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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있는 조상님들의 밤

이경희

666.
그렇게 인류의 종말이 찾아왔으니…

계룡산 능선을 타고 마련된 인류 최후의 도피처에 14만 생존자가 모여들었다. 그중에서도 가장 마지막 무리에 속해있었던 한나는 점점 좁아지는 문틈 사이로 겨우 몸을 비집어 넣을 수 있었다. 그녀의 뒤에도 수많은 사람들이 남아있었지만 한 번 굳건히 닫힌 철문은 다시는 열리지 않았다. 철문 너머 남겨진 사람들의 비명을 애써 무시하며, 한나는 벽에 등을 기댄 채 주저앉았다.

대체 왜 이렇게 돼버린 거지?

북한의 핵실험 때문에 EMP가 쏟아진 후유증이라는 소문을 들었다. 양자가 어쩌고 중력파가 저쩌고 시공간이 뭐가 어떻게 되었다는 그런 말을 지껄이는 과학자들도 있었다. 또 누군가는 그저 대통령이 제사를 잘못 지냈기 때문이라고도 했었고.

§

“아닙니다! 이것은 모두 하나님의 뜻입니다!”

누군가 성서를 끌어안고 부르르 떨며 소리질렀다.

“요한계시록 제 20장 4절. 선과 악이 치르는 최후의 전쟁이 모두 끝나니, 이제 성서의 예언대로 천년 왕국이 도래하여 하나님을 믿는 모두가 부활하게 된 것입니다!”

머리 끝까지 짜증이 치민 한나는 자기도 모르게 소리치고 말았다.

“우리 시어머님은 교회 안 다니셨거든요?”

화가 난 교인들이 그녀를 향해 욕설을 쏟아냈다. 한나는 눈을 감고 귀를 틀어막았다.

정말 왜 이렇게 돼버린 거지?

한나는 조심스럽게 과거를 돌이켜보았다. 그게 정말 최후의 전쟁이라고? 내가 벌였던 그 치열한 전투가 정말 선과 악의 마지막 투쟁이라고?

에이, 그럴리가.

실소가 터져나왔다. 왜냐면 그녀가 해온 일이라고는 고작해야…


“제사를 없애자!”

한나의 외침소리와 함께 복면을 뒤집어 쓴 여성들이 어느 뼈대있는 종갓집 마당에 들이닥쳤다. 그들은 각자 몽둥이를 휘두르며 순식간에 병풍을 부수고 제사상을 뒤집어엎었다. 곱상한 비단 한복을 차려 입은 남자들이 “어허!” “어허!” 거리며 발끈했지만, 앞으로 나서서 적극적으로 제지하는 사람은 없었다.

결단코. 지금껏 한 번도.

“다, 당신들 대체 누구요?”

겨우 목소리를 쥐어 짜낸 남자가 외쳤다. 자리를 떠나려던 한나는 뒤로 돌아서서, 복면을 슬쩍 들어 올려 입이 나오도록 했다.

“제사 없애기 운동본부 몰라요?”

그 이름을 듣자마자 양반들은 모두 제자리에 주저앉았다.

§

오늘도 한 건을 제대로 마친 여성들은 운동본부 사무실 뒷골목의 치맥 집에 모여 서로를 축하했다. 한나는 손수 소맥을 말아 회원들에게 나눠주었다. 회원들은 정해진 의식을 치르듯 컵 안에 쇠젓가락 하나를 찔러넣고 나머지 젓가락으로 쩡 소리가 나도록 두드렸다. 하얀 거품이 크림처럼 흠뻑 넘실거리며 치솟았다.

“언늬이, 오늘 짱 멋있었어요오오…“

이미 흠뻑 만취한 수진이 그녀의 어깨에 들러붙었다. 수진은 방금 전 쳐들어갔던 종갓집의 막내며느리로, 본부에 도움을 요청한 오늘의 의뢰인이었다. 얼마 전까지 세계를 떠돌며 중역들의 통역을 도맡았던 사람이 거기서 육전이나 부치고 있는 게 말이나 돼? 한나는 다시금 화가 치밀었다.

“나 진짜 넘므 고마운 거 있죠오…”

“야, 알겠으니까 좀 떨어져.”

“아이이으잉.”

술에 잔뜩 취한 수진을 밀어낸 한나는 테이블 위로 올라가 크게 소리쳤다.

“여러분 주목!”

그 자리에 모인 모두의 시선이 한나를 향해 꽂혔다. 조금 의기양양해진 그녀는 소주가 담긴 500cc 맥주잔을 높이 치켜들며 연설을 시작했다.

"여러분! 우리는 오늘도 중요한 전투에서 승리를 거뒀습니다. 이 땅에서 제사가 사라지는 그날까지, 제사 없애기 운동본부장 저 요한나는 최선을 다해 노력하겠습니다. 항상 저를 지지해주시고, 서로를 도웁시다. 우리 회원님들, 다음번 호출 때도 오늘처럼만 활약 부탁드립니다! 투쟁!”

모두의 환호와 박수 세례를 받으며 맥주잔을 단숨에 비운 한나는 큰소리로 외쳤다.

“인류 최후의 전쟁은!”

그러자 모두가 한마음으로 소리쳤다.

“제사 없애기!”

§

그 후로는 하나도 기억나지 않았다. 눈 부신 햇살에 눈을 찔린 그녀는 정신을 차리자마자 화장실로 기어가 뱃속에 있는 것을 모두 게워냈다. 가슴 속이 텅 비어버린 것처럼 공허하고 쓰라렸다.

적당히 입을 헹구고 비틀비틀 거실로 돌아왔을 때, 그녀는 드디어 자신이 미쳐버린 줄로만 알았다.

왜냐면, 그녀의 눈앞에 있었던 것은 2년 전 돌아가신…

“애미야, 국에 왜 국물이 있니?”

시어머니는 잔뜩 짜증 난 목소리로 그녀에게 물었다. 침착하자. 침착해. 이럴 때일수록 이성적으로 대응해야지.

“국이니까 당연히 국물이…”

“에휴, 아무튼 얘는 뭘 제대로 하는 게 있어야지. 봐라, 국물이 이렇게 많으니까 먹을 때마다 입에서 줄줄 새잖니”

시어머니가 국을 떠 입에 넣을 때마다 턱 아래 뚫린 구멍으로 국물이 다시 쏟아지고 있었다.

“어, 어머님. 재작년에 돌아가시지 않으셨…”

탁. 시어머니가 수저를 내려놓았다.

한나는 자신을 쏘아보는 시어머니의 눈빛에 꼼짝없이 얼어붙었다. 당황스러웠다. 그러면서도 자신이 왜 당황하고 있는지 궁금했다. 눈앞에 있는 사람이 이미 죽은 사람이어서일까? 아니면 시어머니여서일까?

그러거나 말거나, 시어머니는 자신의 할 말만 계속했다.

“아범은 어디 갔니? 또, 아침 안 맥이고 보낸겨?”

“아니요, 어머님. 그게, 저희가 이혼을…”

빨리 전 남편을 불러야겠다는 생각이 퍼뜩 들었다. 그 자식한테 빨리 넘겨 버리자. 지 엄마니까 지가 좀 알아서 하라지. 그녀는 슬금슬금 걸음을 옮겨 스마트폰 쪽으로 향했다.

“얘, 어딜 가니. 여기 좀 앉아봐.”

탁. 탁. 시어머니가 숟가락으로 식탁 빈자리를 두드렸다. 눈알이 썩어 텅 비어버린 눈두덩이로 정신이 빨려 들어가 버릴 것만 같았다. 그녀는 재빨리 팔을 뻗어 전화기를 집어 든 다음 천천히 식탁을 향했다. 털썩, 다리가 풀려 의자에 주저앉고 말았다. 식탁에 펼쳐진 육첩반상을 보자마자 다시 숙취가 올라오는 것 같았다.

그래, 이거 다 꿈일 거야. 아무렴 꿈이겠지.

한나는 고개를 좌우로 붕붕 저어 불안감을 떨쳐낸 다음, 당당히 나가기로 마음먹었다. 까짓거 꿈에서라도 한 번 제대로 들이받지 뭐. 그 자식이랑 이혼한 지가 언젠데 뭐 하러 쩔쩔 매?

