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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 술 한 잔 두드리다

2005.03.14 23:0803.14

  글쎄. 말하자면 딱히 어디부터 잘못되었다고 할 수는 없다. 내 인생이란 게 애초부터 그리 타인의 귀감이 될만한 것은 아니었다. 학교란 곳은 거의 기억이 나지 않았고 군대란 곳은 잠깐 기억나다가 잊혔고 맨 처음 취직한 직장은 안타깝게도 없다. 그렇다. 벌써, 벌써란 말을 써야 할 정도로 나이를 먹었다는 사실이 슬프게도, 서른을 넘겼음에도 나는 일정한 수입을 얻어 본 적이 없다. 이 사실은 내가 아직도 소년과 같은 감성을 가졌다는 뜻이다. 적어도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이런 의견에 좀처럼 찬성하지 않는 사람들은, 특히 어머니, 가끔 내 생존 능력을 시험해 보곤 한다. 세상은 생존하기에 그리 적절한 곳은 아니다. 일단 우리가 이 곳에서 뭔가를 도모한다는 행위 자체가 거대한 착각에 가까운 것이다. 아, 물론 거기 그 사람은 제외하고 말이다. 그 사람은 내가 알기로는 사람이 아니다. 사람이 아니라 어디 이상한 성운에서 온 사람이라고 한다. 뭐, 별로 알고 싶은 생각은 없다. 단지 술 한 잔 사준다길래 말을 듣고 있는 것 뿐이다. 이 사람은 꽤나 말이 많았다. 그냥 말이 많은 게 아니라 썰이 길었다. 같은 말을 반복하는 법도 없이 말도 안되는 말을 주저리주저리 풀어놓는 입에는 탄복하고 말았다. 어느새 나는 취하고 말았던 것이다. 어찌나 취했는지 맞장구까지 치고 있었다.
  "그래설라무네 우리가 여기 지금 이곳에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에서 감동을 받을 수밖에 없는 거요."
  "맞는 말씀이십니다!"
  집에서 쫓겨나와 거리에 쭈그리고 앉은 사람에게 술 한 잔 건네준다면 무슨 말에라도 동조하도록 만들 수 있다. 여기 실례가 있다.
  "그런데 말이오."
  갑자기 말투가 어두워졌다. 나는 어둠에서 나온 위대한 왕자라고 고백하려는 사람처럼 표정이 암울했다. 긴장을 하고 있는 것은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풀어질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아직 계산을 하지 않았다. 이런 상황에서 뻗어버리기라도 하면 곤란해진다. 안색이 좋지 않았다. 좋지 않은 징조였다.
  "잘 들어보시오."
  고개를 숙이고 내 얼굴에 입을 가까이 갖다댔다. 흔히 악당들이 악당다운 언급을 할 때 애용하는 동작이었다. 나는 악당은 아니었지만 싸구려 영화는 수도 없이 봤다. 직업이 없는 사람에게 케이블 재방송 영화는 상당히 유용했다. 시간을 없애고 자긍심과 재활 의지를 없애는 일에.
  "난 세상을 없앨 거요."
  무슨 소린가 했더니만.
  "아, 그렇습니까? 참 좋은 일이군요."
  남자는 놀란 얼굴로 날 바라봤다. 어쩐지 감동하고 있는 것 같기도 했다.
  "그렇지요? 정말 이 세상은 계속 이을 필요가 없을 정도로 쓸모가 없지요? 제 생각이 맞는 거죠? 당신도 이 세상 따위는 없어져야 한다고 생각하죠?"
  "아, 그렇구 말구요. 지당하신 말씀이십니다. 그러니까 자아 술 한 잔 더 하시죠. 아줌마 여기 소주 1병!"
  남자는 울기까지 했다. 어깨를 들썩이고 숨죽인 소리가 새어나오는 그런 모습 있지 않은가. 보통 이런 경우에는 혼자서 멋쩍게 술을 먹기보다는 어깨에 손을 턱하고 얹어줘야 제 맛이다. 도덕적 우월성이란 위치는 그렇게 쉽게 얻을 수 있는 게 아니다. 동정심이야말로 그런 위치까지 걸어갈 수 있는 가장 좋은 안내서이다.
