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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편 신시대(新時代) 담(談) 4

2012.03.21 06:1703.21

4.







파도는 바다 위에 쌓아올린 산이었다.





처음 본 바다는 노장파(老壯派) 비전서의 이야기 한 자락을 떠올리게 했다. 썩은 고기를 뜯는 새매는 봉(鳳)이 죽은 쥐를 빼앗을까 우짖고, 우물만이 제 세상인 줄 알고 편히 사는 개구리는 바다로 향하는 붕(鵬)을 비웃는다. 아주 잠깐이었으나 나는 자괴했다. 어미뫼가 나의 우물이었는가. 그래서 자식들은 큰 세상에 미쳐 어미를 버리고 아비를 떠나는가.





몸에 소슬하게 스며드는 산바람과 달리 바닷바람은 살을 파고들어 뼈를 잡아 휘는 기분이었다. 아주 멀리서도 콧내로 달라붙는 습기를 느낄 수 있었다. 그 습기가 청량하게 느껴질 때 즈음 비로소 바다가 눈에 보였다. 그저 많고 많은 물이라고 생각했던 바다는 순간마다 무늬를 바꾸는 비단이었다. 끊임없이 움직였고 멈출 줄을 몰랐다. 땅이 그리워 끊임없이 밀려오다가도 분수를 알아 스스로 물러갔다. 단지 머물다 간 흔적만이 모래뻘에 톱니처럼 남았다. 그 위에 짐짓 말발굽 자국을 남기며 달려보기도 했다. 산에서는 느껴볼 수 없는 장쾌함이었다.





바다 위로 빗방울이 달리던 날, 바다가 하늘을 향해 물방울을 쳐올리던 날, 나는 보임과 들림에 정신없이 빠져들다 결국 낙마(落馬)했다. 진흙처럼 푹신한 뻘에 처박혀 옷만 좀 버리고 만 것이 다행이었다. 서당의 글둥이(學童)들이 쓰다 버린 지필묵(紙筆墨)을 주워모은 꾸러미를 찾을 생각도 못 한 채 뻘에 무릎을 박고 손가락만 부들부들 떨었다. 하늘과 바다가 서로 그리워 우는 소리를, 바다와 하늘이 맞물려 맴도는 물의 흐름을 쓰고 싶었다. 뻘은 떠돌내와 비교할 수 없이 크고 넓은 종이였고, 나는 두 어머니가 남겨주신 눈과 귀로 자연이 그려내는 가장 위대한 풍경화를 보고 있었다. 그러나 쓸 수 없었다. 묘사에 주력하면 서사가 비트적거렸고, 서사에 주력하면 묘사가 흐려졌다. 검지손가락이 부러지도록 흙만 파내다가 끝내 빗물만도 못한 눈물을 뚝뚝 떨구었다. 정자 아래 솟아오른 고봉준경(高峯俊景)을 쓰지 못해 끝내 통곡하다 글을 사르고 오랑캐로 떠돌았다는 어느 시인의 이야기가 떠올랐다. 내 뒷모습을 지켜보는 누이는 당연했겠지만 정 비장도 아버지도 말이 없었다. 내가 스스로 마음을 추슬러 말에 오를 때까지 묵묵히 기다려줄 따름이었다.





다시 며칠을 달려 우리는 무너진 산의 귀퉁이와 마주했다. 오랜 세월의 더께가 쌓여 금가고 내려앉은 성의 일부였다. 하늬끝벌의 관문(官門)을 본 아버지의 눈에서 불꽃이 쏟아졌다.



“성(城)은 사람이 쌓은 뫼다. 안은 부드럽고 따뜻하며 면밀하게 백성을 품어야 하지만, 겉은 높고 가파르며 적을 맞아 허락함이 쉽지 않아야 한다. 아무리 왜구가 기망(欺罔)하다 한들 이런 성에 기대어 살기를 바랬는가. 또한 이렇게 무너지도록 성에만 기대어 살았는가. 관(官)의 현판을 걸고 보살펴 지키는 이조차 없더란 말인가.”



