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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기로운 아카시아 꽃 한 아름



1

여자는 흐르는 땀을 닦으며 잠시도 쉬지 않고 미나리를 캤다. 오늘은 장사꾼이 오는 날이라 손놀림을 빨리했다. 이틀에 한 번꼴로 낡아빠진 소형 트럭을 몰고 이 먼 곳까지 찾아오는 이유는 미나리가 싱싱하고 향긋해 비싸게 팔아넘길 수 있기 때문이다. 여자는 무릎높이로 자란 미나리를 한 움큼 쥐어 낫으로 베고, 허리춤에 차고 있는 노끈 하나를 쓱 빼내 돌돌 감아 묶었다. 다음 앞뒤로 몇 번 흔들어 물기를 빼고는 둥근 고무대야에 담았다. 그새 미나리가 가득 차 비워놓고 와야 했다. 여자는 고무대야를 가만가만 밀며 미나리꽝 밖으로 나갔다. 한 발 한 발 옮길 때마다 첨벙첨벙 물소리가 났다.


여자는 무거운 고무대야를 번쩍 들어 올려 논두렁에 내려놓고 큰길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지금쯤이면 장사꾼이 트럭을 몰고 나타나야 하는데, 살랑살랑 부는 바람에 먼지만 날렸다. 이내 종아리에 붙은 거머리를 떼어내 땅바닥에 내던지고, 바닥에 깔아놓은 하얀 비닐 위에 미나리를 차곡차곡 쌓았다. 거머리를 떼어낸 종아리에서 피가 줄줄 흘러내렸다. 반대쪽 종아리에도 같은 상처가 여럿 보였다. 여자는 미나리꽝에 거머리가 많다는 걸 알면서 아무것도 신지 않고 맨살을 드러낸 채 들어가 미나리를 캤다. 미나리를 캐는 동안 거머리가 들러붙어 피를 빨아도 미나리 캐는 데 정신이 팔려 알아차리지 못했다.


한참을 기다려도 장사꾼이 나타나지 않자 여자는 다시 빈 고무대야를 발로 툭툭 차며 걸었다. 이곳 미나리꽝은 여자가 태어나기 전부터 있었다. 어미도 이곳에서 태어나 평생 미나리만 캐다 재작년 봄 세상을 떴다. 당시 어미의 나이는 겨우 마흔다섯이었다. 일하고 들어와 으스스 춥다더니, 앓아눕고 한 달도 안 돼 숨을 거두었다. 마을 노인이 퉁퉁 부은 다리를 보고는 독충에 쏘였다며, 늪지에서 흘러들었을 수도 있으니 조심하라 했다. 그렇게 어미를 허망하게 떠나보내고 눈물 한 방울 흘리지 않았다. 다음날 마을에 가서 어미의 죽음을 알리자 칠십 넘은 영감들이 빈 수레를 끌고 와 싣고 갔다. 여자는 따라가지 않고 집 앞에서 죽은 어미를 싣고 가는 수레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얼마 안 있어 미나리꽝이 끝나는 지점에서 검은 연기가 피어올랐다. 미리 쌓아놓은 장작더미에 죽은 어미를 올려놓고 불을 붙인 것이다. 밤새 타고 남은 재는 누군가 삽으로 퍼서 미나리꽝에 뿌렸다. 아비는 얼굴이 어떻게 생겼는지 알지 못했다. 태어났을 때부터 곁에 없었기 때문에 굳이 알려고도 하지 않았고, 어미도 아비 이야기는 죽는 그 날까지 한 번도 하지 않았다.

 

고무대야에 미나리가 반쯤 찼을 때, 장사꾼이 드디어 모습을 드러냈다. 트럭이 멀리서 먼지를 날리며 달려오자, 여자는 하던 일을 멈추고 밖으로 나가 장사꾼을 맞았다. 오십 대 중반이라는데, 서리가 내려앉은 듯 머리가 허해 육십은 족히 넘어 보였다. 장사꾼은 차를 세우고는 담배부터 꺼내 물었다. 여자는 장사꾼을 힐끗 쳐다보고는 화물칸에 미나리를 차곡차곡 실었다.

 

“바쁠 것 없으니까 천천히 하게!”

 

잠깐만 거들어줘도 한결 수월할 텐데, 장사꾼은 담배만 뻐금뻐금 피우고 있을 뿐, 도와줄 생각이 전혀 없는 듯 보였다. 여자도 바라지 않는지 별말 않고 미나리를 옮겨 싣기 바빴다. 잔뜩 쌓아놓은 미나리가 조금씩 바닥을 드러내자, 그제야 차에서 내려 미나리가 제대로 잘 실렸나 살폈다. 생긴 건 보잘 것 하나 없는 여자지만, 손끝만큼은 흠 잡을 데 없이 야무졌다. 장사꾼은 포장을 펼쳐서 덮고, 지폐 몇 장을 빠르게 세서 건넸다.

 

“요즘 벌이가 시원찮아 이것밖에 못 주니까, 적다고 섭섭해하지는 말게!”

 

여자는 싫다 좋다 한마디 않고 있다가 장사꾼이 차에 타려고 돌아서자 팔을 붙잡아 지폐 한 장을 손에 쥐여 줬다. 다음번에 올 때 필요한 걸 사오라는 뜻이었다. 여자가 돈만 주면 장사꾼 스스로 알아서 필요한 걸 사다 주는데, 일할 때 입으라며 옷도 사다 주고 된장이나 고추장 같은 양념도 사다 줬다. 가끔 색깔 있는 속옷을 사와 넌지시 건네며, “밤에 이걸 입으면 잠이 잘 올 거야!” 하고 말했다. 하지만 여자는 속옷 따위에 관심도 없었다.

