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밀번호를 잊어버리셨나요?

단편 일상단상

2009.11.09 20:4211.09

<span style="FONT-SIZE: 170%">일상단상</span>

 

청년은 회사를 쉬는 주말이면 안개로 젖은 새벽공기를 맡으며 주변의 산을 오르곤 한다. 문뜩 오늘은 평소보다 좀 멀리 산행을 나가자고 생각했다. 기실 주변의 산은 대부분 다 올라봤으니 새로운 산을 찾는 것은 산을 오르는 사람으로서 당연한 선택일 것이다.

청년은 새벽별을 뒤로 하고 다가오는 버스를 탄 채, 마을 밖으로 나간다. 버스 안에는 산행을 나오는 사람들의 모습이 하나 둘 섞여있다. 청년의 눈과 마주치자 눈웃음을 지으며 살짝 목례를 보낸다. 청년도 수줍은 미소를 지으며 똑같이 인사를 보냈다.

버스가 산에 도착했을 때에도 아직 해가 게으르게 기어오르는 중이어서 사람들은 드문드문 있을 뿐이었다. 약수터가 유명한 곳이라 사람들은 물통을 들고 입구로 향했다. 높은 산은 아니었지만 산세가 험했기에 산을 휘감은 뱀 마냥 나선으로 이어진 산경(山徑) 위로 사람들은 꼬리를 물고 오른다. 대열을 맞춰 올라가는 것이 약속된 행군마냥 발소리가 겹쳐져 산 속으로 흐른다.

거친 돌계단 위로 물통을 들고 오르는 어르신들과 살갑게 인사를 주고받는 청년은 호감사기 좋은 외모와 함께 좋은 사람이라는 인상을 주기에 충분했고 사람들 사이로 스며든 것처럼 동화되었다. 하지만 그는 주변사람들과 달리 약수가 목적이 아니었다. 자신의 하나뿐인 취미가 목적이었다.

그의 취미는 삽질이었다.

청년이 어눌하다든가 바보라는 뜻이 아니다. 오히려 주변 사람들보다 눈치가 좋았고 회사에서도 평가가 좋았다. 말 그대로 땅을 파는 것이 그의 일과라는 것이다. 그는 고등학교를 다닐 때부터, 주변의 공터, 집 앞마당, 놀이터, 화단 등등 삽을 꽂아 넣을 수 있는 곳이면 일단 팠다. 그는 가방에 접이식 삽을 꼭 챙기고 다녔고 이런 행동들은 오랫동안 지속되다보니 가족들이나 주변 사람들도 이젠 그의 기행에 적응했다.

사실 취미라기보다 광적인 습관에 가까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일반인의 범주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 인물이었다. 특별히 육체적으로도 광기의 흔적이 드러나는 것도 아니어서 등산복 위로 나타난 건장한 청년의 외모는 이 나라 나라 젊은이들의 획일화된 틀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 당연한 모습이었다.

청년은 일렁이는 군중 사이에서 일탈해 전나무 숲으로 들어갔다. 숲 속은 늘 푸른 겉모습과 달리 따스하게 파고드는 볕뉘조차 거부하며, 오래된 피부마냥 갈라진 껍질을 한 어두운 나무들의 그림자들 위로 이끼들이 창궐해, 음침한 속내를 잉태하고 있었다. 인간들에게 개발된 약수터나 운동장과는 반대로 사람들을 거부하는 깊은 동공(洞空)같았다. 청년의 발자국은 사람들이 모인 왁자지껄한 산경에서부터 점차 멀어진다.

지독한 냄새가 코를 찌르는 썩은 나뭇잎이 흐트러진 거무죽죽한 바닥을 보며 청년은 조심스럽게 한걸음 한걸음 나아가다 나무와 나무 사이가 살짝 먼 공터에 걸음을 멈추었다. 무릎을 꿇고 손으로 땅을 만져봤다. 짓무른 피부같은 토피를 파내면 버석버석하지만 물기를 머금은 거무스름한 흙이 부식질을 잔뜩 함유한 모양인지 찐득한 느낌이 깊었다.

“여기면 파도 되겠네.”

첫 삽을 팠다.

