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밀번호를 잊어버리셨나요?

삐그덕 낡은 의자

온연두콩

 


열쇠를 돌리자 철컥 소리가 복도 안을 울린다. 손잡이를 당기니 경첩이 쩌억하고 늘어지게 신음했다. 주인아주머니는 헛기침으로 민망함을 감추려 했지만, 정작 내게 신경 쓰이는 일은 아니다. 나는 그저 낡은 목조건물다운 소리라고만 생각하고 말았다.

“요란은 해도 여닫는 데 문제는 없어요.”

아주머니는 손을 내저으며 넉살 좋게 웃었다.

“창이 잘 나서 볕이 잘 들어요. 온수 시설 새로 해서 뜨거운 샤워도 문제없고요.”

얼마나 애정을 담아 설명하는지 소리를 없애면 자식 자랑 중으로 보일 수도 있을 것 같다.

“도시 계획 시범 지역으로 선정되는 바람에 덕 좀 봤죠. 오는 길에 공원 봤을 거에요. 클래식한 우리 건물하고 잘 어울려서 내 눈엔 아무리 봐도 그림 같지 뭐겠어요. 포아 애비뉴로 진입하면 제일 먼저 보이는 곳이라 외관을 알아서 꾸며주더군요.”

동의를 구하려고 눈 맞추려는 아주머니를 향해 나는 살며시 웃었다.

“교통도 편리해요. 번화가로 진입하기 전에 핸들만 살짝 꺾으면 나오니까요. 길이 안 막히니 시간 잡아먹을 일 없고, 업타운 쪽은 살짝 미끄러지기만 하면 ‘어머, 도착!’이에요.”

아주머니는 열쇠를 선반에 올려놓음과 동시에 사설 기숙사 칭찬을 쉴 새 없이 늘어놓았다. 난 기계적으로, 하지만 무성의하진 않게 끄덕이며 나름대로 집 안을 살폈다. 아주머니가 방문과 창문을 여는 동안 마음이 내키는 대로 구경하다 어느 한 곳에서 걸음을 멈췄다.

발아래 나뭇결을 따라 시선을 이어가니 거실 모서리가 나온다. 바닥에서 벽으로 각을 틀어 이어지다 얼마 가지 못해 낮게 경사져 낯선 공간을 드리우고 있었다. 허리나 무릎 중 하나는 낮추어야 하는 그곳은 집에서 가장 구석지고 어두운 부분이었다.

천천히 계속 걸었다. 홀린 듯 이끌린 걸음이었다. 경사면 창문을 통해 들어오는 빛이 나무 바닥에 네모난 영역을 만들어 얼핏 아래층으로 통하는 비밀 문처럼 보였다.

빛과 그림자가 나뉘는 경계를 자세히 보면 숨은 문고리가 보일 것도 같았다. 눈을 가늘게 뜨고 온 정신을 집중해 네모진 부분의 틈을 찾으려고 애썼다.

눈시울이 붉어질 정도로 깜박임을 참고 참다 마침내 보고야 말았다. 부유하는 작은 먼지 알갱이들이 자기네들끼리 얽히고설켜 길고 촘촘한 세로결을 만들어내는가 싶더니 그 결 뒤편에서 한 부분을 벌린 투명한 손가락 하나가 힘겹게 틈을 비집고 내밀려는 움직임을.

어느새 강해진 먼지층이 뜯어지며 투둑 소리가 났다. 나는 참지 못하고 도와줄 생각으로 손을 들었다. 무심한 창 아래로 손가락을 대려는데, 아주머니의 목소리가 덥석 나를 잡아 세웠다.

“내부도 괜찮지요?”

반짝이는 먼지들의 영향 아래에서 순식간에 벗어난 나는 잠꼬대하는 사람처럼 대답했다.

“네. 정말 근사하네요.”

예상치 못한 대답이었는지 아주머니는 나를 한참 바라보더니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요, 그렇죠. 그렇고말고요.”

실내는 깔끔했다. 오전 사용자는 짐이 별로 없는 모양이다. 내 짐을 어디에 두면 좋을지 생각하며 시선을 무심코 침대 쪽으로 향했다. 그러자 아주머니는 내가 침대를 바라본다고 생각했는지 내 팔을 잡더니 주의를 돌렸다.

“아니야. 아무렴 사용자가 오전 오후로 나뉜다고 침대까지 같이 사용하게는 안 한다고. 아가씨가 사용할 침대는 맞은편 방에 있어.”

