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밀번호를 잊어버리셨나요?

게시물의 무단 전재, 복사, 배포를 금합니다.

괴이학회 비상구 by 김선민

2019.12.01 00:0112.01

[특집] 괴이한 거울

비상구

김선민

비상구 문이 열리지 않았다. 문을 닫는 순간 안에서 잠겨 버렸다. 호텔 방이 24층인데 실수로 25층에 내려 비상구 계단으로 내려가겠다고 생각했던 순간 모든 것이 꼬여버렸다. 엘리베이터 문에 붙어 있던 빨간 글씨로 적힌 쪽지 때문에 실수로 25층을 누른 탓이었다.

내가 내린 곳이 25층임을 깨달았을 때 이미 엘리베이터는 다른 층으로 올라가 버린 상황이었다. 고민을 하다가 엘리베이터를 기다리기 귀찮아서 비상구로 내려가기로 했다. 일부러 숨겨놓은 돗 찾기 힘든 곳에 위치한 비상구는 두터운 이중 문으로 막혀 있었다.

순간 다시 엘리베이터를 잡아서 갈까 고민했다가 어차피 한 층 밖에 되지 않으니 빨리 내려가는 게 낫다고 생각했다. 문을 열고 비상구 계단 쪽으로 나가니 천장에 붙어 있는 희미한 불이 깜박깜박 거렸다. 계단 아래는 불이 켜져 있지 않아 발 아래 계단이 잘 보이지 않았다.

‘망할……. 무슨 비상구가 이래. 비상시에 탈출하다가 미끄러져 죽겠네.’

속으로 궁시렁거리면서 24층 쪽으로 내려갔다. 어두워서 벽을 잡고 더듬더듬 발을 내딛었다. 겨우 한 층 뿐인 거리가 길게 느껴졌다. 24층이 표기된 문 앞에 서서 문을 잡아당겼다. 그런데 뭔가가 잘 못됐다.

“뭐야? 왜 안 열려.”

아무리 문을 잡아 당겨도 비상구 문이 열리지 않았다. 호텔 카드키를 옆에 대봐도 문은 요지부동이었다. 두터운 철문을 바라보며 나는 망연자실한 표정을 지었다. 다시 25층으로 올라가서 똑같이 문을 잡아당겨 보았다. 똑같았다. 문은 열리지 않았다. 안쪽에서 자동으로 잠긴 것이다. 천장의 전등만 계속 깜박이고 있었다.

“젠장 어쩌나.”

출장을 혼자서 오는 바람에 문을 열어달라고 딱히 부탁할 사람도 없었다. 호텔에 전화해서 중국어로 이 상황을 설명할 자신도 없었다. 어쩔 수 없이 이대로 1층까지 내려야 할 듯 싶었다. 25층에서 1층으로 내려가야 한다니 벌써 짜증이 밀려왔다. 애초에 엘리베이터만 제대로 찍었어도 이런 일이 없었을 텐데 한 순간의 실수로 이 사단을 낸 내 손가락이 원망스러웠다.

어쨌든 호텔 방에 들어가기는 해야 하니 나는 다시 계단 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비상구 쪽 전등의 불은 너무 약했고, 심지어 중간중간 네온사인으로 층을 표시해놓아서 파란 빛이 일렁여 더욱 괴기스러웠다. 평생 처음 와본 중국에서 이런 일이 벌어지니 더욱 당혹스러웠다. 본인은 중국어도 못하는데다가 여기에서는 영어도 제대로 통하지 않았다.

‘중국 출장 괜히 온다고 했네.’

굳이 오지 않아도 될 출장이었지만 어떻게든 집에서 나가려는 핑계를 만들려다보니 이런 상황까지 오게 됐다. 집에 있으면 애들이 울어재끼고, 마누라는 잔소리를 해대는 통에 십분이라도 편하게 쉴 수가 없었다. 출장 자체는 귀찮았지만 호텔에서 좀 느긋하게 있을 수 있겠지 하는 생각에 덜컥 자원해 버렸다.

하지만 정작 중국에 오니 생각만큼은 여유롭지 못했다. 뭔가 업체와 소통이 잘 못 됐는지 본래 거래처 쪽에서 준비해두겠다고 한 동시 통역사가 오지 않아 어설픈 영어와 번역기를 동원해 미팅을 진행해야 했다. 중국어라고는 한 마디도 못하니 통역기가 제대로 말을 번역하고 있는지를 확인조차 하지 못했다. 가끔 거래처 쪽에서 이해가 안 간다는 표정을 짓고 나를 빤히 바라보았다. 그 텅 빈 눈동자가 꽂히면 위축되서 더욱 긴장하고 당황했다.

