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밀번호를 잊어버리셨나요?

중편 신시대(新時代) 담(談) 2

2012.03.21 06:1403.21

2.







누이는 나이 열다섯에 이름과 재주를 한꺼번에 받았지만, 나는 한 해를 더 기다려야 할 모양이었다. 배울 것은 많았고, 시간은 재채기보다 빨랐다.





아버지에게도 분명 나 같은 시절이 있었으리란 생각이 유일한 버팀목이었다. 그러나 막연하게 나도 그렇게 되리라 믿기에는, 아버지가 할 줄 아는 것이 너무 많았다. 아마도 아버지의 생각은 꼭 닭이나 쥐 같은 모양이었다. 무엇이든 눈에 들어오면, 머릿속에서 움튼 생각이 자꾸 새끼를 치며, 순식간에 떼를 지었다. 눈을 잠깐 감았다 뜨신 것만으로, 생각들은 짐승떼에서 가축이 되어 엄중하게 다스려졌고, 아버지의 몸은 그 생각을 바깥으로 가지런히 드러내는데 능숙했다. 이를테면 숲과 떠돌내, 그리고 나그네가람 중턱의 목암 제재소, 장터처럼 멀기도 하거니와 공통점도 없는 것들을 연결시켜 생필품을 구할 수 있는 방도를 순식간에 생각해신 일만 보아도 알 수 있는 일이었다. 나로서는 도통 흉내조차 못 낼 재주였다.



“아버진, 도대체 언제 그렇게 이 많은 걸 다 배우셨어요?”



“때 되면 다 한다.”





아버지의 낙관적인 대답도 그리 큰 위안이 되진 못했다. 어머니들도 그러했지만, 아버지는 유독 스스로의 과거사를 입에 올리지 않았다. 단지 아버지가 몸소 보여주시는 온갖 노동의 앞보임(先例)와 품새로, 그 행적을 짐작만 할 수 있을 따름이었다.



“조급하다.”





내가 무슨 일을 하건 아버지에게 가장 많이 듣는 말이었다. 농사를 지을 때에도, 덫을 놓을 때도, 열매를 딸 때도, 토끼 굴을 찾을 때도, 나그네가람의 고기들을 낚아 올릴 때도, 그 고기의 배를 따서 물에 씻고, 양념을 푼 물에 조심스레 넣어 끓일 때도, 밥을 안치고 찬거리를 차릴 때에도 아버지는 늘 무렴하게 반복하여 지겹기까지 했다.





붉게 달아오른 민물매운탕을 저으며 아버지는 가락을 넣었다.



“마음이 급하니, 삽과 호미가 손끝에서 허투루 돌고, 덫에 숨결과 냄새를 남기며, 토끼가 기척을 알아채어 숨고, 흔들리는 낚시바늘에 고기가 돌아가고, 투망을 던져도 그 사이로 샌다. 하루에 삼시세끼 먹는 밥을 정한 마음으로 짓지 않으면 어찌 몸을 보하겠느냐. 하여, 심(心)은 언제나 허일리정(虛壹而靜)하다 했으니, 항상 차근차근 마음을 먹거라.”



볼멘 목소리가 먼저 입술을 비집고 나왔다. “저도 이름을 빨리 받고 싶어요.”



“음, 밥이 고슬고슬하게 잘 됐구나. 네 어미들이 구천에서 맘 놓겠다.”





이름 얘기가 나오면 아버지는 늘 말을 돌렸다. 예전 같았으면 가장 먼저 밥상을 차렸을 누이가, 나그네가람 물결을 벗 삼아 해금(奚琴)을 켜고 있었다. 한 대륙의 호궁(胡弓)과 비슷하다 하여 과연 어느 나라의 악기가 먼저인지 종종 얘깃거리가 된다고도 하였다. 북은 어렵지 않게 다루었으나, 해금은 그렇지 않았는지, 누이는 눈만 뜨면 해금의 활을 잡았고, 잘 때도 남자처럼 품고 잤다.



“모든 악기는 여자와 같아 때에 맞춰 불어주고 두드려줘야 늙지 않는다. 특히 해금은 그 중에서도 심히 까다롭지.”



밥그릇에 밥을 푸면서 아버지가 말을 이었다.