“민망합니다. 여러번 간언(諫言)하였으나 성주께서 늘 더 급한 일이 있다 물리치셨습니다.”



“앞으로는 성객(城客)이라 부르게. 그는 주인이라 불릴 자격이 없네.”





아버지의 말끝에는 바닷바람보다 더한 칼바람이 불었다. 이런 아버지를 보지 못했다. 누이도 눈치로 깨닫고 입을 다물었다. 정 비장이 목소리를 돋우자 이름뿐인 문이 삐거덕 열렸다. 문이 늙어 이제는 그만 쉬고 싶어 한다는 것을, 나는 소리로 누이는 울림으로 알고 서로 눈빛만 주고받았다.





처음으로 마을의 중심에 들어섰다. 우리가 떠났던 설림(說林)처럼 크지도 복잡하지도 않은 시골 마을보다 훨씬 크고 번화한 마을이 우리를 반겼다. 수많은 시선과 소리와 울림이 우리를 향해 득달처럼 달려왔다. 반갑지도 좋지도 아니하였다. 그나마 말 위에서 악기를 비끄러맨 누이의 자색에 시선이 좀 더 모였다. “잠시 기다리시지요.” 정 비장은 말을 타고 빠르게 어디론가 사라졌다.



“왜구와 싸우는 마을치고는 화려하고 빛나 어지러울 정도입니다.”



“이런 곳은 마을이라 하지 않고 도(都)라고 한다. 규모가 크고 경제가 집중되어 몇 번의 싸움이 있다 한들 쉽게 흔들리지 않는다. 이 나라가 한 대륙과 이웃하여 결코 평안하다 할 수 없음에도 도 중의 도인 수도(首都) 서울은 평안하지 않느냐.”



온갖 왁자한 소리로 귀가 어지럽고 온갖 움직임에 눈이 어지러웠다. 고향 마을의 장터와는 비교도 할 수 없는 커다란 저자(市)에서 사람들이 파리처럼 꼬여 움직였다. 바다 근처에 사는 이들은 삶도 바다를 닮아가는가. 무너진 성벽 사이로 들어온 바람에서 짠내가 묻어나듯 소리높여 물건들을 주고받는 사람들의 목청에도 바다가 깃들어 울렸다.





아버지는 말에서 내려 흙을 몇 번 만져보시고는 손을 툭툭 털었다.



“상업(商業)이 흥하니 땅에 매여 사는 이들은 아니다. 흙에 소금기가 질어 오랫동안 농부의 손길을 받지 못했구나. 그나마 논밭에 매여 사는 이들은 이보다 더 먼 곳에 있을 것이다.”



“중요한…… 것입니까?”



“중요하다. 상업이란 결국 사람의 이득을 취하고자 사람이 만들어낸 것이니 목숨만 건지면 어디서든 다시 설 수 있다. 허나 땅에 매여 사는 이들은 스스로의 피땀이 밴 땅을 지키기 위해 목숨도 버린다. 묵류의 지킴이란 그들로부터 기반하는 것이다.”



“땅보다는 목숨이 중하지 않겠습니까.”



“한율아, 너에게 있어 아비의 목숨과 누이의 목숨 중 무엇이 더 중하더냐.”



느닷없이 목울대가 콱 틀어막혔다. “………아버지.”



“농자(農者)에게는 땅이 그러한 것이다.”





아버지는 잔잔하게 웃었고 때마침 정 비장이 말을 달려 수하 몇 명과 함께 황급히 앞에 섰다. 그를 알아본 저자의 상인들이 허리를 숙여 예를 표하였으나 대단치는 않았다. 정 비장은 예를 받는 둥 마는 둥 하고 아버지 앞에 서서 무릎을 꿇었다.