“후우…….”

층수가 꽤 되니 내려가는 것도 쉽지 않았다. 겨우 절반인 15층까지 왔을 때였다. 밑에서 누군가가 올라오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혹시 건물을 청소하는 사람인가 싶어서 재빨리 소리가 나는 쪽으로 내려갔다. 카드키로 문을 열고 다시 엘리베이터를 타면 금세 안락한 방으로 돌아갈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저기요!”

혹시라도 먼저 문을 열고 들어갈까봐 급하게 한국말로 사람을 불렀다. 그런데 별다른 대답이 없었다. 발소리가 나는 곳을 향해 아래로 뛰어 내려갔다. 불빛이 어두워 발을 잘 못 딛을 까봐 난간을 잡구 두 칸, 세 칸 씩 휙휙 뛰어 내려갔다.

‘어디 있는 거지?’

내려가는 발소리는 들리는데 아무리 둘러봐도 사람은 보이지 않았다. 이상해서 내려가는 걸 멈추고 귀를 기울였다. 쿵쿵쿵 소리가 들렸다. 나는 위를 올려다보았다.

‘내려가는 소리가 아니라 올라가는 소리였나?’

여기서 열 개 층만 더 내려가면 일층이었다. 호텔 로비로 통하는 문은 열려 있을 테니 그쪽으로 나갈 수 있을 터였다. 그때 머릿속에 다른 걱정이 스며들었다.

‘만약 일층 문도 열려있지 않다면?’

그렇게 생각이 미치자 끔찍했다. 문이 열리지 않는 비상구 안에서 다른 누군가가 문을 열어줄 때까지 기다리거나 열려 있는 다른 층 문을 하나하나 확인해야 했다. 25층에서 내려오는 것도 지치고 힘들었는데 이 길을 다시 걸어 올라가야 한다고 생각하니 더욱 피로감이 몰려들었다.

“젠장…….”

나는 고개를 들어 발걸음 소리가 나는 쪽으로 몸을 움직였다. 아까와 달리 이번에는 위로 올라갔다. 계단의 높이가 꽤 높아 한 층을 오르는데도 몸에 힘이 들어갔다.

“후우……. 후우…….”

평소에 운동을 안 한 탓인지 숨이 가쁘게 차올랐다. 나는 비상구 계단을 오르며 귀를 기울였다. 쿵, 쿵, 쿵 소리는 계속 울려 퍼졌다. 그런데 여전히 사람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이봐요! 저기요!”

비록 한국말이지만 적어도 자신을 부르는 소리임은 알 수 있을 텐데도 위에 있는 사람은 걸음을 멈출 줄을 몰랐다. 어느새 나는 오기가 생겼다. 어떻게든 저 사람을 찾아서 카드 문을 찍고 호텔방으로 돌아가려고 마음을 먹었다.

“후욱……. 후욱…….”

거친 숨을 잔뜩 내뱉었다. 등 뒤에는 어느새 땀이 가득 찼다. 빨리 방으로 돌아가서 샤워하고 침대에 눕고 싶었다. 오늘 미팅도, 관광도 뭐 하나 제대로 풀린 것이 없었기에 피로감이 배로 덮쳤다. 그때였다. 갑자기 위에서 들리던 발걸음 소리가 뚝 하고 멈추었다. 다시 16층 정도까지 올라온 나는 짜증이 치솟았다.

“뭐야? 설마 그냥 문 열고 들어간 건가?”

이쯤 되니 누군가가 나를 가지고 노는 것 같다는 생각조차 들었다. 요즘 중국에서 한국인에 대한 감정이 별로 좋지 않다고 하더니 이런 식으로 사람을 가지고 노나 하는 반발심이 머리 끝까지 차올랐다.

“이 새끼들이…….”

이를 박박 갈고 있을 때였다. 계단 밑에서 뭔가가 어른거렸다. 나는 고개를 내밀어 그 밑을 살폈다. 사람 형체처럼 보이는 그림자가 일렁였다. 나는 짜증이 섞인 목소리로 외쳤다.

“이 보쇼! 사람가지고 장난치는 것도 아니고! 뭐요!”

소리를 치며 나는 다시 계단 밑으로 내려갔다. 이번만큼은 반드시 저 사람을 붙잡아서 비상구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가려 했다. 쿵쿵쿵 소리를 내며 밑으로 내려갔는데 이상하게도 또 아무도 그 곳에 없었다. 이쯤 되니 다시 이상한 감정에 젖어들었다.