 

“뭐, 먹고 싶은 건 없고?”

 

여자는 돼지고기를 좋아했다. 일이 힘드니까 돼지고기로 떨어진 체력을 보충했다. 트럭이 시야에서 사라지자 주변을 대충 정리하고 집을 향해 걸었다. 찬바람이 불어와 얼굴을 스쳤다. 입춘이 지났다 해도 아침과 저녁때 부는 바람은 코끝이 시릴 정도로 차가웠다. 집까지는 걸어서 이십 분 정도 걸리며, 노인들이 사는 마을은 십오 분은 더 가야 나왔다. 어미가 있을 때는 가끔 마을에 가서 놀다 오곤 했는데, 어미가 죽은 뒤로는 그 많은 미나리를 혼자서 캐려니 바빠 거의 가지 못했다. 이제는 반대로 노인들이 수시로 찾아와 집 안을 발칵 뒤집어놓고 갔다. 노인들이 집 안을 샅샅이 뒤져서 가져가는 건 장사꾼한테 미나리를 팔고 받은 지폐인데, 눈이 침침해 앞이 잘 보이지 않는다면서 돈 냄새는 귀신같이 맡아 찾아갔다. 아무리 꼭꼭 숨겨놔도 찾아서 가져가니까 이제 노인들이 가져가든 말든 신경도 쓰지 않고 아무 데나 놓고 나왔다.

 

저 멀리 아카시아 나무가 보이고 그 옆에 조그만 판잣집이 한 채 서 있었다. 저곳이 여자의 집이었다. 조금 있으면 아카시아 가지에 새싹이 돋고 하얀 꽃이 피어 멀리서도 달콤한 향기를 맡을 수 있었다.



2

뜨거운 태양이 내리쬐는 황톳길을 사내 혼자 걸었다. 고개를 푹 숙이고 어깨를 늘어뜨린 채 걷고 있는 모습이 몹시 지쳐 보였다. 사내의 배낭에는 디지털카메라와 물병 그리고 복숭아향이 풍기는 사탕 한 봉지가 전부였다. 간식거리로 챙겨온 옥수수식빵은 이틀도 안 돼 다 떨어졌다. 사내가 걷고 있는 길은 최근 몇 달 동안 비다운 비가 한 번도 내리지 않아 거북 등껍질처럼 쩍쩍 금이 갔다. 이상기온 현상 때문인지 갈수록 봄 가뭄이 심한데, 올해 들어 유독 심해 바닥을 드러내지 않은 저수지가 없을 정도였다. 길가에는 잡풀이 듬성듬성 자라 있고, 잡풀 속에 숨어 있던 검은 벌레가 발소리에 놀라 도망쳤다. 바람이 조금만 세게 불어도 먼지가 일었다. 그늘이 있으면 발목도 아프고 목도 마르니까 잠깐 쉬었다 가면 좋겠는데, 옆으로 넓게 드리워진 나무는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하는 수 없이 풀밭에 푹석 주저앉아 이마에 흐르는 땀을 닦았다.

 

배낭 하나 달랑 메고 집을 떠나온 지도 오늘로 벌써 사흘째다. 첫날만 버스를 타고, 어제오늘 계속 걷기만 했다. 시골버스를 타고 가다 차창 밖으로 보이는 허허벌판을 문득 카메라에 담고 싶어, 운전석 쪽으로 비틀비틀 걸어가 여기서 내릴 테니 잠시만 멈춰달라고 했다. 버스 기사는 거울을 통해 뚫어지게 쳐다보고는 다음 정류장까지 꽤 먼데 괜찮겠냐고 물었다. 이렇게 길을 잃고 헤맬 거라고는 전혀 생각을 못 했던 터라, 사내는 괜찮다 말하고 서둘러 차에서 내렸다. 그는 곧장 나무 한 그루 보이지 않는 허허벌판을 향해 걸었다. 걷다 마음에 드는 풍경이 보이면 잠시 걸음을 멈추고 카메라를 꺼내 찍었다. 그렇게 정신없이 걷다 보니 어느새 날이 저물어 왔던 길로 부랴부랴 되돌아갔으나 버스에서 내렸던 곳을 찾을 수가 없었다. 어둠이 짙게 깔리고 졸음이 몰려와 그대로 길바닥에 드러누워 잠이 들었다. 다음날도 눈뜨자마자 땀을 뻘뻘 흘리며 길을 찾아 나섰으나 허사로 끝났다. 하루만 버스를 타고 어디쯤 갔다가 돌아올 생각이었으므로 먹을 것을 많이 챙겨오지도 않았다. 이럴 줄 알았으면 아껴 먹는 건데, 배가 몹시 고파 전날 식빵을 다 먹어버린 게 후회스러웠다.