“어머님, 과일 드실래요?”

“그래, 이제 좀 마음에 드는 소리 한다. 사과 있니?”

“어머, 어떡하죠? 사과는 없고 배뿐인데. 어머님 배 좋아하시지 않으셨어요?”

“뭐 마음에 썩 들진 않지만, 그럼 그거라도 한번 깎아보련?”

한나는 다시 자리에서 일어났다. 천천히 냉장고로 걸어가 배를 하나 꺼낸 다음, 싱크대에서 과도를 집어 들었다. 칼을 쥔 손에 꾸욱 힘이 들어갔다. 그녀는 껍질을 깎으며 시어머니를 힐끔 훔쳐보았다. 시어머니는 몸통 밖으로 주르륵 흘러나온 내장을 다시 억지로 집어넣고 있었다.

죽여도 되겠지? 저거 좀비니까.

그녀는 망설임 없이 성큼성큼 다가가 시어머니의 이마에 칼을 푹 찔러넣었다. 수박 가르는 것보다 쉽게 칼이 쑥 들어갔다.

“얘! 이게 무슨 짓이니!”

앙칼진 비명소리가 고막을 찔렀다. 귀가 아파 도저히 견딜 수가 없었다. 한나는 양쪽 귀를 틀어막으며 뒤로 몇 걸음 물러났다.

어, 안 죽네. 영화에선 이럼 죽던데. 좀비 아닌가?

“야! 이년아. 너는 자식이 돼서! 애미 머리에 칼을 꽂냐!”

시어머니가 불같이 화를 내며 일어나 그녀의 머리채를 휘어잡으려 했다. 그녀는 겨우 어머님의 팔을 쳐냈다.

“아, 아니요오 어머님, 그게 아니고.”

그녀는 낑낑대며 시어머니의 어깨를 눌러 억지로 자리에 앉혔다.

“그래. 내 한 번만 참는다. 알겠니?”

“예, 예에…”

“어딜 칼을 휘둘러, 칼을. 나 때는 시어머니가 한마디 하시면 그저 예, 어머님, 예, 어머님 하는 것 말고는 입도 뻥끗 못 했다. 얘는 고개는 또 어쩜 이렇게 빳빳하니? 나 때는 이렇게 고개도 못 들었다. 좋은 시엄마 만난 줄 알어. 너 우리 현수한테도 그런 식이니? 하긴, 시엄마 알기를 우습게 하는데 남편한테는 오죽하겠니. 에휴, 불쌍한 우리 현수.”

“죄, 죄송합니다.”

기세에 밀린 한나는 고개 숙여 사과하고 말았다.

“그래, 진즉 그럴 것이지. 어딜 맞먹으려고 굴어? 으른들이 좋은 말씀 하시면 그저 알겠습니다, 알겠습니다 할 것이지. 암튼 요즘 것들은 귀여운 구석이라고는 없어요. 대체 누굴 닮아서 저러는지. 쯧쯧.”

시어머니는 이마에서 칼을 쑥 뽑아 손에 들고 휘두르며 본심을 드러냈다.

“아가, 나 용돈 좀 다오.”

당장 여길 빠져나가야겠어.

한나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집 밖으로 뛰쳐나갔다.


아무리 전화를 걸어도 현수는 받지 않았다. 쓸모없는 전 남편 같으니라고. 그녀는 전화기를 손에 쥔 채로 거리를 빠르게 질주했다. 옷도 제대로 갈아입지 못한 탓에 그녀는 술과 땀에 찌든 정장 차림 그대로였다.

“하이고! 젊은 처자가 옷 입은 꼬라지 하고는!”

어디서 노인 목소리가 들렸다. 역시나. 이번에도 움직이는 시체가 힘겹게 지팡이를 짚으며 그녀 쪽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치마가 이게 뭐꼬? 아주 날 잡숫소 잡숫소 이마에 빰뿌렛을 붙이지그려?”

내가 두 번은 못 참지. 한나도 이번엔 날 선 목소리로 대꾸를 붙였다.

“아니! 제가 짧은 치마를 입건 티팬티를 입건 할아버지가 뭔 상관이세요?”

“어허!”

귀가 따가웠다. 어르신들이 저승에서 목청만 키우셨나.

“엄연히 도덕이 있고, 어? 예의가 있고, 어? 정해진 뭐가 다 있는데! 어딜 여자가 말이야 백주 대낮에 맨다리를 훌러덩… 어이쿠.”

노인은 말을 마치기도 전에 비틀거리다 쓰러졌다. 하지만 바닥에 엉덩이를 붙이고도 그녀의 머리부터 발끝까지 삿대질로 훑으며 지적질을 이어갔다. “아이고 혈압아!” 소리치며 뒷목을 잡는 대목에 이르자 그녀는 할 말을 잃었다. 거의 뼈밖에 남지 않은 노인의 몸에 피가 흐를 리가 없기 때문이었다.

말을 말자.

그 순간, 갑자기 머리 위에서 와장창 창문이 깨지며 유리가 쏟아졌다. 깜짝 놀란 그녀는 반사적으로 몸을 던져 피했다.

2층 기원에서 쩌렁쩌렁 말다툼 소리가 들렸다. 내용을 보아하니 누군가 몸싸움을 벌이다 의자를 던진 모양이었다.

“야 니는 형님한테 접어줄 줄을 모리나! 꼭 그렇게 따박 따박 이겨 먹어야겠나!”

“아니 형님, 승부에 그런 게 어딨소.”

“니 몇살이여? 니는 장유유서도 모리나? 옛날에는…”

한나는 있는 힘껏 달려 빠르게 골목을 빠져나갔다.

시내는 그야말로 아비규환이었다. 여기저기서 정체를 알 수 없는 시체들이 나타나 사람들을 붙잡고 이러쿵저러쿵 제멋대로 잔소리를 지껄이고 있었다.

“얘 머리 색깔이 그게 뭐니, 옷은 또 그게 뭐야,” “그래서 좋은 대학 가겠니?” “뭐어? 래애퍼? 딴따라?” “으른이 부르시는데 인사를 해야지, 이 나라를 이렇게 발전 시킨 게 다 누구 덕인데 말이야…”

한나는 한숨을 쉬며 조심스럽게 시체들을 피해 나아갔다. 멀리 광장 쪽에 사람들이 잔뜩 모여있는 모습이 보였다. 다행히 살아있는 사람들이었다.

가까이 다가가자 사람들이 왜 모였는지 알 것 같았다. 빌딩 옥상에 설치된 커다란 전광판에서 뉴스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속보] 서울에서 좀비 사태! 죽은 조상님들 되살아나!

화면 속에서 앵커가 소식을 전하고 있었다.

“시청자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서울 시내에서 발생한 좀비 사태에 대해 긴급 속보를 전해드립니다. 지금 시내 곳곳에서 죽은 조상님들이 되살아나 거리를 활보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모두 의식이 있으며, 자신이 누구인지 명확히 기억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또한, 그들은 살아생전 가장 미련이 많이 남은 장소로 소환된다고 합니다. 주로 여러분들이 살고 계신 집이나, 직장 같은 곳이 될 수 있습니다. 시간이 지날수록 되살아나는 시신의 수가 점점 늘어나고 있다는 보고입니다.”

뒤이어, 앵커는 조상님 한 명을 초청해 인터뷰를 진행했다. 방송국 내에서 되살아난 시신은 앵커의 선배 기자라고 했다. 그가 몇 년 전 불미스러운 사건으로 퇴사한 뒤 사고를 당했다는 정보도 함께 전해졌다.

“선배님. 대체 이게 어떻게 된 일인지 혹시 아시나요?”

“나야 모르지.”

“되살아난 과정은 혹시 기억하십니까?”

“기억 안 나.”

“그럼 마지막으로 기억하시는 것은…”

“건방지게.”

“네?”

“야. 내가 너한테 하나부터 열까지 다 설명해줘야 해? 언제부터 선배가 후배한테 설명하게 돼 있었어? 스스로 열심히 고민해서 알아볼 생각은 안 하고.”

선배의 태도에 당황한 앵커는 그의 자존심을 치켜세워주기 위해 온갖 아양을 떨었다.

