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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편 신시대(新時代) 담(談) 5

2012.03.21 06:1803.21

5.







가장 높은 파도 위에 산처럼 자리잡아 흘러온 왜구의 배를 발견한 이는, 어물전에서 고기를 덖어다 말리는 일로 시어미를 봉양하는 울돌 어멈이었다. 노동에 지친 그녀의 삶은 맷돌처럼 무겁고 힘겨웠다. 어미와 처를 남겨둔 채 수장된 아들에 대한 원망과 그리움을 남편 잡아먹은 며느리를 향한 패악으로 고스란히 쏟아놓는 시어미가 윗돌이었고, 반찬 투정으로 하루를 보내며 언제쯤에야 장성해서 어미의 버팀목이 되어줄지 알 수 없는 철없는 어린 아들이 아랫돌이었다. 저잣거리 구석에서 국밥 한 그릇을 청해도 반찬처럼 딸려 나오는 이야기였다. 첫 술을 뜨자마자 이미 식어 걸쭉해진 국밥의 맛은 언제나 똑같았고, 울돌 어멈의 삶도 그처럼 이미 흔하고 익숙한 눈물이었다. 비슷한 삶의 무게를 지고 있었기에 남의 일 같지 않다며 동정어린 수다에 열중하는 아낙들도 그러나 역시, 울돌 어멈의 고단한 삶은 역시 남의 일에 지나지 않을 터였다. 고통과 고뇌는 나에게만 막역한 벗일 뿐, 멀리서 지켜보는 이에게는 청하고 싶지 아니한 객(客)에 불과하였다.







아버지가 전쟁을 대비하는 방식 또한 이 싸움이 결코 문 한 번 두드려보고 어물쩡 지나갈 객이 아님을 성 안 모든 이에게 알리는데 있었다. 애초부터 전쟁에 참여할 생각도 없이 제 몸만 지킬 벼슬아치들과 여차하면 몸을 빼어 먼 땅에서 다시 장사를 시작할 요량인 상인들은 아버지의 강경한 태도에 어쩔 수 없이 협력하고 있는 듯해보였다. 특히 정 비장의 말에 따르면 재산 대부분을 몰수되다시피 군비(軍費)로 공납하게 된 고관대작들의 분노는 대단한 모양이었다.



“든 자리는 몰라도 난 자리는 안다 들었습니다. 사람뿐 아니라 금전도 그렇겠지요.”



“네 말이 옳다. 어쨌든 그 돈으로 대장간을 고치고 병력과 인력을 충당하고, 군량을 끌어모아 심지어 밥 지을 아낙까지 부족할 형편이니 오히려 다행이지 않으냐. 허나 또 엉뚱한 데서 불꽃이 튀더구나.”



“……예?”



“저 계집들 말이다.”





역시 장터 한구석에 위치한 색주가 근처의 술도가에서 정 비장과 나는 마주앉아 있었다. 술도가와 색주가는 서로 이웃하여 하루도 빠짐없이 화려한 불을 밝혔고 난잡한 음악을 울리며 손님을 끌어모았다. 아낙들의 원성이 자자하여 언제나 장터 구석에 자리하였지만 어미와 처의 눈을 피하여 문전성시(門前成市)를 이룬 남정네들의 풍경이란 구태여 자리를 가릴 것도 없어보였다. 정 비장의 턱끝을 따라 눈을 돌리니 화려한 복색에 눈매에 웃음을 매단 여인들이 보였다. 문득 대장간에서 놀림받던 정 비장 생각이 나서 슬쩍 웃음이 나왔다.





“기녀(妓女)들 말씀이십니까?”