무저(無低)를 닮은 흙은 파고들수록 현실감을 잃게 만들었다. 청년은 첫 삽을 뜰 때부터 수많은 취미활동을 하는 다른 이들처럼 광적인 집착으로 자신의 이성을 지우곤 했다. 스스로 원해서라기보다 그의 정신이 그렇게 만들어졌기 때문이리라.

이런 집착은 스스로 주체할 수 없는 것이었다. 전나무가 바람에 사락 사락 소리를 내며 빛을 거부하고 청년을 감싼다. 땀이 흐르며 오래되고 고통스런 기억이 이끼마냥 창궐한다.

그는 확인해야 했다.

허리까지 파내려갔을 즈음, 삽에 뭔가 걸렸다. 탁탁 긁어내니 어떤 모양새가 나타났다. 누린내가 훅하고 올라온다. 깊은 나무뿌리에 뒤엉켜 뒤틀린 부패물이 내뿜는 악취였다. 구역질이 올라온다. 소매로 코끝을 가리고 벌레들과 미생물들로 이미 살갗은 깊게 파먹히고 문드러져 백골을 내보이고 있었다.

그렇다, 사람이었다. 괴로움에 뒤틀린 얼굴이 반쯤은 사라져 있었다. 소매로 코를 가린 청년은 얼굴을 찡그린 채, 몇 달 전까지는 사람이었을 부패물을 보다가 어찌할 줄을 몰라 주저앉았다. 눈싸움이라도 하는 마냥 썩은 시체 마주보던 청년은 정말, 깊은 안도감을 내뱉곤 중얼거렸다.

“지금 즈음, 내가 묻었던 그 자식은 어떻게 되었을까.”

청년으로선 세상에 자신같은 사람이 또 존재한다는 것이 다행이라 생각했다.

구덩이에 주저앉은 청년은 하늘을 보았다. 전나무의 첨단이 말린 눈썹처럼 보이는 밤하늘 가운데에 홍채처럼 빛나는 꽉 차있는 보름달이 자신을 백안시 하는 것이 보였다.



===============================================================

간단한 엽편을 써봤다. 아직 난 쓸만한가? 자신감이 없어진다. 아니 자심감은 있었던가.

댓글 0
번호 분류 제목 글쓴이 날짜 추천 수
공지 2024년 독자우수단편 심사위원 공고 mirror 2024.02.26 1
공지 단편 ★(필독) 독자단편우수작 심사방식 변경 공지★5 mirror 2015.12.18 1
공지 독자 우수 단편 선정 규정 (3기 심사단 선정)4 mirror 2009.07.01 3
1457 단편 fallout SunOFHoriZon 2009.11.15 0
1456 단편 파이퍼 전투 소대1 Mothman 2009.11.15 0
1455 단편 셀레네 여신은 보석을 원한다 Mothman 2009.11.15 0
1454 단편 비사사설毘舍舍說 먼지비 2009.11.15 0
1453 단편 추락한 물고기1 리오르 2009.11.12 0
1452 단편 구멍 니트 2009.11.12 0
1451 단편 고양이는 야옹하고 울지 않는다1 매구 2009.11.12 0
1450 단편 신의 힘을 가졌던 인간들 먼지비 2009.11.11 0
1449 단편 붉은.3 Claret 2009.11.10 0
1448 단편 스넌2 앤윈 2009.11.10 0
단편 일상단상 닥터회색 2009.11.09 0
1446 단편 숲의 꿈 먼지비 2009.11.06 0
1445 단편 갈증해소 夏弦 2009.11.03 0
1444 단편 4번 타자 최고의 날 심동현 2009.11.03 0
1443 단편 죽은 달의 여신4 안단테 2009.10.31 0
1442 단편 실종4 라티 2009.10.30 0
1441 단편 블록과 아들1 나길글길 2009.10.27 0
1440 단편 상실4 9crime 2009.10.27 0
1439 단편 정의의 거짓말2 사랑 2009.10.26 0
1438 단편 살인마1 엄길윤 2009.10.26 0
Prev 1 ... 70 71 72 73 74 75 76 77 78 79 ... 147 Nex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