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밀번호를 잊어버리셨나요?

섬, 달빛

목이긴기린그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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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쳐드는 달빛에 먼지가 반짝였을 뿐이었겠지만, 그때의 나에겐 그런 사실은 그다지 중요하게 여겨지지 않았다. 피아노 건반을 하나하나 꾹꾹 눌러가는 가을의 손끝에는 빛이 깃들어 있는 듯 보였고, 그 광경이 아름다웠기에 그걸로 충분했던 것이다.

눈을 가늘게 뜬 채로 뚫어질 듯 악보를 노려보며 연주를 이어가는 모습은, 서툰 기색이 있었지만 동시에 그림처럼 아름답기도 했다. 연주는 조금 느린 템포로, 하지만 끊어지는 일 없이 이어졌다. 눈을 감고 듣기도 하고, 가을의 표정을 관찰하기도 하며 듣는 사이 연주는 끝이 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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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 남해에 위치한 그 섬을 찾아간 것은, 섬을 찾은 당일로부터 한 달 쯤 전에 받은 문자 한 통 때문이었다.

‘다친 데는 괜찮니? 얼마 전에 네 콘서트에 갔었단다.’

라는 문장으로 시작하는 문장은, 이모가 보낸 것이었다.

이모가 보낸 장문의 문자는, 여러 부연 설명을 빼놓고 요점만 보자면, 대학교를 다니는 한 여자애의 피아노 레슨을 부탁하는 내용이었다. 이모의 조카라고 하니 나의 먼 친척인 셈이다.

이런저런 부연설명을 듣다보니, 언젠가 열렸던 친척모임에서 내 방에 있는 피아노 옆을 기웃거리던 여자애 한 명이 떠올랐다.

그 여자애는 지금은 남해의 섬에 살고 있어서, 이 섬으로 오려면 어디로 가서 어떤 배를 타야하는지 설명하는 파일도 첨부되어 있었다.

문자를 받은 후부터 한 달쯤, 어떡할까 갈팡질팡하다가 일단 움직이면서 생각하기로 결심했다. 그렇게 움직이기 시작했는데, 섬으로 향하는 배에 몸을 실었을 때까지도 명확한 결단을 내린 상태가 아니었다.

석양의 열기를 담은 바닷바람이 불어온다. 해가 가라앉아 가는 시간이었다. 낮 시간대에는 학교에 다니기 때문에, 레슨을 하게 된다면 저녁이나 밤에 하게 될 것이다.

섬에서 내려, 휴대폰으로 약도를 확인하며 걸음을 옮겼다.

이윽고 나는, 집 평수보다 넓은 정원도 있는 목조주택에 발을 들여놓게 되었다. 어쩐지 가을이라는 여자애가 돈 많은 부모 밑에서 버릇없이 자란 그런 애면 어떡해야 하지, 하는 걱정이 들기 시작했다.

나를 맞아 준 건 두 사람이었다. 이모도 반가웠지만, 우선 이 만남의 주역이자 첫 대면인 여학생에게 시선을 집중했다.

첫 인상은 ‘선명하다’였다. 입고 있는 하얀 프릴블라우스의 음영과 갸름한 턱선이 창으로 들어오는 자연적인 렘브란트 조명에 의해 유독 도드라져 보여 그런 인상을 받은 것 같다. 뒤로 넘겨 묶은 갈색 머리카락은 날개 뼈까지 내려오고 있었고, 귀하게 자랐다는 게 드러나는 단정한 용모는 곱슬거리는 앞머리를 이마가 보이게 오른쪽으로 넘기고 있어서 더 잘 드러나 보였다. 아무런 설명이 없었지만, 이 학생이 내가 가르쳐야 할 사람이라는 건 알 수 있었다. 얼핏 보기만 해도 열의가 느껴졌다. 어느 정도 피아노를 쳤었다는데, 분위기만 보면 피아노의 세계에 갓 발을 들여놓은 사람 같았다.

나를 쳐다보며, 긴장한 듯 뻣뻣하게 굳어 있는 그녀가 간신히 입을 열어, 나를 테이블로 안내했다. 곧 커피를 내오겠다기에, 오는 길에 많이 마셨으니 차가 있다면 차를 달라고 부탁했다.

얼마간 얘기를 나누다가 할 말이 떨어지는 것 같아 가을의 연주를 듣기 시작했는데, 한 곡을 듣다가 연주가 끝나기도 전에 그녀를 가르쳐 보기로 마음먹었다. 내가 끌린 것은 그녀의 연주 스타일이었다. 원곡과는 안 어울릴 수도 있는 해석이, 정석과는 조금 다르지만 자기가 추구하는 느낌으로 표현하는 것이, 그리고 연주를 하는 자세와 표정의 섬세함 부드러움이, 과연 내가 가르쳐주게 되면 어떻게 될지 호기심을 불러일으켰던 것이다.

가을은 연달아 몇 곡을 이어가다 연주를 마치고는, 나를 돌아보며 조심스레 물었다.

“어떤가요? 별로인가요……?”

나는 솔직히 말하기로 했다.

“응, 못 치네.”

가을의 손이 움찔 떨렸다. 그러나 그녀의 연주가 서툴다는 건 나도 그녀도 알고 있었다.

“네, 맞아요.”

“실망하지 마. 재능은 있어. 그래서 너도 나한테 가르쳐달라고 부탁한 거잖아?”

나는 잠시 머릿속으로 내 일정을 되짚어보고 말을 꺼냈다.

“일단은 주 2회씩 내가 오는 걸로 할까?”

내 말에 가을은 잠시 입을 다물었다. 말을 어떻게 꺼내야하는지 잠시 망설이는 눈치더니, 피아노를 한 번 보고는 이윽고 입을 열었다.

“실은 그와 관련해서, 조금 부탁드릴 게 있어요.”

가을은 내가 생각지도 못한 말을 꺼냈다.

“사실 제가 부탁드릴 건 평범한 레슨이 아니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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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주 후, 두 번째로 가을을 만났을 때는 집안에 가을과 나 단 둘만 있었다.

“약속했던 시간보다 좀 오래 걸렸네.”

“죄송해요. 생각지도 못했던 오류 때문에 코드를 좀 수정하느라.”

가을은 몇 마디 인사말 후에 곧장 피아노를 봐주셨으면 한다고 말했다. 잠시라도 지체할 수 없다는 듯 빠르게 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저번에 봐서 알고 있듯 1층에 있는 문이 닫힌 정체를 알 수 없는 여러 방들 중 한곳에 피아노가 있다.

그녀는 피아노 앞에 앉아 건반덮개를 열더니, 피아노 위에 올려두었던 네모난 상자를 들어올렸다.

레슨 박스다.

가을은 레슨 박스를 머리에 꼈다.

옆에서 보기엔 상자를 눈앞에 붙여둔 것 같은 모습이었다. 가을은 뭔가를 조작하고는 피아노를 치기 시작했다.

건반을 확인하는 듯 고개를 좌우로 돌리며, 서툴게 연주를 이어갔다.

얘기를 들었을 때도 신기하게 느꼈지만, 실제로 보니 감회가 새로웠다.


한 달 전 이곳에서, 가을은 내게 이런 부탁을 해왔다.

“사실 제가 부탁드릴 건 평범한 레슨이 아니에요.”

내가 의아해하고 있는 사이, 그녀는 직접 보는 게 빠르다면서 잠시 자리를 비웠다. 나는 그녀가 내준 아이스커피를 마시면서 기다렸다.

커피 타는 게 익숙하지 않은지 밍밍한 맛이었다.

