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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 장산범

2015.08.02 12:2008.02

작년 여름에 있었던 일이다. 무료하게 방학을 보내고 있었던 나는 피부병 치료라는 명목으로 시골 할머니 댁에 보내졌다. 너무 급작스럽게 벌어진 일이라 거부 의사를 표시할 겨를도 없었다.

이곳은 정말 작은 마을이었다. 할머니 댁에서 가장 가까운 이웃도 200M는 떨어져 있었다. 다른 집들도 마찬가지였다. 마을 내의 집들은 모두 띄엄띄엄 지어져 있는 게, 꼭 옹기종기 모여 사는 나의 시골 이미지와는 대조돼 보였다. 그런 나의 마음을 읽었는지 할머니가 다가왔다.

"민수야.. 해줄 얘기가 있구나."

그러곤 할머니는 장산범에 대한 얘기를 해주셨다. 이 마을엔 장산범이 사는데, 사람들이 뭉쳐있는 걸 싫어한단다. 그래서 회관에도 잘 안 가신다고.

처음엔 허무맹랑한 소리로 들렸다. 오래된 시골엔 케케묵은 전설이 하나씩 있잖은가. 그러나 나의 두 손을 꼭 잡고 말씀하시는 할머니의 태도에선 거짓성이라곤 찾아볼 수 없었다. 잠시 후 할머니는 장산범의 모습을 묘사해주셨다. 비단같이 곱고 흰 털로 온몸을 감싸고 있는데, 그것이 사람 흉내를 내고 다닌다고 한다. 때마침 마을을 둘러싸고 있는 첩첩산중이 시야에 들어왔다. 거기서 느껴지는 경외감은 전설의 진실성을 보증해주는 것 같았다. 

며칠간은 지루함을 달래기 위해 휴대폰 게임을 했다. 전파가 안 터져서 신문물로 할 수 있는 거라곤 그것뿐이었다. 그것마저 질려버리면 복순이와 놀곤 했다. 할머니는 개를 키우셨다. 복순이라는 푸근한 이름을 가진 녀석이지만, 사실 덩치가 산만한 진돗개이다. 말을 척척 알아듣는 게 똘똘한 녀석인 듯하다. 그런데 복순은 잘 놀다가도 간헐적으로 아무도 없는 인삼밭을 바라보며 짖어댔다. 인삼밭은 상당한 규모였는데, 그 밭을 따라 도로가 길게 뻗어있었다. 나는 최근에 바른 도로라서 냄새가 나는 것일 거라고 생각했다.

땡볕이 쬐는 날이었다. 도저히 무언가를 할 힘이 생기지 않았다. 나는 잠시 눈을 붙일 요량으로 마루에 누웠다. 마루엔 그늘이 져있어서 그나마 시원했다.


"으으.."

마루에서 굴러떨어지는 바람에 눈을 떴다. 잠시 눈을 붙인다는 것이, 벌써 해가 저물어 있었다. 그러나 다행히도 낙하의 충격은 적었다.

마루에서는 바로 개집을 볼 수 있는 구조였다. 시야가 어둠에 적응되는 것을 기다리며, 어둠 속을 면밀히 관찰했다. 곧 나는 자기 집 안에서 웅크리고 있는 복순을 볼 수 있었다. 더 자세히 보니 복순이는 떨고 있었다.

"복순아 왜 그러니?"

평소 같았으면 쾌활하게 달려들었을 녀석이다. 그러나 이번엔 미동도 없었다. 오히려 나보고 가만히 있으라는 듯한 눈빛이었다.

'어디 아픈가?'

순간 복순이가 옥수수를 엄청 좋아한다는 할머니 말씀이 떠올랐다. 인삼밭이 끝나는 지점부터는 옥수수밭이었는데, 도보로 30분 정도의 거리다. 내려앉은 음영을 보니 오밤중은 아닌 것 같았다. 나는 생각했던 것을 바로 실행에 옮겼다.

마당을 벗어나자 탁 트인 인삼밭이 눈에 들어왔다. 밤중에 보는 인삼밭은 조금은 괴기스러웠다. 다행히 도로에는 가로등이 점점이 있어서 그나마 안심이 됐다. 나는 가로등과 달빛에 의지해 꾸준히 걸어나갔다.

아스팔트길 위는 지나치게 한적했다. 고개를 조금만 틀면 산과 개울이 나왔다. 이쯤이면 거의 다 왔다고 생각했을 때쯤 멈춰 서서 밭을 바라보았다. 아직도 인삼밭이었다. 조금만 더 가면 나오겠지.라는 생각으로 마음을 진정시키고 있는데 인삼밭에 우두커니 서있는 무언가가 눈에 들어왔다. 

