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밀번호를 잊어버리셨나요?

중편 신시대(新時代) 담(談) 7

2012.03.21 06:2003.21

7.







소년 왜장의 말은 옳았다. 아버지가 직접 나서는 일은 없었으나 아버지는 늙은 고참 군관과 정 비장을 양 축으로 하여 십수 개의 밀집방진을 교대로 내밀며 상대 적진을 밀어내었다. 왜구라면 그쯤에서 물러서야 했다. 그러나 우리가 밀어내는만큼 왜구들은 더 상륙해왔다. 이미 들어온 적들을 당해내기도 버거운 판에 해안선을 막을 힘은 없었다. 열린 바다를 통해 건너온 왜구들은 이 땅에서 왜적이 되고 왜군이 되었다. 팔방구수 밀집방진을 내보낼 수도 없을만큼 기세가 흉흉한 왜군이 진을 치고 성 앞에서 압박을 가하고 있었다. 아버지는 밀집방형 훈련을 중단하고 궁시(弓矢)를 만져본 이들을 따로 추려 성벽 위로 올렸다. 동네 팔매싸움(投石戰)에서 내로라 하는 돌꾼들도 마찬가지였다. 본격적인 공성과 수성의 대비가 이루어지고 있었다. 글보다 그림이 어울리는 형국이었다.







가까이서 글을 쓰라고 하셨으나 가까이 갈 일이 없었다. 정 비장도 늙은 군관도 내가 전장으로 나가는 걸 꺼렸다. 붓과 서책, 벼루만 익숙한 내 손은 병장기를 쥐지 못했다. 가벼운 단검은 왜구의 긴 칼을 물리칠 수 없었고, 두터운 갑주도 뚫을 수 없었다. “눈이 좋으니 활을 써보시지.” 늙은 군관이 농담삼아 활을 내밀었지만 가느다란 내 팔은 활줄을 반도 당기지 못했다. 짐승의 힘줄과 내장을 말려 맨 활줄은 질기고 탄탄하여 아직도 생명을 머금은 듯 보였다. 손가락이 끊어지도록 내당겨도 좀처럼 내 쪽으로 오지 아니하였다. 칼과 창이 상대를 후비는 여인의 혀였고 방패가 그 마음이라면 활줄은 여인만이 지니는 고집이었다. 나 같은 남자에게는 쉽사리 오지 않겠다는 무서운 앙탈처럼 보였다.







내가 버거워 내던진 병장기는 고스란히 누이에게 돌아갔다. 악기가 없는 누이에게 칼과 창은 모두 악기의 대용품이었다. 칼과 창을 이가 빠지도록 두드리며 소년 적장과 아버지가 만들어내던 화음을 찾아내려는 듯해 보였으나 마음에 들지 않는 모양이었다. 누이가 만들어내는 소리는 내가 들어도 그 때의 소리와 달랐다. 내가 쓴 글을 보여주고 싶었으나 누이는 글을 읽을 줄 몰랐다. 관심도 없었다. 같은 핏줄이었으나 우리가 배운대로 우리의 길은 서로 갈라지고 있었다. 그나마 마음이 핏줄로 엮였다는 사실만이 위안이 되었다.





나는 점점 글을 쓸 수가 없었다. 글을 쓰려면 마음에 광경을 들여야 하는데 그러기 어려웠다. 성벽 아래에서 내려보는 싸움은 점점 나와 거리를 줄이면서 농밀한 요기를 피우기 시작했다. 쇠냄새와 피냄새가 내 몸을 적시면서 그들이 울부짖는, 삶과 죽음의 뒤섞인 소리가 내 마음을 후벼팠다.





