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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다이디타운

2008.07.25 23:2507.25





starrisener@gmail.com[다이디타운]을 말하기 전에 먼저 레이먼드 챈들러가 누군지부터 알고 시작하자. 레이먼드 챈들러는 아는 사람들은 다 알겠지만, 미국의 하드 보일드 추리 작가이다. 그의 소설 [기나긴 이별](레이먼드 챈들러, 박현주 옮김, 북하우스, 2005년 5월), [빅 슬립](레이먼드 챈들러, 박현주 옮김, 북하우스, 2004년 1월)은 영화화되어 누아르 영화의 걸작으로 남아 있다. 로만 폴린스키의 [차이나타운](Chinatown, 1974)도 레이먼드 챈들러의 영향권에 있다고 알려져 있으며, 무라카미 하루키 역시 챈들러의 문체로부터 많은 영향을 받았다고 한다. 하루키는 한 인터뷰에서 심지어 챈들러는 자신의 영웅이었다고 밝혔다. 다음의 인용문을 보라.

   “레이먼드 챈들러는 1960년대 내 영웅이었습니다. [기나긴 이별] 같은 책은 열두 번이나 읽었습니다. 나는 그의 소설의 인물들이 혼자 힘으로 살아가고 있고 매우 독립적임에 영향을 받았습니다. 그들은 외롭긴 하지만 고상한 삶을 찾습니다.”
―――[기나긴 이별] 해설 中 (p.639)

   우리가 흔히 아는 사립 탐정―――레인코트를 입고 깃을 세웠으며 중절모를 눌러 쓰고 우수에 찬 눈빛으로 담배를 물고 있는 모습은 레이먼드 챈들러가 창조한 탐정 ‘필립 말로’로부터 나왔다고 알려져 있다. 왜 있지 않은가. 할 일이 없어서 빈둥대고 있는 독신 탐정이 사무실에 앉아 있다. 벨이 울리고 문이 열린다. 의뢰인이다. 금발의 미녀. 그녀는 어딘지 신비스러운 면이 있는 것 같다. 그녀가 사립 탐정에게 사건을 의뢰한 순간부터 그는 엄청난 음모 속으로 빠져든다. 어디서 많이 들어본 얘기 아닌가. TV 시리즈 [레밍턴 스틸]에서 피어스 브로스넌이 보여준 깐죽대는 탐정상. 여자한테 치근덕대면서 끊임없이 독백을 하고 갱이나 경찰한테 얻어터지기 일쑤인 사립 탐정. 우리에게 이제 너무도 익숙해져 버린 바로 그 모습을 맨 처음 창조해낸 사람이 바로 레이먼드 챈들러다.

   하드 SF [쿼런틴]에 나오는 사립탐정 닉도 ‘필립 말로’를 모델로 하고 있으며, [다이디타운]의 탐정 ‘드레이어’도 그렇다(드레이어의 풀네임은 ‘시그문드 챈도 멀랜드리 드레이어’인데 김상훈씨는 역자 후기에서 ‘챈도’와 ‘챈들러’ 간의 유사점을 지적하고 있다. 또한 우리에게 익숙한 바로 그 음료―――‘김릿’을 마시는 대신 흡입하기도 한다). 사실상 우리가 알고 있는 영화나 만화 속의 폼 잡는 탐정, 형사 캐릭터는 전부 필립 말로의 변형이라고 보면 된다. 그들이 필립 말로나 레이먼드 챈들러를 알고 있든 모르든 간에 말이다.

   레이먼드 챈들러의 소설은 실종자를 찾는 의뢰를 받는 것으로 시작하곤 한다. [다이디타운]도 마찬가지다. 어느 날 찾아온 의뢰인은 금발의 미녀이고, 그녀는 자신의 애인을 찾아달라고 한다. 챈들러의 [리틀 시스터]에서 오빠를 찾으러 온 누이를 연상하게 한다. 그런데 ‘드레이어’를 찾아온 금발의 미녀, ’진 할로-C’는 클론이다. 처음부터 [다이디타운]은 챈들러를 향한 오마주와 SF를 적절하게 섞어버린다. 다이디 타운의 사회에서 클론은 천대받는 불가촉천민이다. 클론은 소유물로 간주되며 단지 성적 노리개로 사용된다.  

   추리 소설에서 주요하게 다루어지는 모티프 중에 seek & find라는 것이 있다. 탐정은 해결책을 찾아서 떠돌지만 결국 그가 찾아낸 해결책―――성배는 이미 그가 찾던 것이 아니다. 이건 자아 실현의 비유로 보면 이해하기 쉽다. 이를테면 이런 것이다. 우리가 어렸을 때는 커서 되고 싶은 대상을 가지고 있다. 대통령이나 경찰, 과학자, 미스코리아 말이다. 하지만 정작 우리가 컸을 때 경찰이나 과학자 혹은 미스코리아가 되고 나면 그것이 어렸을 때 꿈꾸었던 것과는 완전히 다른 것임을 깨닫고 만다. 즉 탐색의 과정에서 그가 탐색한 대상은 변질되고 만다. 세상의 모든 일이 다 그렇다. 무언가를 얻고 나면 곧 그것이 싫어지기 마련이다.