“조금만 활이 어긋나도 비명이 귀를 찢고, 조금만 현이 풀려도 맥이 빠져 아무리 달래도 쉽게 마음을 풀지 않지. 오로지 그 속을 헤아려 밀고 당김에 한 치의 오차도 없어야 하니, 아마도 넓은 땅을 질타하는 호방한 대륙의 감성으로 만들고 다루기는 어려웠을 게다. 해금은 물도 땅도 아니며 또한 물과 땅이기도 한 이 땅에 매여 사는 우리의 악기다.”



또 볼멘 소리가 툭 튀어나왔다. “하다못해 악기도 이름이 있는데요.”



매운탕을 그릇에 덜던 아버지가 물끄러미 나를 바라보았다.





“명(名)이란, 누가 그저 지어주기보다, 스스로 뜻을 두고 그로 나아가기 위하여 짓는 것이다. 사실 스스로 자기 이름을 부르는 일은 많지 않으니, 불러주는 이들이 납득하고 아낄 수 있어야 하지 않겠느냐. 아직 네 몸에 배인 업(業)을 모르는데, 어찌 명부터 받을 생각에 그토록 몸과 마음을 태우느냐. 거기 소면 다오.”





아버지의 말에 집중하느라 깜빡 때를 놓쳤고, 그래서 아버지는 다소 덜 익은 소면을 건져올리며 아쉬운 표정을 지었다. “차라리 불어서 국물이 배면 더 나았겠구나.”







밥그릇에서는 겨우내 잘 익은 봄 향기가 났고, 솥 안에서는 여름이 펄펄 끓었다. 부드럽게 녹아 씹히는 작은 생선살에 비해 소면은 심이 덜 녹아 목 안에서 토막으로 끊어졌다. 한가로운 여름에 여유는 넘쳐 흘렀으나, 나도 누이도 표정이 좋지 않았다. 그런 우리를 곁눈질하며 아버지는 여전히 웃음을 지우지 않았다. 손을 흔들어 누이의 시선을 끌고는, 해금 켜는 시늉을 하며 미소를 지었다. 해금, 켜볼만 하더냐.





누이는 나를 보며 또박또박 말했다.



- 너무 어려워요. 이렇게 속내를 헤아리기 어려운 악기는 처음이에요.



“음(音)은 알되, 박(拍)을 몰라 그렇다.”



- 박? 박이 무엇인가요?



“사람이 길을 걸을 때도 제 걸음의 간격과 흥을 가늠할 줄 알아야 쉬 지치지 않는다. 소리의 고저를 음(音)이라 하면, 박(拍)은 소리의 장단에 관여하여 늘이고 줄이고 휘어 꺾어 듣는 맛이 나게 하니, 이를 합쳐 음악이라 한다. 악보가 있다면 함께 보며 짚어줄 터인데, 없으니 아쉽구나.”





더 이상 참을 수가 없어 매운탕을 조금 더 덜며 넌지시 여쭈었다. “아버지, 아버진 대체 예전에 무얼 하셨었나요?”





“이름은 불러야 맛이고, 과거는 잊어야 맛이다. 우리 셋이 모여 사는데 불편함이 있더냐. 무엇이 그리도 궁금해서.” 아버지는 하늘로 웃음을 띄웠다. “살아 있는 것의 도리란, 배를 채운 연후 주위를 둘러 정리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때로는 나누고 먼저 줄 줄 아니, 그를 일러 아름답다고 한다.”



“까막까치도 다 크면, 늙은 어미에게 벌레를 물어 나르던걸요.”





내가 여전히 마음이 풀리지 않아 불퉁거리자 아버지는 웃으며 내 머리를 쓰다듬었다. 머리칼 사이로 느껴지는 아버지의 손바닥은 딱딱하고 거칠었다. “산이 네 스승이구나. 반포지효(反哺之孝)를 다 가르치고. 옛말에 사람은 위로 먹고 아래로 낳으니 순생(純生)이라 하고, 화목(花木)은 아래로 먹고 위로 낳으려 하니 역생(逆生)이라 하며, 날고 기는 모든 것을 아울러 횡생(橫生)이라 한다 했다. 비록 사는 방식은 다르나 모두 삶의 한 자락을 차지하고 있으니, 어찌 하늘의 뜻에 어긋나게 살겠느냐. 까막까치가 하는 일이라 하여 사람이 지키기에 가볍다는 뜻은 아니다.”





나는 한숨을 내쉬며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국물이 거의 다 졸아든 솥 주위로 초여름의 날벌레가 꼬이고 있었다. 누이와 함께 먹던 자리를 치우는 동안, 아버지는 차게 식힌 오미자차로 입가심을 했다.





