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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편 신시대(新時代) 담(談) 6

2012.03.21 06:1903.21

6.







“팔방구수(八方九守)하라! 여덟 방위만 지키면 중심은 뚫을 수 없다!”



아버지는 서역어를 잘 알지 못했다. 젊었을 적 색목인의 두터운 어깨에 기대어 싸워본 일이 있었고 적대한 적도 있었으나, 서역 또한 사람 사는 곳이라 말과 글과 생각이 인종마다 서로 달라 통용할 수 없다고 했다. 다만 우리가 한 대륙의 글자를 빌어쓰듯 서역 대륙에도 큰 나라의 말과 글을 좇는 경향이 있는데 아버지는 그들의 말과 글을 조금 배웠을 뿐이라고 하였다.





“본디 이름은 팔랑크스(Phlanx)다. 창과 방패로 무장한 거한들이 밀집하여 여덟 곳을 막아내고 사방을 쳐없애서 중심의 본진을 지킨다. 요해는 간결하되 지킴은 두터워야 한다. 복잡한 모든 진법이 이 방진에서부터 수천 개로 갈라진다. 나아가 쳐없앰이 아니요, 머물러 지킬 뿐이나 이 하나만으로도 능히 승산이 있다.”



아버지의 말대로 전황은 돌아갔다. 정 비장은 번을 짜 돌아가며 수색대를 내보내 왜적의 거취를 살폈고, 남은 이들은 힘을 합쳐 성벽을 보수하고 아버지의 명대로 밀집방형의 군세를 익혔다. 때마침 왜구의 본진과 마주친 열네 번째 별동 수색대가 정 비장의 휘하에 있음은 참으로 다행한 일이었다. 그는 등골 같은 산자락을 평지처럼 내달려 왜적의 본진을 성 앞 너른 땅(平野)까지 이끌고 왔다. 미리 정해둔대로 연기와 불을 피워 왜구가 쳐들어옴을 알리자, 아버지는 밀집방진을 성 바깥으로 내세울 준비를 했다. 연전에 왜구의 동태를 고한 적이 있던 늙은 고참 군관이 군명을 받아 정 비장과 안팎으로 호응하여 별동대를 성 안으로 들였다. 그들을 뒤따라온 왜적들의 살기가 사나웠다. 성이라는 거대한 바위에 달라붙으려 몰려드는 수천 마리의 따개비와 다르지 않았다. 저물어가는 노을녘에 반사되는 창칼 소리가 이해할 수 없는 왜말과 섞여 난삽했다.





그 때 막 성 안으로 들어와 말과 함께 숨을 돌리던 정 비장에게 아버지는 군권을 넘겼다.



“내가 나가거든 방비하게.”



“……총군사령! 어데를 가십니까!”



벼락같은 정 비장의 반문에 아버지는 뜻밖에도 긴장한 답을 내놓았다.



“일개 왜구들이 아닐세. 수도 수려니와, 달려오는 기세는 익숙치 않아 흐트러졌으되 사방에서 진세를 수습하려 도모하려는 움직임이 있네. 저들 중에 군략을 아는 무관들이 섞여 있네. 부딪히지 아니하고는 헤아릴 수 없으니 달리 방도가 없어.”



“그렇기로 총군사령께서 직접…….”





아버지는 더 말하지 않았다. 창을 세차게 휘돌려 주위 공기를 끊었고, 그 것으로 주위 군관들의 진언도 끊겼다. 정 비장은 더 이상 말을 늘이지 아니하였다. 그의 점고 아래, 날래고 빠른 병졸들이 창과 방패를 번쩍이며 아버지의 뒤를 뒤따랐다. 기가 펄펄 살아 움직이는 이, 주눅들어 창과 방패를 들기도 힘겨운 이, 얼굴을 굳힌 채 별달리 속내를 드러내지 않은 이들이 한데 모여 아버지 앞에서 훈련해온 방진을 형성했다. 아버지의 말 한 마디 한 마디가 사람의 움직임으로 선하게 표현되는 진법이란 그렇게 신기한 것이었다. 서로 다른 물방울이 모여 파도를 만들듯, 그들은 한데 모여 굳세고 단단한 방진을 형성했다.





아버지가 창을 비껴 든 채 걸어서 출진했다. 나는 성벽 아래서 그 모습을 굽어보았다. 지필묵을 펼쳐 아버지의 첫 전투를 세세하게 기록할 심산이었다.