 

더위가 조금은 가신 듯하자 사내는 다시 일어나 걸었다. 목이 마르고 허기지면 사탕을 하나 까서 입에 넣었다. 사흘 동안 씻지도 못하고 먼지를 뒤집어쓴 채 걷기만 해 몰골이 엉망진창이었다. 갈아입을 옷도 챙겨 오지 않아 몸에서 냄새가 났다. 맑은 냇물이라도 흐르면 옷을 벗어 빨아 입으면 좋겠는데, 작은 도랑조차 보이지 않았다. 날이 저물자 하늘이 점점 흐려졌다. 밤중에 빗줄기가 한차례 쏟아질 듯 보였다. 그때 근처에서 개 짖는 소리가 들렸다. 다리가 길고 꼬리가 없는 검은 개였다. 저 개는 어디에 있다가 갑자기 나타난 걸까. 개를 따라가 보기로 했다. 가다 보면 사람들이 사는 곳에 닿을지도 몰랐다.

 

사내는 개를 쫓아 있는 힘껏 달렸다. 그러나 오 분도 못 뛰고 멈춰 섰다. 지쳐서 한 걸음 내딛는 것조차 힘들었다. 날은 완전히 저물어 칠흑 같은 어둠이 주위를 덮었다. 개가 사라진 곳에 어렴풋이 이 층 건물이 보였다. 지붕은 폭격을 받은 듯 날아가 버렸고, 이 층은 형체만 겨우 남아 있었다. 사내는 망설이지 않고 곧장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검은 개가 먼저 들어온 것 같은데, 아무리 찾아봐도 보이지 않았다. 바닥에 널브러져 있는 깨진 콘크리트 조각을 발로 밀치고 자리를 잡았다. 잠을 자다 새벽에 추워 깰지 몰라 덮을 만한 게 있나 찾아보았지만, 헝겊쪼가리 하나 보이지 않았다. 낡은 모포라도 덮고 자면 한결 나을 텐데, 고맙게도 누가 가져다 놓았는지 바닥에 낡은 스티로폼이 깔려 있었다. 사내는 너무나 지치고 피곤해 스티로폼에 눕자마자 곧 곯아떨어졌다.

 

꿈에 도시가 불길에 휩싸이는 광경을 보았다. 고층 건물이 무너지고 여기저기서 불길이 치솟았다. 순간 화들짝 놀라 잠을 깼다. 어느새 어둠이 걷히고 날이 밝았다. 하늘은 흐릿했다. 사내는 일어나기 귀찮아 다시 눈을 감고 몸을 웅크렸다. 어디선가 물방울 떨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조금 전 봤던 광경이 뇌리에 스쳤다. 무너지는 건물더미에 사람들이 깔려 살려달라고 아우성쳤다. 그때 뒤에서 무언가 자박자박 걸어오는 소리가 들렸다. 더는 누워 있지 못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찬 데서 이불도 덮지 않고 자서 그런지 왼쪽 어깨가 결렸다. 어깨와 목을 빙글빙글 돌려 뭉친 근육을 풀고 주위를 살폈다. 옅은 안개가 건물 안으로 스며들었다. 그곳에 검은 개가 서 있었다. 전날 저녁 무렵 사내가 쫓았던 그 개였다. 내심 사나우면 어쩌나 걱정했는데, 으르렁거리지도 않고 보기보다 순했다. 밖에 나갔다 들어왔는지 검은 털이 축축이 젖어 있었다.

 

“너였니? 밤새 내 옆에 누워 있었던 게?”

 

새벽에 누군가 곁에 있다가 일어나 슬그머니 밖으로 나간 기억이 어렴풋이 났다. 꿈이려니 했는데, 녀석이었다. 덕분에 추운 줄 모르고 잤다. 사내는 젖은 머리를 쓰다듬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안개비라서 걷는 데는 지장이 없을 듯했다. 몇 달 동안 이어온 가뭄이 쉬이 끝나지 않을 것 같더니만, 하룻밤 사이에 딴 세상으로 변했다. 오늘은 이렇게 흐리다가도 내일은 또 어떻게 변할지 모르는 게 날씨였다. 하여튼 오늘도 어제처럼 먼 길을 걸어야 하는데, 뜨거운 태양을 내리쬐며 걷는 것보다는 나았다. 근처에 떨어져 있는 배낭을 찾아 메고 건물을 나섰다. 검은 개도 사내 뒤를 따랐다. 가야 할 길은 안개가 자욱해 한 치 앞도 보이지 않았다. 짙은 안갯속에 발을 잘못 들여놓았다가 영원히 길을 잃지 않을까 불안했다. 검은 개가 사내 마음을 헤아렸는지 앞장서서 걷기 시작했다. 사내는 한 발짝도 움직이지 못하고 불안한 눈으로 보고 있다가 검은 개를 따랐다. 며칠 동안 길을 잃고 헤맸더니 이제 어디로 가야 할지도 모르겠고, 안개까지 끼어 앞이 보이지 않으니 검은 개를 믿고 따르는 수밖에 달리 방법이 없었다.

 

검은 개를 따라 쉬지 않고 걸었다. 물기를 잔뜩 머금은 안개가 부는 바람에 따라 이리저리 휘날렸다. 안개에 가려 앞은 보이지 않고, 발목까지 차오른 물길을 걸으려니 몇 배는 더 힘들었다. 밤새 폭우가 쏟아진 것도 아닌데 물이 조금씩 불어나 어느새 무릎이 흠뻑 젖을 정도로 차올랐다. 여기서 멈추지 않고 계속 차오르면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모르니 단념하고 돌아서야 했다. 다행히 무릎까지만 차고 더는 차오르지 않았다. 무거워진 등산화 때문에 걷기 힘들어 차라리 벗고 맨발로 걸을까 하다가, 깨진 유리조각이라도 밟으면 치명적이라 그냥 참고 걸었다.