반면 눈과 귀가 어두운 누이는 즐겨 성벽에 올라갔다. 정 비장의 그림자가 방패라도 되는 것처럼 그 먼 등 뒤에 수그리고 앉아 소리를 들었다. 왜적들이 얼기설기 엮은 사다리를 성벽에 걸치고 올라오는 소리, 돌이 그들의 골통을 내려찍는 소리, 갈퀴낫과 긴 창날이 성벽에 부딪히며 긁히는 소리, 죽기 싫다는 소리, 살고 싶다는 소리, 그 모든 원색적인 소리는 지금까지 누이가 들어보지 못했던 소리들이었고 또 누이가 들을 수 있을만큼 컸다. 정 비장은 누이가 올라오지 못하도록 여러 번 말렸지만 늘 누이는 북새통의 싸움 어딘가에 소리를 들으며 있었다. 그래서 정 비장은 언제나 누이를 등 뒤에 지고 선 채 싸워야만 했다.







아버지는 그에 대해 다른 말을 하지 않았다. 단지 나에게 그렇게 말할 뿐이었다. 우리의 기악합주처럼, 혹은 서역의 교향곡처럼 누이에게는 이 전장이 하나의 거대한 음악처럼 들릴지도 모른다고 나직하게 말했다. 아버지는 그에 대해 간섭할 수 없다고 자르듯 말했다. 그리고 또다시 창자루를 떨치며 성벽 위로 올라갔다. 성벽을 사이에 두고, 밀어 붙이려는 뜻과 머물러 지키려는 뜻이 물러서지 않고 겨루었다. 나는 그 광경을 종이 안에 제대로 담을 자신이 없었다. 모두가 각자의 영역에서 자신을 깎아가며 지쳐있었으나 오로지 누이만이 소리를 주워담으며 신기해하고 즐거워하였다. 갯벌에 묻힌 조개껍질에 마음을 빼앗긴 어린 아이 같은 모습이었다.





아버지도 그 선만큼은 용납할 수 없었던 모양이었다.





누이는 대장간에서 무기를 악기처럼 다루는 일에 골몰했다. 커다란 나무 기둥을 하나 깎아서 세워놓고, 칼로 찌르고 베었고, 창으로 찔렀으며 몽치로 후려치고, 도끼로 꺾었다. 누가 보면 무가(武家)의 여식 같다 할 터였다. 그러나 누이가 무기를 악기 대신 사용하여 소리를 찾아내려는 것을 알았기에 나는 따로 말하지 않았다. 화살도 없이 활줄을 퉁기며 음률을 찾는 누이 모습만 봐도 알 수 있었기에 대장장이들도 따로 입에 올리지 않았다. 그러나 그 모습을 본 아버지의 눈꼬리가 대번에 하늘로 치솟았다. 이제껏 본 적 없는 사나움이었다. 아버지가 온 것도 모르고 나무 기둥을 상대로 열중하는 모습을 본 아버지의 눈이 거꾸로 솟았다. 누이를 돌려세워놓고 천둥처럼 그 뺨을 맵게 올려붙였다. 난생 처음 당하는 손찌검에 눈물보다 억울한 신음소리가 입술에서 먼저 흩어져 떨어졌다. 그러나 아버지는 듣지 않았다. 누이의 입술을 읽으라 나를 부르지 아니하였다.



“네 눈에는 사람 몸이 악기처럼 보이더냐!”





뒤늦게 정 비장이 황망히 달려왔으나 감히 아버지를 막지는 못했다. 아버지는 준엄하게 누이를 쏘아보다가 곧 몸을 돌려 사라졌다. 누이는 눈물을 떨구며 창칼과 무기들을 전부 용광로에 처넣어버렸다. 어차피 누이가 제멋대로 써서 이가 빠지고 틀이 헐거워진 무기들이었다. 다시 벼리려면 녹여야할 터였다.





