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밀번호를 잊어버리셨나요?

중편 신시대(新時代) 담(談) 3

2012.03.21 06:1503.21

3.







산의 가락은 변하지 않는다. 지난 여름이 올 여름과 같고, 올 여름은 내년 여름과 다르지 않다. 지난 해 초여름 무렵에 글을 배우고자 작정했는데 벌써 한 해가 흘렀다. 나는 얼마나 변하였는가, 스스로를 톺아보았으나 알 수 없었다. 단지 평안히 읽는 것이 좋아 조급함이 없었다.



“여름이구나.”



아버지가 한가롭게 말했다.



“열기가 과하면 만물이 녹아 뒤섞이고, 경계가 없어 세상이 어지러워진다. 음식을 묵히면 곧 상하기 마련이니, 주인도 길손도 때를 서두르는 계절이 바로 이 때다. 오늘은 반갑지 아니한 객(客)이 올 듯 하구나.”





그렇게 말하는 아버지의 손 아래로 길고 짧은 나뭇가지들이 어지럽게 떨어져 있었다. 효(爻)였다. 역경(易經)의 점복(占卜)에 깊이 마음을 빼앗기지 말라 이르셨지만 가끔 보시는 경우가 있었다. 누이는 한가롭게 아침상을 물렸고, 나는 마음이 설레어 삽짝문 바깥에 서책을 펼쳐 앉았다. 벗이 멀리서 찾아오니, 어찌 기쁘지 않을까.





기쁘지 않았다.





서서히 해가 산마루 중턱쯤을 여유작작 올라가고 있을 무렵이었다. 털북숭이 커다란 손이 화닥닥 허공을 뒤채며 내 서책을 앗아갔다. 번쩍 고개를 들었으나 역광(逆光)에 얼굴이 어두워 제대로 살피지 못했다. 삐죽삐죽 돋은 수염과 커다란 근골부터 눈에 들어왔다.





“이 놈 봐라, 뭐하는 놈이기에 이 귀한 서책을 지니고 있느냐?”



“뉘시오, 내 책 돌려주오!”





버럭 소리를 지르며 손을 뻗었으나 아마도 군관(軍官)인 듯한 그 자는 내 몸을 억세게 밀어내며 책을 살폈다. 한참을 흥미로운 눈으로 나와 책을 번갈아 살피더니, 너털웃음을 지으며 순순히 서책을 돌려주었다.



“대륙의 글자를 알더냐.”



“읽고 쓸 줄 아오.”



“모색에 비해 재주가 귀하다. 네가 리훈(理訓) 어르신의 아들이냐?”



“…나는 내 아비의 자식일뿐, 그가 뉜지 모르겠소, 허나 오늘 반갑지 아니한 객이 올 거란 말씀은 남기셨소.”





군관은 한숨을 내쉬며 멀거니 집 안을 들여다보았다.



“세상 꼴이 이런즉, 뉜들 반가우리. 어디 출타 중이시냐?”



“안에 계시오만 객이 반갑지 아니하여 나오지 않으시는 모양이오.”



“녀석, 사납구나.”





군관은 껄껄 웃으며 삽짝문을 기웃거리다가, 문득 광에서 나오는 누이와 눈빛을 마주했다. 누이는 황급히 광으로 도로 들어갔고, 군관의 눈은 화살처럼 그 뒤를 쫓았다. 황급히 그 앞을 가로막으며 내가 짐짓 목소리를 돋우었다.





“헌데 대체 뉘시오? 복색을 보니 관(官)에서 나오신 모양이오만.”





퉁방울 눈에 서글서글한 인상을 지닌 서른 남짓의 군관은 그제서야 헛기침을 터뜨리며 시선을 돌렸다.





“하늬끝벌에서 온 전령이다. 리훈 어르신께 전할 말씀이 있어 왔다.”



