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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 겨울이 가지 않는 이유

2005.04.06 14:5604.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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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는 곰곰히 작년 기억을 더듬어 보았다. 작년 이맘때, 그러니까 3월 말 쯤에는 노란 민들레가 곳곳에 피어있었다. 사람들은 화사한 봄 옷으로 갈아입고 마음껏 거리를 활보하고 있었고, 오랜 겨울을 지낸 아이들은 엄마 손을 잡고 거리로 나오곤 했었다. 고개만 돌리면, 예쁜 색으로 돋아나는 연두빛의 어린 새싹들도 심심찮게 볼 수 있었단 말이다. 하지만 올해는......

  "춥다."

  나는 입에서 하얗게 뿜어져 나오는 김을 보며 중얼거렸다. 숨을 쉴 때마다 파도처럼 얼음같이 차가운 공기가 밀려들어왔다가, 따뜻한 공기가 하얗게 변해 밀려나가고 있었다.

  "왜 추운건지 알려줄까?"

  누구에게도 묻지 않은 질문에 대한 대답이 어디선가 들려왔다. 나는 깜짝 놀라, 주위를 둘러보았지만, 버스를 기다리는 사람은 나 혼자 뿐이었다. 소리는 버스 정류장 뒤, 누렇게 마른 관상수들이 시들하게 서있는 화단 안 쪽에서 나고 있었다. 하지만 그곳에도 사람은 없었다. 나는 차갑게 얼어 감각이 없는 귓볼을 쓰다듬으며, 다시 중얼거렸다.

  "벌써 3월 말인데, 왜 아직도 이렇게 추운거야."

  짙은 밤색의 모직 코트 주머니에 손을 밀어 넣으며, 나는 어깨를 떨었다. 잠시 귀를 감싼 것 뿐인데도, 두 손은 차게 식어있었다. 주먹을 꼭 쥐니, 손 끝에서 한기가 흘러 나왔다.

  "멍청하기만 한 줄 알았더니......이제보니 예의도 없는 애구나?"

  "뭐?"

  나는 주위를 다시 둘러보았다. 내 허리께까지 오는 화단 안 쪽의 버려진 신문 위에서 둥글게 또아리를 틀고, 낮잠을 자는 듯 눈을 감았던 고양이가 기지개를 펴며 입을 열었다. 고양이는 고개를 살짝 비틀어 누런 이파리들을  우아하게 따돌리며, 내 앞으로 나와 섰다.

  "아무리 사람 말이 아니더라도 그렇게 무시하면 안되지."

  네 발로 내 앞에 서있는 고양이는 다시 한번, 입을 열었다. 나는 그제서야 내게 말을 건 것이 이 고양이임을 확신할 수 있었다.

  "미, 미안. 나는 네가 잠을 자고 있는 줄 알았어."

  나는 맵시있게 생긴 녀석의 귀와 매끈하게 곡선을 그리고 있는 얼굴에 감탄하며, 서투르게 사과를 건냈다.

  "그렇다면, 눈을 감고 얘기한 내게도 잘못이 조금 있는 셈인가? 좋아. 너의 무례는 없었던 것으로 해주지."

  고양이는 아몬드형 눈을 빛내며 고개를 잠시 갸웃거린 후에 말했다. 녀석의 눈은 각각 초록색과 파란색으로 빛났는데, 고개를 움직일 때마다 미묘하게 홍채의 크기가 변하고 있었다. 양쪽의 색이 다른 눈이 나를 응시하고 있는 것은 왠지 기분이 이상했다. 녀석은 흰색에 밝은 회색 줄무늬를 가지고 있었다. 오랜 방랑생활 때문인지, 털결은 그다지 좋지 않았다. 하지만 탄탄해 보이는 가슴이라던지, 온 몸이 그리고 있는 부드러운 곡선들이나, 여유롭게 흔들리는  긴 꼬리는 푸석한 털결에도 녀석을 빛나게 해주었다. 그래, 이 녀석은 참 매력적으로 생긴 고양이였다.

  "고마워. 그런데, 너는 왜 추운지 알고있니?"