이윽고 그녀는 상자 하나를 들고 돌아왔다.

“사실 제가 미디어학과인데……졸업 작품으로 만들기로 한 프로그램이 있어요. 피아노를 쉽게 배울 수 있게 해주는 프로그램이에요.”

“어떤 방법으로?”

“리듬 게임에서 차용한 방법이에요.”

그녀는 그렇게 말하며 내 머리에 상자를 씌워주었다.

분명 앞이 막혀있었는데, 막상 써보니 앞이 보였다.

“AR(Augmented Reality)고글을 한 번도 안 써보셨어요? 전면에 비치된 카메라가 앞을 비춰주는 거예요. 아직 조금 더 보정해야 돼요.”

나는 고개를 좌우로 돌려보았다. 시야에 딜레이가 생기기 시작했다.

뭔지는 알겠지만 이게 왜 피아노를 배우는 것과 관련이 있는지는 아직도 감조차 잡히지 않았다.

좀 더 설명을 들어야 하겠다는 생각에 유진을 바라보자, 마침 그녀는 스마트폰을 들여다보며 버튼을 터치하고 있었다.

“슈베르트의 들장미로 해볼게요.”

그러더니 문득 가을은 멈칫하더니, 나의 왼손을 바라보며 말했다.

“손은 괜찮으시겠어요? 불편하시면 멀쩡한 손으로만 치셔도 돼요.”

“괜찮아. 요즘 교정기가 잘 나오더라고.”

나는 얼마 전에 뼈가 부러져 교정기를 낀 왼손을 들어보였다. 마치 사이보그의 팔처럼 기괴한 모양이긴 했지만, 이걸 끼면 손가락은 자유자재로 움직일 수 있었다.

가을은 고개를 끄덕이고 말을 이었다.

“피아노 건반을 봐주세요. 몸을 조금만 뒤로 젖히시고, 카메라에 건반 전체가 다 들어오게 해주세요.”

가을은 스마트폰을 들여다보면서 그렇게 말했다. 보고 있는 시야가 공유가 된다는 걸 어렴풋이 깨달았다.

뭐가 됐건 결국 피아노를 치는 일이다. 나는 자세를 바로잡고 손목에 힘을 뺐다.

“시작하면 막대 모양의 노트가 내려올 거예요.”

기다리고 있자 위쪽 시야 밖에서 부터 노트가 내려오기 시작했다.

뭔가 가만히 내려다보고 있자니, 노트들이 건반에 도착한 후에 사라지기 시작했다.

고정된 이펙트가 아닌 듯 고개를 움직일 때마다 내 움직임에 따라 노트도 움직였다.

“그거 노트가 건반에 닿는 타이밍에 맞춰서 치시면 돼요.”

“나도 보면 알아.”

나는 건반에 손을 얹고 노트에 맞춰 손가락을 움직였다. 어떤 노트는 길고 어떤 노트는 짧았다. 음을 얼마만큼 길게 끌어야 하는지를 보여주는 표시였다.

노트에 따라 건반을 누르다보니 이윽고 피아노에서 한 음 한 음이 익숙한 멜로디가 되어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방금 말한 대로, 슈베르트의 들장미였다.

일반적인 리듬게임보다 노트가 내려오는 칸이 많고, 그 속도도 만만치 않다. 게다가 열 손가락을 다 써야 하는 터라 어느 손가락으로 어떤 건반을 눌러야하는 지 모른다면 손가락이 꼬일 것이다.

피아노를 치는 데에 익숙하지 않은 사람이라면 많이 헤맬 것 같았다.

한 곡을 끝내자 스코어가 나왔다. 89점. 초반에 흘려보냈던 걸 제외하면 거의 다 맞게 쳤다.

나는 상자를 벗고 가을을 돌아봤다.

가을은 눈을 반짝이며, 어떻냐는 듯 의기양양한 얼굴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나는 뭘 기대하는지 알 수가 없어 적당히 감상을 말했다.

“게임이야? 잘 만들었네.”

가을은 표정을 바꾸며 화를 냈다.

“아니거든요. 게임이 아니라 레슨 박스에요.”

그러고는 설명을 시작했다. 경청하는 한편, 처음부터 해주길 바랐던 행동이었는데 멀게 돌아왔다는 생각을 했다.

“이름만 들어도 알 수 있죠? 피아노 레슨을 해주는 앱이에요. 레슨 상자라고 불러도 돼요.”

가을은 내가 건네 준 상자를 들어 보이며 그렇게 말했다.

그녀는 상자를 내려놓고, 아까 전에 만지던 스마트폰 화면을 내게 보여주었다.

화면에는 리모컨처럼 이런저런 버튼들이 떠올라 있었다. 인터페이스는 2천 년대 초반 웹디자인처럼 몹시 투박했다.

그래도 보는 데에는 문제가 없었다.

그녀는 화면을 넘기고 버튼을 누르면서 휙휙 기능을 설명했다.

“여기서 어떤 음악을 연주할지를 고르는 거고, 속도도 조절할 수 있어요. 오른손 왼손 구별해서 한쪽 노트만 내려오게 설정할 수도 있고요…….”

다 이해할 필요는 없어서 나는 설명을 할 때마다 고개를 끄덕이며 적당히 걸러 들었다.

가을도 설명이 과했다 싶었는지, 아니면 설명 할 게 없는지 말을 멈추고는 곧장 결론을 말했다.

“어떤 것 같아요? 피아노 배우는 데에 도움이 될까요?”

나는 잠시 고민하다가, 꾸밈없이 내 생각을 말했다.

“피아노를 처음 배우는 단계에서는 꽤 도움이 될 것 같아. 그런데 어느 정도 단계에 들어가면 건반의 반동이나 무게, 터치의 강도에 따라 소리가 어떻게 다르게 나는지와 같은 디테일이 무척 신경이 쓰이는지라, 제대로 구현하려면 꽤 힘이 들지 않을까?”

“그건…….”

가을은 뭐라 말하려다가 입을 다물었다.

“뭐, 나는 이런 거에 대해서 잘 모르니까 단언은 할 수 없어. 근데 뭘 부탁하려는 거야?”

가을이 대답했다.

“제가 부탁드리는 건 레슨 박스가 얼마나 효과가 있는지 봐주시는 거예요. 아시겠지만 저는 피아노를 잘 못 쳐요. 어릴 적에 체르니까지 떼고 그만뒀거든요. 그런 제가, 레슨 박스를 써서 앞으로 실력이 얼마나 느는 지, 레슨 박스를 통해 피아노를 배우는 게 얼마만큼 효율이 나오는지 평가해주세요. 잘 되면 졸업 작품으로도 내고 팔아보기도 할 거예요.”

그렇게 말한 후 가을은, 아직 완성을 덜 했기 때문에 만약 승낙하신다면 조금만 더 기다려달라고 말했다.


연주가 끝났다. 가을은 레슨 박스를 벗고 나를 돌아보았다.

“선생님, 그런데 동영상으로 보면 되지, 왜 굳이 찾아오신 거예요?”

“실제로 눈으로 봐야 늘었는지 아닌지 판단하기 쉬우니까. 앞으로도 종종 찾아오도록 할게.”

“뭐 저야 나쁘진 않죠……그동안은 바빴으니까, 오늘부터 시작인 거예요. 하루 두 시간씩 레슨 박스로 연습할게요. 계약은 1년이에요.”

그렇게 나와 그녀의 기묘한 계약관계가 시작되었다.

/4

“거긴 그렇게 치는 게 아니야, 박자가 밀린다고. 좀 더 손목에 힘을 빼서 쳐봐. 탈골이라도 된 것처럼!”