   ‘드레이어’는 의뢰대로 실종자를 찾아 돌아다니지만 그는 ‘진 할로-C’가 말한 것처럼 좋은 녀석이 아니다. 그럼에도 진 할로-C는 자신의 믿음을 거두지 않고 이야기는 약간 신파로 흘러간다. 신파. [다이디타운]을 설명하기에 적절한 단어다. [다이디타운]은 세 개의 주요 에피소드로 구성되어 있다. 그 중 진 할로-C와 드레이어가 만나는 거짓말 에피소드는 신파의 시작이다. 이 에피소드는 완벽하게 챈들러 소설의 오마주이기도 하다. SF적인 요소는? 솔직히 말해서 다이디 타운은 그저 SF의 껍질만을 둘러쓰고 있을 뿐이다. 작가가 그리고 있는 세계는 과연 ‘필립 말로’가 미래 세계에서 활동했다면 어땠을까에 중점을 둔 세계이지만, SF 본연의 재미라고 할 수 있는 괴상하고 신기한 미래 세계를 그리는 일에는 약간 소홀하다고 생각한다.

   작품에서 중요하게 다루고 있는 SF적인 소재는 앞에서 말한 ‘클론’과 ‘업둥이’다. 미래 세계는 출산 제한 정책을 갖고 있어서 현재 중국처럼 한 가족 한 자녀 갖기 운동을 펼치고 있다. 만약 잉여 자녀를 출산할 경우 그 아이는 소급 낙태―――살해된다. 때문에 부모들은 아이를 살리기 위해서 지하 세계로 보내고 이들은 자신들만의 공동체를 형성해서 살아간다. 이들이 바로 ‘업둥이’다. ‘업둥이’는 구걸을 하며 목숨을 연명한다. 메갈로폴리스의 시민들은 자신의 아이가 ‘업둥이’ 중에 있다는 죄책감을 항상 안고 있다.

   2등 인간으로 치부되는 ‘클론’, 공식적으론 사회에 존재하지 않는 ‘업둥이’. 현재 세계의 흑인이나 극빈자층을 비유하고 있음을 쉽게 알 수 있다(김상훈씨는 ‘업둥이’도 오마쥬라고 하는데, 코드웨이너 스미스는 딱히 번역된 것이 없어서 모르겠다). 일종의 사회학적인 SF를 폴 윌슨은 시도하고 있다. 그렇다고 폴 윌슨이 딱딱하고 진지한 자세로 이야기를 펼쳐가고 있는 건 아니다. [다이디타운]은 앞에서 말한 것처럼 신파다. 가볍게 읽을 수 있는 작품이고 내용도 쉽게 예측이 가능하다. 꼬인 이야기도 없고 인물은 평면적이고 추리라고는 하지만 트릭이랄 것도 없다.  

   내가 보기에는 일부러 폴 윌슨이 소설을 쉽게 쓴 것 같다. 문장도 단순하고 묘사도 적어서 술술 읽힌다. 읽다 보면 “어라? 그건 그거고 저건 저거잖아? 그걸 왜 그렇게 어렵게 추리하고 난리야? 바보 아냐?” 란 생각이 들 정도로 작품 내의 복선이라든가 인과 관계가 저절로 눈에 띈다. [모든 것이 F가 된다]나 [잘린머리 사이클] 같은 일본의 신본격추리에서 맛볼 수 있는 골 때리는 미궁은 존재하지 않는다. 애초에 챈들러의 추리 소설도 복잡한 트릭과는 거리가 먼 것이었다. 챈들러는 인간 그 자체에 더 집중했다.

   하지만 챈들러의 ‘필립 말로’가 갑옷 대신 레인 코트를 입고 검 대신 권총을 든 기사라면, 폴 윌슨의 ‘드레이어’는 그냥 뒷골목 깡패다. 드레이어는 알콜 중독자에다가 클론에 대해 엄청난 편견을 가진 인물이다. 드레이어가 필립 말로와 공통점이 있다면 ‘동정심’ 뿐이다. 둘은 인간에 대한 동정심을 근거로 행동한다. 이들은 마지막까지 우리가 포기할 수 없는 인간성―――휴머니즘의 상징이다. 공자식으로 말하면 ‘인仁’이고 맹자식으로 말하면 ’측은지심’이다. 그러나 드레이어는 여자에게 너무 휘둘리는데다가 도망간 마누라가 데려간 자식 걱정에 밤을 지새우는 인간이라서, 필립 말로가 보여주는 냉정하면서도 따스한 매력은 덜하다.

   어차피 오마주는 오마주일 뿐이다. 폴 윌슨은 챈들러가 될 수 없다. 그건 작가 자신이 더 잘 아는 사실일 것이다. [다이디타운]은 크게 어려운 용어가 나오지도 않고 복잡한 상황 설정이나 세계관이 등장하지도 않는다. SF라고는 하지만 겉만 SF로 포장한 형사물로 읽어도 무방하다. 이제는 좀 지겨워지기 시작하는 김상훈씨의 번역이긴 하지만, 역시 김상훈씨가 번역한 책은 매끄럽게 읽을 수 있다. [판타스틱]을 통해 연재를 지켜 본 독자라면 한번쯤 읽어볼 만한 책이다. 후회하지 않을 것이다.
댓글 2
  • No Profile
    as 08.08.04 12:29 댓글 수정 삭제
    글을 참 희한하게 쓰시는군요. 그냥 레이몬드 챈들러 풍을 기대하지는 말자고 하면 될 것을 열심히 비교하면서 불평하시더니 마지막은 '후회하지 않을 것이다'라니요. 게다가 '역시 김상훈씨가 번역한 책은 매끄럽게 읽을 수 있다'고 하실 거라면 앞에 지겹다는 얘긴 왜 붙인 것인지? 사족이 너무 많고 일관성이 떨어집니다. 하고자 하는 말을 명료하게 쓰셨으면 좋겠네요.
  • No Profile
    08.08.04 13:25 댓글 수정 삭제
    아, 그렇습니까. 주의하도록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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