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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 순례길

2015.08.04 16:0808.04



여러분, 여기부터 성녀의 정원입니다. 잠시 쉬어가도록 하죠.”

델커스는 허리를 펴고 뒤를 돌아보며 말했다. 일주간의 훈련을 거쳤지만 순례자들은 수 없이 산을 오르내린 성직자들에 비해 뒤쳐질 수밖에 없었다. 쉬어가겠다는 말에 십 수 명의 순례자들은 쓰러지다시피 바위나 흙바닥에 몸을 뉘었다. 저 아래 뒤쳐진 몇 명의 순례자들은 가파른 산길을 아직도 기다시피 올라오고 있었다. 델커스는 커다란 지팡이로 땅을 짚고 순례자들의 안색을 살피며 숨을 골랐다. 새벽에 신성도시 아네스를 출발하여 이곳에 도착하기까지 꼬박 열두 시간이 걸렸다. 다음날 새벽에 성지를 들리고 저녁이 되기 전 무사히 아네스로 도착하려면 순례자들이 다치지 않고 잘 따라줘야 했다.

모두들 땀을 닦으시고 새 옷을 여러 겹으로 따뜻하게 갈아입으세요. 악마의 봉인이 내뿜는 한기 때문에 한 여름이라고 방심하셨다가 성녀님을 못 뵐 수도 있습니다.”

뒤쳐진 순례자들을 이끌고 올라온 성기사 트리스가 말했다. 낭떠러지처럼 급격한 경사와 울창한 숲이 사라지고 나무 한그루 없는 완만한 들판과 짙은 안개가 펼쳐진 이곳은 순례자들에게 성녀의 정원이라는 이름으로 불렸다. 밤낮으로 햇빛을 감추고 있는 안개와 서늘한 기운은 시간이 비켜가는 이 공간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멈춰버린 시간 속에서 성녀가 악마와 전투를 벌였던 계절의 새싹과 꽃들이 지난 이백년간 시들지 않고 끝없이 펼쳐져 있었다. 순례자들은 하얀 입김을 뿜으면서 고단한 몸을 일으켜 트리스의 말을 따랐다. 몇 몇 순례자들은 성녀의 고난을 생각하며 옷을 갈아입다말고 흐느껴 울었고 잠시 후 그들 모두 한데 모여 기도를 시작했다.

모두 강한 신앙심을 가지고 있어. 이번 순례도 무사히 완료될 것 같구나.”

델커스는 정상을 향해 짧게 기도했다.

트리스, 이번이 몇 번째 순례길이라고 했지?”

다섯 번째입니다.”

아직 많이 힘들겠군.”

트리스가 입고 있는 갑옷을 보며 델커스가 말했다. 성기사는 순례자와 이들을 인솔하는 성직자를 보호하기 위해 가벼운 무장을 하고 일박이일간의 순례길에 동행한다. 순례기간동안 사용하는 모든 짐은 본인 몫이기 때문에 무장을 한 성기사라도 예외는 없었다.

성녀님이 발치에 계십니다. 그분이 감당하고 있는 것을 생각하면 조금이라도 힘들다고 느낄 수 없습니다.”

트리스는 힘든 기색 없이 평온한 얼굴이었다. 젊은 기사의 체격은 커다란 불곰을 보는 것처럼 위압감 있었고 두 눈은 흔들림 없이 맑았다. 순례길을 올랐던 지난 세월을 통틀어 트리스만큼 신실하고 강한 성기사를 본 적은 없었다고 델커스는 생각했다. 특히나 지난 백년간은 이렇다 할 이름을 남긴 기사들도 없었다. 그것은 유수의 귀족들이 집안의 명예를 위해 자녀들을 기사단에 입단시키면서 부터였을 것이라고 델커스는 생각했다. 델커스는 미소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난 자네 같은 젊은 기사들이 더 많아졌으면 좋겠네. 교회에서도 자네에게 많은 기대를 걸고 있어. 시인들의 노래에 등장하는 기사들만 봐도 전부 백 년이 넘은 인물들이니 그간 인재가 없긴 없었지.”

과분한 말씀이십니다. 그저 신을 위해 봉사하는 삶을 살 뿐입니다.”