아주머니는 조바심을 내는 듯했다. 여러 달 방이 안 나간 것으로 보아 시간대를 나누어 방을 셰어하겠다는 사람을 구하기가 어려웠던 모양이다. 하긴, 나도 오늘 안으로 기숙사를 구해야 하는 사정이 아니었다면 이런 집은 거들떠보지도 않았겠지. 하지만 솔직하게 말하자면, 아닌 게 아니라 집 안에 발을 들이는 순간부터 이 공간에 소속되는 느낌을 받았다고 고백해야겠다.

문밖에서부터 늘어놓은 설명 때문은 아니다. 오히려 아주머니가 애써 감추려 드는 오래되고 낡은 느낌이나, 살짝이 기울어진 곳에 서면 삐걱거리는 울림, 동화책에서 봄 직한 구조의 번거롭지만 아기자기한 선반 같은 아주 사소한 것들이 이상할 정도로 내 마음을 끌어당겼기 때문이다.

“정확하게 제가 이 방을 몇 시에서 몇 시까지 사용할 수 있는 거죠?”

드디어 방이 나갔구나 싶은지 아주머니 얼굴에 환하게 화색이 돈다.

“아이고, 이렇게 빨리 결정해 주다니 고맙기도 하지. 그 사람은 이미 오전 8시부터 오후 5시까지만 사용하고 있어요. 그러니까 아가씨가 좀 더 써도 상관없겠지요. 서로 부딪히는 일이 없도록 한 시간씩 교대 시간에 텀을 뒀으니까 서로 시간만 잘 지켜주면 문제 될 일도 없을 거예요.”

자신의 답변이 꽤 맘에 들었는지 아주머니 얼굴에 흡족함이 넘실댄다. 나는 다시 침대와 책상, 선반 같은 것들을 찬찬히 바라봤다. 선택에 흔들림 없음을 스스로 확인하면서.

“학교 기숙사보다 저렴한 거 맞죠? 잘못 안 거라면 다른 곳을 알아봐야 하거든요.”

 


렉시는 신호음 한 번이 끝나기도 전에 전화를 받더니 작정한 사람처럼 질문을 퍼부었다.

[어떻게 됐어? 구한 거야? 온종일 전화 안 받은 유일한 이유가 그거여야 할 거야.]

알렉시아 러브그린. 대단한 자존감 소유자. 나는 이 친구의 자신감과 쾌활함을 사랑했다. 태생적으로 우울하고 감성적인 나를 햇살로 이끌어주는 존재이니.

“다른 이유면 안 되는 이유는?”

[장난해? 기숙사는 당장 구해야 했으니까 바빴을 너의 정신머리를 이해할 수 있지만, 그 외 다른 일이라면 내 전화를 받는 것보다 더 중요할 수 없을 테니까 그렇지.]

“오호, 자신감이 상당한데?”

[자, 이제 주소를 불러 봐.]

앉은뱅이 탁자 위에 지난주 프리마켓에서 구매한 레이스 깔개를 깔고 크기가 딱 맞는 동그란 유리를 덮었다. 커피 잔을 들어 올리자 유리에 동그랗게 김이 서리다가 이내 사라진다.

“계약 기간이 언제까지라고?”

렉시는 보드라운 인조털방석 위로 올라앉더니 부츠를 벗으며 물었다.

“일단은 3개월인데, 서로 별말 없으면 자연 연장이래.”

나는 무릎 위를 덮고 있는 퀼트의 바느질 부분을 만지작거리며 대답했다. 그러다 어느새 내 시선은 퀼트에서 벗어나질 않았다. 한참을 그렇게 집중하는 동안 렉시는 아무 말 없이 그런 나를 바라보거나, 내가 보는 것을 같이 바라보며 내 침묵의 시간을 존중해 주었다.

커피 잔을 입에 대고 마시면서 렉시를 바라보자 그녀는 내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물질적인 것이든 정신적인 것이든 한 번 꽂힌 것에 나를 가두고 좀처럼 나오지 않으려는 내 어두운 습성을 그녀는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부끄러운 행동이고 그래서 비밀스럽지만, 이런 나를 솔직하게 보여줄 수 있는 건 그녀가 어떤 기준을 두고 나를 비정상이라고 판단하는 일이 없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이 친구에게만큼은 최대한 솔직할 수 있었다.