“기녀에도 격이 있다 총군사령께 들었다. 삶의 굴곡이 심하여 고운 손에 미주(美酒)를 빚어 사내를 홀리고, 한껏 꾸민 미색을 팔아 배를 채우는 빈곤하고 비천한 삶이라 손가락질 받아온 이들이지. 허나 늘 서책과 예악을 가까이 하여 행함에 법도와 품격이 있고, 풍류와 호색을 구분치 못하는 설익은 필객(筆客)을 꾸짖으니, 마음은 아껴 주고, 몸은 함부로 팔지 않는 그 절개를 기려 녹죽(綠竹)이요, 오욕과 협잡에도 굴하지 않는 아름다움을 기려 설중매(雪中梅)라 하니, 과연 열 서생 못지 않은 한 기녀 있다 하겠구나. 헌데 저들 중에는 몇이나 될꼬. 그런 계집이 이 땅에 있기나 할 터인가. 밤일을 줄이고 낮에 일찍 깨어 군졸들 밥 짓는 일을 도우라 일렀더니, 밥보다 몸이 더 고플테니 반값에 도와주마는 시덥잖은 농부터 저네들은 다리만 벌려주면 왜적 아래서도 살 수 있다 뻗대는 꼴이 기가 막혀 총군사령과 웃고 말았다.”





말끝에 정 비장은 물그릇을 들어 독주처럼 들이켰다. 전시가 아닌 때에 누이와 맞술(對酌)하기 맞춤할 법 했다. 그러나 누이는 하루 종일 대장간에 머물러 장 보는 일 외에는 바깥에 잘 나오지 아니하였다. 밥 짓는 일 외에는 쓸고 두드리고 어루만지며 쇠를 살피는 일에만 열중했다. 비록 순시 중에 국밥을 놓고 무릎을 맞대 앉았으나 누이를 향한 정 비장의 마음을 모르는 바 아니었다. 불현듯 장난기가 일었다.



“내 누이도 그럴 거라 믿으심은 아니겠지요.”



정 비장이 목구멍 바깥으로 물을 뿜었다.



“그, 그, 그, 그럴 리가 있겠느냐! 친누이를 두고 네 농이 과하다. 하, 하기사 어찌 치마 두른 이들만의 일이겠느냐! 옛 말에 자신을 알아주는 이를 위해 여인은 화장하고, 남자는 목숨을 바친다 들었다. 그처럼 기개 있는 바지저고리가 요즘 뉘 있더냐?”





황급히 말을 돌리는 정 비장의 귀뿌리가 홍시처럼 물들어 있었다. 이런 이인 줄 알았다면 처음 만나던 날 내 책을 빼앗던 왁살스러움도 웃고 넘겼을 것이다. 짖는 개일수록 물지 않고, 거친 이일수록 속은 여린가 보았다. 나는 웃음을 빼물며 그가 가장 좋아할만한 반찬거리를 슬쩍 꺼내었다.





“그 같은 기개를 지닌 이, 예 있지 아니합니까. 제 소견으로 정 비장께서는 제 누이의 좋은 배필이십니다.”



“허, 거참, 농이 과하대도!” 손사래를 젓는 정 비장의 손길이 내심 부드러운 이유가 꼭 취기 때문만은 아닐 것이었다. 나는 미소지었고, 정 비장은 다시 물그릇으로 상기된 얼굴을 가렸고, 기녀들은 그런 정 비장을 핼끔거리며 킬킬거렸다. 비록 이립을 진작에 넘겼으나, 강건하고 훤칠한 모색의 정 비장이 이제껏 숫총각이라는 사실이 꼭 대장간에만 머물러 있으란 법은 없을 터였다. 못과 망치가 가득한 대장간 사이를 바람처럼 빠져나간 말(言)은 역시 말(馬)처럼 빠르고 사나워 그 끝을 잡아채기도 전에 사방에 퍼져 있기 마련이었다.





그 때 술기운에 젖은 한 기녀의 목소리가 들렸다. 제 딴에는 소리 죽여 속살댔겠지만 내 귀에는 동굴 속 울림이었다.



“저봐라, 저봐. 정 비장 오늘도 저 꼬마 데불고 유유자적이네. 참으로 멀쩡한 허우대 타고나 사내 놈이 그리도 좋다더냐? 얼굴 뻘개진 것 좀 보거라. 기막혀서.”



“저 꼬마 생김이 그리 알흠둥이(美童)도 아닌데 묘하구려. 원앙금침 위에서 요분질 떠는 재주가 좋은갑소. 언니, 가서 좀 배워오우. 천하의 정 비장 녹인 년으로 이름나면 장사도 잘 되잖겠소.”



