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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 젊은 나무꾼의 슬픔2

2015.09.06 23:5809.06

젊은 나무꾼의 슬픔2

 

#1

나무꾼은 그런 것은 처음 보았다. 철로 만든 그 거대한 고리는 이승의 이름난 대장장이들이 흉내조차 낼 수 없을 만큼 정교했다. 고리의 표면에서 팔뚝만한, 더러는 손가락만한 크기의 철조각들이 싱싱한 생선처럼 엎치락 뒤치락 꿈틀거리며 별빛을 반사하는 것이 보였다. 고리는 허공을 유영하는 철조각들의 군체 그 자체였다. 어지간한 집 한채가 통째로 들어갈 정도로 큰 강강술래였다.

 나무꾼은 매달릴 곳도 없는 허공에 갑자기 나타난 이 고리에서부터 두레박이 내려오기 시작했다는 것을 기억했다. 멀리서 보았을 때는 두레박을 매달고 있는 줄, 그러니까 노각성자부줄이 이 고리에 이르러 갑자기 사라지는 모습이었다. 그러나 이렇게 바로 아래에서 보면 줄은 고리의 안쪽을 지나 저 위에 걸린 도르래까지 팽팽하게 이어져 있었다. 전혀 다른 세상을 비추는 거울처럼, 고리 바깥쪽으로는 평범한 밤하늘이 보였지만 안쪽으로는 푸르스름한 기운이 감도는 신비로운 세계가 펼쳐져 있었다.

저 고리가 하늘나라와 이승의 경계로구나!’

두레박의 옆면에 위태롭게 매달린 채, 나무꾼은 머리 위에 펼쳐진 광경을 정신 없이 들여다 보았다. 끝없이 이어져 있을 것 같았던 노각성자부줄의 끝이 하늘나라 풍경 저 멀리 보이기 시작했다. 깎아지른 절벽의 끄트머리에 줄이 걸려 있는 도르래가 있었고, 그 옆에는 나무 발판이 환영하는 손처럼 빼꼼 튀어나와 있었다. 두레박이 끝까지 올라가면 정박할 수 있는 나루인 듯 했다.

목이 아파진 나무꾼은 무심코 시선을 아래쪽으로 돌렸다가 눈을 질끈 감아버렸다. 그의 발 까마득한 아래에 온 세상이 펼쳐져 있었다. 달빛과 별빛만이 은은하게 비추는 밤이었지만, 그 아득한 높이감은 나무꾼의 공포를 극대화하기에 충분했다.

그는 눈꺼풀이 덮어버린 검은 시야 위에 아내의 모습을 떠올렸다. 갑작스레 빨라졌던 심장의 두근거림이 천천히 원래대로 돌아오기 시작했다. 나무꾼은 그녀를 볼 수 있는 길이라면, 이 정도 두려움은 아무것도 아니라고 생각했다.

 

#2

나무꾼에게 아내는 그의 영혼이 선사받은 가장 찬란한 선물이었다. 그녀를 만나기 전, 그는 자신의 짝이 어딘가에 있을 거라고는 상상조차 하지 못했던 천하디 천한 나무꾼 한 사람에 불과했다. 가진 것도 없고 생긴 것도 그다지 매력적이지 않은데다 너무 순박해서 종종 바보 같이 답답하게 구는 그에게, 마을 여자들은 어떠한 종류의 호의도 보이는 일이 없었다. 마치 약속이라도 한 듯, 그녀들은 한결같이 그와 필요 이상의 말을 섞는 것도 삼갔다. 상판에는 그 속마음을 훤히 드러낸 채로 말이다. 실수로 미소라도 지어 주었다가 날 쫓아다니기 시작하면 어떡하지? 그럼 인생이 정말 피곤해져 버릴 거야!

