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밀번호를 잊어버리셨나요?

단편 스넌

2009.11.10 15:1211.10

 그 때는 혼란스러웠다. 언니가 자주 다니던 사이트에서는 "군대 이 년 가지고 되겠어요?"라고 도도하게 얘기한 여자를 미친년이라고 불렀다. 또한 지하철에서 개가 싼 똥을 치우지 않던 여자를 미친년이라고 불렀다. 언니는 분노했다. 저런 폭력적인 시선에 여자가 노출되어 있다는 사실을 언니는 통탄했다. 그러던 어느 날 언니는 서점에 가서 깜짝 놀라기도 했다. '미친년이 되자'는 책이 당당하게 베스트셀러에 올라와 있기도 했다. 하여간 때는 그랬다. 어떤 사람들이 여자들을 욕했고 미친년들이 세상을 장악해 간다고 질겅거렸다. 언니는 거의 매일 매일 분노했다.

여기 있던 반지는 누가 갖다 치웠을까

 어디 갔지, 어디다 놓았더라
 그때 언니는 책상 구석에 쌓아 놓았던 종이들을 헤집고 있었다. 헤집다가 또 분을 못 이긴 언니는 종이들을 왈칵 집어던졌다. 언니 방 꼴은 넘너른하다 못해 처연하기 그지없었다. 언니가 집어던진 옷가지와 책들이 서로를 물어뜯느라 정신이 없었고 언니는 맥이 빠진 채 바닥에 떨어진 요구르트 병을 집어들다가 그 처연한 싸움에 동참하기로 했다. 악에 받혀서 요구르트 병을 물어뜯으면서도 언니는 쉴 새 없이 계속 생각했다. 눈알이 굴러가는만큼 뇌가 데굴거렸다.

 대체 어디다 뒀더라 어떻게 움직였더라
 언니는 생각하고 또 생각했다. 언니 머릿속에서 그 때 가장 확실했던 건 반지를 상자 안에 넣은 후로 어언 일주일이 지나있었고 언니는 지금처럼 아득바득 뭔가 물어뜯어가면서(무려 울기까지 했었다) 다시는 이 상자를 열지 않겠다고 다짐했었고 물론 다짐한 것도 어언 일주일이 지나있었고 언니는 그 다짐을 확실히 지켰다는 거다. 언니는 재빠르게 눈알을 다시 굴렸다. 상자는 이 방에서 가장 먼저 싸움을 본의 아니게 시작한 일번 타자였다. 시작부터 속엣 것을 죄다 게워낸 채 침대 옆에서 구르던 상자를 언니는 다시 냉큼 무르팍에 올려 놓았다. 작은 상자라 안에 반지 같은 게 없다는 건 빤히 보이는데도 언니는 손톱으로 쇼생크 탈출이라도 하려는 마냥 필사적으로 상자 바닥을 긁어댔다. 언니는 병신이 아니었다. 아무리 그 때 제정신이 아닌 언니라고 해도 상자를 긁어봤자 벽돌 속의 보물처럼 반지가 바닥에서 삐용 튀어나오지는 않을 거라는 것쯤은 알고 있었다. 언니는 분노에 찬 함성을 지르며 반지 대신 상자를 다시 내던졌다. 부웅 공중으로 날던 상자는 언니 복사뼈에 멋지게 착지했다.

 뭔가 뜨거운 것이 가슴으로부터 치밀어 오르는가 했더니 눈가에 집결했다.
 “썅!”

 언니는 쌍시옷과 ㅑ발음을 하기 위해 얼굴을 일그러뜨리는 수밖에 없었고 일그러진 얼굴근육은 가볍게 눈물샘을 건드렸고 그 순간 눈물이 좌르륵 흘렀다. 언니는 참말 어처구니가 없었다. 언니 앞에서 현식이(언니가 벌써 세 번째 헤어졌다 만났다를 반복하고 있는 운명의 그이)는 입술을 파르르 떨면서 눈물을 흘렸다. 반지를 꺼내 놓으면서 못 버렸다고, 고백하는 현식이의 고 떨리는 입술은 귀여워서 도무지 참을 수가 없었다. 언니는 그 작고 여린 표정 앞에서 내일은 학교에 반지를 반드시 끼고 가겠다고 행복하게 약속했던 것이다. 이래서야 학교에 갈 수 있을 턱이 없다. 언니는 침대에 얼굴을 파묻었다. 진짜 썅이었다. 복사뼈가 된통 아팠다.

 그때쯤 동생은 학교에서 펜을 꺼내려고 필통을 열었다가 상당히 의아한 물건을 발견했다. 큐빅이 반드레한 금반지. 안쪽에는 ㅎㅅ이라는 머리글자가 새겨져 있긴 했지만 뭐 동생이 그거까지 볼 여유는 없다. 그냥 어디서 많이 본 거 같긴 한데. 동생은 언니 것일까 잠깐 의심했고 언니 것일 확률이 약 95.4%쯤 된다고 결론을 내렸다. 하지만 생각해보면 언니가 아끼는 반지라고 했을 때 이 안에 들어와 있을 확률은 100.0% 없다. 동생은 언니가 이 반지가 없어졌다는 사실도 모를 거라는 결론에 도달했다.

 동생은 슬그머니 반지에 넷째 손가락을 밀어 넣었다. 딱 맞는다! 동생은 ㅎㅅ이라는 머리글자가 자기 손가락을 따라 빙글빙글 돌고 있다는 건 꿈에도 생각지 못한 채 반지가 여기까지 흘러오게 된 경로에 대해서 고찰하기 시작했다. 언니는 반지를 끼고 동생 방에서 자다가 벗겨진 걸 잊었을 거다. 그리고 동생은 방청소 같은 걸 하다가 뭐 거치적거리는 게 있으니까 대충 여기저기 쑤셔 넣었을 거다. 자업자득이지. 동생은 그냥 반지 하나 먹어버리기로 했다. 썩 마음에 들었다.

 수민이가 동생 옆자리에 가방을 놓고 앉았다. 동생은 씨익 웃으면서 반가웁게 인사한다. 키 크고 얌전하고 어른스러운 수민이는 따라서 웃으려다가 반지를 봤다. 언니가 끼고 다니던 어른스러운 반지를 어서 칭찬하길 기대하면서 동생은 암팡지게 넷째 손가락을 꼬는데 수민이는 반지를 보는 건지 책상을 보는 건지 멍하게 있다가 고개를 숙이고 키들거렸다. 의아하달까 떨떠름한 동생 표정을 본 수민이는 살짝 손짓을 하더니 귓전에 속삭였다.

 “나, 오늘부터 브래지어 해.”

 동생은 등잔만하게 눈을 홉뜨고 수민이 가슴을 노려봤다. 부러운 년. 눈에 띄게 튀어나오지는 않았지만 수민이 키 정도면 지금부터 한다고 해도 이상할 건 없다. 하지만 동생도 그다지 키가 작은 편은 아닌데. 동생은 난데없이 가슴 밑바닥 가득히 한불 깔리는 열등감에 몸서리쳤다. 하지만 그걸 그대로 드러낼 수는 없으니 동생은 실실 웃었다.

 “어때? 느낌 안 이상해?”
 “조금 답답하기는 한데…… 어쩔 수 없지 뭐.”
 나도 언젠가 답답해지고 말겠어. 동생은 이를 아득 갈면서 또 실실 웃었다.

 실실 웃기만하다가 집에 돌아와서 동생은 언니한테 브라자 사달라고 조를 셈이었는데 집에 돌아오자마자 분노한 언니의 용 같은 발톱 아니 손톱에 반지를 뽑혔다. 자칫 손가락까지 뽑힐 뻔 했다.

 "언제 훔쳐갔어."
 "안 훔쳐갔어!"

 동생은 애가 타게 언니한테 반지가 필통 안에 들어 있었다고 설명했다. 동생은 땅을 치고 싶을만치 억울했다. 물론 언니한테는 완전 구라로 밖에 보이지 않았다. 얌전하게 상자 안에 들어있어야 할 반지가 왜 저 년 필통 속에 들어가 있단 말인가. 끝내 동생은 울음을 터뜨렸고 언니는 가살스럽다고 생각하면서도 알았다고 한 마디 던지곤 반지를 받아서 방에 들어갔다. 각자 방에서 각자 침대에 누운 채 입술을 비죽거리던 자매는 같은 시간 같은 자세로 딱 한 마디를 공유했다.

 "미친년."


상실의 시대

 다음 날, 오후수업이랍시고 빈둥거리며 늦잠 자던 언니보다 일찍 일어났기 때문에 동생은 다행스럽게도 언니와 마주치지 않고 학교로 갈 수 있었다.

 남의 방에 와서 퍼 자다가 떨어뜨려놓고 지랄이야, 지랄이

 그래도 얼굴 안 보니까 속이 시원하기는 했다. 가뜬한 마음으로 교실에 들어서자마자 동생은 놀랐다. 말해두자면 동생은 학교에 일찍 오는 편이다. 동생이 등교할 시간에는 교실에 사람이 많아봐야 세 명 정도 있다. 수민이는 동생보다 일찍 학교에 와 있었다. 말해두자면 수민이는 학교에 늦게 오는 편이다. 수업시간에 턱걸이해서 들어오는 경우가 다반사다.