“정말 그 리훈이라는 이가 우리 아비가 맞소? 우리 아비는 들메(山野)에 묻힌 필부(匹夫)로 군관 나으리께 어르신이라 존칭받을만한 이가 아니외다. 잘못 찾으신 듯 하오.”



군관은 눈살을 찌푸렸다.



“이미 아랫말에서 다 확인하고 오는 길이다. 이 산에 네 어미 둘을 묻고 그 주변을 지키며 붙박여 살지 않더냐. 이따위 야트막한 산에 무어 귀하여 다른 이들 있을 성 싶지 않다.”



“……나에게는 귀할세. 알다시피 애들 두 어미가 여기에 있으니 어디로 가겠는가.”





아버지가 방문을 열며 한 마디 던졌다. 가죽띠에 긴 칼을 차고 가죽을 덧댄 무쇠 갑옷을 입은 군관은 철그럭철그럭 소리도 요란하게 넙죽 엎드려 절을 올렸다.



“리훈 어르신께 인사 올립니다.”



“오랜만일세, 정 비장(裨將). 안즉도 전령 노릇하며 소일하는가.”



“성주(城主)께서 말 다루는 솜씨를 높이 사신 덕에 붙박여 살 날이 없습니다.”



“녹봉 받아 유람이라. 좋은 팔잘세. 한때 자네와 같이 말태울이하며 동고동락하던 정이 있어 얼굴은 비췄네만, 아들놈 말마따나 이제는 산골 촌부에 불과하니 다른 이 알아보시게.”





대화를 들으며 나는 점점 아연해졌다. 도대체 아버지의 정체는 무엇인가? 대체 무엇을 하시는 분이기에 말로만 듣던, 반도의 남쪽 끝 하늬끝벌에서 아버지를 모시려 이토록 안달하는가? 정 비장은 두건 쓴 고개를 바짝 추켜세우며 침통한 표정을 지었다.





“어르신, 성주의 당부로서도 왔지만, 민초(民草)들의 뜻이기도 합니다. 저 근해(近海)의 왜구(倭寇)들이 들끓어 하루도 편할 날이 없고, 한 대륙의 창검이 언제 이 나라를 향할지 몰라 각자 자기 땅 지키기도 바쁜 실정입니다. 한 대륙을 종횡하시며 핍박받는 이들을 구하고자 묵수(墨守)하던 분이 아니십니까.”





아버지는 뱃속으로부터 깊은 한숨을 끌어올렸다.





“세상이 변했네. 늙은이 하나 창 들고 나간다 지켜질 일이 아니야. 종사하는 무관(武官)들이 더 잘 알 터인즉. 하물며 호쿠사이의 왜인(倭人)들과는 대면한 적조차 없네.”



“그러나 변치 않는 것도 있다 믿어 백성들이 모셔오라 당부하였습니다. 이 것이 그들의 뜻입니다.”



정 비장은 품 안에서 작은 주머니 몇 개를 꺼내었다.



“배를 타는 백성은 고기를 팔고, 논밭을 가는 백성은 곡식을 팔고, 대장장이는 쇠를 두드려 모은 금전(金錢)입니다. 삶을 지키고자 스스로의 삶을 잘라 모은 그 정성을 갸륵타 여기소서.” 주머니를 받아든 나는 그 안을 슬쩍 열어보고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모양도 무게도 두께도 다 다른 금전들이었지만 결코 적은 양이 아니었다. 나는 아버지께 주머니를 공손히 드렸고, 아버지는 내키지 않은 표정으로 그 것을 뒤적거리다가, 문득 종이쪽 몇 장을 발견하였다.



“이건 뭔가?”



정 비장은 약간 굳은 표정으로 고개를 조아렸다.



“제가 대필한 어음입니다.”



“……그게 뭔가?”



“쉽게 이르되 일종의 계약서(契約書)올시다. 지금 당장은 금전을 마련하기 어려우니, 차후에 꼭 그에 적힌 금액을 마련하겠다는 뜻을 적은 것입니다. 그를 이행하지 않을 시에는 국법(國法)에 의해 형벌을 받게 됩니다.”