‘뭐야 이거……. 내가 뭐에 홀렸나?’

나는 내 뺨을 찰싹찰싹 쳤다. 오늘 일이 너무 안 풀려서 피곤해서 그런가 보다 싶었다. 불빛에 잘 못 비친 그림자를 보고 사람이라 착각하는 일은 종종 있다. 나는 호흡을 가다듬고 다시 일층으로 내려가려 했다.

“휴우……. 내가 다시는 중국 오나 봐라.”

사실 중국자체가 잘못한 건 없었지만 나는 어디로든 이 짜증과 분노를 내몰고 싶었다. 일층을 향해서 내려갈 때 쯤이었다. 다시 아래에서 뭔가가 올라오는 것이 느껴졌다. 나는 그걸 보고 고개를 내저었다.

‘또 헛것이 보이는 건가.’

무시하고 그냥 갈 길을 가려고 했다. 그런데 이번에는 아까와 뭔가가 달랐다. 쿵쿵쿵 올라오는 소리 뿐만이 아니었다. 날카로운 뭔가가 벽을 긁는 소리가 같이 들렸다.

크드드드드득!

뭔지는 모르겠지만 순간 온 몸이 싸늘하게 식었다. 나는 내려가는 발걸음을 멈추고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분명히 그것은 내가 있는 쪽으로 올라오고 있었다. 나는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고 갈팡질팡했다.

‘제, 젠장……. 뭐야 이거.’

나도 모르게 뒷걸음질을 쳤다. 벽을 긁는 소리가 신경을 거슬렀다. 뭐가 벽을 긁고 있는 건지 머릿속에서 온갖 상상이 다 일어났다. 플라스틱 쓰레기통 모서리가 긁히는 것일 수도 있고, 빗자루 끝이 쓸리는 것일 수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 머릿속에는 자꾸 날카로운 칼이 떠올랐다.

상상력은 사람을 겁먹게 만든다. 나도 모르게 어느새 세차게 계단 위로 뛰어 올라가고 있었다. 숨이 턱까지 차올랐지만 내 다리는 멈추지 않았다. 머릿속에 아무 생각도 나지 않았다. 이곳에서 칼에 찔리면 과연 누가 나를 발견해 줄 수 있을까. 피가 흥건하게 계단을 적셔도 나는 도움을 요청할 방법이 없었다. 이 차가운 비상구 계단에서 차갑게 죽어가는 수밖에 없었다.

“씨발, 씨발……. 씨발…….”

욕을 지껄이며 층을 올라갈 때마다 문을 열어보았다. 두터운 철문은 도저히 열릴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밑에서는 카드드득 소리가 울리며 다가왔다. 얼굴이 땀 범벅이 되어 문을 잡아당기고 다시 오르기를 반복했다.

“후우……. 후우…….”

그때였다. 한 곳의 문이 철컥 소리를 내며 열렸다. 나는 재빨리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그리고는 숨을 몰아쉬었다. 눈앞에 다른 철문이 보였다. 떨리는 손으로 문을 열었다. 다행히 문이 열렸다.

“하아……. 하아…….”

숨을 급하게 몰아쉬고 호텔 복도를 둘러보았다. 급하게 들어오느라 이곳이 몇 층인지 확인도 못했다. 호텔 방문에 붙어 있는 숫자를 확인하려 했다. 그런데 방문에 숫자들이 하나도 붙어 있지 않았다. 방문에는 알 수 없는 중국어가 빨간 글씨로 적힌 쪽지가 똑같이 붙어 있었다. 아까 엘리베이터에서 봤던 그 쪽지와 같았다.

“아까부터 뭐야 이거.”

나는 방문에 붙어 있는 쪽지를 하나 떼서 살펴봤다. 학창 시절 한자를 배우기는 했지만 간자체는 일반 한문과 달랐다. 아무리 들여다봐도 무슨 글자인지 의미를 알 수 없었다. 나는 쪽지를 구겨서 주머니에 넣고 복도 주변을 둘러봤다.

구조는 내가 있던 24층과 똑같았는데 인기척이라고는 느껴지지가 않았다. 나는 이마의 식은 땀을 닦고 다시 엘리베이터를 찾았다. 여기가 몇 층이든 일단 내 방으로 들어가면 오늘 있었던 일을 잊고 푹 잠들 수 있을 것 같았다. 미로처럼 얽혀 있는 복도를 지나 엘리베이터가 있는 곳을 찾으려 했다.

