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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의 공기는 너무 뜨거웠다. 끈적하고 나른한 여름의 오후였다. 손 끝에 닿는 책상의 느낌이 찐득하게 느껴지고 등을 받친 의자가 후끈했다. 소녀는 눈을 감고 숨을 죽였다. 혀에 닿는 뜨끈하고 시큼한 공기와 피부에 느껴지는 끈적함. 최대한 움직이지 않고 몸을 고양이처럼 웅크리면 좀더 나아질까. 하지만 그닥 달라지지는 않았다. 더운 공기, 뜨거운 공기, 나른하고 시큼한 공기.

"뭐 하니?"

문득 눈을 떴다. 출판사 직원 언니가 다정한 얼굴로 바라보고 있었다. 손에 들린 것은 캔커피. 들고 있던 캔커피를 소녀의 손에 쥐어 준다. 시원한 느낌이 손가락과 손바닥을 타고 팔을 통해 심장으로 흘러드는 느낌. 이 들척지근하고 뜨거운 공기 속의 시원함.

"먹어. 캔커피 좋아한다고 해서 뽑아 왔으니까. 아버지 기다리는 거지? 그, 교수님이 네 아버지 맞으시지?"

소녀가 고개를 까닥하자 그녀는 약간 난처한 듯 미소지었다.

"사장님이 교수님과 점심만 먹고 온다고 하셨지만 이 더운 날 사장님이 소주 한 잔 안 하고 오실 리 없는데....시간이 좀 걸릴 거야. 괜찮겠니?"

소녀는 다시 고개를 까닥했다. 그녀는 소녀가 마땅히 먹을 만한 게 없나 하고 주위를 둘러보고 있었다. 소녀는 신경 쓰지 않아도 된다고 말하고 싶었지만 이 나른한 공기에서는 입도 벌리기 싫을 정도로 귀찮기만 했다.

아버지가 출판한 책의 증정본을 받을 겸 출판사 사장님 얼굴도 볼 겸 해서 출판사로 간다고 했을 때 선뜻 따라나선 것은 바깥의 공기가 이렇게 뜨거울 줄 몰랐기 때문이었다. 뜨거운 것을 좀체 견디지 못하는 소녀는 작은 한숨을 뱉어내며 아버지를 따라 겨우 출판사 건물로 들어섰으나 출판사 건물 역시 무덥기는 마찬가지였다. 에어콘 바람이 나오는 사장실 외에 다른 곳은 무덥기만 했다. 그나마 건물 안이라 그늘이 있다는 게 유일한 위안이었다. 소녀는 손에 쥔 차가운 캔을 어루만지며 신발을 비벼 벗어 떨어뜨리고 무릎을 모아 팔로 안았다.

"....뭐랄까, 글의 구성이 좀 떨어져."

소녀는 낮고 텁텁한 누군가의 목소리에 머리를 들었다. 책상 너머 깐깐한 얼굴을 한 편집장이 보였다. 보통은 거의 쓰지 않는 파이프 담배를 물고 있어서 취향이 참 별나다고 소녀가 생각했던 사람이었다.

"게다가 글의 묘사가 빈약해."

파이프 담배에서 연기가 올랐다. 푸르스름하고 엷은 빛깔의 연기. 그 너머로 보이는 얼굴빛이 푸르죽죽해 보이는 것을 소녀는 신기한 얼굴로 바라보았다.

"미안하네만, 이런 글은 출판할 수 없어."

탕, 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낯익은 소리다. 아버지의 서재에 있는 쓰레기통이 철제였기에 무거운 것을 쓰레기통 속에 던지면 저런 소리가 들려 오곤 했다. 아버지의 조수가 아버지의 책을 깨끗이 정서하고 나면 아버지는 어린아이처럼 키득거리며 여기저기 고친 자국이 가득한 원고 뭉치를 쓰레기통에 조준하여 던졌고 두꺼운 원고 뭉치는 방금 들린 그것보다 큰, 그러나 그런 류의 둔중한 음을 내곤 했다. 심리학에 대한 연구서를 쓰는 아버지의 원고 뭉치는 소설책 같은 것보다 몇 배는 두꺼웠다.

