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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mrita 라벤더의 고요한 하루

2018.12.01 00:0012.01

라벤더의 고요한 하루

amrita

일의 발단은 엄마의 강권이었다.

또 그래 그만 마음이 흔들려서 알았다고, 만나 보겠다고 했던 자신 탓이었다. 좀 더 자세하게는, 하나뿐인 딸이라고 있는 것이, 나이가 서른셋이 다 되도록 남자친구 하나 사귀지를 않고, 맨날 맨날 공부나 하고 일이나 한다고, 이래서 어느 세월이 손주를 보겠냐며, 흑흑, 크흑, 아이고 아이고, 우는 소리를 하던 엄마한테 더 싫은 소리를 하지 못했던 자기 탓이었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22세기에 선이라니?

라벤더 이글라이더는 한숨을 푹 쉬었다.


정말 정말로 놓쳐서는 안 될 훌륭한 신랑감이라는 자의 이름은, 일단, 김화성이라고 했다. 직업은 장교라고 했다. 그냥 장교도 아니고, 화성기지의 장교라고 했다. 결혼하면 화성의 배우자 비자를 받아서 곧바로 영주 자격을 갖추게 된다고 한다. 딱히 화성에 가볼 생각도, 동경한 적도 없었던 라벤더에게는 별 의미가 아니더라도, 동창회라도 가서 ‘나 요새 화성기지 장교 만나,’ 라고 하는 순간 부러움의 대상이 되는 게 현실이긴 했다.

화성이라고 하면 거의 천국 수준으로 이야기가 된다. 지겹고 구식이며 번거로운 게 많은 지구에 비해, 화성에 가면 모든 것이 새것이고, 첨단 기술과 환경이 매우 편리 쾌적하다고들 한다. 기본생활 지원비가 지구의 거의 세 배이고, 복지시설 이용이 전적으로 무료이다 보니 아무나 가고 싶다고 그냥 갈 수 있는 곳이 아니었다. 오죽하면 화성 이민 복권이 지구 복권 인기 1위를 차지한 지 이미 반백년이다.

일반인이 화성에 가려면 일단 신체검사, 지능검사, 감성검사, 온갖 검사를 받은 뒤 필기시험과 면접을 통과하고서 또 거액의 보증금을 걸어놓아야 6개월 단기체류 비자를 받을까 말까 한다. 말이 6개월이지, 우주 여행에만 3개월이 걸리니까 사실상 3개월에 불과하다. (그나마 전에 비교하면 많이 짧아진 여행 기간이라고 한다.) 화성에 발을 딛는 순간부터 시간을 치는 게 아니라, 화성 행 여객선이 출발하는 순간부터 적용되는 기간이기 때문이다. 화성 행 여객선의 좌석 값은 또 말할 것도 없다. 지구의 일반 주택 평생소유권 다섯 개는 되는 돈이 어디서 뚝 떨어지는 것도 아니다.

아무튼 그런 화성에 가장 쉽고 빠르게 이민 갈 수 있는 방법은 단 하나다. 결혼!

결혼!
결혼!
결혼!

이거야말로 일석이조, 꿩 먹고 알 먹기가 아닌가? 라벤더의 엄마가 생각하기에는 그랬다. 비자발적 독신주의자 딸을 치워버리는 걸로도 모자라 화성인 사위까지 보게 된다니! 비록 서류 대기 시간은 십 년에서 이십 년일지언정, 일단 혼인신고를 올린 후 가족 초청으로 이름을 올려 놓으면 언젠가는 자신도 화성에 갈 수 있다!

화성에는 대기 오염도 없고 구식 수도 시설도, 바퀴 달린 자동차도 없다, 모두가 공중도로로 공중차를 타고 다닌다고 한다. 주택도 차도 그냥 정부에서 내어 주고, 노인 연금도 그냥 주고, 의료 비용도 그냥 무료다. 지글지글한 지구에 비하면 그냥 천국이라고 한다.

지금까지야 어차피 못 가볼 곳이니 별 생각도 없었다만, 혹시 아는가? 라벤더는 (비록 자기 딸이지만) 자기가 봐도 미모가 좀 되는 편이고, 나이도 그렇게 꽉 찬 것도 아니고, 공부도 많이 해서 좋은 학교서 학위도 여러 개 따 뒀고, 어릴 적부터 음악 공부도 해왔으며, 지금도 뭔가 나름대로 공공 프로젝트니 뭐니 하면서 무슨 듣기 좋은 일 같은 것도 바쁘게 하면서 돌아다니는데, 이 정도면 솔직히 훌륭하지 않은가? 그러니 성혼 브로커도 아예 첫타에 화성 장교라는 대박을 물어다 준 게 아닌가?

그러나 자기가 모든 일을 다 할 수는 없는 것이다. 이제는 순전히 저 곰탱이 딸래미한테 달린 일이다. 선 보러 가는데 옆에 붙어서 코치를 해줄 수도 없는 노릇이고, 이제 어떻게 할 것인가?

라벤더가 선을 보러 나오기까지는 엄마의 온갖 연애 교육도 큰 몫을 했다. 그는 엄마한테 매일 매일 연애 코칭을 받느니 차라리 매도 먼저 맞는다고, 얼른 선을 보고 끝내는게 좋겠다고 생각했다. 남자의 마음을 사로잡는 법! 남자가 좋아하는 패션! 남자가 좋아하는 표정! 남자가 좋아하는 어투! 남자가 좋아하는 버릇! 같은 말들이 시도때도 없이 쏟아지는데, 스트레스로 일상 생활을 제대로 할 수가 없을 지경이었다.

게다가 마무리는 항상 눈물로 범벅한 책망이었다.

라벤더야, 엄마가 널 가졌을 때 얼마나 아름다운 라벤더 정원을 거닐었는지 아니? (그걸 내가 어떻게 알 수 있나? 그리고 그걸 어떻게 믿어? 지금까지 나한테 사기 한두 번 쳤어?) 그 무엇보다 말이야, 한 사람을 만나서 평생 사랑과 교감을 나누면서 산다는 건 더할나위 없는 행운이고 행복이란다, (아빠가 맨날 밖으로 돌고 바람이나 펴서 내버렸다며?) 엄마는 네가 평생 혼자이길 바라지 않아, (바라지 않으면 어쩔 건데?) 나중에 네가 외로우면 어떡하니? (그건 내가 걱정할 문제고.) 내가 죽어서도 눈을 감을 수 있겠니? (죽으면 눈을 감아야지 뭐 선택의 여지가 있나?) 자식이라고는 너 하난데, (그럼 또 낳든지.) 널 두고 편하게 죽을 수도 없는 이 에미 생각은 해본 적 없니? (각자의 인생이오.) 매정한 것! (그렇게 생각하든지, 말든지, 내가 어떻게 해줄 수도 없는 일.)

이러저러해도, 아무튼, 라벤더는 엄마가 슬프기를 바라지는 않았다. 그렇지만 엄마 속의 허전함은 자기가 뭘 해도 채워지지 않는 것이기에 딱히 부질없이 시간 낭비하고 싶지도 않았다. 그래서 그는 조건을 내걸었다.

1. 이번 선 자리에 나가는 대신, 다시는 결혼 얘기 꺼내지 않기.
2. 선 자리의 결과가 어떻든지간에, 딴 말 없기.
3. 1번과 2번 약속이 깨지는 순간 연락을 끊겠다. 연락 뿐만이 아니라 혈연관계기록, 친족기록까지 갈아엎고 멀리 이사갈 것이다.
4. 3번은 농담이 아니다.더는 용돈도 없다.

라벤더는 계약서를 써서 공증까지 받은 후에야 선 자리에 입고 나갈 옷을 한 벌 샀다. 화성 사람들은 자유로운 옷을 좋아한댔나? 패션 코디네이터가 연산을 평소보다 세 배나 더 돌리더니 보여준 걸로 결정했다. (사실은 무지개색 원피스였는데 그냥 무채색으로 커스터마이징 했다. 차마 무지개색 까지는 입을 수 없었다. 그쪽에서는 원래 그렇게 해맑은 디자인을 알아준다나.)

선날 전날 밤에 라벤더네 엄마는 수면보조제를 챙겨 먹었고, 당일에는 딸의 화장을 손수 했다. 라벤더는 엄마가 얼굴에 라이팅 크림을 펴바르는 동안 얌전히 눈을 감은 채 속으로 생각했다, 자기가 엄마하고 성격이 달라서 많은 일들이 일어나는 것 같다고. 딱히 나쁘다고 할 것은 없지만, 화장이란 건 재미있는 일이긴 하지만, 역시 이번이 마지막인게 좋을 것 같다.

코스메틱 광기계가 얼굴 위를 훑으며 지나갈 때마다 약간 어색한 느낌이었다. 크림과 빛이 만날 때마다 색과 광채의 정도가 조정됐고, 눈을 감고서도 라벤더는 엄마의 매우 진지한 표정을 볼 수 있었다.

자기가 어릴 적 콩쿨에 나갈 때마다 엄마는 항상 밤잠을 설쳤고, 옷과 화장을 준비하느라 며칠을 썼다. 사람마다 좋아하는 게, 장단점이 다 다른데. 엄마는 날 낳지 않았으면 패션 쪽으로 나가서 아주 잘됐을지도 몰라. 여러 생각이 오고 갔다. 라벤더는 자기 엄마를 잘 알았다. 자기 같은 애 말고 좀 더 여시 같은 애였다면 그래도 엄마는 좀 더 행복했을 것이다. 좀 더 자주 웃었을 것이고, 좀 더 많이 기뻤을 것이다.

라벤더는 아랫배에 약간 힘을 주었다. 기운 빠져서 등이 굽어지는 건 별로다. 뭐가 어쨌든, 사랑하는 엄마의 기대를 채우지 못한다는 건, 좀 별로인 일이다.

라벤더는 약간 슬픈 마음이 되었다. 그래서 평소와는 달리, 이번 선 자리에서는 좀 더 노력해 봐야겠다고 생각하기까지 했다. 어지간히 아닌 게 아니라면, 그래도 좀 봐서, 적어도 세 번은 만나보고 결정해야지. 그래도 화성 장교인데 그렇게까지 안 좋지는 않을 거야. (화성에서 군에 들어가는 건 지구에서 화성 가는 것과 비슷하게 힘든 일이라고 한다.)

그리고 만약 그 장교가 자기를 안 좋아한다면, 그러면, 좀 자주 웃기라도 하면서 적어도 세 번까지는 버틴 후 보내더라도 보내자고, 라벤더는 구슬커피를 일단 시키며 다짐했다. 그 나름대로는 아주 비장한 결단이었다.

선은 오후 세 시에 이스턴 카페에서 보기로 했다. 라벤더는 삼십분 먼저 나가서 미리 커피부터 한 잔 마셨다. 나름대로 마음을 가다듬고 싶었다. 멍하니 커피만 마시기보다는 일거리도 들고 가서 좀 읽었다. 자폐증세를 지닌 지구의 마지막 세대가 어떻게 현 사회의 연속기술체제에 적응, 이바지할 것인지에 대한 상호작용 논문이었다. 지구의 탑 파이브 대학이 참여하는 꽤나 큰 상호논문 프로젝트였다. 심란한 마음이라 잘 안 읽힐 줄 알았는데 너무 흥미롭게 몰입이 잘 되었다.

“어머머.”
“얘, 저기. 세상에.”

곁에서 누가 속닥이는 소리에 라벤더는 퍼뜩 정신을 차렸다. 시간을 보니 아직 세 시 십분 전이라, 아 아직은 괜찮구나 하고 다시 논문으로 돌아가려다, 문득 카페 입구 쪽을 보았다.

돈이 있었다.

응?

“어?”

라벤더는 눈을 깜박 했다. 다시 한 번, 의식적으로 느리게 감았다 떠 보았다.

아, 아니구나. 그냥 돈을 온몸에 입은 남자네.

응?

“응?”

뭐지 이건? 꿈인가? 누가 무슨 장난치는 건가?

라벤더는 ‘자기 눈을 믿지 못했다’는 느낌이 도대체 어떤 느낌인지 이제서야 알 것 같았다. 그렇다. 이스턴 카페의 입구에는 한 남자가 서 있었다.

옷이- 옷 자체는 일반적인 정장이었다. 단지 옷감이 죄다 지폐였다. 빛이 반사될 때 드러나는 외곽으로 보아하건대, 그냥 지폐 프린트도 아니고 입체적인 자수였다. 돈이 옷의 모든 부분에 일관적으로 수놓인 정장이었다. 그런 옷차림의 남자가 누구를 찾는 듯 카페를 멀리 둘러 보았다.휙! 휙!