돌아갈 차비를 하던 도중, 아버지가 돌연 건너가듯 말을 던졌다.



“고민이다.”



“뭐가요?”



평소 고민이라곤 하나도 없는 듯이 평온하던 아버지가 그리 말하는 게 신기했다.



“너에게 말과 글을 가르쳐야 할지 알 수가 없구나.”





허리께에 해금과 활을 비끄러맨 누이가 앞서서 나는 듯이 달려갔다. 짐을 나눠든 아버지와 나는 서로를 마주보며 한참 말이 없다가 비로소 내가 투덜대듯 말을 밀어냈다.





“필요없다고 하시지 않았던가요.”



“나도 그런 줄 알았다. 헌데 날이 갈수록 네 말이 창검처럼 날카로워지는구나. 궁금한 것을 마음 안으로 삭히지 않고 오래 묵혔다가도 잊지 않고 입 밖으로 밀어내니 그 묻어둠이 놀랍고, 답을 쉽게 주지 않으면 줄 때까지 죄어치니 그 끈기가 놀랍다. 흔치 않은 재능이기에 네가 뭇 말과 글을 배운다면 그로써 세상을 그리고, 후대에 선대를 알리는데 일조할 수 있을까 하여 고민하는 것이다.”





아버지는 무렴한 듯 웃었지만, 나는 결국 말뿐일까 싶어 마음이 바위처럼 가라앉았다. 겉은 흐르지만, 속은 멈춘 시냇물처럼, 무거운 마음에 비해 말은 찌르듯 쏟아졌다.





“딱히 누가 가르치시지 않았지만, 이미 말은 할 줄 알아요. 우리 셋만 이리 살아 이름도 필요없는데, 글이 굳이 필요할까요?”





뜻밖에도 아버지가 엄정한 표정을 지었다. “네 헤아림이 얕구나. 글은 말을 보전하기 위해 생겼으나, 글을 통해 말을 다스리기도 한다. 하여 둘은 서로 상생하니. 상극(相剋)의 음양(陰陽)이 서로 엉기어 호응함도 이와 같다. 그와 같은 법칙을 율려(律呂)라 하여 음악의 근본이 된다.”





아버지는 약간 은근한 말투로 말을 이었다. “네 눈과 귀가 이미 밝다. 너는 비록 움직이기 힘드나 천하의 가장 빠른 이가 수고한들 너보다 이 세상을 더 넓고 깊게 접할 수 있겠느냐. 그 것을 말과 글로 표현하여 사방에 널리 퍼뜨리는 것도 좋거니와 귀가 온전치 않아 박(拍)을 모르는 네 누이에게 율려의 기본을 가르쳐 음악을 완성케도 할 수 있겠구나. 너에게는 아주 신묘한 재주가 있으니 말이다.”





다른 말보다도 신묘한 재주, 그 한 마디에 내 마음이 크게 너울쳤다. 과연 아버지도 누이도 가지지 못한 나만의 재주였다. 그로써 아름다운 누이를 도울 수 있다면 마냥 좋았다. 그래서 나는 아버지의 뜻에 따라 지필묵(紙筆墨)을 처음으로 잡았다. 그러나 지필묵을 사용하기에 앞서 근 다섯 열흘(五旬)을 떠돌내 얕은 곳에 서 있어야만 했다.





“쓰면서 듣거라.”





냇가 옆 바위에 누이와 함께 올라앉아 술병을 기울이던 아버지가 가락을 넣어 일렀다.





“태고에 말(言)이 있었다. 사람의 입에서 나고 자라 달림이 말(馬)에 비견할 바 못되어 사방으로 퍼지니, 수십 갈래로 나뉘어 땅마다 부르고 들음이 달라졌다. 이후 말을 보전하려 글을 만들려 하니, 그 처음은 그림이라. 모양(形)과 소리(聲)와 뜻(意)에 따라 그림의 선을 늘이고 줄이고, 꺾고 펴며, 없애고 늘리니, 나중에 이를 일러 획(劃)과 순(順)이라 하여 이에 벗어나는 모양은 글자 대접을 받지 아니하게 되었다. 하여 네가 지금 하는 것은, 붓을 잡기에 앞서 올바른 획과 순을 몸에 익히기 위한 연습이다.”