지난 삼십 년 동안 난 이 가파른 순례길을 올랐다네. 기도하거나 눈물을 흘리는 게 보통이긴 하지만 악마를 보고 성지에서 오줌을 지린 기사들도 여럿 보았네. 명심하게 가장 최악은 검을 들고 악마에게 뛰어드는 것이야. 자네도 알고 있지? 일반인의 영혼은 그 싸움을 감당하기 힘들어 영혼을 빼앗긴 마수가 되어버리니까. 자기는 다르다고 생각하는 순간 그 교만한 영웅심이 모든 순례자들을 죽이게 되지. 마수가 늘어날수록 악마의 힘은 커진다네.”

알고 있습니다. 신은 이 싸움에서 우리를 도우고 계십니다. 우리의 믿음을 키워 악의 힘을 누르는 것만이 싸움에서 이기는 법이라고 믿고 있습니다.”

트리스의 힘 있고 흔들림 없는 대답에 델커스는 미소를 지었다.

자네 같은 훌륭한 기사를 보내주신 신께 감사를.”

델커스는 정상을 향해 다시 짧게 기도했다.

안개는 시간이 갈수록 점점 짙어졌다. 해가지기 전 성녀의 정원에 있는 오두막에 도착해 잠을 자는 것으로 첫째 날의 일정은 끝나게 된다. 순례자들은 안개 속에 길을 잃지 않도록 서로를 살피며 꽃이 흐드러지게 핀 들판을 조심히 걸었다. 성녀님의 고난이 끝날 수 있도록 도와달라고 들판의 꽃을 어루만지며 어느 순례자는 기도를 했다. 안개는 점점 더 짙어지고 공기는 차가워졌다. 악마가 자신의 봉인을 견고히 하기 위해 펼친 결계는 안개와 냉기 속에서 악마가 봉인된 순간 그대로를 변함없이 담고 있었다. 시간이 지나 노을이 안개를 주홍빛으로 물들였을 때 앞장서 걸으며 날카롭게 주변을 주시하던 트리스는 어깨 갑옷 위로 둔탁한 무언가가 떨어지는 것을 느꼈다. 곧 이어 순식간에 무수히 많은 우박이 트리스를 포함한 순례자들을 덮쳤다. 근처엔 아무것도 피할 곳이 없어 순례자들은 비명을 지르며 그들의 짐 밑으로 머리만 집어넣어 웅크렸다.

델커스님. 마수가 나타났습니다. 순례자들을 부탁합니다.”

트리스는 커다란 검을 세워들고 주위를 살폈다. 살을 찌르는 강한 한기가 휘몰아치며 안개 속에서 마수의 형체가 드러났다. 마수가 그들에게 한 걸음 다가올 때 마다 흙과 풀들이 얼어붙었다 부서졌다.

모두들 동요하지 말고 한데 모이세요. 기도를 시작합니다.”

델커스가 동요하는 순례자들을 한데 모았다. 겁에 질려 웅크린 채 일어나지 않는 사람들은 지팡이로 후려쳐 일어나게 했다. 마수가 가까이 다가올수록 우박은 점점 굵어져 순례자들의 머리와 이마를 찢어 놓았다. 피가 흐르면 흐를수록 고통이 아득해지며 사람들은 기도에 더 집중하게 되었다. 모두를 모아 기도하던 델커스가 하늘을 향해 지팡이를 뻗었다. 델커스의 동작과 함께 떨어지던 우박이 빗줄기로 변하더니 증발하였고 하늘에서 한줄기 빛이 내려 안개와 냉기와 안개로부터 모두를 보호했다.