  나는 고양이가 내게 처음 했던 말을 떠올리며 물었다. 내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녀석은 긴 꼬리를 채찍처럼 휘둘러 바닥을 탁- 치면서 쌀쌀맞은 목소리로 대꾸했다.

  "너 참, 예의가 없구나? 초면이라면 이름부터 교환해야하는 것 아냐? 이름도 모르는 채로 이것저것 알려고 하다니, 인간들은 모두 너처럼 예의가 없니?"

  녀석의 큰 눈이 반쯤 감기며, 눈꼬리가 사납게 휘어졌다. 입가를 씰룩이자 그 사이로, 훌륭해 보이는 흰 송곳니가 위협적으로 드러났다. 나는 고양이의 은빛 수염이 미세하게 흔들리는 것을 확인하곤, 재빨리 사과했다.

  "아, 미안. 이유가 너무 궁금해서 통성명을 해야한다는 것을 잊어버렸어. 인간들이라고 모두 나처럼 예의가 없는건 아니니까 이해해줘. 나는 수인이야."

  "나는 웅쿠르니아옹 이지만, 인간들이 부르기 편한 이름까지 알려준다면, 미오야."

  미오는 사람이 따라하기 힘든, 목과 가슴을 울려 내는 가르릉대는 소리를 내며 자신의 이름을 소개했다. 역시 나는 사람이라 먼저 말한 이름보다는 미오라는 이름이 편했기에 나는 고양이를 미오라고 부르기로 했다.

  "사람들은 참, 예의가 없는 동물이란말야. 고양이인 나도 사람의 말로 사람의 이름을 부르려 하는데, 그것들은 내 이름이 버젓이 있는데도 소리내기 힘들다고 자기들 편한대로만 내 이름을 부르려한단 말야."

  내가 미오라고 부르겠다고 말하자, 미오는 앞발을 할짝이며 투덜거렸다. 고양이임을 의심하지 못할 정도로 사람과 같은 소리가 나왔던 앞말들과는 달리, 고양이 특유의 울림이 말 소리에 진득하게 묻어났다.

  "아, 그럼 네 고양이 이름으로 부를까? 발음이 힘들기는 하지만 노력하면......"

  나는 미오가 할짝거린 앞발을 눈가에 문지르는 것을 보며, 귀엽다고 생각했다. 그렇기에 더욱 귀여운 녀석의 신경을 거스르기 싫었던 나는 재빨리 말을 바꿨다.

  "그건 싫어. 인간들은 부르기 어렵다는 핑계로 내 이름을 틀리기 일쑤거든. 난 내 이름이 틀리게 불려지는걸 싫어해."

  난 쓴 웃음을 지었다. 물론, 나도 내 이름이 틀리게 불려지는 것은 싫지만......저런 류의 투정은 내가 들어주기 힘든 것이었다. 미오는 얼굴을 다 닦았는지, 고개를 숙여 가슴 털을 살살 핥기 시작했다.

  "그럼, 미오. 내게 왜 추운지 가르쳐주지 않을래?"

  미오는 자신의 털을 핥느라 정신이 없었지만, 나는 애써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아, 춥고 배고파. 작년같으면, 시끄럽게 일어나는 벌레나 볕을 쪼이러 나온 쥐를 잡아먹을 수도 있었을텐데......"

  미오는 여전히 몸을 핥으며 중얼거렸다. 가슴은 이미 다 핥았는지 몸을 둥그렇게 말아 배쪽을 핥으려 노력하던 미오는 아예, 두 발로 일어서 혓바닥을 놀리고 있었다. 장미 꽃잎같이 작고 붉은 미오의 혀가 조금씩 보일 때마다, 앞발과 몸체가 같이 흔들렸다. 그 모양은 꽤나 귀여워서 방해하기 싫었지만, 나는 왜 아직까지 추운지 그 이유가 너무 궁금했기 때문에 미오의 말을 끊고 다시 물었다.

  "그러니까, 왜 추운건데? 알려주면 내가 내일 아침, 고양이 통조림 하나를 여기 가져다 놓을게."