순간 아버지는 벼락 같은 눈으로 정 비장을 쏘아보았다.





“이보시게, 세간에서 묵류(墨類)를 금전에 팔린 용병으로 알던가?”



“그런 게 아니옵고……. 부디 표현보다 그에 깃든 마음을 보아주소서. 요즘 세상이 갈수록 급하고 빨라져 뭍의 것과 물의 것을 바꾸어 서로의 부족함을 메꾸어주기보다 금은동(金銀銅)으로 주조한 형전(形錢)으로 필(必)과 욕(欲)을 채우고, 심지어 색목인(色目人)들이 퍼뜨리기 시작한 지전(紙錢)까지 유행하게 되었습니다. 하여 뜻과 마음과 힘을 그 같은 물건에 빌어 표현하는 것이 요즘의 풍속인듯, 부디 어렵게 모은 그 귀물(貴物)을 어르신께 드리는 뜻만 갸륵케 보소서.”





아버지는 눈을 감았다. 바람에 흐느적거리는 긴 백발과 정리하지 않은 수염, 얼굴에 퍼져 꿈틀대는 주름이 새삼 노인처럼 보였다. 그토록 나이를 먹는 동안, 바깥 세상은 아버지의 뜻대로 돌아가지 않은 모양이었다.





“공수반 소저. 그대가 남긴 마지막 비병(秘兵)이 온 세상을 집어삼킬 듯 하오. 구천에서 자랑스럽겠구려.” 눈을 뜬 아버지는 주머니를 도로 마당에 던졌다. “뜻은 확실히 알겠네. 허나 가져가게. 좋게 쓰면 좋게도 쓰이려니와, 나쁘게 쓰고자 하면 천하에 끔찍하고 사위스런 물건일세. 이 것은 귀물(貴物)이 아니라 귀물(鬼物)이요, 내 아는 이가 천하를 제패하기 위해 만들어낸, 실로 위력적인 무기일세. 이제 후대 사람들은 이를 얻기 위해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얻지 못한 이는 목숨을 버릴 것이며, 인연을 저버려 외롭고 괴로운 짐승처럼 살다 갈 것이니, 그를 일러 인간이라 하겠는가. 그 아수라(阿修羅)위에 오로지 이 것들이 군림하여 왕처럼 살 것이네.”



주머니를 챙기는 정 비장의 손길이 떨렸다.



“그 후대는 천년일지 만년일지 알 수 없사옵니다. 허나, 당대에 왜구로부터 도륙당하는 하늬끝벌의 슬픈 목숨들은 어찌 하시렵니까.”

말을 올리는 가락과 애절함이 무인(武人)이기보다 문인(文人)이었다. 다시금 눈을 감아버린 아버지는 나직하게 일렀다. “가서, 네 누이 좀 데려오너라.” 바깥에 아직도 그 무섭게 생긴 사람이 있냐며 도리질을 치던 누이는 겁먹은 표정으로 내 손을 잡고 나왔다. 아버지는 다시 예전의 미소를 지으며 손짓과 입술로 우리의 뜻을 함께 물었다.



“바깥 세상 구경을 하고 싶으냐.”



이제까지의 모습을 지켜본 나는 섣불리 대답하지 않았지만 누이의 눈은 한낮의 별이었다. 번쩍거리는 그 모습에 아버지는 너털웃음을 지으며 다시 손짓하였다. 무엇을 생각하는지 알겠다. 허나 바깥 세상의 울림이 비록 이 곳보다 많으나, 이 곳처럼 아름다우리란 보장은 없다. 실망을 넘어 절망할 터인즉, 그래도 가겠느냐?



- 그래도 보고 싶어요.