“아니, 그래도 선배님 우리 방송국 유일의 과학전문 기자 아니십니까. 전문가의 고견을 듣고자 이렇게 저희가 모셨고요. 부디 아시는 만큼이라도 설명을 부탁드립니다. 전국의 시청자님들이 모두 라이브로 지켜보고 계십니다.”

선배는 ‘시청자’라는 말에 번뜩 정신이 든 모양이었다.

“이번 현상은 말이에요. 제 경험상 아무래도 양자 얽힘이 관련된 사건인 것 같단 말이죠.”

“양자 얽힘이요?”

“어제는 중국에서 입자가속기 시험이 있던 날이었습니다. 아마 그것과 지금 사태 간에 밀접한 관련이 있지 않을까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질문은 제가 드렸는데요.”

“사람들의 영혼이 살아생전 품었던 미련이 공간에 양자적으로 얽혀서, 시신을 다시 그곳으로 불러낸 것이 아닌가 예상해본 겁니다.”

“그게 과학적으로 어떤 입증된 이론이 있는 건가요?”

“그냥 양자가 어떻다고 붙이면 왠지 다 그럴싸해 보이잖아요.”

“선배님. 그래도 기자가 취재한 팩트를 갖고 말씀을 하셔야…”

“야.”

선배의 턱이 테이블 위로 떨어졌다.

“너 방송 끝나고 좀 남아라. 어디 선배한테 따박따박 말대꾸…”

선배는 턱을 집어 다시 끼워 넣으며 말을 이어갔다. 뉴스가 중단되고 특집 방송으로 화면이 넘어갔다. 화면 속 무대에서는 아이돌 계의 조상님이 나와 80년대 스타일의 춤을 추며 후배들의 동선을 방해하고 있었다.


대체 어디로 가야 하지?

딱히 갈만한 곳을 떠올리지 못한 한나는 근처 무인 모텔에 들어가 방을 빌렸다. 혹시나 찌질한 남자가 첫 경험을 못 잊고 이곳에서 부활할까 걱정되었으나, 다행히 그녀가 빌린 방은 텅 비어있었다.

옷을 벗고 샤워를 마친 한나는 다시 현수에게 전화를 걸었다. 하지만 전 남편은 여전히 전화를 받지 않았다. 어디서 레전드 드림팀 직장 상사들한테 갈굼이라도 먹고 있나 보지? 그녀는 전 남편에 대한 일말의 기대마저 접어버렸다.

그 순간 전화가 울렸다.

전 남편인가 했는데 수진이었다. 한나는 서둘러 전화를 받았다. 수화기 너머에서 수진의 훌쩍이는 소리가 들렸다.

— 언늬이… 어디세요?

“수진아, 왜 그래?”

— 언니, 여기 너무 무서워요. 그 꼰대들보다 더한 꼰대들이 있더라고요. 증조부에 고조부에 고종 삼촌에 고모할머니까지 수십 분이 나타나셔서 제사 똑바로 안 지내냐고, 예법이 이게 맞네 저게 맞네 물어뜯고 싸우고 물건 집어 던지고 밥상 엎고 아주 난리도 아니어서요…

“얘, 거긴 너무 위험해. 일단 여기로 와.”

한나는 자신이 머무르는 모텔의 주소를 알려주었다. 한 시간쯤 지나자 누군가 문을 두드렸다. 문을 열자마자 수진이 그녀의 품에 안기듯 매달렸다.

“으앙 온늬이, 이거 우리가 제사를 옶애서 조상님들이 노하신 거라던데요. 진짜예요?”

수진이 꺽꺽 울먹이는 목소리로 그녀에게 물었다.

“누가 그래?”

“택시 기사님이요. 그분도 조상님이신데…”

“아니야, 수진아. 이거 과학적으로 다 증명됐어. 양자가 얽히고 뭐 그런 거래. 다 과학적인 문제야. 귀신 그런 거 아니래.”

한나는 자신이 무슨 말을 하는 지도 이해하지 못한 채 입에서 튀어 나오는 대로 이상한 논리를 마구 쏟아냈다. 다행히도 수진은 그녀의 헛소리를 믿는 것 같았다.

“자, 여기 침대에 좀 앉아 봐. 물도 마시고.”

그녀는 수진에게 물컵을 건넸다. 수진은 벌컥벌컥 물을 들이키다 사레가 들었다. 그녀는 수진을 진정시키기 위해 최대한 다정한 손길로 등을 두드렸다.

“언니는 별일 없으셨어요?”

“어, 그게… 시어머님이 우리 집에 오셨어.”

한나는 자신이 겪은 일들을 전해주었다.

“네에? 그러고 그냥 나오셨어요?”

“그럼 어떡해? 전 남편은 연락도 안 되는데.”

“언니는 다르실 줄 알았는데, 실망이에요!”

수진이 침대 반대편으로 홱 돌아누웠다.

“얘, 왜 그러니?”

“그동안 저한테 하신 말씀. 끝까지 투쟁하라고 하신 말씀. 저 진심으로 믿었단 말예요! 그런데 언니가 시어머니 앞에서 그렇게 굴복하시면 제가 앞으로 누굴 보고 용기를 얻겠어요?”

한나는 갑자기 부끄러워졌다. 맞아. 내가 왜 움츠러들었지? 어차피 지금은 시어머니도 아닌데. 당당하게 맞서 싸워 이겨냈어야지.

“미안해. 내가 잠시 약해졌었어.”

한나는 수진에게 사과했다.

“내가 어떻게 했으면 좋겠니?”

수진은 다시 홱 돌아눕더니 선망 가득한 눈으로 한나를 바라보았다. 시선이 마주치자 얼굴이 화끈거렸다. 그러거나 말거나, 수진은 한나의 곁으로 좀 더 가까이 다가와 그녀의 두 손을 꼬옥 움켜쥐었다.

“어쩌긴요. 복수해야죠. 언니 이혼도 시어머니 땜에 하신 거라면서요. 이번 기회에 제대로 해요.”

“복수라…”

머릿속으로 만감이 교차했다. 막상 복수를 하려니 뭐가 상처였는지, 뭘 어떻게 되갚아줘야 할지 막막했다. 시어머니와의 관계는 처음부터 끝까지 전부 엉망이었으니까.

“트위터에서 보니까 좀비라고 막 흉폭해지거나 힘이 세거나 그러지는 않는대요. 감염되는 일도 없고요. 그니까 별 어려움은 없을 거예요.”

“그럼 애초에 좀비가 아닌 거 아냐?”

“그럼 좀… 상님? 아무튼 우리 제대로 복수하고, 그 담에 멀리 떠나요.”

“그래, 다시 싸우러 가자.”

“투쟁!”

한나는 굳게 각오를 다지며 벗어두었던 옷을 챙겨입었다. 온몸에서 진득한 술 냄새가 났다.

§

바깥은 이미 해가 뉘엿뉘엿 지고 있었다. 아까보다 몇 배로 불어난 조상님들을 피해 골목으로 들어서자 집이 보였다. 전 남편과 헤어지고 유일하게 손에 남은 거라곤 낡아빠진 이 집 한 채 뿐이었다. 그것도 주택담보대출이 60%나 걸린 반쪽짜리 집. 생각해보니 열 받네. 당신이 뭔데 내 집을 떡 하니 차지해?

한나와 수진은 살금살금 현관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섰다. 시어머니는 몸빼바지 차림으로 거실 소파에 누워 TV를 보고 있었다. 눈빛으로 신호를 교환한 두 사람은 순식간에 시어머니를 붙잡아 입을 막고 밧줄을 몸에 감았다.

“어딜 감히 이것들이! 으른을 우습게 알아! 빼애액!”

입만 막으면 될 줄 알았는데. 이 세상에서 나는 소리라고는 생각되지 않는 기괴한 비명소리가 뇌를 뒤흔들었다. 두 사람은 귀를 틀어막고 바닥에 쓰러졌다.

“며늘아 안 그래도 할 말 많았는데 잘 왔다. 내가 낮에 부적 하나 받아놨다. 옆집 선영이 말이, 이거 팬티에 이렇게 넣고 매일 물구나무 십 분씩만 서면 애가 금방 들어선다더구나. 얘, 애기 안 생기는 거, 그거 다 네가 노력이 부족해서다?”

