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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지상 냉동육 by 손지상

2019.11.15 00:0511.15

6회차.jpg
[특집] 괴이한 거울

냉동육

손지상

여자가 비명을 지르는 소리가 열고 닫을 때 마다 나는 낡은 철제 대문 경첩 소리가 귀를 찔러와, 방 구석에 웅크리고 앉아있던 내 기분이 확 나빠진다. 이 동네 배달부든 주민이든 누구나 저 빌어먹을 대문 자물쇠가 망가진 것을 뻔히 알아서 아무도 초인종을 누르지 않고 남의 공간을 함부로 침입해 들어온다.

도둑?

도둑이 들까 봐 걱정할 일은 없다. 주인조차 이사가 버린 — 한 달에 한 번 찾아와 점검하는 정도다 — 이 허물어져 가는 단독주택 반지하 투룸 월세방과 원룸 옥탑방에 물건을 훔쳐갈 도둑은 아무도 없다. 들어와 봤자 빈털털이 대학생들이라 훔칠 물건도 없고, 반지하방이나 옥탑방 현관문은 따로 잠그니 걱정할 필요가 없다.

요사이 저 대문 밖으로 통 나가지 않았다. 대문 안 잠겨 있는 현관문을 나가는 일은 일주일에 두 번 정도 시키는 배달음식을 가지러 갈 때뿐이다. 밖으로 나갈 때 마다 기분이 나빠지기 때문이다. 어플리케이션으로 시켜서 따로 얼굴 보고 돈을 낼 필요가 없다. 혹시라도 노크해 음식을 건네려고 하면,

“그냥 앞에 놓고 가세요.”

하고 고함친다. 그러면 배달부는 욕을 하면서 음식을 놓고 비명 소리 내는 대문 밖으로 나간다. 비명 소리가 사라지고 나서야 현관문을 살짝 열고 음식을 챙긴다.

문제는 나는 오늘은 배달 같은 걸 시킨 적이 없다는 점이다.

‘도대체 누구지, 설마?’

공포에 질린 나는 룸메이트 친구 얼굴을 떠올렸다. 등줄기가 오싹해진다. 공포에 질려 피부가 차갑게 얼어버린다. 대문 안으로 들어오는 발자국 소리가 현관문 앞에서 멈춘다. 누구냐고 소리 지르고 싶지도 않았다. 웅크린 채로 차갑게 굳어버려, 이대로 저 정체 모를 발자국 소리가 다시 떠나기만을 빈다.

철커덕.

잠긴 현관문이 열리는 소리가 난다. 문이 열린다. 발자국이 안으로 들어온다. 사람이 움직일 때 나는 부산스러운 소리가 들린다.

‘안 돼.’ 속으로 중얼거린다.

발자국이 반지하방 안의 작은 계단을 내려와, 부엌을 겸한 좁은 거실 안을 걷는다. 오래된 노란 장판 위로 무언가가 걷는 소리가 들린다. 이어서 가장 안쪽 — 투룸 가운데 친구는 안쪽 큰 방을 쓴다 — 방문을 열려고 문손잡이를 돌리는 소리도 난다.

철컥철컥.

작은 방에서 웅크린 나는 이대로 냉동창고 걸쇠에 걸린 고깃덩이처럼 얼어붙은 채 잡아먹힐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공포에 떨었다.

‘잠깐?’

공포 속에서 문득 의문이 들었다.

‘방문 잠갔나?’

며칠 째 제대로 먹지도 못 하고 공포에 질려 있어서 그런지, 얼어붙은 머리가 영 굴러가지 않는다. 분명 잠갔다. 하지만 확신이 안 갔다. 대문 밖을 나섰을 때 분명 가스밸브 잠근 것 같은데 살짝 다른 일에 집중하느라 확실하지 않은 그런 상태였다. 당황한 나는 방문을 잠갔나 확인하려고 일어서려 한다. 동시에, 그 자리에 그대로 멈춰 있어야 한다는 충동도 느낀다. 줄다리기하듯 팽팽하게 서로 길항하는 충동 사이에 껴서 어쩔 줄 모른 채 과열된 컴퓨터처럼 ‘프리즈’(freez) 상태가 되어버렸다.

철커덕 철커덕.

침입자가 문을 열려고 시도한다. 그러나 문은 잠겨 있다.

‘다행이다.’

안도의 한숨을 속으로 내 쉰 나는 아예 반응을 안 하기로 결심했다. 이대로 얼어붙어 있으면 방에 아무도 없다고 생각하고 떠나주지 않을까 기대한 것이다.

헛된 기대였다.

열쇠를 넣고 문이 열리는 소리가 난다.

침입자가 내 방문 열쇠를 가지고 있다.

깜짝 놀란 나는 엄청난 공포가 짓눌러와 소리 없이 무릎을 끌어안고 눈을 꼭 감았다. 눈꺼풀 안쪽 검보라색 스크린 위로 점점이 이상한 빛이 깜빡깜빡거린다.

“뭐하고 있어?”

익숙한 목소리에 놀라 고개를 든다.

“냄새. 환기 좀 시켜라. 아이고, 창문이 높네. 이 방도 그렇구나?”

침입자— 룸메이트의 여자친구에게, 나는 대꾸하지 않았다. 나는 농담처럼 룸메이트 여자친구를 ‘제수씨씨’라고 불렀다. 나와 룸메이트와 룸메이트 여자친구는 모두 같은 과 동기다. 우리 셋 다 재수학원에서부터 아는 사이고, 과CC를 하고 있어서 내가 농담삼아 만든 별명이다. 농담이라도 끼워 넣지 않으면 ‘제수씨씨’와 나 사이의 변한 거리감을 참기 힘들어졌기 때문이다.