그래, 두꺼운 원고 뭉치가 쓰레기통 속에 던져지면 그런 소리가 난다. 소녀는 출판사에서도 자신의 집과 똑같은 철제 쓰레기통을 쓴다는 것을 신기하게 여기다가 자신의 곁을 지나치는 남자를 보았다. 책상 너머에서 이 쪽으로 걸어오는 남자. 편집장의 말을 듣고 있던 남자.

낡은 청바지에 너덜너덜한 청자켓을 걸쳐 입고 걷는 남자. 낡은 야구 모자를 푹 눌러쓴 남자. 소녀의 옆을 휙 지나치는 남자.

웃고 있는 남자. 환하게 웃고 있는 남자.





긴 길을 따라 걸었다. 뜨거운 햇빛. 뜨거운 도로. 공기의 뜨거움으로 아른아른 보도가 아지랑이처럼 흔들린다. 소녀는 현기증을 느꼈다. 더웠다. 무엇보다 더웠다. 출판사 여직원이 쥐어 준 캔커피는 이미 미지근해 있었다. 남자가 멈춰선다. 소녀는 캔을 따고 한 모금 마셨다. 초콜릿 맛이 나는 커피다. 소녀가 좋아하는 커피였다.

이런 식으로 뜨겁고 나른한 여름날 왜 남자의 뒤를 쫓고 있는지 소녀는 대답할 수 없었다. 굳이 말하자면, 태양이 너무 뜨거워서 사람을 죽였다는 뫼르소의 대답을 차용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왜 남자의 뒤를 쫓고 있는가, 그것은 단순한 호기심인가. 자석에 이끌리듯 남자의 뒤를 쫓으며 소녀는 나른하게 중얼거렸다. 공기가 너무 나른해서, 아마도. 쿡쿡 웃는다. 문득, 머리 위로 그림자가 지는 것을 느꼈다. 남자가 소녀의 손을 낚아챈다. 캔커피가 손에서 굴러떨어져 갈색 액체를 도보에 흩뿌린다. 딸그랑, 하는 음색.

"왜 나를 쫓고 있는 거지?"

남자의 음색은 낮으면서 매끄럽고, 지저분한 긴 옷에 싸여 있는 육체는 건장하고 군살이 없다. 모자를 푹 눌러써 얼굴을 가리고 있지만 눈매는 형형하다. 소녀의 손목을 잡고 있는 남자의 손은 크고 단단하며 반지를 낀 자국이 있고 군살이 없는 손이다. 소녀는 말했다.

"웃으셨잖아요."

그 말에 남자의 눈매가 흔들린다. 소녀가 반복한다.

"웃으셨잖아요. 원고가 거절당한 걸 기뻐하고 있었어요."

남자는 희미하게 웃는다. 그 미소는 씁쓸하다. 소녀는 아까 본 남자의 웃음을 떠올린다. 환하고도 악마적이고 음습하면서도, 남자의 웃음은 죄책감이 걸려 있었다.

"맹랑한 꼬마 아가씨군. 다 큰 어른을 미행하는 데 두려움도 없었나? 내가 아가씨를 어떻게 다룰지 몰라."

그러나 그 말투에는 웃음기가 섞여 있었다. 소녀도 방긋 웃는다.

"말해 줘요."

"집으로 돌아가, 꼬마 아가씨."

그가 소녀의 손목을 놓아 주고 고개를 돌렸다. 그 뒤에 대고 소녀는 말한다.

"아버지에게, 그 원고 드릴 거에요."

그가 잠시 멈칫했다.

"당신이 버린 원고, 출판사 쓰레기통에 있을 테니까. 아버지에게 사정해서 읽게 할 거에요. 아버지에게 부탁해서 출판시킬 수도 있어."