귀에서 피가 날 정도의 잔소리가 속사포 랩처럼 귓속에 때려 박혔다. 애초에 조상님들의 목소리가 공기의 진동을 통해 전달되고 있다는 생각 자체가 큰 착각이었다. 그럴 리가 없잖아. 폐도 없고 혀도 없는 사람들인데.

한나가 아무 대답이 없자, 시어머니는 몸이 묶인 채로 벌떡 일어나 격노했다.

“내가 아까 냉장고도 다 확인해봤다. 우리 현수 인스턴트 싫어한다고 몇 번을 말하니! 보니까 배달음식 쿠폰도 옆면에 잔뜩 붙어있더라. 그러다 뒤룩뒤룩 살쪄. 몹쓸 병 걸려. 알어? 그리고 야채는 일주일 이상 묵히지 말랬지? 또 정수기 물 마시지 말고 보리차 우려서 육각수 만들어 먹으라고 했니 안했니? 잔소리 같아도 이거 다 니들 위해서 하는 소리야. 난 맨날 이렇게 이야기할 거다. 알겠니? 우리 가족이면 너도 내 잔소리 참을 줄 알아야 해.”

시어머니가 점점 가까이 다가왔다. 한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천천히 뒤로 물러났다. 하지만 이내 벽에 부딪혔다.

“다 우리 손주 보자고 하는 거 아니니? 내가 언제 다른 거 바라디? 그냥 아들 하나만 낳아달라는데, 그게 그렇게 어렵니? 내가 한약도 지어주고, 부처님께 기도도 올리고, 부적도 쓰고, 이렇게 지극정성을 다했는데! 빼애액!”

시어머니가 갑자기 확 달려들었다. 궁지에 몰린 한나는 자기도 모르게 주먹으로 시어머니의 턱을 쳤다. 뼈 부러지는 소리가 들리며 시어머니가 바닥에 쓰러졌다. 턱뼈를 제대로 맞았는지 손가락이 아팠다.

“나도 진짜 이 얘긴 안 하려고 했는데…”

한나는 저린 손을 주무르며 소리쳤다.

“강현수 무정자증이거든요!”

한나는 수진을 일으켜 함께 집 밖으로 도망쳤다.


차에 시동을 걸자마자 한나는 곧장 마트를 향해 출발했다.

“언니, 이제 어디로 가는 거예요?”

“마트로 가자. 일단 생필품부터 챙겨야지. 식량이랑, 물이랑, 생리대랑 뭐 이것저것 필요한 거 많잖아.”

예상대로 마트는 아비규환이었다. 한나는 수진에게 차를 지키도록 당부한 다음, 마트 안으로 뛰어들었다. 매장 내부에서는 되살아난 조상들이 왜 에누리를 해주지 않느냐며 직원들과 다투고 있었다. 몇몇 직원들은 이미 귀에서 피를 쏟으며 기절한 상태였다.

한나는 정면 출입구를 피해 매장 안으로 들어가 눈에 보이는 대로 카트에 생필품을 쓸어 담았다. 그리고 무기가 될만한 것들도. 텐트와 캠핑 장비들도 함께 챙겼다. 아무래도 문명이 닿는 범위 내에서는 좋은 꼴을 보지 못할 것 같아서였다.

의류매장에서 옷도 몇 벌 챙겼다. 꽉 조이는 정장과 속옷을 벗고 트레이닝복으로 갈아입으니 세상이 달라진 기분이었다. 그녀는 수진에게 입힐 옷도 같은 디자인으로 카트에 담았다.

내 차가 행사용 봉고차여서 천만다행이지. 그녀는 뒷문에 새빨갛게 각인된 ‘제사를 없애자!’ 문구를 한번 쓰다듬은 다음, 트렁크를 열고 와르르 짐을 쏟아 넣었다.

“언늬이… 전화 좀 받아보세요.”

운전석으로 돌아오자마자 수진이 떨리는 목소리로 그녀에게 전화를 건넸다.

“누구 전화야?”

“미주 언니요.”

“미주 씨?”

“지금 사무실에 계신대요. 운동본부 사무실이요.”

“여보세요. 미주 씨!”

— 한나 씨 큰일 났어. 선배님이 살아오셨어.

“뭐?”

— 우리가 쫓아냈던 그 선배님 말이야. 그리고 그 윗 선배님들도.

“뭐요?”

수화기 너머로 남자들의 목소리가 들렸다.

— 뭐야, 다들 벌써 퇴근했어? 좋은 뜻으로 모여서 운동한다는 사람들이 따박따박 퇴근하고 월급 꼬박꼬박 챙겨가면 뜻은 어떻게 이루나? 우리 때는 말이야 여기다 침낭 하나 깔아놓고 일주일씩 때우고 그랬어. 어? 미주 씨 지금 퇴근하려고? 차라리 소주나 한 병 같이 까자. 내가 새우깡 사 올 테니까…

“미주 씨! 괜찮아?”

— 한나 씨, 여긴 내가 막아볼 테니까, 절대 사무실로 오지 마. 나 구할 생각 하지 말라고! 꺄아악!

비명과 동시에 전화가 끊어졌다.

“구해야 해요.”

수진이 심각한 표정으로 말했다.

“그래, 구하러 가자.”

한나는 차에 시동을 걸었다. 두 블록 만에 사무실이 보였다. 다행히 그녀가 살던 집도, 마트도, 사무실도 모두 근처였다.

사무실 앞에 차를 세운 한나는 트렁크를 열고 무기를 꺼냈다. 자신은 빨간색 야구 배트를, 수진에게는 라이터와 에프킬라, 그리고 시끄러운 꽹가리를 건넸다.

“수진아, 절대 무리하지 말고, 멀리서 꽹과리만 두드려. 그놈들 말 소리 안 들리게. 에프킬라는 정말 긴급한 상황에서만 쓰는 거야, 알겠지?”

“네, 언니. 미주 언니는요?”

“이거면 되지 않을까?”

한나는 미주 씨를 위한 장비를 보여주었다.

“네. 그거면 될 것 같아요.”

“그럼, 가자.”

쾅! 2층 사무실 문을 박차고 뛰어들자 세 명의 선배들에게 둘러싸인 미주 씨의 모습이 보였다.

“미주 씨! 이거 써!”

한나는 한 손에 들고 있던 블루투스 헤드폰을 던졌다. 미주 씨는 허겁지겁 헤드폰을 받아든 다음 귀에 쏙 뒤집어썼다. 미주 씨가 아이유 노래를 들으며 정신을 추스르는 사이 수진이 꽹과리를 두드렸고, 한나는 신나게 배트를 휘둘러 선배들을 떼어놓았다.

“야! 니들이 민주화가 뭔지는 알아?” “구로 동맹파업은?” “서울역 회군은 알아?” “마르크스,” “레닌,” “마오이즘,” “알린스키 조직론,” “알튀세르주의 공부는 다 했어?” “정권 바뀌니까 아주 민주화 다 끝난 거 같지?” “경제 민주화는 어쩔 거야?” “재벌 해체는?” “국보법 폐지는?” “천민자본주의에 맞서서 계급 투쟁할 생각은 안하고, 뭐어? 제사 없애기?”

선배들이 돌아가며 재잘거렸지만 시끄러운 꽹과리 소리에 파묻혀 내용의 절반도 알아듣지 못했다. 이 정도면 할 만한데? 한나는 자신감을 얻어 배트를 휘둘렀다. 선배들 중 하나가 배트를 맞고 휘청거리다 창문을 깨고 밖으로 떨어졌다.

“시끄러워 이 꼰대들아!”

하지만 한나의 기세는 그리 오래 가지 못했다. 엉망진창으로 배트를 휘두르다 보니 슬슬 체력이 달렸고, 팔도 너무 아팠다. 반면 선배들은 지치지도, 상처를 입지도, 아픔을 느끼지도 않았다. 한나는 결국 배트를 쥔 팔을 아래로 늘어뜨렸다.

“꺄아악!”

등 뒤에서 수진의 비명소리가 들렸다. 바깥으로 떨어졌던 선배가 다시 올라와 수진을 제압한 것이었다. 수진은 에프킬라를 뿌리려다 되려 선배에게 라이터를 빼앗기고 말았다. 선배는 그 라이터로 담배에 불을 붙이며 빼애액 소리 질렀다.