 가끔은 이런 날도 있겠지, 어제처럼 반가웁게 인사를 할 찰나에 수민이는 동생을 힐끔 보더니 입꼬리를 올리는 둥 마는 둥 쟤가 날 싫어하는 거 같기도 하고 아닌 것도 같이 웃어보였다. 그리고는 책상에 얼굴을 파묻고 자기 시작하는 게 아닌가. 인사할 타이밍은 완벽하게 놓쳐버렸다. 동생은 어쨌든 옆에 가방을 걸어놓고 수민이를 내려다 봤다. 키 크고 얌전한 수민이는 맨날 웃는다. 비단 동생한테만 그러는 것도 아니다. 수민이가 웃지 않는 모습이 외려 잘 기억이 나지 않을 정도다. 아까 그 웃는 듯 마는 듯한 표정은 대체 뭐란 말인가.

 내가 어제 뭔가 잘못했나 가슴 보면서 이 간 거 들켰나
 갑자기 수민이가 고개를 번쩍 들었다.
 "신경 쓰여서 잠을 못 자겠잖냐."
 다시 엎어졌다.

 언니는 자랑스럽게 걸었다. 찬란한 햇빛을 반사하는 반지는 넷째 손가락에서 전처럼 빛나고 있었다. 현식이는 언니를 향해 환하게 웃었고, 언니는 이백 킬로미터 밖에서도 그 웃음에 눈이 부셔서 쓰러질 것만 같았다. 그렇다. 세상은 빛으로 충만했다. 언니는 거짓말 한 개도 안 보태고 죽어도 좋았다. ……거짓말이다. 언니는 살포시 현식의 손을 잡았다.

 숨 쉬고 있다는 사실이 이렇게 감격적인데 죽긴 왜 죽어.

 자주 가던 카페에 앉아서 언니는 수줍게 웃었고 수줍게 커피를 홀짝였다. 작고 하얀 현식이 손이 눈앞에서 꼬물거렸다. 상아로 깎은 펜대같은 손가락. 물론 언니는 그런 펜대를 단 한 번도 본 기억이 없지만 옛날에는 아마 있었을 거다. 170센티미터가 안 되는 작은 키와 비교적 마른 몸매에 저 손가락은 굉장히 어울린다. 거기다가 길게 기른 손톱 끝에 반짝이는…… 어, 댕글?
 "댕글, 잘 어울리네에……."
 말끝을 기일게 늘이면서 언니는 얼굴이 홧 달아올랐다. 고개를 살짝 들어보니 현식이도 귀까지 새빨갰다.

 "또, 그 얘기. 나도, 마음에…… 들어."
 또? 뭐 사소한 건 넘어가자.
 "언제 뚫었어?"
 현식이는 입을 따악 벌리고는
 "이거 네가,"

 까지 말했다. 하지만 금방 뭔가 떠올린 듯 빨간 입술을 어정쩡하게 반쯤 내밀더니 나지막한 소리로 다시 말했다.

 "오늘은 왠지 얌전하네."

 언니는 더욱 수줍게 입을 가리고 웃어보였다. 언니가 그 후로 적어도 삼 분 쯤은 되는 현식이의 침묵을 자기 자신조차 뭔 소린지 모를 소리를 끝없이 해대면서 견뎌내는 동안 수민이는 잠에서 깨어났다. 잠에서 깨자마자 수민이는 어 내가 언제 잠들었지? 마냥 해맑게 말하고는 웃었다. 그래서 반 애들은 모두 아까 그 현식이 마냥 입을 따악 벌렸다.

 조금 전으로 돌아가 보자. 1교시 국어시간, 국어선생님이 수민이 앞에서 탁탁, 구둣발을 구른다. 반응 없음. 한 번 더, 탁탁, 구둣발을 구른다. 역시 반응 없음. 손가락으로 탁탁, 책상을 친다. 부스스하게 수민이가 일어난다, 아니 움찔거린다. 동생은 수민이 어깨 위에서 뭔가 반짝거리는 걸 본다. 빨갛게 반짝이는 머리카락. 빨간색을 보는 순간 동생은 소름이 오스스 돋는다. 선생님은 뭔가 말하려는 표정,

 "아, 잠 좀 자자고요."
 선생님은 눈을 둥그렇게 뜬다.
 "뭐? 야, 일어나! 일어나!"

 꼼짝도 않는다. 선생님은 수민이 어깨를 흔든다. 꼼짝도 않는다. 국어선생님은 있는 힘을 다 해서 수민이를 끌어내려고 했지만 아무래도 수민이랑 책상 사이엔 오공본드라도 붙어있는 것 같다. 결국 꼼짝도 안 했다.
2교시 체육시간 전, 수민이는 눈을 번쩍 뜬다. 수민이 머리카락 끝이 불그스름하게 빛난다. 동생은 약간 쫄았지만 그래도 말을 붙여보기로 했다.

 "너… 아까"
 "반장!"
 반장을 찾자마자 수민이는 쿨하게도
 "나 생리통이라 못 나간다 그래."
 뭐? 벌써 생리해? 동생은 눈을 휘둥그레 뜨고 수민이를 돌아봤다. 이미 잠들었다.

 동생은 체육시간에 준비체조를 하면서도 약간 혼란스러웠다. 대체 수민이는 갑자기 왜 저런단 말인가. 거기다가 벌써 생리까지. 저것이 말로만 듣던 생리히스테리 같은 건가. 체육복 옷깃 사이로 힐끗 밋밋한 자기 가슴을 들여다보고는 고개를 번쩍 들었다. 쳇.

 교실에 돌아와서 동생은 솔직하게 부럽다고 말해보았다. 상큼하게 수민이는
 "구라야."
 하더니 아까처럼 웃는둥 마는둥 웃고 다시 잠들었다. 반 애들이 모두 어처구니 없어하면서 속살거리는데 고 오 분만에 다시 깨어나서 저 모양으로 웃고 있는 거다.

 "지금 몇 시야?"
 "점심시간."
 "뭐? 그럼, 체육시간은?"
 "안 나갔잖아."
 "뭐?"
 "기억 안 나?"
 "뭐가?"

 기억 안 나는 거다. 혹시나 수민이는 몽유병에라도 걸린 건가. 반장이 슬금슬금 다가와서 뒤에서 내 손을 움켜잡았다. 복도에서 반장은 이를 갈았다. 못된 계집애라고, 말도 걸어주지 말라는 거다. 아까 생리통이라고 거짓말하면서 바보 취급당한 게 아직까지 분한 모양이다. 금세 반장은 주먹을 부르쥐고는 눈물을 그렁거리기 시작했다.

 기억 안 나는 걸까. 수민이는 교실에 덩그러니 혼자 남아있다.
 집에 돌아가려는 순간 동생은 등 뒤에 느껴지는 섬뜩한 감각에 홱 고개를 돌렸다. 수민이의 빨간 머리카락은 산호초처럼 꼿꼿하게 하늘을 향해 서 있었다. 비명을 지르듯, 하늘로 용솟음치는 머리카락을 보며 동생은 엉덩방아를 찧었다. 비명은, 다행히 나오지 않았고 동생은 바닥을 반쯤 기어서 복도 끝까지 내달렸다. 눈물 때문에 앞이 잘 안 보였다.

 집에 돌아와서 언니는 밥을 차린다. 동생은 숟가락을 놓는다. 보글보글 된장찌개가 끓는다. 그리고 언니는 자리에 앉았다. 밥을 한 숟갈 뜬다. 동생도 밥을 한 숟갈 뜬다. 된장찌개가 아직도 끓는다. 그리고 김치를 한 조각 집었다. 동생은 입에 가만히 숟가락을 물고 있다. 된장찌개가 넘친다. 둘 다 가만히 앉아만 있다. 된장찌개가 넘쳐서 가스불이 꺼졌다. 그래도 둘 다 가만히 앉아만 있다. 언니가 눈을 번쩍 뜬다.

 "아차!"


멋진 여자들

 객관적으로 말하자면 언니는 예쁜 편이다. 하지만 저 부제는 언니를 지칭하는 말은 아니다. 언니한테도 나름대로 우상이라는 게 있다. 수업시간마다 언니는 힐끔힐끔 우상을 훔쳐본다. 마음속으로는 아닌 척 하면서 몇 번씩 경배를 드렸을지 모를 일이다. 언니는 앞에 있는 정물을 노려본다. 사과가 햇빛을 받아서 반짝거린다. 불그스름한 선이 도드라진다. 하지만 언니의 화폭에 나타난 선은 결코 저렇게 반짝거리지는 않는다.