 

쉬지 않고 한참을 걸었는데, 검은 개는 지치지도 않는 모양이었다. 사내는 다리가 풀려 한 발짝도 걷기 싫었다. 아무 데나 앉아 조금만 쉬었다 가면 좋겠는데, 사방이 온통 물에 잠겨 있으니 그럴 수도 없었다. 물병을 꺼내 한 모금 겨우 남은 물을 마저 다 마시고, 주변을 둘러보았다. 사방이 온통 습지식물 천지였다. 토란잎 비슷하게 생긴 식물의 넓은 잎사귀에는 달팽이가 들러붙어 느릿느릿 기어 다니고, 새까만 물잠자리가 습지식물 사이를 팔랑팔랑 날았다. 사내는 눈앞에 펼쳐진 광경이 도무지 믿기지 않았다. 생각지도 못한 광경이라 전혀 다른 세상에 들어와 있는 느낌이었다.

 

“이건 현시가 아니야! 꿈이야!”

 

사내는 정신을 차리고 검은 개를 찾았다. 검은 개는 저만치 서 있다가 근처에서 사람 소리가 들리자 첨벙첨벙 뛰어갔다. 저 멀리 희미하게 사람들 형체가 눈에 띄었다. 네 명의 남자가 이쪽으로 걸어오고 있었다. 이곳에서 사람을 만나리라고는 생각도 못했던 터라 너무나 기뻤다. 허기져 쓰러지기 일보 직전인데, 밥 한 끼 정도는 얻어먹을 수 있지 않을까 싶었다.

 

이곳 늪지에는 다른 곳에서는 흔히 볼 수 없는 식물이 많았다. 지금 사내가 보고 있는 식물은 파리지옥이라는 식충식물인데, 신기하게 생긴 식물을 보고 그냥 지나칠 수가 없어 배낭을 열고 디지털카메라를 꺼내 들었다. 마침맞게 딱정벌레 한 마리가 날아와 파리지옥 주위를 맴돌았다. 속이 울긋불긋한 포충낭이 주둥이를 활짝 벌리고 딱정벌레를 유혹했다. 저곳에 빠지면 어떤 곤충도 쉽게 빠져나오지 못했다. 순간 딱정벌레가 포충낭 안으로 들어가 끈끈이액에 들러붙었다. 이제 아무리 발버둥 쳐봐야 소용없었다. 사내는 카메라 뷰파인더에 눈을 바짝 대고 포충낭 안에서 허우적거리는 딱정벌레를 찍었다.

 

그 사이에 사람들이 얼굴을 알아볼 수 있는 거리까지 다가와 걸음을 멈추었다. 네 명 다 머리가 허연 노인이었다. 저들은 얼굴을 맞대고 소곤소곤 귓속말을 주고받았다. 사내는 카메라를 배낭에 넣고 노인들이 있는 곳으로 가려다 멈칫했다. 방금 가랑이 사이로 꾸불꾸불 헤엄치며 지나간 짐승은 늪지에 사는 물뱀이었다. 물뱀이 물풀 사이로 꼬리를 감춰 보이지 않자 그제야 안심하고 걸었다. 노인들은 그때까지 심각하게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가 사내가 가까이 다가오자 일제히 고개를 돌렸다. 낯선 사람을 경계하는 눈초리가 역력했다. 사내가 걸음을 멈추고 안녕하세요! 하고 인사를 하자, 노인들이 뒤도 돌아보지 않고 왔던 길로 돌아갔다. 잠깐만요! 하고 소리를 질러도 소용없었다. 노인들이 아무 말도 않고 가버리자 사내는 너무나 황당해 할 말을 잃었다. 자신이 큰 실수라도 했으면 이해하겠는데, 보자마자 아무 말도 않고 가버리면 어쩌란 말인가. 사내는 뒤쫓지도 못하고 멀어져 가는 노인들을 보고만 있었다. 지쳐서 빨리 걸을 수도 없을뿐더러, 물길에 익숙한 노인들을 따라잡는다는 건 어림도 없었다. 노인들은 천천히 걷는 것 같은데, 눈 깜짝할 사이에 저만치 걸어갔다. 보통 사람들이 평지를 걷는 것보다 더 빨랐다. 노인들이 시야에서 사라져버리자 허탈감이 물밀 듯 밀려들었다.

 

사내는 한숨을 내쉬고 물끄러미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먹구름이 잔뜩 끼어 한낮인데도 어두컴컴했다. 더 어두워지기 전에 빨리 이곳을 벗어나야 하는데, 물풀 사이로 사라진 물뱀이 또 언제 다시 나타날지도 모르고, 물 위에서 밤을 맞이하는 건 생각만 해도 끔찍했다. 조금 전까지 주변에 있던 검은 개도 노인들을 따라가 버렸는지 보이지 않았다. 상황이 이보다 더 나쁠 수는 없지만, 그래도 희망을 잃지 않고 노인들이 사라졌던 곳을 향해 걸었다. 마을은 분명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었다.