마수는 성기사의 무장을 하고 있었다. 하얗게 변한 피부와 얼어붙은 갑주는 그가 이미 인간이 아님을 알 수 있게 했다. 델커스가 말한 오래 전 악마에게 검을 휘두르다 영혼을 빼앗긴 기사들 중 하나였다. 트리스는 몸을 날려 한 걸음에 마수의 머리로 검을 휘둘렀다. 마수는 얼어붙은 검을 들어 트리스의 공격을 받았다. 마수가 검을 휘두를 때 마다 강한 눈보라가 휘몰아쳤다. 몇 번의 공격을 주고받는 사이 마수의 검이 내뿜는 냉기가 트리스의 손을 얼어붙게 만들었다. 바위로 내려치는 것 같던 그의 공격도 점점 약해져갔다. 트리스는 빈틈을 찾아 힘껏 검을 휘둘렀지만 마수는 그의 검을 가볍게 쳐냈다. 마수가 얼어붙은 입술을 비죽이며 트리스의 가슴을 향해 검을 휘둘렀다. 안돼! 트리스의 방어가 빈 것을 보고 순례자들은 비명을 질렀다. 마수의 검이 닫기 직전 트리스의 검이 파열음과 함께 불타올랐고 소용돌이치는 대기가 마수를 멀리 날려버렸다. 기회를 놓치지 않고 트리스는 앞으로 뛰어들어 몸을 일으키는 마수를 사선으로 갈랐다. 귀를 찢는 비명과 함께 마수의 검과 몸에 불이 붙어 그 재가 안개 속으로 사라졌다.

트리스 괜찮나?”

델커스와 순례자들이 트리스에게 달려왔다.

저는 괜찮습니다. 다친 분들이 많습니다.”

불의 검이시다!”

신과 성녀님의 은총이 내리셨다!”

순례자들이 트리스 앞에 엎드려 제각기 기도했다. 불타고 있는 트리스의 검을 보며 델커스는 남 몰래 미소 지었다.

한참을 걸어 어두운 밤이 되어서야 일행은 작은 오두막에 도착했다. 성녀가 그녀의 기사들과 일전을 치루기 전 하룻밤을 지냈던 곳으로 이 오두막 역시 순례길에서 중요한 장소였다. 트리스가 먼저 오두막에 들어가 위험을 살피고 모두를 안으로 들여보냈다. 촛불이 하나 둘 켜지고 다들 바닥에 앉아 경건하게 기도를 시작했다. 성녀가 사용했던 촛대, 불을 땠던 아궁이, 식사를 했던 그릇이 오두막에 모두 그대로 남아있었다. 순례자들은 감격에 겨워 터질 것 같은 울음을 겨우 참아내다 결국 서로 끌어안거나 얼굴을 감싸 쥐고 눈물을 흘리기 시작했다. 신의 말씀과 힘을 온전히 그 작은 몸으로 받아 신의 대리인으로써 악마와 대적하고 있는 성녀. 그녀의 흔적을 살피며 신실함과 용기를 떠올리는 것만으로 사람들은 신을 직접 영접한 것 같은 감격을 느꼈다.

악마의 심장에 검을 꽂은 성녀님은 그 순간 그대로 이 차가운 공간 안에 갇혀 계십니다. 발치에 악마를 대적한 채 이백년이란 세월을 굴복하지 않으셨습니다. 성녀님의 싸움은 우리가 이렇게 따뜻한 불을 쬐고 있는 순간에도 계속되고 있는 것입니다. 그분을 도울 수 있는 것은 무엇도 아닌 신을 향한 우리의 사랑과 믿음뿐입니다. 하지만 세상은 어떻습니까? 이백년의 시간이 지나고 평온한 일상이 계속되자 모든 일상이 자신의 권리인 것처럼 생각하고 있는 사람들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믿음과 감사함이 사라지고 있습니다. 욕심과 탐욕이 세상을 물들이고 있습니다. 돈에 대한 탐욕, 권력에 대한 탐욕, 명예에 대한 탐욕, 사랑에 대한 탐욕 모든 것이 악마의 힘을 키우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여러분은 신을 위한 삶을 산다고 자신할 수 있습니까? 이 모든 탐욕에서 조금이라도 자유롭다 자신할 수 있습니까? 혹시 여러분 자신의 마음속에 악마를 키우고 있지는 않습니까? 인간은 약하고 탐욕은 달콤합니다. 하지만 신을 향한 믿음을 굳건히 한다면 신이 우리와 함께 할 것입니다. 악마와의 싸움에서 이길 수 있습니다. 우리 모두의 믿음을 키워 자신의 마음속 악마와의 싸움에서 승리할 때 성녀님의 싸움도 끝이 날 것입니다. 믿음을 가지십시오. 강함이란 굳건한 믿음에서 시작됩니다. 언제나 신과 함께하는 삶을 사시기 바랍니다.”