“성주께서 말씀하시기를, 금일 이 때부터 어르신을 총군사령(總軍司令)에 봉하고 이 성의 모든 군무(軍務)를 맡긴다 하셨습니다.” 이어 그는 벌떡 일어나 소리를 돋우었다. “듣거라! 너희들의 바램대로 성주께서 묵류의 인재를 초빙하여 이 땅을 방비하려 하신다! 백성과 병졸들은 여기 계신 리훈 총군사령의 명령을 추호도 없이 따라야할 것이다!”



병졸과 상인들이 다같이 무릎을 꿇어 입을 모았다. “총군사령 어르신의 명에 따르겠나이다!”





나도 누이도 이와 같은 위압감에 놀라 입을 다물지 못한 채 엉거주춤하였으나 아버지는 그리 기쁘지 않은 안색이었다. 아버지는 일단 손짓하여 정 비장을 조심스럽게 불렀다.





“성주께서 이리 하라 하시던가?”



“……그러합니다.”



“직접 대면치도 아니하고 군무를 맡기다니 얕은 위인일세. 아니면 내가 민초들의 뜻을 등에 업고 좌지우지 할까 두려워 경계하든가. 어느 쪽이든 반갑지는 아니하네. 자고로 장(長)이란 위에서의 부름보다 아래로부터 추대받는 편이 훨씬 편한 법이지.”



“총군사령 어르신. 지금 그런 말씀을 논하실 때가 아닙니다.”



“하기야 그렇네.”





서서히 돌아서는 아버지의 등이 유난히도 차가워보였다. 그러고 보니 성 안에 들어선 이후 그토록 헤프던 아버지의 웃음은 많이 사라져 있었다. 그리고 우리는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낯선 아버지의 모습을 보게 되었다.





병졸의 수를 헤아리고, 쓸만한 병장기를 추려낸 나머지는 대장간에 보내 고치게 하며, 사람들에게 번을 정하여 경계를 엄중히 하게 하는 한편, 무너진 성벽을 보수하게끔 하는데 크고 작은 소란이 있었다. 아버지와 오래 알고 지낸 정 비장조차 곤혹스러워할만큼 아버지의 명령은 선을 넘는 모양이었다.



“총군사령. 작금(昨今)의 명을 확인코저 합니다.”



“하시게.”



“성내의 군민들을 모아 번을 짜서 성벽을 보수하는 노역에 종사시키되 지원이 없으면 차출할 것이요, 그 짜임은 통솔할 군졸 하나에 상인이 여섯이요, 농자(農者)가 셋이라 하셨습니다.”



“그랬네.”



“군민(群民)들의 불만이 매우 높습니다. 성에 매인 이들은 군(軍)이지 민(民)이 아니며, 상농(商農)을 가를 것 없이 백성 모두가 이미 한 해의 일정량의 부역과 세를 바침으로 의무를 다했다 불평하고 있습니다. 스스로 뜻하여 나오지 아니하는 백성 아홉을 어찌 홀로 이끌 수 있느냐며 군졸들의 사기 또한 좋지 아니합니다.”



“그런가.”



세 글자로 일관하는 아버지의 신경은 정 비장의 말을 귓가의 바람처럼 흘려들었다. 허물어져가는 성벽 위에서 아버지는 집에서 가져온 길다란 꾸러미를 풀고 그 안에 갈무리해두었던 창을 꺼내었다. 병기를 모르는 내가 보기에도 자루는 굵고 두꺼웠으며, 균형 있게 맞춰 달아둔 날은 예리해보였다. 지금껏 병기를 든 아버지의 모습은 단 한 차례도 본 적이 없음에도, 아버지의 손에 쥐어진 창도, 창을 든 아버지의 모습도 전혀 어색하지 않았다. 정 비장도 작은 기침을 뱉어내며 고개를 숙여 아버지의 말을 기다렸다.



“군졸이나 농자보다는 상인의 불만이 많지 않던가.”



“그러합니다.”