“아이, 진짜. 자꾸 짜증나게 할래요? 레슨 받고 싶은 거 아니니까 좀 조용해주시지 않으시겠어요?”

내 지적에 가을이 툴툴 거렸다.

레슨을 시작한지도 한 달이 흘렀다. 그동안 가을과 꽤 친해져서, 레슨 시간 외에도 나는 가을의 집에서 한동안 놀다갔다.

평가하는 것 외에 쉬는 시간이 되면 나는 내가 읽은 책이나 재밌게 본 영화 얘기를 했다. 그리고 섬에 박혀있지 말고 여행을 다니면서 감수성을 북돋고 식견을 넓힐 것을 권장했다. 예술 전반은 서로 다른 예술에 좋은 영향을 줄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레슨은 필요 없다니까요. 자꾸 그렇게 가르쳐주시려 하면 레슨 박스가 얼마나 효과가 있는지 판단할 수가 없잖아요.”

“레슨해주는 게 아니야. 네가 중간에 포기하지 않게 도와주는 거지. 가끔 숨을 돌리지 않으면 질리게 되거든.”

훌륭한 연주를 하는 데에는 감정적 영감이 필요하다.

밤중이었지만 날이 좋았고, 그런 날에는 밖에 있지 않으면 손해다. 그렇게 말하며 가을을 데리고 산책을 나섰다.

“별로, 선생님 혼자 나가세요. 섬 풍경은 저한테 새로울 것 없는 것이니까요.”

“익숙한 것을 새롭게 볼 줄 모르면 피아노는 가망이 없지.”

가을은 마지못해 따라 나왔다.

봄이었고, 달빛에 반사된 푸른 잎사귀 사이로 물결치는 빛살 속으로 걸음을 내딛는 사이, 어느 순간부터 먼 곳에서 군청 빛깔이 어른거려 우리 둘은 그 시린 빛을 향해 발길을 돌렸다.

군청빛의 실체는 바다였다. 해변으로 내려가 바다를 거닐다가 섬으로 올라갔다. 신발에 들어간 모래를 털어내고 다시 걸음을 옮겼다. 밤공기 속에서 마을 외곽을 거닐었다. 우리는 발목을 간지르는 잡초들의 이름을 궁금해 하며, 웃었다.

가을은 처음에 투정을 부리던 것과는 다르게 지금은 순전히 이 순간을 즐기고 있는 듯 보였다. 나는 그녀에게 다 잘 될 거라고 말했다. 레슨 박스도 좋은 물건이고, 피아노도 잘 치게 될 거고……. 가을은 무심코 빨라진 내 걸음을 쫒느라 그런지, 홍조가 올라온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가을과 헤어져, 발길을 돌려 마지막 배를 탔다. 집에 도착할 때면 꽤 늦은 시간이 될 것이다.


사흘 뒤인 목요일에 다시 가을을 찾았다. 문을 두드리자 금방 문을 열어준 가을을 보며, 뭘 하고 있었느냐고 묻자 거실 창가에서 책을 읽고 있었다고 했다. 그쪽으로 시선을 옮기자 나무 의자가 보였고, 그 옆 테이블 위에는 방금 전까지 읽고 있었던 것으로 보이는 책 한 권이 놓여 있었다. 'The Secret Garden.' 비밀의 정원? 무슨 책이었던가 생각하는데, “버넷의 비밀의 화원이에요” 라고 가을이 말했다. 영문학 전공자였던 어머니로부터 어릴 때부터 영어를 배웠다고 한다.

“예전부터 읽고 싶었던 책이었는데 선생님이 책을 읽으라고 권해주셔서 읽을 수 있게 되었어요.”

감정의 움직임 이라는 의미에서의 '감동'은 작곡이 도움이 된다. 연주에서도 마찬가지고. 책은 감동을 불러일으키는 훌륭한 촉매가 될 수 있으니 가까이 하는 게 좋다. 감동은 영감이 되고, 영감이 함께하면 자신의 한계와 틀을 넘어설 수 있다. 그래서 재능이 대단찮거나 성격이 추악하다 싶은 사람도 아름다운 곡을 작곡하기도 하는 것이다. 나 같은 사람도 가끔 내 자신의 연주에 감격해서 울면서 연주한다.

“좋지, 재밌으면 나도 읽고 싶네.”

예전에 겪었던 그 감동들이 되살아나 내 목소리에 물기가 묻어나오는 걸 느낄 수 있었다. 더 할 말이 있었지만 나는 감정의 동요를 숨기기 위해 말을 멈추었다. 마지막으로 하고 싶었던 말은 마음속에서 떠돌았다. 그래, 음악만 있으면 되겠구나, 그런 생각.

그러나 그 말은 하지 않았어도 되었다고 생각한다. 착각일지도 모르지만, 가을도 내말에 동조되어 덩달아 감정이 북받친 것처럼 보였던 것이다.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에요. 이 감정 그대로 피아노를 연습해야겠어요! 열심히 연습해서 레슨 박스의 효과를 널리 알릴 거예요!”

그런 뜨겁고 좋은 분위기가 형성되었다. 나는 이 상황에 만족했다. 훗날 생각해보면 이때가 가장 감격스러운 순간이었다. 이때는 좋았지. 이때까지는.

“너 연습하면 안 되는 거 아니었어? 하루 두 시간을 지켜야 실험에 그 종속변수인가 뭔가가 지켜진다며.”

“괜찮아요. 선생님이랑 같이 연습하고 싶어서, 선생님이 오기 전에 한 시간만 연습했거든요.”

유진의 말에 나는 흐뭇함을 느꼈다.

급격한 낙차는 이 감동에 젖은 순간의 바로 다음 순간에 찾아왔다.

가을은 피아노 앞에 앉으며 레슨 박스를 머리에 썼다.

그리고 그녀가 건반 위에 손을 올리기 전, 나를 돌아보며 이 말을 꺼냈다.

“선생님, 레슨 박스만 있다면 호로비츠를 뛰어넘는 것도 금방이겠죠?”

“……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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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로비츠가 누구인가에 대한 설명이 필요할 것이다.

나에게는 정말로 그게 필요했다. 가을이 하는 말을 믿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피아노 얘기를 하면서 ‘호로비츠’라는 이름이 나왔다면 그건 백이면 백, ‘블라디미르 호로비츠(1904.10.1.~1989.11.5)를 얘기하는 것일 수밖에 없다.

“……호로비츠를 뛰어넘겠다고?”

“아, 너무 옛날 사람인가요? 그럼 좀 더 최근 사람으로 할까요?”

나는 웃었다. 괜찮은 조크였다고 말하며 한바탕 웃고 난 후 가을을 바라보았다.

레슨 박스 아래로 드러난 가을의 입가가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자기 말에 내가 웃어서 화난 것으로 보였다. 그러나 나는 달래줄 마음이 없었다. 이미 가을이 입에 담은 거장의 이름에 머리가 어질어질해지는 기분을 느꼈기 때문이다. 이걸로 비긴 셈이다.

대신 싸움을 끝내기 위해 먼저 손을 내밀었다.

“진심으로 하는 소리는 아니지?”

가을은 내 악수를 거부하며 고개를 저었다.

“진심이에요.”

가을이 진심이란 걸 알 수 있었다. 그러나 나는 가을의 말을 개소리라고 단언할 수 있었다. 그만큼 호로비츠라는 이름이 주는 무게는 무거웠다. 레슨 박스가 아무리 대단한 것이라 해도 그랬다. 기독교 목사가 자기는 이 새로운 개정판 성경을 암송하는 걸로 예수를 뛰어넘는 신성을 얻겠다고 말하는 꼴이었다.