“젠장……. 엘리베이터, 엘리베이터 어딨어.”

분명 24층에서는 금방 찾았던 엘리베이터가 이곳에서는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나는 점차 초조해졌다. 그때였다. 복도 코너 뒤에서 뭔가가 다가오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긴장하며 복도 벽에 붙었다.

이이이잉.

나타난 것은 호텔 복도를 청소하는 로봇이었다. 거대한 휴지통처럼 생긴 로봇은 호텔 곳곳을 돌아다니며 쓰레기를 주웠다. 나는 움직이는 로봇 청소기를 보고 안도를 했다. 뭔가 다시 낯설지 않은 일상으로 돌아왔다는 느낌을 받았다.

로봇은 복도를 따라서 움직이다가 갑자기 방향을 틀어 내 쪽으로 다가왔다. 내가 읽을 수 없는 중국어가 로봇 상단부에 떠올랐다. 아까 쪽지에 적혀 있던 그 글자랑 비슷했다. 인지하지 못하는 글자가 계속 보이니 왠지 모르게 소름 끼쳤다. 나는 로봇 청소기를 무시하고 내 방을 찾으려 했다. 그런데 로봇은 자꾸 나를 따라 붙었다.

“저리가라. 저리 가라고!”

로봇을 피해 움직이려 해도 로봇은 끈질기게 나를 따라붙었다. 아까 나를 쫓던 발소리처럼 떨어뜨리려고 해도 떨어지지가 않았다. 짜증이 확 난 나는 발로 로봇을 뻥 차버렸다. 로봇이 뒤로 벌러덩 넘어졌다.

“로봇 청소기 주제 짜증나게 굴고 있어.”

혹시라도 호텔 측에서 변상을 요구할까봐 나는 급하게 자리를 피했다. 그런데 코너를 도니 그 앞에 똑같은 로봇 청소기가 나타난 것이었다. 나는 뒤를 돌아서 아까 내가 넘어뜨린 로봇청소기를 보았다. 복도가 워낙 복잡하게 꼬여있어서 내가 아까 있던 복도가 어디인지 헷갈렸다. 이 로봇이 아까 그 로봇인 건지도 알 수 없었다. 아까 그 놈처럼 이 로봇도 나에게 다가와서 역시나 내가 알지도 못하는 글자를 화면에 띄웠다.

“젠장! 저리 꺼지라고!”

로봇을 다시 발로 차버리고 나는 급하게 복도를 뛰어갔다. 아무리 찾아도 엘리베이터는 보이지 않았다. 그러던 중 내 눈에 다시 비상구 문이 보였다. 침을 꿀꺽 삼키고 몸을 돌렸다. 하지만 복도를 빙빙 돌며 지나갈 때 마다 비상구 문이 나타났다. 나는 갈등했다. 어쨌든 비상구를 통해 1층으로만 내려가면 로비가 나타날 것이고, 그럼 다시 안전하게 24층인 내 방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

나는 슬며시 비상구로 가서 첫 번째 문을 열고, 다시 두 번째 문을 열어보았다. 아까 보았던 비상구 풍경 그대로였다. 귀를 기울여 보았다. 이상한 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후우…….”

침을 꿀꺽 삼키고 이번에는 무슨 일이 있어도 반드시 1층으로 내려간다고 마음을 먹었다. 나는 문을 닫고 다시 비상구 쪽으로 나왔다. 밑을 보니 전등이 다시 깜박 거렸다. 몸의 땀이 싸늘하게 식는 기분이었다.

“이게 뭔 일이냐 젠장.”

너무 지쳐서 나는 잠시 계단에 걸터앉아 숨을 골랐다. 삼십팔년 인생동안 이런 경험은 겪어 본적이 없었다. 평범하게 중학교, 고등학교, 대학교를 나와서 무난하게 살아왔다. 소개팅으로 지금의 아내를 만났고, 5년 전에 결혼해서 두 살 터울의 아이를 가졌다. 아내는 육아 때문에 일을 그만두었고, 나는 힘겹게 외벌이를 하며 사는 소시민이었다. 살면서 누군가와 싸워본 적도 없고, 원한을 사 본적도 없었다.

“망할, 도대체 왜 나한테 이런 일이 왜 생긴 거냐고.”