3

여자는 고무대야가 옆으로 쓰러지지 않게끔 양쪽 귀퉁이를 붙잡고 조심조심 밀며 밖으로 나왔다. 먹구름이 잔뜩 끼어 있으니 불안감이 일어, 일하면서 자꾸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날씨도 좋지 않고 미나리도 평소만큼은 캤으니, 더는 욕심부리지 말고 들어가 쉬기로 했다. 무리해 일하다 감기라도 걸리면 자신만 손해였다. 그녀가 하루도 쉬지 않고 나와서 일을 하는 건 미나리 캐는 일 말고는 딱히 할 일이 없기도 하지만, 힘겹게 일궈서 물려준 어미를 생각하면 하루가 다르게 쭉쭉 자라는 미나리를 보고 나 몰라라 할 수가 없었다. 미나리를 캐면 시간도 잘 가고 잡생각도 들지 않았다. 가끔 장사꾼이 자기 사는 곳은 볼거리도 많고 먹을거리도 많아 심심할 겨를이 없다며, 자기와 함께 도시에 나가 살자고 꼬드겼다. 일이 힘들고 외로워 장사꾼을 따라가 살고 싶은 마음이 전혀 없지는 않으나, 미나리꽝이 늪지로 변해버릴 걸 생각하니 도저히 그럴 수가 없었다.

 

미나리꽝 너머는 안개가 자욱하고 이름도 희한한 습지식물로 뒤덮여 들어가기가 무서웠다. 노인들은 발을 잘못 들여놓았다가는 길을 잃고 헤매기 쉬우니 근처도 얼씬하지 말라고 했다. 습지식물은 생명력이 강해 척박한 땅에서도 잘 자라는데, 미나리꽝도 일 년만 돌보지 않으면 삽시간에 퍼져 습지식물로 뒤덮이고 말았다. 장사꾼은 미나리꽝이 습지식물로 뒤덮이든 말든 무슨 상관이냐고 했지만, 습지식물로 뒤덮인다는 건 미나리꽝이 늪지로 변한다는 뜻이며, 마을 대부분을 차지하는 미나리꽝이 늪지로 변하면 노인들도 삶의 터전을 잃고 모두 이곳을 떠나야 했다. 그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알기에 그녀가 미나리꽝을 버리고 떠나지 못하도록 노인들이 집에 있는 돈도 샅샅이 뒤져서 가져갔다. 또한, 노인들은 수시로 늪지에 들어가 습지식물을 살폈다. 어제도 노인 네 명이 늪지에 들어갔다 나오는 걸 봤는데, 습지식물이 어디까지 침범해 들어왔나 살피고는 그 사실을 마을 사람들한테 알렸다. 아직은 멀리 떨어져 있어 별다른 움직임이 보이지 않으나, 습지식물이 경계선을 조금만 넘어도 마을 사람들이 단체로 몰려가 뽑아 없앴다. 그래도 그들이 안심하고 지낼 수 있는 건 그녀가 미나리꽝을 든든하게 지켜주는 덕분이었다.

 

그때 미나리꽝에서 소리가 들렸다. 여자는 소리를 듣고 고개를 돌렸다. 검은 개 한 마리가 멀찍이 떨어져 멀뚱멀뚱 쳐다보고 있었다. 늪지에 검은 개가 산다는 말은 자주 들었으나, 두 눈으로 보기는 오늘이 처음이었다. 여자는 작은 돌을 집어 검은 개를 향해 던졌다. 달려들어 물지도 모르니 내쫓으려는 심산이었다. 하지만 검은 개는 제자리에 서서 꼼짝도 하지 않았다. 보통 개라면 돌멩이를 던지기 전에 미리 알고 도망쳤을 것이다. 순간 검은 개가 무언가 알리려고 오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검은 개가 알리려는 게 도대체 뭘까. 머리를 늪지 쪽으로 향하고 있는 것이 어쩌면 자기를 따라오라는 것 같기도 했다. 여자는 어떻게 해야 하나 망설이다 검은 개를 따라가 보기로 했다. 태어나 한 번도 들어가 보지 않아 늪지가 어떻게 생겼나 궁금한데, 한 시간 후면 날이 저물 듯하니 그 전에 나와야 했다.

 

여자가 미나리꽝에 발을 들여놓자 그제야 검은 개가 돌아서서 걸었다. 서두르는 것이 빨리 따라오라는 것 같았다. 늪지에 무슨 일이 벌어졌기에 저리도 서두르는 걸까. 검은 개가 서두르니까 덩달아 그녀의 발도 빨라졌다. 발이 푹푹 빠지는 미나리꽝을 하루에만 수십 번 넘게 드나들다 보니 다리에 힘이 붙어, 검은 개를 뒤쫓는 것쯤은 아무것도 아니었다. 정신없이 뒤쫓아 들어가, 어느새 미나리꽝과 늪지가 경계를 이루는 곳에 이르렀다. 맨 먼저 미나리꽝과 늪지 사이에 둘러쳐진 그물망이 눈에 들어왔다. 십 년 전, 습지식물이 침범하지 못하도록 어미가 마을에 가서 노인 몇 명을 데려와 함께 쳤다. 이제 삭아서 떨어진 곳이 많아 걷어내고 새것을 사다가 쳐야 하는데, 미나리꽝이 워낙 넓다 보니 혼자서는 엄두가 나지 않았다. 여자는 잠시 걸음을 멈추고, 그물망을 훌쩍 뛰어넘어 걸어가는 검은 개를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안개가 자욱하고 자신이 서 있는 곳보다 훨씬 어두웠다. 여기까지 따라오기는 했으나, 막상 늪지에 발을 들여놓으려니 망설여졌다. 그물망을 넘는 순간 무서운 일이 벌어질 것만 같았다. 그래도 여기까지 왔으니 한번 들어가 보기로 했다. 지금껏 한 번도 찾아오지 않은 검은 개가 일부러 찾아와 이곳까지 이끌었을 때는 분명 그만한 이유가 있었다.