“여자애가 어딜 담배를 펴? 시집 안 갈 거야? 애기 안 가질 거야?”

수진은 후다닥 도망쳐 한나의 등 뒤에 달라붙었다. 몸을 추스른 미주도 그녀의 곁으로 모였다. 서로의 등을 맞댄 세 사람은 각자 손에 잡히는 대로 물건을 집어 들고 포위망을 좁혀오는 선배들과 맞서려 했다.

“한나 씨, 내가 오지 말랬잖아.”

미주 씨가 헤드폰을 귀에서 조금 떼고 말했다.

“어떻게 그래요. 명색이 본부장인데.”

“아무튼 정말 고맙긴 한데, 이제 어쩌지?”

“포위망 뚫고 탈출해야죠. 볼륨은 최대로 높이셨어요?”

“어.”

“언니들, 저도 꽹과리 준비됐어요.”

“그래, 그럼…”

다시 배트를 움켜쥐고 달려 나가려는 순간, 어디선가 강력한 음성이 들려왔다.

“왕언니가 왔으면 인사를 해야 할 거 아냐, 이것들아.”

딱 한 마디. 딱 한 마디가 들렸을 뿐인데도 선배들은 모두 귀를 틀어막고 무릎을 꿇었다. 왜냐면,

목소리의 주인공이 바로 심 선생님이었으니까.

“선생님!”

심 선생님이 전동 휠체어를 타고 사무실로 들어오는 모습이 보였다. 한나는 배트를 내려놓고 선생님을 향해 달려갔다. 여든을 지긋이 넘긴 선생님은 여전히 예전의 그 모습 그대로였다. 상큼한 미소를 지어 보인 선생님은 선배들에게 잔소리를 시작하셨다.

“야. 너네들 결국 다 도망가서 좋은 데 취직했잖아! 필드에서 뛰어본 적도 없는 것들이 먹물 냄새는 아주 그냥… 너네 쌍민자동차 파업 현장 나가봤어? ITX파업은? 런던바게뜨, 병정오토텍 이름이나 들어봤니?”

선배들은 귀를 틀어막고 바닥을 데굴데굴 굴렀다.

“그때 니들 뭐 했어? 중아일보에서 나 까는 기사 쓴 거 민수 너지? 현철이 너는 삼정에서 핸드폰이나 팔고 앉았고. 만수 너는 아이티인가 뭔가 헛짓거리하다 요즘은 치킨 튀긴다며? 최루탄 냄새도 한번 안 맡아본 것들이 어디서 유세야? 유세는.”

얼마 지나지 않아 선배들은 완전히 돌처럼 굳어버렸다. 심 선생님의 잔소리를 참지 못하고 생명 활동을 정지한 모양이었다. 황당했다.

"와, 우리한텐 그렇게 재잘재잘 떠들어 댔으면서, 그거 한마디를 못 참네.”

한나는 그렇게 말하며 굳어버린 선배들을 발로 걷어찼다. 활동을 정지한 시신은 연탄재 부스러지듯 산산이 무너졌다.

“얘 한나야. 그동안 고생했다.”

심 선생님이 칭찬하셨다. 분명 칭찬인데도 소름 끼칠 정도로 무서운 눈빛이셨다.

“예, 예에… 선생님은 잘 지내셨어요?”

“그래, 보다시피 나야 뭐 항상 이 모양이지. 담배나 하나 줘봐.”

한나는 주머니에서 담배를 꺼내 선생님 입에 물려드렸다. 눈치 빠른 수진이 라이터를 되찾아와 불을 붙였다. 심 선생님은 담배 연기를 맛있게 뿜으며 눈을 감았다.

“너희는 이제 어떡할 생각이니?”

“일단 서울을 벗어나려고요. 안전한 장소를 찾은 다음엔 회원님들을 다시 모을 거고요.”

“그건 계속할 거니?”

“제사 없애기요? 아뇨.” 한나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저희가 문제의 근원을 착각하고 있었어요. 제사 없애기 운동본부는 현시점 부로 명칭과 목표를 바꿀 거예요. ‘조상 없애기 운동본부’로.”


한나와 수진, 미주와 심 선생님은 함께 봉고차에 올라 서울을 빠져나갔다. 한동안은 지리멸렬한 도주 생활이 이어졌다. 산으로 숨으면 안전할 거라 생각했건만, 대한민국 땅에 존재하는 산의 수만큼 등산을 즐기는 꼰대들이 있었다. “장비는 그렇게 쓰면 안 되지.” “텐트는 좋은 걸 써야지.” “여자들끼리 위험하게 산을 오르나?” 등등… 네 사람은 결국 ‘산속에 숨어 적당히 시간 보내기’ 작전을 폐기했다.

경부고속도로를 따라 충청도까지 내려온 한나 일행은 세종시 중심 부근의 버려진 아파트에 터를 잡았다. 이곳은 예전엔 허허벌판이었던 곳이어서 조상님들의 출몰이 상대적으로 적었다. 게다가 주민 대부분이 기러기 공무원이었던 탓에 남아있는 사람도 많지 않았다. 다시 말해 도시 곳곳에 식량이 풍족하게 남겨져 있다는 뜻이었다.

물론 가끔은 조상님들과 마주쳐 전투를 벌여야 하는 때도 있었다. 그때는 한나와 미주가 헤드폰을 쓰고 욕받이를 역할을 했고, 심 선생님이 잔소리로 그들을 제압했다. 수진은 회복 담당이었다. 그녀는 한나와 미주의 멘탈이 나가지 않게 안전한 곳에서 꽹과리를 치며 열심히 응원했다.

일주일에 한 번 마트에 들러 식량을 채집하는 날을 제외하면 거의 집 안에서 시간을 죽여야 했다. 세종시는 너무나 지루한 도시여서, 유기견들에게 사료를 나눠주거나 스마트폰으로 간단한 게임을 플레이하는 것 외에는 딱히 즐길만한 것이 없었다. 사설 SNS 망에 접속해 서로의 소식을 전해 듣는 정도가 그나마 남은 삶의 낙이었다.

인터넷으로 드문드문 전해지는 바깥세상의 상황은 점점 나빠지고 있었다. 조상님들의 수는 빠르게 늘어났고, 세상을 가득 채울 정도로 세력이 성장했다. 처음엔 대한민국만의 일이라고 생각했는데, 알고 보니 지구상의 모두가 같은 문제로 고통받고 있었다. 미국에서는 스티브 잡스가 무덤에서 뛰쳐나와 아이폰 엔지니어들을 고문하고 있다고 했고, 유럽에서는 히틀러와 처칠, 드골 사이에서 3차 세계대전이 발발하기 직전이었다. 마오가 되살아난 중국은 참새를 잡느라 여념이 없었고.

그럼 한국은? 한국은 더 최악이었다. 되살아난 독재자들 밑으로 추종자들이 모이기 시작했고, 어찌 된 일인지 맥아더 장군까지 한국 땅에 나타났다. 그들의 지시를 받은 군 출신 조상님들에게 군대는 완전히 장악되었다. “야! 너 해병대 몇 기야?” 한마디에 귀신 잡는 해병대가 속수무책으로 와해되었다는 소문도 들렸다. 전차와 장갑차를 끌고 나타난 조상님들 앞에서 현대의 생존자들은 속수무책이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한국전쟁 참전 용사들과 광복군이 되살아나 별도의 군대를 조직하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독재자들의 군대는 위로는 북한군, 아래로는 국민군과 동시에 전쟁을 벌이기 시작했다. 사회주의파와 민족주의파. 독재파와 민주파. 친일파와 독립파. HOT팬과 젝키팬. 출신에 따라 여러 패거리로 나뉜 조상님들이 서로를 욕하고 싸운 덕분에 생존자들에 대한 관심도 잠시 옅어졌다.

그렇게 별일 없이 1년이 흘렀다.

다시 봄이 되자 서울에서 탈출한 사람들이 점차 세종시로 모여들었다. ‘조상 없애기 운동본부’의 존재를 알음알음 전해 듣고 찾아온 사람들이었다. 한나는 뜻있는 사람들을 규합해 세력을 불리고 체계적인 조직을 갖췄다. 그녀의 지시에 따라, 회원들은 세종정부청사를 요새로 삼고 도시의 식량을 청사 내부에 그러모았다.