“애초에 살아만 있으면 어디서든 제 한 몸 건사하기 쉬우리라 낙관하기 때문이겠지. 미망한 생각 아닌가. 가서 이르게. 이 성이 무너지면 목숨도 삶도 무너져 어디서든 살아가기 힘들 것이라고.”



“저, 그리고…….”



“또 있는가?”



“백성들이 이토록 몸을 바쳐 성을 지켜내려고 할 동안, 궁 안의 고관대작(高官大爵)들은 대체 무엇으로 전쟁을 대비할 것이냐는 탄원 또한 야밤의 폭풍처럼 빗발치고 있습니다.”



아버지는 한숨을 내쉬었다.



“아래가 부실한 누각은 작은 바람에도 무너지는 법. 이 성의 다스림이란 고작해야 이 정도의 모습인가. 이토록 신의를 얻지 못하여 어찌 큰 난관을 헤칠 것인가.”



“……송구합니다.”



“정 비장의 탓이 아님을 아네. 허나 생각해 볼 일일세. 고고지성(呱呱之聲)의 순간부터 이날 이때껏 스스로를 귀한 태생이다 착각하여 오로지 먹고 마시는 도락에 매인 저 무르고 늘어진 살덩이들을 거둬다 무에 쓰겠는가?” 아버지의 말은 시위에 걸어 당긴 길고 날카로운 화살이었다. 성벽 어디선가 조바심치며 아버지의 말을 듣고 있을 일부 고관들의 움찔하는 모색이 내 눈에도 선하였다. 정 비장 역시 흘끔 뒤편의 성벽을 한 번 돌아보는가 싶더니, 짐짓 목소리를 돋우어 외쳤다.



“하옵시면 총군사령의 뜻이란, 병력으로조차 쓸 수 없는 저들을 그냥 궁 안에 두어 잔명이라도 보존케 하심입니까?”





정 비장의 말이 성 안에 들어온 아버지를 드물게 웃게 했다. 그러나 나와 누이에게 보여주던 자애로운 미소는 아니었다. 뱀처럼 징그럽고 여우처럼 헤아리기 어려운 뜻을 감춘 미소였다.





“공맹문(孔孟門)의 가르침에 이르기를, 사람이란 하늘(天)로부터 음양(陰陽)의 리(理)를 이어받은 귀한 생명이라 하였네. 어찌 그 타고남에 귀하고 천함이 따로 있으랴만, 그러나 각기 지닌 재주만큼은 소용됨이 다를 수도 있겠지. 그를 일러 불가(佛家)에서는 또한 업(業)이라 하지 않던가.”



“…무슨… 말씀이신지.”



“몸도 재주도 전쟁에는 별무소용이라 하나, 그들이 가진 것도 그렇겠는가. 애초에 물(物)이 무슨 잘못이런가. 그를 허투루 쓰는 인자(人者)의 잘못 아니겠는가.” 은근한 아버지의 말에 비로소 정 비장이 그 뜻을 알아챈 모양이었다. “아!” 외마디 탄성을 지르며 즉각 허리를 꺾는다.



“언젠가 말했듯, 금전이란 무서운 것일세. 길들이지 못한 들짐승과 같아 제 뜻대로 움직일 재주가 없거든 욕심을 버리고 방생함도 큰 용기요, 제 몸을 보호할 지혜일 터. 이 성 안의 높으신 나으리들이 스스로 귀하신 몸을 다치는 일 없도록 각별히 신경써주시게.”



정 비장이 빙긋 웃으며 말을 보태었다.



“높은 분들이 스스로 금전을 내어 앞으로 몸을 써 이 성을 지킬 군졸과 백성의 배를 불리고, 몸을 데워줄 수 있다면, 그 마음이 어찌 금전 몇 푼에 비하겠소이까.”



“성주 이하 각료들의 큰 뜻에 감복하네. 바쁠 터에 가보시게.”