그리고 다시 한 번 방긋 웃으며, 아버지의 이름을 또박또박 말했다. 그는 돌아선 채 이마를 누르고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 그 교수의 이름은 들은 적 있지. 부녀가 나란히 천재라고들 하지. 그래...."

그는 신경질적으로 입술을 비틀며 말했다.

"그래, 너라면 무슨 짓이든 할 수 있겠지. 안 그런가? 소위 천재란 것들이 범인(凡人)들을 얼마나 비참하게 하는지. 나는 모차르트를 질투하는 살리에르를 이해할 수 있어. 내가 살리에르라면 모차르트를 찔러 죽여 버렸을 거야. 나는...."

순간, 그는 입을 다물었다. 털썩, 하는 소리. 여름의 열기에 짓눌린 소녀가 바닥에 쓰러져 있었다.





".....일사병이라니, 어이가 없군."

남자는 혀를 차면서도 녹아 버린 얼음주머니를 바꾸어 얹어 주었다. 소녀가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햇살이 너무 뜨겁고 나른했어요."

"그런데도 나를 따라왔나, 꼬마 아가씨? 호기심 한번 대단하군."

"아뇨, 호기심이 아녜요. 햇살이 너무 뜨거웠어요."

그가 멈칫 하더니 입꼬리를 올리며 웃는다.

"총을 들었다면 나를 쏴 버렸겠군."

이방인의 뫼르소처럼. 소녀는 웃었다. 남자도 다시 웃는다. 입꼬리를 올리면서. 널찍한 거실, 팔에 느껴지는 서늘한 에어컨 바람. 남자는 하얀 티셔츠와 녹색 반바지를 갖춰 입고 손목에는 시계를, 그리고 왼손 약지에는 반지 하나를 끼고 있다. 소녀가 누워 있는 소파는 검은 가죽으로 네 개가 한 세트. 고급 원목 장식장이 있는 실내.

"누구의 원고지요?"

소녀의 물음에 그가 무표정으로 소녀를 본다.

"일부러 변변찮은 옷을 골라 입고 반지와 시계 같이 비싸 보이는 것은 빼 버림으로써 무시당할 첫 인상을 주고 사람들이 가장 짜증내기 쉬운 더운 시기를 골라 소설은 절대 취급 안 하는 출판사에 소설 원고를 보인다, 그런 식으로 일부러 거절당하게 만드는 원고는 누구의 원고에요?"

"내 원고야, 꼬마 아가씨."

그의 입술에 매달린 씁쓰름한 미소. 그는 장식장에서 양주 한 병을 꺼내 작은 컵에 따라 들이킨다.

"나에게는 아주 근사한 사촌형이 있지."

그가 나직히 중얼거린다.

"말 그대로 천재지. 어릴 때부터 그랬어. 영국의 명문대를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해서 고국으로 돌아와 대기업에 입사해 지금은 그 대기업의 간부다. 스물 후반에 말이야. 그래, 단순히 그것뿐이라면 다만 부러워만 하는 것으로 충분했지.....하지만 그것뿐이 아니라구."

소녀는 힐끗 양주병을 바라보았다. 아버지가 어머니 몰래 숨겨두고 마시는 그것과 꽤나 닮았다. 그러나 그는 감상에 빠졌음에도 불구하고 눈치가 빨랐다. 양주병은 다시 장식장 속으로 들어갔다. 소녀가 입을 쑥 내밀었다. 그는 무시하고 말을 이었다.

"그 원고, 사촌형이 고친 원고다."

그래서? 하는 눈빛으로 소녀가 그를 바라보자 그가 다시 말했다.

"사촌형이 고치기 전보다 몇백 배는 나아졌다고 볼 수 있지. 아니, 사촌형이 거의 손을 댔다고 봐야 옳을 거다. 아니, 이렇게 말할 필요도 없어. 다시 말하지. '그가 다시 썼다'라고 봐야 옳은 거다. 많은 부분에 손을 대진 않지만 그는 언제나 시기적절한 부분에 손을 대고, 완전히 모든 것을 탈바꿈시켜."