왜군들도 새로운 무기를 준비했다. 창칼을 다시 녹이고 주물러 대충 만든 무기가 아니었다. 틀림없이 그 소년 적장이 말했던 더 넓은 세상에서 가지고 온 무기였다. 그들이 그 무기를 들고 우리를 향해 올려겨누자 정 비장은 실소했다. “저 놈들이 괴상하게 생긴 목검을 망측하게 잡고 뭘하려느냐.” 정 비장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콩 볶는 소리가 사방에 울렸다. 성 안 주민들은 어데서 술추렴을 하거나 비가 오나 싶어 하늘 위를 보았지만 성벽의 시체들은 아래로 떨어져 내렸다. 화살보다 훨씬 센 작은 쇠알갱이들을 활보다 멀리 내보내는 불줄통(火繩銃)이라는 것을 아버지가 밝혀내기까지 성벽 위로 나서려는 병졸들은 반의 반도 되지 않았다. 그러나 그 나무막대기가 무당의 저주가 아니라 무기였다는 사실이 밝혀져도 막는데는 별무소용이었다. 아버지는 늘상 커다란 방패를 두세장씩 겹쳐 끼워 창대에 매달고 성벽 위에 올라야 했는데, 아버지가 성벽에 나타나기만 하면, 탄환(彈丸)이라고 불리우는 그 쇠알갱이들이 눈이라도 달린 듯 그에게만 귀신같이 날아들었기 때문이었다. 방패 위에 깐 가죽을 뚫고 얇은 쇠판을 두들기는 탄환들의 소리는 아버지의 목숨을 빼앗고자 악을 쓰는 소리였다. 겁에 질려 방패 뒤에 움츠린 병졸들을 독려하다 어깨와 배, 허벅지에 탄환을 맞고 후송 조치된 정 비장은 그 불줄통이 서역의 나라들이 대부분 쓰고 있는 무기였다는 사실에 놀랐고, 그 무기의 원료가 한 대륙에서 반출되었다는 사실을 알고 더더욱 놀랐다. 그러나 역시 왜군을 막는데는 도움이 되지 아니하였다. 죽음이 시끄럽게 콩 볶는 소리를 내며 스멀스멀 성 안으로 물밀듯 들어오고 있었다. 아버지는 낮에는 성벽 위에서 떨고 있는 병졸들을 독려했고, 밤에는 정 비장과 어깨를 맞댄 채로 서역 책을 읽으며 불줄통을 막을 방법을 생각했다. 나는 낮에는 아버지를 따라 불줄통이 불러일으키는 공포와 죽음에 대해 쓰며 생각했고, 밤에는 그 것을 막는 방법을 찾아 읽으며 생각했다.





생각은 말을 일으켰고, 말은 다시 말을 낳았으나 방도는 쉽사리 나오지 않았다.





“불줄통의 심지에 불을 당기면, 그 몸통 안에 채워놓은 불씨가루(火藥)가 터지면서 그 힘으로 탄환을 밀어내는 원리라고 합니다. 그러니 물에 적시면, 심지에 불을 붙이지도 못할 것이고, 그 안에 쟁여둔 불씨가루가 습해져서 쓰지 못할 것입니다.”





내 말에 정 비장이 얼굴을 찡그리며 나무랐다. “네 생각이 얕구나. 그런 물을 어데서 끌어온단 말이냐. 소 잡아 기우제라도 지낼 것이냐?” 그 나무람은 내 목을 움츠러들게 했으나 아버지가 그 나무람의 끝을 돌려 정 비장에게로 던졌다.



“……부정적인 말은 부정적인 생각을 늪처럼 끌어오네. 빠지면 헤어날 수 없으니 말과 생각을 살피게. 한율이도 매한가지다.”



그렇게 말하는 아버지도 이미 그 늪에 빠져 좀처럼 부정적인 생각을 아니 할 수가 없는 모양이었다. 담배와 짜증과 신경질이 늘어버린 정 비장은 한숨과 곰방대 연기를 섞었다. 시끄러운 전쟁에서 내 문장은 더욱 난삽해졌고, 답답한 전황 속에서 내 생각도 갇혀 바깥으로 드러나지 아니하였다.





“이렇게 낮에 내려와 있으니 알겠는데 상인들이며 부자치들이 몰래 뒷문으로 빠져나가고 있습니다. 심지어 잔푼돈을 받고 문을 열어주고 그들을 내다주는 일로 호구하는 망종들도 있는 모양입니다. 조치가 필요할 줄 압니다.”



“예상했던 일이었네.”