“밥 안 먹었지? 얼굴 보니까 뭐 안 먹은 티가 나네. 밥 먹자. 내가 만들어줄게.”

‘제수씨씨’는 부엌에서 음식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에코백 장바구니에 잔뜩 무언가를 들고 왔다. 대파가 장바구니 밖으로 삐져나와 있었다.

“뭐하러 왔어?”

제수씨씨의 등에 대고, 나는 룸메이트 때문에 왔냐고 물었다. 제수씨씨야 말로 나 다음으로 룸메이트가 실종됐다는 사실을 알았을 테니 걱정되서 온 것이리라.

‘그런 것치고는 너무 늦게 온 것 같지만.’

부산하게 부엌에서 움직이면서 제수씨씨는 남자친구인 룸메이트가 아니라 내가 걱정되어 왔다고 했다.

“수업도 빼먹고 과실도 안 오니까. 죽었나 살았나 궁금해서 온 거지.”

룸메이트는 걱정이 안 되냐고 묻자, 의외의 대답이 돌아왔다.

“연락 왔는데? 급하게 본가 내려간 거라고? 어머니하고도 통화했어.”

“뭐? 연락 했다고?”

“어. 왜?”

“그럼 방은 왜 열려고 했어?”

“물건 챙겨달라고 해서 그거 가지러 갔었지. 어디 아픈가 걱정되서 왔더니 고마워도 안 하고 뭘 자꾸 꼬치꼬치 캐물어?”

“미안.”

“됐고. 일단 뭐 먹어. 얼굴이 아주 다 죽어간다. 죽은 나중에 먹어, 냉장고에 넣어놓을 테니까. 일단은 영양보충 좀 하자.”

“영양보충?”

닭이라도 시키려나 싶었는데, 제수씨씨가 생각지도 못한 질문을 던졌다.

“더 좋은 거 먹자. 부루스타 어디 있어?”

휴대용 가스 버너가 어디 있느냐 물으면서, 부엌 위쪽 찬장을 연다.

“아, 여기 있네.”

“갑자기 그건 왜?”

“신문지도 교지 신문으로 챙겨 왔어. 환기도 시킬 겸, 문 다 활짝 열고 고기나 구워 먹자. 영양보충 하면 삼겹살이지.”

하고 제수씨씨가 냉장고 냉동실을 열더니 랩으로 싼 얼린 고깃덩이를 꺼내 내 보였다.

그 순간, 심장이 뛰었다.

얼음고기.

미친 듯이 내달리는 박동 때문에 어지럽다.

입에서 비명이 터져 나왔다.

“안 돼! 그거 치워! 안 돼!”

“왜 그래? 무슨 일이야?”

“안 돼! 얼음! 얼음! 얼음!”

나는 정신이 아득해져갔다.

제수씨씨가 급하게 내게 달려와 어깨에 손을 대려고 했다.

“내 몸에 손 대지 마!”

화들짝 놀란 제수씨씨가 누전된 전깃줄이라도 만진 것처럼 뒤로 물러선다.

“무슨 일 있었어? 정말 괜찮아?”

제수씨씨에게는 돌아가 달라고 했지만, 말을 듣지 않는다.

평소에도 오지랖이 넓은 편이지만 이 정도로 고집이 세지는 않다. 내가 신경질적인 모습을 보여서 그런지, 가끔씩 엉뚱한 사람처럼 목소리가 낮게 깔려 쉰 목소리를 내기도 했다.

“정말 미안해. 그냥 좀 요새 안 좋은 일이 있었거든.”

“혹시 그거 두 달 전 일이야?”

깜짝 놀란 나는 고개를 번쩍 든다. 눈 앞의 제수씨씨가 마치 다른 사람처럼 느껴진다.

“그걸 네가 어떻게 알아?”

“통화했다고 했잖아.”

나는 바로 그 말이 무슨 뜻인지 이해했다. 룸메이트와 연락하면서 들었다는 말이리라.

“뭘 얼마나 들었어?”

“그래서 본가 다녀오겠다고.”

제수씨씨는 내 말을 무시하고 자기 말만 했다. 평소에도 그러듯이.

“뭘 얼마나 들었냐니까? 무슨 일이었는지는 못 듣고?”

“도대체 무슨 일인데 그래?”

제수씨씨의 간절한 애원에도 나는 더 이상 이야기하지 않고 입을 다물었다. 정말 룸메이트한테 들은 게 맞을까? 어쩌면 룸메이트의 위치를 확인하기 위해 나에게 어떠한 종류의 페인트를 걸고 있는지도 모른다. 최근 들어 두 사람은 싸움도 잦았으니까.

솔직히 싸움이 잦아서 희망을 품기도 했다. 하지만 지금은 그저 혼자 있고 싶다.

제수씨씨는 내 앞에 와 털썩 주저앉았다. 그리고 나를 빤히 쳐다보았다. 고개를 들지 않아도, 정수리로 쏟아지는 뜨거운 시선이 느껴진다.

“그냥 가줘.”

“솔직하게 다 말해줄 때 까지는 안 갈 거야. 싸웠어?”

“아냐.”

“그럼 저저번주에 무슨 일 있었는지 말해줘.”

“안 믿을 거야.”

“믿고 안 믿고는 내가 결정할게. 말해줘.”

“내가 하는 말, 아마 못 믿을 거야. 내가 꿈꾼 걸 수 도 있어. 하지만 믿어줘. 다 사실이니까. 적어도 내가 느끼기에는. 그게 꿈이나 착각은 절대 아니야. 하지만 넌 그렇게 생각하겠지. 아마 못 믿을 거야.”

“괜찮으니까, 해봐. 내가 다 믿어줄게.”

제수씨씨가 상냥한 손짓으로 내 손등을 만진다.

머릿속에서 종소리가 울린다.