땀방울이 수면 위로 톰방 떨어졌으나 흔적조차 남지 않았다. 이제껏 작다 여겼던 떠돌내는 가장 큰 죽간이고, 종이였다. 손가락으로 글자를 쓰고 또 써도, 흐름은 순식간에 내 곁을 떠나 흔적을 지워버렸다. 시간은 그렇게 잡을 수도 머물게도 할 수가 없는 것이었다.





“기, 기왕이면… 앉아서, 종이나 죽간 위에 쓰면, 안, 안 될까요?”





물살이 달라붙는 하체가 무거워 숨결이 턱 아래에서 갈갈이 흩어졌다. 아버지는 술병을 기울이며 웃었다. “그럼 종이 만드는 법부터 배워야겠구나. 기상합종회(技商合從會)에 들어가려느냐?”







꼬박 오십 번의 해와 달을 마주한 뒤에야 아버지는 술병을 든 채 내 곁으로 뛰어내렸다. 의외로 물은 많이 튀지 않았고, 아버지의 허리는 꼿꼿했다. 위에서 아래로,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널네모꼴(長方形)을 이루는 선과 점이 흔들리지 않았을 때, 비로소 아버지는 물결을 횡(橫)으로 가르며 앞서 나왔다.





“나오너라.”





누구보다 밝은 내 눈에도 안 보이는 글자를 어찌 보셨는가 싶어 되묻지 않을 수 없었다. “글자가 잘 나오나요?” “이제 겨우 움직임을 갖췄을 뿐이다.”





이제 글을 쓰려나 싶었지만, 갈 길은 멀었다. 더위가 서서히 바닥으로 내려앉을 무렵, 여름에서 가을로 넘어가는 밤에는 소슬한 산바람이 피부에 스며들었다. 열어놓은 문으로 달빛과 누이의 소리가 서로 엉겨 방 안으로 쏟아졌고, 아버지는 돌돌 말린 대쪽판(竹簡)을 건네주었다.





“살펴보아라.”





군데군데 금이 가 푸른 것은 쪼개어 엮은 대나무인데, 그 위로 파놓은 것들은 아마도 글자인지라 읽을 수가 없었다. 다만, 글씨가 하나같이 반듯하여 작은 네모꼴 안에 얌전히 들어앉아 쉬고 있었다.





“뭐가 보이느냐.”



“다른 건 모르겠지만……. 글자가 참 평안해보입니다.”



아버지 앞인데도 괜시리 온 몸이 얼어 말이 경직되게 나왔다. 그 것이 스승인가 보았다.





“아는 만큼 보이는 것이니, 네가 과연 하나를 깨우쳐 하나를 보았구나. 대나무의 결을 따라 글자를 새겨야 쉬우니, 글자는 자연스럽게 네모꼴을 갖추고, 위에서 아래로 쓰는 차례를 갖추게 되었다. 그 것이 바로 한 대륙의 글자요, 그 글자의 요결(要結) 중 하나를 리(理)라 하여 훗날 글자를 쓰는 원리일 뿐 아니라 사람 삶의 중심으로 우뚝 서게 된다. 그러니 너는 일단 한 대륙의 글자와 말을 배움이 좋겠다.”





“어째서…… 입니까?”





아버지는 잠시 생각에 잠긴 눈으로 달빛이 푸르스름하게 떠도는 마당의 어둠을 바라보았다.





“내 젊었을 적, 화국(火國)이라는 강성한 나라가 있어 한 대륙의 크고 작은 나라를 무릎 꿇려 마침내 하나의 나라를 이루었다. 그 동안 글자를 읽고 쓰는 법뿐 아니라 중요하다 여김도 나라마다 서로 달라, 다스림이 어려울까 저어하여 열일곱개나 되는 글자 쓰는 법뿐 아니라 걷는 법과 말타는 법, 바퀴 굴리는 간격조차 하나로 통일하니 그로 연유하여 마침내 사람의 생각을 하나로 모았다. 이 뜻을 헤아릴 수 있겠느냐?” 나는 고개를 가로저었으나 아버지도 대답을 기대한 눈치는 아니었다. 마치 술을 마시듯 목젖을 꿀렁 울리며 설명을 이었다.