“싸움이 너무 길어졌습니다. 그냥 왜구일줄 알았지요. 더군다나 이렇게 우리가 몰릴 거라고 생각도 하지 아니하였습니다.”



“모든 전쟁이 그러하네.”



“저 불줄통은 심지에 불을 붙여 타들어가는 시간이 깁니다. 가까이 달려들면 두 번 쏘지는 못할 것입니다. 팔방구수 귀행진(龜行陣) 전법을 다시 쓰시지요.”



“그 생각도 해보았으나 저들도 이미 그를 헤아려 병졸을 세 줄로 세웠네. 첫줄이 쏘고 심지를 되살릴 동안 둘째줄이 쏘고 세번째 줄이 예비하네. 첫줄이 다시 일어나면 둘째줄이 엄호하고 세번째 줄이 준비하네. 도가나 불가가 말하는 순환의 원리야.”



“지랄같군요.”





늘 아버지를 어려워하던 정 비장이었다. 그 동안 전우애가 싹텄는지 아니면 아버지에 대한 절대적인 신의가 정 비장도 무너지기 시작했는지 말투가 헤실헤실 풀어져 있었다. 죽음 같은 피로를 양 어깨와 눈꼬리에 매단 아버지는 굳이 탓하지 아니하였다. 정 비장이 곰방대를 침상 아래로 톡톡 치며 나에게 물었다.



“한율아, 저자에서 창과 방패를 팔던 이의 이야기(矛盾古事)를 알고 있느냐?”



“모를리 있겠습니까. 어려서 들어 알았고, 철들어 읽어 알았습니다.”



“지금 판이 비슷하고나. 저들이 창이라면 우리는 방패다. 이야기 속 장사꾼은 창과 방패를 각기 든 채 머리를 쥐어짜내고 있을테지. 허나 창이 너무 강하다. 저들도 우리도 각기 뭉쳤으나 우리의 방패보다 저들의 창이 강하다. 그러니 우리는 방패를 두텁게 덧댈 방도를 찾아야 한다.”



누가 그걸 모른답니까, 라고 신경질적으로 내뱉으려다가 겨우 말을 삼켰다. 아버지의 얼굴이 그믐처럼 어두웠다.



“싸움이 변하고 있다.”



나와 정 비장이 입을 모았다. “네?” “무슨 말씀이십니까.”





“이 싸움이 처음 시작할때만 해도 무예의 겨룸이었고, 군략의 다툼이라 여겼다. 하지만 이젠 아니야. 불줄통은 기상합종회의 기술로 만들어낸 도구이지, 군략과 무예를 펼치는 무기가 아니다. 불줄통을 가진 이들이 떼로 모여 있으면 천근 쇠를 지고 만릿길을 걷는 장수도 감히 대적할 수 없을 테지. 싸움을 좌우하는 힘이 뿌리부터 바뀌고 있다. 어렵구나.” 아버지를 나를 건너다보았다. “우리가 아주 중요한 역사의 한 자락에 있는 모양이다. 한율이는 가다듬어 잘 쓰고 있느냐.”



“노력……하고 있습니다.”





“문장에 사로잡히지 마라. 문장과 거리를 두어라. 문장의 고삐를 틀어쥐어라. 말을 다루듯 글을 다루어라. 말하는 말도 타는 말도 다루는 법은 다르지 아니하다.”





글에 대한 아버지의 말은 언제나 뜬구름의 무게를 가늠하는 듯해보였다. 병졸들에게 팔방구수에 대한 요해를 설명해줄 때와는 전혀 달랐다. 창은 길게, 방패는 짧게 잡으라. 입으로 구령을 붙이며 보폭은 항상 헤아려 맞추라. 창을 내찌를때 방패는 끌어당겨 균형을 맞추라. 방향을 바꿀 때마다 창날과 방패의 방향을 유의하라. 진법을 형성할 때와 문단을 형성할 때의 말은 서로 달랐다. 쉬운 아버지와 어려운 아버지는 언제나 서로 달랐다.





막막한 침묵에 정 비장이 새로 피워올린 연기가 올라가 섞였다. 한참 뒤 아버지는 바위처럼 무거운 고개를 들었다.