  나는 자꾸만 딴청을 피우는 미오에게 어쩔 수 없이, 미끼를 던졌다. 이건 내 짐작이지만, 미오도 그런 이야기를 인간에게 함부로 이야기해주기는 싫을테지. 그래서 이야기를 해줄듯, 말듯 내 약을 올리는 것이고.

  "따서?"

  미오는 배 안쪽에서 움직이던 고개를 잠시 들고, 심각한 눈빛으로 반문했다. 빛을 받아 홍채가 작아진 눈에서는 고양이 특유의 날카로움이 배어나고 있었다.

  "그래. 따서."

  나는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바라던 대답이었던듯, 미오는 내 말이 끝나자 허리를 곧추세우고, 네 발을 모아 바른 자세로 앉았다. 조각같은 자세로 앉은 미오는 낮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그건, 네가 겨울을 놓지 않기 때문이야."

  "뭐?"

  나도 모르게 목소리가 높아졌다. 한톤 가까이 높아진 목소리에 미오는 귀를 뒤쪽으로 찡긋거렸다. 숨을 몰아쉬는 듯, 작은 코를 벌름거리던 미오는 다시 한번 말을 이었다.

  "네가 겨울을 놓지 않고 있잖아. 겨울은 가야 하는데, 지금도 봄에게 밀리고 있는데, 네가 겨울을 안 놔주기 때문에 겨울이 못 가고 있잖아."

  "거, 거짓말. 내가 어떻게?"

  나는 미오가 하는 말을 믿을 수가 없었다. 물론, 고양이가 말을 한다는 사실도 믿기는 힘들었지만, 그것은 당당히 내 눈앞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이기 때문에 의심하기도 힘든 것이었다. 하지만 이 얘기는 다르다. 나는 A그룹이라 불리는 회사에 평직원으로 있을 뿐인, 평범한 27살의 인간 여자일 뿐이다. 몇년을 신었음에도, 언제나 균형을 잡지 못해 가끔 다리를 삐는 하이힐을 저주하고, 특별한 운동을 한 일도 없어서 늦은밤 귀가할 때마다 공포에 떠는 그런 여자 말이다. 작지도, 크지도, 못 생기지도, 그렇다고 예쁘지도 않은, 그야말로 평범한 여자가 나였다. 그런 내게 겨울을 붙잡고 늘어질 힘 따위는 있을 턱도 없고, 더군다나 추위를 잘 타는 내가 춥다고 투덜거리고 있는 것은 진심이 절절히 배어나온 말이었다. 나는 누가 뭐래도 겨울을 얼른 보내버리고 싶었기 때문에, 이 말도 안되는 상황에서도 끈질기게 고양이의 말을 경청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 내게 겨울을 붙잡고 있다니?

  미오는 앞발을 들어, 아직 혼란스러워하고 있는 내 앞에서 작게 까딱거렸다. 나는 의도를 눈치채고 미오의 입가로 내 귀를 옮겼다. 미오는 비밀을 이야기 하듯 소리를 낮춰 천천히 말했다. 작은 소리로 가르릉대는 그녀의 목소리가 귓가에 울려 간지러웠다.

  "왜냐하면......너는, 그녀의 자손이기 때문이야."

  "그녀? 그녀가 누군데?"

  "겨울을 다스리는 분, 눈의 여왕. 네가 바로 그녀의 자손이야."

  나는 보지 않고도 내 눈이, 빛을 보지 않는 고양이의 홍채처럼 커졌음을 알 수 있었다. 미오가 말하는 그녀가 내가 알고 있는 그녀라면......

  "말도 안되. 눈......"

  내가 말을 마치기도 전에, 미오가 앞발로 내 입을 막았다. 미오의 발바닥은 눈처럼 차갑고, 부드러웠다. 미오가 내 입술에 닿아있던 앞발을 조용히 내렸다. 갈리지 않은 야생의 날카로운 발톱이 부드럽게 내 입술을 긁었다. 미오는 피가 묻은 발톱을 무심하게 할짝이며, 말을 이었다.

  "그 분을 큰 목소리로 부르지 마. 그녀는 자신의 겨울이 자신에게 돌아오지 않는 것에 대해 화내고 계셔."