휙!

도망쳐!

라벤더의 그런 생각을 읽기라도 한 듯, 바로 그 때 남자와 시선이 딱 마주쳤다. 그는 라벤더를 곧바로 바라보며 씨익 웃었다. 왼손의 순은 마호가니 지팡이를 한 바퀴 빙글 돌리며.

아 안돼! 오지 마! 저리 가!

돈정장의 남자는 성큼성큼 카페를 가로질러 라벤더에게로 왔다. 만인의 시선이 그를 따라왔다가 라벤더에게 왔다가 다시 그에게로 갔다. 그 와중에도 라벤더는 엄마의 ‘활짝 웃어, 알았지?’ 라던 말을 기억해냈고, 기억만 했을 뿐 웃기까지는 못 했다.

젠장 어떡하지?

“안녕하십니까, 지구의 라벤더 이글라이더 레이디?”

카페 저쪽에서 누가 마시던 커피를 뿜었다.

“아- 아, 네, 처음 뵙겠습니다.”
“소인은 김화성이라구 그럽니다.”
“네? 아, 네. 아. 그러시군요. 만나서 반갑습니다.”

차분하고 분위기 있던 카페에는 이제 냉빙지옥의 밑바닥에나 도사릴법한 뼈저린 적막만이 흘렀다. 이 사람들… 하긴 나라도 그랬을거야……. 심지어 멀쩡히 통화 중이던 사람까지 서둘러 통화를 종료한다. 이 한 몸 바쳐 모두를 즐겁게 하는, 이런 게 고대의 군자의 마음가짐일까?

어떡하지 고대의 성인처럼 그냥 죽을까?

“좋은 말씀 많이 전해 들었어요. 정말 분위기가 멋지시구려.”
“네, 저- 저도 좋은 말씀 많이 들었습니다.”

화성에서는 사람들이 서로 말을 안 하나? 왜 자꾸 어투가 혼돈이지? 아닌데, 언어는 일치한다고 알고 있는데?
“제가 요새 무협을 많이 읽어서요. 분위기 어색할까봐 약간 좀 연습을 했습지요, 하하하!”
“아, 그러셨군요.”
“이런 자리가 전 처음이기 때문에 그래도 아직도 좀 긴장이 되네요. 잘 부탁드립니다.”

김화성 씨는 갑자기 진지한 얼굴로 꾸벅 인사까지 했다. 라벤더는 덩달아 목례했다.

“네, 저도 그렇습니다. 이제 그만 앉으시죠?”

라벤더는 천천히 이성을 되찾아갔다. 그래, 행위예술 같은 걸 하는 초월본성자연주의 아티스트와 대담하는 거라고 생각하자. 뭘 생각하려고 하질 말자. 일단 이 자리부터 모면을 하고…….

“지구는 올 때마다 참 새로운 것 같아요. 화성은 맨날 그게 그거거든요.”
“그런가요? 하긴 직장 집만 다니면 별로 새로울 게 없죠.”
“그치요. 아참, 그리고 지구에는 온갖 틈새마켓이 있어서! 전 정말 틈새마켓 좋아해요, 이것도 어제 산 거예요! 빈티지 명품이라던데 삼백밖에 안 줬어요.”

설마 블랙 마켓 말하는 건가. 근데 저 돈정장을 어디서 돈 주고 샀다고? 삼백? 에어카 한대 값? 김화성은 라벤더의 멍한 표정을 감탄으로 착각했는지, 신나서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어제 갔더니 어떤 아저씨가 이걸 입고 이러고 있더라고요, 그것 참!”

그는 갑자기 양팔을 벌리더니 새 날갯짓하듯 파득파득 거리기 시작했다. 양다리도 역시 접었다 구부렸다, 모았다 벌렸다 한다.

“북북! 북북! 북북춤! 북북! 북북!”

아…….

몇 번을 반복하더니 갑자기 휙 옆으로 돌아선다. 그러고는 양팔을 물결처럼 흐느적 흐느적하며 미꾸라지 같은 백스텝을 밟는다.

“인-생은- 쌩트립! 아다지오 쓰리고- 자진모리 삼박자 워크 워크 잭슨 킹! 아이야 너으 왕관은 어디로 갔는고오오? 오예, 오 예, 그 누구보다 쌈박히! 그 누구보다 유련히!”

화성 장교 김화성이 어제 블랙 마켓에서 보고 감동받아 돈정장 샀던, 어떤 얼어죽을 상인의 복고풍 힙합 재현은 한도 끝도 없이 이어졌다.

“어허, 우후, 알 수가 없는 일이 쥐! 인생! 인생! 미스터리 로 꽉 찬! 어 허, 예 헤, 심해바다 저 아래! 대왕오징어 는 알까! 무건! 무건! 무거운 우 주! 에헤 라 쿵짝! 꿈은 날아 오 르 고!”

어디서 컵 떨어지는 소리가 났다. 그 소리가 라벤더의 경직되었던 의식을 흔들어 깨웠을지도 모른다.

“저- 저는 갑자기 급한 일이 생겨서, 그만, 갑니다.”

다 필요없다.

라벤더는 후다닥 일어섰다. 옆으로 돌아서, 공연에 심취한 김화성의 동선을 피해 나가려는게 그의 계획이었다. 무슨 이유에선지 김화성은 더욱 신이 나서, 제자리에서 세 번을 빙글빙글 돌다니 갑자기 양팔을 한껏 벌렸다.

“갑자기! 왜 요! 아직! 아니 아직인데? 요?”

도망쳐야 한다. 라벤더는 잠시지만 커피잔을 김화성의 뒷통수에 집어던져 기절이라도 시킬까 생각했다. 그때였다, 멀리서 뿔나팔 소리가 울려퍼진 것은.

이것은 옛날 평면 영화에서나 나오는 장면이 아닌가. 라벤더는, 그리고 이스턴 카페 안의 모든 손님들은, 거의 동시에 카페 바깥을 바라보았다. 저 화성놈 이번에는 또 무슨 수작인가? 아무 이유 없는데도 라벤더는 밀물처럼 밀려오는 불길한 예감의 원인을 김화성이라고 생각했고, 그것은 슬프게도 정확한 감이었다.

라벤더는 아무튼 카페 밖으로 뛰쳐나갔다. 카페 안의 다른 많은 사람들도 줄지어 우르르 몰려 나왔다. 김화성 역시 춤을 멈추고 달려 나왔다.

라벤더는 어서 택시를 부르든지 아님 그냥 무작정 뛸 작정이었지만, 눈앞에 펼쳐진 광경에 두 다리가 완전히 경악하여 얼어붙어 버렸다. 한 발자국도 더 움직일 수가 없었다.

광화대로 한가운데 공중로에 기름이라도 칠한 듯 매끄럽게 날아오는 찬란한 무지개색 에어트럭 떼거지란 뭘까?

뭘까?
뭘까?

“요 맨! 당신 블랙기사 인 더 하우스!”

저 새끼가 그 블랙 마켓 사기꾼이구나!

라벤더와 카페 손님 모두 동시에 같은 생각을 떠올렸다.

그 사기꾼의 차림새는 대략 이러했다. 골드 체인을 목에 치렁 치렁 건 것까지야 뭐 그렇다 치고, 양쪽에 땋아 말아올린 선녀 헤어스타일에(유행 지난 지 육십 년), 호피무늬 장포에, 황금빛 뱀피패턴 쫀쫀이 타이즈, 그리고 셔츠니 뭐니 무슨 상의 따위는 없다.

“화성- 스타일! 이베에에에에엥트! 당신 맞선녀! 그러므로 선녀 스타일!”
“대체 좀….”
“지금 신고 들어가요.”
“감사합니다.”

아직 세상은 지나치게 잔인하지는 않은 것 같다. 라벤더 이글라이더의 휘청대던 손은 카페 문고리를 쥐고서야 간신히 흔들림을 멈췄다. 카페 손님 중 누군가 경찰과 통화를 시작했고, 블랙 마켓 사기꾼의 요란한 음악 소리에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카페 안으로 들어가서 말을 이어갔다.

“괜찮아요? 어디 아파요?”

김화성의 멀끔한 얼굴이 불쑥 나타나는 순간, 라벤더는 이성을 잃고 그대로 박치기를 해버릴 뻔했다.

아, 하지만 도로의 차들이 점차 멈춰 서는데.

도로의 눈치없는 어떤 놈들은 얼씨구나 좋다며 아무 이유없이 덩달아 춤을 춘다. 누군가 “이거 뭐야? 오늘 뭐 해?” 이런다.

사태는 전혀 진정될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사기꾼이 팔을 팔락대며 북북! 이라고 외치자마자 트럭 문이 확 열렸다.

“맞선 서포트 왔습니다!”
“맞선 서포트 왔습니다!”
“맞선 서포트 왔습니다!”
“동!”
“서!”
“남!”
“북!”
“불!”
“바람!”
“물!”
“땅!”

설마.

라벤더는 빨간옷, 흰옷, 파란옷, 까만옷 입은 팀 넷이 에어바이크 타고서 트럭에서 우르르 쏟아져 나와 공중에 큰 진을 펼치는 것을 보다가, 김화성의 순수하고 말간 면상을 보다가, 방금 떠올리고 만 궁금점을 결국 묻고야 말았다.

“설마, 어제 저 새- 저 인간한테 이 거지같은 맞선 서포트 서비스까지 구매했니?”
“앗! 어떻게 아셨나요?”
“저 새- 저놈이 그랬어? 이런 거 하면 좋을 거라고?”
“네! 처음에 임팩트를 파파팍! 주는 거라고 그랬습니다!”
“화성에서도- 그쪽 동네에서도 이런 식이야?”
“기왕 하는 거 재밌게 하는 걸 좋아하는 편이죠, 아무래도 하하핫!”
“그렇구나…….” 죽어서도 화성에는 가지 않겠다.
“제가 생각하기로는요, 아무래도 화성의 트렌드는 지구보다는 뭐랄까, 좀 더 밝고 명랑한 그런 톤인 것 같습지요. 지구가 첼로라면 화성은 하프? 플룻? 감이 오시죠? 좀 더 영롱발랄한 그런?”

라벤더는 침묵했다. 뭐라 말해야 할까, 저 맑디맑은 면상에다 대고.

이런 꼴을 보자고 선을 본다고 했나? 내 인생이란 대체 뭐지? 엄마가 덜 불행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긴 했지만, (그리고 잔소리 좀 그만 듣고 싶었지만) 이런 걸 원한 건 아니다. 라벤더는 허공에서 벌어지는 컬러 이펙트 콘트라밴드 스펙트럼(자기들이 그렇게 외치고 있다) 떼춤을 잠깐 간신히 흘깃 보았다.

내가 이상한 걸까? 이런 걸 좀 즐기는 게 좋은 일인 거 아닐까? 사실은?

지나가다 말고 차를 허공에 세운 채 셔츠 벗어 창밖으로 연신 흔들어 대는 몇몇 사람들을 보자, 라벤더는 잠시 그런 생각마저 들었다. 엄마가 했던 말처럼, 내가 앞뒤 꽉 막힌 재미없는 센스없는 애인 걸까? 좀 이런 저런 걸 놓고 순간을 즐기지를 못하는? 그런 라벤더의 생각은 아까 경찰에 신고 넣었던 어떤 카페 사람의 쨍한 목소리에 확 가라앉았다. “언니! 금방 온다더니 무지 늦장부리는데요? 길이 막힌대요! 어쩜 이런지!”
“그래요? 아무튼 고마워요…….”

동시에 카페의 다른 손님들은 각자 그럭저럭 정신을 차린 건지 한숨을 쉬거나 허공의 난장판을 촬영하거나 하기 시작했다. 라벤더더러 당신 괜찮냐며 카페에서 포장케잌까지 사다가 주는 사람까지 있었다. 카페 주인까지 나서서 라벤더에게 새 커피를 가져다 주었다. 잔잔한 위로의 물결에 둘러싸인 기분은 어느 정도 묘했고, 어느 정도 쪽팔렸고, 많이 고마웠다.