나는 어느새 손가락 끝으로 바늘땀 하나에 집착하고 있었다. 단절된 공간이 흠 없이 안전한가를 확인하는 것처럼. 퀼트의 조각들이 서로를 만나 거대한 하나를 이루고 있지만, 그 작은 조각은 저마다 단독적인 바느질로 주변을 두르고 있다.

내가 꼭 그랬다. 울타리를 쳐 방어벽을 만들고 그 담벼락에 손을 얹어 눈만 빠끔히 내놓은 모습. 태생적으로 우울하고 감성적이라는 말은 그냥 한 말이 아니다. 나는 병적일 정도로 폐쇄적이고 망상에 빠지는 기질의 소유자로 나를 알아주는 친구 한 명을 위해 바느질 딱 한 땀만을 개방한 상태였다.

“그나저나 며칠 전 프리마켓에 살인 사건 났던 거 알아?”

갑자기 생각났다는 듯 렉시가 약간 언성을 높여 말했다.

“뭐?”

전혀 모르던 일이어서 깜짝 놀랐다.

“지역 뉴스에도 났었는데 몰랐구나. 아니 무슨 대낮에 버젓이 살인할 수가 있다니. 아직 범인이 누군지 가닥도 안 잡힌 모양이던데.”

나는 마지막 커피 한 모금을 꿀꺽 소리 나게 삼켰다가 목구멍에 통증이 느껴져 콜록거렸다.

“안 되겠어. 앞으로 너 프리마켓 갈 땐 나를 불러. 혼자 다니는 건 위험한 것 같아.”

“응. 그럴게.”

렉시는 빈 커피잔을 들고 싱크대로 가져가 설거지를 했다. 그녀의 애정 어린 행동을 보며 덕분에 이곳에서도 보살핌을 받으며 지내겠구나 싶었다. 이런 생각이 들 때면 뱃속 깊은 곳이 따뜻해지며 온몸이 충만해지는 기분이 들고는 했다.

 


여지없이 삐그덕 하고 기우는 소리가 난다. 나무 바닥의 찬 기운이 발바닥 전체를 감싸고 돌아 약하게 소름이 돋았다.

문득 정신을 차려보니 나는 새하얀 원피스 잠옷 차림으로 손에는 나무로 만든 의자를 들고 있었다. 유아원에서나 쓸 법한 아주 작은 의자다.

어두운 거실 한가운데 멍하니 서서 경사진 벽 아래의 공간을 바라봤다. 창문 아래 바닥과 벽과 모서리는 작당하고 어둠의 소굴을 차려 호기심과 두려움의 갈퀴를 숨긴 채 나와 눈싸움을 했다. 온통 까만 사이로 날카롭게 빛나는 눈동자라도 보여주길 바랐지만, 그들의 고집에 나는 그만 패배를 인정하고 먼저 가까이 다가섰다.

모서리를 더듬어 가장 구석진 곳으로 나무 의자를 끼워 넣듯 들이밀고 그 위로 두 발을 밟고 올라가 쭈그려 앉았다. 겨우 올라간 상태에서 꼼짝할 수 없게 되자 양팔로 무릎을 끌어안고 머리를 벽에 기댔다. 무게 중심이 옮겨지자 낡은 바닥은 덕분에 버티는 중이란 것을 적나라하게 표현했다.

나는 그 아우성을 듣고도 매정하게 무시하는 여주인 같은 표정을 지으며 다리 저림을 도저히 참을 수 없게 될 때까지 이 자세를 고수하리라 다짐했다.

“…어어?”

벽에 기댄 상체를 앞쪽으로 불쑥 일으켰다. 믿기 어려운 일이 발생한 것이다. 눈에 힘을 줘가며 찾으려 했던 아래로 통하는 문이 아주 선명하게 나타났다. 눈을 여러 차례 비비며 거듭 확인할수록 문은 점점 현실이 되었다.

손잡이를 잡고 열어보고 싶은 강렬한 충동에 손을 뻗다 몸이 앞으로 완전하게 기울었다. 의자 다리 한쪽이 들리자 바닥에선 여지없이 고통에 찬 외마디가 끼익 하고 들려왔다. 아랑곳하지 않는 나의 행동에 원망이라도 하듯 소리는 다시 들려왔다.