하지만 그것은 정녕 기우에 불과했다. 나무꾼도 하루하루 나무를 해다 입에 풀칠을 하느라 바빴기 때문에 신붓감 같은 건 신경 쓸 겨를이 없었기 때문이다. 아버지가 몸져 누운 이후 혼자 두 명 어치의 일을 해야 했던 그에게 낮은 나무를 하는 시간일 뿐이었고, 밤은 잠을 자는 시간일 뿐이었다. 수레바퀴처럼 반복되는 그 삶에는 여자라는 존재가 비집고 들어올 만한 틈 따위 개미 코딱지만큼도 없었다.

 

#3

두레박은 이윽고 나루에 도착하였다. 타고 있던 하늘나기 (하늘나라 사람)들이 내리는 듯, 발걸음 소리가 울려왔다. 나무꾼은 숨을 죽인 채 두레박 옆면의 줄을 꼭 붙잡고 정적이 찾아오길 기다렸다. 아래쪽을 슬쩍 내려다보니, 거대한 고리는 방금 전과 달리 푸른 기운을 잃고 투명하게 아래쪽 풍경을 비추고 있었다. 낭떠러지 아래 어둠 속으로 흐릿하게 구름이 뭉글거렸다. 그는 하늘나라가 참 신기하다고 생각했다. 떠 다니는 섬 위에 이런 곳이 있다니!

어느덧 소리가 잦아들고 등불이 꺼졌다. 나무꾼은 우람했던 근육이 다 빠져 볼품 없어진 팔을 뻗어 나루 쪽으로 조금씩 움직였다. 어둠 속에서 한참 용을 쓴 끝에, 그는 야윈 몸을 나루 위로 올릴 수 있었다. 나무꾼은 몸을 숨길 생각도 하지 못하고 그대로 드러누운 채 숨을 몰아쉬어야 했다. 그나마 주변에 아무런 인기척이 없는 것이 다행이었다.

한참을 그렇게 차가운 밤공기와 몸을 섞고 나서야, 그는 정신을 차리고 몸을 가눌 수 있었다. 나무꾼은 주변을 둘러보았다. 절벽 위에 설치된 나루 주변에는 허리까지 올라오는 이름 모를 잡초들만 무성했다. 소 세 마리는 다닐 수 있을 만한 꽤 널찍한 길 하나가 잡초들 사이로 뚫려 있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길게 이어진 길의 저 멀리에는 등불 하나가 아련하게 빛나고 있었다.

저 곳 어딘가에 아내가 있을 거라는 생각에 갑자기 나무꾼은 힘이 났다. 비쩍 마른 몸은 가끔 억지로 밀어넣었던 죽을 유일한 연료로 삼아 길을 걷기 시작했다.

 

#4

따지고 보면, 그 시절 나무꾼이 여자에 관심을 갖지 못한 것은 그를 낳자마자 도망가 버린 어머니의 탓도 있었다. 전혀 대비하지 못한 채로 삶의 반쪽을 잃어버린 아버지는 남은 생 동안 남녀의 정 따위를 믿지 않았고, 그 사상은 고스란히 자식에게 전해졌다. 아버지가 입버릇처럼 되뇌이던 어머니에 대한 욕과 저주와 원망들을 나무꾼은 잊을 수가 없었다. 추적추적 갑갑한 비가 내리던 날, 그 분이 한 많은 이승에서의 삶을 마치면서 남긴 유언조차 여자에게 마음을 주지 말라였다. 그러고보니 어른들의 말은 틀리는 법이 없다. 그가 아버지의 말을 들었다면 이런 고생도 하지 않았을 것이다.