소녀가 아무 말 하지 않고 침묵을 지키자 그가 말을 이었다.

"스트로브를 바보로 여기고 스트릭랜드를 광기에 미친 천재라고 추앙하는 녀석들 따위, 내 마음 알 수 없을 거다. 뛰어난 작품을 알아볼 줄 알면서 자신의 작품이 한없이 초라하다는 것이 얼마나 사람을 절망에 빠뜨리는지. 스트로브가 뛰어난 감식안을 가졌으면서도 자신의 형편없는 작품에 이상하리만큼 관대했던 것은 신이 그를 가엾게 여겨 내린 단 하나의 선물일 거다."

"....문학 작품 속의 실제로 있지도 않은 인물을 끌어내서 지껄여 봤자 소용 없잖아요. 하지만 굳이 그렇게까지 사촌형의 원고가 욕을 먹는 꼴을 보고 싶었나요?"

그의 눈이 순간 사나워졌으나 곧 잠잠해졌다.

"그러니까 천재는 모른다고 했잖나. 입 다물어, 꼬마 아가씨. 내가 화내기 전에."

'하나도 안 무서워'하고 종알대는 소녀에게 손을 휘휘 내저으며 그는 말했다.

"그에게 악의가 없다는 건 알아. 하지만 내 소설은 하나도 빼놓지 않으며 일일이 어드바이스해서 글을 완전히, 놀랄 만큼 훌륭하게 바꿔 버리면서....그러면서 자기 글은 쓰지 않아. 그에게 내 글을 고쳐 주는 건, 내 글을 더할 나위 없이 훌륭히 바꿔 주는 건 단순한 심심풀이다. 나는 화가 나서 견딜 수가 없는 거야....갈구하는 내게 그 재능은 없고 원하지 않는 사람에게 그 재능은 주어진다...."

소녀는 고개를 갸웃하다 말했다.

"....아저씨."

"....아저씨가 뭐야..."

그의 불평을 무시하고 소녀는 말했다.

"사촌형에 비교하지 말아요. 비교 따위 해 봤자 어쩔 수 없잖아요."

"이봐...."

"원론적이고 뻔한 말이지만, 사실이잖아. 비교해 봤자 소용없잖아요. 비교해 봤자 아무런 소용이 없다구요."

나 역시.

소녀는 중얼거렸다. 아버지와 자신을 비교해 봤자 아무런 소용이 없다. 절대로, 아무런 소용이 없다. 소녀는 소파에서 일어나 까닥 고개를 숙였다.

"돌아갈게요. 다음에 출판하거든 꼭 볼 테니까, 작가소개란에 사진 꼭 넣어요. 그리고."

소녀는 덧붙인다.

"이제, 사촌형이 졸라도 보여 주지 말아요. 아무리 엉망진창인 것처럼 보여도 그대로 출판해요. 완벽을 너무 기하는 것도 좋지 않아요. 남의 손으로 이룬 완벽 따위, 당신도 유쾌하지 않잖아요? 계속 쓰고, 출판하고 하면, 나아질 거라고 생각해요."

소녀를 천재라고만 보고 있고, 소녀의 컴플렉스를 모르는 남자에겐 별로 와닿지도 않는 달갑잖은 설교겠지만,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이라곤 고작 여기까지다. 아니,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라 해야만 하는 일이었다. 스스로에게 하는 말이니까.

나 역시 믿고 있어. 아버지를 따라잡을 수 없는 나. 아직은 안 되는 나. 아직까지는 '천재 누구씨의 딸'로 존재하는 나. 하지만, 아버지와 나 자신을 비교하지 않을 테니까. 절대로. 언젠가는 혼자 설 수 있는 그 날을 기다리며.