이번에는 길고 좀 더 흐느끼는 울음 같았다. 머리가 쏠리자 버틸 수 있는 한계를 벗어나 나는 딱딱한 바닥 위로 쿵 하고 떨어졌다.

“아야!”

눈을 번쩍 뜨고도 눈앞이 깜깜하다. 그러다 얇은 이불을 머리에만 뒤집어쓴 채 침대에서 머리부터 떨어져 볼썽사나운 모습을 연출 중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꿈이었다. 잠결에 들었던 끼익 하는 소리는 아마도 침대 끄트머리에서 몸을 뒤척이느라 나는 소리였던 모양이다. 일어나 이불을 잡아내리 끌어 몸에 두르고는 침대에 등을 기대고 앉아 머리를 쥐어 감쌌다. 싸늘한 공기에 손은 절로 이불로 향해 몸을 꽁꽁 둘렀다. 꿈속에서 떠올린 어떤 상상이 기억나 방 안 가득한 한기의 온도가 더욱 낮아지는 듯했다.

마룻바닥에 생겨난 문을 열지 않았지만, 이미 머릿속으로 어떤 이미지를 떠올렸다. 열려고 시늉하긴 했지만, 알고 있었다. 절대 손잡이는 만질 수 없으리라는 것을.

문 아래 낮고 좁게 파인 안에는 싸늘하게 식어버린 남자가 손을 곱게 모은 채 누워있을 것이다. ‘죽은 것일까?’ 생각하는 순간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번뜩 뜬 사백 안은 처음부터 시선을 나에게로 향한다. 한 번도 본 적 없는 시체의 희번덕한 눈동자에 나는 몸을 떨었다.

침대로 올라가고 싶었지만, 차디찬 남자가 어느새 자리를 차지하고 누워 절대 감지 않는 사백 안으로 나만 바라보는 망상에 사로잡혀 꼼짝할 수 없다. 망상이라는 것을 알지만, 한 번 생각해 버린 이상 절대 뒤를 돌아보지 못할 것이다.

도움을 요청하고 싶은 마음이 들자 렉시가 생각났다. 동시에 휴대전화가 침대 머리맡에 있다는 것 역시 떠올랐다. 뒤를 돌아볼 수 없으니 모든 상황은 스스로 해결해야 했다.

찬찬히 생각하려고 애썼다. 그리고 인정했다. 갑자기 떠오른 말도 안 되는 상상과 괜한 두려움의 근원이 무엇인지 나는 이미 알고 있다. 그건 생각의 콜라주 같은 것으로 비슷한 시기에 들어온 정보를 제멋대로 혼합하며 이상한 결론으로 도출한 것이다.

새로 구한 사설 기숙사의 오전 사용자가 남자라는 것과 프리마켓에서 살인사건이 일어났다는 것, 그리고 창으로 들어오는 빛으로 환하게 네모진 영역을 만드는 것을 보고 그 모양대로 비밀의 문이 생겨나길 바라는 환상을 꿈꿨다는 것. 단지 이것들이 새로운 생활에 대한 설렘과 근심으로 인해 호러적 상상을 끌어냈다. 그냥 그런 것일 뿐이다.

아, 잠깐만. 오전 사용자가 남자라고 했던가. 그런 말을 들었던 것 같진 않은데.

이불을 머리 위까지 뒤집어쓰고 시야를 최대한 가렸다. 살며시 자리에서 일어나 여러 번 더듬거린 후에야 스위치를 찾을 수 있었다.

탁.

소리와 함께 사방이 환해졌지만, 기대했던 마음의 평화는 아직이다. 나는 이제 차디찬 남자가 사백 안에 길어진 입으로 나를 향해 가부좌 틀고 앉은 모습을 상상하기에 이르렀다.

복도와 거실도 불을 밝혔다. 오전 사용자의 방으로 가기 위해선 집 안이 밝아야 했다. 거실을 지나는 동안 눈동자만 움직여 흘낏 경사진 벽 구석 쪽을 바라봤다.

당연하게도 그곳엔 아무것도 없다. 구석에 놓인 낡고 작은 나무 의자를 빼면.

……나무 의자. 의자라니.

의자는 원래 없다. 꿈속에서 내가 가져다 놓은 물건이니.

잠시 걸음을 멈칫했다. 이젠 의자도 볼 엄두가 나지 않는다. 손을 꼭 잡아 쥐고 단숨에 건넌방 문을 열었다. 생각지 못한 차가운 바람이 휙 불어와 나는 나도 모르게 손으로 얼굴을 가리며 눈을 감았다.