  "정말이지, 이 별은, 이 별은 말이죠. 이 별에 사는 사람들은 다 불쌍해요. 너무 불쌍해서 견딜 수가 없어요. 모두가 행복한 얼굴로 살아가고 싶다고 말하고 생각하지만요. 실상 아무도 어떻게 해야 행복해질 수 있는지 몰라요. 또 정말로 행복해졌을 때는 결국 그걸 차버리고 말아요."
  "예에. 예에. 맞는 말씀이십니다. 동감합니다. 크으."
  술 맛이 느껴지질 않았다. 그래서 더 좋았다. 아예 마시지도 않고 취하는 방법은 없는 것일까. 난 술 한 병을 더 시키려다 밖에 잠깐 나가 속에 있던 술을 게워냈다. 그리고 다시 마시기 위해 원래 자리로 돌아왔다. 남자는 내가 밖으로 나갔다 온 것도 눈치채지 못한 채 여전히 주절거리고 있었다.
  "그래서 말이죠. 전 생각했어요. 아예 아무도 아무것도 느끼질 못하게 된다면 얼마나 좋을까하고요. 그러면 배고파서 슬픈 사람도 아파서 슬픈 사람도 없고요. 괴로워서 슬픈 사람도 슬퍼서 슬픈 사람도 없을 겁니다. 얼마나 좋아요. 하지만 그렇게 되면 인간이란 종은 없어지게 될거예요. 왜냐하면 사람을 사람답게 만드는 건 여전히 고통이거든요. 감각이란 것이죠. 아시죠? 아저씨. 사람이 취기를 못 느끼면 어떻게 되겠어요?"
  "엉?"
  순간 나는 내 정신이 그 어느때보다 명료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리고 마신 것과 먹은 것을 모두 토해냈다. 하지만 토할 때 언제나처럼 찾아오는 내장을 모두 뱉어내는 느낌이 없었다. 또한 목구멍이 순간적으로 막혀 질식사하는 느낌도 없었다. 편지를 다 쓰고 딱풀을 써서 봉하는 일과 다를 게 없었다. 없었다. 아무런 느낌도 없었다. 정말로 없었다.
  난 음절 하나하나를 또렷하게 발음했다.
  "당 신 지 금 뭘 한 거 지?"
   남자는 희미하게 웃고 있었다. 포장마차에 있던 다른 사람들도 토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토록 낯선 경험에 쉽게 적응하는 사람은 없었다. 너무 놀란 나머지 오뎅 국물 통에 손을 담근 사람은 한참을 토한 후에야 그것을 깨달았지만 여전히 담그고 있었다. 만약 저 사람이 운전을 하고 있었다면 어떻게 될까. 자신이 핸들을 잡고 있는지 잡고 있지 않은지를 알 수 없다면, 액셀을 밟고 있는지 밟고 있지 않은지를 알 수 없다면, 도대체 어떻게 될까.
  만약 지금 위대한 일을 하고 있던 위대한 사람 중 한 명이, 그러니까 나와는 전혀 상관도 없고 애초에 상관이 있을 가능성도 없는 사람이, 아주 중요한 일을 하고 있었다고 치자. (그런 사람들은 원래 언제나 중요한 일을 하고 있으니까.) 이를테면 NPT 같은 것. 자, 한 쪽에는 위대한 수상이 있고 다른 한 쪽에는 더 위대하거나 혹은 덜 위대하더라도 그 사실을 인정하지 않는 대통령이 있다. 그럴듯한 종이에 사인을 마치고 서로는 악수를 하기 위해 일어선다. 물론 진짜 일어서는 건 아니다. 일어서는 동작에 한없이 가까워질 뿐이다. 그리고 손을 잡았을 때,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는다면, 평소에 느끼던 것들이 사라진다면, 공기가 주는 희미한 압박감이나 입안을 맴돌던 침, 항상 간지럽던 넓적다리, 그 모든 게 일순간에 느껴지지 않는다면, 둘은 어떤 생각을 할까. 상대방이 준비해놓은 완벽한 함정에 걸렸고, 이제 좀 있으면 자국에 핵세례가 내려지리라는 예측에 도달할 거라는 내 예측은 무정한 세상에 남아있는 희망에 너무나도 무감각한 것일까?
  여기가 끝인지도 알 수가 없다. 지금은 눈도 보이고 소리도 들을 수 있지만 언제 끊길지 모른다. 물이나 전기도 세금을 내지 않으면 끊기는 세상에서 오랫동안 무료로 사용해왔으니 그 정도면 된 것이다.