그래, 라벤더는 다시금 생각했다, 아무래도 화성 장교가 낀 일이니까 경찰도 곤란할 거야. 저 블랙 마켓 새끼야 재활소를 제집 드나들듯 할테니 뭐 신경이나 쓰겠어? 뭘 해야 공공소란, 경범죄 정도로 걸리는 게 다일 텐데. 아,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이렇게 맹해 빠진 화성놈한테까지 사기를 치냐? 해도 해도 정말 너무한거 아냐? 라벤더가 멍하니 케잌을 한 입 두 입 떠먹으며 그리 생각하는 동안 김화성은 양뺨을 수줍게 붉히며 되도않는 고백 비슷한 소리를 늘어놓고 있었다.

“우리 만난 지 얼마 안 됐지만, 전, 전 라벤더씨가 좋아요.”
“그래?”
“전 이렇게 착 가라앉은 사늘사늘한 라벤더씨의 분위기가 특히 좋은 것 같아요. 제가 좀 방방 뜨는 타입이라 그런지, 하하핫!”
“그래, 그렇구나?”
“네, 맞아요! 어제 안절부절하다가 틈새 마켓에 가길 잘했어요, 전 이런 자리 처음이라 무지 긴장했었거든요. 그런데 선 보는데 누구랑 같이 가는 건 좀 아니라고 해서, 그러면 어쩌나 했는데 마침 이런 서비스가 있다고 해서 참 기뻤지 뭐예요? 지구에는 이벤트라는 풍습이 있다면서요!”
“그래, 기뻤구나?”
“네, 지구는 참 신기한 곳인 거 같아요! 뭐랄지, 참 이런 저런 도움이 섬세하게 준비된 곳 같아요. 그에 비하면 화성은 뭔가 좀 융통성이 없고 죄 자동화에…….”

김화성의 말은 계속 이어졌다. 라벤더는 이제 어쩌지? 라고만 계속 생각할 뿐이었다. 아까는 화가 좀 나기도 했지만 이제는 잘 모르겠다. 아무래도 이 김화성이는 그냥 사기를 당한 것뿐이다. 자기가 사기를 당했다는 것조차 모르는 것 같다. 왠지 막막했다. 자신은 애당초 선 보러 나올 생각부터가 없었다.

뭐가 문제인 걸까? 라벤더는 자신의 인생을 쭉 되짚어 보았다. 자기한테 선을 안 보면 안 되는 어떤 조급함, 불안함이 있나? 그런 건 없다. 저 말 많은 화성놈이 마음에 드는가? 그건 아니다. 내가 왜 내 인생에 저런 어벙한 걸 끼워넣어야 하는가? 그럴 이유라고는 반 세기 전에 문명사회에서 사라진 생리만큼도 없다. 하지만 엄마는- 엄마는.

라벤더는 자신의 엄마를 잘 알았다. 비록 자기에게는 선이나 결혼, 번식 같은 게 무의미할지라도 엄마한테는 그게 무척 큰 일이라는 걸. 그것도 그냥 큰 일이 아니라, 자기 딸이 평생 독신으로 산다는 생각만 해도 눈물이 주륵 주륵 흐르는, 어떤 감정적인 큰 산이라는 것을. 그게 자기 책임인가? 그렇지는 않다. 엄마의 감정 문제는 엄마 책임이다. 그러나 그렇게 깔끔히 딱 자를 수 있는 일인가? 그렇지는 않다. 그리고, 설령 그렇게 딱 자른다고 양방에게 다 좋게 해결될 일인가? 역시, 그렇지는 않다. 어쩌면 이런 일은 다 좋게 해결되기란 애당초 불가능한 것인지도 모른다.

뭐가 어쨌든, 라벤더는 쉴새 없이 뭔가를 말해대는 김화성의 말간 면상을 바라보며, 자신이 지금껏 차마 조립해낼 수 없었던 문장을 머릿속에서나마 결국 조립해냈다, 자신은 뭐가 어쨌든 엄마를 사랑한다. 자신은 해줄 수 없는 일을 자꾸 바라는 엄마였지만, 라벤더는 자신이 처음 공립 교육과정을 시작하던 날 아침, 자기 정수리에 자꾸만 입맞추던 엄마를 아직도 기억했다. 자신은 너무 어려서부터 엄마의 불가능을 가능으로 돌려놓으려 애써왔지만, 나이가 들며 문제를 깨달아 왔지만, 또한 극복하거나 포기해 왔지만, 이런 일을 겪을 때마다 마음 한 편이 차가워지는 건 어쩔 수가 없었다.

‘지금까지 시도해온 것과는 좀 다른 접근법이 필요하지 않을까.’

언제까지나 마음에도 없는 선 자리에 나갈 수는 없다. 지금이야 선이지만 좀 더 시간이 지나면 인공수정, 입양자리까지 떠밀려 나갈 수도 있는 일 아닌가? 라벤더는 허리를 곧게 펴고 앉았다.

아무리 약속을 했다고 해도, 엄마 역시 자기를 잘 알았다. 자신이 그렇게 무 자르듯 딱 자를 수 있는 딸이 아니라는 걸 모를 리가 없다. 그렇다고 너무 몰아붙이면 화낼 테니까, 그 정도는 말고 그냥 계속 꾸준히 눈물로 몰아붙이는 것이다. 죄책감 역시 무기가 될 수 있으니까.

어쨌든 이대로는 안 된다. 라벤더는 그런 결론에 이르렀다. 뭔가가 확실히 바뀌어야 한다.

‘일단 이놈부터.’

라벤더는 의자에서 (아까 카페 누군가가 가져다 준 의자이다) 일어나 섰다. 김화성은 쉴새 없이 움직이던 입을 잠시 멈추고 그런 라벤더를 바라보았다. 여전히 상큼발랄하기 그지없는 눈빛이다. 너도 참 고생한다고 생각하며, 라벤더는 입을 열었다.

“저놈들 다 보내. 그리고 너하고도 볼 일 없으니 이제 난 갈게.”
“네, 네?”
“우린 아냐. 그냥 아닌 거야. 암튼 좋은 사람 만나고, 저런 사기꾼한테 돈 쓰지 마. 지구에는 아직 저런 사기꾼이 많아. 그냥 화성 가서 살어.”
“아냐! 오 그건 정말 아냐! 아직 많은 것이 남았어!”

멍한 김화성의 옆구리를 꾹 찔러 밀어내며 블랙 마켓 맨이 끼어 들었다. 언제 착륙한 건가? 어쨌든 자신이 알 바 아니었다. 라벤더는 사기꾼 쪽은 쳐다보지도 않고 김화성에게 말했다.

“아무튼 난 이제 갈 테니까 이 난리는 알아서 수습하고 가. 그럼 안녕?”
“왜요오오, 안 가면 안 돼요?”
“안돼 안 돼, 가면 안 돼! 안돼 안 돼, 가면 안 돼!”

김화성과 블랙 마켓 맨의 코러스는 계속되었다.

“이렇게 만난 것도 인연인데에-!”
“그래 맞어, 정말 맞어, 인연을 소중히 해야 쥐!”
“이제 그만…….”
“조금만 더 저의 정성을 지켜봐 주세요!”
“그래 맞어, 정말 맞어, 나도 정말 공들여 준비했다구!”

라벤더 이글라이더는 하늘을 한 번 우러러 보았고, 땅을 내려다 보았고, 울상 지은 김화성과 느끼한 블랙 마켓 맨을 잠깐 보았다. 멀리서 들려오는 사이렌 소리와 여전히 군무 중인 이벤트 가이들의 함성 소리, 거기다 선 좀 보러 나가라며 흐느끼던 엄마의 울음 소리까지 기억 나며 뒤섞이면서 갑자기 머릿속이 차갑게 식었다.

‘좋게 얘기하면 들어먹질 않지.’

라벤더는 통신창을 열고 1번을 선택했다. 하긴 좋게 얘기해서 들어먹을 사람들이었다면 애초에 문제가 이렇게까지 커지지도 않았을 것이다.

발신 바의 첫번째 마디가 미처 다 차기도 전에 보이스톡이 연결 되었다. 낮은 목소리가 대뜸 질문했다.

“라벤더냐?”
“응.”
“갈까?”
“응.”

곧바로 통화가 종료되었다. 라벤더는 김화성과 블랙 마켓 맨이 뭐라고 떠들든 쳐다보지도 않고, 곧바로 가방을 뒤져 라이딩 벨트를 꺼내 둘러 찼다. 마지막으로 착용한 지 십 년은 되었지만, 몇 초의 무선 충전 이후 아무 문제 없이 전원이 켜졌다.

“설마 그건- 혹시?”

라벤더의 그런 모습을 보던 블랙 마켓 맨의 눈빛이 처음으로 불안하게 흔들렸고, 김화성도 덩달아 진지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라벤더는 라이딩 고글을 꺼내 썼다.

일 세기 전, 지구의 정부가 막 연합을 이루었을 때, 잦은 불협화음과 전쟁의 위협이 있었다. 지금에야 상상하기도 힘든 일이지만 그때는 가장 기본적인 식수, 식량 분배조차 제대로 되지 않던 시절이었다. 전지구적으로 군사조직이 해체되는 과정에서 반란 시도 역시 잦았다. 그러한 환경에서 민간에서 자체적으로 발생, 발전해 나간 치안유지 조직이 있었으니, 그 이름하여 이글라이더스였다.

“언니 혹시? 정말? 트룰리?”

김화성은 왜 갑자기 자신의 이벤트 맨이 목소리를 떨며 눈물을 글썽거리는지 몰랐다. 대체 무슨 일이지? 화성 네이티브로서 당연한 일이긴 했다.

이글라이더스는 창단 이후 근 반 세기 동안 지구 전역에서 활약했고, 연합 정부가 완전히 안정을 찾은 이후 자진 해산했다고 전해진다. ‘우리의 대의는 이제 불필요해졌다,’ 가 이글라이더스가 내놓은 이유였다.

연합 정부에서는 이글라이더스의 리더쉽을 초청해 포상과 명예 훈장을 선사했고, 모든 멤버들은 평생 특별 연금을 지급 받았다. 신기하다면 신기하게도, 이글라이더스의 멤버 중 단 한 명도 정치에 입문하지 않았다. 잠시 훈장 수여식에 나타났던 한 명을 제외하고는 그 누구도 공식적으로 얼굴을 공개하지도 않았다. 그렇게 이글라이더스의 존재는 세월과 함께 희미해져 갔지만, 그들의 영웅담은 마치 전설처럼 지구의 인트라넷 망을 타고 흘러 다녔다.

그렇다. 라벤더 이글라이더는 이글라이더스의 몇 안 되는 마지막 후손 중 하나였다. 그의 어머니는 이글라이더스 창단 멤버의 딸이었고, 놀라운 재능의 소유자였지만 젊어서 취미로 라이딩을 하다가 곧 그만두었다. 바람은 지나치게 제멋대로라 별로라는게 이유라 한다. 아버지는 그런 브리 이글라이더를 계속 쫓아다니다가 결국 그 정성에 감동받은 삼촌(브리의 남동생)에게 이글라이딩을 사사 받은 후 완전 매료되어 지금껏 어딘가에서 바람을 즐기고 있다(고 한다).

브리, 즉 라벤더의 어머니는 그런 남편을 이해할 수 없었다. 하긴 본인에게는 별 일 아닌 일에 목숨 걸고 매달리는 남편이었으니, 게다가 애가 태어났는데도 육아는 뒷전이고 라이딩이나 하러 나다녔으니 그럴 만도 했다. 그래도 브리 이글라이더는 최대한 인내했다. 딸이 태어난 지 일 년이 지나서야 결국 혼자서 이름을 결정하게 되었을 때에도, 남편이 어서 정신 차리기를 소망하며 라벤더라고 성명신고서에 썼다. 가뭄에 콩 나듯 집에 들어올 때마다 라벤더 꽃다발을 가져오던 놈이었으므로.

좀 더 시간이 지난 후에야 그는 아닌 놈을 인내하는 것만큼 무의미한 일은 없다는 것을 깨달았고, 이혼했다. 딸은 똑부러지게 자라났지만 그렇다고 허전함이 충족되지는 않았다. 애당초 스스로가 아닌 그 누구에게든 그런 걸 바라면 안 된다는 것이야 잘 알았지만, 그렇다고 괴로움이 사라지는 건 아니었다.

라벤더는 그런 엄마를 누구보다도 잘 알았다. 엄마 역시 스스로를 붙잡기 위해 부던히도 애써 왔다는 것까지도.

‘그렇지만 이대로는 아무 것도 안 돼.’

이대로 여기저기 원치 않는 선 자리나 나가면서 시간 낭비하는 인생을 살 수는 없다. 라벤더는 천천히 몸을 풀었다. 간단히 스트레칭 하는 정도였다. 귓가에 알람음이 몇 번 울렸다.