그래서 나는 가을을 말리고 싶었다.

“우선 하디(1983~)나 리베르티(2001~)를 목표로 삼는 건 어때? 아니, 이것도 거의 불가능에 가깝겠구나. 그냥 우선 너 자신을 뛰어넘는 걸로 가자……아니지, 내가 지금 무슨 말을 하는 거지?”

머리가 어질어질해졌다. 가을은 갑작스레 너무 높다란 벽을 제시해서, 조언자인 나의 머리까지 돌게 만들었다. 친구는 멀리 하고 적은 가까이에 두겠다는 심보일까? 그렇다면 나는 유진의 적이 될 수밖에 없다.

짜증이 치밀어 방안을 걸어 다녔다. 왜 호로비츠고, 호로비츠인 것도 모자라 하루 두 시간씩 연습하는 레슨 박스로 넘어서겠다는 말이 나온 걸까.

가을은 하룻강아지 범 무서운 줄 모른다는 말처럼 의기양양하게 레슨박스를 조작했다. 실제 피아노 건반과 싱크를 맞추기 위한, 특유의 허리를 곧게 펴는 동작을 취하고는, 연주를 시작했다.

연주는 늘 그렇듯 아름다웠다.

가을이 레슨박스를 벗으며 물었다.

“어땠어요?”

“아름답더라.”

나는 순수하게 내 감상을 말했다. 그러나 가을은 불만스러운 표정이었다. 자신의 부족함을 느끼는 사람은 호평보다 혹평을 좋아한다는 건 안타까운 일이다.

“순수하게 감사하면 안 돼?”

“부족한 점이나 말해줘요. 레슨박스로 피드백이 안 되는 부분이 있던가요?”

“없어.”

내 말은 진심이었다. 레슨 박스는 좋은 프로그램이다. 이제 어느 손가락으로 쳐야하는지에 따라 노트 색깔도 다르게 표시되고, 강약 조절도 생겼다. 기술적으로는 모든 부분에서 피드백이 가능했다.

“호로비츠는 잘 모르겠지만 스티븐 잡스나 뭐 그런 사람들처럼은 될 수도 있겠는데?”

“어머, 선생님. 이건 기술이 아니라 예술이에요.”


몇 달의 시간이 흘렀다.

이미 계약한 기간은 끝났고, 레슨 박스는 효율적이라는 결론이 내려졌다. 물론 실험자가 가을 밖에 없는 실험이었지만, 가을은 딱히 실험을 더 해볼 생각은 없어 보였다. 레슨 박스에 대해 지나칠 정도의 자신감을 갖고 있어서기도 하고, 졸업 작품으로 내기 전까지 괜히 아이디어가 유출되는 것을 원치 않아서기도 했다. 그 졸업 작품전도 이제 1주일이 채 안 남았다.

사무적인 관계는 끝났지만 나는 예전처럼 가을의 집을 찾곤 했다.

가을도 피아노 연습을 멈추지 않았다.

시계가 저녁 여덟 시를 가리킬 때, 가을이 잠시 기다리라더니 방을 나갔다. 물이라도 마시고 오나 했는데, 얼마간 돌아오지 않아 나는 가을이 앉았던 의자에 앉아 가을이 연주하던 악보를 정리했다.

왜 악보가 있냐면 이 곡은 가을이 고등학생 시절 친구의 결혼식 때 연주하기 위해 꼽은 곡이기 때문이다. 그런 자리에서 레슨박스를 쓰고 피아노를 연주하는 건 아무래도 너무 튀는 짓이라 부득이하게 몇 주 전부터 악보를 보고 치는 것도 같이 연습하게 되었다.

새삼 느낀 것이지만, 레슨 박스는 연습용이다. 실전에서도 레슨 박스를 쓰는 건 반칙이었다. 레슨 박스의 효율성을 검증하려면 레슨 박스를 안 쓰고도 얼마나 잘 칠 수 있는지를 봐야 한다. 학교시험으로 치자면, 레슨 박스를 쓰고 피아노를 치는 건 오픈북 시험이다.

나는 악보를 보며 음표들을 하나하나 건반으로 옮겼다. 이 곡은 잘 모르는 곡이었다. 연주할만한 곡을 추천해 달래서 같이 고민하다 문득 제목이 떠오른 곡인데, 어떤 곡이었는지는 기억이 안 났지만 결혼식에 어울리지 않을까싶어 꼽았었다. 슈만(Robert Alexander Schumann 1810.06.08~1856.07.29)의 '헌정(Widmung)'이다.

슈만이 자신의 신부인 클라라(Clara Josephine Wieck Schumann 1819.09.13~1896.05.20)에게 결혼식 전날 바친 미르테의 꽃 스물여섯 곡의 가곡 중 첫 번째 곡이다.

정확히 이르자면 내가 치고 있는 것은 리스트(Franz Liszt 1811.10.22~1886.07.31)의 피아노 독주곡 버전이다.

초견으로 치는 거라 사실 국어시간 때 하는 받아쓰기와 다를 바 없었다. 악보를 읽으며, 가을이 앉았던 자리에서 이렇게 연주하고 있자니 어쩐지 지금에서야 헌정의 정서를 알게 된 것도 같다.

Du meine Seele, du mein Herz,

Du meine Wonn', o du mein Schmerz,

Du meine Welt, in der ich lebe,

Mein Himmel du, darein ich schwebe,

O du mein Grab, in das hinab

Ich ewig meinen Kummer gab.

Du bist die Ruh, du bist der Frieden,

Du bist vom Himmel mir beschieden.

Daß du mich liebst, macht mich mir wert,

Dein Blick hat mich vor mir verklärt,

Du hebst mich liebend uber mich,

Mein guter Geist, mein beßres Ich!

당신은 나의 영혼, 당신은 나의 심장

당신은 나의 환희, 오 당신은 나의 고통

당신은 나의 세계,

……

문득 정신을 차려보니 가을이 문가에서 조용히 멈춰 서있다는 걸 알아차렸다. 들고 있는 커다란 접시 위에는 먹기 좋은 크기로 잘려있는 복숭아가 물기를 머금은 뽀얀 빛을 발하고 있었다. 가을은 내가 그녀를 보면서 연주를 멈추자 다시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선생님처럼 연주할 수 있으면 좋겠어요."

"별로 잘 친 게 아니야."

가을은 방 한 가운데에 하나 있던 탁자에 접시를 내려놓았다. 작은 탁자였다. 접시에 얹어놓은 포크의 손잡이가 탁자 밖으로 튀어나왔다.

나는 가을의 말을 돌려서 부정하기는 했지만, 내심으로는 이 연주에 꽤 번뜩이는 부분이 있는 듯해 흡족한 마음도 없잖아 있었다. 나는 칭찬에 인색한 편이라는 소리를 듣는데, 사실 나 자신에게 자주 놀라기 때문에 남겨놓은 감탄이 모자라기 때문이다.

남들 앞에서 이런 자화자찬을 하다가 어울리지 않는다고 누가 핀잔을 준 적이 있다.

가을은 접시를 올려놓은 탁자를 탁자 채로 들고 내 옆에 갖다 놓았다. 드세요, 라고 말하며, 자기도 의자를 끌어와 앉았다.

한동안 말없이 앉아있던 가을이 입을 열었다.

“한 번 더 쳐주시면 안 될까요?”

