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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 새벽달

2005.03.30 14:5203.30

아직 동이 트지 않은 하늘은 짙은 남색이었다. 우아한 곡선을 그린 초승달 곁에는 달만큼이나 밝은 별이 매달려, 추운 바람이 불 때마다 깜박깜박 빛을 흐렸다. 모희는 코트 주머니에 두 손을 찔러 넣고 삐딱하게 서서 달과 별을 바라보고 있었다. 빰이 얼어 얼얼하고, 검은 스타킹 한장을 달랑 신은 다리도 추웠지만 그런 건 아무래도 좋았다. 모희는 기지개 펴기 전 새벽 하늘을 그렇게 들여다본 적이 없었다. 새로운 하루가 시작되기 전의 부산한 생기가, 신비로운 남색 하늘에 흘렀다.
"저어..."
누군가 말을 걸었다. 모희는 달과 별에게서 시선을 거두었다. 지금 모희의 눈앞엔 머리속이 하얗게 질린 채 입술을 떠는 어눌한 여자아이가 하나 있었다. 모희는 짜증이라기보단 경멸감이 들었다. 이건 왜 여기 있지? 썩 사라져 주면 좋을 텐데. 모희는 빨리 꺼져, 라고 말하려다가 민영을 옥상으로 부른 건 바로 자신이라는 사실을 깨닫고 그만두었다 .하지만 무엇 때문이었는지는 기억이 안 났다.
  모희는 가끔씩 백일몽에 빠져들곤 했다. 그리고 퍼득 깨어나면 뭔가 알 수 없는 상황이 벌어져 있곤 했는데, 그 상황을 이해하기까진 약간의 시간이 걸렸다. 모희는 자신이 민영을 옥상으로 불러낸 이유를  생각해내려고 양 미간을 찌푸렸다. 모희는 그런 표정에 겁을 집어먹고 입술 뿐 아니라 턱과 어깨까지 떨었다.
   코트 주머니 안의 커터칼을 만지작거리며 모희는 비로소 기억해낼 수 있었다. 이유같은 건 처음부터 없었다. 혹은, ´이유´는 어딘가에 확실이 존재하지만 몰라도 될 정도로 하찮다. 자신이 무엇을 할지는  자신도 모른다ㅡ단지 어떤 목적으로 이끄는 악의에 의해 움직일 뿐이다. 속이 텅 빈 마리오네트처럼. 내 것이 아닌 머리, 내 것이 아닌 가슴, 내 것이 아닌 몸.
  저 미련해 터진 여자애 억시 텅 비어서, 뭔가에 의해 조종되고 있다. 저 앤 그 사실을 아는걸까. 모희는 민영의 새파랗게 질린 얼굴을 훑어보았다. 그런 사실을 알기엔 너무 멍청하고 둔해 보였다. 모희의 몸 곳곳에 연결된 실이 팽팽히 조여들었다. 경멸감 때문이었다.
  "죽고 싶은 적 있어?"
  갑작스런 모희의 질문에 민영은 피가 싸악 가셨다. 모희는 무표정한 얼굴로 ´당연히 있겠지. 그렇게 심하게 따돌림당해왔는데 죽는 생각 한 번 안해봤을 리가 없잖아?´ 하고 묻고 있었다. 그리고 그것은 사실이었다. 그러나 민영은 대답할 수가 없었다. 그 아이는 모희의 오른쪽 코트 주머니를 계속 쳐다보고 있었다. 그 주머니 속의 손이 뭔가를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그게 무엇일까...먹는 것? 어쩌면 학교 앞에서 파는 백원짜리 불량식품일지도 모른다. 저 모희가 불량식품을 만지작거린다고. 어쩐지 우습다.
웃어지지 않았다. 민영은 모희가 무서웠다.  