“한세월 걸리네.”

그리 말하며 라벤더는 고개 들었고, 김화성과 블랙 마켓 맨도 덩달아 고개 들었고, 경찰차와 막 실갱이하던 이벤트 가이들도 함께 뒤를 돌아보았고, 햇살이 저 먼 곳 에어 시그널의 측면 미러에 부딪혀 쩡 하고 부서져 내렸다.

“저건…….”
“설마…리얼리?”

티켓 스틱을 불나게 흔들며 당장 차 빼라고 외치던 교통 경찰마저 뭔가 이상함을 느꼈을 때, 곧 뒤를 돌아보았을 때, 거리의 인파와 공중의 정체 차량 운전자들이 또한 같은 쪽으로 시선을 돌렸을 때, 모든 이가 동시에 감지한 것은 첫째로, 햇살을 가린 그림자였다.

“도, 독수리?”
“이글? 트루? 진짜로? 우오오오오!”

블랙 마켓 맨은 갑자기 무릎을 퍽 꿇었다. 그리고 양손을 하늘 높이 치켜 들었다. 눈에서는 눈물마저 글썽거렸다. 김화성은 당황해서 그런 블랙 마켓 맨과 저 먼 하늘의 독수리와 라벤더를 보았지만 아무도 아무런 설명을 해주지 않았다.

블랙 마켓 맨은 눈물을 뚝뚝 흘리며 라벤더에게 “더, 더할나위 없는, 끄윽, 영광입니다!” 라고 말했고, 라벤더는 그런 그에게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아닌 놈과 불필요한 말을 섞을 필요는 없기 때문이다.

독수리는 유유히 하늘을 날아서 라벤더 앞에 착지했다. 날개의 끝과 끝까지 이 미터에 달하는 너비라 김화성과 블랙 마켓 맨은 재빨리 라벤더에게서 멀어져야 했다.

라벤더는 독수리가 입은 경량화 조끼와 금색 발판을 쓰다듬었다. 이게 얼마 만인지 모르겠다. 조금 마음이 울렁거렸고, 기뻤다. 귓가에서 통화 요청음이 울렸지만 라벤더는 그냥 검지를 까닥 해서 종료 시켰다. 지금은 엄마하고 통화할 기분이 아니었다. 그는 독수리의 등으로 한 발을 올렸고, 경량화 도구끼리 호환하며 순식간에 몸이 가벼워지는 감각에 휩싸였다. 그 다음은 곧바로 이륙이다.

그렇다고 무게가 없어지는 것이 아니다. 중력의 방향을 따르던 무게는 경량화 과정을 거쳐 이글과 이글 라이더를 둘러싸고 둥글게 돈다. 동시에 둘의 무게중심이 일치되며 잠김으로써 불시에 떨어진다든지 하는 일을 방지하기도 한다.

어째서 독수리인지는 라벤더도 잘 몰랐다. 첫 이글라이더조차 자신의 먼 조상 이야기에서 떠올린 아이디어라고 한 바가 있다. 아직 인류가 바다로 갈려져 있었던, 불을 만들기 위해 화로에 불씨를 간직해야 했던 멀고 먼 과거의 어느 한 때부터 전해져 내려온 신성한 새 이야기. 천둥으로 빚어졌거나, 창조주와 인간을 잇는 성스러운 새이므로 아무나 아무 때나 죽여서는 안 되는, 그런 새.

‘그것도 웃겨. 그렇게 성스런 새라면 아예 죽이질 말아야지 뭐 인간 맘대로 언젠 죽여도 되고 언젠 안되고 그런 건가? 아무튼.’

라벤더의 몸은 독수리의 날개 위에서 기나긴 바람을 가르며 공중으로 떠올랐다. 무거운 물결 같던 중력의 그물이 한순간에 수만 가지의 깃털처럼 흩어지며 떠돌아 갔다.

날 수 있다는 것은 이런 일이었지.

라벤더는 깊은 숨을 내쉬었다.

라이딩 고글은 눈만 보호하는 게 아니라, 얼굴과 목까지 얇은 공기 장벽으로 둘러쳐 준다. 바람과의 마찰이 심해질 때마다 순화해 주는 역할을 한다. 그래서 비행 중에도 말을 할 수는 있다. 보통은 안 하지만.

비행 중의 통신은 전체적 사념 순환 체계를 통하는 것이 보통이다. 사념 통신은 가능은 하지만 보통은 채널을 열어놓지도 않는다. 생각 자체로 소통하는 것은 부담스러운 일이다. 라벤더는 엄마하고도 사념 통신을 하지 않았다. 엄마도 딱히 라벤더에게 사념 통신을 하자고는 않았는데, 엄마한테도 부담스러운 일이기 때문이었다. 현재로서는 지구의 인류 대부분이 설령 사념 통신을 한다 쳐도 일대일이 아니라 공개된 익명 채널에다가 별 뜻없는 생각이나 일방향으로 보내는 정도가 다였다.

라벤더가 사념 통신을 하는 사람은 삼촌이었다. 그것도 아무 때나 하는 게 아니라, 라이딩하는 동안에만 가능하도록 설정해 두었다. 그러니 현재 라벤더의 상태가 곧바로 그의 삼촌, 페퍼 잭 이글라이더에게 전달되는 것이었다.

-오랜만이구나.
-응.
-어지간히 싫었나 보네? 하긴 그럴 만도 하구먼. 그 얼간이들은 대체 뭐냐?
-엄마가.
-그랬겠지.
-끝까지 안 본다고 그랬어야 했는데.
-그러면 한 한 달 정도 가만 있다가 다른 선 자리 들이밀었을걸.
-그것도 그래. 그래서 이대로는 안 될 것 같아.

다른 방도를 모색해야 해.

라벤더는 눈을 게슴츠레 뜨고 허공의 끝자락을 보았다. 하늘은 붉고 푸르고 어둡고 밝고 황금색으로 빛났다. 그때 바람의 한 흐름이 어깨를 약간 밀었다. 눈이 가기도 전에 이미 라벤더는 옆에서 삼촌이 날고 있다는 걸 알았다.

-좀 더 자주 날아보는 건 어때?
-난 바쁘니까.
-일부러 바쁘려 하는 건 아니고?
-삼촌도 알잖아, 난 이게.
-좋으면서 싫어, 그래, 잘 알지.

라벤더가 관두라는 생각을 하기도 전에, 삼촌에게서 어떠한 이미지가 전달되어 왔다. 며칠은 안 깎은 수염에, 대강 잘라대서 엉망인 머리칼을 대충 틀어올린 채로 이글 라이딩을 하는 남자의 모습이었다. 충혈된 눈과 굵은 광대선이 낯설면서도 낯익었다.

-굳이 왜?

라벤더는 불쾌한 기분이 되었다. 애비라는 놈의 이미지는 볼 때마다 기분이 더럽다.

-아직도 이러고 다닌단다.
-내가 왜 그런 걸 알아야 되는데?
-그 자식이 재수없는 자아도취 성격장애 비행 중독자라고 해서 네가 비행을 즐기는 게 잘못이 되는 건 아니잖아?
-그건 뭐.
-너나 네 엄마나 그래. 이글 라이딩은 원래 우리 거라고? 저 새끼더러 ‘우훗 하늘을 나는 나! 멋진 나! 멋지다는 걸 굳이 어필하지 않아서 더 멋진 나!’ 이러고 넝마나 뒤집어쓰고 나돌아다니라고 조상님께서 피땀으로 일구어낸 게 아냐? 자기 목숨이야 어떻게 되든 사람들을 하나라도 더 살리려고 일찌기 분연히 떨쳐 일어나셨던 마리아님의 정의로운 뜻이 담긴 비행이라고.
-한 잔 했어? 그것도 진짜 술로?
-그래.
-취해서 라이딩 하는 건 괜찮고?
-정말 한 잔만 했어. 그것도 다섯 시간 전에. 아무튼 뭔 말을 못해, 너나 누나나.

라벤더는 잠깐, 정말 아주 잠깐 옆을 보았다. 삼촌은 잠시 라벤더 옆에서 이어 날다가 씩 웃더니 서북방으로 방향을 바꿨다. 금새 멀어지는 브로콜리 파마 머리가 왠지 아련했다. 삼촌도 이제 새치가 나네.

-마리아는 항상 내가 잘 돌보고 있어. 마음 바뀌면 얘기해, 장난감하고 둥지하고 다 보내 줄게. 뭐 그 집엔 에이비어리도 있는데 별 필요도 없겠다만.
-알았어.
-정말 화성에는 갈 생각이 없는 거?
-없어.

화성에서는 이글 라이딩을 할 수 없을 걸.

라벤더와 페퍼 잭 이글라이더는 동시에 같은 생각을 했다.

공중까지 완벽하게 도시 계획에 포함되어 돌아갈 테니까.

-그럼 잘해봐.

라벤더는 긴 한숨 쉬는 자신의 이미지를 삼촌에게 보냈다. 이제 엄마한테 뭐라고 하나?

삼촌은 도망치는 이미지로 답해 왔다. 그리고 통신이 종료되었다.

라벤더는 일반 통신 채널을 잠시 확인했다가 얼른 접었다. 정말 이글라이더였을 줄은 몰랐다는 프로젝트 매니저의 메시지부터 방송사의 인터뷰 요청, 일단 얼른 집으로 들어오라는 엄마에 이르기까지 매우 많은 수신 요청이 쌓여 있었다.

이제 어떡하지.

라벤더는 생각해 보았다. 이대로 집으로 가면? 엄마는 울먹이며 어떻게 김화성 같은 놈을 파토놓을 수 있냐며 항의할 것이다.

집에 안 가면? 집에 안 가면 어딜 가는가?

돌아가면? 죽으면 죽었지 화성맨과 블랙마켓 맨의 면상을 두 번 다시 보는 일은 없을 것이다.

어떡하지?

라벤더는 무척 곤란한 심정이었다.

‘아냐, 어쨌든 지금은 고민하긴 싫고.’

마지막으로 날아본 것이 오 년도 넘었다. 라벤더는 발 아래로 내려다보이는 공중 도로선과 장난감 같은 도시의 배경선이 반가우면서도 동시에 달갑지 않았다. 어차피 돌아가야 하는 곳이라 그런 모양이었다. 그것보다는 허공에 혼자 붕 떠 있는, 온 사방이 바람인 이 감각이 훨씬 달콤하고도 시원했다.

라벤더는 이글 라이딩을 좋아했다. 좋아했다는 것을 넘어서 일상의 일부였다. 자신의 어린 시절 사진 중 대다수가 펠레의 날개에 감싸인 걸 찍은 모습이었다. 펠레는 그 당시 엄마의 독수리였고, 성질이 다소, 아니, 많이, 더러웠다고 한다. 그래도 어린 자신이 뒤뚱거리며 다가가면 (마지못해) 깃털을 좀 만지게는 해 줬다고 한다. 아버지를 볼 때마다 미친 듯이 난리를 쳐서 가까이 오지도 못하게 했다는데, 그러고 보면 참 선견지명을 지닌 독수리였다.

라벤더는 열세살 때 마리아를 만났다. 이글 라이딩 시뮬레이션 테스트를 만점으로 통과하고도 엄마의 못 미더움을 통과하지 못해서, 원래 계획보다 삼 년은 늦게 만나게 된 독수리였다. 그나마도 삼촌의 강력한 서포트가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엄마는 라벤더가 이글 라이딩 하는 걸 썩 좋아하지 않았다. 어차피 에어 카가 날아다니는 세상에 굳이 다 지나간 과거의 이글 라이딩을 계속해서 뭘 하느냐는 것이었다. 그거야 물론 그렇지만, 삼촌은 어깨를 으쓱 했다, 좋아서 하는 건데 굳이 뭘 복잡하게 따질 필요는 없잖아? 누나야말로 왜 더는 안 날아? 브리 이글라이더는 말없이 손사래를 쳤다.

약간의 논쟁 이후, 삼촌은 라벤더를 이끌고 오래된 에이비어리로 갔다. 브리 이글라이더는 여전히 투덜거리며 좀 떨어져서 따라왔다. 이글라이더 가의 에이비어리 입구에 도달하려면 먼저 정원으로 가야 했다.

정원은 항상 아름다운 곳이었다. 부엌의 곁문을 열면 바로 정원으로 연결되었는데, 정원 자체가 육각형의 특화 유리로 감싸인 공간이었다.