 

 

#5

한참을 걷고 나서야, 그는 멀리서 밝게 빛나던 저 불빛이 사실 등불 하나가 아니라 수많은 등불들이 비추고 있는 도시 전체라는 것을 깨달았다. 하나의 도시가 그렇게 빛날 수 있다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달빛보다 더 밝게 빛나는 거대한 도시는 나무꾼에게 지극히 낯선 풍경이었다. 그러나 등불 수천개 어치는 될 듯한 그 어마어마한 광량보다도 더 놀라운 것은 도시를 구성하는 건물들의 규모였다. 거의 모든 건물들이 탑 마냥 3, 4층으로 솟아 있었다. 더러는 둥글고 더러는 각져 있는 건물들은 다양한 생김새로 제멋대로 자란 죽순 같았지만, 그 무질서함이 절묘한 균형미를 이루며 수백 개의 군봉들이 솟아 있는 듯한 절경을 빚어냈다. 사슴이 말해주었던 하늘나라의 서울이 분명했다. 가운데 솟아 있는 탑은 특히 유려한 몸매를 뽐내면서 다른 군봉들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저 곳에 아마 하늘님이 살고 있을 것이었다. 나무꾼은 홀린 듯 그 탑의 곡선을 바라보다가, 그녀와의 첫만남이 떠올라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6

우연히 구해준 사슴이 말해준 대로 산 속 샘을 찾아간 그는, 생전 처음 보는 살구색 세상을 맞닥뜨렸다. 목욕을 하는 일곱 선녀들의 매끈한 나신이 나무꾼의 잠들어 있던 젊은 본능에 싸대기를 날렸다. 물에 젖은 길다란 머리칼이 새하얀 육체 위에 선명하게 달라붙어 가슴과 허리를 타고 내려오는 아찔한 곡선을 드러냈다. 그는 정신 없이 그 황홀경을 바라보았다. 부드러운 살결이 일렁이는 길고 날씬한 허리 가운데 귀엽게 쏙 들어간 배꼽이, 고개를 든 나무꾼의 본능을 빨아들일 것만 같았다.

 

#7

하늘나라의 높은 탑을 바라보며 한참 걸은 끝에, 나무꾼은 희한하게 생긴 철 덩어리를 들고 이리저리 서성거리고 있는 이들을 발견했다. 사슴이 말해 준, 도시로 들어가는 길을 지키고 있는 문지기들 같았다. 나무꾼은 그들의 시선에 포착되기 전에 조용히 길을 벗어났다. 옥수수 밭에 숨어들어, 나무꾼은 허리를 숙이고 천천히 움직였다. 거센 바람이 어깨높이까지 올라오는 옥수수 줄기들을 흔들어 그의 기척을 지워주었다.

 

#8

내 날개옷이 없어!”

한 선녀가 외침에 나무꾼은 당황하여 몸을 숨겼다. 누군가가 날개옷을 훔쳐간 모양이다. 나무꾼은 그녀를 돕고 싶었다. 선녀들이 나누는 걱정 어린 대화가 들려올 동안, 그는 샘을 훔쳐볼 만한 다른 장소가 있는지 이리저리 둘러보았다.

그 때 빽빽히 늘어선 나무 사이로, 나무꾼을 바라보고 있는 한 사슴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낮에 구해주었던 녀석이었다. 하지만 그보다도 더 눈길이 가는 것은 그 주둥이에 걸린 하늘거리는 무언가였다. 그것이 무엇인지 알아본 나무꾼은 자신의 상황도 잊고 벌떡 일어나 큰 소리로 외쳤다.

!”