 교수님은 언니 뒤에 와서 서 있다. 하지만 언니는 아직 모르는 것 같다. 언니의 시선은 교수님의 잘 빠진 다리에서 사과로 옮겨온 지 어언 오 분이 지나 있다. 그러다가 뒤에서 뭔가 느끼고 화들짝 놀라서 뒤를 돌아본다. 순식간에 언니의 얼굴이 새빨개진다.

 그렇다, 언니의 우상은 바로 이 미인이다. 그렇지만 언니가 이 교수님을 존경하는 이유는 미인이기 때문만은 아니다. 언니는 처음 이 교수님의 그림을 보고 엄청난 정서적 쇼크를 받았다고 친구들한테 고백한 적이 있다. 언니는 기실 용을 쓰고 이 대학에 들어온 것이다.

 교수님은 여자만 그리는 걸로 유명하다. 그리고 그린 모든 그림에 제목을 붙이지 않는 것으로도 유명하다. 그리고 교수님이 그린 그림들은 하나같이 보는 사람의 마음에 커다란 파동을 일으킨다고도 한다. 언니도 그랬다. 언니는 미술관에서 흐르는 눈물을 주체할 길이 없었다. 언니는 눈알이 눈물을 타고 흘러내리는 줄 알고 볼을 계속 감쌌다. 고교 1학년 때 그 전시회에서 돌아온 후 사흘 간, 언니는 눈이 짓무르도록 울어댔다. 친구들이랑 낄낄대고 연예인 얘기하면서도 눈알이 흘러내렸고, 텔레비전에서 살인사건에 대한 뉴스를 보면서도 눈알이 흘러내렸고, 좋아하는 명란젓을 보고 침을 줄줄 흘리면서도 눈알이 흘러내렸고, 엄마 몰래 포르노를 받아보다가도 눈물이 흘러내렸다. 눈알이 겨우 제자리를 잡던 사흘째, 언니는 미술학원에 등록했다.

 쇼핑백을 손에 바리바리 싸 들고 있는 소비적인 여성, 언덕길을 달려가는 여고생, 심지어는 있을 리가 없는 아름다운 보살까지. 언니는 여기저기 구멍이 나 버린 마음을 누군가가 다정하게 감싸 안아주는 것 같은 기분이었다.

 뒤에서 학생들이 소곤거린다.
 "근데 어떻게 수업은 계속 하네?"
 "야, 아니라잖아."
 "누가 알아, 그걸."

 교수님은 생글 웃으면서 그 학생들 쪽으로 고개를 돌린다.
 "잡담은 나중에. 다른 학생들이 집중하는 데 방해가 되겠지?"
 ……언니는 울컥하지만 참는다. 언니는 교수님을 믿는다.

 사건은 한 달 전쯤에 일어났다. 교수님은 난데없이 수업에 들어오지 않았다. 그것도 보름쯤. 신문에서도 뉴스에서도 난리였다. 표절 의혹. 물론 교수님의 그림과 똑같은 그림이 있었던 건 아니다. 파주시의 시골에 혼자 살던 할머니의 방에서 엄청난 그림들이 발견되었던 것이다. 다만, 교수님과 화풍이 굉장히 비슷한.
이 할머니가 언제부터 그림을 그린 것인지는 알 수 없지만, 방 안에서 발견된 그림의 양은 엄청났다고 한다. 심지어는 이 할머니가 본 적이 있을까 의심스러운 뉴욕의 금발여자마저 있었다는 거다. (나중에는 텔레비전에서 보고 그렸다는 식으로 결정이 났지만) 할머니한테 대체 이 그림들을 어떻게 그렸냐고 모두들 물어보고 싶었지만, 안타깝게도 그건 불가능했다. 그림이 발견된 건 혼자 살던 할머니가 돌아가시고 나서 아들이 방을 정리하다였으니까. 이 할머니를 일전에 알았던 게 아닌가, 할머니의 그림들을 훔친 게 아닌가, 수많은 억측 속에서 교수님은 수업에 나오지 않았다.

 그리고 그 그림들은 하루 종일 텔레비전만 보던 할머니가 텔레비전에 언뜻언뜻 비쳤을 교수님의 그림에서 큰 쇼크를 받고 따라 그렸을 것이라는 걸로 결론이 났다. 교수님은 수업에 나왔다. 어째서 시골 할머니가 그렇게 그림을 잘 그렸냐는 건, 뭐 재능을 몰랐던 거 정도로.

 또각또각, 교수님의 하이힐 소리만 실습실에 울려 퍼진다. 언니는 사과를 보면서 가슴에 손을 얹는다. 가슴 언저리 어딘가에서 바닥을 벅벅 긁는 듯, 뭔가 아릿하다. 언니는 훌륭한 화가가 되고 싶다. 그리고 언니는 살짝 시계를 본다. 현식이가 데리러 온다고 했는데.

 동생은 집에서 텔레비전을 보다가 깜짝 놀랐다. 사실 뉴스를 좋아하는 건 아니지만, 오늘 뉴스를 보고 있었던 건 운명이라고밖에 생각할 수 없다. 이 엄청난 장면을 놓친 가여운 친구들한테 동생은 손가락에 모터를 달고 마구 문자를 보내고 있다. 아마 지금쯤 인터넷 인기 검색어에는 당당하게 1위로 올라있겠지.
동생은 중학교에 들어가면 방송부가 될 거다. 심심하면 집에서 입에 연필을 물고 책을 읽어본다. 거기다가 요즘엔 아나운서가 뜨는 시대가 아닌가. 예쁜 아나운서들이 개그도 하고 사회도 보고 뉴스 진행도 한다! 동생은 사실 멋진 아나운서가 되고 싶다. 그래서 열심히 팩도 한다. 입에 연필을 물고 책을 읽는 건 부수다. 나중에 성형수술도 꼭 할 거다.

 동생은 그래서 가끔 부수적으로 뉴스를 본다. 예쁜 아나운서들은 꼭 뉴스 앵커가 되고 싶어한다. 동생은 잘 모르겠다. 뉴스는 별로 재미도 없고, 뉴스에서 얘기하는 건 그다지 튀지도 않는다. 튀는 건 뉴스뿐이고, 아나운서 얼굴은 잘 보이지도 않는다. 그렇지만 다들 뉴스 앵커가 되고 싶어한다. 그러니까 동생은 종종 뉴스를 본다. 그런데, 오늘 엄청난 일이 벌어진 거다. 동생이 제일 우아하게 생겼다고 생각하는 저 앵커 말이다. 목소리도 곱고, 늘 꼿꼿한 자세로 우아하게 입술을 여는 저 앵커 말이다.

 성대모사도 할 수 있을 거 같다. 자, 방금 전 그 상황을 동생의 입을 통해 들어보자.

 "오늘 대구광역시 달서구 진월동에서 한 십칠세 김모양이 자신의 숙부인 사십오세 김모씨를 살해했습니다. 김씨는 김양을 열다섯살 때부터 성적으로 학대해왔다고 김양은 진술……했다 그래, 씨발 내가 죽였다. 그……괴새…끼…나쁜 새끼…… 무슨 짓을 저질렀는지 알기는 알아? 너희는 성적으로 학대해왔다고 진술했다고 하면 끝이지. 그 미친 새끼가 윤미한테 담배꽁초를 처넣을 때, 너희는 대체 뭘 했어. 씨발놈…… 이제 나한테까지 그러길래……"

 까지 말하고 앵커는 울음을 터뜨렸고, 급작스럽게 뉴스 로고화면이 나왔다. 이건 뭐, 끝내주는 일이다. 생방송의 매력이란 이런 건가. 동생은 손에 단 모터를 한참 후에야 해제했다. 이후에도 계속 문자는 오고 있다. 동생은 약간 석연치 않은 불안을 안고 있지만, 그건 문자로 보내지 않았다. 아나운서의 예쁜 커트머리가 잠깐 변했던 거 같은 생각이 든다. 수민이의 용솟음치던 머리카락을 떠올리다 동생은 머리를 흔들었다.

 저녁에 언니랑 동생은 리모콘을 들고 잠깐 티격태격했다. 언니는 반드시 MTV를 봐야한다고 했지만, 동생은 결국 뉴스를 틀었다.
 "저거 보라니깐!"

 다른 방송국의 다른 앵커가 말하고 있다.
 "……방송 중에 욕설과 격렬한 분노를 드러낸…… 정신을 잃었다가 의식이 돌아왔습니다. 모 앵커는 그 사건에 대해서는 전혀 기억이 나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현장의 이민규 기자……."

 언니가 한마디 했다.
 "별 미친년들 다 있다니깐."

치명적인 여자들

 언니는 현식이와 함께 있다. 현식이는 손가락을 까딱거리면서 바닥을 친다. 톡, 톡, 톡, 톡, 톡…… 소리가 잦아질수록 언니는 점점 불안해진다. 아무 말이라도 해 줬으면 좋겠다. 분명히 현식이한테도 전화가 갔을 거고, 설령 안 갔다고 해도 보기는 봤을 거다. 안 갔을 리가 없지. 현식이랑 언니가 사귀는 건 과 전체가 아주 잘 아는 일이다. 그런데도 현식이는 아무 말 없이 톡, 톡, 톡, 톡, 톡, 톡…….