신이시여... 저희를 흔들리게 하지 마시옵고... 델커스와 순례자들의 기도는 계속됐다. 트리스는 먼저 기도를 마치고 밖으로 나와 오두막 주변을 한 바퀴 살폈다. 짐승이나 마수의 인기척은 느껴지지 않았다. 파란달빛에 적셔진 안개는 서늘한 공기만큼이나 창백했다. 주위를 살피던 트리스는 검을 들어보았다. 쾅 하는 파열음과 함께 검이 불타올랐다. 따뜻한 기운이 주위를 휘감아 트리스는 평온함을 느꼈다. 성녀는 불의 검을 처음 쥔 성기사였다. 그녀가 악마와 함께 이 산에 봉인된 후 신실한 마음과 강한 육체를 가진 기사들 중에서도 몇 십 년에 한두 명이 불의 검을 휘둘렀다고 했다. 트리스가 알고 있기로 현재 기사단에 있는 어느 누구도 불의 검을 든 자는 없었다.

트리스. 식사하러 들어오시게.”

델커스가 기도를 마치고 밖으로 나왔다.

아 그 검. 나도 실제로 본 것은 처음이군.”

트리스는 뒤를 돌아보았다. 불타오르던 검은 검붉게 식으며 불길을 거두었다.

죄송합니다. 근처를 순찰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트리스는 조금 뜸을 들이다 다시 말했다. 그의 얼굴은 왠지 어두웠다.

불의 검이 왜 내게 나타났는지 궁금합니다. 델커스님은 아시는 게 있습니까?”

델커스는 트리스에게 다가와 손을 잡았다.

그야 자네가 훌륭한 기사이기 때문이야. 자네는 성기사단은 물론이고 교회와 도시 전체에 큰 기쁨이네. 온 나라와 타국에서도 자네를 찬양하기 위해 교회를 찾겠지. 신의 새로운 자녀들이 많이 생겨날 거야.”

델커스는 침을 튀기며 트리스가 앞으로 신에게 어떤 도움이 될지 계속해서 설명했다. 하지만 트리스의 얼굴에 생긴 그림자는 사라지지 않았다. 가만 듣고 있던 트리스가 조심히 입을 열었다.

이 검으로. 제가 악마를 죽이고 성녀를 구할 수 있지 않을까요?”

델커스가 트리스를 잡고 있던 손을 놓았다.

무슨 생각을 하는 건가. 트리스 제발 그런 생각은 하지 말게. 자네가 낮에 말했듯이 우리가 악마를 이길 수 있는 힘은 믿음뿐이야. 고난의 짊은 성녀님이 짊어지고 계시네.”

트리스는 고개를 숙이고 자신의 장검을 바라보았다.

불의 검은 신이 자격을 갖춘 성기사들에게 신의 힘을 나누어 주는 것이라고 들었습니다. 성녀님의 검이 심장을 완전히 관통하는 것을 막기 위해 악마가 남은 힘을 다해 만든 얼음 봉인. 그 봉인을 부수고 성녀님을 도와 악마의 심장을 찌를 수 있는 것은 같은 불의 검을 든 성기사가 아니겠습니까.”

델커스는 품에서 금속 조각을 하나 꺼내보였다.

자네가 해치운 마수가 입고 있던 흉갑 조각이야. 이 검은 장미문양이 보이나? 내 추측이 맞다면 그는 칠십년 전 순례길에서 악마에게 영혼을 빼앗기고 모든 순례자를 마수로 만든 렌리경야. 불의 검을 쥐었던 자 중 유일하게 봉인을 향해 칼을 휘두르다 악마의 시종이 된 어리석은 사람이지. 자네도 이 안개를 해매이며 악마의 수호자가 되고 싶나?”

트리스는 대답이 없었다.

이백년의 시간동안 모든 기사들이 실패했다네. 악마의 얼음에 검이 닿는 순간 영혼과 육체는 악마의 도구가 되었지. 악마와 싸우는 것은 성녀님만의 몫이네. 우리는 그저 그녀가 지치지 않도록 세상의 믿음을 더 굳건히 하는데 힘을 쏟아야해.”

다시 트리스의 손을 잡은 델커스가 말했다.

자네는 언제 봐도 믿음직한 신의 종이네. 흔들리지 말고 그 마음을 끝까지 간직해야해. 자네가 불의 검을 쥐게 된 것은 신의 뜻이네. 신을 알지 못하고 방황하는 자들을 신의 자녀로 인도할 빛의 기사. 그게 자네의 역할이란 말일세.”