아무리 생각하고 또 생각해봐도 이유를 알 수 없었다. 평소에 나는 법 없이도 살 사람이라 자부했다. 누군가가 나에게 원한을 가졌다면 그건 그 사람 잘 못이지 내 잘 못 일리가 없다. 회사에서도 다른 직원들과 트러블 나지 않도록 얼마나 조심해서 말하는지 모른다. 특히 여직원들하고는 단 둘이서는 밥도 먹지 않았다. 괜한 구설수가 싫어서였다. 가만히 앉아 있으니 온갖 상념들이 떠올랐다. 비상구에 갇혀서 길을 못 찾으니 초조해져서 망상증이 생기는 듯 싶었다. 1층의 로비에만 도착하면 모든 일이 전부 원래대로 돌아 올 것이라 생각했다.

나는 벽에 붙어 있는 숫자를 보고 여기가 몇 층인지 가늠하려 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벽에 붙어 있던 네온사인 숫자들이 보이지 않았다.

‘아까까지는 분명히 붙어 있었는데?’

생각해보니 호텔의 가장 높은 층의 경우에는 펜트하우스처럼 프라이빗한 공간으로 준비해둔다고 들었다. 나도 모르게 너무 높이 올라가서 한층 자체가 누군가의 개인 소유인 곳으로 들어갔을 수도 있곘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렇게 생각하니 아까 있던 일이 납득이 갔다. 호텔 방에 숫자가 없고 이상한 쪽지가 붙어 있거나, 엘리베이터가 없거나, 로봇들이 무단 침입자를 막았던 일 등이 이해가 갔다.

‘그래, 밑으로 내려가다보면 층 숫자가 나오겠지.’

나는 다시 비상구 밑으로 내려갔다. 꽤 내려갔다고 생각했는데도 이상하게 벽에 숫자들이 보이지 않았다. 이 호텔이 이렇게까지 높았나 싶어서 핸드폰을 꺼내 호텔 사이트에 접속하려 했다. 무엇보다 아까 주머니에 넣어둔 글자가 무슨 의미인지 번역기로 해석해보려 했다. 그럼 지금 이 상황이 조금이나마 더 이해가 갈 것 같았다.

구겨 놓은 쪽지를 펴서 번역기 앱으로 이미지를 찍었다. 번역 언어를 중국 간자체에서 한국어로 설정했다. 앱이 잠시 이미지를 스캔했다. 그런데 번역기 앱이 해당 글자를 제대로 찾지 못했다. 쪽지가 구겨져서 그런가 싶어서 다시 종이를 펴서 이미지를 찍었다. 마찬가지였다. 나는 간자체가 아닌 번체로 바꿔서 해석을 해봤다. 역시나 앱에서는 해석할 수 없는 글자라는 표시가 떴다.

“뭐야 이거. 한자가 아닌가?”

이상하다 싶어서 이번에는 글자 자체를 해석하는 기능을 켜서 스캔을 했다. 그런데 스캔을 하던 중 갑자기 핸드폰의 화면이 일렁이더니 제대로 켜지지가 않았다.

“이런 미친, 갑자기 왜 이래?”

핸드폰을 껐다가 켜보았지만 반응은 마찬가지였다. 엎친데 덮친 격이었다. 그나마 핸드폰이 최후의 수단이었는데 이 마저도 무용지물이 된 셈이었다. 나는 완전히 이상해진 핸드폰을 무릎 위에 올려두고 머리를 쥐어뜯었다. 어찌할 바를 몰라 우왕좌왕 하던 나는 다 체념한 심정으로 뒤에 있는 비상구 문을 열어보았다. 놀랍게도 문이 열렸다. 안으로 들어가 보니 아까와 같은 풍경의 복도가 펼쳐져 있었다. 숫자 없는 호텔방에 붉은 글씨의 쪽지가 다다닥 붙어있었다.

“어떻게 된 거지?”

복도를 걷다가 코너를 돌았다. 나는 복도에 있는 것을 보고 깜짝 놀랐다. 로봇 하나가 바닥에 넘어진 채 놓여 있었다. 내 등 뒤에서 식은땀이 흘렀다. 저 로봇이 아까 내가 찬 로봇인지 가늠을 할 수가 없었다. 분명 나는 몇 층이나 밑으로 내려왔는데 복도에 쓰러진 로봇이 같은 것일 수가 있을까. 물리적으로 불가능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머릿속을 맴돌았다.

“하아……. 하아…….”

나는 넘어진 로봇을 보고 뒤로 물러났다. 그리고는 번호가 없는 호텔방의 문을 잡고 열어보려했다. 하지만 문은 열리지 않았다.

“이보세요! 여기요!”