 톡, 톡, 톡, 톡, 톡, 탁, 탁, 탁, 탁, 탁, 언니는 달리고 있었다. 틀림없이 달리고 있었다. 언니는 컴퓨터 앞에서 왈칵 울음을 터뜨렸다. 모니터 속에서 언니는 틀림없이 지하철 안을 질주하고 있었고 소리를 지르고 있었고 펄쩍펄쩍 뛰면서 춤을 췄다. 뭐라고 말하는 거 같긴 한데 대체 뭐라고 말하는지 알아들을 수도 없었다. 언니가 정신을 차린 건 집에 도착해서였다. 동생은 언니가 브래지어와 팬티 차림으로 집으로 뛰어 들어왔다고 했다. 그러더니 침대에 쓰러져서 그대로 잠들더라는 거다. 그래도 개중 다행인지 화면에서 벗고 있던 건 발뿐이었다.

 인기 검색어 1위를 몇 번씩이고 맨발녀가 쟁탈했고 누군가 화라도 내 줬으면 했지만 아무도 말을 해 주지 않았다. 전화가 꽤 왔지만, 전화가 와서도 다들 입을 다물었다. 차마 말을 못 한 거겠지. 하지만 현식이까지 이러는 건 너무하다.

 언니는 결국 터져버렸다.
 "왜 아무 말도 안 해?"
 "뭘?"
 톡, 톡, 톡, 톡, 톡, 톡, 톡, 톡, 톡,……. 언니는 모니터 앞에서 그랬던 것처럼 현식이 앞에서 눈물을 쏟는다. 그리고 말을 하기로 했다. 그리고,
 말을
 할 수가 없다.
 표정을 지을 수도 없고, 손가락을 움직일 수도 없다. 갑자기 현식이가 멀어져간다. 그리고 고개를 들고 현식이가 웃는다.

 "너구나."
 뭐? 언니는 눈을 감았다.

 정신을 차렸을 때 언니는 실습실에 있었다. 발목 끝에 팬티가 달랑거린다. 그리고 가슴이 아래 위로 일렁거린다. 현식이는 언니의 엉덩이를 양손으로 잡고 힘껏 밀어붙이고 있다. 어라? 하읏, 숨이 거칠게 새어나온다. 뭐지? 현식이가 움찔거리는가 싶더니 몸에서 쓰윽 빠져나간다. 혹시나 안에다 한 건가! 언니는 재빠르게 고개를 숙여서 살펴본다. 그건 아닌 것 같다. 현식이는 눈을 가늘게 뜨고 언니를 힐끗 보더니 몸을 돌려서 바지를 입는다. 언니는 현식이 팔을 붙잡았다.

 "야……아."
 바지를 입던 현식이는 갑자기 눈을 커다랗게 뜬다.
 "……목소리."
 "뭐?"

 언니의 질문에 대답할 틈도 없이 현식이는 티를 주워들고 실습실 문을 열었다. 그리고 복도 맞은편 강의실로 들어갔다. 언니는 현식이를 쫓아가려다가 흠칫, 팬티를 입었다. 사실 언니는 화가 난다. 제정신이라면 절대로 실습실에서 옷을 벗지는 않았을 거다. 대체 내가 정신을 잃은 사이에 또 무슨 일이 있었던 건가. 어쨌든 서둘러서 옷을 주워 입었다. 누구라도 들어오면 큰일이다. 손이 떨려서 몇 번씩이나 옷깃을 놓쳤다.

 사실 언니는 지금 비참하다. 말로 차마 다 할 수 없을 정도로 비참하다. 기억이 뭉텅이씩 잘려져 나간다. 언니는 언니가 누군지도 모르겠다. 옷을 다 입고 나서 언니는 그냥 콱 죽고 싶다고 잠깐 생각했다. 그제야 언니는 또 알았다. 눈알이 흘러내릴까봐 볼을 자꾸 만져보고 있었다는 사실을.

 언니는 강의실 앞에서 한참을 망설였다. 또 기억이 사라졌었다는 사실을 어떻게 현식이한테 말해야 한단 말인가. 아니, 그보다 아까 그 현식이 표정이 더 신경 쓰인다. 마치, 아니 착각이겠지만, 그래도 마치, 언니가 '언니가 아니었'다는 걸 알고 있는 거 같은 표정. 대체 언니는 언니가 기억하지 않는 때에 무얼 했던 걸까. 현식이 때문인지 언니 때문인지 알 수 없지만 언니는 도통 눈물을 멈출 수가 없다.

 언니는 용기를 내서 살짝 강의실 문을 열었다. 약간 열었을 때, 언니는 그림을 보았다. 그림에는 역시 여자가 있었다. '역시'라고 표현한 건, 어딜 봐도 교수님 그림이었기 때문이다. 그림 속에 있는 여자는, 다리를 벌리고 팬티를 발끝에 건 채 울고 있었……다? 그림에 온통 붉은 빛이 쏟아지고 있었다. 조금 더 열었을 때 언니는 현식이와 초록색 구두를 보았다. 조금 더 열자 예쁜 다리를 살짝 꼬고 있는 교수님이 보였다. 교수실의 붉은 조명은 교수님을 더 눈부시게 만들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현식이와 빈틈없이 입술을 맞대고 있는 교수님이었다.

 그 때까지 언니의 뺨에는 계속 뭔가 흐르고 있었고, 그래서 정말 울고 싶어지니 언니는 어떻게 해야 할 지 알 수가 없어서 일단 문을 열고 들어갔다. 현식이는 입술을 떼고 이쪽을 돌아다 봤고, 교수님의 머리카락은…… 언니는 숨을 크게 들이쉬려고 했지만, 잘 숨이 쉬어지지 않았다. 교수님은 웃고 있었다. 새빨갛게 불타면서 하늘 위로 올라갈 듯 솟구치고 있는 교수님의 머리카락은 점점 길어지는 것처럼 보였다. 언니는 더 이상 교수님을 똑바로 바라볼 수 없었다. 크 으 으 으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 드디어 비명이 터져나온 순간

 언니는 야수처럼 그림을 향해 달겨들었다. 그림은 살짝, 언니처럼 보였다. 언니는 교수님이 만든 그림을 찢으려고 했지만, 찢으면 찢을수록 그림은 언니였다.

 언니가 그림을 찢어발길 때 불타는 것 같은 머리를 중력이랑 아무런 상관없이 아름답게 휘날리며 교수님은 가만히 언니를 지켜보고만 있었다. 언니는 이제 무슨 말을 해야 할 지 알 수가 없었다. 교수님이 어떻게 이럴 수가 있어요? 이럴 수도 있다. 현식이는 제 남자친구에요? 아닐 수도 있다. 행복하세요? 미친 것도 아니고.

 "그건 내 자화상이야."
 교수님 목소리는 난데없이 콰직콰직 속을 짓밟아댔다.
 "……저잖아요."
 "네가 나니까 그렇지."

 톡, 톡, 톡, 톡, 톡, 톡, 톡, 톡, 교수님이 앉아있던 의자에서 현식이가 손가락을 두드리고 있었다. 톡, 톡, 톡, 톡, 톡, 언니는 맨발로 지하철을 달리고 있었다. 톡, 톡, 톡, 톡, 톡, 그래, 너로구나. 달리기도 잘 하고 현식이가 좋아하고. 설마 네가 뉴스에서 비명을 질렀니? 또 네가 그림을 그리던 할머니였니? 또…….

 "난 지금껏 내 자화상밖에 안 그렸어."

 고등학교 1학년 때 흘렸던 그 눈물이 떠올랐다. 내 속에도 있었던 걸까. 난 나를 보면서 끝내 울었던 걸까. 그러고 보니 정서적 공감을 불러일으키는 건 여성한테 뿐이라고 교수님을 공격했던 평론도 있었다. 너는, 그러면 너는,
 "……누구?"
 
 "나는, 스넌이야."

 동생은 눈을 커다랗게 떴다. 수민이의 머리카락은 자기 의지라도 가지고 있는 듯이 한쪽으로 구부러지면서 동생의 뺨을 쓰다듬었다. 수민이의 또 다른 인격은 수민이가 절대로 못 할 것 같은 어른스러운 표정으로 싱긋 웃었다. 어쨌든 이 스넌이라는 게 뭔지 알아야 수민이를 돌려놓을 수 있다. 동생은 어쨌든 인격 스넌 역시 수민이라는 판단을 내렸다. 지멋대로 휘날리는 새빨간 머리카락은 아무래도 뭔가 쓰인 거 같지만, 그래도 인격 스넌의 비위를 맞춰 주자는 생각에서 눈을 크게 뜨고 순진한 표정을 지었다. 어쨌든 초등학교 5학년한텐 이게 잘 먹힌다.

 "스너언? 수민이가 아니야아?"
 "믿는 척 할 필요 없어."
 흠칫.