다음 순간 비명소리가 낭자한 혼란이 시작되었다. 나무꾼이 사슴을 향해 뛰어갈 동안 날개옷을 입은 여섯 선녀들은 일행을 남겨둔 채 놀라 비명을 지르며 순식간에 하늘로 날아올랐다. 달려가면서 나무꾼은 어쩔 줄 모르고 서 있는, 홀로 남은 선녀를 곁눈질로 보다가 그녀와 눈이 마주쳤다. 그 눈빛을 본 나무꾼은 반드시 사슴을 잡아서 그녀에게 날개옷을 돌려줘야겠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사람이 도구도 없이 사슴을 잡는 것은 무리한 일이다. 당연하게도 나무꾼은 허탕을 치고 샘으로 돌아와야 했다. 선녀는 두 팔로 몸을 최대한 가린 채 오들오들 떨고 있었다. 나무꾼은 자신의 옷을 벗어주려다 멈칫했다. 방금 목욕을 마친 선녀님이다. 깨끗해진 몸 위에 땀에 찌들어 냄새나는 옷을 덮어주면 당연히 싫어할 것이다. 그는 샘물 가장자리로 다가가, 자신의 옷을 정신 없이 빨기 시작했다. 찰박찰박 물이 튀는 소리가 울릴 동안, 선녀는 물끄러미 나무꾼을 바라보고 있었다.

 

#9

문지기들로부터 충분히 멀어진 후, 나무꾼은 다시 길로 올라섰다. 어느 새 도시 안이었다. 이승과 달리 이 곳에는 외적으로부터 내부를 방어하는 튼튼한 성벽이 없었다. 나무꾼은 자신을 보고 있는 사람이 있는지 살피며 조심스럽게 거리로 들어섰다.

하늘나라의 거리는 밤인데도 불구하고 활기가 넘쳤다. 거리에 높이 설치된 등불들이 밝게 빛나 환했고, 그 아래로 꽤 많은 하늘나기들이 이리저리 돌아다니고 있었다. 인파 사이로 순라꾼처럼 보이는 이들도 보였다. 질서 정연하게 들어선 집들은 나무기둥도 없이 4층 높이를 견뎌내고 있었다. 창문들은 창호지 대신 신비하고 투명한 막으로  막혀 있었다. 하늘나라에서는 평민들의 집조차 이승의 대궐처럼 웅장하고 우아한 것 같았다.

이쪽으로 다가오는 순라꾼을 보고, 나무꾼은 재빨리 한 집 뒤편으로 몸을 숨겼다. 들켜서 목숨을 잃는 것은 두렵지 않았지만, 혹시 이승으로 보내질까봐 걱정이었다. 그는 아내 없이 이승으로 돌아가느니 차라리 그냥 죽는 것이 낫다고 생각했다.

 

#10

보통의 남자였다면, 그날 밤 집으로 데려온 오갈 데 없는 선녀에게 바로 달려들었을 것이다. 하지만 나무꾼은 그러지 않았다. 그의 머리 속에는 어서 빨리 날개옷을 찾아 그녀를 돌려보내야 한다는 생각 뿐이었다. 그래서 안방에 모셔 둔 선녀가 밤중에 찾아와 동침을 제안하기 전까지, 그는 하늘나라에서 온 이 숭고한 존재를 감히 더럽힐 생각을 하지 못했다.

 

#11

나무꾼은 한 집 한 집을 몰래 살펴보기 시작했다. 이 넓은 도시를 샅샅히 뒤져서라도 아내를 찾아낼 각오였다. 그는 투명한 창문 안쪽을 들여다 보기도 하고, 안에 있는 사람들이 대화를 나누는 목소리에 귀 기울이기도 하면서 배고픔도 잊고 어두운 골목 사이사이를 이리저리 돌아다녔다.

 

#12

떨리는 새하얀 피부 사이로 자신의 구릿빛 육체가 감겨들어가는 것을 보면서, 나무꾼은 자신이 무엇을 위해 태어났는지 알게 되었다. 나무꾼과 선녀는 첫날밤을 치룬 다음날, 단 둘이서 조촐한 혼인식을 올렸다. 나무꾼에게는 꿈만 같은 일었다. 하늘나라의 선녀가 왜 자신과 결혼해 주는 건지 그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지만, 그는 곧 그녀를 의심할 시간도 아깝다고 결론을 내렸다. 남편으로서 온 힘을 다해 그녀를 사랑하고, 채워줄 뿐이었다. 선녀도 이승 생활을 받아들인 것인지, 사랑스러운 아내의 역할을 충실히 수행해 주었다.