날이 맑은 날에 정원에 가서 서 있으면, 특화 유리를 거치며 최적화된 광선이 수정 조각처럼 쏟아져 내렸다. 벽을 따라 소용돌이치듯 배치된 수경 재배 계단을 타고 물 흐르는 소리가 사방으로 울려퍼졌고, 때때로 가동되는 내부 바람에 머리칼이 쓸렸다.

정원의 벽으로는 수경 재배되는 한해살이 풀들이 있고, 좀 더 안쪽에는 흙과 바위로 조성된 지대가 있다. 이곳에는 다년생 식물과 나무가 자란다. 정원의 천장은 매우 높기 때문에 아직까지 나무의 높이 때문에 문제가 생긴 적은 없었다. 정원의 중심에 에이비어리가 있기 때문이다. 독수리를 위해 지은 에이비어리는 개폐가 가능한 특수 지붕에, 둥글게 몰아치며 상승하는 바람의 흐름으로 둘러싸인 곳이었다.

에이비어리의 문이 열릴 때에는 정원의 모든 잎사귀가 흔들린다.

바람이 일어나기 바로 전에 가장 강렬해지는 종류의 침묵이 있다. 엄마는 그 느낌을 비행의 어떤 열쇠라고 부르고는 했다. 라벤더는 이글 라이딩을 시작하기 전부터 이미 그게 어떤 느낌인지 알고 있었다. 아주 오래 전부터 그냥 아는 어떤 것이었다. 한 순간도 모를래야 모를 수가 없는, 피보다 유효하며 호흡보다 친숙한 감각이었다.

감각을 무시하는 존재는 빨리 죽기 마련이다. 세상은 아무리 흘러간들 언제나 과거에 불과하며 인간은 살아남지 못하면 현실에서 탈락 당해 썩어 없어질 뿐이다. 그래서 옛날에 이미 자본주의가 살아남기 위해 순환주의로 환골탈태했으며, 순환 기록과 가치조절이 자동화된 화폐가 탄생했고, 구닥다리 지배 체제와 정부들이 부서지는 혼란 중에 다른 개체의 안전을 지키기 위해 자발적으로 일어났던 자들이 있었고, 사람들에게 영웅이라고 불렸고 존경받았으며 때로는 욕망 당했다.

에이비어리는 부서지는 빛과 회전하는 바람과 산란하는 침묵으로 꽉 차 있었다. 라벤더는 잠시 눈을 뜰 수 없었고, 귓가에서는 바람의 끄트머리가 연신 사각였다. 온몸이 가벼웠다.

어린 라벤더가 에이비어리 안에서 처음 깨달은 것은, 새는 혼자 날지 않는다는 사실이었다. 날개가 있든 없든, 날개가 얼마나 크든, 뼈가 얼마나 가볍든 그런 건 나중 문제였다. 새는 바람에게 모든 걸 맡긴다. 약간 죽음과도 비슷한 항복을 해야 비로소 바람은 새를 받쳐 올린다. 날갯짓은, 날갯짓 소리는, 그야말로 바람 속 깃털 같은 것이었다. 아무리 크고 사나운 새라도 바람을 거꾸로 탈 수는 없다. 그리고 그는 난생 처음으로 자신만의 독수리를 만났다.

새는 햇빛을 그으며 난다.

독수리가 날아오르는 모습에서 라벤더가 느낀 경외감의 이유에는 그러한 이유가 있었다. 날기 직전 자신을 바람 속에 통째로 포기해 버리는 새의 모습에서, 라벤더는 힘이 한 개체에게 허락되는 과정을 보았다. 이유도 논리도 없었고 또한 부질없었는데, 가장 무력했고 텅 비었으며 허무했는데, 바로 그러했기에 허공을 얻었다. 아무 것도 없는 자리에서 몸이 떠오르는 순간을 바라보고 있노라면 생각이 하얗게 지워진다. 속절없는 아름다움이 점점이 번져나와 투명한 떨림으로 공간을 물들여 간다.

라벤더는 자신의 독수리의 이름을 첫 이글라이더의 이름을 따서 마리아라고 지었다.

아마도 그래서 아버지는 어머니를 욕망했다. 어머니라는 사람이 아니라, 정확히는 그 DNA를. 이글 라이딩을 할 수 있다는 것, 첫 이글 라이더를 조상으로 두었다는 것, 특별하다는 것.

라벤더는 열두 살까지는 그래도 가끔 아버지를 그리워하기도 했다. 얼굴도 잘 몰랐지만, 기사를 찾아보기도 했고 엄마 몰래 사진을 저장해 두기도 했다. 엄마는 절대 아빠 얘기를 하지 않았다. 물어봐도 말할 게 없다는 대답뿐이었다.

라벤더는 아빠가 무슨 피치 못할 사정이 있어서 멀리 떠났겠거니 추측했다. 비록 본 적은 없지만, 어쩌면 아버지도 먼 곳에서 남몰래 자신을 그리워할지도 모른다고. 그런 생각들은 라벤더가 열두살이 되어 나이 제한을 벗어났을 때, 그래서 부모의 이혼사유기록부를 열람했을 때 산산조각 났다.

결혼하고서 아버지가 집에 들어가는 일도 별로 없었고, 애가 태어나든 말든, 이름이 없든 말든 상관도 하지 않았으며, 결혼 상태를 유지해주는 조건으로 엄마에게 DNA 융합을 조건으로 드밀었다는 데에서 더는 뭐라고 할 말이 없었다.

……이글 라이딩에 관련된 DNA를 복사, 융합해주는 조건 하에 결혼을 유지할 것이며, 일 년의 절반은 라이딩에 할애할 것이며……인류 첫 이글라이더인 마리아 이글라이더의 기억 자료와 기타 유전적 정보에 제한 없이 접근할 수 있어야 하고…….

물론 거부되었지만.

애당초 아버지란 작자에게 자신은 존재하지 않았다. 이글 라이딩만이 목적이었고, 이글라이더가 되는 것이 목적이었다. 그래서 삼촌에게 사람 좋은 양 접근해서 친해졌고, 그래서 브리 이글라이더에게 접근해서 결혼했으며, 이래저래 비벼 보다가 아무래도 DNA까지는 내주지 않을 듯하니 집을 떠났다. 그래놓고 혼자 무슨 고독한 한 마리 독수리인양 잡지사와 인터뷰를 했고, 가정에서 이해받지 못한 쓸쓸한 피해자인양 기사에 나왔다. 지난 기록들을 찾다 찾다 화가 난 라벤더가 결국 엄마에게 달려가 따졌을 때였다.

왜 나한테 말을 안 했어? 공론화도 안 시켰고?
그런 얘기로 자식한테 하소연 하고 싶겠니? 그리고 권한 설정 봐봐.
권한 설정?
그래. 사유기록부 권한 설정 있잖아.

그 말대로 이휸사유기록부 권한 설정을 열어 보니 전체 열람 가능으로 되어 있었다. 혹시 해서 다시 과거의 언론 기록을 찾아 보니, 이혼사유기록부 권한 설정이 전체 공개로 변경된 후로는 일체 아버지 쪽 동정적 기사나 인터뷰 같은 것이 없었다. 오히려 브리 이글라이더의 집 앞에 꽃과 선물이 쌓였다든지, 후원금이 갔다든지 하는 기록이 있었고, 세월이 지남에 따라 점차 잠잠해져 갔다.

이런 걸로 구구절절 말해 뭣하게. 게다가 그때 너는 한 줌 짜리 애기였잖니.

브리 이글라이더는 딸이 소파에 푹 주저앉자 홍차를 한 잔 따라다 주었다.

엄만 멋도 모르고 그게 사랑인 줄 알았지. 글쎄, 사랑이긴 했지. 날 사랑한 게 아니라 자기 자신만 사랑한 거였지만.

그래서 엄만 우리 딸이 정말 사랑받으며 살았으면 좋겠어. 결론은 항상 그렇게 났다. 이글 라이딩에 반 미쳐서 맛이 간 놈 말고, 심신 건강한 사람과 제대로 알콩달콩하게 사랑해서 둥지를 이루고 살았으면 좋겠다고. 문제는 그걸 라벤더의 의지를 무시하면서까지 관철시키려 하기에 발생했다.

‘그래서 일이 이런 지경에 이르렀지만. 결국 독립을 해야 하나?’

하지만 그러면 에이비어리를 떠나야 한다. 그건 정말 싫었다. 새벽 또는 저녁, 가끔은 늦은 밤, 정원을 가로질러 에이비어리까지 산책하는 것은 라벤더의 유일한 낙이었다. 진하게 달게 끓여낸 밀크티 한 잔을 들고서 에이비어리 벽에 기대어 앉아, 바람 소리를 들으며 말없이 한 모금 두 모금 마시는 것이야말로 삶의 보람이었다.

‘아무튼 뭔가 방도를 찾아야 해.’

끈질기게 라벤더의 발목을 잡고 늘어지는 생각 중 하나는, 엄마는 전에는 이렇지 않았다는 것이다. 물론 옛날에도 감정이 좀 풍부하긴 했지만, 좋아보이는 걸 밀어부치는 성격이 없었다고 할 수는 없지만, 지금처럼 눈물이 많지는 않았다. 약한 모습을 보이지도 않았고, 죄책감 공격을 일삼지도 않았다. 그럼 지금은 왜 그럴까? 회한? 나이?

라벤더는 열여섯살이 되던 날 있었던 일을 아직도 어제 일처럼 생생히 기억했다. 생일 파티라며 삼촌이 갑자기 들이닥쳤고, 블랙 마켓에서 사왔다며 진짜 막걸리를 자랑스레 내놓았다. 정작 주인공인 라벤더는 별 감흥이 없었지만 (일반 막걸리와 그다지 맛이 다르지도 않았다. 알콜이 들어가 있다지만 그런 걸 먹어서 무엇하는가?) 엄마와 삼촌은 실컷 퍼마신 후 수육을 삶아 먹고서 쓰러져 잠들었다.

페퍼 잭 이글라이더는 잠들기 전에 이제는 블랙 마켓에서도 진짜 수육을 구할 길이 없다며 세상이 정말 빨리 변한다며 한참 한탄을 늘어놓았고, (그야 진짜 수육을 구하려면, 삼촌, 돼지를 불법으로 구해서 죽여야 하잖아? 그런 건 안 하기로 인류가 결정한 지 벌써 반백 년인걸? 몰라! 나 어릴 때만 해도 진짜 수육을 먹을 수 있었어!) 라벤더는 생일 케잌을 독차지할 수 있어서 아무튼 땡큐였다.

니 근데 좋은 거 볼래?
뭔데?
비밀이야 근데? 알았지? 약소옥 해.
약속. (그런데 누구한테 비밀이라는 거야?)

라벤더는 삼촌이 눈은 다 감겨서는 간신히 손가락만 움직여 영상 띄우는 모습을 호기심어린 눈으로 보았다. 페퍼 잭 이글라이더는 오른손 검지에 삶의 모든 자부심과 벅찬 감격을 담아 재생 버튼을 찔렀고, 곧 잠들었다.

사방으로 바람이 휩싸이듯 했다. 창백한 푸른 색상이 끓어넘치듯 퍼져나갔다. 숨이 턱 막히는 기백에 라벤더는 저도 몰래 주먹을 꽉 쥐었다. 여기는 이제 하늘이었고, 바람의 바다였으며, 눈앞에 선 이는 엄마였다. 동시에 엄마가 아니었다. 라이딩 고글로도 가릴 수 없는 형형한 광채가 담긴 두 눈을, 라벤더는 엄마에게서 한 번도 본 적 없었다.

브리 이글라이더는 씩 웃었고, 아마도 영상 촬영모드인 삼촌의 이마를 손바닥으로 철썩 때렸다. 그리고 돌아서는가 했더니 더는 그 자리에 없었다.

어어…?

아니다. 아주 멀리에 있다. 라벤더는 의자에서 벌썩 일어섰다. 왠지 심장이 간질거리는 기분이었다.

바람이 등 뒤에서 뒤늦게 쓸려나간다.

엄마는 하늘을 바람으로 잘라버릴 것처럼 날았다. 발밑의 독수리가 독수리라기보다는 독수리의 그림자처럼 보일 지경이었다. 사람이 이렇게 (아무리 이글라이더라지만) 날 수 있다니 말도 안 된다. 브리는 삽시간에 멀리 갔고, 번개 소리 같은 걸 이끌며 눈깜짝할 새 또다시 라벤더의 정수리 위로 지나갔다. 바람과 바람이 떄로는 부딪혔고, 때로는 겹쳐 흘렀으며, 멀리서는 일렁였으며 가까이로는 조각 조각 베여나가 흩어졌다. 날아다니는 몸의 그 어디에도 무게감이 없었다.