트리스는 고개를 숙였다.

제가 경솔했습니다.”

식사를 마치고 좁은 오두막에 다닥다닥 붙어 누워 일행은 잠을 청했다. 창문이 없는 오두막은 촛불을 끄자 칠흑 같은 어두움에 휩싸였다. 트리스는 눈을 감고 성녀를 떠올렸다. 거대한 악마의 심장에 불타는 검을 찌르고 이백년의 세월을 갇혀있는 성녀. 자꾸 순례길에 오르게 되는 것은 신을 위해서일까 성녀를 보기 위해서일까. 트리스는 자신의 생각에 깜짝 놀라 눈을 떴다. 반대쪽에 누운 델커스가 어둠 속에서 조용히 트리스를 지켜보고 있었다.

 

새벽빛이 안개 속의 최종 목적지를 어슴푸레 비추고 있었다. 눈보라를 뚫고 걷던 일행의 발걸음이 빨라졌다. 불편했던 순례자들의 걸음걸이도 성지를 두 눈으로 확인하자 가벼워졌다. 말 한마디 없이 걷던 일행이 멈춘 것은 가파르고 높은 계단과 함께 얼음이 된 성기사들과 성직자들이 하나 둘 선명하게 보이면서 부터이다. 델커스가 말했다.

성기사 메멘님이십니다.”

메멘이라는 성기사는 몇 계단 올라가지 못한 채 얼어붙어 있었다. 트리스만큼이나 체구가 커다란 그 기사는 사람 몸통만한 전투해머를 양손으로 들고 있었다. 눈보라가 델커스의 목소리를 집어 삼키려할수록 그의 말은 크고 분명해졌다.

메멘님은 가장 선두에서 쏟아지는 마수들을 뚫고 악마를 향해 돌파로를 만드셨습니다. 위협적이었던 기사님은 제일 먼저 악마의 표적이 되어 얼음 동상이 되었습니다.”

순례자들은 얼음동상 앞에서 고개를 숙이고 기도했다. 계단을 오르면서 델커스의 설명은 계속 되었다.

다음은 성직자 브린님이십니다. 성녀님 일행 중 가장 나이가 어렸지만 믿음이 빛나는 강한 분이셨습니다. 전투에 참가하셨을 때 브린님의 나이는 열다섯이셨습니다. 얼음동상이 되면서도 끝까지 기도를 멈추지 않으시며 전투를 도왔다고 합니다.”

성기사 델피르님이십니다. 단검과 활을 사용하셨습니다. 그가 쏘았던 화살은 모두 수거되어 교회에 모셔져있습니다. 얼음봉인 속에서 악마의 머리를 향해 날아가던 화살을 볼 수 있습니다.”

성기사 드완님이십니다. 메멘님이 쓰러진 후 자신의 키만큼 커다란 방패를 들고 앞장서 계단을 오르는 모두의 방패가 되셨습니다. 자 드완님을 지나고 나머지 계단을 오르면 성녀님을 볼 수 있습니다.”

어느덧 일행은 수많은 성직자와 기사들을 지나 정상에 올라섰다. 순례자들은 먼발치에서 봉인 안에 갇힌 악마와 성녀를 보는 순간 자리에 주저앉거나 쓰러졌다. 순례길이 다섯 번째라는 트리스도 여전히 놀라운 그 모습에 입을 벌리고 바라보았다.

휘몰아치는 눈보라 속으로 수정처럼 맑은 거대한 얼음기둥이 보였다. 얼음기둥이 너무 맑아 성녀와 악마가 봉인되지 않은 채 숨 쉬고 있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악마의 얼굴은 용과 사자의 대가리를 섞어놓은 것 같았으며 뿔이 아홉 개나 돋아나있었고 펼치면 산 정상을 뒤덮을 수 있을 정도로 거대한 날개는 비명을 지르듯 하늘을 향해 치솟아 있었다. 악마의 붉고 검은 몸통에 붙어있는 팔다리 하나하나가 사람 크기만 했다. 그 몸통의 심장을 아직도 불타오르고 있는 검이 꿰뚫고 있었다. 타오르는 불의 검은 그 어느 전설에서 묘사된 것 보다 밝고 뜨거웠다. 거대한 악마를 향해 긴 검을 내지르고 있는 성녀는 눈처럼 희고 가냘픈 몸이었다. 하지만 불타는 검만큼이나 붉은 그녀의 눈빛은 흔들림 없이 악마를 노려보고 있었다.