누이는 완강했다. 꼭 도끼질을 하던 그 무렵 같았다. 아버지는 알았다고, 가서 짐을 꾸리라는 손짓을 했다. 황급히 제 방으로 돌아가는 누이의 발걸음이 깃털이었다. 그 모습을 물끄러미 보던 아버지는 다시 나를 쳐다보았다.





“너는 나를 따라 가야 한다.”



우리의 뜻을 물은 게 아니었다. 누이의 뜻만 물으신 것이었다. 괜시리 또 속에서 궁금증이 불처럼 일었다.





“꼭 가야만 합니까?”



“가야 한다. 생각보다 세상이 더욱 빠르게 변하고 비틀어지고 있구나. 더 늦기 전에 네 밝은 눈으로 보고, 네가 배운 글로 써서 남겨야 한다. 그러니 가자. 가서 인간의 삶이란 무엇인지 직접 네 눈으로 확인하고 쓰거라.”



“저는 이제서야 아버지가 제자백가의 일원이시요, 저 머나먼 남쪽 땅끝의 백성들조차 경외하는 묵류의 계승자라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저보다 더 많은 세상을 보시고 아시며 깨우치신 아버지께서 직접 남기시는 편이 좋지 않겠습니까.”



“이 세상은 너희들의 것이다. 내 것이 아니다. 그러니 그를 남겨 다음 세상의 주인에게 전하는 것도 너희 몫이다. 일이 급한 듯 하니 어서 너도 채비하거라. 정 비장, 말은 준비하였는가?”



혹시나 일이 틀어질까 저어하던 정 비장이 반색을 하며 외쳤다.



“얘기를 듣고 이미 말 세 필을 더 준비해두었습니다.”



“고맙네. 그럼 가세. 가면서 세상이 어찌 변했나 얘기나 좀 더 들려주게.”



아버지는 몸을 떨치고 일어섰다. 찬장을 뒤적이더니 가장 길쭉한 꾸러미를 하나 꺼내어 여벌 옷과 함께 짊어졌다. 그러다 문득 나를 보고 아련하게 웃었다.





“바깥 세상으로 나가니 이름이 있어야할터인데, 내 미처 헤아려주지 못했구나.”



“……생각해둔 이름이 있습니다. 허(許)하신다면, 그를 쓰고자 합니다.”



“무엇이더냐.”



“누이의 이름은 들으려 해도 듣기가 쉽지 않고, 잡으려 해도 잡기가 쉽지 않은 음률을 말합니다. 하여 저는 그를 보(補)하고, 보(保)하기 위하여, 한율(翰率)이라 하겠습니다. 누이가 짜낸 울림을 만방에 퍼뜨려 누이가 있음을 알게 하고자 함입니다.”





삽짝문을 나서는 아버지의 답은 짧았다.





“네 뜻이 깊어 이름이 좋다. 청어람(靑於藍)이구나.”









*         *        *







정 비장이 말을 끌고 나오자 아버지의 눈썹이 위로 올랐다 아래로 힘없이 떨어졌다.



“군마(軍馬)가 아니잖은가.”



“병농일치(兵農一致)의 법이 시행되는 중입니다. 살피소서.”



“그렇기로 농경마(農耕馬)를 징발하면 이를 부려 땅을 가는 이의 삶은 어쩌겠는가. 그조차 법이 헤아려주는가.”



“적을 물리쳐야 삶도 있습니다.”



“삶이 버티어주어야 적도 있네.”





정 비장은 더 대답하지 않았고, 아버지는 말을 쓰다듬었다. 난생 처음 말을 보는 나와 누이는 그저 신기할 따름이었다. 말의 눈은 맑았고, 근골은 가늘고 날렵했다. 커다란 엉덩이 아래로 우람하게 잡힌 양물과 탄탄한 다리가 뻗었다. 아버지가 웃었다.





“한율아, 보기 좋으냐?”



“접하기는 처음이나, 생김부터가 잘 달릴 듯 합니다.”