정 비장이 두 손을 맞잡아 예를 바친 후 몸을 돌려 성큼성큼 걸어갔다. 금이 간 성벽 한 켠에 비둔한 몸들을 악착같이 숨기며 엿보고 엿듣던 고관들은 대경실색하여 재물들을 지키고자 사라진지 오래인 모양이었다. 그러나 아버지의 총애를 받는 정 비장의 기세는 그야말로 잠룡비호(潛龍飛虎)와도 같아 거칠 것이 없어보였다. 그 뒷모습을 바라보던 아버지는 머금었던 옅은 미소를 지우고 창을 한 차례 돌려 자신의 등 뒤로 세웠다. 땅딸막한 아버지의 등 뒤로 산처럼 곧추선 창이 서서히 기우는 햇볕에 물들어 날카로웠다.

아버지는 숨을 들이쉬었다.





“무뎌졌구나.”



“……예? 창은 날카로워 보입니다만.”



“중원(中原). 대륙의 가장 뛰어난 이들만이 모여 사는 곳의 이름난 대장장이가 벼리어준 창이다. 굳세기로 치자면 세월도 비껴가고, 예리하기로 치자면 피와 물을 먹여도 관계치 아니한다. 그러니 사람의 몸이 어찌 이보다 단단할 수 있겠느냐. 변치 않을 뜻은 있되 그 뜻을 담는 사람은 이토록 약한 것이구나.”





아버지의 자탄이 길고 무거워 나는 말을 보태지 아니하고 입을 다물었다. 길게 내어봐야 쓸데없는 말일 뿐이었다.





“사람의 몸도 악기나 병기와 다를 것이 없다. 살피지 않으면 늘어지고 휘어지고 녹이 슨다. 위급할 때 부러지고 끊어지고 깨지느니 늘 단련해야 하는 법이다. 한동안 쓰지 않은 몸은 언제든 틈이 보이는 법이다. 정 비장 휘하의 군졸들이 비루한 절름발이의 말에 그리 쉽게 목숨을 맡기겠느냐.”





아버지의 몸 주변이 돌연 어지러웠다. 한쪽 다리가 불편한 아버지의 몸은 거의 움직이지 않았다. 불편한 다리를 추처럼 땅에 디뎌 중심을 잡고 허리와 팔을 비틀어 창을 휘두르고 찔렀다. 허공에 춤을 추듯 움직이는 창은 평행으로 흐르는 빗방울 같다가도, 하늘을 찔러올리는 벼락처럼, 혹은 땅을 내리덮는 먹구름처럼 수백수십의 변화를 그 궤적에 품고 있었다. 어지러웠다. 한 획에 아홉 필법의 묘수를 담는 명필의 서체가 저럴까 싶었다.





“저는 아버지나 정 비장처럼 무(武)를 알지도 못하거니와 애시당초 금전과도 거리가 먼 이입니다. 무엇으로 이 전쟁에 보탬이 되리이까.”



아버지의 창이 멈추었다. 격렬한 움직임을 멈춘 끝에 매달린 호흡은 여전히 평온했다.





“뭘 들었느냐. 네가 가진 업은 따로 있다. 너의 눈과 귀는 밝고, 너의 입은 말을 알고 너의 손은 글을 안다. 네가 이 곳에서 연마해야 할 재주는 그 것이다. 네가 할 수 없는 재주에 연연하지 마라. 네가 할 수 있는 것을 갈고 닦을 시간도 많지 아니하다. 그렇기에 네 누이에게도 따로 무엇을 하라 이르지 않은 게다.” 엄중하게 나를 질타하던 아버지가 문득, 말을 끊었다.



“헌데, 네 누이는 대체 무얼 하더냐?”