성녀님이십니다. 이백년 동안 이 외로운 눈보라 속에서 홀로 세상을 지키고 계십니다.”

맙소사. 신이시여. 성녀님, 성녀님. 순례자들은 악마에 대한 두려움과 성녀에 대한 경배감에 감히 앞으로 나가가지 못했다. 트리스가 그들을 대신해 앞으로 한 발씩 나아갔다. 순례자들도 트리스를 믿고 그의 등 뒤를 조금씩 따랐다.

성녀는 여느 성기사의 복장과 다름없는 평범한 기사단의 갑옷을 입고 있었다. 그녀의 몸은 갑옷보다는 드레스가 어울릴 가녀린 여자의 몸이었다. 이런 여린 몸으로 그녀는 어떻게 마수들의 무리를 뚫고 악마와 대적할 수 있었을까? 악마의 가슴을 찌르고 있는 저 하얀 팔은 이백년 동안 얼마나 고통스러웠을까? 가냘픈 다리는 이 무서운 악마 앞에서 어찌 저렇게 단단하게 땅을 디디고 있는 것일까? 깎아내린 듯한 턱과 뾰족하고 오똑한 콧날, 칠흑같이 흩날리고 있는 긴 머리카락. 트리스는 마수들을 베어 넘기고 악마를 향해 뛰어들던 성녀를 상상하며 경배감과 그 이상의 감정을 느꼈다. 다시 한걸음 봉인을 향해 발을 내딛는 트리스의 검이 어느새 불타오르고 있었다. 트리스는 검을 한 바퀴 휘둘러 악마를 향해 겨눴다. 몰아치던 눈보라가 트리스 주변으로 뜨거운 수증기와 함께 증발했다. 하얀 수증기를 내뿜는 불타는 장검을 든 트리스는 신이 강림한 것 같은 착각이 들 정도로 위압적이었다.

트리스 뭐하는 겐가! 어리석은 행동 하지 말게!”

델커스가 트리스를 향해 고함을 질렀다. 트리스의 행동에 어리둥절해하는 순례자들 중 눈치 빠른 몇몇은 뭔가 큰 일이 벌어질 것 같은 예감에 계단 아래로 서둘러 도망쳤다.

성녀님을 구해야 합니다!”

이백년 동안 모든 기사들이 실패했어! 악마에게 그 힘을 온전히 바치는 꼴이란 말일세! 자네 여기 온 사람들을 모두 죽이고 싶나!”

저는 성공할 수 있습니다. 신의 믿음이 함께 하니까요.”

그만!”

트리스는 델커스의 비명에도 뒤돌아보지 않고 검을 휘둘렀다. 붉게 타오르는 검에 베인 얼음 기둥이 사선으로 부글부글 끓어오르며 갈라졌다. 그때 악마가 사람 얼굴만 한 눈동자를 굴려 번뜩 트리스를 노려보았다.

죽어라!”

불의 검이 악마의 심장을 찌를 수 있을 만큼 얼음기둥을 베어낸 트리스는 망설임 없이 검을 앞으로 내질렀다. 하지만 그의 검이 악마에게 미치기 전 트리스의 움직임이 멈추었다. 울컥 피를 토하며 트리스가 몸을 내려 봤다. 황금빛으로 반짝이는 빛의 창이 트리스의 몸을 꿰뚫고 있었다. 빛의 창은 델커스의 손짓에 따라 트리스의 몸을 공중으로 떠올렸다.

트리스 내가 그만 하라고 했을 탠데!”

델커스가 공중에 떠오른 트리스를 향해 말했다. 입에서 피를 흘리며 트리스가 외쳤다.

제 검이 악마의 봉인을 베는 것을 보시지 않았습니까! 놈의 심장을 뚫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성녀님을 구할 수 있습니다!”

성녀를 왜 구해!”

델커스가 말했다. 트리스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성녀도 악마도 그 자리에 그대로 두란 말이야! 네가 뭔데 성녀를 구하네 마네 하냐는 말이다!”