 

여자는 용기를 내 늪지에 한 발을 내디뎠다. 미나리꽝보다 약간 차갑다는 느낌만 들뿐 우려했던 일은 벌어지지 않았다. 지금부터는 다양한 습지식물을 헤치고 지나야 하는데, 어떤 것은 잎사귀 끝이 날카로워 살짝 스치기만 해도 종아리가 쓰라렸다. 익숙지 않은 곳이다 보니 조심스러워 걸음걸이도 미나리꽝을 걸을 때보다 느렸다. 검은 개도 그녀가 느리다는 걸 알고 잠시 걸음을 멈췄다가 다시 걸었다. 이제 안개에 가려 미나리꽝은 보이지 않고, 이름 모르는 습지식물만 보였다. 여자는 돌아 나올 때를 생각해 한 발 한 발 내디딜 때마다 두 눈을 크게 뜨고 주위를 살폈다. 아무 생각 없이 걷다가는 길을 잃고 헤매다 영원히 빠져나오지 못하고 죽고 말 것이다. 노인네들이 왜 늪지에 들어가지 말라고 했는지 이제야 알 것 같았다. 이곳은 발을 잘못 들여놓았다가 목숨을 잃고 마는 죽음의 세계였다.

 

저기 무언가 보였다. 습지식물에 가려 잘 보이지는 않지만, 검은 개가 서 있고 그 옆에 누군가 쓰러져 있었다. 여자는 걸음걸이를 빨리해 검은 개가 서 있은 곳으로 갔다. 젊은 남자가 죽을 듯 누워 있었다. 밑에 습지식물이 깔려 있어 물속에 잠기지는 않았다. 숨을 내쉬는 것이 살아 있는 건 분명한데, 정신을 잃고 쓰러지는 순간 상체가 물속에 잠겼다면 숨 막혀 죽었을지도 몰랐다. 여자는 머리 쪽으로 가서 배낭 멜빵을 붙잡고 끌었다. 사내가 왜 여기에 쓰러져 있고 어디서 왔는지 궁금한데, 그건 나중 일이고 지금은 서둘러 집으로 데려가야 했다. 검은 개도 멀찍이 떨어져 뒤를 따랐다. 자신의 목숨을 살린 게 저 검은 개라는 걸 사내가 알려나 몰랐다. 검은 개는 그물망 있는 곳까지 종종걸음으로 따라와, 두 사람이 그물망을 지나쳐 가자 이내 돌아서서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다음날 장사꾼이 미나리를 싣고 떠나려고 하자, 손가락 열 개를 펼쳐 보이고는 아픈 시늉을 하며 열흘 후에 오라 했다. 전날 집으로 데려온 남자가 오후 늦게까지 깨어나지 않아 며칠은 아무 데도 가지 말고 곁에서 지켜봐야 했다. 그러자면 미나리 캐는 일을 당분간 그만둘 수밖에 없었다. 장사꾼은 지금껏 한 번도 없던 일이라 의아했지만, 봄바람이 솔솔 불어오니 일할 마음이 사라져 그러는 모양이다 생각하고 까닭을 굳이 묻지 않았다.

 

“많이 아프면 내가 약이라도 한 첩 지어다 줄까?”

 

장사꾼이 값을 치르고는 걱정스러운 눈으로 표정을 살폈다. 여자는 그럴 필요 없다는 듯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장사꾼이 건네준 지폐를 꽉 움켜쥐었다.

 

“그럼 열흘 후에 봄세!”

 

장사꾼은 시동을 걸고 곧 미나리꽝을 떠났다. 여자는 그 길로 집으로 달려가 사내가 깨어났나 보았다. 아직도 이불 속에 잠들어 있었다. 먹어야 기운을 차릴 테니 죽이라도 쒀서 주고 싶은데, 지금 봐서는 금방 깨어날 것 같지 않았다. 곧 어두워질 듯 보여 등잔에 불을 붙이고 밖으로 나왔다. 우물가에 서 있는 아카시아가 눈에 들어왔다. 가지마다 맺혀 있는 봉오리가 며칠 안 있으면 활짝 필 듯한데, 그 전에 사내가 깨어났으면 했다. 여자는 아카시아 꽃이 피는 이맘때가 가장 좋았다. 달콤한 향기를 내뿜는 꽃이 활짝 피면 어찌나 아름다운지 몰랐다. 사내도 만개한 꽃을 보면 분명 좋아할 것이었다.

 

잠시 후 세상이 온통 어둠에 잠겼다. 그때 방 안에서 인기척이 들렸다. 사내가 깨어난 모양이었다. 여자의 얼굴이 이내 화색이 돌았다. 사내가 여자를 보자마자 한 소리는 “배가 고프니까 밥 좀 줘요.”였다. 여자는 배가 고프다는 소리를 듣고 부리나케 뛰어 나가 있는 반찬으로 간단히 밥상을 차려왔다. 진수성찬은 아니지만 구수한 냄새가 구미를 당겼다. 사내는 밥상을 빼앗듯 받아들고는 밥 한 그릇을 후딱 비웠다. 여자는 먹는 모습만 봐도 흐뭇했다. 어미가 죽은 뒤로 누군가 집에서 밥을 먹기는 처음이었다.