아버지의 말처럼 따개비처럼 버글대던 왜적들은 어느 틈에 군세를 가지런하게 정돈한 터였다. 대부분이 멀리서 작은 초승달처럼 보이는 길다란 만도(蠻刀)를 휘두르는 천둥 벌거숭이들이었으나 두터운 갑주를 입은 이들이 더러 보였다. 그들이 왜적들 사이를 누비며 진세를 정돈하고 있었다. 성문이 열리자 적진 중 일부가 앞으로 돌출되었다. 고함이 서로 부딪혔고, 적진의 일부는 금시로 뭉개어 흩어졌다. 아마도 아버지가 이끄는대로 우리 군졸들이 방패를 앞으로 내밀어 공세를 막아냈고, 뒷줄이 창을 내찔러 상대를 격퇴했을 터였다. 상대가 따개비의 파도라면, 아버지의 밀집방진은 그 따개비들을 차근차근 뜯어먹는 커다란 거북이 같은 모양새였다. 아버지가 지휘하는 거북이는 날이 돋친 머리가 사방으로 뻗쳐 있었다. 방패로 막고 창으로 찌르면서 한발한발 이동할때마다 왜군의 진지가 조금씩이지만 확실히 무너지는 꼴이 내 눈 앞에서 보였다. 이 것이 아버지가 말하던 무(武)의 모습인가 보았다. 방진 하나로 수천 명의 적을 물결처럼 몰아대는 아버지의 모습이 눈 앞에 선연했다. 조금이라도 더 가까이 가고 싶다는 욕망이 스멀스멀 종이 사이로 새어나왔다. 그러나 붓 아래 따르는 문장은 욕망 같지 아니하였다.





아버지가 이끄는 거북이가 한바퀴 휘돌았다. 깊게 들어가 포위당하기 전에 전장을 이탈하려는 모양이라고 정 비장이 전황을 대신 읽어주었다. 아버지의 팔방구수는 서두르는 법이 없었다. 물러감이 나아감과 다르지 아니하였다. 진세의 앞이 반전하여 뒤가 되었고, 뒤가 반전하여 앞이 되었다. 거북이의 크기가 줄어들며 조금씩 조금씩 성 안으로 빨려들어왔다. 왜구가 한데 모여 무리하게 압박한다면 기백 명밖에 되지 않는 밀집방진을 무너뜨리지 못할 바는 아니었다. 그러나 정 비장이 때맞춰 신호할때마다 활잡이(弓手)들이 화살을 날려 왜구와 왜구 사이의 연대를 끊었다. 아무래도 왜구들을 이끄는 왜장들 사이의 신호가 긴밀치 못한 것 같았다. 적들은 압도적으로 많았지만, 바위와 나무, 물, 흙이 서로 끈끈하게 뭉쳐 긴밀하게 하나를 이루는 산 같지 아니하였다. 겉보기는 하나이되, 부딪히며 산산히 사방으로 퍼지는, 포말 같은 모습이었다. 그 광경은 또 하나의 바다였다.





그 때 갑자기 정 비장이 기성을 울렸다.



“저 놈은 무엇이냐?”



거북이의 크기가 많이 줄어들었을 때였다. 거북이의 숫자가 절반 이하로 줄었을때가 가장 위험할 때라고 아버지는 말하였다. 한 사람이 한 사람 이상의 몫을 해야만 하기 때문이었다. 그 때 왜구들이 사이로 갈라지며 한 명의 적장을 앞으로 내보냈다. 드물게도 말을 탔고 높이 쓴 투구가 달빛에 눈부셨다. 초승달보다 더 긴 칼을 사방으로 휘두르며 그는 정면으로 달려들었다. 언뜻 보면 제풀에 달려드는 하였으나 창이 닿는 거리 바깥에서 고삐를 채어 말발굽을 멈추는 솜씨가 예사롭지 아니하였다. “그 놈 참!” 정 비장이 감탄사를 내뱉었다. 확연치 않았으나 내 눈에 보이는 왜장은 무척 젊어보였다. 그는 말등을 곧추세워 포효하듯 앞다리를 들어올리고는 다시 사방으로 칼을 휘둘렀다.



“저 놈이 싸움을 거는 모양이다. 총군사령 말마따나 그저 왜구가 아니구나.”