“한율이가 후문을 방비해라.”



“……예?”



“달리 사람이 없다. 정 비장은 정양하여 한시바삐 나를 도와야 하고, 나는 왜적을 막아야 한다. 너에게 권위를 실어주마. 후문으로 나가는 이들을 막아라. 합심하지 않으면 저들을 쫓아내기 어렵다.”



평소 같았으면 문약한 서생인 나에게 아버지가 따로 일을 맡기지는 아니하였을 것이었다. 전쟁의 숨결이 무겁고 급하게 치달으며 아버지를 옥죄고 있었다. 여유롭게 생각하고 여유롭게 움직이던 어미뫼의 아버지가 아니었다. 아버지의 숨결이 전쟁의 숨결에 눌려 야트막했다. 새삼 아버지의 마른 팔뚝이 등걸처럼 눈에 들어왔다. 누구보다 지쳐 계실 터였다.





그러나 아버지는 숨을 끌어올려 묵직하게 말을 뱉었다. 스스로를 독려하는 호흡이었다.



“정 비장 말이 옳네. 방패를 두텁게 덧대보세.”










*           *          *







싸움에서 크게 다친 이들 중 움직임에 무리가 없는 이들을 골라 후문에 돌아가며 번을 세웠다. 다리가 끊어진 이는 앉아서 살폈고, 팔이 끊어진 이는 서서 살폈다. 외눈박이와 귀머거리는 좀처럼 눈을 감고 자려 들지 않았다. 몸의 일부를 바쳐가며 싸웠는데 도망가는 이들이 있다는 사실은 그들에게 받아들이기 어려운 터였다. 분노와 배신감이 투지와 잔혹함을 키웠다. 옳은 일인지는 알 수 없었으나 달리 방도가 없었다. 왜적이 아닌 제 동포를 감시하는 눈이 사방에서 번뜩였다. 분위기는 더더욱 사나워졌으나 후문으로 도망치려 하는 이들은 제꺽 줄었다. 밤에도 흉흉하게 번쩍이는 칼날들은 땅으로 떨어진 별의 잔해들처럼 보였다.







그 즈음 나는 누이의 또다른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창과 칼과 몽치와 도끼를 모두 내다버린 누이는 한동안 대장간에 얼씬도 하지 아니하였었다. 쇠와 쇠 사이의 울림을 찾는 일에 흥미를 잃을 법하다고 생각했기에 모두들 관계치 아니하였다. 낮이고 밤이고 바쁘게 돌아가는 성 안의 상황에서 누이 하나에게만 정신을 쏟을 수도 없었다.







누이는 달빛이 강물처럼 퍼져 흐르는 후문의 성벽 위에서 활을 들고 서 있었다. 왜구와 대치하는 정문 쪽에 비해 후문 쪽의 성벽은 낮고 야트막했다. 어미뫼의 잇달은 봉우리 사이를 누비던 누이의 준족이라면 못 이를 높이가 아니었다. 그러나 눈도 어두운 누이가 내 앞에도 아득한 어둠을 바라보며 활로 무엇을 겨누고 있는지 알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러나 나는 누이에게 그 것을 미처 물어볼 수 없었다. 대신 내 눈 앞에 느닷없이 나타난 촌부(村婦)를 부를 수밖에 없었다.



“울돌 어멈!”



때가 잔뜩 끼어 푸석푸석한 얼굴 위에 달빛이 내려앉자 아버지 앞에서 덜덜 떨면서도 건어물을 팔려 노력하던 울돌 어멈을 알아볼 수 있었다. 덖어말린 건어물 보따리 대신 속을 들들 삭히던 어린 아들을 앞세우고 있었다. 나를 알아본 울돌 어멈은 어린 아들을 더러운 치마폭으로 싸안고 뒤로 물러섰다. 그러나 후문을 지키는 초병들의 사나운 눈길 아래 그녀가 감히 물러설 곳은 없었다. 초병들은 욕설을 퍼부으며 그녀를 한데 몰아세웠다. 어린 아들이 울돌 어멈의 치마폭에서 비죽비죽 울음을 터뜨렸다.



