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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 숲의 꿈

2009.11.06 13:2411.06

  숲 가장자리에 자리잡은 나무꾼들의 마을은 수백살은 먹은 숲에 기대어 살고 있다. 통나무집의 난로에는 밤의 어둠을 몰아내는 불이 넘실대고, 아침이면 잎사귀에 맺힌 이슬에 바짓단을 적시며 도끼를 둘러멘 나무꾼들이 집을 나선다. 숲 안 쪽에 세워진 교회에서는 주말이면 종소리가 울려퍼지고, 외딴 곳에 사는 나이든 수도사는 벌을 치고 콩밭을 맨다.
  그러나 노인들은 이 땅이 주님과 교회의 이름으로 축복받은 영주들의 가호에 놓이기 이전, 좀더 어둡고 으슥하고 울창하며 축축한 가장 오래된 뿌리처럼 깊은 비밀들이 있었다고 말한다. 겨우살이 나무로 만든 관을 쓰는 이들, 나무에 매어달린 왕을 믿는 이들(가시나무 왕관을 쓴, 십자가에 못박힌 신의 아들을 비교하는 것은 불경한 일이리라). 잎사귀와 가지, 싹과 뿌리, 숲의 비밀스러운 사제들. 호화로운 융단에 수놓아진 대로, 비할데 없는 기사이고 왕가의 수호자이며 성인 서품을 받은 최초의 영주가 용감하게 숲의 어둠 속에 첫 발을 내딛고 이교도 무리와 싸워 결국에는 그들을 성스러운 숲을 태우는 불길 속으로 모조리 쓸어넣어 버렸다는 이야기는 아이들에게도 잘 알려진 것이다.
  하지만 그 이야기에 무언가 빠져 있는 것은 분명하다- 등걸에 다시 피어나는 싹과 겨울을 견디고 물이 오르는 거죽, 잠들은 도토리에 관한 것이. 숲의 사제들은 창칼에 모조리 도륙당하기 전 신비에 입문한지 얼마 되지 않은 가장 어린 숲의 사제를 나무 속으로 떠밀었고 옹이는 굳게 다물렸으며 아이는 호박 빛깔의 송진 속에서 뿌리처럼 잠들었다. 그 후로 천년 동안 숲은 꿈꾸어왔고 나무꾼들은 나무를 베고 교회당의 종은 울렸다. 그 전에는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모든 것이 한결 같았던 것처럼 말이다.

  마을 사람들 중에서 가장 좋은 나무를 골라내서 베어오는 것으로 으뜸인 나무꾼이 있었다. 부모나 형제도 없이 혼자였고 말수도 적어 다른 사람과 잘 어울리지 못했다. 다른 사람들이 숲의 가장자리에서 드문드문 흩어져 서로 도끼질 소리가 울리는 것을 들으며 도끼를 휘두를 때, 그는 혼자서 해가 머리 위에 오를 때까지 깊숙한 곳으로 걸어들어간 다음 다른 도끼질 소리가 들리지 않는 곳에서야 도끼를 들었다. 재미도 없고 무뚝뚝하다고들 수군거렸지만 말썽될 일은 없었고 조용히 시간을 보내곤 했다.
  어느날 그는 여느 때처럼 도끼를 둘러매고 한 손에 도시락 꾸러미를 들고 마을과 사람들과 떠들썩함과 잡다함을 뒤로 한 채 걸었다. 나무 그늘 너머에서 큰 사슴들이 쳐다보다 도망치고, 무슨 새인지 모를 새울음 소리가 메아리치다 정적 속으로 사라졌다. 옛날 동화에 나오는 황금처럼 빛나는 햇빛도 조각나 숲의 깊은 어둠에 어룽지고 숲은 빛을 삼켜 버린다. 땀을 뚝뚝 흘리면서 입을 다물고 걸어, 마침내 숲 한가운데 텅빈 공터에 도달했을 때는 평소보다 훨씬 늦은 시간이었다. 나무꾼은 감탄하면서, 공터 한 가운데에 우뚝 서서 온 잎사귀에 햇빛을 얹은 채 바람을 따라 우아하게 물결치는 나무를 바라보았다. 그 주위만큼은 경의를 표하기라도 하는 것처럼 숲이 한 걸음 물러나 있었고 나무는 왕처럼 서 있었다. 그러나 나무꾼이 나무에게 보내는 경의란 사냥꾼이 사냥감에게 보내는 것과 다르지 않은 것이다. 나무꾼은 윗통을 벗어부치고 한참동안이나 도끼질을 한 뒤, 손바닥에 침을 뱉고 다시 도끼질했다. 나무 찍는 소리가 울릴 때마다 길게 드리운 그림자가 파르르 흔들리고, 온 숲의 어둠과 보이지 않는 곳들이 저들끼리 속삭거리는 소리, 갸날픈 날개를 치며 날아오르고 탄식하고 흐느끼는 소리로 부산스러워졌다. 마침내 시해당한 왕처럼 우지끈하고 나무가 넘어가자 그제야 숲은 조용해졌다.
  나무꾼은 자신이 쓰러뜨린 왕 곁에 앉아서 딱딱한 보리빵을 씹었다. 마지막 빵을 집어들 때, 그는 나무 사이의 어스름에 왠 아이가 서 있는 것을 알아차렸다. 아이는 발가벗고 있었고 부드러운 살결에는 약간의 검은 흙과 나무껍질이 묻어 있었다. 다른 이들이라면 겁에 질릴 법도 하건만, 그는 두려움이 없는 사내였으므로 아이에게 다가갔다. 말을 걸었으나 말을 알아들을 수 없는 것 같았다. 겉옷을 걸쳐주자 잠자코 있었으나 보리빵을 입에 대려 하지는 않았다. 나무꾼은 둥지에서 떨어진 새를 조심스레 감싸듯이 아이를 데리고 통나무집으로 돌아왔다. 아이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밤 내내 조용히 잤다. 잠들은 아이의 눈꺼풀 아래은 쉼없이 꿈틀대며 움직이고 있었다. 나무꾼은 밤 늦도록 자기 침대에 잠든 아이를 내려다 보다가 바닥에 겨울 옷을 깔고 잠을 청했다.