왜적들은 더 이상 거북이를 압박하지 않았다. 대신 칼과 칼을 서로 부딪히고 두드리며 괴상한 고함을 질러대었다. 전쟁이 아니라 숫제 놀음이었다. 우두머리를 나오라 질러대는 괴이쩍은 청함이었다. 그에 응답하듯 하늘을 찌를듯한 창날 하나가 앞으로 나섰다. 누가 봐도 아버지였다. 나는 황당해서 붓을 멈추었다.



“무슨 생각이신 겁니까!”



“사내 간의 예의 아니겠느냐. 물러날 수 없다.”



“그렇기로…….”



정 비장은 말을 끊었다.



“옳게 생각하신 게다. 장수의 기량도 헤아려야 하거니와, 단독으로 맞싸움이 시작되면 거기에 눈길이 몰릴테니 남은 병졸들이 쉽게 물러날 수 있다.”





아버지가 어찌 물러날 수 있는지 묻기도 전에 왜구들의 함성이 들려왔다. 아버지와 젊은 적장이 서로 일합을 부딪혀 나누었다. 상대는 커다란 말을 탔고, 칼도 길었다. 긴 칼에 말의 체중과 속력을 고루 싣고 부술듯이 베어내렸다. 아버지는 허리 뒤로 창을 세워 몸 전체를 휘돌리면서 그 공격을 사방으로 분산시켰다. 휜 채로 굳어진 아버지의 한쪽 다리는 무시로 흔들리지 않는 축이었다. 아버지는 팽이처럼 휘돌며 적장의 칼을 서너 번 더 받아내었다. 적장의 공격은 아버지의 방어에 되튕겨 흩어졌다. 말 위에서 벼락처럼 쏟아붓는 칼질은 아버지를 향해 집중되는 날카로운 선이었다. 신묘한 솜씨로 상대의 칼을 받아내는 아버지의 모습에 전장의 모든 눈이 집중되어 있었다. 그래서 나도 정 비장도 성벽 위로 올라온 누이를 알아볼 수 없었다.



- 아버지셔?



갑작스레 누이가 어깨를 두드리는 바람에 나는 깜짝 놀랐다. 여전히 아버지의 싸움에 한쪽 눈을 던친 채로, 누이의 손가락을 내 목에 가져다 대었다.



“어떻게 된거야? 여긴 왜 올라왔어?”



- 소리, 아, 저 뜨거운 소리, 저 소리들이 나를 불렀어.



누이의 흐린 눈은 열망으로 어지러웠다. 누이는 내 손을 꼬옥 잡은 채 귀를 움찔거렸다. 아버지와 적장이 주고 받는 쇳소리가 사방으로 퍼졌다. 이제까지 왁자하게 어지럽던 쇳소리와 고함과는 맥락이 달랐다. 왜구들의 응원도, 우리 병졸들의 고함도 모두 잦아들었다. 아닌게 아니라 그 소리는, 전장에 속한 소리라기보다 악기의 울림 같았다. 하지만 그 소리가 대장간에 있던 누이까지 불러올릴 줄은 몰랐다.



- 소리 하나는 급하고, 소리 하나는 여유롭구나.



정 비장에게 말을 전하자 그는 어렵다는 듯 수염만 비틀었다.



“모르겠다. 보졸이 기마를 대하자면 창이 정석이긴 하나……. 내 보기엔 총군사령이 위태해보인다.



그 때 아버지가 몸을 한껏 낮추며 창으로 말다리를 후렸다. 필체로 치자면 일필휘지나 다름없었다. 붓을 거두듯 창자루를 말아잡는 끝으로 말다리가 고스란히 걸렸다. 적장의 몸이 무너지는 말등 위에서 위로 퉁겨올랐다. 올려찌르면 충분히 적장의 몸뚱이를 꿸 수 있었다. 그러나 아버지는 침착하게 그가 떨어지길 기다렸다가 비로소 창 끝으로 칼을 치우고 그의 투구를 벗겨내었다. 왜구들 사이에서 거친 욕설 같은 고함이 산처럼 잇따랐으나 무시로 덤비는 일은 없었다. 아버지는 한손으로 말고삐를 잡았고, 창끝으로 적장의 등을 밀었다. 승부에 승복한 그는 두 손을 번쩍 든 채 아버지와 함께 성문 안으로 들어왔다. 왜구들은 더운 물에 데쳐놓은 낙지처럼 축 늘어져서 진지를 세우러 사방으로 흩어졌다. 일개 해적들이 성을 빼앗고자 진지를 세운다는 말은 나조차도 들어본 적이 없었다. 저들이 오래 싸우기로 작정하였으니 그 뜻을 쉽사리 꺾을 수 없을 터였다. “싸움이 길어지겠구나.” 정 비장은 황급히 아버지를 맞이하러 아래로 내려갔다.