그것과는 50M 정도를 사이에 두고 있었는데 도저히 나무로는 보이지 않았다. 처음엔 마치 흰색 한복을 입은 사람으로 보였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나는 그것이 무엇인지 금방 깨달았다. 

그것은 흰색 털로 온몸을 감싼 채 두 발로 서 있었다. 할머니가 묘사해준 장산범과 정확하게 일치했다. 나는 못 본 척하기로 하고 빠르게 걷기 시작했다. 온갖 생각이 들기 시작한다. 몇 분쯤 걷다가 다시 돌아봐도 그것과의 거리는 하나도 벌어지지 않아 있었다. 오히려 좁혀진 것 같다. 순간 달빛에 구름이 걷히고 녀석의 모습이 제대로 눈에 들어왔다. 

그것이 어기적어기적 걷고 있는 게, 마치 4족 보행 생물이 억지로 걸어 다니는 모습과 흡사했다. 순간 전신에 소름이 돋았다. 나는 이대론 안 되겠다 싶어 전속력으로 달음박질쳤다. 조금만 더 가면 구멍가게가 나올 터인데, 그것에 모든 것을 걸어보기로 했다.


"헉.. 헉.. 헉.."

죽을힘을 다해 전력질주했다. 평소 같았으면 일찌감치 주저앉았을 텐데 위급한 상황이 오니 배는 더 빠르게 뛴 것 같다. 가빠오는 숨을 뒤로하고 뒤편을 바라보았다. 이윽고 나는 모든 것을 포기하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녀석과의 거리는 그대로였다. 녀석이 일부러 나와의 속도를 맞추고 있는 것이다. 나의 다리는 이제 포기한 듯 주저앉았다. 녀석이 다가오는 소리가 점점 커질수록 나의 심장은 더욱 심하게 요동친다. 나는 눈을 질끈 감았다. 

그렇게 몇 분쯤 지났을까, 탁구공 같은 게 데룩데룩 굴러가는 소리에 실눈을 떠보았다. 순간 나는 소스라치게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놈은 검은자위밖에 없는 눈을 이리저리 굴리고 있었다.

이상한 점은 그뿐만이 아니었다. 녀석은 네 발로 내 주의를 빙빙 돌고 있었는데, 사지를 길게 늘어트리고 기어 다니는 꼴이 마치 수풀의 거미나 갯벌의 게 따위가 걸어 다니는 듯한 모양새였다.

가끔 너무나도 힘들 때면 죽고 싶다는 생각이 들긴 했지만, 실제로 이런 상황이 닥치니 미치도록 살고 싶어졌다. 누구라도 좋으니 1초가 1년 같은 이곳에서 나 좀 빼내줬으면 좋겠다. 
극도의 공포감에 점점 정신이 혼미해진다.

"학생! 이리로 빠져나와!"

누군가의 절규를 마지막으로 나는 정신을 잃었다.


"학생. 학생 여기서 자면 귀신이 잡아가"

나는 귀신이라는 말에 벌떡 일어났다. 동시에 백광의 빛이 나를 매섭게 덮쳐왔다.

"으..윽.. 제발 살려줘!"

나는 방어자세를 한 채 눈을 질끈 감았다. 그런데 왠지 무언가가 이상하게 느껴졌다. 새들의 지저귐, 개울의 속삭임, 공기의 상쾌함. 모든 것이 평화로웠다. 나는 용기를 쥐어짜 살며시 눈을 열었다.

"이.. 이장님?"

내 앞에는 이장님이 나를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바라보며 서있었다. 뜨겁게 내리쬐는 태양을 보니 대낮인 것 같다. 어지간히도 정신을 잃었었나 보다. 이장님의 한 손에는 곡괭이를 들려져 있었다. 아마 밭일을 하시다 도로에 쓰러져있는 나를 발견하신 것 같다. 이장님의 인자한 미소를 보니 왈칵 눈물이 쏟아지려는 것을 가까스로 참았다.

"이.. 이장님!"

이장님 품에 안기려는 순간, 나는 무엇인가 잘못되었음을 느꼈다. 이장님이 들고 있는 곡괭이엔 피가 묻어 있었고 응고된 듯한 피에는 하얀 털 몇 가닥이 달라붙어 있었다.

"이게 어떻게 된 일.."

말을 끝맺으려는 순간 탁구공이 굴러가는 듯한 소리가 귓등을 가격했다. 데룩데룩 소름끼치는 이 소리는 내 몸의 모든 세포가 기억한다. 다시 이장님의 얼굴을 보니 심하게 뒤틀려 있었다. 힘에 의해 강제로 안면 전체가 떼어내진 듯해 보였다. 내 다리는 무의식적으로 뒷걸음질쳤다. 잠시 후 나는 내 귀를 의심할 수밖에 없었다. 이장님이 내게 어기적어기적 다가오며 입으로는 냇물 소리를 흉내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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