내 안에 나를 가로막던 모든 게 다 녹아내리는 기분이 든다.

나는 고개를 들었다. 눈 앞에 제수씨씨의 얼굴이 보인다. 이렇게 가까운 거리에서, 이렇게 아름다운 얼굴을 바라본 게 얼마 만인가? 그런데도 나는 왜 이 얼굴이 이렇게 무섭게 보인단 말인가? 알 수 없는 힘을 뿜어내는 시선에 저항하지 못한 채, 시키는 대로 모든 것을 말해야 한다는 충동에 휩싸인 나는 순순히 이야기를 시작하기 시작했다.


두 달 전 밤이었어.

룸메랑 나랑 밤 늦게까지 술을 마셨어. 왜 마셨냐고? 그냥. 과 행사 있었잖아. 그거 끝나고, 그냥 들어가기 뭐해서 호프집 가서 맥주 좀 더 마셨어. 할 이야기도 있었고. 우리 둘이 이야기하고 있는데, 상준이가 끼어들더라고. 하필이면 밖에 있는 파라솔 자리에 앉아가지고.

상준이 모르나? 염상준. 민속학과 과대. 소설 쓴다는. 모르는구나. LT(Leadership Training)라고, 각 과에 학생회 멤버랑 과대들이 가는 MT 있는데 그 때 알게 된 친구야.

무시하려고 했는데, 상준이가 워낙 눈치도 없고 시끄러워서 눌러 앉는 거야. 다다음달에는 상준이랑 룸메 둘 다 군대 가기도 해서, 룸메가 앉으라고 권하더라고. 그래서 끼는 걸 뭐라 할 수 가 없더라고.

— 군대 간다고 룸메 대타 찾는 이야기 하는 거야?

난 아직 할 이야기가 더 남았는데, 상준이가 있으면 하기 좀 그렇잖아? 그래서 그냥 그렇다고 하고 입을 다물었어. (무슨 이야기인지는 지금 하는 이야기랑 관계 없으니까, 일단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만 집중해서 이야기할게.) 그런 상황에서 상준이가 한 말에, 나는 좀 화가 났어. 그래서 뭐라고 했지. 그리고 우리 무슨 이야기하는가 들었냐고. 자기는 아니라고 딱 잡아 떼더라고.

— 야, 일단 닭 한 마리 더 시키자.

하고 말을 돌리더니, 바로 메뉴판이랑 오백 한 잔 달라고 종업원한테 주문했어. 그리고 우리더러,

— 뭘 그렇게 인상 구기냐. 내가 먹은 건 내가 낼게. 아니다, 아예 이 자리는 내가 쏠게. 갑자기 끼어들었으니까 그 정도는 해야지.

— 웬일이냐?

하고, 룸메가 물어보니까, 자기가 이번에 쓴 단편소설이 무슨 웹진에 팔려서 원고료를 조금 받았다나 봐. 그래 봤자 30만 원이지만, 자기 입장에서는 공돈이니까, 남들한테 한턱 쏘는 거라고 그랬어.

무슨 내용을 가지고 썼냐고 물으니까, 괴담이래.

맞아, 괴담.

도시전설 같은 거 있잖아.

나는 화제를 돌리려고 무슨 괴담이었냐고 물었어. 그랬더니 자기가 직접 들은 괴담이라면서, 여기, 그러니까 우리 집 가려면 항상 지나치는 넓은 주차장에 얽힌 이야기라고 했어. 맞아. 거기 있는 주차장. 망한 데. 차량 들어가지 못 하게 표지판 서 있는 데. 왜 못 들어가게 할까?

상준이는 그 주차장에 얽힌 괴담을 들었대. 고등학생들한테.

— 가끔씩 밤에 늦게 돌아다니는 사람들이 거기서 시커먼 그림자가 서 있는 걸 본다는 거야. 그것도 하나나 두 개가 아니라 여러 명이. 그런데 그게 궁금해서 안에 들어가서 그걸 만지면, 갑자기 그 그림자가 움직이면서 막 돌아다닌대. 그래서 그거 가지고 단편 썼어.

제목이 뭐냐고 물었더니 엉뚱한 소리를 했어.

— 얼음땡.

의외로 룸메가 관심을 보이더라고.

— 그거 우리 동네는 얼음망치라 했는데.

라나?

나는 그냥 가만히 듣기만 했어.

응? 술래잡기 얼음땡 몰라? 일본에서는 안 해? 애들이 막 돌아다니면 한 명이 잡으러 다니는…… 오니곳코? 그게 무슨 뜻이야? 도깨비 놀이? 술래를 도깨비라고 하나 보지? 오니가 도깨비야? 그러고 보니 상준이도 그러더라고, 그 영화 있잖아, 삐에로가 나오는 공포영화. <그것>이었나? 상준이 말로는 그게 영어 제목이 <IT>인데, 영어로 술래가 ‘it’이라고 하더라고. 얼음땡은 술래잡기랑 비슷한데, 잡히기 직전에 ‘얼음’ 하고 소리 지르면 술래가 못 잡아. 대신 얼은 거니까 꼼짝 못 해. 누가 다른 사람이 와서 터치해서 ‘땡’을 해줘야 돼. 우리 동네에서는 얼음한 애가 가까이 있으면 ‘부싯돌’이라고 해서 둘이 부딪치면 ‘얼음’ 풀리는 규칙도 있어. 룸메네 동네에서는 모두가 다 얼음 하면 한 명만 술래가 땡 시킬 수 있는 ‘망치’라는 것도 있었대.

여하튼 간에—

상준이는 그 그림자가 실은 귀신이 얼음땡을 한다는 식으로 단편을 썼대. 뭐 뻔한 이야기지. 그 주차장이 실은 무덤 터였고, 무덤 터 위에 세운 연립주택이 있었는데, 거기에서 친하게 지내던 애기들이 건물 불타는 바람에 죽었고, 무덤 터였다 이제는 건물 터가 되었다가 이제는 주차장이 된 그 자리에서 아이들 유령이 계속 얼음땡 놀이를 하고 있다는 거지.