“치워라, 이 년아, 가서 소금이나 좀 가져오니라. 저것들이 어디 할 짓이 없어서 남의 자리 동티나게 저 지랄들이야. 가서 무릎을 맞대고 밥을 처먹든, 달구새끼처럼 궁둥짝에 자지를 비벼넣든 안 보이는데서 하라고 해!”



“아이고, 언니, 소리 좀 낮촤요. 듣겠소!”



“……이미 들었습니다.”



“응? 뭘 들었다는 게냐?”



“아, 아닙니다. 잠시 딴 생각을 하느라. 일어나시지요, 이 곳에 오래 있으면 행여나 걱정 들을까 걱정입니다.”



“응? 아, 아, 그래. 네 말이 묘하구나. 걱정 들을까 걱정이라.”





다소 아쉬운 듯 일어나면서 정 비장은 상 위에 구리돈 몇 푼을 올려놓았다. 술이 작게는 싸우고 일하는 이들의 기운을 북돋아주고, 크게는 민생을 돕는 일이라 여겨 아직까지는 금주령(禁酒令)의 시행이 엄정하지 아니하였다. 그러나 정 비장이 행여나 술 마신 태를 보이면 아버지는 창칼처럼 날카롭게 대하였다. 총군사령이기 때문이 아니라 아버지였기 때문이었다. 일군(一軍)의 장으로서 스스로 참는 술을 즐기는 이들을 차마 부러워할 수 없어 잉걸처럼 태우는 속을 과연 정 비장은 모를 터였다. 행여나 주향(酒香)이라도 맡고자 술도가에서 끼니를 때우는 그 속 또한 능히 짐작이 갔다. 그러나 그보다도 지금은 말(言)을 붙잡을 무거운 족쇄가 더 급했다. 대장장이들이 남는 때에 남는 힘으로 그 놈의 소문 끝에 못질이라도 한 번 야무지게 해주었으면 싶었다.





주막 삽짝을 나서는 우리 앞에 황급히 달려온 전령 역시 우리 둘을 슬쩍 훑어보며 알 듯 모를 듯한 미소를 지은 뒤에야 비로소 허리를 꺾었다.



“비장 나으리, 예 계셨습니까? 총군사령께서 급히 찾으십니다.”



홍시 같던 정 비장의 얼굴이 장독처럼 변했다. “무, 무, 무슨 일이시라더냐?”



“왜구의 함선을 목도한 이가 있습니다. 서둘러 뫼시라는 총군사령의 명이올시다.”



장독 같던 정 비장의 얼굴은 순식간에 바윗돌처럼 굳었다. 내딛는 발걸음에 술기운을 뿜어내며 돌풍처럼 달렸다. 다리가 불편한 나는 도저히 그 뒤를 따를 수가 없었다. 전령이 자신의 조랑말을 내어주었다. 성 안을 돌아다닐 때 쓰는 전령용 노마(老馬)였다. 순하게 늙은 짐승의 눈이 맑았다. “전령께서는 어쩌려고 이러시오.” “다 모이시고 정 비장 나리만 남았기로 온 것입니다. 저는 뛰어서 돌아가도 됩니다.” 말을 마친 채 황급히 뛰어가는 전령의 다리는 행여나 남색가에게 잡힐까 두려워 달아나는 모습처럼 보였다. 바람에 실려 부푼 말과 글(風聞)이란 그렇게 무서운가 보았다.










*           *          *







맷돌 같은 삶을 지고 온 여인의 몸은 맷돌처럼 뭉뚝하고 무심했다. 오로지 날 때부터 품어온 듯한 짜증과 피로만이 얼굴에 몰려 이목구비를 어지럽혔다. 여자란 마늘이네, 불길이네 말하던 아버지와 대장장이가 떠올랐다. 중년의 여인은 끊임없이 갈면서 스스로 갈리는 맷돌이었다. 물론 모색은 변함이 없었으나 이 자리에 선 아버지는 아버지가 아닌 총군사령이었다. 그 앞에 선 울돌 어멈은 작게 졸아들어 있었다. 사투리의 억양이 배어나오는 말끝을 억지로 눌러 잠재웠다. 일생을 눌려 사는 그 모습이 가련하고 답답했다.