“땅과 벗하고 사람과 가까워 어질고 순한 짐승이다. 하여 태고부터 요긴하게 부려쓰고 때로는 싸움에 나가기도 하였다. 싸움에 쓰는 군마는, 이렇듯 땅을 가는 말을 쓰기보다 날 때부터 점찍어 기른다. 그런 말은 제아무리 무리에 섞여 기갈(飢渴)에 주려도 주인될 자의 말을 알아듣고 본능을 누른다. 허나 전쟁이 길어지면 그런 말을 구하기 어려워 이렇게 고삐와 안장과 등자로 하여금 묶고 눌러 억지로 말(言)을 듣게 하니, 참람한 일이구나.”



말에 훌쩍 올라타며 아버지는 지나가듯 말했다.





“너희들이 볼 바깥 세상도 아마 이럴 것이다. 사람이 토해낸 생각이, 뭉치고 살아 움직여 다시 사람을 다스리는 꼴을 볼 게다. 사상(思想)은 그래서 무겁고 중하니, 한때 꽃을 다스려 온화한 화국(花國)의 군주가 대륙 일통(一統)의 몽(夢)에 젖어 온갖 참담한 짓을 저지른 연유도 여기에 있다. 생각이 사람을 다스리기보다, 자기 스스로 그를 다스리고자 했다.”





아버지 말마따나 말은 순했다. 정 비장이 일렀듯이 이미 나이가 들어 거칠게 달리지 않았고 누가 타든 거부하지 않았다. 군마로서는 좋지 못했으나 말에 익숙하지 않은 나로서는 바랄게 없었다. 누이는 불편한지 짐만 말등에 올려놓고 자기 발로 뛰겠다 성화였다. 안장 위로 손짓과 몸짓이 분주하게 오갔고, 결국 누이는 불퉁한 얼굴로 대금만 찢어지게 불어댔다. 아버지는 민망한 웃음을 보였지만 정 비장의 눈에는 그조차 어여쁜 모양이었다. 누이의 온 몸을 훑어 오르내리는 시선이 햇살보다 더 밝았다.



“한 대륙의 정세는 어떠한가?”



“……예? 아아, 예……. 조만간 한 대륙의 주인이 또 바뀔 것 같습니다.”



“또 전쟁이 일어날 조짐인가?”



“그런 것이 아니옵고, 일통전쟁이 끝나고 스스로 흩어져 화국의 상공부(商工部)와 술기부(術技部)를 맡은 기상합종회의 영향이 실로 어마어마합니다. 하여 군국을 깨부순 일을 기리고자 무(武)를 세습하던 왕가(王家)는 더 이상 무위(武威)로 대륙을 다스릴 수 없음을 깨달은 듯합니다. 조만간 왕위를 양도하고, 새 왕조가, 아니, 새 황조(皇朝)가 열릴 것입니다.”



“빠르다. 예상은 했지만 너무 빠르구나. 새 황조의 이름은 뭐라던가?”



“달리 말할 것 없이 한(漢) 제국이라 한다 들었습니다.”





아버지는 이맛살을 찌푸렸다.





“대륙의 이름으로 나라를 대신하는가. 땅이 곧 나라가 될 수 있다던가. 나라가 없다고 땅이 없음이 아니거늘 나라의 이름으로 땅을 묶으려는가. 그 오만함이 참람되고 부끄럽다. 공수반은 대체 어떤 세상을 만들고자 하였던가. 생전에 말을 더 나눠보지 못함이 아쉽네.”



정 비장이 짐짓 헛기침을 했다.





“병서(兵書)에 이르기로 대륙을 일통한 군국의 용맹한 병사들조차 기상합종회가 발명한 쇠뇌(衰檑)는 어쩌지 못했다 하였습니다. 호쿠사이의 왜구들은 창에 버금가는 길이의 왜도(倭刀)를 자유로이 씁니다. 군율도 절도도 없으나 사납게 달려들어 엉키고, 삽시간에 갈려 싸우는데 능하니 아무리 궁사(弓射)로 막으려 한들 중과부적(衆寡不敵)입니다. 활에 능한 우리 군에게 쇠뇌를 줄 수 있다면 왜구와 대적할만 할 것입니다.”