뻔하지만 그럴듯한 이야기였어. 실제로 그 주차장에서 그런 소문이 돈다는 말은 나도 언뜻 들은 적이 있기는 했으니까.

자리가 파하고, 상준이는 다른 술자리로 떠났어. 그렇게 여기저기 다니면서 사람들 이야기에 걸근대는 게 버릇이거든. 그러다가 뭐 하나 걸리면 소설로 쓰는 거지. 소설 쓴다는 사람들은 다 그런가?

결국 나랑 룸메는 원래 하던 얘기를 마저 하기도 분위기가 그래서 일단 집으로 들어가기로 했어. 집으로 가는 동안 우리는 아무 말도 안 했고. 어색했거든.

골목길이라 어두컴컴했고, 오렌지색 가로등불도 평소보다 좀 기분 나쁘게 보였어. 시간이 그렇게 늦은 건 아니었는데 — 열두시 지났나, 안 지났나쯤? — 사람도 적고 차도 잘 안 지나다니더라고.

룸메가 먼저 말을 꺼냈어.

— 야, 저거 봐봐.

하고, 손가락질을 하는 거야.

나는 장난치지 말라고 무시하고 그냥 가려고 했는데,

— 저거 보라니까!

하고, 룸메가 날 확 잡아당겼어. 어깨가 다 아프더라고.

나는 화가 나서 소리치다가, 헉 하고 놀라고 말았어. 우리 둘 다 발을 못 떼겠더라고. 하필이면 아까 상준이가 이야기했던 바로 그 주차장 앞에 우리는 있었어. 나는 내 생각에 빠져서 땅만 보고 걷다가 그 사실을 몰랐던 거야.

주차장에는 검은 그림자가 몇 개 서 있었어. 서 있었다고., 맞아. 낡은 가로등이 하나 있기는 하지. 하지만 그 가로등 불빛을 우뚝 선 그림자 몇 개가 가로막고 서 있었다니까. 땅 바닥 표면에 그려진 게 아니라, 땅 위로 솟아 있었어. 마치 검은 연기가 아래에서 피어오르는 것처럼.

그때까지도 나는 그게나 룸메가 나한테 장난치는 거라는 의심을 버리지 못했어. 난 원래 그런 거 안 믿는 사람이니까.

하지만 등줄기가 너무 오싹해서 내 몸은 마음과 반대로 반응했어. 순간적으로 그 광경을 보니까, 그 자리에서 얼어붙더라고. 룸메도, 나도.

얼마나 긴 시간을 그렇게 굳었는지도 모르겠어. 시간이 멈춘 것 같았으니까. 그래도 한 몇 초밖에 안 되었겠지.

갑자기 룸메가 어깨를 부딪쳐 오더라고. 그제야 정신을 차렸어. 내가 얼른 등을 돌리고 도망치려고 하니까, 룸메가 팔을 꽉 붙들고는 귓가에 대고 속삭이더라고.

— 움직이지 마. 조용히 도망가자. 들키지 않게. 쫓아올지도 몰라. 그러니까 등은 돌리지 마. 우리가 바라보면 저쪽도 함부로 덤비지 않을 거야.

나는 아주 살짝 턱을 움직여 동의했어.

검은 그림자들을 똑바로 쳐다보면서, 우리 둘은 아주 천천히 움직였어. 뒷걸음질 치면서.

그제야 우리는 발견하고 만 거야.

꼼짝도 않는 검은 그림자 사이로 뭔가 다른 게 보였어. 뭔지는 잘 보이지 않았어. 아니. 아예 보이지 않았다고 해야 맞겠지. 투명인간 같은 게 그림자 사이를 지나 다니고 있었어.

어떻게 알았냐고?

투명인간 같은 게 돌아다닐 때마다, 물병을 통해서 세상을 보는 것처럼 그림자가 이렇게 저렇게 뒤틀려서 왜곡돼서 보였거든.

솔직히 처음에는 혹시나 착각한 거 아닌가 싶기도 했어. 거리도 좀 떨어져 있고, 주변은 어둡고. 우린 술도 조금 마셨으니까. 애초에 검은 그림자가 우뚝 선 것도 맨 정신으로 본 건가 의심스러울 정도잖아?

그런데 룸메가 귓속말로 물어보더라고.

— 봤어?

난 짧게 봤다고만 했어.

우리는 따로 말할 필요 없이 똑같이 투명한 무언가가 더 존재한다는 걸 알게 됐고, 아마도 동시에 똑같은 걱정을 하게 된 것 같아. 무서웠던 거지.

그 투명한 게 우릴 쫓아오면 어쩌지, 하고.

하필이면 현실이 되었어. 갑자기 그 투명인간 같은 게 멈추더라고. 우린 이미 한 오백 미터 정도 떨어져 있었고. 그래서 멈춘 것도 명확히 보이지 않았어. 언제부터 멈췄나도 몰랐고.

어쩌면 멈춰 서서 우리를 보고 있었는지도 몰라.

갑자기 그 투명한 것 위로 무슨 스캔하는 것처럼 위에서 아래로 파란 은색 빛이 훑고 지나갔어. 빛은 천천히 위아래로 계속 움직였어.

그 전까지는 그림자를 지나칠 때 그림자가 왜곡되어 보이니까 무언가가 움직인다는 걸 어렴풋이 알았는데, 빛 때문에 어떤 존재가 있고 그게 어디에 있는 지 확실하게 보였어.

그 빛을 내는 투명한 것이 갑자기 못 들어가게 막아놓은 표지판을 빙 둘러서 주차장 밖으로 나오려는 거야.