“아낙의 이름이 무엇이오.”



높은 이에게 존대를 받아 황송한 듯 그녀가 얼른 고개를 수그렸다.



“쇠, 쇤네는 울돌 어멈이라 부, 부, 불리고 있습니다요.”



“죄를 묻고자 함이 아니니 떨지 마오. 그래, 언제 어디서 왜구의 배를 보았소?”



“쇤네는… 오, 오래전에 애 아비가 뒤지… 아, 아니, 아이의 부친, 부친을 여의고… 고, 고기를 덖어 말리…….”



정 비장이 호령했다.



“이보게, 울돌 어멈! 총군사령께서 왜구의 함선을 언제 어디서 보았는가 묻지 않으셨는가! 군말은 빼시게!”



아버지가 이맛살을 찌푸리며 정 비장을 쳐다보았다. “정 비장, 그 기운 아꼈다 적을 내쫓는데에나 쓰시게.” 정 비장은 단번에 입을 다물며 뒤로 물러났고, 아버지는 다시 잔잔하게 웃으며 손을 저었다. “괜찮소. 계속하오.”





“아, 아시다시피, 고기를 덖어 말리려면, 예, 예, 고기가, 좋은 고기가 필요합지요. 나으리들 쓰시는 말로 새, 새… 생선(生鮮)! 아, 예 그렇습죠. 생선이라고도 하고, 어물(魚物)이라고도 하는 것들 말입니다요.”



“알고 있소. 좋아하기도 하고.”



울돌 어멈의 얼굴에 아주 잠깐 빛이 스쳤다. “오메, 그러시구만요, 나으리이. 허면 바쁘시지 아니할 쩍으 꼭 쇤네에게 한번 들러주시랑게요. 요즘 제철인 괴기가 아주 기양 땡볕에 꾸덕꾸덕하게 잘 말라가꼬잉…….”





아버지가 잠깐 기침을 했다.



“왜구를 물리친다면 이 촌부(村夫)도 더 이상 바쁠 일이 없을게고 허면 다시 자녀들과 함께 살던 산으로 돌아갈 터요. 그 곳에서는 바다의 것들이 귀하니 그 때 울돌 어멈의 어물을 꼭 챙기리다. 그러니 울돌 어멈이 이 촌부에게 물건을 팔기 위해서라도 왜구 얘기를 좀 해주셔야겠소.”



“아, 예, 예, 그러문입죠. 아무렴, 바쁘신 분인데요. 이 쇤네가 그만 너갱이(넋)가 빠져서…… . 예, 그러니까 바다에 걸어둔 그물을 잠깐 보러 갔었더랬습니다. 애 아비가 살아 생전에는 그래도 제법 배를 타서 고기를 그물로 던져 잡아주곤 했었는데, 이 년 홀로 그처럼 일할 수가 있어야지요. 그래서 목 좋은 곳에 그물을 감쳐두고 걸리는 잔고기들이나 잡곤 한답니다요. 아, 지금 금방도 저녁 찬거리나 준비할까 싶어서 가보았는데, 아 글쎄, 글쎄…….”



“함선의 숫자가 얼마나 되었소?”



“이 년이 이 곳에 지내면서 배를 꽤 자주 봤습지요만은, 왜놈들의 배는 놈들 닮아 그리 크지 않어요. 그런 개미떼 같은 것들이 꽤나 많이 바위 위에 버글버글 묶이고 붙어서 아이고, 꼭 따개비 같이 보였습니다요.”



“따개비처럼 많았다?”





아버지는 이맛살을 찌푸렸다. 군략(軍略)에 어두운 내 귀에도 무겁게 내려앉는 말이었다. 비록 바닷일에 잔뼈가 굵었다 하나 중년의 촌부(村婦)가 찬거리를 마련하러 왕복할 정도의 길이었다. 저들이 그토록 잔혹한 수적(水賊)들이라면 그 같은 거리는 마병(馬兵)처럼 줄일 수 있을 터였다. 하물며 왜구는 언제쯤 정박하여 지금쯤 어디를 헤매며 무슨 속셈을 차려두는 꿍꿍이인지 우리 중 아무도 아는 이가 없었다.