거절할 이유는 없었기에 나는 악보의 첫 페이지를 펼쳤다. 건반 위에 손을 얹고 숨을 골랐다. 가을은 내 옆에서 허리를 곧게 편 채, 내 연주에 집중하려는 듯, 혹은 내면에 침잠해 있는 듯한 눈길을 허공에 던지고 있었다. 그런 가을을 일별하고 연주를 시작했다.

“…….”

연주가 끝나자 가을은 연신 감탄을 내뱉었다.

“같은 건반 하나를 쳐도 선생님 같은 분이 치면 소리가 다르네요.”

이번 연주가 그렇게 좋았던가 의문이 생길 정도로 가을은 눈을 빛내며 만면에 미소를 띄우고 있었다. 나는 뭐라 할 말을 찾지 못했다. 어떤 말을 해도 이 분위기에 어울리지 않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선생님처럼 저도 피아노를 잘 치고 싶어요. 그리고…….”

더 말을 이어가려던 가을이 문득 말을 멈추고 한숨을 내쉬었다. 그 모습을 보자 가을이 한 말이 다른 느낌으로 다가오기 시작했다. 처음엔 단순히 감탄하는 말이라 느꼈는데, 지금은 정말로 자기도 잘 치고 싶다는 마음이 담겨있던 말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 마음이 방금 전의 한숨에 섞여 있었다. 그래서 나는 채 꺼내지 못한 말보다는 앞의 말이 신경 쓰였다.

“피아노에는 그다지 관심이 없는 줄 알았는데?”

레슨 박스의 연장선으로만 피아노를 치고 있는 줄 알았었다.

가을은 고개를 저었다.

“피아노는 잘 치고 싶어요. 어릴 적에 피아노 학원을 다닌 것도, 피아노를 치고 싶어서 제가 졸라서 다닌 거고요.”

“그럼 왜 그만뒀었는데?”

“계속 붙잡고 있을 만큼 집중력이 따라주지 않더라고요. 그래서 제가 다니고 싶어서 갔던 건데도, 도무지 지겨워서 앉아있기 힘들었어요. 이렇게 피아노를 치기 싫은데 왜 피아노를 배우고 있는 건가 싶을 때도 있었고요.”

가을은 내게서 시선을 돌렸다. 자신의 말을 단초로 삼아 기억을 되짚는 듯, 아무것도 없는 공간을 응시하며 말을 이었다.

가을은 어렸을 적에 피아노 학원에 다니던 얘기를 풀어놨다. 학원을 몰래 땡땡이치거나 친구들과 놀았다거나 하는 얘기들이었다.

그 내용을 정보로 받아들이면서, 한편으론 가을에게도 어렸을 적이란 게 있구나 하고, 어쩐지 감탄하고 말았다. 처음 만났을 때부터 다 자라 있는 상태라. 애처럼 구는 모습이 머릿속에 그려지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다가 뭔가, 제 내면의 뭔가가 변했어요. 스위치가 들어갔다고 해야 하나, 끊겨있던 회로가 연결되면서 불이 들어오기 시작했다고 해야 할까.”

그녀는 뭐라 말을 잇지 못하더니, 의자에서 일어서서 방안을 서성거리기 시작했다. 걸어 다니다보면 없던 표현력이 자신의 몸에 거미줄처럼 걸리기라도 할 것 같을 때가 있다. 뇌를 쥐어짜도 문장으로 구체화가 되지 않는 감정과 표현이 그 동력이었다.

“……아, 모르겠다. 아무튼 저는 계속 피아노를 붙잡고 있는 것도 효율이 안 좋겠다 싶어 부모님께 다시 부탁드렸어요. 학원을 그만두고 싶다고요. 게다가 그만둘까 고민하던 날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오락실에 들렀었거든요. 마침 리듬게임이 늘어서 있는 입구로 들어갔었는데, 거기서 보고 만 거예요. 게임을 하는 사람들은 주위에 누가 돌아다니는지, 누가 서서 구경하고 있는지 따위는 신경 쓰지 않고 있는 광경을요. 그 모습은 피아노 학원의 금방 어수선해지는 풍경과는 달랐죠. 그래서 느꼈어요. 즐거워야 하는 거구나, 라고.”

회상이 끝난 듯 가을의 시선이 다시 현실로 돌아왔다. 그녀는 말을 길게 했다는 듯 숨을 돌리더니, 말을 맺었다.

“뭐, 그렇게 제가 즐겁게 피아노를 칠 수 있는 방법은 뭘까 고민하다가 이렇게 다시 시작하게 된 거죠. 한 가지 아쉬운 건 좀 더 어릴 적부터 시작했었으면 좋았겠다는 것 정도예요.”

“……너는 재능이 있으니 연습하다 보면 몇 년 안에 나보다 실력이 좋아질 거야. 청중의 입장인 나를 놀라게 하는 연주나 작곡을 할 수도 있겠지.”

“그럴까요?”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진심이었다.

각오를 다시 되새긴 것치곤, 그 이후의 연습시간은 지금 공기처럼 미적지근했다. 분명 말을 너무 많이 한 탓일 것이다. 나는 마지막 운항편으로 집으로 돌아왔다. 그러나 생각은 아까 전 그 순간에 멈춘 채 끊이지 않았다. 달을 올려다보며 생각했다. 그때 말을 꺼내던 순간의 반짝임이 머리를 떠나지 않았다.

그녀에게 어떤 말을 해줘야 좋았을까. 욕망인지 열정인지 구분할 수 없는 갈 길 잃은 상념에 무력하게 휩쓸려 버렸던 시절이 나에게도 있었지만, 내가 작곡한 곡이 인기를 끌면서 어느새 그 시절을 벗어나게 된 자신을 자각하고 있었다. 나는 평온하지만, 마음의 평온을 줄 수 있는 조언 같은 것은 모른다. 몰라서 아무 말도 해주지 못했다. 가을은 몇 마디 말로 풀어줄 수 없는 과제를 안고 있기 때문이다.

그 과제를 풀 수 있는 방법은 결과물을 내는 것 밖에 없다.


이튿날, 어제 일 때문에 왠지 이대로 별 도움이 되지 못한 채 가만히 있을 수 없어 다시 바다를 건넜다. 가을은 어제의 기분이 내 착각이었던 양 배 위에서 바라봤던 달빛처럼 은은한 웃음을 입가에 띄우고 있었다. 그 빛을 보자 말해주려고 준비했던 말들이 혀끝에서 떨어져 목 뒤로 넘어갔다.

나름대로 마음을 정리한 모양이다. 다행이긴 하지만 새벽녘까지 내 나름대로 고민했던 일이 허무해져, 가을이 조금만 더 고민해줬으면 좋겠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그녀는 잡담할 시간도 없다는 듯 곧장 나를 피아노실로 데려가더니, 어떤지 평가해달라고 말하며 피아노 앞에 앉았다. 어제 아이디어가 떠올라 레슨 박스를 조금 손 본 다음에 더욱 연습을 했다고 말했다.

막상 연주는, 겨우 하루사이에 눈에 띄게 일취월장할 리는 없는 터라 당연하게도 크게 나아진 점은 없었다. 딱 하루 치 연습량만큼의 실력이 늘었을 뿐이었다.

"악보가 대강 손에 익었나 보네."

"네, 결혼식이 겨우 나흘 뒤니까요."

빨리 잘 칠 수 있게 돼야 할 텐데. 뒷말은 혼잣말이었다.