방 창문이 열려 있었다. 집 소개하던 아주머니가 문과 창문을 열었던 것이 기억났다. 조심스레 스위치를 켰다. 옷장과 침대 밑을 가장 먼저 확인하고 (어린잇적 공포증에서 벗어나지 못한 까닭이다) 이유는 알 수 없지만, 마법 진이나 이상한 문양이 새겨진 곳은 없는지 구석구석 확인했다.

누가 보는 것도 아니었지만, 이런 행동을 하면서도 내가 정신 나간 짓을 한다는 걸 충분히 인식하고 있었다. 그래도 멈출 수는 없었다. 어쩌면 밤마다 나는 이렇게 확인을 재확인하려고 들지도 모른다.

불안의 근원이 방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님을 알지만, 근원을 파헤치는 건 나 같은 겁쟁이에게 무엇보다 두려운 일이라서 수고스럽더라도 ‘아무것도 없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는 결과적인 상태를 확인하는 것으로 일시적 만족을 얻는 것을 택했다.

이미 본 방이지만, 정말 짐이 없다. 낮엔 집에 있고 저녁과 밤은 집을 비우는 사람이라니. 뭘 하는 사람인 걸까. 괜한 호기심이 들었지만, 이내 관심을 접었다. 다만 이 방의 주인이 정말 남자인지를 알아야 했다. 옷을 확인하면 될 것이다.

외투 몇 벌과 바지 몇 벌, 다른 쪽으로는 수트가 걸려 있다. 남자 옷이다. 대체로 얌전하고 수더분한 스타일이었는데, 안쪽에 걸린 검은 옷 하나가 시야에 들어왔다.

라이더 재킷.

치수가 작아 보이는 데다 분위기가 확연히 다르다.

젊은 사람인가 생각하며 옷을 잡아빼자 뒤에 가려져 있던 원피스 하나가 보였다. 커다란 꽃잎이 풍성하게 프린트된 시폰 원피스. 동작을 빨리해 여자 옷이 더 있는지 확인했다.

없다.

없다는 사실을 인지하는 순간, 내 뒤에 따라다니는 창백한 얼굴이 남자에서 여자로 변하는 것을 느꼈다. 흡혈귀에게 물린 후 이제 막 마지막 숨이 끊겨 영원한 죽음으로 변모하기 직전의 모습.

빼낸 옷을 가지런히 제자리도 돌려놓았다. 지문이라도 지워야 하는지 잠시 갈등했지만, 낮에 아주머니와 함께 만진 것이 다 사라진다면 더 의심을 받을 수 있어 그만두기로 했다.

의심이라니, 누가 의심을 한단 말이지. 지문 감식할 일이 뭐가 있다고.

싸늘함에 창문을 닫아야겠다고 생각하는 찰나, 종이 팔락이는 소리가 들렸다. 어디서 나는지 두리번거리다 협탁위에 놓인 노트 사이에 삐져나온 종이들을 발견했다. 창을 닫고 노트를 열어 그것들을 들었다.

손으로 찢어 모아둔 신문 기사로 렉시가 말한 프리마켓 살인사건 내용이 실려있었다. 나는 아예 자리 잡고 앉아 기사들을 읽기 시작했다.

[스물두 살의 대학생 레베카 도슨이 유명을 달리한 곳은 환한 대낮의 한 프리마켓에서였다. 빈티지 예술가인 그녀는 주로 폐타이어 장과 고물처리장, 프리마켓 등에서 재료를 구한다고 동료이자 친구인 제롬 파티어가 인터뷰했다. 그의 말에 의하면 도슨은 새로 개방한 포아 애비뉴 근린공원에 설치 미술품 전시를 계획 중이라 했다.]

다른 지역 기사 신문으로 시선을 옮겼다.

[프리마켓 대낮 살인 사건 발생. 피해자는 레베카 도슨으로 청소부에 의해 시체로 발견되었다. 지인 인터뷰에 따르면 그녀는 프리마켓을 자주 찾는 편이고, 사고 당일에도 작업 재료를 사러 갔을 것이라 했다. 사건 관련한 목격자가 나오지 않은 현재, 피해자의 신원조회와 사건 정황, 부검 결과 등을 가지고 수사를 진행 중이지만, 범인을 잡는 것에는 일단 회의적인 분위기다. 피해자 머리카락이 잘리고 옷이 벗겨진 것으로 보아 범인은 자신의 흔적이 남을만한 것을 거둬 갔을 것이라고 경찰은 말했다.]