여름의 무더위가 점점 짙어만 가는 날이었다. 소녀는 그나마 찬 방바닥에 배를 깔고 누워서 텔레비젼을 보고 있었다. 아버지 역시 소녀의 옆에서 똑같은 포즈로 텔레비젼을 보고 있던 판이었다. 똑같은 부녀라고 어머니에게 웃음 섞인 잔소리를 들어도 아버지와 소녀는 꿈쩍 하지 않고 텔레비젼을 보고 있었다.

"뭐 재미있는 거라도 해요?"

한구석에서 잡지를 읽고 있던 어머니가 가까이 다가왔다. 그러나 둘이 뚫어지게 바라보고 있는 채널에서 나오는 게 광고뿐이라는 것을 알자 피식 웃으며 채널을 돌렸다. 느릿느릿 리모콘으로 채널은 넘어갔고, 화면을 멍하게 주시하던 소녀는 갑자기 어머니에게서 리모콘을 빼앗았다.

"잠깐만요!"

놀라는 어머니를 아랑곳하지 않고 소녀는 채널을 뒤로 돌렸다. 살인 사건이 뉴스에 방송되고 있었다. 물론 뉴스에서는 끔찍한 시체 같은 것은 보여 주지 않고 핏자국 같은 것도 자막처리하고 있었다. 아, 그러나 소녀는 알 수 있었다. 아니 깨달았다. 널찍한 거실. 소파는 검은 가죽으로 네 개가 한 세트. 고급 원목 장식장이 있는 실내. 에어컨으로 서늘한 온도를 유지하고 있을 실내.

그나마 견딜 만하던 여름의 공기가, 갑자기 소녀를 압박해 온다. 너무도 덥고 나른해서 쓰러질 것만 같다.





경찰서에서는 소녀의 아버지는 그렇다치더라도 아직 어린 소녀를 살인자와 대면시키는 것을 꺼려했다. 그러나 소녀의 아버지가 자기가 같이 들어갈 것이니 괜찮다고 완강히 주장했다. 그들은 천재 부녀라고들 불리고 있었고, 소문에 대부분의 사람들은 약하기 마련이었다.

소녀는 철창 너머로 부들부들 떨며 살인자를 바라보았다. 살인자가 미소지었다. 소녀는 울었다.

"내가 죽인 거로군요."

"그럴지도 모르지."

"내가 죽인 거에요. 내가 죽였군요."

소녀는 울면서 중얼거렸다.

"이상하다고 생각했어야 했는데. 사촌의 원고를 처음부터 끝까지 거의 다시 써내려갔다고 할 만큼, 그 정도로 처음부터 끝까지 수정하고 고쳐 줄 정도로 글쓰기에 관심을 가지는 사람이, 자기 글을 안 쓸 리가 없죠. 안 쓴게 아니죠. 못 쓴 거죠. 못 쓴 거예요. 당신은 그의 글을 고치는 것밖엔 할 수 없었던 거예요."

"그의 잘못이야."

살인자가 말했다.

"내가 원고를 수정해 주겠다는 것을 거부하고 원고를 들고 나갔으니. 아니 편집장의 잘못이야. 그런 쓰레기같은 원고를 받아들이다니."

소녀는 울었다. 뺨을 타고 흘러내리는 눈물이 얼마나 뜨거운지. 온몸을 감싼 공기가 얼마나 습습하고 시큼하며 끈적한지. 여름의 더위. 사람을 죽이게 만들고 죽게 만드는 여름의 더위.

"당신은 그가 없인 안 되었어요. 그는 천재였어요. 나같은 이름만 부풀려진 천재도, 당신과 같은 반쪽짜리 천재도 아닌 진짜 천재였어요. 당신 없이도 그는 언젠간 스스로 자신의 글을 고치고 걸작을 만들어냈겠죠."

"아냐."

살인자가 흉흉하게 이를 드러냈다.