 "네 언니도 방금 나랑 만났어."
 "뭐?"
 스넌은 울음을 터뜨렸다. 아니, 스넌이라고 말해버리다니. 스넌으로 변한 수민이는. 아니 스넌인 척 하는 수민이는. 공포 소설같은 걸 보면 그 요괴가 자신이라고 믿는 순간부터 요괴는 떨어져나가지 않는다. 아니, 요괴가 아니라 이중인격이지. 해리성 인격장애? 뭐 그런 거였지. 그건 그렇고 얘는 왜 우는 거지? 원체 잘 울던 수민이를 생각하니까 마치 수민이인 것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수민아?"
 수민이인지 스넌인지는 눈물에 젖은 속눈썹을 빠르게 깜빡거렸다.

 "이제 얘는 수민이가 아니야. 내가 빠져나간다고 해서 수민이가 되진 않을 거야. 조금씩 수민이가 아닌 게 될 거야. 아직까지는 수민이일지 모르지만. 너희 언니는 너희 언니가 아니야. 이미 오래 전에 아니야. 다들 자기가 자기인 줄 알지. 하지만 자기가 자기가 아니라는 걸 아니까, 자기이고 싶으니까 그림을 그리고 글을 쓰고 춤을 추고 노래를 하는 거야. 아마, 곧 수민이도 그렇게 되겠지. 나는 그게 슬퍼."

 아무래도 이건 수민이가 아니다. 아닐 거다. 수민이의 다른 인격이라면 수민이가 사용할 법한 어휘들을 사용해야 한다. 그렇지만 얘는 아니다. 말투도 어휘도 수민이랑은 전혀 다르다. 거기다가 뭔 소린지 모를 말을 마구 늘어놓는다. 그러니까, 자기는 수민이가 아니라고? 그렇지. 넌 스넌이니까. 근데 스넌이 아니라도 수민이가 아니라고? 거기다가 우리 언니가 언니가 아니라고?

 "난 네 속에는 없어."
 스넌은 동생의 손을 잡았다. 스넌의 머리카락은 아까보다 훨씬 격렬하게 흩날렸다. 세상이 온통 빨간 빛으로 변하는 것만 같다.

 "네가, 부러워."
 스넌은 다시 울음을 터뜨렸다. 뭔지 잘 모르겠지만 동생도 마음이 아파져서 스넌을 끌어안았다. 한참 동안 어깨에 턱을 대고 울던 스넌은 계속 울면서 고개를 들었다. 머리카락이 추욱 내려앉았다.

 "나, 왜 울고 있지?"
 아니, 수민이었다.


당신의 마음도 격침

안타깝게도 언니의 이야기는 해 줄 수가 없다. 언니는 스넌으로 변하는 빈도가 점점 잦아져서 요즘에는 언니의 생각은 아주 단편적이다. 그런 단편적인 생각의 대부분은,

 "어? 여긴 어디? 난 누구? 왜 이러고 있지?"
 에 집중되어 있다. 그런 이야기를 해도 별로 재미는 없을 거다. 거기다가 마음만 아파질 뿐이다.

 생각해보자, 정신을 차렸더니 어느새 육삼빌딩에 있는가 했더니 또 눈을 깜빡이니까 속초행 열차에 타고 있고 또 눈을 깜빡이니까 앞구르기를 하고 있다. 옆에서 동생이 손뼉을 치면서 즐거워한단 말이다. 이래서야 도무지 의미가 없다. 역시 집에서 의식이 돌아올 때가 많기는 하지만, 보통 그건 자기 전이다. 시계를 보면 밤 열두시에서 새벽 한시. 언니가 할 수 있는 일은 한숨을 쉬고 뒤에 후크만 풀려있는 브래지어(대체 왜 후크만 풀고 사라지는 건지 알 수가 없다. 그냥 끝까지 풀고 네가 자면 되잖아!)를 끄르고 나서 자신의 불행한 처지에 대해 한탄하며 깨어있으려고 노력을 하는 정도다. 생의 모든 에너지를 담아 눈꺼풀을 치켜올리지만 얼마 가지는 않는다. 곧 고개는 바닥을 향해 치닫는다. 언니는 아무래도 스넌이 몸을 극도로 피곤하게 만들어 놓고 빠져나가는 것 같다고 생각한다. 언니는 차마 잘 수 없다. 잠이 들고 나면 또 밤이다. 그렇다고 해서 다른 사람한테 전화를 할 수도 없다. 전화를 거는 순간 눈을 감았다 뜨면 다시 밤이다. 나쁜 년.

 가끔 스넌이 나타나지 않아서 당황하고 있으면, 다른 사람의 얼굴을 빈 스넌이 나타나서 무려 사과까지 한다. 너무 많이 거기 있어서 미안하다고. 거기에다가 하는 얘기는 동생이 좋다는 거다. 동생이랑 친하게 지내고 싶다는 거다. 그렇다고 스넌의 뺨을 후려칠 수도 없다. 그러려고 하면 스넌이 언니 속으로 들어와 버릴 테니까. 사실은 몇 번이고 그런 적이 있다. 스넌이 단 한 번 언니를 내버려둔 건 언니가 동생한테 구원을 요청했을 하룻밤뿐이었다. 동생은, 스넌이 누군지 알고 있었다.

 그래서 동생은 학교가 끝나면 꽤나 잰 걸음으로 집에 돌아온다. 스넌은 학교에 가는 건지 안 가는 건지 사실 잘 모르겠다. 이번 학기가 끝나면 언니 학점은 삽질을 해서 아르헨티나까지 갈지도 모르겠다고 가끔 생각한다. 하지만 동생은 스넌이 집에 있는 게 좋다. 언니가 사오는 붕어빵이나 닭꼬치보다도 스넌이 집에 있는 게 좋다. 언니도 집에 있어줬으면 좋았을 거다. 언니가 싫다는 게 아니고.

 언젠가 언니는 밤에 잠옷을 입고 동생 방에 들어왔다. 구해달라고 말했다. 스넌한테 속아서는 안 된다고 했다. 그래서 동생은
 "나, 스넌 알아."
 라고 대답했다. 언니는 제발 구해달라고 했다. 살고 싶다고 했다. 끔찍하다고 했다. 언니는 동생의 팔을 쥐어뜯으면서 울다가, 너한테 말해봤자 무슨 소용이겠냐면서 방으로 돌아갔다. 동생은 언니가 깨어있으려고 죽을만치 노력하다가 잠든다는 사실을 안다. 자고 일어났을 때 동생을 끌어안으면서 입 맞추는 건 언니가 아니라 스넌이라는 것도 안다. 하지만 스넌은 저렇게 좋은 사람인데.

 스넌은 책을 읽고 있다. 동생이 들어오자마자 스넌은 시익 웃는다. 스넌의 웃는 모습은 어쩐지 체셔 고양이 같다. 입이 귀에 걸린 것처럼 시익. 스넌이 집에 온 날부터 집은 온통 붉고 밝게 빛난다. 딱 하나 마음에 안 드는 건 그거다.

 오늘은 현식이 오빠도 있다. 언니 애인이라는 말은 전부터 많이 들었지만 소개를 받은 건 스넌한테서다. 저 가느다란 머리카락에 가느다란 손가락. 빤하게 보고 있다는 걸 알았는지 현식이 오빠는 이쪽을 돌아다보고는 살짝 눈웃음쳤다. 잠깐 덜컹했다. 스넌도 언니도 현식이 오빠랑 만나고 있는 건 역시, 이래서였나보다. 스넌은 요리를 잘한다. 파스타를 들고 왔다.

 "넌 와인은 안 돼."
 스넌은 눈을 찡긋하고는 잔에 물을 따른다. 스넌이 윙크를 할 때면 마음이 편안해진다. 텔레비전을 봐도 책을 읽어도 윙크를 하는 여자들은 입술이나 볼이 빨갛고 가슴을 들이밀고 부담스러운 몸짓을 한다. 하지만 스넌의 윙크는 뭔가 다르다. 혼란스럽게 하기보다는 마음을 더 단단하게 붙들어 매는 느낌이다. 그리고 스넌이 좋다.

 스넌은 언니 옷장에 가득 있는 예쁜 옷들에는 조금도 관심이 없다. 아니, 집에서는 브래지어만 하고 있는 때가 더 많다. 브래지어에 트레이닝 바지라니 이건 무슨 애 둘은 낳은 주부같다. 거기다가 향수도 안 뿌리고 화장도 하지 않는다. 얼굴은 언니 얼굴이지만 이건 언니라고 할 수가 없다. 자기 몸으로 이렇게 살고 있는 걸 알면 언니가 원통해서 스넌을 죽이려고 들 거다. 아, 스넌은 죽을 수가 없지.
아무튼 스넌은 매일 이야기를 한다. 텔레비전보다 스넌의 이야기는 훨씬 더 재밌다. 스넌은 신문을 읽다가 추리를 하기도 하고, 몇 백 년 전에 일어난 이야기를 실감나게 이야기 해 주기도 한다.