델커스 그게 무슨 말입니까! 나를 놓아 주십시오! 악마를 죽여야 합니다!”

점점 높은 곳으로 떠오르는 트리스가 델커스에게 외쳤다.

델커스님 이게 무슨 일입니까! 트리스님을 놓아 주십시오!”

남아있던 순례자들이 델커스의 옷을 붙잡고 매달렸다. 델커스는 순례자들의 머리를 향해 손바닥을 보이며 짧은 기도문을 읽었다. 기도문이 끝나자 순례자들의 얼굴이 부풀어 오르더니 곧 눈부신 빛과 함께 뼈만 남기고 영혼과 육신이 증발했다.

델커스!”

트리스는 델커스를 향해 그의 검을 던졌다. 악마의 눈동자가 빙글 움직여 어느 때보다 크게 불타오르는 트리스의 검을 보았다.

 

네 명의 최고위 성직자가 기다란 책상에 앉아 있었다. 빛이 들지 않는 회의실에는 어둠이 가득 차 보고자는 그들의 얼굴을 확인할 수 없었다. 각각의 성직자 앞으로 몇 장의 보고서가 제출되었다. 그 중 누군가가 먼저 말했다.

트리스와 델커스가 죽었군.”

델커스가 방심했어. 이렇게 죽을 사람이 아닌데.”

또 다른 성직자가 말했다.

트리스의 시체는 회수되었나?”

보고자는 고개를 푹 숙인 채 대답했다.

트리스와 델커스님을 비롯한 모든 사체는 악마의 마수가 되었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대신 트리스의 검과 갑옷, 델커스의 성서와 옷은 새로 만들어 박물관에 전시할 예정입니다.”

어둠속의 성직자 한 명이 고개를 끄덕이고 말했다.

이 보고서를 증언한 순례자들은 어떻게 처리했지?”

보고자는 여전히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전원 순교자로 처리하여 다가오는 축제 기간 중에 성대한 장례를 치를 예정입니다.”

그렇지, 델커스와 트리스 그리고 순교자들. 불의 검을 휘둘러 악마의 봉인을 베어버린 역사상 가장 위대한 성기사 트리스. 좋은 이야기가 하나 나올 것 같군. 장례식을 통해 각 국에서 신성도시 아네스에 기부금이 쏟아질 수 있도록 그들의 영웅담을 전파시키게.”

그런데 트리스는 왜 갑자기 돌변한 거야? 누구보다 교회의 말에 믿음을 가지고 있던 젊은 기사였는데.”

그러니까 평민 집안의 자녀들은 안 된다는 겁니다. 천한 피가 어디 가겠습니까.”

한 마디도 하지 않고 보고서를 앞뒤로 뒤적이고 있던 성직자가 말했다.

어쨌든 이번 사건으로 순례자들과 관광객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도록 각별히 주의해야하네. 특히 부유한 귀족들의 자제들이 계속 성기사에 지원할 수 있도록 이 사건을 역으로 잘 이용해봐.”

보고자가 대답했다.

걱정 마십시오. 악마가 손에 쥔 창녀는 교회에 영원한 부와 명예를 가져다줄 겁니다.”

처음부터 없었던 것처럼 회의실의 모두는 소리 없이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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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71 단편 반 빙하 소설4 엠제이 2015.08.27 0
2170 단편 백수광부지가 소슬 2015.08.26 0
2169 단편 그들만의 고독 엉클준 2015.08.24 0
2168 단편 [심사제외]괴우주야사 외전 : 괴지구전투 니그라토 2015.08.22 0
2167 단편 향기로운 아카시아 꽃 한 아름 장피엘 2015.08.16 0
2166 단편 [심사제외]부자는 인류 멸종시켰다 니그라토 2015.08.13 0
2165 단편 여름이 터졌다 레몬 2015.08.11 0
2164 단편 루이 레몬 2015.08.11 0
2163 단편 맹목 하루카나 2015.08.09 0
2162 단편 순교자. 파모똥 2015.08.08 0
2161 단편 젊은 나무꾼의 슬픔 알렉산더 2015.08.06 0
단편 순례길 persona 2015.08.04 0
2159 단편 장산범 강동하 2015.08.02 0
2158 단편 검은 빵3 엠제이 2015.08.01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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