  미오는 자신의 분홍색 코를 까칠한 혓바닥으로 핥으며 말했다. 흰색이 많이 섞인 미오의 코가 잠시 진분홍색으로 물들었다. 나는 작게 소리를 낮춰 소곤거렸다.

  "아, 알았어. 그런데, 그분은 동화에서만 나오는 사람 아냐?"

  나는 내가 알고있는 그녀를 떠올리며 말했다. 내가 알고있는 눈의 여왕은, 흰 드레스와 흰 코트를 입고, 무시무시한 눈보라를 거느리고, 눈처럼 흰 썰매 위에 눈보다 더 흰 자신의 몸을 앉혀놓곤 하던......동화에서나 나오던 사람이었다.

  "동화에만 나오는 사람이 어떻게 자손을 퍼뜨리냐? 자손조차도 믿지 않으니, 점점 성에서 나오려 하지 않으시는거야."

  미오는 짜증섞인 목소리로 투덜거렸다. 긴 꼬리가 다시 한번, 세차게 바닥을 때렸다. 나는 저렇게 바닥을 자꾸 치면, 꼬리가 아프지 않을까 걱정하며 입을 열었다.

  "너는, 그 분을 좋아했구나?"

  동화에서나 나올법한 사람이라고 생각하면서도, 내 선조라고 들었기 때문인지 나도 모르게 많이 누그러진 목소리가 튀어나왔다.

  "실제로 뵌적은 없어. 그 분이 마지막으로 세상에 나온건 76년 전이야."

  미오는 아쉽다는 듯이 혀로 입가를 핥으며 말했다. 하지만 미오에겐 아쉬움으로 끝낼 이야기인지 몰라도, 내겐 아니었다.

  "뭐? 그럼, 너는 어떻게 그분을 알고, 내가 그분의 자손이라는걸 아는건데?"

  나는 만나지도 않은 그녀를 내 선조라고 말하는 미오의 뻔뻔스러움에 화가나서 목소리를 높였다. 불확실한 일을 사실처럼 말해서 겨울이 가지 않는 일을 내 책임인 것 처럼 말하다니, 나는 사기꾼이라도 보는 듯한 사나운 눈길로 미오를 노려 보았다. 미오는 내가 화를 내는 것에 겁을 먹었는지, 몸을 약간 움찔거리더니, 말을 이었다.

  "우리 36대 전의 할머니가 그분 덕에 목숨을 구한 적이 있어."

  "......"

  나는 그 말을 믿기 힘들었다. 내가 아는 그녀는 자신의 마음에 든 소년을 납치해서 소년의 눈에 얼음 조각을 박아넣을만큼 냉혈한이었다. 미오에겐 미안한 말이지만, 그런 그녀가 죽어가는 고양이 따윌 살리리라곤 상상하기 힘들었다.

  "눈을 파고, 그 안에 들어가 있으면 오히려 따뜻한거 알아?"

  내 침묵을 의문의 의미로 받아들였는지, 미오가 대뜸 이유를 알기 힘든 질문을 던졌다.

  "이글루가 그런 원리라고 들었어."

  이유는 알 수 없었지만, 나는 아직도 겨울이 가지 않는 이유에 대해 궁금했기 때문에, 미오의 말에 퉁명스럽게 대꾸했다. 겨울이 가지 않는 알 수 없는 이유는, 고양이 주제에 말을 하는, 저 알기 힘든 존재만이 대답해줄 수 있을 것 같았다.

  "그 분은 얼어죽을뻔한 우리 할머니를 품에 안아 살려주셨어. 할머니는 그 일을 두고두고 후손에게 이야기해 주셨지. 그 분의 눈부시게 희고 아름다운 썰매와 그 썰매보다 더욱 아름다운 그분에 대해서. 그리고 그녀의 기운에 대해서."

  미오는 내가 궁금해하지도 않은, 그녀가 죽어가던 미오의 선조를 어떻게 살렸는지에 대해 말해주었다. 하지만 미오의 마지막 말은 내가 이해하기 힘든 종류의 이야기였기 때문에, 나는 다시 한번 반문할 수 밖에 없었다.