그러나 뒤이어 나온 아버지의 말꼬리는 차분했다.



“알았소. 울돌 어멈 덕택에 군졸들과 백성들이 다치거나 죽는 일이 적을 것이오. 노고에 감사드리오. 뉘가 울돌 어멈을 댁까지 좀 뫼시게.”





나에게 조랑말을 넘겨주었던 군졸이 울돌 어멈을 데리고 사라지자마자 군관들은 아버지 곁으로 바싹 다가왔다. 횃불 아래서 아버지의 주름살이 유독 깊었다.





“정 비장, 이제껏 출몰한 왜구의 숫자가 얼마나 되었는가?”



“적게는 삼사십, 많게는 기백 명으로 어선들을 부수어 가라앉히고 어물을 탈취하는 일을 주로 하였으나 오륙백 넘어 모여 성 앞에서 짧게나마 소란을 부린 적이 두어 번 있습니다.”



“그런가.” 잠시 눈을 감으며 생각에 잠기던 아버지가 결심한 듯 좌중을 둘러보았다.



“좌중의 의견을 듣고자 하오. 이 늙은이보다 더 왜구와 접전하신 경험들이 있을 터인즉. 지금껏 이런 일을 겪은 적이 있었소?”





밤의 침묵이 매섭게 목구멍 안으로 차올랐다. 모두들 눈알만 데룩거릴 뿐 대답이 나오는 이가 없었다. 아버지는 길고 긴 한숨을 몇 호흡에 나누어 끊어 뱉으며 조금씩 갉아먹힌 달의 테두리에 시선을 둔 채 앉아 있었다. 아버지가 뱉은 한숨이 더운 달빛과 서로 엉기어 서너 번쯤 휘돌았을 때, 비로소 늙은 군관 하나가 떠밀리듯 입을 열었다.





“이 늙은 것은 호패(號牌)가 허리춤에 걸린 지금꺼정 병영 쌀을 축낸 하잘것 없는 이올습니다만……. 진갑(進甲)이 얼마 남지 않은 지금에도 왜구가 달음질쳐 오지 아니하고 어디론가 감쪽같이 사라져 버린 일은 금시초문이올시다.”



“허면 우리를 꾀는 것이군.”



좌중의 분위기가 포말처럼 잠깐 퉁겨올랐다가 가라앉았다.



“어데로 꾄단…… 말씀이십니까?”



“어데긴 어데겠는가. 성 바깥이겠지. 바닷굴보다 작은 올뱅이(다슬기)도 껍질을 깨야 먹을 수 있는 법.”



아버지의 말을 듣던 정 비장은 잠시 침묵하다가 입을 열었다.



“금시로 꿰뚫어볼 기만(欺瞞)입니다만, 한낱 왜구 따위가 쓸만한 전술이 아닙니다. 대체 그들이 무엇을 노리는지 모를 일입니다.”



“계속 일러두는 말이네만, 우리의 태세는 나아가 무찌름이 아니라, 두텁게 머물러 지키는 것. 따라서 왜구들이 바라는대로 굳이 나가줄 건 없네. 허나 수색조차 아니할 수는 없겠지.”



마침내 자리에서 몸을 일으킨 아버지의 군명(軍命)은 여름밤을 가르는 빗방울 같았다.





“한 아낙의 눈만 믿고 방비할 수 있겠는가. 그 동안 소란에 그쳤으니 앞으로도 소란만 할 것이다 장담할 수 있겠는가. 정 비장은 나와 함께 총무(總務)를 맡고, 각 군관들께서는 맡은 병영에 돌아가 빠르고 날래며 가급적 왜구와 접전한 경험이 있는 자들을 추려 열 명 단위로 별동대(別動隊)를 꾸리시오. 손에 익은 병기를 가져감이 좋으나 필사의 접전에는 때가 있은즉 지급한 창과 방패, 갑주를 빠뜨리지 않도록 살피시고, 군량은 따로 준비하지 않되 허리에 맨 쌀주머니는 만약을 대비하여 챙기라 이르시오. 준비가 빠른 이들부터 휴식을 취하게 하고 날이 밝는대로 주위를 살피도록 순번대로 나아가게 하시오.”