"그의 글은 내가 수정해 주지 않으면 안 되었어. 편집장이 미친 놈이야. 그런 쓰레기같은 원고를 받아들여 출판을 하려 하다니. 언젠가 그는 망했을 거야. 그리고 뼈저리게 후회했겠지. 그는 나에게 감사해야 해. 출판 소식을 듣고 그의 인생에서 가장 기뻤을 순간에, 과오를 저지르고 그걸 깨닫기 이전에 내가 죽여 주었으니."

"당신은 살인자일 뿐이야!"

소녀가 소리를 질렀다. 소녀의 목소리는 분노로 떨리고 있었다.

"내가 그 살인의 협조자인 것처럼, 내가 그를 죽인 것처럼 당신도 살인자일 뿐이야. 당신은 천재의 재능을 질투한 비겁한 자에 불과해. 하, 살리에르! 결국 모차르트를 죽여 버린 살리에르! 그럼에도 스스로를 모차르트라고 믿고 싶은 건가? 스스로도 알고 있겠지, 당신이 질투심에 불타는 어리석은 살리에르라는 걸! 그러면서도 부인하려 애쓰지, 필사적으로! 성공할 수 있을 것 같아? 당신은 쓰레기야. 한낱 범인(凡人)에 불과한 자!"

그가 철컥 소리를 내며 일어서서 분노한 목소리로 으르렁댔다.

"뭐라고, 이 계집이! 다시 한 번 말해 봐!"

간수가 놀란 듯 다가왔으나 소녀의 아버지는 말없이 손을 저어 간수를 멈추게 했다. 소녀는 불타는 듯한 눈으로 살인자를 응시했다.

"다시 한 번 말해 줄까? 가엾은 바보! 천재의 재능을 질투하여 천재를 살해한 가엾은 범인(凡人)! 결국 그것뿐이야, 당신은. 천재 소설가의 글에 오탈자나 잡아주는 그런 역할에 불과했어. 당신은 쓰레기야, 쓰레기 중의 쓰레기! 자신의 재능을 과대평가해서 스스로를 천재라고 믿는 가엾은 멍청이!"

살인자는 뭐라 알아듣지 못할 비명과 분노가 섞인 고함을 질러댔다. 소녀는 뒤돌아서서 방을 나섰다.

여름의 공기는 뜨거웠다.





뜨겁고 끈적끈적한 여름의 공기. 온몸이 축축하고 습습한 여름의 공기. 소녀는 태양 아래 비틀댔다. 돌아서서 긴 그림자를 드리우던 남자. 낡고 초췌한 옷을 입고 웃던 남자. 술을 마시던 남자. 괴로워하던 남자.

'사촌형이 졸라도 보여 주지 말아요. 아무리 엉망진창이라더라도...'

소녀는 고개를 내저었다. 자신이 그를 죽였다. 아아, 그에게 한 어줍잖은 충고가, 진실에 눈뜨지 못한 말 한마디가 그를 죽게 했다. 죽음으로 밀어넣어 버렸다. 아버지라면, 아버지라면 어쩌면.....

비교하지 않겠다고 말했는데, 자꾸만 생각하게 되어 버려. 아버지라면 눈치챘을 거다. 사촌형과 그의 음습한 마음을.

그리고, 지금도 아버지는 눈치채고 계시겠지. 내가 또 한 명의 남자를 죽이려 하고 있다는 것을.

"아버진 알고 계셨죠? 알고 계시면서 그대로 둔 거죠?"

소녀의 아버지는 무어라 말하려고 했으나 소녀는 말을 막고 재빨리 말했다.

"나는 그의 글을 본 적이 없어요. 그의 글의 원본도, 사촌형이 고친 글도 본 적이 없어요. 그가 정말 천재이고 그의 사촌형이 단순히 그의 영감을 일깨우는 존재였을지...."

아니면 그가 단순히 사촌형의 영감을 일깨우는 존재였을지.