라벤더는 숨쉬는 것도 잊었다가 몰아서 쉬었다. 호흡은? 호흡이 중요하다고 했는데? 그는 온힘을 다해서 엄마를 관찰했지만 아무리 봐도 숨쉬는 것 같지도 않았다. 정상적으로 숨을 쉰다면 저렇게 날 수가 없다. 브리 이글라이더는 가끔 멈춰서 동생 쪽을 보며 웃었다. 그리고 바람을 모조리 이끌며 흘리며, 잡아당기며 쏟아내며 엎으며 칼날처럼, 파도처럼, 깃털처럼 날았다. 바람의 소리가 높다가도 더욱 높아져서 희게 투명해졌고, 무더기로 쓸려갔다가 돌아오는가 하면 발밑이 뻥 뚫리듯 무너졌다. 바람에 휩싸인 브리는 무자비하게 자유로웠고 하늘은 깊고도 깊어서 끝이 없었으며 라벤더는 마치 꿈을 꾸는 것만 같았고, 심장의 통증도 그래서 아련하게만 느껴졌고 눈가의 눈물은 남의 것만 같았다.

왜 포기한 거지?

라벤더는 답을 이미 알고 있었다. 나 때문이다.

영상이 끝난 후로도 한참을 라벤더는 그냥 가만히 앉아만 있었다. 어지러웠다. 가슴이 아팠다. 천천히 곁을 둘러보니 삼촌은 거실 바닥에 아무렇게나 누워서는 코골며 자는 중이고, 엄마는, 엄마도 소파에 드러누워 쌔액쌕 잘만 잔다.

잠이 와? 지금?

라벤더는 복장이 터질 것만 같았다. (그 후로도 계속, 이 날만 기억해도 속이 뒤집어질듯 했다.) 저걸 버리고도 잠을 잘 수가 있어? 밥을 먹고 물을 마실 수 있어? 어떻게? 어째서?

그날 라벤더는 그렇게 좋아하는 케잌에 손도 대지 않고 고스란히 내다 버렸다. 쓰레기통은 케잌이 쓸려 들어가자마자 센서를 깜빡이며 분해 처리를 시작했고, 라벤더는 차라리 엄마가 나는 모습을 안 보는 게 나았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지만, 동시에, 볼 수 있어서 정말 다행이라고도 생각했다. 전혀 말이 안 되는 생각들이, 맞춰지지도 않고 어울리지도 않고 인정할 수도 없는 괴로움들이 밤새 그의 심장을 쑤셔댔기에, 한 숨도 잘 수 없었다.

‘지금 생각해봐도 마찬가지야.’

라벤더는 마리아의 방향을 돌렸다. 자신이 비행을 그만두게 된 것은 (여러 요인이 있었다고 해도) 납득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저렇게 날 수 있는 사람이 비행을 그만둬버린 세상에서, 자신이 비행을 한들 무슨 의미가 있는가? 왜 그렇게 되어야 했는가? 왜 모든 것에는 원인이 있고, 왜 자신은 세상에 태어났는가?

라벤더는 더더욱 이대로는 집으로 들어갈 수 없었다. 차마 엄마를 마주할 자신이 없었다. 그는 괜히 아랫입술을 물었다. 어린애처럼 운다 해서 뭐가 달라지는가. 머리를 식힐 필요가 있었다.

집이 아니라면, 카페가 아니라면, 잠시라도 미디어의 눈을 의식할 필요 없이 나다닐 수 있는 곳이라면 어디일까. 아까의 경험 때문에 그다지 내키지는 않지만 그래도 역시 블랙 마켓 뿐이다.


블랙 마켓이라고 해봐야 별 건 없다. 아직 정돈되지 않은 구역, 자동화가 덜 된 곳을 블랙 마켓이라고 부르는 것뿐이다. 거래가 자동기록되지 않는 구식 지폐가 아직 쓰이며, 진짜 술과 담배를 구할 수 있고, 실시간 위생유지센서 같은 거 없이 막 튀겨 파는 떡꼬치 맛을 볼 수 있는 그냥 사람 사는 동네이다. 가끔씩 구식 자동차도 굴러다니고 해서 걸어다닐 때 좀 조심해야 하는 것 빼고는 그다지 위험할 것도 없다. 말이 블랙 마켓이고 암시장이지, 딱히 치안이 나쁜 것도 아니고, 독특한 명물이나 명소로 사람이 많이 몰리는 곳은 정부에서도 공원으로 지정을 검토 중이라는 말도 있을 정도다.

‘화성이는 대체 어느 동네를 갔길래 그런 사기꾼한테 걸려서.’

라벤더가 자주 가는 곳은 춘천 쪽 옛 소양강댐 근처였는데, 여러 비자동화 구역 중에서도 가장 운치 좋고 구경거리 많은 곳이기 때문이었다. (라벤더의 학생 시절 취미는 비자동화 구역 탐험하기 였다.) 특히 버드나무 거리가 제일이었다.

끝없이 이어지는 버드나무 곁에 펼쳐진 좌판과 사람들 구경하는 것도 재미있고, 이제는 도시에서 찾아볼 수 없는 캡슐 커피를 손에 쥐고 다니며 마시는 맛도 쏠쏠했다. 거리에 나오는 물건들은 매번 그 종류가 달라졌는데, 알 수 없는 풀이나 약초로 담갔다는 술, 집에서 직접 키웠다는 연초, 불꽃놀이용 화약, 부채나 장신구, 옛날 종이책 같은 골동품, 가구며 옷가지까지 아무튼 다양했다.

라벤더는 인적이 드문 폐차장 곁으로 하강, 착지했다. 착륙한 뒤에는 걷는 게 약간 어색하다. 몸이 좀 무거워지고 느려진다. 그는 제자리뛰기를 몇 번 하고서 심호흡을 했다.

마리아는 알아서 라벤더 어깨에 앉았고, 라벤더는 라이딩 장비를 풀어 가방에 넣고서 슬슬 길가로 걸어나갔다. 자신을 본 사람은 없는 듯했다.

‘오늘은 한산하네.’

막상 오기는 왔으나 라벤더에게 딱히 특별한 계획은 없었다. 그냥 좀 걸어다니다가, 바람이나 쐬고, 마음이 가라앉으면 집에 갈 생각이었다. 시간을 끌다가 집에 간들 달라지는 건 없겠지만 그래도 나중이 지금보다는 낫다. 라벤더는 한숨을 푹 쉬었다. 집 생각하니까 또 한없이 답답해지는 이 심정. 그때 어깨에 앉은 마리아가 날갯짓을 두어 번 하더니 희끗 날아올랐다.

“어?”

몇 안 되는 사람들이 탄성을 지르며 낮게 나는 마리아에게서 비켜 섰다. 마리아는 잠깐 부산스레 날개를 치다가 마음을 정했다는 듯 한 층 더 높이 상승했다. 그대로 곡선을 그리는가 했더니 흐르듯 어느 집 담벼락 너머로 건너가버렸다. 라벤더는 급히 그 뒤를 따라 달렸다.

‘이런 집이 있었나?’

자주 다니던 길이지만 생소한 양식의 집이었다. 한옥 양식에 대문은 활짝 열렸고, 아니, 열렸다기보다는 문을 떼어낸 건지 아예 없고, 붉은 칠을 한 간판 같은 게 위에 달렸다. 간판에는 보은사 라고 적혀 있었다.

‘그럼 가정집이 아니라 가게?’

그냥 가게라고 하기도 좀 어색한 것이, 모금함이라고 적힌 흰 금속 상자가 대문 바로 너머 버티고 섰고, 사람은 코빼기도 안 보인다. 라벤더는 일단 마리아를 찾아야 했기에 안으로 조심스레 들어섰다.

“아무도 안 계세요?”

마당은 드넓은 잔디밭이었다. 받침돌을 따라 한 걸음 한 걸음 가다 보니 어느새 다른 건물이 나왔다. 대문과 비슷한 양식의 한옥집이었다. 섬돌에는 한 켤레 실리콘 신발이 놓여 있다.

벽이 벌컥 열렸다.

“뉘슈?”

아니, 벽이 아니라 문이다. 라벤더는 아무튼 사람이 있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제 새가 이 집으로 날아가서요, 죄송하지만 좀 찾아봐도 될까요? 사실 이미 다른 데로 갔을 수도 있고요.”

라벤더가 태어나서 지금껏 본 적 없는 크기의 반지를 엄지에 낀 흰 손이, 종이를 댄 문의 다른 쪽도 마저 밀어 열었다. 그러자 드러난 것은 그림자에 반 정도 파묻혀 앉은, 흰 종이 같은 재질의 천옷 차림의 중년 여성이었다. 그는 진짜임이 분명한 담배에 불을 붙이려던 참이었는지 잠시 고개를 돌렸다. 찰칵이는 소리가 끝난 후 흰 연기가 맹렬하게 퍼져나갔다.

“새? 그름 넘 걱정할 건 없슈. 저가 알아서 오것지.”

라벤더는 난처히 웃었다. 보은사의 주지는 그런 그를 바라보다가, 갑자기 생각난 게 있는지 방바닥을 탁 쳤다.

“나두 새가 있는데 이리 오슈.”
“아니, 저기 전….”

왠지 딱 잘라 거절할 수 없는 기백에 라벤더는 어물거리다 슬그머니 대청마루에 앉았다.

“궁금한 게 뭣이지? 오널 아가씨는?”
“별로 궁금한 거 없는데요. 그냥 제 새가 여기로 날아가서…….”
“있잖유. 얼굴에 써 있고만.”

라벤더는 담배 연기에 몇 번 기침을 했다. 주지는 두 번 박수를 쳤고, 방 안쪽에서 푸드덕 거리는 소리가 났다.

“나도 새가 있다니께.”

연기가 걷히자 방 안이 좀 더 잘 보였다. 라벤더는 벽 한 면을 꽉 채운 바람개비에 먼저 크게 감탄했다. 높이와 너비를 맞추어 정연하게 나무 받침대에 꽂힌 바람개비들이 저마다 다른 색과 무늬로 돌아가는 모습이 장관이었다.

바람개비 벽을 등진 채 천장에 매달린 것은 세 개의 새장이었다. 모두 문이 없었다. 가운데 새장 속에 있던 참새가 주지에게 파드득 날아내려왔다. 라벤더는 호기심 반, 신기함 반인 기분으로 참새가 주지가 열어주는 바구니에 수북한 종이쪽지 중 하나를 골라내는 모습을 구경했다. 이윽고 참새는 종이쪽지를 라벤더 앞에 떨구었고, 그는 참새와 보은사 주지를 번갈아 보았다. 묻지 않은 질문에 주지가 먼저 대답했다.

“열어 봐유.”

참새는 다시 포르륵 새장으로 날아 들어갔고, 라벤더는 왠지 조심스럽게 쪽지를 집어 들었다. 왠지 긴장이 되었다.

“내가 나지 니겠느냐, 내가 너라면 너겠지.”
“그렇지! 그렇다니께!”

아주 흡족하다는 듯 주지는 옆에서 추임새를 넣었다. 라벤더는 뭐라고 할 말이 없었다. 참새는 라벤더 무릎께에서 통통 뛰어다니다가 다시 둥지로 포르르 날아갔다.

“아기씨가 갖고 온 문제에 답이유 그것이.”
“이건…너무……애매한…네에…….”
“동물을 키워도 좋구.”
‘새를 키우는데요. 뭐 키운다기보다는 모신다고 해야겠지만.’
“허긴 키워야 되는 애가 벌써 떡 하니 버티고 있는데 문 동물까지 키울람 지칠 수도 있것슈. 커피 혀요?”
“네…….”

그러자 주지는 다시 박수를 짝짝 쳤고, 네 바퀴 달린 상자가 덜그덕 거리며 집 뒤켠에서부터 마당을 돌아서 가로질러 왔다. 거기까진 좋았는데 대청마루에 올라오는 기능은 없는지, 그저 앞에서 멈추더니 퍽 하고 윗뚜껑을 터뜨리듯 열어젖혔다. 안에는 캡슐 커피가 차곡차곡 쌓여 있었다. 보온 기능도 있는지 김도 모락모락 피어올랐다. 일어나려는 라벤더를 주지가 손짓으로 제지시켰다.

“손님인데 내가 갖다 줘야지, 안 그류?”

