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밀번호를 잊어버리셨나요?

단편 맹목

2015.08.09 14:3508.09

 다른 건 아무것도 필요 없어. 나는 그녀가 없으면 이 세상을 살아갈 수 없어. 

01. 
 "일어났어?"
 "응." 그녀는 눈을 비비며 말했다. "또 미래를 꿈꿨어."
 "무슨 꿈?"
 "음……. 보랏빛 자수정, 차가운 바닥, 날 보며 우는 네 얼굴. 납치라도 당했나 봐." 그녀가 장난스레 말했다. 
 "그럴 리가." 용사가 건너편에 앉아 지긋이 그녀의 얼굴을 바라보며 말했다. "내가 마왕을 물리치고 영웅이 되면 누구도 널 함부로 건드리지 못하게 지켜줄 건데?"
 "진짜? 약속해 줄 거야?" 
 "응. 약속할게. 걱정 안 해도 돼." 용사는 조용히 말하며 안심시키듯 그녀의 가슴을 향해 손을 뻗으며 말했다. "일전을 앞두고 불안해서 그런 것뿐이야."
 따뜻한 빛이 복도를 환하게 밝혔고, 그녀가 배시시 웃었다. 아, 내가 저 웃음을 따라 여기까지 올 수 있었구나. 
 그녀가 꿈꾼 대로 나는 마왕을 물리칠 것이다. 그녀의 예지몽이 틀릴 리 없기에. 


02. 
 눈을 떴을 때, 그녀는 이미 꽁꽁 묶여 있었다. 
 비명을 질러보아도 꽉 막힌 소리만이 방 안을 울릴 뿐. 팔과 다리에 힘을 주어 보지만 풀릴 기미는 보이지 않는다. 딱딱하고 거친 돌 바닥과 작고 날카로운 부스러기가 그녀의 피부를 마구 긁지만, 공포에 감각이 마비된 탓에 그녀는 따가움을 느끼지 못한다. 
 그 순간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린다. 그녀는 반사적으로 눈을 감고 움직임을 멈춘다. 그제야 마비된 감각이 서서히 돌아오고, 팔다리에 난 생채기가 그녀를 괴롭힌다. 그녀는 어금니를 꽉 깨문다. 참아야 해, 들키면 안 돼. 
 잠시 후 방 안이 보랏빛으로 물들었다. 발소리는 이내 그녀를 향했다. 움직이면 안 돼. 
 "……피부 다 상했네."
 아주 익숙하거나 친근하지는 않지만 어디선가 들어본 듯한 목소리. 어디서 들어본 걸까. 발걸음이 멀어지는 순간 에리나는 살짝 눈을 떠본다. 

03. 
 용사여, 그대 덕분에 이 세계에 평화가 찾아왔다네. 원하는 것이 있다면 말해 보게, 내가 들어줄 수 있는 한도 내에서는 
 현군이시여, 감사합니다. 하지만 저는 당신에게 원하는 것이 없습니다. 그럼 이만 저는 돌아가 보겠습니다. 부디 국가에 이 평화가 계속되길 진심으로 바랍니다.
 정말인가?
 네.
 ……자네, 괜찮은가?
 왕이시여, 어째서 그런 걸 물어보시는지요. 
 자네와 같은 눈을 한 백성들을 수도 없이 봐왔어. 다시 한 번 묻지, 자네 정말 괜찮은가?
 ……저는 괜찮습니다. 

04. 
 방 한가운데의 자수정, 그 안의 은빛 검, 그 앞에는……먼발치에서 딱 한 번 봤지만 누구라도 한 번 봤다면 절대로 잊을 수 없는 모습. 
 "용사님!"
 용사가 뒤돌아보았다. 
 "용사님! 저 좀 도와주세요. 갑자기 정신을 잃고……."
 그 순간 자수정 뒤편이 에리나의 눈에 들어온다. 수많은 여자가 손과 발을 축 늘어트린 채 생기 없는 눈으로 그녀를 보고 있었다. 
 "역시 깨어계셨네요."
 비명을 지를 새도 없이 눈앞이 깜깜해졌다. 

05. 
 폭죽이 터지고, 사람들이 환하게 웃는 소리가 들린다. 그러나 내 눈앞에는 그녀가 불타는 없어지는 모습만이 보였다. 
 '너는 영웅이 될 수 있을 거야.' 그녀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 결말이 이런 거라니. 
 나의 빛, 나의 의미, 나의 세계, 나의 전부. 그녀가 없으면 영웅 같은 거 아무런 소용 없는데. 
 문득 창문 밖을 쳐다보니, 누군가 환하게 웃으며 지나간다. 초록빛 눈, 금빛 머리카락……이레인이랑 꽤 닮았다. 
 그 순간 쨍그랑 하는 소리가 들린다. 이레인의 가슴에서 꺼낸 은빛 검이 떨어져 있었다. 어쩌면…….

06. 
 보랏빛 자수정이 보였다고 그녀는 말했다. 
 그녀의 예언은 틀리지 않는다. 그렇기에 용사는 마왕을 무찌를 수 있었고, 그녀의 육신이 불타 없어져도 희망을 품을 수 있다. 언젠가 그녀는 다른 이의 육신에서 눈을 뜰 것이다. 
 이레인, 나는 너를 포기하지 않을 거야. 용사는 그렇게 생각하며 에리나를 의자에 앉힌다. 용사는 약초를 적셔 들고 온 손수건으로 에리나의 팔을 닦는다. 에리나의 팔에 난 생채기들이 모두 사라진다. 
 그리고는 에리나의 가슴에서 빼내어 바닥에 아무렇게나 던져놓은 은빛 검을 가차 없이 부숴버렸다. 쨍하는 소리와 함께 은빛 조각들이 바닥에 퍼진다. 
 용사는 보랏빛 자수정에서 이레인의 은빛 검을 꺼내 에리나의 가슴안에 집어넣으려 한다. 잘 들어가는 듯싶었으나 이내 은빛 검은 에리나의 육신을 거부하고 다시 자수정 안으로 돌아간다. 젠장. 용사는 그렇게 툭 내뱉은 뒤 껍데기만 남은 에리나의 육신을 방 뒤편에 던져놓고 방을 나온다. 

07. 
 이레인, 내게는 너밖에 없어. 
 반드시 네 예언대로 널 살려낼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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