전투 요원들을 선발해 생존에 필요한 전투 기술도 가르쳤다. 헤드폰으로 멘탈을 보호하는 법, 어르신에게 뻔뻔하게 맞서는 법, 눈 똑바로 뜨고 대들기, 상대의 약점을 찾아 집요하게 잔소리하기 등등. 모두 조상님 사태 이전부터 경험으로 습득한 지혜들이었다.

“조상님들은 혈압에 약해요. 혈압으로 제압해야 합니다. 그리고 용돈! 부모님 외엔 용돈은 절대 드리면 안 됩니다. 아시겠어요?”

한나의 가르침은 효과적이었다. ‘조상 없애기 운동본부’의 전투 요원들은 작전 개시 수개월 만에 세종시에서 조상님들을 축출해내는 데 성공했다. 이제 세종은 잔소리 청정구역이 되었고, 사람들의 얼굴에서 조금씩 웃음이 되살아났다. 농기계를 가져와 주변 땅을 농지로 개간하는 데 성공한 후로는 식량 문제에도 해결의 실마리가 보이는 것 같았다.

§

그러나 겨울이 되자 희망은 산산이 부서졌다. 오랜 전쟁 끝에 세력을 통일한 독재자들의 군대가 추위를 피해 남하하기 시작한 것이었다. 정찰 부대의 보고에 따르면 청주에 주둔한 부대의 규모가 매일 커지고 있었다. 며칠 뒤에는 수십 대의 전차와 중화기도 도착했다. 만약 군대가 세종시로 밀고 들어온다면 세종청사는 하루도 버티지 못할 터였다.

그즈음, 계룡산 중턱에 생존자들을 위한 도피처가 마련되었다는 소문도 들려왔다. 소문에 따르면, 계룡산은 도인들이 마음수련 하던 곳이라 이곳에는 미련을 갖고 부활한 사람이 거의 없으며, 그나마 일부 부활한 조상님들도 다들 명상에 빠져 조용할 뿐이라는 거였다. 소문을 듣고 모여든 사람들이 조용조용 산성을 쌓아, 이제는 난공불락의 요새가 완성되기 직전이라고 했다.

“우리 계룡산으로 떠납시다.”

미주가 제안했다.

“소문이 진짜일까요? 함정일 수도 있어요.”

수진이 걱정스레 반론했다.

“어차피 군대가 밀고 들어오면 여긴 끝이야. 포탄 한 발이면 전부 박살 날 걸?”

심 선생님도 의견을 거들었다.

모두 일리가 있는 말이었다. 한나는 수진의 품에 안긴 채 밤새 고민했다. 계룡산 도사들? 그런 뜬구름같은 소문에 도박을 걸어도 되는 걸까? 목숨 걸고 개척한 이 땅을 끝까지 사수해야 하지 않을까? 애초에 군대가 여길 그냥 지나칠 수도 있잖아. 여기가 아니라 대전으로 가는 걸 수도…

아니야. 대전에 남은 거라곤 튀김소보로 밖에 없는데 거길 왜 가. 독재자가 원하는 게 뭐겠어? 당연히 정부청사지. 여긴 상징이야. 대한민국 정부를 차지했다는 상징. 여기에 부하들 데려다 장관으로 앉히고, 고위 공무원도 한 자리씩 나눠주고 그러고 싶을 게 분명해.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쉽게 결심이 섰다. 다음 날 아침, 한나는 회원들을 모두 모이도록 했다. 그리고 이렇게 지시했다.

“계룡산으로 갑시다.”

그녀의 지시에 따라 사람들은 일사불란한 움직임으로 짐을 챙겼다. 각자 짐과 식량을 차에 싣고 무기를 챙기니 순식간에 떠날 채비가 완료되었다.

“오늘 밤, 달이 지면 출발합니다.”

한나가 말했다.

해가 떨어지고 어두운 밤이 찾아왔다. 전기가 끊긴 도시는 칠흑처럼 어두웠고, 하늘에 박힌 별빛과 자동차 헤드라이트만이 흐릿하게 길을 밝히고 있었다.

선봉에 선 한나의 봉고차를 따라 수백 대의 차들이 줄지어 출발하기 시작했다. 대략 한 시간을 달려 목적지인 계룡산 근처까지 도착했을 때, 무전기에서 긴급한 외침소리가 들려왔다.

— 습격이다!

뒤이어 하늘에서 조명탄이 터지고 포탄 세례가 쏟아졌다. 눈앞의 도로가 폭발하며 파편이 하늘로 치솟았다. 한나는 급히 핸들을 꺾어 도로에 패인 웅덩이를 피했다.

“언늬이!”

수진이 그녀의 팔에 매달렸다. 차가 거칠게 흔들렸지만, 미주는 무전기를 들고 침착하게 지시를 내렸다. 뒤 칸에서는 심 선생님이 휠체어에 앉은 채로 소총을 꺼내 응사하고 있었다.

“각자 최대한 빨리 여기서 벗어나세요. 계획한 대로 차를 버리고 흩어지는 겁니다!”

한나는 무전기를 받아들고 마지막 지시를 내렸다.

“모두 살아서 계룡산에서 만납시다.”

— 예! 본부장님!

한나는 무전기를 던져버리고 밟을 수 있는 한도까지 엑셀을 밟았다. 충분히 안전해졌다는 판단이 들자 그녀는 갓길에 차를 세웠다.

“선생님, 여기서부턴 걸어서 가야 해요.”

그녀는 미주와 함께 심 선생님의 휠체어를 땅에 내렸다. 선생님은 말이 없었다. 고개를 아래로 떨군 채 한참을 고민하던 선생님은 결연한 표정으로 한나에게 말했다.

“얘들아, 날 두고 가렴.”

“네? 안 돼요. 어떻게 여기 두고 가요!”

“난 어차피 죽은 몸이잖니.”

한나는 당황했다.

“…알고 계셨어요?”

“어렴풋이.”

한나도, 미주도, 수진도 말이 없었다. 선생님은 가볍게 미소지으며 그녀들을 위로했다.

“괜찮아. 내가 저놈들이랑 싸워온 게 몇 년인데.”

“선생님…”

“어서 가. 붙잡히기 전에.”

울음을 터뜨리려는 수진을 억지로 끌어당기며, 미주와 한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선생님, 꼭 무사하셔야 해요.”

세 사람은 마지막으로 인사하고 산을 오르기 시작했다. 한참 산을 올라 중턱에 이르렀을 즈음, 멀리서 선생님의 쩌렁쩌렁한 잔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너희들 그 뺏지 안 떼냐? 육이오 때 태어나지도 않은 놈들이 무슨 낯짝으로 얼어 죽을 종북 타령이야, 종북 타령은! 육시럴 것들 군대는 갔다 오긴 했냐?”


대체 왜 이렇게 돼버린 거지?

겨우 마음을 추스른 한나는 계룡산 요새 중심으로 향했다. 한나의 명성을 익히 들은 각 단체의 지도자들이 그녀를 반갑게 맞이했다.

“반가워요. 조상 없애기 운동본부장 요한나예요.”

여러 단체의 리더 중에서도 가장 중심에 서 있는 남자가 그녀에게 다가와 악수를 청했다.

“내 부모 내 손으로 보내드리기 협회장 이시온입니다.”

“상황은요?”

“계룡산 요새 안에는 12개 단체에서 대략 14만 명 정도가 집결했습니다. 어쩌면 대한민국 최후의 생존자들인 건지도 모르죠. 지금은 함께 힘을 모아 최후의 전투를 준비 중입니다. 식량은 충분하지만 무기는 많이 부족해요.”

“들어올 때 살펴보니까 겨우 돌담뿐이던데, 몰려오는 조상님들을 어떻게 막아내실 셈이죠?”

“여긴 산세가 험해 전차가 올라올 수 없습니다. 조상님들은 대부분 뼈가 약해 여기까지 중화기를 짊어지고 오지도 못하고요. 그동안 전투라고는 소총 사격을 주고받는 정도여서 크게 위협이 되진 않았습니다.”