  영주의 세금 징수인들이 올 날이 얼마 남지 않은 탓에 나무꾼은 아이를 따로 보살피거나 할 시간이 없었다. 아직도 잠들어 있는 아이를 집에 둔 채 도끼를 메고 나섰다가 느지막히 돌아오면 아이는 이미 자고 있곤 했다. 나무꾼이 나가 있는 사이 아이는 문 밖에 기대 앉아 하루종일 해를 쬤고 그러다가는 가느다란 손으로 흙을 들어 조금 맛보았다. 이런 날들은 꽤 오래 계속되었다. 그러나 그 동안에도 이미 변화는 일어나고 있었다.
  처음에는 아무에게도 이상스러운 일이 없었다. 잎사귀가 초록을 더한다든지 가지가 더 많이 흔들린다든지 뿌리가 깊히 파고들어 물을 찾는다든지 하는 것을 눈치챌 수는 없는 일이다. 얼마 후 수도사의 콩밭은 콩대가 어느 해 보다 더 크게 자라나고 잎도 두터웠지만 그에 못지 않게 잡초도 많이 자라 김 매는데 고생해야 했다. 나무꾼들은 나무껍질이 더 푹신푹신해졌다든지 나무진이 물처럼 풍부하게 솟는 것을 발견했다. 어느날 나무꾼은 늦게 집에 돌아와 마룻바닥에서 싹이 돋아난 것을 보았다. 손으로 잡아 뽑고 발로 문지른 뒤 누웠으나 다음날 아침에는 여기 저기에 작은 잎이 피어나 있었다.

  어떤 아이는 왕관 같은 가지뿔을 한 사슴들이 나무꾼의 집 주위를 둘러싸고 있는 것을 보았다고 했다. 가까이 다가가도 전혀 사람을 피하는 기색이 없었지만, 그러다가 갑자기 가장 큰 사슴이 숲으로 몸을 돌리자 모두 다 떠나가 버렸다고 했다. 애들 이야기를 진지하게 듣는 사람은 없었지만 나무꾼의 집은 이제 누가 보아도 다시 살아난 것이 분명했다. 목재의 접합부끼리 이어지고 기둥에서 실뿌리가 내리면서 사방에서 잎이 돋았다. 언젠가부터 그 집에 보이는 아이가 나무에 말을 건다는 소문도 퍼졌다.
  마을의 신부는 그런 소문을 무시했으나 신을 향한 열정에 불타는 나이든 수도사는 그 아이가 보통 아이가 아니며 무언가 더 사악한 것이라고 우겼다. 저녁빛을 받으며 두 사람이 산책하는 것은 자주 있는 일이었지만 논쟁은 점점 더 심해졌고 신부는 수도사의 어조에서 느껴지는 지나친 열기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한편 나무꾼으로 말할 것 같으면 자기가 데려온 아이를 두고 이러쿵 저러쿵 하는 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고 다른 사람들도 퉁명스러운 나무꾼에게 더 말하지는 않았어도 입소문은 점점 더 커져만 갔다.
  몇 겹으로 깊어진 숲은 들어설 때마다 이전의 숲보다 더 어두워진 것 같고 나무들도 훨씬 커진 것 같다고들 했다. 이상스럽게도 더 잘 보이는 어둠 속으로는 불분명한 형체가 움직이고 반짝거리는 것이 떠돌아다니다 나무꼭대기까지 올라가서야 사라졌다. 아침마다 용의 입김같은 안개가 숲에서부터 밀려와서는 고집스럽게 떠나지 않다가 해가 중천에 뜬 다음에야 마지못해서 숲 속으로 도로 슬금슬금 돌아가는 것은(그렇다, 엷어지는 것이 아니다) 누구에게나 분명히 보였다. 어떤 사람은 대낮에 털복숭이에다가 커다란, 하지만 곰도 아니고 여우도 아닌 것이 휙 지나가는 것을 보았다고 맹세하기도 했다. 수도사가 한 층 더 열기에 차서 저 아이가 악마라고 부르짖고 다니는 것도 이런 소문들에 한 몫 했을 터이다. 사람들은 점차 숲에 들어가는 것을 꺼리기 시작했다. 숲에 있으면 사방에서 누군가의 눈길이 느껴지고 숨쉬는 소리가 어깨 너머로 들리며 숨결이 와닿고 피부 밑으로 물이 흐르는 것 같은 감촉이 든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나무꾼은 그런 소리를 코웃음 치고 넘겨버리고 날마다 도끼를 맨 채 숲 속으로 갔다.