  나는 다시 자리에 털썩 앉았다. 감각이 느껴지질 않아 술병을 잡거나 술잔을 집을 수는 없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이미 술병을 입에 물고 나발을 불고 있는 나를 어쩔 수는 없는 것이다. 세상이 뭐 어쨌다고? 잘 모르겠구만.
  남자는 그런 나를 보며 어쩔 수 없다는 듯이 웃고 있었다. 나도 웃어주고 싶었지만 아직 술이 남아 있었다.
  "나와 함께 가겠소?"
  술 맛은, 술 맛이란 건 솔직히 맛이 있는 건지 없는 건지 모르겠다. 감각이 없어지기 전에도 그랬다. 나는 술을 마시면서도 뭘 마시는 건지 잘 몰랐던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말하듯이, 혹은 쓰레기, 잉여 생산물, 희망에 찬 구더기들이 말하듯이 분위기란 걸 마신 건지도 모른다. 확실한 것은 3년 전에 씹은 껌 말고는 없었다. 뱉자마자 신발에 붙은 걸로 봐서는 세상이 어찌 돌아가는지 알고 있는 껌이었다.
  "고개만 끄덕이면 된다오. 어떻소? 당신이 가겠다면 나는 물론 좋다고 말할 것이오. 술병을 입에서 떼고 자리에서 일어나고 우주선이 내려오고. 알겠소? 모든 게 그렇지 않소? 한순간에 모든 게 결정나 버린다는 걸 알고 있지 않소?"
  고개를 끄덕이려다가 술이 먼저 떨어졌다. 술병이 떨어져 산산조각이라고 비명을 질렀다. 듣기 좋은 소리는 아니었다. 어째서 청각은 남아있는지 감각의 실체에 대해 몇마디 하고 싶은 기분이었다.
  남자는 시계, 시계 비슷한 것, 아니면 시계를 뛰어넘는 것을 바라봤다. 1초 정도? 2초 정도? 확실치가 않다. 아무래도 껌을 하나 더 씹어야겠다. 빌어먹을 국제표준시 같으니라고.
  "좀 있으면 우주선이 올 거요. 얼른 결정해 주었으면 좋겠소. 이러다간 양치질도 못하고 잠자리에 들게 생겼소."
  남자는 아무래도 균형이란 단어를 알고 있는 모양이었다. 괜찮은 인생을 구가하려면 저 남자, 혹은 어디 이상한 성운에서 온 사람처럼 굴어야 한다. 그게 정답이다.
  "한 잔 더 하고."
  나는 본래 정답을 모르는 사람이다. 학원 선생이 수도 없이 그렇게 말했다. 나는 학원 선생 말이 맞다고 생각했고, 지금도 역시 그렇다고 생각한다.
  "한 잔 더 하고?"
  의아하다고 말할까 아니면 유쾌하다고 말할까?
  "한 잔 더 하고."
  묵묵히 술잔을 내려다보던 남자는 다시 자리에 앉았다. 어느새 감각이 돌아와 있었다. 다른 사람들은 아닌 모양이었지만 말이다. 뭐, 언제나 다른 사람들이란 게 실재하는지에 대해서 궁금증이 일곤 했다.
  술이 남은 술병이 마침 옆 탁자에 놓여 있었다. 원래 주인은 위장의 용적에 관한 고찰에 열중하고 있었다. 공식 몇가지를 넌지시 일러주고 싶은 마음을 억누르며 술병을 가져왔다. 남자의 술잔과 내 술잔을 가득 채웠다. 소주잔이 채워졌다. 우리에겐 술 한 잔이 남아 있었다. 남자와 나는 술잔을 들었다. 가볍게 부딪히며 말했다.
  "위하여."
  '무엇을'처럼 달팽이가 레종 피워대는 소리는 자제하도록 하자.
  "위하여."
  술이 술만이 할 수 있는 일을 하기 위해 목구멍을 통과했다. 그 느낌은 역시 술 마시는 느낌이었다.
  남자는 약간 어지러워하더니 술주정을 할 때까지 마신 후에 한 잔을 더 마시면 어떻게 되는지를 몸소 실현해주었다. 남자가 완전히 술에 취해 쓰러지자 나는 약간 우쭐한 기분이 되었다. 남은 술을 술잔에 따랐다. 그리고 기다리기 시작했다.
  무감각한 사람들이 내지르는 비명 속에서.
  우주선이 올 때까지.
땅콩샌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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