“탐나는가? 허나 나는 만들 줄 모르네. 대륙으로부터 배우려 한다 한들 쉽게 가르쳐주지 않을 것이며, 사온다 한들 거금(巨金)에 국위(國威)까지 꺾지 않으면 안되겠지. 너무 비싸지 않은가. 혹여 그 때문에 나를 불렀다면 헤아림이 크게 어긋난 것이네.”



정 비장은 쓰게 웃었다. “……성주님의 뜻일 따름입니다.”





“위에서 내려다봄이 과연 그토록 좁은가. 기상합종회가 쇠뇌에 의존하여 스스로 안주하지 않고, 자처하여 화국의 품 안으로 들어가 결국 그 맥을 끊고 자신들의 세상을 만들어가는 것을 보며 느끼는 게 없더란 말인가. 대륙의 시류가 흐르고 흘러 반도의 남부에까지 널리 퍼지거늘, 아직도 병기 몇 개로 큰 흐름을 막을 수 있더라 생각하더란 말인가. 정 비장, 헤아림이 밝으나 지위가 낮아 함부로 말할 수 없는 그 심려가 크겠네.”



“아닙니다. 제 어찌…….”



“그렇다 해도 내 딸에게 너무 그리 눈길 주지 마시게. 청춘에 백화(百花)가 묘약(妙藥)이라 하나, 내 여식은 묘약 아닌 묘음(妙音)일세.”





장쾌한 웃음을 터뜨리며 말을 달리는 아버지의 뒤를, 수염 사이까지 빨갛게 물든 정 비장이 재빨리 따랐다. 편자 박힌 말발굽이 탕탕 튕기며 따라 웃었고, 누이는 온 몸의 신경을 곤두세워 말근육의 떨림과 울림에 집중했다. 한가로웠다.





서울 근처 어미뫼에서 남쪽 땅끝 하늬끝벌까지 내려가는 동안 나는 별로 할 일이 없었다. 아버지와 얘기를 나누면서도 정 비장의 헤아림은 빈틈없고 기민했다. 누이는 걷는 말 위에서 악기를 다루거나 달리는 말의 허리께를 붙잡고 그 울림을 살폈다. 나이가 되어 한껏 피어나는 처녀가 마을을 지날 때마다 어지럽던 눈빛들이 모였다. 손발을 멈추고 멍하니 바라보는 그 사이를, 나의 밝은 눈과 귀가 파고들어 담았다. 신기함이 지나쳐 어지러웠다.





낮에 마음에 담아둔 풍경을 밤에 풀어 썼다. 주막에 딸린 방에서 잘 때도 있었으나 누이 때문에 방을 따로 잡기가 쉽지 않았다. 주막에서 저녁거리를 구하여 숲가나 강변에서 자리를 풀 때가 더 많았다. 익숙치 않은 말허리께에 매달려 달린 누이는 달의 숨결처럼 잔잔히 코를 울렸고, 번(番)을 자청하여 서는 정 비장은 그 모습을 아련히 눈에 담았다. 아버지는 근처 주막에서 받아온 두 술병을 번갈아 마시며 중얼거렸다.





“이토록 다른데, 어찌 같다 한단 말인가. 왜 구분을 못하는가. 어지러운 세상에 너마저 어지러우면 어쩔꼬.”



“……무슨 연유로 저러십니까?”



“아까 저녁 잡숫다가 주모가 막걸리와 동동주를 헷갈려 잘못 가져왔다 계속 저러신다. 술 좋아하는 건 변하지 않으셨구나.”

“아시니 다행입니다. 그런데도 군영(軍營)에 청하는 연유를 모르겠습니다.”



“한율이라 했었더냐? 네 아버지는 네 생각보다 넓으신 분이다. 하여 한 곳에 머무르실 때 다른 모든 것을 잊으신다.”