나흘 뒤라, 사실 나는 가을에게 다른 연습을 시키고 싶었던 터라, 나흘만 참으면 되겠구나 하는 게 솔직한 심정이다. 그런 마음을 속에 갈무리하고 가을의 연주를 봐주는데 집중했다. 일단 기본은 악보에 적힌 데로 정확하게 치는 것이다.

“그냥 대충하면 돼.”

“선생님으로서 할 말은 아니지 않나요?”

“원래 기술적으로만 완성돼도 보통 청중은 다 잘 친다고 생각해줘.”

그래서 조급해할 것 없이 느긋하게 가르쳐갔다.

그리고 예정되었던 결혼식 날짜가 다가왔다.

가을은 식 전날 묵을 곳을 정하랴 그 뒤에 뭐하랴 할 예정이라 며칠 집을 비우게 됐기 때문에, 일주일 정도 섬을 떠나있게 되었다.

나는 그동안 병원에 가보기로 했다. 서울까지 올라가야하기 때문에 그동안 귀찮아서 망설이던 일이지만, 나는 여전히 팔에 낀 보정기가 없으면 젓가락질도 할 수 없는 환자였다.

그렇게 나는, 오랜만에 병원에 전화를 걸었다. 사실 이 과정에서 꽤나 망설였는데, 그건 자조적으로 말해서 내 인간관계가 극도로 좁은 원인 중 하나와 마주해야 했기 때문이다. 내가 먼저 약속을 잡는다는 건 꽤나 의지가 필요한 일이란 걸 새삼 깨닫게 되었다.

“네, 서울 의료 메카닉 전문센터입니다.”

“안녕하세요, 4개월에 한 번씩 점검해야 한다고 해서…….”

“언제 방문하실 예정이신가요?”

“이번 달 27일이요.”

“네, 그때 오시면 돼요.”

통화를 끝냈다. 일단 예약을 잡고 나니 마음은 편해졌다.

그 후 가을이 잘 연주할 수 있을까 생각하며, 가을이 연주하기로 한 곡을 천천히 연주하며 시간을 보냈다. 그러다보니 나는 슈만처럼 후대에 이름을 알리 수 있을까 의문이 떠올랐다. 애초에 슈만에 대해 잘 모르는 입장인데 가을 앞에서 너무 떠들어 댄 게 아닌가, 별의 별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생각의 흐름이 좀처럼 진정되지 않아서, 그냥 끝장을 보자는 심정으로 거리를 걷기로 했다. 이 도시를 다 둘러보기 전에는 이 생각이 멈추겠지 하는 마음에서였다.


일주일 후 섬에 찾아가니, 가을이 없었다. 한참 집 앞에서 기다려도 가을이 오지 않았다.

그날 섬에서 나와 가을에게 전화를 걸었다. 어디 있었느냐고 물으니, 결혼식 때 친구들과 오랜만에 만나서 그 참에 동창회로 이어졌다고 말했다.

이틀 후에 돌아올 예정이라며, 가을은 그 말에 이어서 혹시 섬까지 헛걸음을 하신 게 아닌지 물어왔다. 나는 아직 집이라고 대답했다.

이틀 후에는 먼저 섬에 있는지 확인한 후 섬으로 향했다. 얼굴을 안 본지 10일이나 지나서인지, 게다가 그 10일이 별 일 없이 빈둥대며 지루하게 보낸 시간이라 체감 상 30일은 지난 것 같아서인지 가을의 얼굴은 새로워 보였다.

나는 의례적으로 결혼식이랑 동창회는 재밌었냐고 물었는데. 가을은 얼굴에 화색을 띄우곤 지난 며칠 동안의 일에 대해 즐거운 듯 얘기를 풀어나갔다. 여태까지 왜 잊고 살았지 싶은 특이한 애들이나, 학생일 때는 그다지 대화를 하지 않았지만 이번에 친해지게 되어 서로 앞으로 연락도 하기로 한 선후배들 얘기였다. 별로 관심 없는 이야기라 나는 건성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 보니, 결혼식 뒤풀이 후에 전화를 받았었어요. 저희 과 교수님과 안면이 있는 분이신데, 레슨 박스를 보고 투자를 하고 싶다고 하시더라고요.”

“오오, 그럼 잘 된 거 아니야?”

가을은 의기양양하게 말했다.

“그럼요. 저는 천문학적인 돈을 벌 거예요. 제 이익을 탐내는 사람들에 의해 수많은 소송에 휘말릴 거고요. 바쁜 몸이 될 테니까 하고 싶은 말 있으시면 지금 다 해놓으시는 게 좋을 거예요.”

/6

2030년 3월 7일.

벨이 울렸다. 나는 가스불을 낮춰놓고 문을 열었다. 문 앞에는 가을이 있었다.

“집이 찾기 쉬운 곳에 있네요.”

칭찬인지 아닌지 헷갈리는 말을 하며 가을이 집안으로 들어왔다. 처음 와보는 만큼, 신기한지 이곳저곳에 눈길을 주고 있었다. 마냥 가을의 반응만 관찰하고 있을 수 없어 준비하던 요리에 다시 신경을 쏟기로 했다. 등 뒤에서는 가을이 채널을 돌리는지 TV소리가 맥락 없이 몇 번 바뀌는 게 잠시 귀안에 들려왔다가 금방 의식 밖으로 사라졌다.

가을을 마지막으로 만난 지도 반년이 조금 넘었다.

졸업 작품전에서 컨택이 와, 레슨 박스에 대한 본격적인 사업이 들어간 게 1년 전이었다.

가을은 그 길로 서울에 있는 집으로 올라갔던 터라, 중간에 한 번 만난 것 빼고는 한동안 만나지 못했다.

아니, 만날 여유가 없었다고 해도 될 것이다.

레슨 박스는 어플로 출시된 이후 점차 인기를 끌기 시작했다. 물 들어올 때 노 저으라는 말이 있듯이, 가을은 콘텐츠 강화에 더욱 시간을 쏟았다. 조용하지만 차근차근 흥행을 해갔다. 사업체의 푸쉬도 있었기에, 레슨 박스는 리듬게임에 국한되지 않고 실질적인 피아노 교육 현장에서도 사용되게 되며, 여러 박람회에도 출시되고 상도 꽤 받았다. 가을과 마지막으로 만났었던 게 레슨 박스의 여러 수상식 중 한 곳에서였다.

“그때 이후로 피아노 외에도 다른 악기에 대응하는 어플도 나오기 시작했었지? 내 부모님도 네 얘기 하시더라.”

“안 그래도 바빴는데 더 바빠졌죠.”

가을이 푸념하듯이 그때 겪었던 에피소드들을 풀어놨다.

지금도 한창 바쁠 가을이 내 집에 있는 건, 사업 초기부터 이어지던 내부의 알력 다툼에서 밀려났기 때문이다.

“바쁜 몸이 될 줄 알았는데 한순간에 한량이 되어버리네요.”

“돈은 못 받는 거야?”

“그냥 주는 돈 받고 나왔어요. 이제는 저 없이도 돌아가니까요.”

나는 가을에게 있었던 얘기를 듣다가 화가 났다.

그러나 내가 그 사람들을 욕하자, 가을은 오히려 의문을 보이며 물었다.

“선생님이 왜 화내요?”

“그럼 넌 화가 안 나는 거야? 그 사람들이 네가 정당하게 받아야 할 돈을 가져가는데?”

“그렇게 피곤하게 생각할 거 없어요. 어차피 목적은 순수하게 실용성 있는 레슨 박스의 완성 그 자체였으니, 전 충분해요. 돈을 벌고 싶다는 건 목적과는 상관없으니까, 전 오히려 지금 받은 것만으로 제작비를 한참 회수할 수 있어서 좋은데요, 뭘.”