캡슐 커피는 이제 단종되어가는 추세라, 블랙 마켓이 아니면 찾기가 힘들다. 온도 기억 기능이 내장된 실리콘 캡슐 안에 담긴 커피는 한 번 양손으로 쥐어 허리를 돌리면 딸칵 하고 개봉 모드로 변하는데, 맨 위에 움푹 파인 부분이 빨래 형태로 올라온다. 다 마시고 나서 빈 캡슐을 아무 쓰레기통에나 버리면 내장된 수거 코드가 자동 활성화되어 올바른 재활용 수거 루트로 자동 인도된다. 만든 의도는 좋았으나 사람들은 꼭 커피를 남김없이 다 마신 뒤에야 버리는 게 아니라는 점은 미처 고려하지 못한 물건이라, 종합센서의 물결 속에 가라앉은 구 모델이었다.

“어?”

맛있어! 라벤더는 캡슐 커피를 돌려서 잘 보았다. 상표나 뭐 이런 건 하나도 없다. 그런데 진짜 맛있다. 그 어디의 블랙 마켓에서도, 도시의 어떤 카페에서도 이렇게 맛있는 커피를 맛본 적은 없다. 애매하던 지금까지의 감정은 온데간데 없이, 라벤더는 보은사로 들어오기를 정말 잘했다고 생각하며 다시 한 모금 삼켰다. 또다시 감동의 물결이 밀려왔다.

보은사의 주지는 씨익 웃었다.

“커피가 정말, 정말로 맛있어요. 어쩜 이렇게 맛있나요?”
“그러게 말유. 나도 몰르겠다니까.”

라벤더는 커피 맛이 너무 좋아서 한결 행복한 기분이 되었다. 약을 탄 것도 아닐 텐데 이렇게 맛있을 수 있다니 세상은 그래도 아직 살 만한 곳인 것 같았다. 주지에게 자신의 말도 안 되는 맞선 얘기며 엄마와의 답답한 일을 차츰차츰 털어놓을 수 있었던 것도 다 커피 덕분이었다. 마리아가 스스로 날아와 대청마루에 얼씬거린 것은 밤이 다 깊어서였다. 그제서야 라벤더는 자기가 마리아를 찾아 들어왔던 것을 기억해냈다.

보은사 주지는 이번에는 바람개비 벽에서 금박 바람개비 하나를 쑥 뽑아 라벤더에게 건네 주었다.

“담에 언제 다시 놀러와유. 와서 커피도 혀고.”

라벤더는 공손히 커피가 정말 맛있었으며 다음에 꼭 또 오겠다며 작별 인사를 올렸다. 옆에서 마리아가 날개로 방바닥을 탁탁 쳤다.

보은사를 나온 후, 라벤더는 어떻게 집에 갈까 하다가 택시를 불렀다. 날아갈 수도 있지만 그러면 에이비어리를 통해 집으로 들어가야 하고, 그러면 천장 여는 소리에 엄마가 단박에 자기가 왔음을 알아차릴 것이다. 기왕이면 조용히 집에 들어가서 조용히 씻고 자고 싶었다. 이쪽도 성공할 확률은 낮았지만.

이제 집에 들어가서 아무튼 언제든지간에, 말을 해야 할 것이다. 더는 이렇게 살 수는 없다. 이글라이딩도 더는 참지 않을 것이다. 날고 싶을 때 날고, 맛있는 걸 찾아서 먹고, 결혼은 안 할 것이다. 말이 통하지 않는다면 독립이라도 해야겠지. 작은 에이비어리라도 맞춤 제작을 한다면 마리아 한 몸 쯤은 감당할 수 있을지 모른다. 자세한 건 더 알아봐야 하겠지만.

‘엄마라면 아마 안 자고 기다리고 있겠지.’

그리고 역시 그러했다. 현관문에 손바닥을 찍자마자 문이 미처 다 열리기도 전에 안에서 “왔니?" 소리가 났으니까.


“많이 늦었네.”

라벤더는 최대한 아무렇지도 않은 듯 행동하고 싶었으나 견디기 힘든 어색한 “어…어." 만이 입에서 새어나갔다.

“내가 몇 번을 연락했는데, 아무튼. 늦었는데 들어가 자렴.”
“어 좀 졸리네…….”

이대로 끝인가? 정말로?

“내가 어떻게 잘 말해 놨으니까, 다음주에 다시 보자. 이번엔 정말 잘하겠대.”

그럴 리가 없지. 라벤더는 이제 그만 확실히 자르기로 했다.

“아니. 난 안 만나.”
“뭐? 그래도 이렇게 끝내는 게 어딨어?”
“안 만나. 그렇게 만나고 싶으면 엄마가 만나.”
“말이 되니 그게?”
“난 선 같은 거 안 볼 거니까, 이제 그만해요. 어차피 진짜로 이 짓거리가 좋아서 하는 것도 아니잖아?”
“그럼 좋아서 하리, 너 결혼해서 행복하게 살라고 그러는 거지!”
“엄마는 결혼해서 좋았어? 아니잖아! 솔직히 나만 안 태어났어도 훨씬 빨리 그만둘 수 있었잖아!”

라벤더는 자신의 말을 후회했고, 후회하지 않았다. 브리는 한숨을 푹 쉬었다.

“그래, 나 때문에…내가 결혼에 실패했으니까 너는 잘되는 걸 보고 싶은 그런 마음도 있긴 해.”
“그런 놈과는 헤어지는게 성공하는 거야! 그리고 난 이렇게 억지로 강요당하는 거 정말 싫고 이런 건 전혀 잘되는 게 아니고 엄마가 날 지금 불행하게 만들고 있다는 게 안 보여? 내가 행복해 보여? 억지로 옷 입고 억지로 이상한 놈 만나서 괴상한 꼴이나 보고 그러는게?”

엄마는 일단 달래서 당장은 은근슬쩍 넘어가자는 전략을 채택한 듯했다.

“그럴 리가 있니, 좋은 사람 만나서 행복하게 살라고 이러는 거지. 피곤할 텐데 그만 자자.”
“내일도 다음주도 내년도 그 언제든 아무튼, 난 누구든 결혼을 목적으로 만날 생각이 없어. 그러니까 엄마는 자식 내세워 대리만족할 생각 말고 포기해.”

라벤더의 심장을 가장 아프게 찌른 것은 엄마의 당황해 하는 눈빛이었다.

“얘, 너는 무슨 말을 해도…….”

역시 그냥 여기를 나가서 멀리 가야 하는 걸까. 라벤더는 영상 창을 최대한도의 크기로 열었다. 옛날 삼촌이 전송해 주었던, 엄마의 비행 영상을 틀었다. 최대 볼륨으로 바람이 회오리치며 귀 아프게 울었다.

라벤더와 브리는 영상이 끝나고도 한참을 침묵했다. 먼저 말을 꺼낸 것은 브리였다.

“너 설마 저거 때문에…지금까지 어물쩡 어물쩡 소개팅이네 맞선이네 나간 거니?”
“엄마가 약한 척 하면서 죄책감 자극했잖아. 눈물까지 흘리면서.”
“그건 니 생각이고! 눈물이야 나이가 드니 잘 나오더라. 저거 때문에 아까 뭐가 자기 때문이라는 둥 너 때문에 내가 이혼 늦게 했다고 헛소리한 거야? 응?.”
“그야……." 그럼 아냐?

브리는 관자놀이를 양손 엄지로 지긋이 눌렀다. 라벤더는 엄마의 입에서 ‘페퍼 이 새끼…….’ 라는 소리를 확실히 들었다. 매우 나지막이 들리락 말락 하게 나온 소리였지만 분명 들었다. 그러고보니 삼촌이 비밀이랬는데. 그러고보니……왜지?

“너 잘 들어.”

브리는 소파에서 일어나 거실을 두어 번 왕복했다. 그는 팔짱을 끼고서 혼자서 뭐라고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중얼거리다가, 바닥에 앉은 딸을 향해 검지 손가락을 세워 보였다.

“내가 비행을 그만둔 건 자식 때문이 아니야. 단지 내 성질이 드러워서다.”
“응?”
“그리고 내가 이혼을 그때 한 건 너 때문이 아냐. 그 놈이- 니 생물학적 애비가 그때 떨어져 나가기로 결정했기 때문이지. 왜냐면.”
“왜?”

브리는 미간을 찌푸렸다가 소파에 앉았다가 다시 일어났다가 다시 앉았다. 라벤더는 다시 물었다.

“대체 왜? 아오 엄마! 답답하다고!”
“DNA가 아니니까.”
“뭐?”

브리는 팔짱을 꼈다가 풀었다. 이제는 뭔가 체념한 듯한 표정이었다.

“이글라이딩은 피로- DNA로 이어지는 능력이 아니라고. 왠지 아니?”

라벤더는 고개를 저었다. 브리는 고개를 끄덕였다.

“나도 몰라. 과학자들도 모르고 엄마도- 네 할머니도 몰라. 아무도 몰라. 사실 난 친딸이 아니거든. 이런 건 대중에 공개된 사실은 아닌데.”

브리는 라벤더의 멍해진 얼굴을 향해 최대한 차근차근 설명을 해보려 애썼다.

처음 이글라이더는 옛 지구의 옛 한국의 어떤 소녀였다. 장식용이 아니고서야 굳이 성씨를 지정하지 않는 요즘과는 달리, 그때에는 성씨가 주로 혈족을 타고 이어져 내려갔다. 초대 이글라이더의 성은 박이었고, 이름은 마리였으며, 정부 체제가 통합되고 나서는 스스로의 이름을 마리아라고 등록했다. 이글라이더라는 성은 정부에서 명예 훈장 격으로 달아주었다. 마리아와 함께 자경 활동을 펼치던 다른 이글라이더들은 세상이 안정된 후 정체를 밝히지 않았다고 알려졌지만, 사실 더 큰 이유는 이글라이딩 능력이 하룻밤새 사라졌기에 그렇게 된 것이다. 그때는 장비로 독수리를 탄 것이 아니다.

무슨 이유에선지, 마리아의 이글라이딩 능력은 사라지지 않았다. 정부에 연구 목적으로 쓰라며 혈액 샘플을 넘겨주었지만 보통 인간과 다른 점은 드러나지 않았다. 마리아는 중년에 이르러 고아 소녀를 입양, 브리라고 이름지었는데, 또 어째서인지 이 소녀는 장비의 도움 없이도 이글라이딩을 할 수 있었다. 물론 브리의 DNA에서도 별다른 점은 나오지 않았다. 마리아는 브리를 입양한 지 오 년 후에 페퍼 잭을 입양했는데, 그는 장비를 갖추어야만 라이딩이 가능했다.

“그러니까 설령 내가 그놈한테 DNA융합인지 뭔지를 해준다 해도 아무 소용이 없는 거야. 그렇게 갖고 싶어하던 진퉁 라이딩 능력은 어차피 가질 수도, 얻을 수도 없는 거란 걸 알고서야 떨어져 나간 거지.”

브리는 라벤더 얼굴 앞에 손을 흔들어 보였다.

“이해가 되니? 안 되지? 아무튼 그래. 그리고 내가 더는 비행을 않는 건, 나는 생각만 하면 내가 대체 왜 그런 인간한테 시간 낭비, 감정 낭비를 했는지 짜증이 나서 그래. 아무튼 욕심이었지 나도. 나는 건 정말 좋거든. 세상에서 제일 좋은 일이야. 그래서 이렇게 나를 사랑하는 사람과 결혼해서 함께 비행할 수 있다면 도대체 여기서 얼마나 더 좋아지는 걸까? 더, 더, 아주 의식이 통째로 깨질 때까지 행복해지는 걸까? 만약 그렇다면 그 다음의 세상에는 뭐가 있지? 뭐 그렇게. 그래서 애당초 맛이 가 있던 놈의 비비 꼬인 속내를 못 알아본 거야. 결국은 내가 어리석어서. 그 생각만 하면 날기가 싫어. 그 기분 아니? 너무나 아름다운 진짜 산딸기 무스 삼단 케이크에 진짜 흙 묻은 기분? 입맛이 뚝 떨어지는 기분? 좋은데 싫은 거?”

라벤더는 입을 열었다가, 닫았다. 다시 열었다.