“힘이다. 말(言)도 살아 있으니 말(馬)처럼 달린다 한들 자연의 이치에서 벗어날 수 없는 것이다. 약한 것은 없어지고, 강한 것은 살아남아 널리 퍼진다. 비록 한(漢) 대륙의 주인이 또 뉘로 바뀔지 알 수 없으나, 힘 있는 자의 말은 끊임없이 살아남아 글을 통해 제 좋을 대로 이야기를 남긴다. 그를 일러 역사(歷史)라 하니. 너에게 가장 널리 읽히는 말과 글을 가르치되 끊기고 잊혀질 위기의 말과 글 또한 새기게 하여 역사를 읽는 후대가 오로지 이긴 자의 말과 글만을 보지 않도록 하기 위함이다.”



“…말이 무겁습니다.”



“살아 있는 모든 것은 제 무게가 있다. 자기 것이 아닌 것을 들었을 때 비로소 무거움을 느낀다. 네 것으로 온전히 삼는다면 무겁지 않을 것이다.”





아버지로부터 글자를 배우는 시간도 낮과 밤이 따로 없었다. 누이의 소리가 들리는 때도 낮과 밤이 따로 없었다. 대금 소리가 위와 아래로 펄럭이며 균형을 잡아나갈 때 중(中)을 배웠고, 천둥을 품은 큰북이 장엄하게 울릴 때 인(仁)을 배웠다. 박자를 아직 깨우치지 못한 장구 소리가 일정하게 달려나갈 때 일(壹)을 알았고, 여전히 엉켜 풀리지 않은 해금의 소리가 답답하여 지(知)가 필요함을 알았다. 같은 울림이라도 징의 소리는 경망스러워 날카로우니 그를 일러 쟁(爭)이라 했고, 척(尺)의 소리는 얇고 가늘어 울리지 않은 듯 울리니, 그를 일러 단(短)이요, 착(着)이며, 정(靜)이었다. 울림과 소리를 연결하는 길을 찾다 지친 누이가 긴 머리칼을 살포시 늘어뜨리며 단잠에 빠졌을 때, 안아들어 자리에 뉘이는 내가 안(安)이고, 그를 살피는 아버지가 애(愛)이며, 몸을 간지럽히는 햇살에 일어난 누이의 눈빛은 경(敬)이자 신(信)이었다. 우리의 눈빛이 서로 얽혀 갈마들 때마다 과연 필무사언(必無使言)의 때가 있음을 알고 경탄했으나, 글자를 알면 알수록, 세상을 보는 눈이 깊고 넓어져 즐거우니 그를 일러 각(覺)이라 하였다.







그러나 갈 길은 여전히 멀었다.





“일찍이 배움에 뜻을 둔 이들은 사물에 내재된 이치를 끊임없이 파고들어 자신의 앎을 지극히 하니 이를 일러 격물치지(格物致知)라 한다. 이 격물치지로 향하는 길은 곧 궁구(窮究)로 밝히니, 이는 곧 깊이 생각함을 일컫는다. 생각이란 때때로 자생(自生)할 수 있으나 쉼없이 살아 있어 자극할수록 생기를 얻으니 이제 글자를 넘어 경(經)과 전(傳)을 읽을 때가 되었구나.”



아버지는 또 하나의 꾸러미를 풀었다.





“젊었을 적 학국(學國)의 지인들로부터 받은 여러 학파의 비전서(秘傳書)들이다. 제자백가(諸子百家)의 사상은 한때 학국을 넘어 온 대륙에 가득 퍼졌으나 그로 하여금 다스림이 어려울까 두려워한 군국(軍國)의 왕이 서책과 죽간을 불태우고 그를 입에 담는 이들을 땅에 묻으니 분서갱유(焚書坑儒)는 인간이 불러일으킨 가장 큰 재앙이었다. 말과 글을 배운다는 일이 때로는 이토록 참람될 수 있으니 다시 한 번 생각해보아라.”





나는 빙긋 웃었다. 어느새 글을 배우며 내 미소가 아버지를 닮아가고 있었다.





“짓궂으십니다. 내친 걸음이 아닙니까.”