“비장님의 언행(言行)은 품격 있는 시문(詩文) 같으니, 무관 같지 아니하십니다.”



“네 아버지께 기마(騎馬)와 궁술(弓術)과 서문(書文)을 배웠지. 좋은 스승을 아버지로 둔 네 복이 크다.”





나는 웃으며 갈아둔 먹에 붓을 적셨다. 붓끝에 머문 달빛도 검게 물들었다. 인근 서당에서 쓰다버린 구겨진 종이 위로 달빛 물든 자욱이 참방참방 떨어졌다. 물끄러미 보던 정 비장이 물었다.



“어찌 쓰지 않느냐. 뭘 쓰려 하기에.”



“……생각은 넘치는데, 나오지 않습니다.”



“글이란 게 원래 그렇더구나. 입과 혀에서 맴돌다 부끄러워 나오지 않는 것을 말이라 하지 않듯, 마음에 담아둔 생각 역시 나와야만 글이다. 한 행(行)을 쓰지 못해 몇날 며칠, 몇 달 몇 해를 버리는가 하면, 일야(一夜)를 만 년처럼 하얗게 새워 세상을 채울 때도 있다. 그 기박함에 질려 결국 몸쓰고자 무과(武科)를 보았구나. 몸은 속이거나 속지 않고 힘쓴 만큼 대답해준다. 시문보다 질박하고 담백하니, 사내의 한 삶을 걸어볼만하더구나.”



나는 처연하게 웃었다. “저는 비장님처럼 몸이 강건하지 못합니다.”



“너에게는 더 귀한 재주가 있다 들었다만.”



“보잘것없습니다. 이 몸이 무엇에 쓰일지도 솔직히 알지 못합니다.”



“내 삶도 버겁다. 삶이 어데로 흐를 줄 뉜들 알겠느냐. 때가 정해줄 것이다. 늦었으니 자거라. 지금은 잠을 청할 때로구나.”



늦여름의 숲 사이로 정 비장의 몸이 서걱서걱 사라졌다. 굵고 독한 산모기가 귓가에서 앵앵대며 설쳤다.





*          *           *





밤에만 술을 즐기던 아버지는 낮에도 술병을 기울이며 달렸다. 속세는 우리에게나 신기한 풍경일 뿐, 아버지에게는 끔찍한가 보았다. 넌지시 연유를 여쭈었으나 아버지는 대답하지 않았다. 보다 못한 누이가 어느 정도 익숙해진 말을 달려 그 옆에 나란히 했다. 누이는 술병을 기울이는 시늉을 하고,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손을 살래살래 저었다.



“걱정마라. 군영에 들어가 못 마실 술을 미리 마셔두는 것뿐이다. 그리고 묘음이는 언제 그리 기마가 늘었느냐? 어디 따라와보려느냐?”



취기에 녹은 것은 마음뿐인가 보았다. 늙은 농경마는 아버지의 다리를 대신하여 달렸다. 정 비장은 혀를 찼지만, 입술을 앙다문 누이는 한 손을 말의 엉덩이께에 댄 채 고삐를 죄어챘다. 말이 앞다리를 들며 히히히힝 쉰 목소리로 울었다. “저, 저, 저저! 묘음 소저! 위험합니다!” 정 비장이 다급하게 외치며 말을 달렸으나 들을 리 없는 누이의 기마는 흐르듯 유려했다. 땅을 갈던 농경마는 정 비장의 군마처럼 달렸고, 그보다 훨씬 빨랐다. 정 비장이 제아무리 고함을 돋우고 박차로 배를 올려차도 소용이 없었다. 아버지와 누이는 해가 저물 때까지 달렸고, 지친 정 비장을 느릿느릿 달리던 내가 따라잡았다.