  "기운?"

  내 질문에 미오는 고개를 끄덕거렸다. 살짝 들려진 턱이 도도해 보였다. 미오는 긴 꼬리를 여유롭게 흔들고는 말을 이었다.

  "고양이는 영력이 쎄지. 그건 다시 말해서 기운에 예민하다는 말도 되. 너는 내가 들은 그분의 기운을 가지고 있어. 물론, 후손인 만큼 아주 약하게 있지만. 겨울은 그 기운때문에 너의 뜻을 거스르기가 힘이든거야."

  미오는 계속해서 내 귀에 입을 가까이대고 소곤거렸다. 작은 동물의 작은 숨소리가 내 귓가를 약하게 간질였다.

  "넌, 겨울을 놓지 않으려 하고 있어."

  결국 미오는 아까와 같은 대답을 들려주었다. 미오와의 대화는, 끊임없이 모습을 바꾸는 미로와 같았다. 녀석과의 대화는 한 바퀴를 돌아 다시 제자리로 돌아왔다. 나는 드디어 이 작은 생물에게 짜증을 부리기로 마음먹었다. 아니, 나도 모르게 짜증섞인 대꾸가 튀어나가고 말았다.

  "그러니까, 내가 왜!"

  "넌 시간이 가는 것을 두려워하고 있어. 겨울이 가지 않아도 시간은 흐르기 마련인데, 너는 그것을 애써 부정하고 있어. 그래서 넌 겨울이 가지 못하게 막고있는거야."

  미오는 꼬리 끝으로 바닥을 타악-치면서 말했다. 내 짜증에 기분이 나쁜 것인지 아님, 그 이유가 기분나쁜것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미오도 분명히 내게 짜증을 내고 있었다. 미오의 보석같은 눈동자는, 그 안에 경계심과 불만을 칼날처럼 품고 날카로운 빛으로 변해 내게로 향하고 있었다.

  "아니, 나는."

  그 작은 동물의 형형한 기세에 나는 말을 더듬었다. 아까 미오에게 긁힌 입술의 상처가 입김에 닿아 뜨겁게 달아올랐다. 나는 대답할 수 있는 적당한 말을 찾아내지 못하고, 마른침을 삼켰다. 그리고 미오는 그런 나를 다그치기 시작했다.

  "시간 앞에 네가 두려워하는 것이 있니? 그래서 겨울을 놓지 못하는거야? 나는 여기서 계속 너를 봤어. 두꺼운 옷깃과 함께 겨울의 끝자락을 움켜쥐는 너를 봤고, 어제와 오늘이 다르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으려는 고집쟁이처럼 고집스럽게 매일 같은 옷, 같은 가방, 같은 구두를 신고있는 너를 봤어. 그래도 아니야?"

  나는 미오의 말에 말문이 막혔다. 그랬다. 나는 그녀말대로 시간이 가는 것이 두려웠다. 겨울이 가고, 봄이 가는 것이 두려웠다.

  나는 이번 여름에 결혼을 한다. 2년여의 열애끝에 하는 결혼이지만, 나는 결혼이라는 것이 두려웠다. 더이상 '처녀'라는 단어를 쓸 수 없음이 두려웠고, 한 사람의 아내가, 며느리가, 어머니가 되는 것이 두려웠다.

  아이를 낳아 잘 기를 수 있을까 라는 고민도 되고, 아이를 낳게 되면 사라질 내 시간들과 직장을 상상하는 것도 두려웠다. 지금은 그를 사랑하지만, 이 사랑이라는 감정이 언제까지 유지될 수 있을지, 그 이후엔 어찌될지 그것을 상상하는 것도 두려웠다. 평생을 살면서 일주일도 함께 살아보지 않은 사람들을 가족으로 여길 자신도 없었다. 그를 사랑하지 않는 것은 아니었지만, 그와 그의 가족은 내겐 별개의 의미로 다가왔었다. 나는 보수적인 아버지와 그런 아버지 때문에 평생을 고생하신 어머니 밑에서 자라왔다. 제사며, 명절이며......크고, 작은 일들에 올라오실 친척 어른들을 챙기는 일까지 모두 고단해하며 치르시는 어머니를 볼 때마다 나는 막연히 결혼에 대한 두려움을 키워나가고 있었다.