온다.

동시에 그렇게 느꼈나봐.

우리 둘 다 그 순간 비명을 질렀어. 그리고 고개를 숙이고 막 뛰기 시작했어.

정신없이 뛰었어. 집까지 올라가는 오르막길 한 가운데 어설프게 만든 시멘트 계단을 연달아 뛰어오르면서 쫓아오는 투명한 무언가에게서 도망치려고 했지. 그런데 평소에도 운동 많이 하는 룸메가 나보다 더 빨리 달리는 거야. 너무 그 등이 미워 보이더라고— 왜 그런 농담 있잖아. 곰이 뒤쫓아오는 와중에 친구 둘 중 한 명이 이렇게 말하는 거. 곰보다 빨리 뛸 필요는 없어, 너보다 빨리 뛰기만 하면 돼— 괜히 그 농담 때문에 불안해지는 거야. 이대로 가다 내가 잡아 먹힐까 봐.

그래서 나도 모르게 뒤를 돌아보고 말았어.

순간적으로 몸이 굳어버렸어.

스캔하는 빛이 골목길을 스캔하며 천천히 다가오고 있었어. 마치 자기를 발견한 게 누구인지 확인이라도 하듯. 머릿속에서 종소리가 들리는 기분이 들었어. 작은 종소리 있잖아. 초등학교 선생님이 아이들 집중시키려고 치는 그런 종소리.

목 너머까지 넘어오려는 비명을 꾹 삼키고, 더 빨리 달리려고 다리에 힘을 쏟았어. 최소한 룸메보다는 빨리 달리자고 마음 먹었어.

룸메가 먼저 여자 비명 소리 같은 쇳소리 나는 저 대문으로 들어갔어. 순간적으로 걱정이 들었어. 혹시라도 룸메가 잠기지도 않는 문을 닫아 나를 제물로 삼지는 않을까 말이야. 하지만 룸메는 그러지 않았어.

— 빨리 들어와, 빨리!

하고, 문을 붙잡고 기다려줬어. 내가 들어오자마자, 옆에 있던 빗자루로 빗장을 괴더라고. 그래 봤자 저 빛이 못 들어올지는 확실하지 않아도, 스캔하는 빛에게 들키지 않을 순 있을 것 같더라고. 적어도 표지판을 돌아서 나온 걸 보면, 물리적인 물건을 통과하지는 못하는 것 같으니까.

우리는 당장 현관문으로 뛰어갔어. 키를 꺼내 여는 내내 손이 떨려서 허둥지둥 대느라 평소보다 오히려 시간이 더 걸렸어.

안에 들어가 문을 잠그자마자, 나는 내 방으로 들어가 문을 잠갔어.

룸메가 문을 두들기며 같이 있자고 하더라고. 하지만 나는 혼자 있고 싶다고 했지. 아까처럼 여기 쭈그리고 앉아 눈을 감고 귀를 막았어. 나는 어떻게 해야 좋을 지 몰라 계속 방금 본 게 착각이라고 믿으려고 했어. 룸메는 계속 문을 두들겼어.

— 야, 같이 있자. 공포영화나 <김전일> 못 봤어? 이럴 때 혼자 있으면 죽어. 그게 뭔지 확실히 알아야 대처를 하든 말든 할 거 아냐.

그러는 게 살 확률이 더 큰 것 같기는 해서, 시키는 대로 문을 열었어. 룸메가 들어와서 문을 잠그더니, 서성거리기 시작하더라고. 두서없이 이런저런 이야기를 했는데, 도대체 그 그림자와 투명하고 빛을 내는 것의 정체랑 과연 밤에만 나타날까, 결국은 이 두 가지로 압축되었어. 물론 답은 나오지 않았지. 아는 게 없으니까. 괜히 상준이한테 그런 이야기를 들어서 헛것을 본 것이라는 생각도 했어.

결국 룸메는 무섭다고 자기 방을 안 가고, 내 방에서 잠들어버렸지. 방금 전 나 들어오라고 문을 붙잡아주던 놈이 이놈 맞나 싶더라고.

나는 불도 안 끄고 아침이 올 때까지 속 편하게 자는 룸메를 노려봤어. 꼼짝도 안 하고.

다음 날 아침 1교시 수업이 있었는데 나는 나가기 싫었어. 그런데 룸메는 갔다 오겠다고 했어. 상준이를 만나 좀 더 물어보겠다고 하더라고. 나는 말리지 않았어. 저녁이 되고 아직 해가 떨어지기 전이 돼서 룸메가 돌아왔어— 그 사이 나는 하루 종일 밖에서 나가지 않았지. 한쪽 구석에 쭈그리고 앉아서 계속 생각만 했어. 뭘 어떻게 하면 좋을지— 룸메는 조사한 내용을 내게 전해줬지.

상준이 말로는 가끔씩 이 주변에 1년에 한 명꼴로 실종되는 사람이 있대. 그게 중간에 학교를 자퇴하고 야반도주를 한 건지 아니면 어떤 범죄에 연루되는 건지는 모르지만 어찌되었든 종적을 감추고 사라지는 사람은 이 동네에서 드물지 않대. 그럴 만도 하지. 재개발 지역으로 몇십 년째 묶여 있어서 낙후된 데다가 대학교 주변이라 뜨내기가 잔뜩 모여 사니까.

그리고 지금 여기 집도 그렇고 토박이 중에는 나랑 룸메가 본 그 이상한 현상을 목격한 사람이 의외로 많다고 했어. 옛날에는 위협적이지 않았기 때문에 토박이들이 별로 무서워하지 않았는데, 학생들을 세 주고 나서부터 달라지기 시작해서 점점 이사 가는 사람이 늘었다는 거야. 그러고 보니 이 집도 주인이 어쩌다 한 번 확인하러 오지 같이 살지 않은 지 오래니까. 그래서 이 언덕에 있는 집들이 죄다 싼 거라고 하더라고. 언덕 입구에 있는 그 주차장 때문에.