  학교에서 모희는 무서운 애라고 소문이 나 있었다. 그 아이는 2학년 때 이 중학교에 전학을 왔는데, 전학온 날부터 졸업식 하루 전인 오늘까지도 학교의 누구 하나 그 아이의 ´표정´을 보지 못했다. 고작해야 뭔가를 생각하려 애쓸 때 아주 가끔 찌푸리는 것 정도였다. 그리고 모희는 표정만큼 말 수도 없었다. 어둠고 차가웠다. 아주 가끔 듣는 그 아이의 목소리는 금속적이어서 소름끼쳤다. 게다가 이런 일화도 있었다. 언젠가 일진 여자애들이 시비를 건 적이 있는데, 모희는 눈 하나 까닥 않고 몰매를 맞다가 마지막에 리더격인 여자애의 얼굴을 벽에 몇 번이고 찧어 버렸다고 한다. 역시 아무렇지도 않게, 분노도 뭣도 없는 얼굴로.
저 아이는 살인도 할 수 있을 거야, 하고 아이들은 수근거렸었다. 어쩌면 지금 내가 모희의 첫 살인 대상이 될 지도 모른다. 민영의 표백된 머리속에 구더기가 들끓기 시작했다.
그때 모희는 주머니에서 커터를 꺼내들었다. 민영의 뒷편에 있는 텃밭에 아주 가냘픈 나무줄기가 뻗어난 것이 눈에 띄어서였다. 옥상의 텃밭은 그들이 소속된 반 관할이었는데 상추와 꽃양배추, 혹은 샐비어 따위를 길렀다. 모희가 발견한 나무줄기는 그중 어느 종도 아니었다. 바람에 날려온 씨앗이 뿌리를 내린 것일까? 아니면 반의 누군가가 장난으로 심어둔 것일까? 아무래도 상관없다. 모희는 커터로 나무의 줄기를 베며, 다시 물었다.
  "죽고 싶은 적 있냐고 물었어."
  "있어..."
  "왜?"
  "아이들에게 따돌림받아서...."
  괴로웠어, 라고 덧붙인 것 같았지만 우물쭈물하는 발음이라 들리지 않았다.
   "왜 죽지 않았어?"
모희는 자기가 왜 이런 질문을 계속하는지 알 수 없었다. 모희는 이 상황이 빨리 끝나버리기를 바랐다. 무슨 일이 일어나든지, 자신의 몸을 묶은 실의 팽팽한 긴장감으로부터 벗어나고 싶었다.
마침내 모희는 나무줄기를 반의 반 길이만 남겨놓고 토막내 버린 뒤, 등을 돌려 민영에게 향했다. 모희는 민영의 눈을 보았다. 민영은 피하지 않았다. 모희는 현기증을 느꼈다.
  모희는 민영의 왼손목을 부드럽게 붙들고 소매를 걷어줬다. 가늘게 떨리는 흰 손목이 드러났다. 모희가 방금 잘라낸 나뭇가지처럼 말랐다.
"무서웠어? 용기가 없었어? 그래서 못 죽었어?"
  민영은 모희의 갈색 손가락에 붙들린 손목에 시선을 고정시키고 있었다. 자기 것이 아니었다. 너무 새하얗고 볼품없어서 병든 새 다리 같았다. 그게 자기의 팔일 리가 없었다.
아이들의 괴롭힘이 극에 달할 때, 혹은 조별 학습에서 혼자만 덩그러니 앉아 있을때 민영은 그렇게 감각을 닫아 버리는 법을 익혔다. 나완 상관 없다, 나완 상관 없다고 몇 십번이고 되뇌이며 진짜 자신은 어딘가 다른 곳에 있고 ´여기´ 있는 건 우글거리는 구더기의 무리일 뿐이라고 생각했다.
  지금 내가 여기에서 죽는다면. 구더기들이 꿈틀거렸다. 지금 내가 여기서 죽는다면, 아니, 죽어야만 한다면? 억울할게 있을까? 모르겠다.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는다. 왜냐하면 나는 구더기니까, 진짜 나는 여기 없으니까. 이대로 내가 죽는다면, 진짜 나는 영원히 자유로워질 것이다. 그렇다면 모든 게 잘 된 것이 아닌가. 편하다. 그러나 민영의 마음, 혹은 몸 한구석에서 무엇인가 몸부림치고 있었다. 모희의 커터가 신경의 살갗을 뚫는 순간 그것은 단발마의 비명을 질러 손목을 움츠리게 했지만, 모희의 손가락도 순간 억세져서 꼼짝할 수 없었다.