남자는 자신만만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하지만 한나는 걱정이었다.

“글쎄요. 앞으로도 그럴까요?”

§

밤이 되자 요새 앞으로 모여든 조상님들이 온갖 잔소리를 해대기 시작했다. 한마음으로 공명을 일으킨 그들의 목소리가 어찌나 컸던지 성벽을 지키던 병사들은 속수무책으로 귀에서 피를 쏟으며 쓰러졌다.

“너네 공부는 열심히 하고 있니? 학교에서 몇 등 했어? 뭐? 아무튼 공부 못하는 것들이 환경 탓만 하지. 공부 그거 다 의지력만 있으면 돼. 바위에 딱 앉아서 집중하라 이거야. 정신머리가 썩어서 그래 썩어서. 눈은 동태눈을 해가지고 생각이 있는 거니 없는 거니?” “으른 말이 우습냐? 왜 대꾸가 없어?” “어디서 따박따박 말대꾸야?” “너 몇 키로야? 살은 좀 빠졌니? 운동은 하고 있어? 뱃살이 추욱 늘어져서는 쯔쯔… 가만히 자빠져서 세끼 꼬박, 꼬박, 챙겨 먹으면 살이 빠질 리가 있나.” “내 말이 말 같지가 않냐?” “으른이 말씀하시면 예, 해야지?” “결혼은 언제 할 거니? 머리는 또 그게 뭐야?" “산 속에 비슷한 애들끼리 갇혀서 어디 제대로 된 사람이나 만나겠니?” “다 너 위해서 하는 말이야. 니가 꿀릴 게 뭐가 있어. 대기업 딱 취직해서 좋은 집에 시집가야 할 거 아니니.”

“아무튼 요즘 젊은 것들은…”

“나약해 빠져가지고…”

“옛날이 좋았지…”

몇 달간 밤낮없이 잔소리가 계속되자, 지쳐 쓰러지는 사람들의 수도 점점 늘어났다. 성문을 열고 투항하자는 의견까지 나올 지경이었다. 그럴 때마다 한나는 반대파들에 맞서 결사 항전을 주장했으나, 언제까지 버텨낼 수 있을지는 장담할 수 없었다. 생존자들은 점점 심리적으로 궁지에 몰렸다.

절체절명의 상황에서 희망을 가져온 것은 과학자들이었다. 다년간 연구를 이어온 ‘이성으로 미신을 물리치는 과학자들의 모임’ 소속 연구자들이 조금씩 사태의 원인을 파악하기 시작한 것이었다.

이시온이 소집한 회의에서 과학자들이 성과를 발표했다.

“모든 사태의 원인은 양자 얽힘 현상이었습니다. 죽은 자들의 시신에 남은 원념이 초신성 폭발의 중력파와 양자적으로 공명을 일으켜 이런 현상이 일어난 겁니다.”

“말도 안 돼. 정말로 양자가 원인이 맞다고?”

각 그룹의 리더들이 저마다 황망한 표정으로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한나가 앞으로 나서며 과학자에게 물었다.

“그건 어떻게 알아내신 거예요?”

“한국천문연구원이랑 ETRI⁠가 사태 초기부터 해외 쪽이랑 함께 쭉 연구해 왔거든요. 최근에 저희가 예측 모형을 하나 보냈는데 LIGO⁠ 쪽에서 중력파 검출에 성공했대요. 중력파-양자 얽힘이 원인일 거라는 저희 가설이 현실로 입증된 거죠. 조상님들의 군대가 대전까지 내려온 이유도 그 연구를 막으려 했던 거였고요.”

어이가 없었다. 군대가 세종으로 오는 게 아니었다니. 한나는 허탈한 웃음을 지어 보였다.

“그래서 해법이 뭔데요?”

“멜론 머스킷 재단에 저희 연구 결과를 공유했더니, 그쪽에서 쓸만한 방안이 하나 있답니다.”

“멜론 머스킷? 그 갑부? 그 사람 아직 살아있대요?”

“네. 지금은 우주 정거장에서 생활하고 있다네요.”

“하긴, 우주 회사 사장이니.”

“곧 화성으로 떠날 거랍니다. 화성엔 조상님이 안 계시니까.”

“그건 좀 부럽네요.”

“떠나기 전 마지막 선물로, 스텔라 링크 시스템 운영권을 우리쪽으로 넘겨주기로 했습니다. 그걸 쓰면 지금 사태를 진정시킬 수 있을 거라고요.”

“스텔… 뭐요?”

“스텔라 링크 시스템(Stella Link System)이요. 머스킷 재단이 궤도상에 쏘아 올린 1만 2천 대의 통신 위성이에요. 지금 한나 씨가 스마트폰으로 통신할 수 있는 것도 다 그 위성들 때문이고요.”

“아… 그거?”

한나는 일단 아는 척을 했다.

“그래서 그걸로 뭘 할 수 있는 데요?”

“통신위성으로 일정한 전파를 발산하면 조상님들을 소환하고 있는 중력파에 다른 파동을 겹쳐 양자 요동의 균형을 깨뜨릴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무슨 말인지는 모르겠으나 샘물 떠서 제사 지내자는 것보다는 현실적으로 느껴졌다.

“그럼 어떻게 되는 데요?”

“전파를 발산하는 동안엔 조상님들이 되살아나는 현상이 중단될 겁니다.”

“저 좀비들을 전부 없앨 수 있다고요?”

“아뇨. 이미 생겨난 사람들은 못 없애고요. 새로 생겨나는 것만 막는 겁니다. 조상님들을 소환하는 파동과 정 반대 속성의 파동을 보내서 중화시키는 거죠.”

“파동이라…”

갑자기 한나의 머리 속에 아이디어가 떠올랐다.

“아뇨. 그걸론 부족해요. 이미 넘쳐나는 조상님들만으로도 인류는 멸망 직전이에요. 그럴 거면 차라리 거꾸로 해요. 같은 파동으로 공명을 일으켜서 더 빨리, 더 많은 조상님을 부르는 거예요.”

“한나 씨, 미치셨어요?”

이시온이 끼어들었다.

“안 미쳤어요. 제 말 들어보세요. 조상님들은 잔소리에 약해요. 그렇게 죽어라 잔소리를 해대면서, 정작 자기들은 몇 마디만 들어도 경기를 일으켜 굳어버리거든요. 그러니까 더 오래된 조상님들을 불러야 해요. 그럼 그분들이 젊은 조상님들을 잔소리로 막아주실 거예요. 지금 독립군이 친일파들을 막아주고 있는 것처럼. 제 생각 어때요?”

그러자 이시온이 반론을 제기했다.

“하지만 그 말은 동시에 최강의 꼰… 조상님을 소환하겠다는 뜻이기도 해요. 지금보다 더 오래되고 더 강한 조상님이, 그것도 점점 더 강한 조상님이 나타날 테니까요.”

이미 예상했다는 듯, 한나는 어깨를 으쓱였다.

“상관없어요. 끝까지 가면 유교고 뭐고 예의범절이라는 게 없던 시절까지 거슬러 올라갈 테니까. 우끼끼 거리는 원숭이만 남게 되면 그때 기계를 끄고 제압하자고요.”

“안됩니다. 허락할 수 없어요.”

이시온은 단호했다.

“너무 위험합니다.”


한나는 텐트로 돌아오자마자 멤버들에게 상황을 공유했다.

“그래서 언니! 그놈한테 지고 돌아오신 거예요?”

흥분한 수진의 말을 들으니 다시금 울컥 화가 치솟았다.

“그 사람 말이 아주 틀린 건 아니야. 한나 씨 생각처럼 잘 풀릴 거라는 보장이 없는 건 사실이잖아. 잘못되면 조상님들 세력만 불려주게 될 수도 있어.”

미주의 냉철한 분석을 듣자 조금 기세가 꺾였다. 한나는 아까 전 못다 한 주장을 마저 펼쳤다.

“어차피 지금 상황이 계속 이어지면 우린 다 죽을 거야. 혹시나 일이 잘 풀려서 우리가 승리한다 쳐도, 전 세계의 다른 생존자들도 그럴 수 있을까? 미주 씨, 이거 전 인류의 목숨을 구하는 일이 될 수도 있어. 그냥 못 본 척 넘어가선 안 돼. 우리가 나서야 해.”