*          *         *







누이는 대장간에서 마늘 껍질을 벗기고 있었다. 쇠와 불이 넘실대는 곳에서 어울리는 풍경은 아니었다. 그러나 대장간의 왁살스러운 사내들도 먹어야 힘을 쓸 터였다. 쇠를 달구고 녹이는 불길의 너울거림 끝을 떼어놓은 부뚜막 불꽃은 갓 태어난 아기처럼 가볍게 몸을 뒤챘다. 그 곁에 옹송그려 앉은 몇몇 늙은 아낙들과 어깨를 맞댄 누이의 얼굴이 상그러웠다. 불빛에 그을린 땀방울이 누이의 이목구비를 매끄럽게 타고 넘어갈 때마다 근골에 비해 아직 어린 대장장이들의 망치가 모루에 빗맞으며 어설피 울었다. 투박하고 단단한 두드림에 길들여진 박자가 헐거워지면 늙은 대장장이들은 혀를 차며 젊은이들을 질책했고, 질책받은 젊은이들은 목을 움츠러뜨리며 다시 흘끔 누이를 바라보았다. 눈과 귀는 어두웠으나 손발만큼은 야무진 누이는, 대장간의 울림에 완전히 취해 있는 것처럼 보였다.







사방에서 들려오는 두드림에, 누이의 몸은 한들한들 박자에 맞춰 어깨와 허리를 들썩거렸고, 가끔 망치가 모루에 빗맞으며 박자를 헝클어뜨리거나 쇠를 얇게 찢는 듯한 소리가 느껴질 때마다, 젊은이들처럼 목을 움츠러뜨리며 머리를 짧게 흔들었다. 늙은 아낙들은 기이한 눈길로 누이를 곁눈질하며 조금씩 그와 거리를 두었다. 결과적으로 누이의 온 몸은 오로지 달궈진 쇠와 식은 쇠가 부딪히며 게워내는 울림으로만 가득하여 손끝의 마늘에 신경쓸 새가 없는 듯했다. 새하얗게 벗겨져 온 몸을 드러낸 채 바닥으로 떨어진 마늘들이 알알이 쌓였으나, 늙은 아낙들은 주워갈 생각도 하지 못한 채 황급히 그 자리를 떴다. 요녀(妖女)네 탕녀(蕩女)네 하는 속살거림이 나에게만 들려 차라리 다행이었다.







가볍게 누이의 어깨를 두드리자 화들짝 놀라 나를 돌아보는 누이의 눈매와 코끝에 땀방울이 이슬처럼 엉겨 아롱졌다. 그제서야 자기가 무엇을 하던 중인지 깨닫고는 서둘러 흙투성이가 된 마늘을 허위허위 더듬어 쥐었다. 겉껍질을 벗겨 나온 미끄러우면서도 끈적한 진액에 흙알갱이가 덕지덕지 묻어, 한 차례 씻어야만 먹을 수 있을 것 같았다. 누이와 함께 마늘을 줍자니 정 비장과 함께 순시를 나오셨는지, 어느 틈에 아버지가 함께 마늘을 주우시며 슬쩍 말을 건네셨다.



“한율아, 도회지에 온 지 꽤 되었다. 혹시 여자를 아느냐?”



“………예?” 느닷없는 말씀에 숨이 막혀 아버지를 바라보았다. 뜨겁게 달아오른 내 얼굴이 꼭 대장간의 불길 때문만은 아닐 터였다.



“묘음이야 어차피 못 들으니 상관 있겠느냐. 허나 마늘이란 참 보면 볼수록 여자를 닮았지. 겉보기에는 작고 여려 쉬워보이나 껍질을 벗기긴 참으로 어렵지 않으냐. 두터운 겉껍질을 벗기면 속껍질이 도사리고, 그 속껍질은 미끄러운 진액에 젖어 남정네의 거친 손길을 자꾸만 피하려 눈물 흘리는 여자 같구나. 그 눈물에 당혹하여 떠나려는 남정네의 발길을 끈적하게 붙잡는 하얀 속살이 또 그 안에 있으니, 급하게 서둘러 씹으면 매운 맛이 속을 찢어 할퀴고, 오로지 더운 불에 은근히 달구어 따뜻하게 익혀야 은은한 단맛이 부드럽게 퍼진다. 이 어찌 여자가 아니라고 하겠느냐. 그러니 한율아, 너도 네 연(緣)을 찾고 나면 네 누이보다 마늘을 더 잘 벗길 수 있지 않겠느냐.”