  그렇지 않다는 것은 이미 알고있지만, 내가 상상하는 결혼 전의 나와 결혼 후의 나는 너무나 다른 존재였기때문에 나는 시간이 가면서 다가오는 결혼이......여름이 두려웠다. 시간이 흐르면서, 점점 결혼이라는 것이 현실로 다가오면서, 나는 나도 모르게 그것을 피하기위해 안간힘을 썼던 것이다.

  시간이 가는 것은 잡을 수 없고, 겨울이 가지 않는다 해도 결혼은 해야 한다. 지금은 하기 싫다고 아이처럼 떼를 쓰고있지만, 결혼하겠다고 결정한 것은 나 자신이다......지난 한달 동안 그토록 잊으려 했던, 그토록 피하고 싶었던 결론이 한순간에 나버렸다.

  가슴이 답답해져 왔다. 뜨거운 무언가가 내 가슴을 세차게 두방망이질 치고 있었다. 울컥울컥 크고, 단단하고, 뜨거운 것이 내 가슴을 타고, 목을 타고 올라왔다. 커다란 구슬이 목에 걸린 것 처럼, 숨조차 쉬기 힘들어졌다. 본능처럼 벌려진 입으로 신음성이 새어나왔다. 어린 아이처럼, 알면서도 인정하지 못하던 고집이 내 온 몸을 정신없이 흔들고 있었다.

  "......그래, 맞아. 나......때문이야. 미안해."

  나는 잔뜩 갈라진 목소리를 힘겹게 내뱉었다. 한숨처럼 나온 사과가 끝나자 눈물 방울이 떨어졌다. 회분홍색 보도블럭에 그려진 작은 진분홍색 동그라미를 확인한 순간, 어디선가 훈풍이 불어왔다. 나는 내가 잡고 있던 겨울을 배웅하기 위해 고개를 들었다.

  "아!"

  미오와 이야기를 나눌 때만해도 보지 못했던, 버스를 기다리는 사람들은 모두 봄냄새가 묻어날 듯한 산뜻한 봄 옷들을 입고 있었다. 나는 미오를 확인하기 위해 황급히 고개를 돌렸다. 미오가 있던 자리엔 노란 민들레가 하나 피어있을 뿐이었다. 미오가 웅크려 자고 있던 신문도, 미오도 그곳엔 존재하지 않았다. 나는 눈물을 닦고, 시계를 보았다. 버스를 기다리기 시작한지 7분이 지나있었다. 나는 곳곳에 올라오기 시작한 새싹들을 바라보며, 무심코 입가에 손을 댔다. 입술에선 예상하지 못했던, 붉은 물기가 묻어나왔다. 나는 입술을 핥았다. 입술 밖으로 나온 혀는 달콤한 봄기운에 피 맛을 잠시 잊었지만, 입술을 핥고 들어온 혀에선 희미한 쇠맛이 나고있었다. 다시 한번, 주위를 둘러 보았지만 연한 회색 줄무늬를 가진, 초록과 파란 눈을 가지고, 분홍색 코를 가진, 매력적인 고양이는 어디에도 없었다. 나는 지각을 피하기 위해 때마침 도착한 버스에 서둘러 올라탔다.

  다음날, 나는 약속대로 고양이 캔을 하나 뜯어 화단의 관상수 밑, 으슥한 곳으로 밀어 넣었다. 캔을 밀어넣은 지 얼마 되지않아 진한 주황색 줄무늬를 가진 고양이 한 마리가 황급히 도망가는 것을 보았지만, 미오는 아니었다. 나는 그 주황색 줄무늬의 고양이에게 시선을 둔 채로 고개를 갸웃거렸다. 미오가 정말 고양이었는지, 내가 잡고있던 겨울이었는지 도무지 알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추신 : 바꿨습니다...생각해보니, 여긴 그 사람이 모르는 곳이라... ^^;
거울에 글을 올리는 것은 처음(인가?)이라서 설레네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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