투구가 벗겨진 적장의 얼굴은 보기보다 훨씬 어렸다. 기껏해야 내 또래였다. 정 비장의 말에 따르면 성인이 된 왜인은 머리칼 앞쪽을 반들반들하게 밀어 알머리를 드러낸다고 했다. 잡혀온 소년 적장은 흙과 땀으로 범벅된 긴 머릿결을 풀어헤쳤다. 주눅은 들었으나 성정은 사나웠다. 알 수 없는 왜말로 사납게 대거리를 했으나 아버지를 바라보는 눈은 내심 두렵게 빛나고 있었다.

찬물로 목을 축인 아버지가 정 비장을 돌아보았다.



“정 비장, 왜말을 하던가?”



“읽고 쓰지는 못해도 듣고 말하기는 어렵지 않습니다.”



“전하게.” 아버지는 한숨을 돌려 엄정하게 물었다. “너희의 진세를 보니 왜구가 아니고, 너의 칼을 보니 섬에서 난 것이 아니다. 짠내나는 땅에서 이리 좋은 쇠가 나올리 없다. 대체 무엇이냐? 이 나라를 사이에 두고 한 대륙과 너희가 무슨 작당을 벌이는 것이냐?”

느닷없는 아버지의 물음에 정 비장의 얼굴이 새파랗게 질렸다. 말을 전해들은 소년 적장의 얼굴에 감탄이 서렸다. 그는 하얀 콧대를 높이 세우며 노래를 부르듯 거만하게 대답했다. 그 말을 듣는 정 비장의 얼굴은 점점 푸르게 질려가고 있었다. 그는 몇 번이고 되물었고, 적장은 고개만 짧게 끄덕일 뿐, 심지어 입술조차 열지 않았다. 포로로 잡혀왔으되 자부심이 넘쳤다. 상황을 알 수 없어도 괜시리 이가 갈렸다.





“총군사령.”



“말하시게.”



“기만일 것입니다. 섣불리 말을 옮겨도 될지 모를 일이라…….”



“말하시게.”



정 비장은 한숨을 내쉬며 말을 이었다.





“호쿠사이 열도는 오래 전부터 여러 섬의 주인들이 서로 싸움을 벌였는데, 그 모습과 역사가 한 대륙을 통일하려 했던 뭇 제후의 싸움과 다르지 않다고 합니다. 한 대륙의 제후들은 참람된 뜻을 품고 제각기 이 싸움의 편을 들어주었는데, 칼이며 무기들은 그때 얻은 듯 합니다. 이제 호쿠사이는 일통되었는데 제 나라 백성들이 한낱 해적 떼가 되어 바다 건너 나라를 노략질하게 놔둘 것이 아니라 반도와 대륙을 차지하여 나눠주고자 왜구를 길잡이 삼아 싸우러 왔노라 전하고 있습니다.”





그 순간 아버지조차도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적장의 말은 당찼고 힘이 있었다. 그 말이 불러온 장대한 야망과 미래에 모두들 할 말을 잃은 듯했다. 나도 모르게 손에 쥐었던 종이를 구겼다. 나의 말과 글은, 소년 적장이 품은 원대한 뜻에 비하면 졸렬하고 작아보였다. 저들은 정말로 저 긴 칼을 빼어들고 싸움의 싸움을 헤치면서 호쿠사이를 통일했고, 이제 반도와 대륙마저 저 가랑이 사이에 타고 앉으려는 모양이었다. 그가 내놓은 말 몇 마디가 모든 사람들의 마음을 타고 앉아 어지럽히고 있었다.





한참만에야 아버지가 정 비장을 통해 입을 열었다.



“될 일이 아니다. 너희들이 싸움을 잘한다 자부하나 반도는 너희들 생각보다 넓고 사는 숫자도 많다. 대륙은 이 반도 같은 나라가 수도 없이 많을 정도로 넓고 멀다. 그럼에도 칼을 넣고 돌아가지 않겠느냐.”