정체는 토박이들도 모른대. 상준이 말로는 어쩌면 한참 오래전부터 있었던 현상일 수도 있고, 오래전부터 그런 현상이 있었다고 사람들끼리 최근 들어 이야기를 지어낸 것일 수도 있대. 민속학적으로 말하자면 입에서 입으로 전하는 이야기는 특정한 시간축을 바탕으로 과거, 현재, 미래를 구분하는 일이 없기 때문에 최근 십여 년 전 일도 갑자기 아주 오래전 이야기로 둔갑한다는 거야.

결론적으로 말해서, 정체에 대해 알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말이지.

룸메는 어디서 들은 건지, 올 때 천일염을 잔뜩 사 왔어. 대문 앞이랑 현관 앞에 뿌렸대. 그리고 자기 몸에 이미 뿌렸고, 나더러도 소금을 뿌려주겠다는 거야. 나는 아무 말 없이 시키는 대로 바보처럼 소금을 맞았어.

— 야, 근데 이거 괜히 우리가 우리 고기 염장해서 더 맛있어지는 거 아닌가 모르겠다?

하고, 룸메가 농담을 하더라고. 아마 긴장해서 자기도 모르게 부담을 덜어내려고 한 것일지도 모르겠어, 지금 와서 생각하면. 하지만 그때 나는 그런 말을 받아들여서 웃을 여유가 없었다. 룸메한테 재수없는 말 하지 말라고 소리를 빽 질렀지. 룸메는 미안하다고 하면서도 기분이 상했는지, 자기 방으로 가버렸어. 그래도 나가는 길에 내 방 문지방에 소금을 뿌려주더라고. 그런 모습이 솔직히 짜증났어. 자기가 착한 짓을 하면 복을 받을 거라 믿는 것만 같았거든. 평소에도 그런 소리를 자주 해서 그렇게 느꼈는지도 모르겠지만.

나는 인터넷을 막 뒤졌어. 혹시라도 이런 문제에 대한 정보가 있지는 않을까 하고. 하지만 무슨 ‘혼자서 하는 숨바꼭질’이니 하는 날조된 주술만 나오지 내가 찾고 싶었던 정보는 없더라고. 이상한 사람들이 이상한 말을 하면서 자기 외로우니까 관심 가져달라고 징징댈 뿐이었어. 누구는 지금 목숨이 달렸는데. 그 때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어.

룸메는 오늘 나갔다 왔는데도 멀쩡했어. 하지만 과연 나도 그럴까? 성경이나 옛날 설화를 보면 그런 거 있잖아. 뒤돌아 보지 말라는 데 뒤돌아 봤다가 소금기둥 되었다는 둥 그런 거. 혹시 나도 그런 거면 어쩌지 하는 생각이 들었어. 나만 선택 받은 거라면 어떻게 하지?

그걸 확인해 보는 방법은 결국 내가 밖에 나가는 수 밖에 없잖아.

하지만 난 나가고 싶지 않았어.

그렇게 한 달을 넘게 버텼어. 그 사이 룸메는 학교도 왔다 갔다 했고, 무언가 이것저것 물건을 사들여서 대비책을 마련하려고도 했어. 절에 가서 염주를 얻어오거나, 성당 성수를 어떻게든 구해보려고 하거나 뭐 그런 식이었지. 종교도 없는 놈이 그러는 게 솔직히 웃겼지만, 그러는 와중에 밤에 들어온 적도 있는데 괜찮다 보니까 점점 긴장도 풀린 모양이야. 한 달이 넘으니까 평소와 다름 없어지더라고. 안심이 되었는지 그때 너랑 데이트도 가고 그랬었어. 진짜 배짱이 좋은 건지, 아니면 무감각한 건지 모르겠더라고. 나만 속이 찢어졌지, 뭐.

그야 룸메는 그 이상한 빛이 어두운 골목을 스캔하는 꼴을 못 봤으니까.

난 봤지만.

결국 나는 아무런 근거도 없이 한 가지 결론에 도달했어. 룸메가 아니라 내가 타깃이 된 거야. 그 이상한 빛을 뿜는 투명한 ‘술래’의 타깃이. 안 그러고서야 왜 골목을 그렇게 스캔하면서 훑었겠어?

머릿속에서는 오르막길을 뛰어오르는 룸메 뒷모습이 자꾸 생각났어. 지금도 내가 그 등 뒤를 쫓아가는 것만 같았어. 뒤에는 곰보다 무서운 형체를 알 수 없는 괴물이 돌아다니는데. 이대로 앉아 있다가는 당할 게 뻔했어. 뭔가 계획을 세워야 할 것 같았지.

나는 행동에 나서기로 결심했어.

어차피 이대로는 죽을 게 뻔하니까.

그날 저녁, 룸메가 방으로 돌아왔어. 이제는 소금도 대충 뿌리더라고. 나는 내 방 문 밖에 나가 부엌 겸 거실에 앉아있었지.

— 방에서 나왔네? 이제 좀 괜찮아?

하고 룸메가 물어봐서, 네 덕분에 이제 무섭지 않다고 했어. 룸메는 자기 일처럼 기뻐하더라고. 아마 그 날 일을 그냥 헛것을 본 거라고 치부하고 잊어버리려고 했는데, 그동안 내가 계속 그 일을 무서워하니까 그러지를 못해 거슬렸을지도 모르지.