정 비장을 비롯한 높고 낮은 군관들이 일제히 복명하는 소리가 천둥처럼 맑았다. 공기가 팽팽하게 당겨지고, 밤달이 줄달음치는 소리가 들렸다. 전쟁의 숨결이 짐승처럼 낮고 사납게 가르랑거리며 악취를 뿜고 있었다.














술도가와 색주가는 밤이 되어야 잠에서 깨지만, 대장간은 낮밤에 상관없이 늘상 깨어 있었다. 불기운에 가득한 열기는 사시사철 낮밤을 혼미하게 만들었다. 전쟁이 가까워짐을 직감한 늙은 대장장이들은 스스로 나서서 번을 짜 교대하며 풀무 앞을 지켰다. 근골을 태우는 노동 앞에 늙은이와 젊은이는 구분되지 않았다. 나이 많은 이는 나이대로 경험을 살렸고, 나이 적은 이는 적은대로 뚝심을 부렸다. 먹는 양도 다르지 아니하여 밤낮없이 밥을 짓고 국을 끓이고 사이사이 씹을거리들을 대는 아낙들이야말로 허리가 휠 지경이었다. 누이는 눈치껏 일을 도왔고, 그래도 시간이 남으면 여전히 쇠와 벗하며 그 울림을 살폈다. 대장장이들에게 나눠주고 남은 사탕수수 꼬리께를 씹던 누이는 시무룩한 얼굴로 징을 두드리고 있었다. 묵직하고 육중한 망치질에 섞여든 징 소리는 경망스럽게 내달려 귀에 거슬렸다. 그러나 나를 본 누이의 눈이 휘둥그레 커지며 재빨리 나를 향해 한달음에 달려왔다.



- 이 늦은 때에 어인 일이니? 설마, 벌써?



“아니, 그런 건 아니야.”





좀처럼 잠이 찾아올 기미가 없어 눈이 빨갛게 달아올라 있을 터였다. 가뜩이나 어둠 속에서 시선 둘 곳을 찾지 못해 어지러운 누이의 눈길이 사방팔방으로 튀었다. 누이는 목울대에 얹지 않은 손을 뻗어 내 양 손을 한꺼번에 쓸어 쥐었다. 천 마디 말보다도 더 강한 힘이었고, 따스한 온기에 나도 모르게 자리를 찾아 털썩 엉덩이를 주저앉혔다.





“조만간 싸움이 벌어질 것 같아.”



- ……너도, 나가야 하니?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자 누이는 턱끝을 쳐올리며 내 손을 두어 번 흔들었다. 목울대에 얹은 손이 목젖을 찌를 듯이 강하게 파고들었다. 미처 말을 통하지 못했을 때, 강한 격정을 드러내는 누이의 방법이었다.





- 아버지께서? 너도 나가라셔?





“응. 이런 때를 위해서 말과 글을 가르치셨다고. 인간이 축생(畜生)에 비해 나을 것이 없으며, 얼마나 덧없이 서로를 할퀴고 물어뜯고 피와 살점으로 서로의 보잘 것없는 삶을 덮어가리려는지, 내 눈으로 직접 보고 기록하라셔.”