문을 두드리며 목소리를 높였지만 호텔방 문은 그 무엇도 열리지 않았다. 나는 뭔가가 잘 못되었음을 절실히 깨달았다. 이곳에 갇혔다. 그리고 빠져나갈 길이 보이지 않았다. 나는 재빨리 다시 비상구로 나가서 계단 밑으로 내려갔다. 내려가고, 또 내려갔다. 속으로 숫자를 세 보았다. 서른 층을 넘게 내려갔다. 하지만 여전히 층수를 나타내는 숫자는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그 자리에 아까 본 글자가 적힌 쪽지가 붙어 있었다. 내려가든 올라가든 똑같은 글자가 붙어 있으니 내가 어디에 있는지 분간할 수가 없었다. 비상구문을 열고 들어가면 아까의 그 복도가 그대로 나타났다.

“씨……. 씨발. 도대체 뭐가 어떻게 된 거야.”

영화 속에서나 벌어질법한 일이 나에게 일어났다. 나는 그냥 중국에 출장 온 평범한 직장인일 뿐인데 이런 일이 왜 일어났는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손이 덜덜덜 떨렸다. 핸드폰을 아무리 껐다 켰다 해도 화면은 일렁이며 제대로 기능을 하지 못했다. 핸드폰 배경화면에 넣어둔 아내와 아이들의 사진이 기묘하게 일그러졌다. 잠시나마 육아에서 벗어나보겠다는 짧은 생각이 이 사단을 만들었다 생각하니 과거의 내가 미웠다.

“후우……. 후우…….”

어떻게든 이 곳을 빠져나가야 했다. 누군가의 장난질인지 아니면 진짜 중국 귀신에게 홀린 건지 알 수는 없었지만 이곳에서 쓰러질 수는 없었다. 나는 비상구 쪽으로 천천히 다가갔다. 그런데 이상하게 아까와 달리 비상구 문이 열리지를 않았다.

“뭐, 뭐야?”

카드드드득!

비상구 뒤에서 아까 들었던 이상한 소리가 들렸다. 나는 깜짝 놀라 비상구에서 손을 뗐다. 뒤로 주춤하며 물러섰다. 그때 그의 뒤로 청소 로봇이 쫓아왔다. 하나가 아니라 두 개, 세 개의 로봇들이 그에게 다가왔다. 한자도 아닌 정체를 알 수 없는 이상한 글자를 띄우고서 나에게 다가왔다.

“씨발! 저리 꺼져!”

나는 로봇들을 발로 차고 복도를 뛰어갔다. 그때 갑자기 핸드폰이 울리기 시작했다. 다시 핸드폰이 돌아온 것인가 싶어서 급하게 핸드폰을 켜보았다. 어딘가에서 전화가 왔다. 호텔 로비인가 싶어서 빠르게 전화를 받았다. 그런데 핸드폰에서 이상한 소리가 흘러나왔다. 중국말인지 다른 지방 방언인지 알 수 없는 말이었다.

“이보세요! 여기요! 나 갇혔습니다! 24층! 2407호 투숙객입니다! 내 말 들립니까?”

내가 말을 해도 핸드폰 너머에서는 자신들 말만 했다. 처음에는 하나의 목소리였다가 점차 두 개, 세 개, 이제는 숫자를 분간할 수 없을 정도로 많은 목소리들이 핸드폰 너머에서 들려왔다. 나는 대화가 되지 않자 통화를 꺼버렸다. 긴급 전화를 하려 하니 다시 핸드폰이 아까의 상태로 돌아갔다.

“젠장, 나한테 왜 이런 일이 벌어지는 거냐 도대체!”

아무리 생각해도 나에게 이런 일이 벌어질 이유가 없었다. 이런 건 영화 속 주인공이나 특별한 사람들에게나 벌어져야지 자신 같은 평범한 소시민에게는 일어날 필요가 없었고, 일어나서도 안 될 일이었다. 나는 복도를 따라 급하게 뛰어갔다. 그때 복도 위에 있는 스피커에서 뭔가 소리가 났다. 여전히 알아들을 수도 없는 말로 수십 명 아니 수백 명의 사람들이 자신의 말을 지껄이고 있었다.

“멈춰! 멈추라고!”

나는 저 소리들을 피하기 위해 복도에 있는 문을 잡아당겼다. 문들은 꽉 잠겨 있어서 아무곳도 열리지 않았다. 그때 복도 뒤에서 뭔가가 다가왔다.

카드드드드득!

날카로운 것이 복도 벽을 긁으며 다가왔다. 나는 이를 딱딱 부딪히며 그 소리를 피해 복도를 달리고 또 달렸다. 아무리 달려도 복도는 끝이 나지 않았다.

“젠장……. 젠장…….”