고개가 절로 시폰 원피스로 향했다. 치수 작은 라이더 재킷은 시폰 원피스 위에 걸친 것이라는 걸 그제야 깨달았다.

“나, 지금 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

남자 방에서 발견한 여자 옷과 근처에서 발생한 살인사건의 피해자를 연관 짓는 것은 지극히 억지이며 망상이다.

하지만 이 망상 덕분에 살인사건의 범인을 잡게 된다면. 그런 거라면?

나는 점점 의심 편을 들기 시작했다. 방은 남자 혼자 지내고 아내나 여자친구 흔적은 없다. 옷은 버릴 곳을 정하지 못해 가지고 있는 것이다. 장소가 정해지면 버리거나 태우겠지. 굳이 살인사건 기사 부분만 모아 따로 가지고 있는 건 범인으로서의 자연스러운 행동일 것이다. 어느새 나는 내 생각을 믿고 있었다.

놀랍게도 방 주인을 살인범으로 결정하고 나자 줄곧 등 뒤를 따르던 존재에 대한 두려움이 사그라들었다. 의지와 상관없는 자연스러운 평화가 마음에 스며들었다. 나는 남자의 방을 나와 여전히 어둠 안에 조용히 자리한 낡은 의자를 바라봤다.

거기에 나를 노려보는 것은 이제 아무것도 없었다.

 


문이 철컥하고 열리더니 발소리가 들려왔다. 느릿한 발걸음이 지극히 일상적이어서 죄지은 자의 것이라고 여겨지지 않았다. 아니라면 죄를 인식 못 하는 양심 잃은 자이거나. 그는 열쇠를 선반 위에 올려두고는 곧장 방으로 들어갔다.

나는 약속 시각을 넘기고도 집에 머물렀다. 살인을 저지른 사람과 같이 살게 생겼는데 계약이 문제인가. 무슨 일이 있어도 그가 프리마켓 살인 사건의 범인이라는 증거를 잡아 경찰에 넘기고 말 것이다.

문이 열리더니 그가 거실로 나왔다. 손에는 커다란 쓰레기봉투가 들려있다. 뭐가 들었나 확인하려고 했지만, 불투명한 검은 색 안이 쉽게 보일 리 없다.

커다란 키에 마른 몸매, 검은 뿔테 안경이 얼핏 직장인 같다. 밖에서 들어온 차림 그대로 옷도 갈아입지 않고 양팔엔 고무장갑까지 꼈다.

급하게 처리해야 하는 거라도 있는 거겠지.

의심의 심증이 자꾸 짙어지고 있다. 그가 봉투를 내려놓고 화장실로 들어갔다. 뭘 만지는지 부스럭 소리가 들리길래 나는 검은 쓰레기봉투로 몰래 다가가 조심스럽게 입구를 벌렸다. 그리고 안에 담긴 것이 무엇인지 알았을 때 나는 생각의 회로가 순간 멈추는 것을 느꼈다.

잡고 있던 봉투 끄트머리가 손가락 사이에서 빠져나갔다. 경사진 벽 모서리를 바라봤다. 내가 꿈으로부터 가지고 온 낡은 나무 의자가 꼭 맞는 맞춤 가구처럼 놓여있다.

다시 쓰레기봉투를 벌렸다. 무늬까지 완벽하게 똑같은 나무 의자가 그 안에 덩그러니 들어있다. 원래 없던 의자가 두 개나 생겼다. 어떻게 생각해야 할지 몰라 눈만 껌벅대고 있는데.

“여기서 뭐 해?”

뒤에서 목소리가 들린다. 의자에 정신이 팔려 남자가 있다는 사실을 잠시 잊고 있었다. 천천히 몸을 돌렸다. 얼이 다 빠져나간 것만 같았다.

살며시 시선을 올려 남자 얼굴을 바라봤다. 안경 너머의 푸른 눈동자가 염려 어린 감정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눈을 살짝 가린 붉은 색 머리카락이 눈동자와 대비되어 강렬해 보인다. 익숙한 표정과 목소리.

그녀는 내게 다시 물었다.

“렉시, 거기서 뭐 하냐고.”