나는 오랜만에 나가서 닭이나 먹으러 가자고 제안했어. 룸메는 찬성했어. 호프집에 가려면 그 주차장을 지나쳐야 해. 그 사실을 자각했는지 룸메는 그동안 자기가 계속 그 앞을 지나다녔지만 아무 일도 없었다고 계속 강조하더라고. 나도 한 번 그렇게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는 경험을 하면 겁을 내지 않을 거라고 생각한 모양이야.

오랜만에 맡는 밤공기는 의외로 상쾌했어. 반지하방에서 한 달이 넘게 나가지 않았으니까. 여전히 등줄기에서 털이 곤두서더라. 주변에 혹시라도 이상한 빛이 보이지 않을까 신경도 곤두세웠고. 다행히 별다른 일은 없었어. 룸메도 내가 그러는 줄은 모르는 모양이더라고. 속 편하게 말이야.

호프집에 와서도 나는 일부러 맥주를 마시지 않았어. 아직까지 겁이 난다고 핑계를 댔지. 대신 룸메가 기분이 좋은지 거나하게 취했어. 아마도 이제 그 날의 공포에서 완전히 벗어났는지, 아니면 벗어났다고 믿고 싶은 것인지, 안주 삼아 시킨 닭도 다 먹어치우고 술도 소맥을 말아서 막 들이켰어. 알잖아, 평소처럼.

다 먹고 나서, 우리는 다시 방으로 돌아가려고 자리에서 일어섰어. 비틀거리는 룸메를 부축하면서 나는 바닥만 보고 걸었는데, 그 사이, 룸메는 네 자랑을 했어. 네가 얼마나 좋은 사람인지, 얼마나 마음이 예쁜 사람인지 말이야. 말하지 않아도 나도 잘 아는데 말이야. 굳이 그 이야기를 꺼내면서 나한테 미안하다고 하더라고. 내가 뭐가 미안하냐고 물어봤지. 그러니까 그러는 거야.

— 아니 그냥, 어쩌다 보니까 그렇게 되었어. 미안하다. 군대 가는데 좀 있으면, 잘 부탁한다.

무슨 부탁을 하는 지 물어봐도, 술에 취해 횡설수설하는 판에 이해하기가 어려웠어— 이런 말을 룸메가 했다는 걸 너한테 말할 생각은 없었는데. 말하다 보니까 여기까지 이야기가 나왔네. 미안— 난 그 말에 대충 대답했어. 신경 쓰지 않았거든. 느낌으로 주차장이 다가오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으니까.

차마 얼굴을 들고 보지 못하겠더라고. 내가 본 것과 비슷한 걸, 룸메가 보게 만들고 싶었어. 근거는 없지만 최소한 같은 출발선상에 서게 되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들었거든.

헉, 하고 놀라는 소리가 났어. 난 반응하지 않았어. 발도 멈췄어. 룸메가 부축한 나를 꽉 껴안고 흔들면서 소리쳤어.

— 저거 뭐야? 저 반짝이는 게 뭐야? 온다! 온다!

솔직히 말할게. 나는 그 말을 듣자 마자 룸메를 내팽개치고 도망갈 생각이었어. 멀리 도망가는 게 아니라, 내가 등을 보이고 싶었어. 그런데 그러기도 전에 나는 머릿속에서 종이 울리는 소리를 들었어.

놀라서 고개를 돌리자, 스캔하며 다가오는 빛이 우리 둘을 덮쳤어.

난 순간적으로 정신을 잃었어— 뭐랄까, 자기도 모르게 졸다가 꾸벅꾸벅 졸 때 있잖아? 그러다 깨면 내가 지금 어디서 뭐 하는지 순간적으로 모르는 경우가 있는데, 그럴 때처럼— 나랑 룸메는 어느새 주차장 안에 있었어.

몽유병처럼 모르는 사이에 우리가 제 발로 그리로 간 건지 아니면 빛으로 순간이동이라도 한 건지는 몰라.

주차장 안에는 우리 말고 다른 사람들이 마네킹처럼 굳은 채로 있었어. 우리가 그림자로 봤던 게 사실은 사람이었던 거야.

이 사람들은 눈동자를 굴려서 우리를 봤어. 눈빛으로 우리에게 무언가 호소하는 것 같았어. 내 머릿속에서는 이런 의문이 들었고. 그럼 도대체 그 투명인간과 빛은 뭘까?

— 저게 뭐야!

룸메가 손가락질 하며 소리를 질렀어. 나는 그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어.

돼지 머리를 한 괴물이었어. 덩치가 엄청 크고, 온몸의 근육이 나무 그루터기처럼 불뚝하게 튀어나와 있었어. 손에는 장도리를 들고 있었고.

돼지머리가 고개를 돌리더니 우리를 봤어.

나는 입구 쪽으로 뛰었어. 룸메는 허둥대며 아무렇게나 도망쳤고.

입구 밖으로 나가려는 데, 불가능했어. 눈에 보이지 않는 투명한 막이 쳐져 있었어. 주먹 밑동으로 내려쳐봤는데, 두꺼운 젤리를 두들기는 것 같았지.

도망칠 방법이 없었어.

갑자기 종소리가 들려 놀라서 뒤를 돌아봤는데, 룸메가 허둥대다 마네킹처럼 굳어버린 사람들과 죄다 부딪치며 도망쳤어. 룸메가 사람들과 접촉할 때 마다 머릿속에서 종 소리가 땡, 땡, 하고 났어. 그럴 때마다, 마네킹처럼 굳어있던 사람이 다시 움직이면서 도망쳤어. 그사이 룸메가 난간 밖으로 나가려고 했는데 역시나 주차장 밖으로 도망을 못 가는 모양인지, 튕겨나가 버렸어.