남편이 된 나무꾼은 이제 아내를 기쁘게 하려는 열망으로 도끼를 쥐었고, 귀가하는 그의 지게에는 전보다 더 많은 나무가 쌓였다. 착한 아내는 나무꾼의 지게에 실린 나무가 많든 적든 박수를 치며 환한 미소로 그를 맞이해 주었으니, 더 많은 것을 안겨주고 싶은 것은 사실 나무꾼의 욕심이었다. 까막눈이던 그가 글을 배우기 시작한 것도 마찬가지 이유였다.

 

#13

그의 하늘나라 탐색은 얼마 가지 못했다. 집 뒤편에 나와 빨래를 널고 있던 한 하늘나기 여자가, 건물 뒤에 숨어 있던 나무꾼을 발견하고 외쳤던 것이다.

당신은 이승 사람이 아닙니까? 대체 어떻게 여기 있는 거죠? 노각성자부줄을 타고 온 거에요?”

…”

낭패였다.

돌아가세요. 이 곳은 당신이 있을 곳이 아닙니다.”

다행히 그녀의 태도는 그다지 적대적이지 않았다. 표정은 단호하긴 했지만, 그녀는 마치 길을 잘못 든 나그네를 도와주는 아이처럼 친절한 말투로 말하고 있었다. 나무꾼은 용기를 내서 입을 열었다.

선녀님, 저를 도와주세요. 부탁입니다. 저는 제 아내를 찾으러 왔습니다.”

아내라구요?”

그녀는 기가 막히다는 표정을 지었다. 나무꾼은 아내의 이름을 말했다.

…”

그녀는 아내를 아는 눈치였다. 나무꾼은 무릎을 꿇고 그녀의 하늘거리는 노란 치맛자락을 붙들며 사정했다. 아내와의 행복했던 결혼 생활과, 거기서 얻은 두 아이에 대한 두서 없는 설명, 그리고 마지막으로 하늘나라에 몰래 들어온 죄에 대해서는 어떤 벌이라도 달게 받을 테니 제발 아내를 볼 수 있게 도와달라는 애원을 듣고, 그녀는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사정이 딱하지만당신과 그 분은 절대로 맺어질 수 없어요. 그래도 이 곳까지 오셨으니, 얼굴은 볼 수 있게 도와 드릴게요.”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잘 하는 건지는 모르겠네요…”

그녀는 중얼거리며 빨랫감을 내려놓고는 그를 어딘가로 인도하기 시작했다. 나무꾼은 연신 감사하다고 외치며 그녀를 따랐다. 두 사람은 수많은 등불들이 밝히고 있는 거리로 나와 인파에 섞여들었다.

 

#14

열 달 후, 선녀는 첫 아이를 출산했다. 그제서야 사슴이 찾아와 그녀의 날개옷을 돌려주었다. 나무꾼과 선녀는 짐짓 사슴을 꾸짖는 척 했지만, 사실 속마음은 부부의 연을 맺어준 것을 고마워하고 있었다.

세 명이 된 나무꾼 가족은 종종 산책을 나갔다. 아내는 산허리에 위치한 햇살이 따듯하게 비치는 언덕과, 그곳에서 바라보는 석양을 특히 좋아했다. 칭얼대던 첫째가 지게 위에서 잠이 들면, 남편은 둘째를 가진 아내와 함께 바위 위에 앉아 미래를 이야기하곤 했다. 지금보다 좀 더 여유가 생기면 나무를 날라 줄 당나귀를 구할 수 있을 거라는 류의 이야기를 하면서 부부는 웃음을 나누었다. 석양을 받아 발그레해진 아내의 볼을 바라보며, 남편은 속으로 언젠가 아내가 좋아하는 이 언덕에 지금보다 더 넓고 더 큰 집을 지으리라 생각했다. 그러면서 무의미하게 반복되어 오던 그의 삶에 목표를 선물해 준 아내에게 감사했다.