“우리는 저 왜놈들이랑 싸우다 갈 곳 없는 병신이 되었는데, 네 년이 감히 도망을 쳐? 비겁하고 더러운 년! 기녀보다도 못한 년!”



초병들의 눈은 하나같이 증오와 살기에 뒤범벅되어 있었다. 이빠진 칼과 피에 젖어 무뎌진 창, 군데군데 바스라진 몽치가 금방이라도 울돌 어멈의 투박한 살점을 저며낼 듯 보였다. 나는 황급히 그녀와 그들 사이에 끼었다. 아버지가 권위를 실어준 것은 이런 지경을 말리기 위함이었다. 한번 피를 보면 걷잡을 수 없어질 터였다. 내 얼굴을 보자 초병들은 숨을 몰아쉬며 무기를 거두었다. 그 순간 울돌 어멈이 버럭 고함을 질렀다.



“안돼! 우린 갈 거여! 가야헌당게!”





별안간 뒤통수가 아찔했다. 눈 앞이 새하얘지고, 뒤통수와 목덜미가 끈적하고 척척했다. 휘청거리는 내 몸을 뒤에서부터 울돌 어멈이 싸안았다. 찢어져 피가 줄줄 흐르는 뒤통수에서 격통이 밀려왔다. 그녀는 돌을 내던지고 품 안에서 비린내 나는 칼을 꺼냈다. 조개나 굴을 까는 칼로 내 목을 찌를 기세였다. 그녀는 목소리를 드높였다.



“비켜! 안 비키면 이 도령 목숨은 없는 것잉게로!”





평생을 바다를 오가며 삶을 지탱해온 그녀의 팔다리는 거칠고 억셌다. 하물며 타고난 모정이 광기로 더욱 두터웠다. 내가 정신을 차린들 대거리할 수 없을 것이었다. 울돌 어멈은 침을 튀기며 고함을 질러댔다.





“저 바다가 내 남편 잡아묵고, 전쟁통에 시어미 가뿌리고, 내 아들꺼정 니들처럼 병신 만들 수는 없당게! 우린 갈 거여, 내 아들은 가야 혀! 싸게 문 열어!” 말끝에 울돌 어멈은 제 아들을 발로 퍽 밀어찼다. 어린 아들은 눈물이 그렁그렁한 눈으로 제 어미를 돌아보았다. 아들을 바라보는 울돌 어멈의 눈빛이 불길보다 더 뜨거웠다.



“싸게싸게 도망쳐라이! 어매가 곧 따라갈 거잉게 도망치야혀!”



그 것이 울돌 어멈의 마지막 고함이었다. 아들이 뒤를 돌아 보초들 사이로 스르륵 빠져나갈 때 아주 짧은 선이 휘파람처럼 밤공기를 갈랐다. 내 뒤통수에서보다 더 많은 피가 울돌 어멈의 목구멍에서 울컥 치솟았다. 칼이 땅바닥으로 툭 떨어졌다. 그녀의 사지가 버르적거리다 힘을 잃고 쓰러졌다. 이마 정중앙에 화살이 하나 꽂혀 있었다. 귀신 같은 솜씨였다.





두말할 것도 없이 누이가 쏜 화살이었다. 긴 머리칼을 바람에 펄럭이며 활을 거두는 누이의 눈빛이 복잡했다. 누이가 상황을 알고 쏜 것인지 알 수 없었다. 아무리 거리가 가까웠다지만 활은 언제 배웠는지도 알 수 없었다. 어미뫼를 나온 뒤 대하는 모든 것이 언제나 내 헤아림 바깥에 있었다. 내 헤아림 바깥에서 사람들은 살고 죽었다. 동네의 아낙들이 활을 쏘듯 누이를 곁눈질해가며 울돌 어멈의 시신을 수습해가던 아침에, 나는 붓을 꺾고 벼루를 깨었다. 말과 글을 안다는 건 삶에 별무소용이었다. 울돌 어멈의 어린 아들은 끝내 찾지 못했다. 죽은 울돌 어멈의 이름조차 아는 이가 없었다. 충격으로 고열에 시달리면서, 나는 정 비장의 바로 옆 침상에서 울돌 어멈의 어린 아들이 이름도 없는 촌부(村夫)로서 평안하게 늙어 죽기를 빌었다. 누구에게 비는지도 알 수 없게 빌었다.