 "비슷한 사건이 백 년쯤 전에 미국에서도 있었거든. 그 때도 저렇게 문은 닫혀있었고. 처음에 들렸던 비명소리는 속임수야. 실제로 사건이 일어났을 때는 비명소리 같은 건 들리지 않았겠지."

 스넌이 아무렇지도 않게 저렇게 이야기 할 때마다, 동생은 기분이 좋아진다. 약간 팔이 아파지긴 하지만. 스넌은 아주 옛날부터 살았다고 했다. 스넌의 머리카락은 가볍게 흔들린다.

 "나는 네가 좋아."

 동생도 스넌이 좋다. 하지만 스넌한테 좋아한다고 말할 수는 없다. 언니는 동생 팔을 붙잡고 구해달라고 말했다. 언니는 원래 잘 울지만 저렇게 울어대다가 눈알이 흘러내리지 않을까 그 날 밤은 걱정까지 되었다. 언니는 울면서 동생을 할퀴었다. 팔에 발갛게 상처가 생겼다. 스넌은 용케도 그날 밤 나타나지 않았고 오늘도 아주 즐겁게 이야기를 한다.

 가끔 스넌은 언니 말고 다른 사람으로도 나타난다. 수민이도 스넌이다. 스넌은 이제 수민이로 사는 방법에 익숙해 진 것 같다. 스넌이 머리카락을 띄우지 않을 수 있다는 것도 동생은 알고 있다. 가끔 나한테만 살짝 얘기해준다. 이 아이는 갑갑하게 살았었나봐. 아이들은 스넌인 줄 모르지만 오히려 수민이보다 스넌을 더 좋아한다.

 수민이는 종종 나타난다. 마치 언니처럼 불규칙하게 나타나지만 언니보다는 더 자주 나타난다. 수민이가 사실은 가끔만 수민이라는 사실을 눈치 챈 건 동생뿐이다. 수업시간에 잠깐 수민이가 되었다가, 쉬는 시간에 다시 말을 걸면 스넌이 되어 있다. 왜 수민이가 나왔던 거냐고 묻는 질문엔 절대로 대답해주지 않는다. 아무튼 스넌은 완전히 누군가로 살 생각은 없는 모양이다.

 가끔 스넌은 선생님으로도 나타난다.
 "이거 집에 가져가. 있다가 같이 먹자."
 굉장히 비싸 보이는 도넛이다. 맛있겠다고 생각하자마자 또 언니한테 할퀸 자리가 욱신거렸다.

 수민이, 아니 스넌이 온다.
 "그거 되게 맛있대."
 "스넌은 안 먹었어?"
 "같이 먹는 게 더 맛있잖아."

 스넌은 시익 웃고는 옆에 앉았다. 스넌은 어디에든 있다. 그 선생님이 스넌으로 변해서 말을 걸어온다고 스넌이 그 때 언니한테 없는가 하면 그건 아니다. 가끔은 수민이인 스넌과 선생님인 스넌이 함께 말을 걸어오기도 한다. 스넌은 둘이지만 둘은 하나인 모양이다. 수민이와 선생님까지 셋과 이야기하고 있지만 실제로 이야기를 하고 있는 건 동생과 스넌뿐이다. 수민이와 선생님은 같다.

 "스넌, 왜 내 속에는 없어?"
 스넌은 아까 동생한테 준 도넛을 우물거렸다.

 "넌 편하니까."
 "그럼 스넌은 불편해?"
 스넌은 도넛을 우물거리면서 웃었다. 동생은 스넌이 너무 예뻐서 자칫 스넌의 뺨에 입이라도 맞출 뻔했다. 매일 아침 스넌이 그러는 것처럼. 가슴이 뛰자 팔이 화끈거렸다. 동생은 빠르게 팔을 움켜잡았다. 언니. 말을 하는 건지 안 하는 건지 모르게 구해달라고 중얼거리던 언니 입술은 설탕가루를 잔뜩 묻힌 채 움직인다. 동생은 팔이 아팠다.

 스넌은 뭐가 불편한 걸까. 끝까지 입을 다물다가 스넌은 브래지어 위에 빨간 블라우스를 걸쳤다. 저 차림으로 나가면 옆 유치원에 사는 닭도 웃을 거다.

 동생은 그 밤중에 언니가 찾아왔을 때를 생각했다. 언니가 돌아오는 시간의 90% 정도는 밤중이다. 그리고 집이다. 혹시 스넌은 햇빛이 불편한 걸까? 언니는 잠옷을 입고 있었다. 하지만 스넌의 트레이닝 바지 역시 잠옷 못지않게 편하다. 그렇다면 스넌은 뭐가

 ……그거?
 동생은 양쪽 가슴에 손을 얹었다. 여전히 밋밋하다.

 스넌이 돌아오자마자 동생은 물었다.
 "어디 갔다 왔어?"
 사실 동생은 지금까지 한 번도 스넌한테 이런 걸 물은 적이 없었다. 그래도 스넌은 대답 없이 또 시익 웃기만 한다. 말해줄 생각은 없는 모양이다. 동생은 마음을 다잡고 다시 물었다.

 "스넌, 스넌이 말하는 몇 백 년 전에는 브래지어 없지 않았어?"
 이번에는 웃지 않는다.
 스넌은 웃지 않고 빤히 동생을 본다. 동생은 말하지 말 걸 그랬나, 잠깐 후회한다. 스넌이 슬퍼보여서 동생은 약간 슬프다고 생각하려다가 팔을 쓸어내렸다. 언니는 지금도 어딘가에서 구해달라고 중얼거리고 있을 거다. 그러니까 동생은 언니를 구해야 한다. 좀 슬픈 점이 있다면, 언니가 사악한 악마의 손에 잡혀가서 칼을 들고 동굴로 질주하는 이야기가 아니라는 거다. 동생은 차라리 그랬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스넌이 슬퍼보인다. 동생은 그걸 견딜 수가 없다.

 "코르셋이 있잖아."

 스넌은 조용히 동생을 끌어안았다. 스넌의 머리카락이 동시에 꼿꼿이 하늘을 향해 솟구친다. 동생은 숨쉬기가 힘들다. 온 몸이 저릿할 정도로…… 두렵다. 머리카락은 지금이라도 모든 걸 죽일듯이 하늘을 향해 내달린다. 부들부들 떠는 동생을 스넌이 끌어안는 순간, 동생은 타는 것 같은 통증에 입술을 깨물었다. 동생은 요한 계시록처럼 나타나는 장면들을 본다. 코르셋으로 허리를 잘록하게 조인 귀부인이 강에서 몸을 던진다. 예쁜 머리카락은 완전히 흐트러져서 하늘을 향해 번쩍거린다. 웃고 있는 입이 점점 길어진다. 귀에 걸릴 것 같구나, 스넌. 하녀에게 힘껏 코르셋을 조이게 한 왕비는 왕을 독살한다. 역시 길게 웃고 있다. 왕이 죽는 순간 왕비의 머리카락은 붉게 솟구쳤다. 시뻘건 용암이 모근에 또아리를 틀고 있다. 또르륵 컵이 굴러간다. 스넌은 기뻐 보인다. 기모노에 오비를 세게 두른 여자의 붉고 아름답게 빛나는 머리카락은 물속에서 그 사람의 발을 놓아주지 않는다. 스넌, 잠깐만 스넌, 브래지어만 한 할머니가 그림을 그린다. 마치 불길같은 색깔로 빛나는 머리를 한 채, 저 그림은…… 꽉꽉 코르셋을 조이고 그 안에서 조용히 무언가가 깨졌다.

 "난 네가 좋아."

 동생은 지금이야말로 스넌한테 말할 때라고 생각했다. 이제는 말해야 한다. 동생은 스넌을 끌어안은 채 귓가에 입을 가져다 댔다. 동생의 손이 스넌의 브래지어 후크를 감쌌다. 스넌의 머리카락이 동생의 목을 휘어감는다. 그럼에도 동생이 걱정한 건, 스넌의 눈알이 흘러내리는 게 아닐까, 약간 두려워하면서

 "나도 스넌이 좋아."

복수, 번개처럼 달리다

 눈을 뜬 것은 언니였다. 역시 브래지어를 끄르는 것과 동시에 스넌은 사라졌다. 언니는 동생을 끌어안은 채로, 자기가 영원히 돌아왔을지도 모른다고 직감했다. 동생은 용사였다. 롤플레잉 게임에 지금 당장이라도 주인공으로 출연해도 된다. 물론 언니 말고는 아무도 몰라주지만 동생은 확실히 용사였다. 언니는 동생이 자랑스러웠다.

 동생이 브래지어를 끄르고 나서 언니는 변하지 않았다. 동생은 몇 번씩이고 얘기했다.

 "브래지어 하면 안 돼. 다 버려. 도로 스넌이 나타날 거야."
 언니는 동생 말을 듣기로 했다. 동생은 스넌과 친했던 거 같지만, 묻지 않기로 했다. 어쩌면 동생은 스넌이 다시 나타나는 게 두려운지도 모른다. 어쨌든 언니는 이제 다시는 사라지고 싶지 않았다. 스넌이 나타난 이후로, 언니는 기껏해야 일주일 정도 살았을 뿐인데, 어느 새 여름이었다. 물론 학점은 개판이었고, 지금껏 4.0 밑으로 내려가 본 적이 없는 언니는 네 개의 F 앞에서 지금 당장 서부의 벌판으로 뛰쳐나가고 싶은 충동을 억제해야만 했다. 땅, 땅, 땅, 땅.