“적을 맞이하여 싸울 때, 삼백육십개의 뼈를 다 부러뜨리고, 살을 발라내고, 내장을 모두 쪼개느냐. 머리만 치면 된다. 쇼군께서는 팔다리를 끊어내기보다 머리만 치실 계획이다. 그분은 지혜로운 신장(神將)이시다.”



“그렇더냐?”



아버지가 차갑게 웃으며 돌연 앞으로 나섰다. 소년 적장의 팔을 들어올리는가 싶더니, 팔을 두어번 휘두르자 순식간에 그가 위로 붕 떴다 아래로 내팽개쳐졌다. 격렬한 신음이 터져나왔는데, 그의 어깨가 기묘하게 위로 솟아 있었다. 침과 눈물을 흘리며 사방으로 구르는 그의 한쪽 팔이 깃발처럼 팔랑거렸다. 바람 부는 산골 등성이 위에 붙잡아매놓은 천자락 같았다. 정 비장도, 고참 군관도, 그 외의 병졸도, 나와 누이도 아버지의 이런 모습을 본 적이 없어 아연했다.





“네 팔을 잡아빼었다. 아프지 않더냐? 머리만 쳐내면 팔다리는 무사할 성 싶더냐? 네 칼로 그렇게 많은 이를 잡아죽이는 것이 그토록 자랑스러워 어린 나이에 말달려 바깥으로 나왔더냐?”



정 비장이 말을 옮겨주기도 전에 아버지는 다시 그의 팔을 잡았다. 소년 적장은 무서워 덜덜 떨었으나, 아버지에게 팔을 맡길 수밖에 없었다. 아버지는 그의 어깨를 잡고 팔을 길게 훑어내려 다시 관절을 끼워주었다. 침으로 범벅이 된 고통이 신음을 길게 끌었다. 등성이처럼 불룩 솟은 어깨가 도로 내려앉아 부드럽고 평안하게 돌아갔다. 그는 온 몸을 푸들푸들 떨면서 자신의 팔과, 아버지를 번갈아 바라보았다.





“돌아가라. 다시 칼을 잡는 모습을 보면 그 때엔 베겠다.”





정 비장이 말을 전하자 그는 굳어진 얼굴로 아버지를 밀어내고 똑바로 섰다. 그가 지나갈 수 있도록 모두가 길을 틔워주었다. 그 때 소년 적장은 다시 몸을 돌렸다. 그리고 정 비장에게 턱짓을 하며 아버지에게 말을 전해달라는 몸짓을 해보였다.





“당신, 호쿠사이에 있었나? 유술(柔術)을 어찌 아는가.”



“호쿠사이에 있은 적이 없다. 지금 배운 무술은 서역인의 것이다. 주짓수라는 이름이다.”



소년 적장이 입술을 비틀어 올리며 끔찍하게 웃었다. 가시가 돋친 듯 날이 선 웃음이었다.



“그 무술은 원래 우리 호쿠사이의 것으로 상대의 관절을 꺾고 비틀어 뜻을 가로막는 기묘하고 합리적인 재주다. 후에 우리처럼 바다 곁에 사는 색목인 무리가 와서 배워갔다. 그들은 그들의 긴 팔다리에 맞게 그 무술을 변형시켜 사방에 퍼뜨렸다. 당신은 훌륭한 쇼군이다. 하지만 세상은 당신이 헤아리는 것보다 넓다. 호쿠사이는 작지만, 호쿠사이는 더 많은 나라를 알고 있다. 더 넓은 세상을 끌어온 우리가 이긴다. 지금이라도 항복하면 내가 진언하여 너희들을 중용하겠다.”





정 비장은 분노하여 발을 쾅 굴렀다. 그러나 아버지는 피로한 기색으로 손을 내저으며 그를 돌려보내도록 했다. 어느 틈에 음울한 달이 떴다. 정 비장이 다시 야습을 방비하며 군기를 엄정히 잡을 때 아버지는 달빛에 구겨진 내 종이를 펼쳐 글을 살폈다.





“더 가까이서 써라. 글이 너무 멀고 얕다. 어지러워 힘이 없다.”





다른 말은 없었다. 아버지는 소년 적장이 말해준 세상의 크기를 적잖이 골몰하는 것처럼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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