 

“혹시 내 배낭 못 봤나요?”

 

여자는 사내가 무슨 말 하는지 몰라 눈만 크게 떴다.

 

“아! 저기 있네요.”

 

배낭은 바람벽에 걸려 있었다. 배낭 안에 흥건히 고여 있던 물은 다 뺐으나, 햇볕에 말리는 걸 깜박해 축축했다. 여자는 사내가 배낭을 열고 카메라를 꺼내 만지작거리는 모습을 호기심 어린 눈으로 지켜보았다.

 

“물이 스며들어 망가졌나 봐요. 작동이 멈춰버렸어요.”

 

사내는 망가진 카메라를 바닥에 놓고 사탕 봉지를 꺼냈다. 사탕은 한 알 한 알 진공포장이라 하나도 젖지 않았다.

 

“이것 하나 먹어봐요.”

 

여자는 사내가 건네준 사탕을 입에 넣어 쪽쪽 빨았다. 달콤한 복숭아향이 입 안 가득 퍼졌다.

 

“피곤하니까 저 먼저 누울게요. 자세한 이야기는 내일 아침에 해요.”

 

사내는 드러눕기가 무섭게 잠이 들었다. 여자는 입 안에 든 사탕이 다 녹아 없어질 때까지 앉아 꼼짝도 하지 않았다.



4

사내와 함께 지낸 지도 벌써 열흘이 지났다. 사내가 건강을 회복해 활동을 시작하자, 여자는 평소와 다름없이 미나리꽝에 가서 미나리를 캐고 해가 지면 지친 몸으로 돌아왔다. 열흘 후에 오라고 했으니 장사꾼이 오늘은 반드시 미나리를 가지러 올 것이었다. 그래서 서두르는데, 마음만 바빴지 일이 좀체 손에 잡히지 않았다. 그건 간밤에 사내가 했던 말 때문이었다. 그동안 고마웠다며, 이곳을 떠날 뜻을 비쳤다. 갑자기 사내가 떠난다고 하니까 마음이 심란해 간밤에 한숨도 못 잤다. 언젠가 떠날 줄은 알고 있었지만, 이렇게 빨리 찾아올 줄은 정말 몰랐다. 사내가 떠나고 나면 다시 예전으로 돌아가 혼자서 밤을 지새워야 하는데, 긴긴밤을 무슨 낙으로 보내야 할지 눈앞이 캄캄했다. 사내와 함께 보낸 열흘 동안 곁에서 자는 모습만 봐도 즐거웠다. 내일이라도 떠나고 나면 그런 날은 다시는 없을 것이었다. 생각하면 가슴만 아프니, 사내는 잠시 잊고 미나리 캐는 일에 열중했다.

 

장사꾼은 제시간에 맞춰 나타났다. 다른 때보다 훨씬 적게 캤는데도 아무 소리도 않는 것이 그 이유를 대충은 아는 듯했다.

 

“조금 전 집 앞을 지나쳐 오는데, 우물가에 젊은 남자가 서 있더군.”

 

여자가 허리를 숙이고 종아리를 긁자, 장사꾼이 유심히 보고 있다가 눈살을 찌푸리며 한마디 했다. 여자는 입을 굳게 다물고 양쪽 종아리를 번갈아가며 더욱더 세게 긁었다. 가려워도 참아야 하는데, 더러운 손톱으로 긁어대니 상처가 덧났다. 벌겋게 달아오른 상처가 결국 터져 잠시 멎었던 피가 다시 새어나왔다.

 

“마침 저기 오는군.”

 

그제야 여자도 허리를 펴고 고개를 돌렸다. 사내가 손을 흔들며 천천히 걸어왔다. 장사꾼한테 이곳을 빠져나가는 길을 물으러 오는 게 분명했다. 여자는 이야기 나누는 모습을 보고 싶지 않아 고무대야를 챙겨 들고 집으로 향했다.

 

“정말 늪지를 지나쳐 왔단 말이오?”

 

장사꾼은 사내가 늪지를 지나쳐 왔다는 소리를 듣고 눈을 휘둥그레 떴다. 여자의 도움이 없었다면 이미 저세상으로 떠났을지도 모르지만, 한번 들어가면 살아서 나오기 힘들다는 늪지를 어느 곳 하나 다치지 않고 무사히 빠져나왔다는 게 믿기지 않았다. 장사꾼이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하자 사내가 빙그레 웃으며 “운이 좋았나 보죠.” 하고 말했다.

 

“도무지 믿기지 않는데, 그렇다면 당신이 떠나온 도시 이름이 뭐요?”

 

사내가 도시 이름을 말하자 장사꾼이 고개를 갸우뚱하더니, 자신이 아는 도시 중에는 그런 이름을 가진 도시가 없다고 했다. 사내는 즉각 이름만 대면 누구나 다 아는 도시인데, 어떻게 모를 수 있느냐고 반문했다. 그러면서 당신이 사는 도시에 전화기는 있을 것 아니냐고 물었다. 여긴 전기조차 들어오지 않아, 자신이 살아 있다는 소식을 전하고 싶어도 연락할 방법이 없으니 막막했다.