아마 흙투성이가 되어 더러워진 마늘이 내 탓인 줄 알고 계신 모양이었다. “마늘 껍질 벗기는 일을 두고 큰 말씀 하십니다.” 쓴웃음을 지으며 바가지에 떠둔 물을 부어 마늘을 씻고 누이 손에 건네어 주었다. 국을 끓이는 듯 구수한 된장 냄새에 섞여든 아낙들 사이로 쭈뼛쭈뼛 누이가 다가가 마늘을 건네었다. 나도 누이도 어디서든 겉도는 존재임이 서글펐다. 아버지도 정 비장도 그걸 아는지 물끄러미 그 뒤를 바라보고 있었다. 정 비장의 얼굴 역시 어딘가 상기되어 있는 품이 대장간 불길 때문만은 아니리란 생각이 들었다.





“네 누이가 그 동안 예 머물렀더냐?”



“예, 끼니 짓는 것을 돕는 모양입니다.”



“여자가 있기에 상서롭지 못한 곳이다. 다치지 않도록 잘 살펴라.” 정 비장의 참견에 아버지가 눈살을 찌푸린다. “뉘가 어디에 있고픈 마음에 남녀가 따로 있는가. 적이 이 성을 침범할 때도 지위 고하와 남녀를 구별하여 대적할 참인가.” “아니, 그런 뜻이 아니오라…….” “관두게. 그대도 여자 속 헤아리려면 멀었네. 칼과 글보다 여인을 먼저 알았어야 했건만.” “……총군사령!”





당황하여 허둥대는 정 비장을 대신해서 내가 아버지께 여쭈었다.



“그런데 아버…… 아니, 총군사령께서는 여기 어인 일이십니까.”



“총군사령이기 때문에 이 곳에 온 것 아니겠느냐. 농은 그만둘테니 정 비장은 가서 일 보시게. 행여나 꾀 부리는 자 없이 각자 맡은 병기를 잘 고치고 만들고 있는지 살펴주게.” 눈치 빠른 정 비장은 부자(父子)가 이야기를 나눌 수 있도록 자리를 비켜주었다. 총군사령의 일을 맡은 뒤로 언제나 정 비장과 어울려 밤낮없이 군무를 살피시는 아버지와 몇 마디 나눌 시간조차 드물었다. 나는 성 안을 돌아다니며 사람들의 다양한 삶을 보고 겪고 쓰는 일로 하루를 보냈다. 그러나 여전히 내 글은 성에 차지 아니하였다. 묶다 만 매듭 같은 단어와 풀다 만 매듭 같은 문장들이 내 손목과 목에 엉겨붙었다. 종이를 가득 메운 것은 글이 아니라 단어와 문장의 억지 나열에 지나지 않았다. 종이와 먹물이 심히 아까웠고 밤새 시달린 붓이 안쓰러웠다.





아버지는 씁쓸하게 웃었다. “문사(文士)의 삶이란 그렇다. 네 누이는 뭘 하더냐.”



“울림에 취한 듯 보였습니다.”



“울림?”



“쇠를 두드리는 울림. 불길의 너울거리는 울림에 번잡스러운 것은 손과 몸뿐 이미 모든 감각이 다 그리로 쏠려 있는 듯합니다.”



“그렇더냐.”