회사원 차림에 고무장갑을 낀 남자는 어느새 렉시 모습을 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녀가 나를 ‘렉시’라고 부르고 있다.

가만, 생각해 보니 렉시는 내 이름인 것 같다.

그럼 저 애는 이름이 뭐지?

그녀가 또 물었다.

“괜찮아? 또 넋이 나가 있네.”

갑자기 한기가 들어 양팔로 몸을 껴안듯 감쌌다.

“추워?”

나를 잘 아는 듯한 여자는 자기가 두르고 있던 스카프를 풀어 내 목에 두르고 팔을 문질러 주었다.

“그러게 볕 안 들고 곰팡이 낀 곳에는 왜 들어왔어. 언제 들어온 거야. 한참 찾았잖아.”

그녀 말에 갑자기 곰팡내가 훅하고 들어왔다.

“아주머니가 볕이 잘 들어서 곰팡이 생길 일은 없다고 했는데.”

나는 아주머니를 기억해냈다. 여자가 들어주길 바라는 마음으로 말했지만, 그녀는 내 말에 시큰둥하다. 손으로 나를 문지르며 춥지 않게 해주는 것에만 신경을 쏟고 있었다.

“뭐라도 걸치고 나오지 그랬어. 조만간 여기 건물 일대는 다 폭파한다니까 앞으로 이 근처는 오지 말자. 어딜 그렇게 자꾸 봐, 렉시?”

나는 고개를 돌려 어둠의 소굴, 구석진 모서리를 바라봤다. 삐거덕거리는 낡은 의자가 여전히 거기 있다.

“저기 의자가……”

여자는 내 얼굴을 잡고 앞으로 향하게 했다. 강제적인 힘이 느껴졌지만, 그 안에는 나를 챙기고 아끼는 마음이 있었다. 그녀가 나를 진심으로 보살핀다는 생각은 틀림없는 것 같았다. 게다가 나를 잘 아는 듯도 했다. 나조차도 잘 모르겠는 나를.

“의자는 어디서든 늘 새롭게 나타나니까 괜히 힘들게 챙길 필요 없어.”

부축을 받으며 삐걱거리는 계단을 밟고 건물 밖으로 나왔다. 눈이 부셔 잠시 눈을 감고 있어야 했다. 몸을 감싸던 한기는 녹아내리고 햇살의 포근함이 느껴진다.

건물 앞 잔디밭을 두른 벤치에 앉아 나는 그녀 무릎을 베고 누워 한동안 그 자세로 휴식을 취했다. 어디서부터 환상인지 알 길이 없다. 지금이 현실이라고 말할 자신조차 없다.

그녀가 손으로 내 이마를 어루만졌다. 미간에 진 주름을 펴주려는 것처럼.

“렉시, 빛이 보이니?”

그녀가 물었다. 나는 눈을 감은 채 그렇다고 대답했다.

“빛 말고 또 뭐가 보이는지 말해 줄래? 너를 찾는 게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야.”

“무슨 소리야? 네가 방금 나를 찾았잖아.”

“렉시, 난 정말 후회돼. 네가 프리마켓에 간다고 했을 때, 내가 같이 가줬어야 했어. 그러지 못한 게 이렇게나 후회될 줄 그땐 정말 몰랐어.”

그녀는 닿을 수 없는 사람을 두고 혼잣말하듯 말하더니 급기야 울먹이기 시작했다. 갑자기 사이가 멀게 느껴졌다.

“무슨 소리야. 이사한 후에 네가 와 줬잖아. 같이 차도 마셨잖아. 기억 안 나?”

그녀는 손을 떨었다. 내 이야기는 들리지 않는 모양이다. 이상하다고 생각하며 눈을 뜨고 일어나려고 했다. 일어나려고 했는데, 아주 무거운 무언가가 내 몸을 아래서 잡아당기고 있어 움직일 수가 없었다.

눈을 뜨자 다시 곰팡내 나는 이 층 건물이었다. 눈 앞을 가린 반투명한 비닐 너머로 건물 천장이 보인다.

나는 누워있다.

누운 것 같다. 나무 바닥이 아니라 바닥을 드러낸 그 아래에. 그러니까 경사진 벽면의 창이 비추는 네모난 부분 말이다. 틈이 생겨 들면 문이 열릴 거라 상상했던 바로 그곳에 내가 옴짝달싹도 못 하는 상태로 갇혀 있단 말이다.