 방학이 되었지만 언니는 집에 있는 게 싫었다. 집에서 컴퓨터 앞에만 앉아 있는 데는 질렸다. 언니는 언니 손으로 언니 팔으로 무언가를 잡아야만 했다. 언니의 몸이 움직이고 있는 걸 확인하지 않으면 안심이 되지 않았다. 그래서 언니는 아르바이트를 시작했다. 유니폼이 예쁜 카페였다.

 손님들은 흘끔흘끔 언니의 가슴을 봤다. 유니폼은 유난히 가슴을 강조하는 복장이었다. 하지만 귀여웠다. 거기다가 시급도 높았다. 가슴을 강조하는 유니폼은 손님을 많이 끌어왔다. 돈을 모아서 뭘 하려고 했냐고 묻는다면 언니는

 "글쎄…… 새 옷이나 살까."
 했을 거다. 사실 별로 아르바이트를 해야 할 이유는 없었던 거 되겠다. 그렇지만 언니는 아르바이트를 해야만 했다. 자신의 손과 발을 움직여서 무언갈 만들고 무언갈 해야만 했다. 스넌이 그랬던 것처럼. 스넌은 벌써 두 달째 소식이 없다. 언니는 현식이와 헤어졌다. 이제 다시는 네가 사랑하는 그 사람을 만날 수 없을 거라고 하자, 현식이는 깔끔하게 헤어져줬다. 현식이와 헤어지고 돌아오는 길에 언니는 아르바이트를 해서 새 옷을 사는 대신에 쌍꺼풀 수술을 할까, 고민했다. 그러다 또 눈알이 흘러내지 않을까 하는 불안감에 관두기로 했다. 벌써 언니는 뺨을 어루만지고 있었다. 언니는 이제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다. 사실 체조라던지 요가도 하고 싶었다. 몸을 가능한 크게 많이 움직이고 싶었다. 하지만 그럴 순 없었다.

 언니는 브래지어를 할 수 없는 몸이다.

 언니가 브래지어를 하지 않고 나서 세상은 안정적이었다. 언니가 스넌이던 사이 미친년들은 지구적으로 출몰했던 모양이었다. 뭔 '녀'나 '걸'들은 엄청나게 늘어났고, 그건 사실 스넌이었다고 동생은 얘기해줬다.

 "스넌은 한 사람이지만, 아니 한 인격이지만 여러 개가 될 수도 있대. 그러니까 여러 개 속에 있으면 따로따로 생각하고 그걸 다른 인격들한테 전달할 수도 있다는 거야. 꼭 하나님 같아."

 그러게.

 덕분에 체조도 할 수 없고 요가도 할 수 없는 언니는 가슴을 바라보는 시선들 때문에 돌아버릴 것 같았다. 그래요, 나 브래지어 안 했어요. 커피를 나르면서 언니는 가끔 생각했다. 유두가 커진다. 점점 커진다. 아주아주 커진다. 쟁반을 손이 아니라 유두가 들고 있다. 사람들이 벌떡 일어난다. 박수를 친다. 오오오오오, 정말 굉장한 유두야. 부끄럽지도 않나? 어떻게 유두를 저렇게 드러내놓고 돌아다닐 수 있지? 유니폼이 찢어진다. 유두가 점점 커져서 이제는 가슴보다도, 아니 언니보다도 더 크다. 오오오오오, 정말 굉장한 유두야. 부끄럽지도 않나? 부끄럽지도 않나?

 부끄러워요.

 캡이 없는 브래지어를 하고 학교에 갔다가 하복으로 유두가 도드라져 보였던 중학교 2학년의 어떤 날, 언니는 끝내 울면서 집으로 돌아왔다. 선생님은 막대기를 들고 쿡쿡, 언니의 가슴을 찔렀다.

 "넌 부끄럽지도 않냐?"

 부끄러웠다. 언니는 산만해진 유두를 힘겹게 부여잡고 집으로 돌아왔다. 스넌이 사라진지 두 달째 되던 그 날, 언니는 더 이상 견딜 수 없었다. 동생은 집에 돌아와서 언니가 옷을 갈아입는 장면을 보고 말았다. 언니는 팔랑팔랑 티셔츠를 벗고서 서랍 안에서 하얀색 그것을 꺼냈다.

 "아,"
 언니가 후크를 채우는 순간, 동생은 뒷걸음질쳤다. 머리카락이 가볍게 흔들리기 시작했고, 새빨간 머리를 위로 내쳐 올린 스넌이 뒤를 돌아봤다.

 동생은 죽을 것만 같았다. 아니 조금 있으면 죽을 거다. 안 돼, 스넌, 그만 둬. ……라고 말할 수 있을 리가 없지. 스넌의 머리카락은 동생의 목을 파고들었다. 이대로라면 뚫려버릴 것만 같았다. 스넌은 울고 있었다. 동생의 뺨 위로 뚝뚝 눈물이 떨어졌다. 스넌의 눈알이 해반닥해반닥 돌아갔다. 동생이 손을 뻗으려고 할 때

 스넌의 눈알이
 흘러내렸다.

 동생은 뚝 떨어지는 스넌의 눈알을 한 손에 받았다. 스넌의 힘은 조금도 약해지지 않았다. 동생은 더 이상은 버틸 수 없었다. 있는 힘껏 눈알을 쥔 손에 힘을 줬다. 스넌의 눈알이 동생의 손에서 뭉개졌고, 동생은 비명을 지르는 스넌을 힘껏 떠밀었다. 스넌이 밀려나갔다. 그리고 베란다의 턱을 휘청 넘어갔다.
동생은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스넌의 눈알은 그대로 있었다. 아니, 언니 눈알은. 언니가 떨어지고 있었다. 언니는 멈칫하는가 싶더니 끝내 비명을 질렀다.

 언니다, 언니다. 언니를 지금 창문에서 밀어버렸다. 언니가 죽어간다. 아니 곧 죽을 거다. 동생은 계단을 뛰어 내려가기 시작했다. 내가 언니를 죽인 걸지도 몰라. 하지만 그건 스넌이었는데. 스넌은 어디로 갔지? 언니는 왜 죽어야 하지?
동생은 아파트 계단을 뛰었다. 언니, 언니. 뛰어 내려가는데 505호 문이 덜컥 열렸다. 하얀색 브래지어를 손에 들고서 505호 아주머니는 따라 내려온다.

 "가슴이 많이 컸구나!"

 체셔고양이처럼 시익 입을 찢는 아주머니를 보면서 동생은 더 빨리 달려간다. 동생은 스넌보다 더 빨리 달릴 수 있다. 505호 아주머니, 아니 스넌은 불편하지만 동생은 편하니까. 동생은 변하지 않을 거다. 동생은 아주 빠르게 달려간다. 403호 문도 열린다.

 "5학년이면 브래지어 할 때가 되었지."

 동생은 멈추지 않는다. 동생은 사실 지금도 스넌을 좋아한다. 다정하고 상냥한 스넌. 언니보다야 몇 백 배쯤 더 살가운 스넌. 하지만 동생은 뛴다. 동생은 천천히 방아쇠에 손가락을 건다. 마을의 무서운 요괴를 이길 수 있는 유일한 처녀는 너 뿐이야. 살그머니 동생의 귀에 누군가 속삭인다. 힘 내. 아마, 귓전에 입을 가져다 댄 너는 스넌이겠지만 동생은 결코 약하지 않다.

 305호와 303호 문이 동시에 열린다.
 "브래지어가 필요해."
 "유두를 보이면 부끄러워."
 "갑갑해져야해."
 "어떻게 편한대로만 하고 살 수가 있니?"

 거짓말 하지 마, 스넌도 하고 싶지 않았잖아. 동생은 달리면서 신발을 벗었다. 조금 더 빨라졌다. 동생은 원피스를 벗어던졌다. 더 빨라졌다. 동생은 팬티도 벗었다. 자꾸 자꾸 빨라졌다. 아주머니들, 아니 스넌들은 점점 더 멀어져간다. 동생은 번개처럼 빠르다.

 동생의 다리에 뭔가 뜨뜻한 게 흐르고 있었다. 달리면서 동생은 고개를 숙였다. 피였다. 더럽다는 듯이 생리대를 말아 버리던 언니가 떠올랐다. 언니는 여전히 피투성이인 채로 아스팔트에 널려있었다. 뒤에서 솟구치는 머리카락의 감각을 느낀 순간 동생은 잠깐 멈출 뻔 했지만, 그래도 멈추지 않았다. 저 미친년들. 다시는 날 쫓아오지 못할 걸. 동생은 드디어 뜨거운 아스팔트 위를 세차게 내딛었다.