그믐이라 달이 없었다. 어두운 강변 새로 물 흐르는 소리만 수다스러웠다. 피곤에 지친 정 비장은 검과 활을 부려놓은 채 꾸벅꾸벅 졸기 시작했고, 아버지는 또 술병을 비웠다. 너무 많이 달린 탓인지 누이는 온 몸을 두드리고 관절을 낑낑대며 비틀었다. 곱고 가녀린 어깨를 뒤에서부터 주물러주자 몸이 일순 굳으며 짧은 신음을 흘렸다.



“아!”



“아, 미, 미안, 아팠어?”



누이의 소리에 익숙하지 않았기에 나도 모르게 대답이 입술에서 새었다. 한숨을 내쉬며 누이의 뒷머리를 두드려 나를 보게 했다. 그리고 다시 아프냐는 몸짓을 지으려 하는데 갑자기 누이가 내 목울대를 가볍게 손으로 쥐었다. 그리고 손으로 내 상체를 가만가만 쓸어보며 무언가를 찾는 듯한 시늉을 했다.



“누, 누이, 왜 그래?”



누이가 몸을 바르르 떨었다. 어디 아픈가 싶어 안색을 살폈으나 누이는 눈을 감고 가만히 생각하더니, 입술을 또렷하게 움직였다.



- 누, 누, 이, 왜, 그, 래.



실로 오랜만에 사지를 내저으며 펄쩍 뛰었다. 나는 누이의 손을 내 목에 꼭 누르며 다시 또렷하게 말했다.



“들려? 내 말 들려? 그대로 해봐. 진짜 들려?”



이번에는 말이 다르게 나왔다.



- 응. 들려. 들린다기보다 목의 울림을 읽는 거지만, 내 동생이 무슨 말하는지 알 수 있어. 기쁘다. 정말 기쁘다. 말하지 않아도 말할 수 없어도 기쁘다.





누이의 눈에서 달빛처럼 밝은 눈물이 차올랐다. 내가 글을 읽고 붓을 통해 쓸 동안 누이는 악기를 통해 썼고, 울림을 통해 읽었다. 아마도 말의 허리께로부터 전해지는 울림을 통해 그와 마음을 나누고 또한 능히 달릴 수 있었을 것이다. 그제서야 군문(軍門)에서 잔뼈가 굵은 정 비장이 누이를 쉽게 따라잡을 수 없었던 이유를 깨달았다.





그 때 아버지가 우리를 손짓해불렀다. 눈이 어두운 누이는 알아채지 못했지만 나는 알아보고 누이의 손을 끌어 함께 앞에 앉았다. 아버지는 누이의 손을 자신의 주름진 목울대에 대며, 눈으로는 우리 모두를 훑어보았다.





“정 비장에게는 이에 대해 말하지 말거라. 무인치고 깨인 사람이나 관료로서 묶여 있다. 때때로 너희들의 기색을 살피는 것으로 보아 아마 밀명(密命)을 받고 재인이사(才人異士)를 추리는 임무도 있을 것이다. 나라가 비록 개인이 할 수 없는 일을 대신해주어 필요하다 하나, 나라가 존속하기 위해 백성을 사지에 몰아넣는 일도 숱하게 많으니, 말을 섞되 마음은 보이지 마라. 특히 묘음이는 내 말 잊지 말고 새기거라. 한율이는 지금처럼 붓 잡는 서생으로 행세하면 그로 족하다.”





아버지의 눈은 또렷했고, 몸에서는 박력이 물결처럼 일었다. 입가에서 술 냄새도 나지 않았다. 누이는 고개를 끄덕였고, 나는 소리죽여 “네.” 라고 대답했다. 그러자 아버지의 표정이 천천히 풀어지며 우리 둘을 끌어안았다.





“고맙다. 너희들에게 고맙다. 잘 살아주어 고맙다.”





어깨가 젖었다. 마음이 흔들렸다. 아버지가 눈물을 떨구는 모습을, 나도 누이도 처음 보았다. 정 비장만 혼곤히 잠들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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