그가 쓴 글을 사촌형이 고쳤다는 이유만으로 사촌형을 뮤즈라고 할 수는 없다. '전혀 새로운 것'으로 탈바꿈시켰다면, 정말로 '완전히 탈바꿈한 작품이 천재적이었다면' 설사 원형을 그가 썼다 해도 그는 단순히 뮤즈(Muse)일 뿐이다. 괴테의 '파우스트' 이전에도 파우스트는 있었지만, 그 '파우스트'를 재구성해 전세계인이 알아야만 하는 작품으로 만든 것이 누구던가. 뮤즈(Muse)가 아닌 천재인 괴테, 그가 아닌가.

"어느 한 쪽은 다른 한 쪽의 뮤즈(Muse)였겠죠. 영감을 주는 존재, 단순히 영감만을 주는 존재일 뿐 천재적인 작품을 만들 수는 없는 존재. 그것이 그였을지 그의 사촌형이었을지는 몰라요. 알 수가 없죠."

둘 모두 스스로를 천재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둘 모두 스스로를 뮤즈(Muse)라고, 단순히 영감만을 주는 존재라고 생각했다. 그의 사촌형은 상냥한 어드바이저의 역할을 해냄으로써 그것을 숨기려 했고, 그는 사촌형이 고쳐준 원고를 일부러 받아주지 않을 상황을 만들어 투고함으로써 그것을 숨기려 했다.

그 미묘한 평형관계를 깬 것이 소녀였다. 그를 죽게 한 것은 소녀였다. 그리고 그를 죽인 살인자를 죽이는 것도 소녀일 것이다. 죽은 그가 뮤즈(Muse)였던 천재였던간에, 그를 잃어버린 그의 사촌형은 결코 작품을 얻을 수 없을 것이다.  그의 사촌형은 자멸할 것이다. 스스로가 천재가 아니라고 믿고, 서서히 늪 속으로 빠져들듯.....

그렇다, 소녀는 살인자를 죽음으로 몰아넣었다. 그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며, 또한 벗어날 수 없는 죄이기도 했다. 의도치 않게 그를 죽음으로 몰아넣은 것이 소녀의 죄이듯, 살인이라는 죄를 지은 살인자라 해도 소녀의 손으로 멋대로 심판한 것은 분명 소녀의 죄였다. 소녀는 신음했다. 작고 어린 짐승처럼, 소녀는 울었다.

크고 부드러운 손이 어깨에 닿았다. 여름의 뜨겁고 강렬한 공기 속에서 그 손은 왠지 서늘하고 기분좋은 느낌이었다. 소녀의 아버지는 부드럽게 속삭였다.

"그저 태양이 너무 뜨거웠을 뿐이야."

소녀는 눈을 크게 뜨고 아버지를 바라보았다. 아버지는 다시 말했다.

"여름의 공기가 너무 뜨거웠고, 태양이 너무 뜨거웠을 뿐이다. 이 더운 계절에 그들은 자멸해 버린 거다. 그것뿐이다."

소녀는 아버지의 목에 팔을 감고 울었다. 죄는 속죄되지 않는다. 태양이 뜨거워서 사람을 쏘았다고 말한 뫼르소는 사형대에 올라야 한다. 소녀의 죄는 그대로 남을 것이다.

하지만, 정말로, 여름의 공기는 너무 뜨거웠어.

정말로, 너무도.




예전에 썼던 단편인데, 그때 이 글을 읽어 주신 분께서 '소녀와 아버지의 비중을 줄이고 그와 사촌형을 더 부각시키는 게 나을 것 같다'는 조언을 해 주셨습니다. 끄덕끄덕하고 깜박 잊고 처박아 두었는데, 이제사 고치네요. 아직까지도 그와 사촌형이 부각되지 않은 측면은 있습니다만; 사실 많이 안 변했습니다orz

나름대로 아끼는 단편입니다. 왜냐하면, 제가 여름을 너무 싫어하거든요(?)orz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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