 

#15

이승 사람 아닙니까?”

한 순라꾼이 나무꾼을 가리키며 그 옆에 선 노란치마 선녀에게 물었다. 그녀는 그들에게 나무꾼의 사정을 간략하게 설명해 주었다. 순라꾼은 난처한 표정으로 말했다.

그랬다간 저희는 하늘님께 크게 혼날 겁니다.”

이대로 돌려보내더라도, 이 분은 아내에 대한 희망을 버리지 않고 기필코 다시 올라올 거에요. 그건 최악의 상황이죠. 차라리 얼굴을 보게 해 주는 것이 나아요.”

서로의 얼굴을 쳐다보던 순라꾼들은 곧 고개를 끄덕였다. 나무꾼은 이들이 자신을 이렇게 배려해 주는 이유를 알 수 없었지만, 어쨌든 고마운 마음에 연신 허리를 숙였다.

노란치마 선녀와 나무꾼은 순라꾼들에게 둘러싸여 거리를 걸었다. 그 모습에 다른 하늘나기들도 신기한 듯 하나 둘씩 다가왔다. 순라꾼들이 그들을 제지했다. 선녀가 나무꾼의 사정을 간략하게 설명해 주었다. 이야기를 들은 하늘나기들은 딱하다는  표정으로 나무꾼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강제로 이승에 보내질 일만 걱정하던 나무꾼은 이 상황에 충분히 안도하고 있었기에, 그들의 시선 같은 건 조금도 신경쓰지 않았다.

 

#16

어느 날인가부터, 아내는 날개옷 안에 들어 있던 거울을 꺼내 들여다보는 일이 부쩍 늘었다. 남편의 눈에는 티 없이 맑은 피부였는데도, 그녀는 무엇이 그리도 불만인지 근심 가득한 눈으로 뚫어져라 거울을 바라보곤 했다. 남편이 없을 때는 심지어 가끔은 거울 속 자신에게 말도 거는 것 같았다.

그래도 부부 금슬은 여전히 좋았기 때문에, 남편은 별다른 걱정은 하지 않았다. 여자란 원래 그런가 보다고 여겼을 뿐이다. 셋째를 가졌다며 배시시 안겨오는 아내를 어떻게 의심할 수 있을까.

 

그러던 어느 날, 그녀는 미안하다는 편지만 덩그러니 남겨둔 채, 두 아이와 배 속의 셋째와 함께 날개옷을 입고 하늘나라로 떠나 버렸다. 충격에 빠진 나무꾼은 아버지의 무덤에 찾아가 밤새 울었다. 글을 배워 그 편지를 읽을 수 있게 된 것을 후회하면서.

 

#17

노란치마 선녀가 도착한 곳은 어떤 집 앞이었다. 그녀가 큰 소리로 나무꾼의 아내 이름을 불렀다. 잠시 후 문이 열리고, 한 아이를 품에 안은 아내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녀는 나무꾼을 보고는 깜짝 놀라 그 자리에 얼어붙어 버렸다. 자신을 불러낸 선녀와, 그 옆에 선 나무꾼을 번갈아 쳐다보며 상황을 파악하려 애쓰는 기색이었다. 그런 아내에게, 나무꾼은 한 발짝 한 발짝씩 천천히 다가갔다. 그의 가슴 속에서 하고 싶었던 말들이 쏟아져 나와 목에서 병목 현상을 일으켰다. 아무 말도 못한 채로 그저 눈물만 흘리고 서 있는 남편의 모습에, 아내도 눈시울을 붉혔다. 마치 이승에서의 결혼 생활 때 그랬던 것처럼, 그것으로 두 사람은 가슴 속에 묻혀 있던 첫마디를 이미 눈을 통해 서로 나누었다는 걸 알았다. 상대를 얼마나 그리워 해 왔고, 지금 얼마나 반가워하고 있는지.