스피커에서는 수백에서 수천 명의 사람들이 각자 자신의 이야기를 떠들어대고 있었다. 머리가 터질 것만 같았다. 그러던 중 나는 복도 앞에 문이 열려 있는 방 하나를 발견했다. 충분히 수상쩍었지만 지금 처지에 가릴 것이 없었다. 나는 급하게 열려 있는 문 안으로 들어갔다. 그리고는 곧장 문을 닫고 걸어 잠궜다.

“허억……. 허억…….”

숨을 몰아쉬고 겨우 정신을 차린 뒤 방을 둘러보았다. 그런데 뭔가 이상한 낌새를 눈치챘다.

“뭐야, 여기……. 내 방이잖아?”

24층에 위치한 2407호. 바로 내 방이었다. 미팅 일정 때문에 짐 정리도 제대로 하지 못하고 침대 위에 짐을 이리저리 놓고 간 흔적이 그대로 보였다. 나는 어찌된 영문인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침대 위에 걸터앉아 가방을 내려놓았다.

“진짜 뭔가에 홀린건가?”

방금 겪은 일이 꼭 꿈처럼 느껴졌다. 나는 손바닥으로 얼굴을 감싸쥐고 마른 세수를 했다. 어쨌든 방으로 돌아오니 마음이 진정됐다. 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내 화면을 켜보았다. 아까와 달리 정상적으로 화면이 나왔다. 보이스 톡으로 아내에게 전화를 걸었다.

신호음이 갔다. 그런데 아내는 전화를 받지 않았다. 아내가 전화를 받지 않자 마음이 초조해졌다. 아내와 아이들의 목소리를 들어야 완전히 일상으로 돌아왔다는 것을 느낄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때 였다.

똑, 똑, 똑

누군가가 방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갑작스럽게 노크 소리가 들려오자 나는 신경이 곤두섰다. 심호흡을 하고 천천히 방문을 열었다. 문을 여니 막상 앞에는 아무도 없었다. 그때 발치에 뭔가가 떨어진 것을 발견했다. 쪽지 한 장이었다. 나는 몸을 숙여 쪽지를 주워들었다. 나는 천천히 쪽지를 주워들어 펼쳤다.

“씨발,,”

쪽지에는 역시나 같은 붉은 글자로 적혀 있었다. 욕이 절로 나왔다. 어떤 놈이 나한테 질 나쁜 장난을 하는가 싶었다. 중국은 각 성마다 방송국이 많다고 하던데 설마 그 방송국 중 하나가 호텔과 짜고 몰카를 하나 싶었다. 나는 호텔 방문을 열고 복도를 향해 소리쳤다.

“이런 씨발 새끼들아! 몰카냐? 몰카 같은 개수작이면 다 좆 되는 줄 알아! 개새끼들아!”

나는 씩씩대며 욕을 마구 퍼부었다. 되든 안 되든 경찰에 신고해서 본떼를 보여줘야 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핸드폰을 보니 여전히 아내에게 보이스톡 신호가 가는 중이었다. 나는 중국 경찰에 신고하는 법을 찾기 위해 인터넷 화면을 띄웠다. 그런데 포털 사이트 실시간 검색에 뭔가가 뜬 것을 발견했다.

“이게 뭐야?”

나는 급하게 기사를 클릭해서 봤다. 뉴스 영상이었다. 영상을 틀어보니 빌딩 위에서 수 십명의 사람들이 옥상에서 떨어지는 영상이었다. 지나가는 사람들이 찍은 듯 화면은 쉴 새 없이 흔들렸다. 화면 속 사람들은 뭐야, 뭐야, 어떻게! 신고해! 같은 소리를 치고 있었다. 그런데 이런 영상이 하나가 아니었다.

“씨발, 진짜 뭐야.”

영상이 끝나고 앵커가 나와 상황을 설명했다. 갑자기 사람들 수천 명이 죽었는데 뚜렷한 이유를 알 수 없었다고 했다. 그런데 이들의 주머니에서 공통적으로 붉은 글자가 적힌 쪽지가 나왔다고 했다. 뉴스 화면에 그 붉은 글자가 적힌 쪽지가 나왔다, 나는 내 손에 들린 쪽지를 보았다. 어느새 손이 덜덜 떨렸다. 다시 스피커에서 소음이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이해 할 수 없는 소리가 끊임 없이 흘러나왔다. 그 소리는 방 곳곳에 가득 차올랐다. 그때 나는 방의 벽과 바닥이 일렁이는 걸 보았다.