나는 가을의 말에 질리는 기분이 들었다.

“그런 순수는 순수가 아니라 광기야.”

나는 힘내서 만든 요리를 식탁 위로 옮겼다. 요리는 최근에 생긴 취미다.

“보정기가 있다 보니 손이 베일 일이 없어.”

리스크가 사라지니 요리란 게 꽤 즐거운 일이라는 걸 깨달았다.

“그래서, 앞으로는 뭘 할 생각이야?”

“글쎄요. 오랜만에 선생님 앞에서 한 곡 쳐볼까요? 들어보실래요?”

피아노를 놔둘 만큼 여유로운 곳은 아니라 키보드만 있었다. 눈에 보이는 곳에 있었기 때문에 그녀는 알아서 찾아가더니 가방에서 AR기어를 꺼내 머리에 썼다.

“그거 없이는 못 치는 거야?”

“이건 일종의 악보에요. 좀 더 고차원적인 악보요. 호로비츠도 악보를 보면서 연주한다고요.”

노트가 내려오기 시작한 듯 가을은 별다른 예고도 없이 건반 위로 손가락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우와, 건반 엄청 가볍게 해서 쓰시네요?”

“손가락이 아파서.”

나는 보정기를 낀 손을 들어보였다.

가을의 손가락이 날아다니듯이 건반 위를 오갔다. 무슨 곡을 치려나 했는데, 쇼팽이었다. 부족한 실력을 화려함으로 감추려는 생각일까? 그러나 연주는 훌륭했다. 재능도 여전했다. 바쁘다고 하면서 몰래 연습해왔던 걸까? 지금 보는 광경이 아까워서 녹화라도 해두고 싶었다.

순간이여 멈춰라!

그러나 문득 예전에 본 글귀가 떠올라 나는 손을 움직일 수가 없었다. 사진으로 남기고 안심하는 것보다, 좀 더 절박하게 눈에 담아두는 습관을 들여야 한다는. 그런 얘기였다.

남겨둘 필요는 없다. 남겨두고 싶다는 그 간절함 또한 남겨두고 싶을 정도로 아름다운 감정이니까.

……연주를 마치고 가을은 기어를 벗었다. 그러고는 씩 웃었다.

“83점이었어요.”

“높은 건가?”

“음, 상위 5%정도? 이것저것 집어넣다보니 난이도가 높아졌거든요. 예전에 말하셨던 강약기능도 엄청 세밀해졌고……것보다 안 해보셨어요? 해보셨으면 아실 텐데.”

“안 해봤어.”

레슨 박스에 대한 뉴스를 보다가 질려버린 게 크다.

기술이 사회에 미치는 파급력이라는 것을 나는 오랜만에 느꼈다. 내가 종사하는 분야였기에 더욱 그랬다.

레슨 박스는 뜻밖에도 예술 쪽에 있어서는 굉장히 첨예한 문제를 표면으로 끌어올렸다. 정신론과 기술론의 대립이다.

레슨 박스는 부모와 아이들에게 인기가 많았다. 부모가 아이들에게 피아노를 배우길 원할 때에, 비싼 학원 보내는 것보단 레슨 박스를 사주는 게 효율도 괜찮고 위험부담도 적다. 위험부담이란, 학원비를 몇 달 치 넣어놨는데 아이들이 중간에 피아노에 흥미를 잃어버리는 경우이다. 레슨 박스는 AR바탕이라, 사실 빈 책상만 있어도 피아노를 치는 게 가능했다. 책상에 81개의 건반을 투영해, 각 건반에 해당하는 위치를 누르면 레슨 박스에서 그 음이 흘러나오는 식이다.

비싼 피아노를 살 필요도 없고, 아이들도 악보를 보면서 치는 것보다 훨씬 흥미를 붙이기 좋아 학원에 보내지 않고 레슨 박스만으로 만족하는 부모들이 많아졌다. 물론 학원 측이 학원생이 점점 줄어들기 시작하자 그 원인을 파악하기 위해 분주해진 건 두말할 것도 없었다.

정말로 한 명의 예술가로서 의문을 표한 것인지, 아니면 학원 수입이 점점 떨어지기 때문인지는 몰라도 문제제기가 시작되었다.

즐겁게 배우는 게 뭐가 문제인가? 초심자는 우선 피아노에 흥미를 붙이기 위해 즐겁게 연주할 필요가 있다. 연주에 고통만이 뒤따라야 한다는 건 헛소리다.

게임으로 익힌 피아노는 예술인가? 이따위 장난감을 써서 손쉽게 배운다면 앞으로 평생 한국에는 호로비츠 같은 피아니스트가 탄생하지 못할 것이다!

웃기게도 가을이 말했던 논의가 실제로 벌어지고 있었다.

나의 입장은, 후자에 가깝다. 일반화할 수 있는 생각은 아니지만, 나는 기본적으로 피아노를 외로운 예술이라 생각한다. 다자이의 말을 변용하자면, 외롭지 않은 사람은 피아노를 잘 칠 수 없다. 나는 내 몸에 상처를 내고 그 상처에서 뿜어져 나오는 감정만 연주하고 싶다. 서투른 해석이라도, 건반 위에서 손가락을 더듬거리더라도, 내 피와 살을 깎아내어 나온 감정만을 표현하고 싶다. 오히려 반문하고 싶은 기분이다. 게임하는 기분으로 잘 치게 된다고 한들, 과연 고통과 고민 없이 이룩한 경지에 의미가 있는가?

어느 사이엔가 화제가 이쪽으로 이어져, 동의를 구하는 마음으로 나의 이런 생각을 말하자 가을은 고개를 저었다.

“결과가 과정을 보장해주지 않는다고 해도, 실질적으로 거기에 무슨 차이가 있겠어요?”

나는 미간을 펴며 내 의견을 피력했다.

“하지만 예술의 가치는 본질적으로 예술가의 인격에 의해 결정된다고 생각해. 예를 들어, 무한한 수의 원숭이에게 무한대의 타자기를 주면 햄릿을 써낼 수도 있지만, 과연 원숭이가 쓴 햄릿에 예술적 가치가 있을까? 부서지지 않는 건반 위로 무한한 수의 돌이 굴러가며 베토벤의 모든 곡을 연주한다고 해서, 우리는 돌이 베토벤의 고뇌를 이해하고 표현했다고 봐야 할까? 돌과 원숭이의 작품에는 인간에 대한 성찰이 뒤따라주지 않아.”

“너무 비약 아니에요?”

“이건 굳이 원숭이나 무생물인 돌에 비유할 것도 없이 곧장 사람을 예로 들어도 돼. 문외한이 어쩌다가 호로비츠의 연주를 재현해낸들, 그건 차라리 표절이지 그 연주가 진짜 호로비츠의 연주만큼 가치 있다고는 할 수 없을 거야. 돌이건 원숭이건 인간이건 아무런 차이는 없어. 그 결과물에 걸 맞는 인격을 가진 존재냐 아니냐로 나뉠 뿐이야.”

가을은 고개를 저었다.

“글쎄요. 오랜만에 만났는데 논쟁은 그만두죠. 어차피 이 논쟁의 정답은 ‘결과’가 말해 줄 거예요. 그것보다 사실 얼굴 보러 온 것 외에도 선생님을 찾아온 이유가 하나 더 있어요.”

“이유?”

“네, 이번에도 조금, 평범하지 않은 레슨을 부탁드리려고요.”