모희는 옥상 자물쇠를 잠그고 내려와 열쇠를 교무실 앞 열쇠걸이에 다시 걸어놓았다. 다시 교실로 돌아가려던 모희는, 마음을 바꿔 열쇠를 가지고 화장실로 들어갔다. 그리고 열쇠를 변기에 던지고 물을 내렸다. 교실에는 민영의 책가방이 책상 위에 덩그러니 내던져저 있었다. 모희는 자기 가방 안에 민영의 책가방을 통째로집어넣고 메었다.
학교 밖으로 나온 모희는 외진 골목의 쓰레기통에 민영의 책가방을 던져넣었다. 골목을 빠져나왔을 때 하늘의 남색은 꽤 희어져있었다. 별은 없고 달만 먹다 버린 뼛조각처럼 걸렸다. 하나 둘 학교로 향하는 아이들이 보였다. 아이들은 두꺼운 점퍼나 코트를 입고 목도리를 두른 채 걸음을 재촉하고 있었다. 바람이 세차게 불어 교복 스커트 자락이 다리에 휘감겼다. 아이들은 고개를 내려뜨리고 바람에 맞서 걸었다. 점점 풍화하는 하늘 위의 뼛조각에 누구도 관심 기울이지 않았다. 원래부터 허상이었던 것처럼 사라져 가겠지. 모희는 고개를 뻣뻣히 들고 걸었다.
교실에는 여자애들 셋이 모여 떠들고 있었다. 무슨 이야기들을 하는지, 말소리가 시끄럽게 울렸다. 알아들을 수 없었다. 모희는 워크맨 이어폰을 끼고 플레이 버튼을 눌렀다. 갈아 엎는듯한 전자음이 귀에 쏟아져내렸다. 눈을 감고 소리에 집중하니 소리가 점점 커져서 모희를 집어삼켰다. 편안했다.
2년 전, 예전 중학교에서 따돌림당했을 때 모희는 항상 워크맨을 끼고다녔다. 음악을 들을 수 없는 상황에서 괴롭힘이 시작되면 바로 이 전자음을 떠올리고 거기에 묻혀버리려 애썼다. 그러면 자신에게 가해지는 폭력이 실제 ´나´와는 아무 상관 없는 것처럼 느껴져, 모희는 무감각해질 수 있었다.
  언젠가부터 모희는 음악을 떠올리지 않아도 무감각하게 되었다. 모희는 가끔씩 자기가 어떤 아이였었는지 떠올려보았지만, 그것은 수백년동안 모래 속에 묻혀있던 그림 같았다. 그림 속의 모희는 따뜻하고 소극적인 눈빛을 하고 있었다. 꽃과 연약한 풀잎들, 털이 복실복실한 작은 동물, 바람과 비와 하늘과 빛과 어둠을 고요히 바라보고 있었다. 그리고 백일몽이 있었다. 빛과 어둠으로 이루어진 다채로운 환상, 어린아이의 세계가 있었다. 모희는 그 세계의 왕이었다.
아이들은 모희가 왕이라는 이유로 그 아이를 싫어했다. 아이들은 모희에게서 세계를 앗아갔다. 대신 절대 괴로워하지 않는 강철 심장을 주었다. 모희는 잊었다. 모희는 만족했다.
모희는 눈을 떴다. 여자애들이 민영의 빈 자리를 둘러싸고 뭐라고 이야기하고 있었다. 책상에 쓰레기라도 들이부을 계획인가. 모희는 지금쯤 옥상 위의 민영이 살려달라고 외쳐대고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러면 아마 자물쇠를 부수고 옥상 문을 열게 될 것이다. 그 아이는 구출되고, 병원에 입원해야 할 것이다. 어쩌면 정신과에. 그리고 나처럼 다른 학교로 전학을 가야 할 것이다. 만약 살아난다면.
내일이면 졸업식이고, 곧 봄방학이 시작된다. 지금 옥상에서 나오지 못한다면 최소한 보름동안 그래도 있어야 한다.
왼손목에서 피를 흘리는 채. 바람에 얼어붙은 시체인 채.
모희는 창으로 눈을 돌렸다. 달은 이미 사라지고 없었다. 차가운 햇빛이 아침하늘을 얼리고 있었다. 모희는 그 하늘을 텅 빈 자신의 눈동자에 담으려고 했지만 자꾸만 미끄러져나갔다. 어쩌면 눈물을 흘리고 있었기 때문인지도 몰랐다. 그러나 모희는 그 눈물이 자기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았다. 내 것이 아닌 머리, 내 것이 아닌 가슴, 내 것이 아닌 몸, 그리고 내 것이 아닌 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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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희와 민영이 원래는 한사람이었다 파문! ...이 사실이라면 이 소설은 환상소설이겠죠. 아마도.

어렸을 때 끄적인 건데, 지금도 마음에 듭니다. 좀 고쳐서 올립니다.

이걸로 신고식을 대신합니다^^;;
lucik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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