“후욱……. 후욱…….”

일렁이는 벽과 바닥에서 사람의 얼굴과 손의 형상이 뚜렷한 윤곽을 띄며 튀어나왔다. 그 목소리들. 목소리들이었다. 수천, 수만의 목소리들이 기이한 형태로 손을 뻗어 내 쪽으로 다가왔다. 침대에서도 수십 개의 손이 뻗어 나왔다. 나는 덜덜 떨면서 나를 향해 다가오는 손과 얼굴을 보았다.

“으아아아아!”

단순히 헛것이라고 치부하기에는 너무 현실적이었다. 나는 핸드폰을 툭 떨어뜨리고 방문을급하게 열었다. 떨어진 핸드폰에서 아내의 목소리가 들렸다. 여보세요? 당신이야? 지금 여기 난리가……. 여보세요? 당신 괜찮아? 다급한 아내의 목소리를 뒤로 하고 나는 무작정 방을 뛰쳐나갔다.

뛰어가는 복도의 벽과 바닥, 천장에서도 그 손과 얼굴들이 나타났다. 이유도 모른 채 그 손들은 나를 따라왔다. 나는 그 손과 얼굴들을 피해 뛰고 또 뛰었다. 하지만 복도는 끝 없이 빙빙 돌았다. 이 곳을 벗어날 방법은 하나 뿐이었다. 나는 복도 벽 중간에 있는 비상구 문을 발견했다. 쫓아오는 손과 얼굴들을 피해 비상구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재빨리 문을 닫았다. 그리고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비상구 계단을 미끄러지다 시피 빠르게 내려갔다. 최대한 빨리 이 곳을 벗어나야 했다. 저 목소리들이 닿지 않는 곳으로 도망쳐야 했다. 그렇지 않으면 정체를 알 수 없는 뭔가가 나를 끊임없이 따라 붙을 듯 했다.

순간 나는 발을 헛딛고 비상구에서 굴러 떨어지고 말았다. 좁은 비상구 문에 부딪히고 목이 꺾여 움직일 수가 없었다. 나는 피를 흘린 채 점차 차오르는 숨을 헐떡거렸다. 그때 위에서 무슨 소리가 들렸다. 카드드드득. 나는 그 소리의 정체를 볼 수 없었다. 소리가 멈추고 뭔가가 나를 내려다보고 있다는 것만 느낄 수 있었다. 그리고 툭 하는 소리가 났다.

나는 힘겹게 눈동자를 돌려 떨어진 것을 보았다. 다름 아닌 붉은 글씨가 적힌 종이였다. 내 눈에 종이에 적힌 글자가 들어왔다. 도대체 저 글씨가 무슨 뜻인지 도무지 알 수 없었다. 나는 살려달라고 소리치려 했지만 제대로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바람 새는 소리만 꺽꺽 대며 내보냈다. 내 몸에서 흘러내린 피가 번져서 점차 종이를 적셨다. 어느새 내 피에 흠뻑 젖은 종이 전체가 붉게 물들었다. 눈꺼풀이 무겁게 가라앉았다. 더 이상 그 글씨가 보이지 않았다.

댓글 0
분류 제목 날짜
amrita 조 팀장이 불보살인 이유 by amrita 2019.12.01
윤여경 이물 by 윤여경 2019.12.01
괴이학회 비상구 by 김선민 2019.12.01
노말시티 별 헤는 밤의 기억 2019.12.01
해망재 파촉, 삼만리 2019.12.01
갈원경 푸른 돌 2019.12.01
곽재식 판단6 2019.11.30
손지상 냉동육 by 손지상 2019.11.15
아밀 외시경 by 아밀2 2019.11.15
괴이학회 죄는 죄로 by 장아미 2019.11.15
천선란 사막으로1 2019.11.15
이경희 다층구조로 감싸인 입체적 거래의 위험성에 대하여 2019.11.15
김수륜 모계유전 by 김수륜 2019.11.01
미로냥 박평수가 술법을 익히다 by 미로냥 2019.11.01
괴이학회 오감 by 남유하 2019.11.01
노말시티 할로윈이든 핼러윈이든 2019.11.01
곽재식 시간여행문3 2019.11.01
갈원경 늦봄 어느 날 2019.11.01
세뇨르 천국의 문을 두드리며 by 세뇨르 2019.10.15
아이 청포로62길 89 by 아이 2019.10.15
Prev 1 2 3 4 5 6 7 8 9 10 ... 42 Next

게시물의 무단 전재, 복사, 배포를 금합니다.

서버에 요청 중입니다.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