아버지는 한동안 말이 없으셨다. 정 비장이 우람한 거구의 대장장이들 사이를 비집고 들어가자 거친 쇳소리 같은 짜증이 파도처럼 일었다. “이보시오, 군관 나리! 불이란 계집이오. 타오를 때 얼러줘야지 아차 쉬면 싸늘하게 식는단 말이오!” “놔두게, 여태껏 계집 맛도 못 본 양반이, 불맛을 알 턱이 있나.” “저 헛늙은 군관 나리가 십팔반 병기에는 능해도 가랭이에 양물(陽物) 쓰는 법에는 당최 어둡다더만!” “조심하시오, 계집년 속구멍은 천길 용광로보다 더 뜨겁고 깊어 흐물흐물 녹기 십상이라오!” 일손을 놓고 점고를 받으러 오는 늙은 대장장이들은 음담패설을 주고 받으며 히죽거렸고, 정 비장은 얼굴이 빨개져 누이를 흘끗거리며 큰소리로 외쳤다. “도, 동네 아낙들도 있는 터에 못 하는 소리들이 없으시오! 그렇게 불씨가 걱정되거든 어서 이름 적고 일들 보시오!” 그 동안 크고 거칠게만 보였던 정 비장도 평생을 불과 쇠를 벗하며 살아왔던 대장장이들 앞에서는 설익은 풋감 같은 기색이라 우스웠다. 그러나 아버지는 웃지 않았다.





“정 비장의 말이 옳을지도 모르겠다.”



“………예?”



“네 누이가 울림에 도취되는 것은 좋다만, 그에 지나치게 끌려 잘못된 길에 빠질까 걱정이다. 대장장이 말마따나 천길만길 용광로보다 더 뜨겁고 깊은 건 여자만이 아니다. 한 번 삶을 잘못 걷기 시작하면 뼈와 살이 녹아 두 번 다시 헤어 나오기 어려울 때가 오기도 한다. 네 누이가 그런 길에 들지 않도록 잡아주는 것 또한 아비의 도리이지 않겠느냐.”



“누이가… 누이가, 어떤 잘못된 길에 빠져들고 있단 말씀입니까? 저는 잘 모르겠습니다.”



“나도 확신할 수 없어 말하기 어렵구나. 그러나 물이 땅을 덮친 다음에야 비로소 벽을 쌓겠느냐, 소를 잃고 나서야 비로소 외양간을 살피겠느냐. 그 이전에 엄단함하고, 그 이후에 살펴 품어줌이 스승이요, 아비의 도리다.” 아버지는 잠시 숨을 멈추었다가, 결심한 듯 나직히 말씀을 건네셨다.





“왜구들이 이 땅에 온다면 그들의 기색을 살피기 위해 거짓으로 싸워 가늠해야 할 터이다. 그 때 너와 네 누이도 동행하거라. 함께 싸우자는 뜻이 아니라 사람이 사람의 숨줄을 끊는 일이 얼마나 끔찍하고 더럽고 하잘것없는 일인지를 보여주기 위함이다. 이 또한 아비의 도리요, 스승의 도리다. 이제껏 큰 흔들림없이 평온하게 살아온 네 누이에게도 큰 가르침이 될 것이다.”





그 때가 언제일지는 알 수 없었다. 그러나 나는 가급적 그 날이 늦게 오길 바랬다. 이제껏 잡아본 날붙이는 식칼과 낫과 도끼가 전부였고, 그나마 오랫동안 잡아 쓸 수 있는 것은 칼도 창도 아닌, 다섯 치 남짓의 털붓(毛筆)이었다. 먹물을 눈에 뿌리고 벼루를 정수리에 내리쳐 적의 골통을 부술 것인가……. 생각도 못할 일이었다. 차라리 피비린내 풍기는 칼을 휘어잡고 이 땅의 생명을 해하러 온 무도함을 탓하는 시문(詩文)을 지어 꾸짖음이 나을 것 같았다. 그러나 전쟁은 빡빡하고 두려운 현실이었다. 이러한 농짓거리조차 통하지 않을 현실에 나는 한없이 외로웠다. 누이는 차라리 모르는 편이 나을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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