그 것이 말과 글을 배운 이의 숙명이니라. 악기를 두드리는 일에 골몰해있던 누이의 등을 함께 바라보며 아버지는 지나가듯 내게 말했었다. 폭포처럼 하늘에서 쏟아진 달빛이 호수처럼 질펀하게 고여 있던, 고향 산자락, 어미뫼의 오두막에서 더할 나위 없이 안온했던 그 때를 떠올리는 순간 등골에서 싸늘한 소름이 밀려 올려왔다. 대수롭지 않게 살았던 그 때가 불과 몇 달 전임에도 하염없이 멀고 어리석었던 때처럼 느껴졌다. 전쟁의 숨결이 곳곳에서 악취를 뿌리는 바로 이 순간에도 공포와 흥분에 스스로 잠을 쫓는 나 같은 문약한 서생이 보고 듣고 쓰고 옮기며 살아야할 삶이란 결국 그 글줄에 오른 다른 이들의 명줄과 서로 뒤엉켜, 범속한 내가 홀로 감당해내지 못할 터였다. 울돌 어멈이 맷돌 같은 삶에 갈려 강팍하고 꺼칠하게 늙어가듯이 나 역시 붓과 벼루 사이에 갈려 그렇게 내 스스로를 소진하다 어느덧 달팍 쓰러져 죽어버리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무시로 치받았다. 도저히 잠을 부를 수 없는 밤들이었다.





- 한율아. 한율아. 한율아.





한참 만에 생각을 헤치고 나오니, 누이가 걱정스러운 눈길로 내 손등을 두드리며 또박또박 입술을 움직이고 있었다. 밤이슬에 물큰하게 젖어가는 누이의 입술 안에서 향내가 났다.전쟁의 숨결이 거칠게 밀려와 누이의 가녈한 미색조차 쓸어갈 버릴 생각을 하니 끔찍스러웠다. 새삼 정 비장 생각이 들었다. 퉁방울만한 눈, 거친 수염, 두껍고 탄탄한 어깨와 손등, 그 거북살스럽도록 커다란 몸집.





“잠깐 무슨 생각 좀 하느라고. 별 일 없을거야. 정 비장께서도 여지껏 이 곳에 계셨지만 고작해야 백 명도 안되는 왜구들이 시끄럽게만 굴다 말았대.”





아버지에게 말과 글을 배웠다는 소리를 할 수 없을 정도로 궁색하기 짝이 없는 변명에도, 그러나 누이는 누이 덕을 하느라 무겁게 웃어주었다.





- 그렇다면 다행이다. 허나 이 곳의 모든 울림이 점점 급박하게 치받는구나. 내 어두운 눈에도 쉼없이 기운을 쓰는 불이 보이고, 서로 부딪히고 휘어지고 깨져가며 모양을 만들어내는 쇠가 보인다. 불과 쇠가 만나면서 어찌나 어지럽고 복잡한 울림을 쏟는지, 그 울림을 저들이 샅샅이 긁어모아 저 흉물스러운 물건 안에 줄줄이 짜내더구나. 저걸 보고 있노라면 영 심란하여 큰일이 나도 날 것 같으다.





누이가 말하는 흉물스러운 물건이란 다름아닌 병장기들이었다. 고관대작들을 을러메고 구슬려서 추렴한 온갖 금전들과 패물들은 모조리 전쟁에 필요한 물건들로 바뀌었다. 덥고 끈적한 여름밤바람에도 꼿꼿이 고개를 쳐들고 성내고 있는 창칼이 초승달처럼 사방에서 번쩍였다. 누이의 어두운 눈길에도 그 살벌한 빛은 견디기 어려운 모양이었다.





- 저 써늘한 날붙이들을 보고 있노라면 참 우리가 살았던 고향이 얼마나 평안하고 알흠다운 곳이었던가를 생각하지 아니할 수가 없구나. 이 곳의 대장장이들은 악기 따위 관심이 없어. 저 흉칙한 병장기들을 벼리고 남은 찌꺼기로 시간 때우듯 대충대충 주물러 버리더구나. 조금만 불의 울림을 줄여주고, 조금만 쇠의 울림을 살펴주면 좀 더 음색이 맑은 악기들을 만들어낼 수 있을텐데. 사람 목숨을 베고 찌르고 부수는 도구에 평생을 걸면서, 그 마음을 살피는 도구에는 어찌 저리 인색한지. 큰 곳의 사람들은 이런 것일까. 사람과 사람만이 모여 사는 세상에는 이렇게 쇠보다도 차갑고 비린내나는 마음만이 모여 넘치게 되는 것일까.





아버지가 가르쳐준 말과 글에도, 누이가 던진 물음에 대한 답은 없었다. 서글프게 웃을 도리밖에, 다른 수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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