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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 소꿉친구

2005.04.18 16:1704.18

소꿉친구


날씨가 유난히 좋은 날이었다. 놀이터에서 그네에 앉아 있는데 바람이 선선해서, 아무도 오지 않았으면 했다. 시간이 그대로 멎고 한 가지 풍경이 일만 년쯤 지속되어, 사실은 인간 따위 이미 멸망했다고 누군가 말해도 나는 수긍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랬다.

이제 나는 나이를 먹었고 그네를 타 본 지도 오래 되었고 근방에서 놀이터를 부러 찾아 본 일도, 까마득하다. 이어폰을 귀에 끼고 만원 지하철에서 엉덩일 더듬는 놈의 손등을 힘껏 꼬집은 후에 인파에 떠밀려 내렸을 때 치한 때문에 기분이 나빠 자의로 내린 건지 다만 남에게 떠밀려 내린 건지 스스로도 알 수가 없었다. 새카맣게 들어찬, 지하철 문 저편 사람들 얼굴은 그게 전부 치한이라고 해도 경찰에 가서 진술할 수 없을 만큼 똑같아 보이기만 했다. 나는 눈이 먼 인간처럼 멍하니 서 있었다. 막차는 빠아앙 하는 큰 소리와 함께 꽁무니를 보이며 저쪽 어둠 속으로 사라져 버렸다.

겨우 세 정거장.
택시를 잡는데 오래 걸렸다.
이런 시간에는 짧은 거리를 가려 들지 않는다. 여자 혼자 택시를 타는 건 무서운 일이어서 나는 지은 죄도 없으면서 몸을 움츠렸다. 나이 지긋한 택시 기사는 허락 없이 속도를 늦추거나 속도를 올렸고, 생각했던 것보다 비싼 요금이 찍혀 나왔다. 나는 이런 시간에, 무려 여자를 태워 주신걸 감사하듯이 요금을 냈다. 택시에서 내렸을 때 방정맞게 눈물이 날 것 같았다. 싸늘한 바람을 맞으면서 하늘을 보는데 달도 별도 없는 하늘에 구름이 안개처럼 자욱하니 지나고 있었다. 늦은 시간이니까 이대로 무슨 일이 벌어져도, 사람들은 나를 욕하겠지. 그런 걸 생각하면 또 울적해 지니까 가능한 한 야무지게 걸었다.

살아간다는 건 의외로 재미가 없는 일이어서, 버텨 낸다는 건 의외로 힘이 드는 일이어서, 투정 부리며 어리광 피우며 사람은 살아 간다고 나는 믿는다. 획기적인 아이디어는 한 번도 떠오르지 않고, 뇌 안에 벌레라도 기생하는 양 간질간질 닿을 듯 말 듯 하는 기분이 일상을 잠식해 버려도 나는, 매일 밥을 먹듯 지하철을 타고 사람과 살을 부딪히고 불쾌함과 따스함 사이를 흔들거리며 살아간다.

사실은 이 지구 따위 이미 멸망해 버린 것일지도 모른다고,
이 모든 것은 죽은 줄도 모르는 원령들이 지루한 일상을 반복하는 것뿐일지도 모른다고,
나는 그런 생각을 하면서 잠자리에 누워 웃는다.
아주 오래 전 일이다. 지구의 나이처럼 오래 묵은 것 같은 건방진 기억. 나는 양 갈래로 머리를 묶은 열 살짜리 계집애였고 놀이터는 그 날 아무도 없었다. 칠이 벗겨진 그네에 앉아 새빨간 녹이 다 묻어 나도록 그네 줄을 힘껏 잡고 나는 울며 발을 굴렀다. 울며 발을 구르고 또 굴렀던 이유는 그 시절에 뭘 배웠는가 기억 나지 않는 것처럼 좀 아득하다. 봄이라 날씨가 좋았고 하늘은 옥빛이었다. 울음이 다 잦아들고 온 몸이 땀으로 젖을 때까지 아무도 오지 않아, 나는 이 세상에서 혼자였으면 싶었다. 그네 위에 몸을 웅크리고 앉아 바람 부는 것에 위로를 받고 그네 줄이 움직이는 쇳소리에 잠이 들었다. 졸다가 눈을 떴을 때 무척 기분이 좋아서 이대로 영원히 모든 걸 멈췄으면 하고 바랐다.

아무도 없기를 바랐던 그 풍경에 뛰어든 것은 바로 너, 이름도 얼굴도 기억나지 않는 너. 겨울 나무처럼 칙칙한 고동색 바지를 입고 너는 팔짝팔짝 경쾌하게 뛰었다. 너는 나의, 이미 멸망해 버린 풍경 속으로 달려들어 웃고 떠들었다. 네 이름도 얼굴도 잊혀질 때까지 나는 이따금 너를 돌이키며 어렴풋이 깨달았다. 네가 나를 지탱할 지도 모른다는 것을.

잠이 들며 잠이 깨며 나는 생각했다.
괜찮을 거라고.
무엇 때문에 고통스러운 지 모르는 것처럼 무엇 때문에 괜찮아 지는 건지 모를 적이 많다. 왜 그런 지 조차 생각할 수 없으니까 나는 눈물이 나오면 훌쩍훌쩍 울고 웃음이 나오면 헤죽헤죽 잘 웃기로 했다. 표정 어두운 사람들 틈에서 여러 가지 화장품 냄새를 맡으며 지하철이 흔들리는 소릴 듣는다. 어쩌면 세상 같은 건 벌써 멸망해 버린 거라고, 우리들은 과거의 기억에 기대 지극히 지루한 일상을 반복하고 있는 거라고, 심지어 그렇게 생각할 때도 나는 우선 믿어 본다. 적막한, 완성된 풍경 속으로 달려 들었던 너를. 이제는 기억할 수 조차 없는 너를.
그러면 괜찮아 진다. 다 괜찮다.
살아가자.


:en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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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로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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