“너의 말에 예(禮)가 있고, 뜻에는 지(知)와 욕(慾)이 있으니 내 가르침이 아주 비틀리지 않은 모양이다. 허나 경전은 어렵다. 만약 뜻을 이해하기 어렵거든 다시 주(注)와 소(疎)를 읽거라. 본디 현인(賢人)의 뜻을 헤아리는데는 경(經)으로 부족함이 없으나 후대가 어리석을까 저어하여 그 뜻을 쉽게 풀이한 전(傳)이 생겼고, 다시 그 뜻에 물을 대어 살리고 빗질하듯 가지런히 한 주(注)와 소(疎)가 더 후대에 나왔다.” 한 호흡을 쉰 아버지가 별빛처럼 나를 바라보았다. “선대의 가르침과 붙어볼 자신이 있느냐.” “온고지신(溫故知新)이요, 이고비금(以古非今)입니다.” “심(心)이 호방하다. 문무(文武)를 겸하여 빈(斌)이 있음을 알겠구나.” 아버지는 맑은 웃음을 터뜨렸다.










글을 읽는 동안 공기는 칼이 되어 등골을 후볐다. 어느 틈에 더위는 가시고, 해는 높이 뜨고 일찍 져 게으름을 부렸다. 화사하던 단풍이 썩은 살점처럼 떨어지고, 눈에 덮인 나무는 백골처럼 외롭게 섰다. 내가 글을 읽는 사이, 아버지는 몇 번 얼음골을 거닐더니 가죽 몇 장을 구해와 옷을 만들었다. 옷소매(衣)로 입(口)을 가리는 모습을 본따 슬픔(哀)이 나왔다고 하였다. 가죽들을 꿰어 옷을 만드는 아버지의 입술이 때때로 실을 뜯느라 소매 끝 언저리쯤에 가 있었으나 그다지 슬퍼보이지 않았다. 글 읽는 아들과 악기 다루는 딸 덕에 할 일이 세 갑절로 늘었을 텐데도 여전히 서두르는 일 없고 허둥대는 일도 없었다. 오히려 세 갑절로 즐거워보이는 모습을 보이기에 낙(樂) 자의 음훈(音訓)이 세 갈래인가 잠시 생각하였다.







툭툭한 가죽옷을 입은 누이는 여전히 밖에서 악기 다루는 일에 골몰하였다. 등을 녹이는 햇살도, 귀를 베는 바람도, 머리를 적셔 무겁게 하는 비와 몸을 어지럽히는 바람도 누이에게는 전혀 소용이 없는 것 같았다. 옛 글에 이르기를 죽림칠현(竹林七賢) 중 한 이는 능히 금(琴)을 타서 천지의 조화를 부린다 했다. 누이의 귀가 조금만 성했더라면 하는 생각이 자꾸 마음을 어지럽혔다.





잠시 죽간을 밀어두고 누이를 향했다. 악기들은 누이의 손끝에서 곱고 부드럽게 노닐어 편안해보였다. 귀로는 듣지 못했으나 내가 오는 기척을 느꼈는지 올려다보며 상긋이 웃었다. 누이의 미소에 설향(雪香)이 가득했다.



- 너도 한 번 볼래?



무엇인지 모르겠으나 고개를 끄덕이며 맞은편에 앉았다. 엉덩이와 뒷허벅이 시리게 젖었다. 앞허벅 사이에 양손을 찔러넣고 어깨를 움츠린 모습이 우스웠는지 누이가 바람 새는 소리로 짧게 웃었다. 이어 누이는 입에 약(箹)을 대었고, 양손이 닿는 범위에 징과 척과 큰북, 작은북, 장구 등의 타악기를 가까이 끌어다놓았다.



설마 그걸 다 연주하려구? 한번에?



내가 놀란 눈빛으로 손을 휘휘 저으며 악기들을 가리키자 누이는 빙긋 웃으며 약에 숨결을 넣었다. 대금에 비해 작고 가느다란 약의 소리는 큰 머리에 짧은 꼬리를 지닌 뱀 같았다. 약의 소리가 토막토막 끊어질 때마다 누이는 손을 빠르게 휘둘러 장구를 두드렸고, 북을 쳤고, 징을 때렸다. 서로 다른 소리가 길고 짧은 생을 살다 죽고, 다시 되물리며 살아나기를 반복했다. 질서가 있고 조화롭다 말할 수는 없었으나 신선했다. 타악기와 취악기(吹樂器)를 함께 다룰 생각을 어찌 하였을까 싶었다.



- 아이 참, 아직은 잘 안되는구나.



누이는 어색하게 웃으며 악기들을 다시 치워두고 종종걸음으로 주방을 향했다. 어느새 해가 높아 점심때였다. 그러고보니 누이가 밥상을 차리는 일도 오랜만이었다. 어미뫼를 달리는 일도 드물었다.