“그러면, 아니 그러면…그거랑 나더러 맞선 보라고 떠미는 거랑 어떻게 연결이 되는 건데?”
“말했잖니. 좋은 사람 만나서 행복하라고. 그런데 이렇게까지 싫어하는 줄은 정말 몰랐어. 어둡고 복잡한 얼굴로 착잡하기 그지없게 알았다고 하길래 너도 남몰래 고민 중이구나, 좋은 사람을 찾기가 힘든가 보다 했지?”
“그거야……아니, 그래도 이번에는 다시는 맞선 얘기 안하겠다는 계약서까지 써놓고 정말 몰랐다고 엄마가?”
“그야 넌 그런 거 좋아하잖아. 문서 작성하는 거. 그렇다고 딱히 라이딩을 다니는 것도 아니고, 점차 뜸해지다가 나중에는 아예 안 날길래 마리아까지 삼촌한테 보냈잖니?”
“그건…엄마도 안 나니까 나만 나는 건 치사하잖아……뭐.”

잠깐. 지금 뭔가 제일 중요한 건 쏙 빼놓고 가지만 열심히 치는 것 같다. 맞아. 정말 그래! 라벤더는 양손을 휘휘 저었다.

“잠깐. 잠깐만! 엄마 잠깐 뭐라고? 이글라이더는 장비 때문에 날던 게 아니야? 비밀리에 연구하던 기술로 라이딩을 성공시켰고, 나중에는 공익을 위해 기증했다던 중력 관련 기술? 아참! 그럼 삼촌은?”
“그건 그렇게 알려지긴 한 건데…. 페퍼야 장비로 나는 거고.”

브리는 소파 손잡이 위에 네트워크 링을 벗어 놓았다. 그리고 라벤더에게도 똑같이 하라는 손짓을 보냈다. 라벤더는 네트워크 링을 검지에서 빼내 벽에 붙인 뒤 일어서서 엄마의 뒤를 따라 부엌으로 갔다. 마리아는 뒤뚱대며 그 둘을 따라갔다.

브리는 부엌의 뒷문을 열고 정원으로 나갔다. 밤이 깊어서 달이 밝았다. 잔잔한 바람에 정원의 모든 풀잎들이 제각기 흔들리며 기척했다. 라벤더는 오늘 따라 유난히 달이 밝다고 생각했고, 그런 달빛이 유난히 엄마의 등에 빛나게 반사된다고도 생각했다. 둘은 아무 말 없이 에이비어리로 향했다.

한바탕의 바람과 함께 에이비어리의 문이 열렸고, 마리아가 가장 먼저 안으로 들어갔다. 그는 날개를 몇 번 펼쳐서 치더니 곧 가볍게 바람에 몸을 싣고 날아올랐다.

곧이어 브리는 성큼 허공으로 발을 딛고 떠올랐다. 바람이 파도쳤다. 라벤더는 그런 엄마를 올려다 보았다.

“지금 도대체…….”

라벤더는 무슨 말을 해야 할 지 몰랐다. 지금 도대체- 뭐, 어쩌라는 거지? 어떻게 이렇게까지 하나도 말이 안 될 수가 있는 거지?

브리는 브리대로 불만 어린 표정이었다. 그는 별로 날고 싶은 기분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결혼을 끝낸 이후 계속 그런 기분이었다.

“이렇게 나는 거란다. 장비의 힘을 빌려 나는 건 그것대로 나는 거겠지만, 아무튼 나도 네 할머니도, 이렇게 그냥 날 수 있어.”
“나도! 나, 나도 날래!”

라벤더는 양팔을 번쩍 들어 올렸다. 까치발을 딛었다. 브리는 한 발 내려 땅으로 내려왔다.

“혹시 너도 혼자서 날게 되지 않을까 싶었는데, 지금껏 그런 기미가 없었던 걸로 봐서는 글쎄다.”
“엄마!”

라벤더는 눈물마저 글썽였다. 브리는 고개를 돌렸지만, 곧 한숨을 쉬었다. 그는 라벤더의 등뒤로 돌아가서, 옆구리에 손을 가져다 댔다.

“일단 힘을 빼. 그리고 숨을 크게 쉬고. 계단을 한 칸 올라간다고 생각하고, 몸을 올려. 자, 하나, 둘, 셋!”

라벤더는 엄마의 손이 밀쳐올리는 느낌을 따라서 한 발을 내딛어 올랐다. 쿵 하고 발이 땅을 때렸다.

“아아악!”
“좀 인내심을 가져. 무슨 세 살도 아니고? 자, 다시! 하나, 둘, 셋!”

다시 쿵 하는 소리가 에이비어리를 울렸다. “아아악 아아아아아악!" 한숨 소리. “자 다시!”

쿵. 쿵. 쿵. 라벤더의 고함은 점차 울음 소리로 바뀌어 갔다. 브리는 팔이 아팠다. 오늘따라 어째 애가 떼쟁이 모드네. 꼭 이것 때문만은 아니겠지만.

“이게 뭐야! 난 이글라이더도 아니란 거야? 엄마도 그렇게 생각해? 이래서 그렇게 나더러 결혼이라 하라고 그랬던 거야? 어차피 날지도 못하는 거 연애라도 하라 뭐 그런 거야?”
“얘는 뭐 맨날 이리 비관적이야….”

브리는 멀리 달을 바라보며 팔을 주무르다가, 주저앉은 딸의 뒷모습을 보았다. 자신도 마리아도 딱히 나는 법을 전해 받거나, 가르친 적이 없다. 그렇다고 자신이 입양 전부터 날 수 있었던 것도 아니다. 적어도 그런 정보는 입양 기록에는 없다. 브리는 자신이 처음 날았던 게 언제였는지 기억해보려 했다. 한 살 떄 입양된 터라 일단 그 정도로 오래된 기억은 나지 않는다.

엄마는 여기서 자주 날았었다. 브리는 미소 지었다. 정원에서, 에이비어리에서, 홀로, 때로는 독수리와 나란히, 가끔은 비가 올 적에도. 허공에 떠오른 채 바람의 흐름을 따라 연꽃처럼 떠다니다가, 자신이 손을 뻗으면 잡아 주었다. 그러면 곧 자신도 공중으로 떠올랐다. 햇빛은 마치 물결 같았고, 바람은 떨림의 몸통 같았고, 허공은 해바라기 꽃잎 같은 감촉이 편편이 쌓여 들어차서 한없이 치밀한 한 몸의, 동시에 수많은 몸으로 이루어진 물질이었다.

브리는 잘 생각해 보았다. 피도 DNA도 아닌 다른 것이 나를 날게 했지. 그건 무엇이었을까.

그는 라벤더를 다시 바라보았다. 자신의 딸은 괜한 것으로 고민하고, 지나치게 스스로를 괴롭히는 면이 있다. 아기 때부터 좀 그랬다. 뭐든 열심히 열심히 하다가, 안 되면 앵 하고 세상 서럽게 울음을 터뜨렸다. 안아 올리면 또 언제 울었냐는 듯 금세 방글방글 웃었지만.

‘그건 어느 애기나 그런 거 아닌가? 아냐, 보통 우는 그런 게 아니라 굉장히 슬프게 울었지, 천지에 사무치는 서러움으로.’

브리는 자신을 잡아 주던 엄마가 뭘 어떻게 했더라, 기억하려 애썼다. 그렇지만 그냥 잡아 올려줬던 거 말고 별다른 건 없었다. 그냥, 잡아서 공중에 놓아 주었다.

‘그냥, 허공을 건네 주듯이.’

브리는 왼손을 오른손등에 얹었다. 난다는 건 어떤 일인가. 그것도 그런 일이다. 그냥 놓듯이 하면 날게 된다. 그럼 내가 아니라 딸내미를 날게 하려면 어째야 하지?

그는 아아, 하고 손을 뻗어 라벤더의 등을 두드렸다. 잔뜩 그늘진 라벤더의 얼굴이 한참 후에야 자신을 본다.

‘엄마는 그때 내게 엄마를 건네줬던 거야.’

브리는 라벤더의 눈가를 손등으로 훔쳤다. 그리고 라벤더의 손을 잡아 일으켰고, 한 발 뒤로 딛어 날아 올랐다. 라벤더는 한 숨 늦게 떠올랐다. 놀랐는지 눈이 둥그래진다. 브리는 좀 더 높이 날았다.

“있어 봐, 엄마가 뭐가 기억난 게 있는데. 어디 보자.”

바람이 둥글게 돌아간다. 브리는 에이비어리를 회전하는 바람과, 에이비어리 바깥의 바람, 밤하늘의 허공을 온통 메운 바람, 공간의 모든 끄트머리까지 다 채우고서 물결처럼 일렁이는 바람의 큰 한 몸을 남김없이 느꼈다. 자신의 몸과 바람의 몸은 분리된 것이 아니었다.

브리는 에이비어리의 열린 천장을 지나 떠올라 갔다. 집이 까마득해져서야 공중의 한 지점에 멈추었다.

“날고 싶니?”

딸은 고개를 끄덕였다.

“날 수 없으니까 날고 싶은 거니, 아니면 날 수 있는데도 날고 싶다고 생각하는 거니?”
“그건……. 어떻게 해야 되는 건지 모르니까.”
“너 걸음마 할 적 생각난다 얘.”

브리는 한 손을 놓았다. 라벤더는 잠시 허우적대다 엄마 비슷한 자세로 공중에 섰다. 한 걸음, 다시 한 걸음 걸어 본다. 여전히 날고 있다. 브리는 새삼 자신이 엄마라는 것을, 그게 어떤 일인지 생각했다. 나는 일은 날 만큼 날아서, 더는 알아야 할 것도 배울 것도 없다고 생각했었는데 그게 아니구나. 끝없다는 것은 말 그대로 끝없어서 계속해서, 계속해서 나아가는 일이구나. 그는 딸의 손을 쥔 손이 조금은 아렸다. 엄마도 그래서 갈 길을 간 거지. 나도 언젠가는 갈 거야. 쉽지는 않겠지만, 쉬울 수가 없는 일이겠지.

영원히 잡아주고 싶지만 그럴 수는 없다. 브리는 라벤더의 머리칼을 손으로 빗어 내렸다. 애는 엄마의 이혼이 제 탓이라고 생각해서 자책해온 모양이지만, 사실은 엄마가 자기를 낳은 것을 세상에서 제일 잘한 일이라고 생각하는 건 전혀 모르는 모양이었다. 이래가지고는 영 헛똑똑이다.

“이 손도 이제 놓을까?”
“아니아니, 잠깐만!”

라벤더는 하늘 한 쪽을 가리켜 보였다. “저기로 가 볼래!”

브리는 딸이 가리킨 쪽으로 천천히 날았다. 이끌려 오는 라벤더의 팔은 더는 무겁게 느껴지지 않았다.

“혹시 아니, 몇 번 이러다 보면 너도 혼자 날을지?”
“그럴까?”
“그래. 넌 걷기도 금방 걸었으니까.”

브리는 왠지 시원한 심정이었다. 나는 생각만 하면 더러워지던 기분도 이제는 깔끔할 뿐이었다. 아마도 몇 번만 더 연습하면, 엄마가 자신에게 해 주었던 것처럼, 자신도 딸에게 전달해줄 수 있을 것이다. 그냥 그럴 수 있을 것 같았다. 무엇이 전달되는 것인지는 자신도 몰랐다. 그저 피가 흐르기 이전에, 심장이 뛰기 이전에, 바람이 불기 이전에 일어나는 무언가였다. 아주 오래 전에 엄마는 그걸 자신에게 건네주었고, 자신은 그걸 받았다. 주는 것과 받는 것이 다 완전해야 무효가 되지 않는다.

달빛이 바람의 물결 속으로 얇디 얇게 겹치며 내려앉았다.

라벤더는 문득 뒤를 돌아 보았다. 멀리서 마리아가 한없이 높이, 더욱 높이 날아오르다가 곧 구름을 뚫고 사라졌다. 바람의 한 줄기가 매끄럽게 다가와 그의 머리칼을 흐트러뜨리고는 곧 방향을 틀어 멀어져 갔다. 엄마의 턱선을 따라 달빛이 물방울처럼 튕겨 나갔다. 그는 길게 숨을 내쉬었다. 조금은 졸렸고, 이미 반쯤은 꿈꾸는 것만 같았다.

‘어디로 가는 걸까.’

라벤더는 어디든 이렇게 단 맛의 바람이라면, 푹신한 허공이라면 날아갈 만 하다고 생각했다. 그는 눈을 감았다. 진작에 날 걸 그랬어. 그러면 아마도 덜 괴로웠을 거야. 아마도 브리도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다. 확실히 아는 건 아니었지만, 라벤더는 어쨌든 막연하게나마 알 수 있었다. 엄마도 지금 굉장히 오랜만에 너무나도 홀가분하게, 가볍게, 행복하다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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