/7

저녁식사를 마친 후, 나는 가을을 침대에 재우기로 하고, 내가 잘 바닥에 이불을 미리 깔아두었다. 그리고 계속 시간을 때우는데, 자정에 가까워져도 가을은 침대로 갈 기색을 보이지 않았다. 처음 알았다. 가을은 잠이 적은 편이었다. 그녀는 내 책을 빌려 읽기 시작하더니, 분위기만 보자면 책을 다 읽기 전에는 잠들 생각이 없는 듯한 얼굴로 책을 빤히 들여다보기 시작했다.

가을이 고른 책은 내가 사놓고도 아직 읽어보지 않은 책이라 그다지 할 얘기가 없다는 게 아쉬웠다. TV를 켜거나 하면 소리 때문에 가을에게 방해가 될 것 같아서 나도 가을이 앉은 소파 맞은편에 앉아 다른 책을 읽었다.

그러나 책 내용은 머리에 들어오지 않았다.

선생님…….

그때 같이 들었던 그 곡, 누구의 곡이었을까요?

네,

여름날, 제가 레슨 박스를 만들고 선생님은 그런 저를 지켜봐주시던 그 시절,

저희가 같이 들었던 그 곡 말이에요.

선생님,

그건 제가 좋아하던 곡이었어요,

“……선생님, 저는 그게 늘 궁금했어요. 인터넷에 검색하면 나오는 클래식 음악들은 누구의 것인가요? 이를테면 바흐도, 베토벤도, 모차르트도 그 사람들이 직접 녹음한 건 아니잖아요. 당연히 아니죠. 하지만 저는 처음에는 그냥 음원이 있는 줄 알았어요. 누구건 간에 어떤 사람이 연주한 걸 녹음했을 게 분명한데, 저는 그런 건 전혀 의식하지 못했어요. 어느 날 그걸 깨달은 후, 저는 제가 자주 찾아듣는 곡이 누구의 곡인지 찾아 헤맸어요. 별다른 정보 없이 제목만 달랑 올라온 동영상이었거든요. 동영상의 이미지는 음반 표지가 아니라 고흐의 그림이었고요. 댓글을 둘러봐도 나오지 않았기에 저는 하는 수 없이 그 곡을 연주한 모든 라이브와 앨범을 다 찾아서 들었어요. 아직 어릴 적이라, 음원을 추출해서 대조하는 방법은 몰랐거든요. 몇 달을 귀로만 들으면서 비교했어요. 그러다가 끝내 호로비츠가 연주한 버전이라는 걸 알게 됐고요. 하, 유명한 사람이 연주한 버전이라 다행이었죠. 아니었으면 몇 년이 걸렸을지도 모르니까요. 원래라면 더 빨리 찾을 수 있었을 텐데, 하필이면 제가 듣던 게 알고 보니 호로비츠의 라이브영상에서 음질을 보정한 버전이더라고요. 그 음질 보정 때문에 아무리 들어도 같은 주법인데 소리는 다른, 그런 이상한 현상을 마주한 채 수십 차례나 돌아가야 했어요. 어쨌든 그때의 해프닝은 그렇게 마무리 되었죠.

하지만 지금은 질문을 하나 더 얹을 수밖에 없겠네요. 그건 진짜로 호로비츠의 곡이었을까요? 기실 저희는 호로비츠의 연주를 실제로 들은 적은 없어요. 모두 기계로 녹음한 것을 들었을 뿐이죠. 실제로 들을 수 있었던 건 그때 그 연주회장에 있었던 사람들뿐이에요. 대부분의 사람들은 간접적으로 호로비츠의 연주를 듣고 그의 예술성을 느낄 뿐이죠. 이렇듯 예술을 받아들이는 방법이 꼭 직접적일 필요가 없다면, 기계로 녹음한 호로비츠의 연주를 스피커로 재생하는 것과, 기계로 분석한 호로비츠의 연주를 그대로 로봇 팔에 재현하는 것에 무슨 차이가 있는 거죠?”

얼마간 생각에 잠겨있는데, 툭 하고 뭔가가 바닥에 떨어지는 소리가 났다. 무심코 눈을 뜨자, 소리의 실체가 바닥에 있는 걸 알 수 있었다. 내가 손에 들고 있던 책을 바닥에 떨어뜨린 것이었다. 덕분에 펴고 있던 책장이 덮이며 어디까지 읽었는지 알 수 없게 되었다. 어처구니없는 실수에 잠깐 동안 눈앞이 깜깜했다.

책을 읽다 나도 모르는 사이 내가 잠들었단 걸 깨달았다. 깨어있는 줄 알았는데, 눈꺼풀 뒤로 과거를 응시하고 있었던 걸까. 재빨리 책을 주워들고 가을의 눈치를 살폈다.

내가 졸았다는 걸 아는지 모르는지 가을에게서 표정의 변화는 알아볼 수 없었지만, 생각해보면 못 알아차렸을 리가 없었다. 그냥 못 본 척 못 들은 척 배려해주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내 추측을 뒷받침 해주듯 가을은 책에 시선을 두고 있지만, 방금 전까지와는 달리 몇 분이 지나도 페이지는 넘기지 않은 채 얼마간 가만히 있더니, 이내 책을 덮었다.

“이제 자는 게 어때요?”

나는 눈을 문지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다음날, 우리는 호로비츠의 연주 동영상을 모두 모아서 손가락의 움직임을 모두 데이터로 바꾸기로 했다.

“저 좀 도와주실래요? 그냥 검색해서 동영상을 다 다운로드 받으면 돼요. 중복되는 동영상은 화질이 더 좋은 걸로요.”

가을의 발상 자체는 간단했다. 호로비츠의 움직임 자체를 현실상에 구현해보면 어떨까 하는 것이었다.

사람의 몸에 센서를 달아 기계가 똑같이 움직이게 하는 기술은 이미 몇 십 년 전부터 존재해왔다.

값을 더 구하기 쉽게 하기 위해 동영상을 보정했다. 외주로 처리했는데, 수천 달러가 들었다.

“과연 이렇게 돈을 들여 할 가치가 있을까? 아무런 고민과 이해 없이 값을 구하고 그대로 적용한다고 거기에 가치가 있을까?”

“존재는 본질에 선행하니까요. 일단 따라하면 이해는 그 뒤에 따라올 거예요.”

/8

호로비츠 라이브의 코드화가 끝났다. 데이터를 넣어 놓은 레슨 박스에 보정기를 연결했다. 나는 보정기를 낀 손으로는 호로비츠의 연주를, 다른 손으로는 내 연주를 쳤다.

“…….”

나는 나 자신의 부족함에 절망감을 느꼈다. 그리고 느꼈다. 레슨 박스가 재현한 호로비츠의 연주는 내가 들었던 연주와 큰 차이가 없다는 것을.

“어때요? 똑같죠?”

“……글쎄, 호로비츠가 연주하던 피아노가 아니라서 잘 모르겠네.”

나 개인이 거부감을 느끼는 것과는 별개로 사회는 결과 위주로 흘러갔다.


호로비츠의 연주회가 열렸다. 물론 진짜 호로비츠의 연주회는 아니다. 호로비츠 연주 데이터를 탑재한 로봇 위에 호로비츠의 홀로그램을 씌우고 공연하는 것이다.

나는 가지 않았다. 신념이나 긍지 같은 이유로 보이콧한 건 아니었다. 어처구니없게도 표가 매진되었던 것이다. 들리는 얘기론 피아노도 호로비츠 스타일로 조율했다고 한다. 건반 위에 손을 얹기만 했는데도 소리가 날 정도의 세심한 피아노였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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