나는 도망치는 사람들 가운데 한 명울 붙잡고 물었어. 지금 이게 무슨 상황이냐고. 그 사람은 알려줄 생각이 없어 보였어. 나는 과격한 방법을 쓰기로 했지. 머리끄덩이를 잡고 마구 흔들었어. 나는 지금 상황을 설명하라고 따졌고, 그 사람은 내게 소리쳤어.

— 알았어, 대답할게! 이건 ‘얼음땡’이야! 누구 하나 잡아 먹혀서 술래가 되지 않으면, 저 돼지 괴물 술래한테서 계속 도망쳐야 해!

누가 술래가 되면 어떻게 되느냐고 묻자, 그러면 한 명만 나갈 수 있대. 대신 다른 사람이 몇 명 보충된다고 했어. 나랑 룸메는 그 ‘보충’으로 들어온 거였지.

그 사이 돼지 괴물이 우리를 향해 달려왔어. 우리가 멈춰서 그런 모양이야. 나는 그 사람 등을 발로 밀어 차버렸어. 바닥에 넘어져 구르던 남자가 돼지 괴물 손아귀에 잡히기 직전에 가까스로 얼음을 외쳤지. 나는 나대로 원망하는 눈으로 보더라고. 나는 그 순간에도 얼음을 외친 그 남자가 짜증이 났고.

나는 뛰어서 도망치려고 했는데, 발을 헛디뎌서 넘어졌어. 바닥에 시멘트가 깨져서 살짝 틈이 생긴 걸 몰랐던 거야. 넘어지다가 발목을 접질렸어. 완전히 꺾여버렸지. 넘어져서 고개를 드니 돼지 괴물이 뛰어오고 있었어.

큰일 났다 싶은데 누가 날 불렀어.

— 괜찮아?

하고, 나를 부축해서 일으켜줬어. 술에 취했으면서도 잘만 뛰는 룸메였지. 룸메도 이미 상황을 파악한 모양이었어. 나를 부축해 달리면서 ‘얼음’ 상태인 사람들을 죄다 건드려서 ‘땡’으로 풀어버려서 술래의 주의를 분산시켰어.

그렇게 한동안 뛰어다니며 도망친 끝에, 우리 둘만 남고 모두 얼음 상태가 되었어. 우리는 지칠 대로 지쳐서 제자리에서 거친 숨을 내쉬었지. 발목은 점점 아파왔어. 얼음찜질도 못 했으니, 이제 시간이 지나면 더 아파지기만 할 게 뻔했지..

나는 룸메한테, 최대한 유인했다가, 얼음인 사람 하나를 땡 시켜서 제물로 바치자고 제안했어. 그러면 출구가 열려서 우리가 밖으로 나갈 수 있을 거라고.

— 난 그런 짓은 못해. 그냥 우리 둘 다 얼음하자.

일단은 그것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어. 우리 둘은 동시에 얼음을 외쳤지. 그러자 돼지 괴물이 움직임을 멈추고, 주변을 훑어보기 시작했어. 눈에서 그 형광색으로 빛나는 파란 빔을 쏘며 주변을 스캔했지.

목표물을 잃은 술래가 이리저리 둘러보다가 아무나 하나 붙잡고, 망치를 휘둘렀어. 장도리를 맞자, 얼음이 풀리고 말았어. 아마 모두가 얼음 상태가 되면 그렇게 무작위로 하나를 풀 수 있는 ‘얼음망치’ 규칙이 똑같이 존재하는 모양이었어.

얼음에서 풀린 사람은 당황하면서 바로 몸을 던져 바닥을 굴렀어. 돼지 괴물은 사람을 껴안아 잡으려다 헛물만 켰고. 자세히 보니 내가 등을 걷어찼던 놈인 거야. 그놈이 내게 달려오더니, 나만 ‘땡’을 시키고, 자기는 다시 ‘얼음’ 상태가 되었어.

나는 절뚝거리며 도망쳐야 할 상황이 되고 말았어. 사실상 무리였지.

돼지 괴물이 나를 향해 달려왔어.

나는 아까 세웠던 계획을 실행하고 말았어.

아슬아슬한 지점까지 유인한 다음, 다른 사람을 ‘땡’ 시켜서 밀어버려 제물로 삼았지. 그리고 필사적으로 깽깽이를 뛰어서 주차장 밖으로 도망쳤어. 그 뒤로 겨우 기다시피 해서 집으로 돌아왔어.

그 뒤로 나는 밖에 나가지 않고 계속 이 곳에 있어.


고개를 푹 숙인 채 솔직한 당시 감정까지 모두 털어놓아 이야기를 마친 나는 제수씨씨가 무슨 말을 할지 몰라 기다리기만 했다.

한참 침묵이 이어졌다.

“그래서였구나.”

제수씨씨가 입을 열었다. 그런데 목소리가 다르다. 아까부터 때때로 느끼던 위화감의 정체를 이제야 깨달았다. 이 목소리는—

“그래서, 나를 땡 시켜서 밀어버린 거구나? 응? 날 질투해서. 내 여자친구를 노리고 있어서. 내가 방해되었던 거지? 나는 너를 믿고 잘 부탁한다고까지 했는데. 비겁한 새끼.”

고개를 들자, 제수씨씨의 모습은 없었다. 대신 돼지 괴물이 마치 아이스크림이라도 씹어먹듯 냉동육을 씹어먹고 있었다. 돼지 머리에서 나오는 목소리는 룸메이트의 목소리였다.

나는 반사적으로 “얼음.” 하고 외쳤다. 그러자 돼지머리 괴물 술래— 룸메이트가 코웃음을 치더니 반대쪽 손을 들었다. 나는 얼음 상태로 꼼짝도 못한 채 눈동자만 굴려 손에 들린 무언가를 보았다.

장도리.

“어떻하냐? 지금 얼음 해 봤자, 나한테는 이게 있거든.”

장도리가 머리로 날아든다.

종소리가 울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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