“네 누이가 악기를 겸애(兼愛)하려나 보다.”



누이가 없는 새, 아버지가 문득 묵류(墨類)의 적(翟) 태사(太師) 이야기를 꺼내었다. 사람의 이름을 받아 살아가는 모든 이를 차별하지 않고 사랑하며, 약한 이를 핍박하는 이를 위해 강자(强者)에 맞섰다는 현인(賢人)과 누이를 언뜻 연결할 수가 없었다.



“기껏해야 악기 여럿을 한번에 치려 했을 뿐입니다.”



“미망(迷妄)하다 여겨 생각조차 않으려 하는 이들이 많다. 공맹문(孔孟門)을 열었던 유(儒) 박사(博士)는 합주(合奏)를 들으며 악기조차 조화로운데, 인간은 그리 못함을 개탄하였다. 네 누이가 아악(雅樂)을 통하여 그 뜻을 이을지 어찌 알겠느냐.”



“이제 보니 우리에게 늘 기대가 크셨습니다.”



“아비된 도리 아니겠느냐.” 아버지의 웃는 얼굴이 부(父) 자(字)를 닮아 있었다. 과연 아비란 웃음조차 그런 것인가 보았다.





겨울이 깊고 밤은 길었다. 서책(書冊)으로 지새운 밤이 하얗게 질려 붉은 열이 올라도 누이는 여전히 악기를 쥐었고, 아버지는 술잔을 기울였다. 취기에 젖은 눈이 항상 무엇을 보고 있는지 알 도리는 없었다. 나는 글로 밤새워 길을 만들었다. 빨아들인 글은 온 몸을 돌다가 마음에 뿌리내려 싹을 틔우고 나무가 되고자 했다.







봄은 싹부터 기척이 온다. 내 마음의 싹이 자란다 느낄 때 즈음, 하얀 설경이 조금씩 무너져내렸다. 봄이 오는 발걸음이 무거워 눈밭은 발자국조차 남기지 못하고 눈물을 흘렸다. 얼었던 흙이 빨갛게 드러나고, 뼈만 남은 나무들에 살이 오르고, 짐승들은 다시 털을 갈기 시작했다. 문(文)으로 세상을 깨닫는 내 눈도 변하고 있었다.
댓글 0
번호 분류 제목 글쓴이 날짜 추천 수
공지 2024년 독자우수단편 심사위원 공고 mirror 2024.02.26 1
공지 단편 ★(필독) 독자단편우수작 심사방식 변경 공지★5 mirror 2015.12.18 1
공지 독자 우수 단편 선정 규정 (3기 심사단 선정)4 mirror 2009.07.01 3
477 장편 상상이론 - 시간의 비밀(1) 테트라찌니 2013.02.04 0
476 장편 상상이론 - 프롤로그 테트라찌니 2013.02.03 0
475 중편 복수와 장미 -프롤로그 규영 2013.01.04 0
474 중편 신시대(新時代) 담(談) 10(完) 이니 군 2012.03.21 0
473 중편 신시대(新時代) 담(談) 9 이니 군 2012.03.21 0
472 중편 신시대(新時代) 담(談) 8 이니 군 2012.03.21 0
471 중편 신시대(新時代) 담(談) 7 이니 군 2012.03.21 0
470 중편 신시대(新時代) 담(談) 6 이니 군 2012.03.21 0
469 중편 신시대(新時代) 담(談) 5 이니 군 2012.03.21 0
468 중편 신시대(新時代) 담(談) 4 이니 군 2012.03.21 0
467 중편 신시대(新時代) 담(談) 3 이니 군 2012.03.21 0
중편 신시대(新時代) 담(談) 2 이니 군 2012.03.21 0
465 중편 신시대(新時代) 담(談) 0,1 이니 군 2012.03.21 0
464 장편 토끼야 어디로 가느냐 손님 2011.12.24 0
463 중편 하마드리아스 -하- 권담 2011.11.21 0
462 중편 하마드리아스 -중- 권담 2011.11.20 0
461 중편 하마드리아스 -상-1 권담 2011.11.20 0
460 장편 돈과 지니(Genie)와 악마의 전쟁 - 1화 키프트 2011.08.23 0
459 장편 돈과 지니(Genie)와 악마의 전쟁 - 프롤로그 키프트 2011.08.22 0
458 장편 돈과 지니(Genie)와 악마의 전쟁 - 예고편 키프트 2011.08.21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