“그치만 한나 씨, 이미 이시온이 안 된다고…”

갑자기 수진이 끼어들었다.

“이시온 그놈이 뭔데요? 언니가 왜 그놈 허락 같은 걸 받아야 해요?”

맞아. 내가 왜 그놈 허락을 얻어야 해?

§

세 사람은 늦은 밤 몰래 텐트를 빠져나와 ‘이성으로 미신을 물리치는 과학자들의 모임’ 그룹의 야영지로 향했다. 아까 전 브리핑을 했던 과학자의 텐트를 찾아낸 그들은 조심스럽게 텐트 문을 열고 안으로 뛰어들었다.

“다, 당신들 대체 뭡니...”

“쉿.”

한나는 재빨리 상대의 입을 틀어막았다.

“조용히 해요. 한번만 더 떠들었다간 크게 다칠 수도 있어요.”

과학자가 고개를 끄덕였다. 한나는 그의 입을 풀어주었다. 미주가 다시 텐트 문을 잠갔고, 네 사람은 랜턴 주위에 둘러앉아 이야기를 시작했다.

“아까 전 제 계획 들으셨죠? 저희 좀 도와주세요.”

한나가 말했다. 하지만 과학자는 단호했다.

“이시온 협회장 허락 없이는 못 합니다.”

“아시잖아요. 이게 전 인류를 구할 유일한 길이라는 거.”

“전 모릅니다. 도와드릴 장비도 없고요.”

“거짓말.” 미주가 끼어들었다. “스텔라 링크 시스템엔 아무 단말기에서나 접속 가능하잖아요. 특별한 장비가 필요한 건 아닐 텐데요. 갖고 계신 태블릿으로 접속 할 수 있는 거 아녜요?”

과학자는 끝까지 침묵을 지켰다. 갑자기 수진이 벌떡 일어나 주머니에 감춰둔 무기를 빼들었다. 그녀는 잔뜩 흥분해 있었다.

“당신! 시키는 대로 안 하면 얼굴에 에프킬라 뿌릴 거예요.”

“네?”

“당. 신. 콧. 구. 멍. 에. 다. 에. 프. 킬. 라. 뿌. 린. 다. 고. 요.”

수진이 또박또박 한 글자씩 읊을 때마다 과학자의 표정이 점점 공포에 잠식되어 갔다.

“아, 알겠어요. 할게요. 한다고요.”

당황한 과학자는 허겁지겁 태블릿을 꺼내 들었다. 머스크 재단의 앱을 열고 몇 번 터치하는 것만으로 금세 통신 시스템의 세팅이 끝났다.

“이제 언제든지 시작할 수 있어요. 근데…” 과학자는 사족을 붙였다. “분명 이거 전부 당신을 책임인 겁니다. 전 아무 책임 없다고요.”

“알겠으니까 바로 시작하세요.”

한나가 지시했다. 과학자가 태블릿의 버튼을 누르자 스텔라 링크 시스템은 조상님들의 부활을 촉진하는 파동을 발산하기 시작했다.

순식간에 전 지구가 되살아난 조상님들로 뒤덮였다. 지금까지의 조상님들보다 훨씬 오래되고 위험한, 사악하고 강력한 존재들이 그들의 곁에 나타나 잔소리를 퍼붓기 시작한 것이었다.

한나는 성벽 위로 달려가 사태를 관찰했다.

“어허! 어디서 천한 것들이 양반 앞에서 고개를 빳빳이 들어?”

두루마기를 입고 갓을 쓰고 등장한 조상님이 젊은 조상님들을 갈구고 있었다.

잘한다, 조상님의 조상님. 화이팅, 슈퍼 꼰대.

“이놈이! 49재도 제대로 안 치르고! 뭐어? 3일 하고는 힘들다고 부모 장례를 마쳐? 쯧쯧… 인륜도 모르는 상놈 같으니라고. 쯧쯧…”

그러자 그의 등 뒤에 새로운 조상님이 나타났다.

“뭣이? 49재? 사십구우재? 적어도 3년 상은 채워야지 이 때려죽일 놈들이! 전쟁통에도 꼭 치르는 것이 삼년상이여! 이 불효자 놈들아!”

그러자 그의 등 뒤에서는,

“뭐어? 부모님 돌아가시면 평생 무덤에 뼈를 묻어야지!”

그리고 그의 뒤에서,

“자고로 하늘의 뜻에 따라 나고 죽는 것이 이치이거늘, 어찌 너희는 이 땅에 돌아와 이리 섭리를 어지럽히는가. 꽃이 피고 지듯 자연스럽게 행동해야 마땅한 것이거늘…”

또, 뒤에서,

“제발 철 좀 들거라! 하여튼 요즘 젊은것들이란 왜 이리 예의가 없는지. 쯧쯧…”

시대를 거슬러 거슬러 한없이 옛된 조상님들이 이 땅에 깨어나 젊은 조상들을 훈계하니, 잔소리를 참지 못한 조상님들은 귀를 틀어막고 바닥에 드러눕기 시작했다. 그들은 부르르 떨며 비명을 지르다 이내 돌처럼 굳어버렸다.

새로 모습을 드러내는 조상님들의 복식이 점점 과거로 돌아가고 있었다. 수수했던 조선 시대를 지나 화려한 고려 시대 복식으로 이어지더니, 당나라 풍이 가미된 통일신라 시대 복식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종래에는 옷감의 질이 점점 떨어지고 화려함도 죽어 문명이 없던 시절로 회귀하고 있음을 확연히 알 수 있었다.

“이제 신호 멈출 준비 하세요!”

한나가 소리쳤다. 그녀의 목소리를 들은 과학자가 태블릿을 손에 들고 정지 버튼을 터치할 준비를 했다.

이제 언어라는 것이 점차 사라지고, 짧은 단어만 주고받는 시기가 되었다. 그럼에도 잔소리는 멈출 줄을 몰랐다. 곰 가죽을 뒤집어쓴 조상님이 뼈 몽둥이를 휘두르며 사람들에게 우어우어 훈계하는 모습이 보였다. 인간이란 생물은 문자도 없고, 언어도 없던 먼 옛날에도 남에게 이러저러한 것들을 간섭하기 좋아했던 모양이었다.

“자, 이제 준비!”

한나가 소리쳤다. 언어라는 것이 완전히 사라지고, 인류가 무리조차 이루지 않게 되는 시기가 도래했다. 조상님들은 이제 사람이라기보단 유인원에 가까운 모습이었다.

“정지하세요!”

과학자가 태블릿을 터치했다. 그러나,

“어? 이게 왜 안 되지?”

당황한 과학자가 몇 번이나 화면을 터치했으나 스텔라 링크 시스템은 정지하지 않았다. 파동을 정지시킬 방법이 없었다. 한나는 그의 곁으로 허겁지겁 달려왔다.

“왜 그래요?”

“이, 이게 에러가 났나 봐요. 정지가 안 됩니다.”

“뭐라고요?”

과학자가 망연자실한 표정으로 바닥에 주저앉았다. 그가 떨어뜨린 태블릿 화면엔 하염없이 로딩 표시만 빙글빙글 돌고 있었다.

“언니! 우리 이제 어떡해요!”

수진이 그녀의 팔에 매달려 소리쳤다.

“어떡하긴 뭘 어떡해. 망한 거지.”

미주는 차분히 블루투스 헤드폰을 머리에 뒤집어썼다.

“미안, 수진아. 내가 괜한 오지랖을 부리는 바람에…”

한나가 망연히 중얼거렸다.

곧이어 매머드가 출현해 성곽에 머리를 들이받았다. 그다음엔 온갖 비늘달린 파충류들이, 그리고 결국 지상 최대의 조상님인 공룡들이 이 땅에 나타나기 시작했다. 다시 지상으로 풀려나온 공룡들이 매머드가 뚫어 놓은 구멍을 통해 쏟아져 들어왔다. 공룡들은 요새 내부를 질주하며 조상이건 후손이건 구분 없이 공평하게 모두를 차례차례 집어삼켰다.

그렇게 인류의 종말이 찾아왔으니…

뭐, 어쩌겠는가. 모두 그들의 오지랖이 원인인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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