 

“도시에 전화기가 왜 없겠소. 그런데 왜 물으시오?”

“그럼 가서 이곳으로 전화 좀 걸어줘요.”

 

사내가 내민 쪽지에 전화번호가 적혀 있었다.

 

“내가 모시는 신부님인데, 전화 걸어서 이곳 위치를 말하면 분명 데리러 올 거예요.”

 

장사꾼이 알았다 말하고 트럭에 올라타, “올지 안 알지 그건 장담할 수 없으나, 가서 통화는 해보리라.”는 말을 남기고 떠났다. 사내는 먼지를 날리며 가는 트럭을 보며 “분명 데리러 올 거야!” 하고 혼잣말을 했다. 처음 며칠 동안은 아무것도 안 하고 여자가 주는 대로 받아먹기만 하니까 좋았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닷새가 지나니까 슬슬 지루해지기 시작했다. 몸무게도 여기 와서 이삼 킬로는 더 늘지 않았나 싶은데, 하는 일 없이 빈둥빈둥 노는 것도 못할 짓이었다. 며칠만 더 기다려보고 신부님이 데리러 오지 않으면 혼자서라도 떠날 생각이었다.

 

그날 이후 사흘이 지났다. 손꼽아 기다리는 신부님은 오지도 않고, 이틀에 한 번꼴로 미나리를 가지러 온다는 장사꾼도 그날 가서 죽었는지 살았는지 깜깜무소식이었다. 날이 저물어 오늘도 오지 않을 모양이군! 하고 체념하고 있는데, 백발의 노인이 불쑥 들어와 오늘 낮에 누군가 마을에 찾아와 주고 갔다며 쪽지를 건넸다. 마을에 사는 노인들은 여전히 인사를 해도 받지 않고 빨리 떠났으면 하는 눈치였다. 쪽지를 받아든 사내는 고맙다 말하고 얼른 쪽지를 펼쳐 보았다. 쪽지에 ‘요즘 일이 바빠 직접 가지 못하고, 마침 마을에 들어가는 사람이 있어 대신 보내오. 신부님이라는 사람과 어제 통화했는데, 내일 정오경에 당신을 데리러 올 거요.’라고 적혀 있었다. 사내는 펄쩍 뛰며 방문을 열고 들어가 그 사실을 여자한테 알렸다. 여자는 아무 내색도 않고 있다가 슬그머니 드러누워 눈을 감았다. 그런 여자의 모습이 미안해 아무 말도 못 하고 밖으로 나왔다. 며칠 사이에 아카시아 꽃이 활짝 피었다. 낮에도 향기가 진한데, 밤에는 더욱더 진했다.

 

다음날 날이 밝아 일어나 보니 여자는 미나리를 캐러 갔는지 보이지 않았다. 사내는 방문 앞에 차려져 있는 밥상을 힐끗 쳐다보고는 곧장 밖으로 나갔다. 그토록 기다리던 그 날이 오늘이라고 생각하니까 설레어 밥상을 봐도 먹고 싶은 마음이 없었다. 이곳을 떠나면 다시는 못 올 듯하니, 기억에 오래 남을 만한 것 하나를 가지고 떠났으면 했다. 그때 눈에 들어온 게 하얗게 핀 아카시아 꽃이었다. 사내는 우물가에 놓인 의자를 딛고 올라서서 한 아름 꺾었다. 달콤한 향기를 맡으며 마당을 거닐다 마루에 걸터앉아 신부님이 무얼 타고 올까 생각했다. 성당에 소형버스가 있으니까 그걸 타고 올지도 몰랐다.

 

얼마 지나지 않아 난데없이 하늘에서 헬리콥터 소리가 들렸다. 승용차나 소형버스를 타고 데리러 올 줄 알았는데, 헬리콥터를 타고 올 줄이야. 사내는 자신의 모습이 잘 보이게끔 공터로 뛰쳐나가 손을 흔들었다. 헬리콥터가 마을을 한 바퀴 빙 돌아 사내를 발견하고 서서히 밑으로 내려왔다. 강한 바람이 몰아쳐 판잣집 양철지붕이 들썩거리고, 하얀 꽃잎이 떨어져 일제히 날아올랐다. 바람을 타고 멀리멀리 날아가는 장면이 마치 눈송이가 날리는 것처럼 보였다. 사내는 가슴에 안은 아카시아 꽃이 떨어지지 않게끔 머리를 숙이고 달려가, 건장한 경찰관 도움을 받아 훌쩍 올라탔다. 여자한테 제대로 인사도 못하고 떠나려니 마음에 걸렸다. 곧 문이 닫히고 헬리콥터가 높이 날아올랐다.

 

미나리꽝에서 미나리를 캐는 여자가 눈에 들어왔다. 한 손에는 미나리를 다른 손에는 낫을 들었다. 여자는 난생처음 듣는 헬리콥터 소리에 놀라 황급히 고개를 들었다. 머리 위로 날아가는 헬리콥터가 거대한 괴물로 보였다. 무서워 고개를 옆으로 돌리니 바람을 타고 날아온 아카시아 꽃이 머리 위로 떨어졌다. 여자는 머리에 내려앉은 꽃잎을 집어 입에 넣고 오물오물 씹었다. 그새 헬리콥터는 미나리꽝을 지나 늪지 위를 날았다. 짙은 안개에 가려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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