 그때 아파트 놀이터에서 나오던 여자는 실오라기 하나 안 걸치고 아파트를 맨발로 달리던, 거기에다 생리중이기까지 한 초등학교 5학년짜리 여자애와 눈이 마주쳤다. 여자는 목소리를 낮추고 중얼거렸다.

 "어머, 미쳤나 봐."







 분량이 애매하게 초과해서 (120장 정도인 듯합니다) 그냥 단편에 올려요. 중/장편엔 연재하시는 분들이 많은 거 같기도 하고.
댓글 2
  • No Profile
    奇極敾 09.11.10 19:40 댓글 수정 삭제
    잘 읽었습니다. 120매면 이 게시판에 올려도 상관없는 걸로 알고 있습니다.
    전체적으로 제가 읽기 버거워하는 경향의 소설이었습니다. 소설을 쓰거나 읽는 가장 중요한 조건 가운데 하나로 저는 명료성을 꼽습니다. 애매모호주제와 흝탕물처럼 흐린 이야기를 쓴다고 해서 애매모호하게 쓰거나 흐리게 쓰는 사람은 없겠지요. 소설의 내용이 그렇단 애기지 소설 자체가 그래버리면 읽어도 뭔 소린지 잘 모를 겁니다. 또 한 가지는 명료성과 맥을 같이하는 조건인데, 바로 형상화입니다. 이를테면 눈에는 보이지 않는 개념과 어떤 의도는 가시적인 것으로서 풀어내야 합니다. 형상화에 실패한 소설은 대개 관념을 중얼거리다가 끝나기 십상이라, 종국에는 대체 무슨 이야길 했는지 어리둥절해 하곤 합니다. 관념을 나타내고자 한다면 먼저 관념의 그릇을 만들어야 합니다. 인물의 행동이나 도구를 차용하여 방편적으로 드러내야 합니다. 적어도 저는 그렇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이제 소설 애기 좀 하겠습니다.
    입말에 가까운 재치가 있어 보일 뻔한 문장으로 엮어져 있는 게 특색입니다. 작가의 개성이 단번에 드러나는 대목이기도 하지만, 대체적으로 산만한 편입니다. 다듬으면 좋은 문장을 얻으실 것 같습니다.
    저는 이 소설을 이야기보다는 이미지로 이루어졌다고 생각했습니다. 서두에서 미친년의 사례를 들었는데, 이는 독자에게 힌트를 주려고 추후에 삽입한 대목이 아닌지요? 뒤늦게 이 소설의 숨은 의미를 파악해보려고 보잘것없는 뇌를 주름잡보던 차에, 그것을 보고 저는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그러나 그럴 의도라면 너무 안일하지 않습니까. 이미지의 나열로 인한 부족함을 단지 그런 식의 벌충만으론 어림없어 보입니다. 뭐 이 애기는 나중에 하기로 하고요.
    저는 이 소설을 할말을 위해 '짜여진' 소설이라고 봅니다. 즉 명확한 주제가 있지요. 배경은 익숙한 현실이지만 분위기는 영 딴판입니다. 비상식적이고 비현실적이고, 약간은 괴기스럽다고 하겠습니다. 이 일종의 환상적인 분위기는 스넌이란 존재가 나타남으로써 두드러집니다. 등장 인물들의 이상행동과 거칠은 장면 전환이 갑작스런 스넌의 등장을 완화시켜주는 역할을 합니다. 스넌이 대체 왜 출현했으며 어떤 의미를 가졌는지는 알 수가 없습니다. 다만 스넌이 어떤 의미를 가진 존재인가, 그것만 어렴풋이 유추할 수 있을 뿐입니다. 작가가 이미지를 보여줬기 때문입니다. 뭐 스넌의 의미야 좀 읽어보면 어느 정도 알 수 있는 있으니 별개로 치고 왜 그런 육화된 모습으로 등장했는지는 좀 의아합니다. 작가의 명령에 의해 엄연한 무대의 막을 헤치로 난입한 격입니다. 그냥 등장해서는 안되지 않을까요. 이것까지 이미지로 처리하기엔, 작위성 혹은 개연성의 눈치가 보이진 않을까요. 적어도 등장할만한 동기가 필요한 대목입니다.
    하여튼 스넌은 나타났습니다. 스넌의 마수에서 벗어나기 위한 언니의 노력은 무위로 돌아갑니다. 동생은 스넌에게 점령당한 언니를 아파트에서 밀어버립니다. 동생은 황급하게 아파트를 내려갑니다. 중요한 메세지를 전하는 스넌의 다른 분신들이 곳곳에서 나타납니다. 동생이 다리에 '생리'적인 피를 흘리며 아스팔트를 내딛습니다.(생리적 현상은, 벗어날 수 없는 몸의 저주이며 그렇기 때문의 스넌은 일종의 생리적 현상일 수도 있겠지요.) 이렇게 소설은 동생이 또 하나의 스넌이라는 암시를 남기며 끝납니다.
    저는 이 소설을 '여성을 폭압하는 현실의 알레고리적 해석'으로써 읽었습니다. 간혹 과격한 이미지의 근거가 혹시 고래로부터 끊이지 않은 여성학대, 여성멸시에 있지 않나 의심하곤 했습니다. 더 나아가 어떤 피해의식에 사로잡힌 결과물은 아닐까 하는 과대망상도 서슴치 않았다는 사실을 고백해야 할 것 같군요. 하지만 더이상 소설이 가진 의미를 떠들어대는 것은 저의 능력 밖의 일입니다. 밑천이 드러나기 전에 그만두겠습니다.
    소설의 완성도라는 측면에서 몇 마디 하겠습니다. '여기 있던 반지는 누가 치웠을까'라는 단락에서 반지가 사라지고 이것으로 자매간에 분란이 생기는데, 저는 어떤 의도로 쓰여졌는지 잘 모르겠더군요. 언니가 상자에 복사뼈를 다치는 묘사도 꽤나 길고 동생이 학교에서 반지를 발견하는 대목도 무시 못할 양인데...반지를 분실한 것을 두고 스넌이 출현한다는 암시이거나 스넌이란 인격의 어떤 현현이라고 볼만한 구석은 없는데 말입니다. 아무래도 이 반지 이야기가 글의 전체적인 몸매에서 똥배를 담당한다고 느껴집니다.
    잦은 장면전환과 강렬한 이미지로써의 보여주기식 소설도 단편소설 창작의 효과적 예라고 할 수 있겠지요. 그러나 이런 소설일수록 더욱 주제에 함몰되기 쉬운 위험이 있습니다. 보통은 독자가 자연스럽게 이야기를 따라가서 어떤 의미와 만나기 마련인데, 이런 소설은 제시된 이미지의 의미가 대체 뭐냐는 의문을 갖고 시작합니다. 생각하지 않고는 소설을 이해하기 힘들기 때문입니다. 소설 속에 몰입하기보다는 소설의 의미를 찾는단 말입니다. 매우 까다로운 문제입니다. 기껏 독자에게 의미를 찾게 유도해놓고는, 의미를 보여주지 못하거나 수준 이하의 주제를 노출시켜버리면, 그 소설은 실패입니다. 다시 말해서 이미지 위주의 공간적 소설은 작가의 깊이있는 통찰력이 전제되지 않고는 성과를 내기 힘듭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세계와 인간을 바라보는 작가의 시선이 보편성을 획득해야 하지 않을까요. - 한편 이야기 위주의 소설은 그런 부담이 덜한 편입니다. 왜냐하면 독자는 이야기에서 오는 오락적 재미를 우선시 하지, 의미는 어떤 보너스 정도로 여기기 때문입니다. - 헌데 이 소설은 독자에게 소설을 너무 제시하고 있다는 인상이 강합니다. 등장 인물의 이상행동과 스넌의 존재가 난해한 것은 힌트 부족 때문은 아닌 것 같습니다. 그것보다는 형상화의 과정이 허술하지는 않나 하는 혐의를 갖게 만듭니다.

    너무 지적만 한 것 같아 좀 찜찜하군요. 그러나 모두 앤윈님의 글이 괜찮기 때문에 이런 장문의 평을 남긴 것 입니다.
    이 정도 글을 쓰시는 분에겐 제가 때 좀 묻힌다고 해서, 큰 실수는 아니라고 애써 위로해봅니다.
    건필하십시오.
  • No Profile
    앤윈 09.11.11 06:24 댓글 수정 삭제
    감사히 받겠습니다.
    다만 한 부분만 살짝 지적하고 넘어가고 싶어서요. 어... 의도를 까놓고 말하는 게 좋은 건지 아닌 건지 잘 모르겠지만 ㅜ 여기서 동생의 '생리적 현상'은 벗어날 수 없는 압력을 상징하는 장치는 아니에요. 동생이 언니랑은 다른 하나의 '성장'을 이루었다는 걸 얘기하고 싶었습니다. 재치가 있어보일 '뻔한' 문장, 너무 와닿습니다. 허흑... 시간 들여서 이렇게 긴 평 써 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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