그 즈음 몸이 얼추 추스르게 된 정 비장이 후에 나에게 전해주었다. 열에 들떠 헛소리를 퍼붓고 있는 나를 보기 어려워진 정 비장은 아직 무거운 몸을 일으켜 바깥으로 나왔다. 비척비척 길을 걷다 뜻밖에도 색주가 문 앞에서 아버지를 보았다. 아버지는 품에서 약간의 은전을 꺼냈고, 늙은 기녀는 화장기 없는 얼굴로 손에 든 악기를 건네주었다. 줄이 튿어지고 몸통이 습기에 뒤틀렸으나 그 것은 틀림없는 해금이었다. 해금은 애처롭고 미묘하여 기녀가 다루기에 어려운 악기였다. 한 번 울어보지도 못한 채 기녀와 기녀 사이를 떠돌았을 터였다. 결국 해금은 아버지의 손을 거쳐 상처입은 몸이나마 누이의 품 안으로 들어갔다. 우울하게 담벼락 그늘 아래 주저앉아 있던 누이는, 정인의 몸을 다루듯 해금을 다루었다. 아마도 누이는 죽은 울돌 어멈을 위해 어설피 우짖는 해금 소리나마 바치고 싶었을 터였다. 누이의 해금 타는 솜씨가 어떠냐고 묻자 정 비장은 물끄러미 나를 바라보다가 말했다.





“그 해금 켜는 손이 꼭 칼을 잡은 것 같았더니라.”





댓글 0
번호 분류 제목 글쓴이 날짜 추천 수
공지 2024년 독자우수단편 심사위원 공고 mirror 2024.02.26 1
공지 단편 ★(필독) 독자단편우수작 심사방식 변경 공지★5 mirror 2015.12.18 1
공지 독자 우수 단편 선정 규정 (3기 심사단 선정)4 mirror 2009.07.01 3
477 장편 상상이론 - 시간의 비밀(1) 테트라찌니 2013.02.04 0
476 장편 상상이론 - 프롤로그 테트라찌니 2013.02.03 0
475 중편 복수와 장미 -프롤로그 규영 2013.01.04 0
474 중편 신시대(新時代) 담(談) 10(完) 이니 군 2012.03.21 0
473 중편 신시대(新時代) 담(談) 9 이니 군 2012.03.21 0
472 중편 신시대(新時代) 담(談) 8 이니 군 2012.03.21 0
중편 신시대(新時代) 담(談) 7 이니 군 2012.03.21 0
470 중편 신시대(新時代) 담(談) 6 이니 군 2012.03.21 0
469 중편 신시대(新時代) 담(談) 5 이니 군 2012.03.21 0
468 중편 신시대(新時代) 담(談) 4 이니 군 2012.03.21 0
467 중편 신시대(新時代) 담(談) 3 이니 군 2012.03.21 0
466 중편 신시대(新時代) 담(談) 2 이니 군 2012.03.21 0
465 중편 신시대(新時代) 담(談) 0,1 이니 군 2012.03.21 0
464 장편 토끼야 어디로 가느냐 손님 2011.12.24 0
463 중편 하마드리아스 -하- 권담 2011.11.21 0
462 중편 하마드리아스 -중- 권담 2011.11.20 0
461 중편 하마드리아스 -상-1 권담 2011.11.20 0
460 장편 돈과 지니(Genie)와 악마의 전쟁 - 1화 키프트 2011.08.23 0
459 장편 돈과 지니(Genie)와 악마의 전쟁 - 프롤로그 키프트 2011.08.22 0
458 장편 돈과 지니(Genie)와 악마의 전쟁 - 예고편 키프트 2011.08.21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