  그는 점점 더 늦은 시간에 집으로 돌아오기 시작했다. 해가 거의 질 무렵, 황혼의 어스름만 남아 있을 무렵, 달과 별이 뚜렷해질 무렵, 모두가 잠든 한 밤중, 다음 새벽이 밝아올 무렵, 다음날 정오(나무꾼은 초췌해진 표정으로 집에 돌아와 바로 잠들어 버렸다), 그리고는 다시는 돌아오지 않았다.
  횃불을 켜든 수색대가 숲 속을 샅샅이 뒤졌다. 흔들리는 불빛이 비추기 전에는 움직이고 있던 것 같은 어둠 속을 여러 차례 헤집고 돌아다녔으나 허탕이었다. 그가 쓰던 것 같은 도끼가 발견되었으나 자루에 꽃이 피어나 있었다. 이제 흥분한 수색대 앞에서 늙은 수도사는 악마의 정체가 분명해졌다고 소리쳤다. 수색대는 악마를 잡아 죽이기 위해 마을로 돌아왔고 횃불은 미친 듯 타오르고 춤췄다.
  미신적인 두려움은 올바른 믿음이 될 수 없다고 믿는 신부는 수색대보다 먼저 아이를 찾아 나섰다. 아직도 발가벗고 있는 아이에게 법의를 벗어 감싸주고 교회당으로 데리고 돌아오는 길에 수도사가 이끄는 무리들과 마주쳤다. 신부는 아이를 데리고 도망쳐 교회당 문을 걸어 잠갔다. 성난 고함과 저주, 문을 두들기는 소리가 요란한 가운데 어둠 속에 꿇어 앉은 신부는 아이를 끌어 안은 채 악마에 대한 두려움이 아니라 신에 대한 사랑이, 증오가 아니라 참된 믿음이 저들에게 함께 하기를 기도했다. 이윽고 소리가 잠잠해지고 신부가 고개를 들었을 때, 십자가에서는 잎과 뿌리가 자라나 이미 그것은 나무로 변해 있었다.

  교황청 휘하의 종교 재판소는 당혹스러워하는 영주의 서신을 받았다. 세금을 납부할 의무가 있는 영민들이 모두 사라졌으며 징수인들이 도착했을 때는 온 마을이 전부 숲으로 변해 버렸는데 여기에 어떤 악마적인 일이 벌어졌는지 알 수 없다는 내용이었다. 이단 심문관과 호위병들이 도착했을 때 성벽은 지반에서 솟아오른 뿌리에 밀려 금이 가고 있었다. 이단 심문관은 마을에서 온통 잎사귀와 꽃에 파묻힌 교회당을 찾아냈다. 서로 단단하게 맞물린 문을 부수고 들어가 보니, 그 안에는 자라나서 바닥까지 늘어진 호랑가시나무관을 쓴 아이가 있었다.
  그들은 이 의심의 여지가 없는 아이를 결박해서 극비리에 종교재판소로 끌고 갔다. 종교 재판소의 처분에 따라 화형대가 쌓여 올려지고 아이가 묶인 채 그 위에 올려졌다. 그러나 불을 붙이기도 전에, 두려움에 찬 주교들 앞에서 장작들은 싹텄고 이파리가 피어났다. 광장의 포석을 뚫고 나무가 자라나고, 아이는 그 안으로 걸어들어갔다. 소용돌이치는 나뭇결의 무늬가 멎었을 때 병사들이 덤벼들어 나무를 토막쳤지만 안은 텅 비어 있었다. 광장 앞에 있던 모든 것은 불태워졌다. 그 때 쯤 영주의 성은 통째로 숲에 파묻혀 있었다.

  반년이 지나기 전에 나라의 절반 이상을 생기 넘치는 이파리들이 메웠다. 사람들은 나무 그늘들 사이로 뿔뿔이 흩어져 버렸고, 사제들과 귀족들과 왕족들은 더 이상 누구도 지배할 수 없었다. 숲을 지배할 수 있는 이는 숲 그 자신 외에 아무도 없고, 숲의 사제란 숲 안에서 살아가는 이들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해서 잠든 숲이 꾸던 꿈은 세상으로 자라났다. 혹은 꿈이 숲으로 자라났고, 세상은 모두 숲과 다를 바 없다고 말해도 좋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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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대 안 사지방은 보안 프로그램 때문에 일정 길이 이상의 글을 올리지 못하고(이전의 글이 잘렸던 것은 그 탓입니다), 신종 흘루 때문에 휴가는 나갈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우수단편에 지원하는 것은 포기하고, 심사 기준에 한참 못 미치는 짧은 글로 먼저 인사를 올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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