이제야 모든 상황을 이해할 수 있었다. 소리 지르고 흐느껴 울며 도움을 요청하다가도 기운이 빠져 기절하기를 여러 번. 그러는 사이 현실과 상상이 뒤얽힌 꿈에 빠졌던 모양이다.

나에겐 집주인 아주머니도, 수상한 룸메이트도, 유일한 친구 렉시도 없다. 나와 친구는 이름이 같다. 그래서 렉시는 우리 둘을 구분하려고 나를 ‘민트’라고 부르고는 했다.

하지만, 이제 그게 다 무슨 상관이람. 버려진 건물 안에 갇혀 아무도 모르게 점점 죽어가는 마당에.

- 지역 뉴스 첫 번째 소식입니다. 도시계획 시범 지역으로 선정된 포아 애비뉴 한 건물에서 이십 대 초반 여성의 시체가 발견됐습니다. 건물 폭파 작업 명령이 떨어진 낡은 사설 기숙사 건물에 폭탄 설치를 위해 들어간 작업 인부가 처음 발견했는데요. 발견 당시 피해자는 이미 사망한 상태였다고 합니다.

- 바닥이 푹 꺼진 데가 있어서 안에 폭탄을 넣으면 되겠구나 싶어 아래를 내려다보다가 얼마나 놀랐는지……. 비닐로 감싼 여자가 눈을 크게 뜨고 있어서 정말 무서웠습니다. 얼마나 크게 떴는지 거의 사백 안이 될 정도였어요. 나 그런 눈 진짜 처음 봤다니까요.

- 경찰 조사에 의하면 피해자는 알렉시아 러브 그린으로 미술을 전공하는 학생이라고 밝혔습니다.

- 올해 스물두 살이고요. 근처 근린공원에서 빈티지 설치 미술품 전시하려고 한창 준비 중이었거든요. 저기, 저쪽이요. 공원 이름이 ‘레베카 도슨’이었나? 그럴 거예요.

- 지인의 인터뷰에 의하면 피해자는 예술가로서 영감과 재료를 구하기 위해 프리마켓을 자주 이용했다고 합니다. 경찰이 피해자의 지갑과 구두를 발견한 곳도 프리마켓인 점으로 미루어 그곳에서 납치당한 후 버려진 건물 안에서 변을 당한 것으로 추측하고 있습니다.

“저, 죄송한데요. 렉시 발견하신 분이시죠? 뭘 좀 물어봐도 될까요?”

“자꾸 떠올리고 싶지 않은데. 나도 정신 상담받아야 할 지경이라고.”

“아저씨, 제발 부탁해요. 제가 유일한 친구거든요. 그 애 상태가 어땠는지 죄송하지만, 말씀 좀 해주세요. 네?”

“뭐. 대충 말하자면 몸 부위가 팔까지 해서 봉투로 꽁꽁 묶여있었어. 알지? 공사장에서 많이 쓰는 검은 쓰레기봉투. 그러고 나서 머리까지 다시 반투명한 비닐로 쌌더라고.”

“고통스러움이 많아 보이진 않았나요. 몸부림 흔적이 많았다거나…… 구타 흔적이라거나.”

“꼭 알아야겠어? 이걸로 눈물 좀 닦아. 아가씨까지 쓰러지겠네.”

“많이 아파 보였어요?”

“아니. 아니야. 몸부림을 치고 싶어도 아마 못했을 거야.”

“왜요?”

“구조를 좀 설명해야 하는데. 마룻바닥을 뜯어내고 나면 그 아래 나무로 된 두꺼운 들보 놓인 게 보이거든. 아가씨 친구도 비닐에 싸인 채 들보 위에 묶여있었어. 그런데 밧줄을 목이랑 배랑 다리에 꼼꼼하게도 동여매 놓았더라고. 못 움직이게.”

“밧줄이 단 한 개도 안 풀렸던가요? 살려고 무슨 짓이든 했을 텐데요.”

“이런 말 뭐하지만, 밧줄은 아주 튼튼하게 묶였어. 왜냐면 아가씨 친구 몸을 동여맨 밧줄마다 끝에 의자를 매달아 두었거든. 나무로 된 낡은 의자 네 개가 1층 공중에서 대롱대롱 매달려 있었어. 바람 불 때마다 흔들리는 바람에 삐걱삐걱 거리는데 아주 소름 끼치더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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