“…별 일 없으셨나요?”

나무꾼이 토해내듯 간신히 안부를 물었다. 선녀는 조용히, 아주 미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서방님도 별 일 없으셨는지요?”

, 그래도 하늘나라 구경은 아무래도 별 일이겠지요…”

얼굴은 웃고 있었지만 나무꾼의 대답에는 원망이 섞여 있었다. 아내는 입술을 깨물었다. 지아비를 만난 반가움과 슬픔이 그녀의 눈가에서 교차했다. 이윽고 그녀는 입을 열었다. 불쌍한 남편에게 설명해 주어야 했다. 일이 이렇게 된 건 결국 그녀의 책임이었고, 모든 것을 되돌려 놓는 것은 그녀의 의무였다.

서방님, 이 세상은 하늘나라가 아니라, 이승의 앞날이에요.”

이승의 앞날이요?”

이승의 먼 훗날엔 땅 위의 모든 것이 오염되서 제대로 씻을 수 있는 물도 찾기가 힘들게 되어요. 그래서 서방님의 시대를 방문해서 몸도 씻고, 좋았던 세상을 둘러보기도 하는 거죠. 여긴 세상에서 가장 높은 산 위에 지어진 최후의 요새에요. 이승 분들이 하늘나기라고 부르는 분들은 다 이 성에서 인류의 생존을 목표로 오염과 싸우고 있는 평범한 사람들이어요. 그리고…”

그녀가 말을 흐렸다. 나무꾼은 그녀의 말을 이해하는 게 버거운지, 그저 멍하니 그녀의 입만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그녀는 주저하다 말을 이었다.

지금은 건강한 아이를 낳을 수 있는 남성이 많이 남아 있지 않아요. 그래서 과거의 시대로 가서 아이를 잉태해 오기도 해요.”

그럼아이를 임신해 갈 목적으로 나와 혼례를 치른 거에요?”

나무꾼은 경악한 표정으로 사랑하는 아내를 바라보았다. 눈동자가 지진을 일으키듯 흔들렸다. 선녀가 고개를 세차게 흔들며 말했다.

그런 목적이 있었던 것은 맞지만, 보통은 혼례까지 치르지는 않아요. 당신을 지아비로 맞이한 건 저도 당신을 사랑했기 때문이에요.”

그러자 나무꾼의 표정에 흐릿한 안도의 미소가 살짝 떠올랐다가, 뒤따라 올라온 울음기에 묻혀 사라졌다. 그는 얼굴을 자신의 소매에 묻고 불썽 사납게 꺽꺽대었다.

그렇군요다행이에요정말 다행입니다. 고마워요…”

선녀는 남편의 모습을 안쓰럽게 바라보았다. 잠시 후 나무꾼은 고개를 들고 애써 밝은 표정으로 말했다.

하늘님께 허락을 받아오겠습니다. 당신과의 혼례를 허락해 달라구요.”

남편의 천진한 말에, 선녀는 눈물이 차오르려는 것을 간신히 한숨으로 밀어내었다.

이해를 못하시는군요. 이건 하늘님의 허락을 받고 말고의 문제가 아니에요. 시간여행의 모순에 대해 이해해야 해요. 예를 들어 볼게요. 제가 먼 과거로 가서 제 조상을 죽이면, 저는 태어날 수가 없게 되어요. 그런데 그렇게 되면 제 조상이 사라졌으니까, 저 자신도 사라지게 되죠. 그렇게 인과율이 파괴되는 것을 시간여행의 모순이라고 해요.”

하지만 당신은 아무도 죽이지 않았잖아요?”

그건 예를 든 거 뿐이에요. 당신이 제 조상님들 중 하나라면, 저 때문에 본래의 인연을 놓치면서, 태어났어야 했던 다음 조상님이 사라질 수도 있어요. 아니면 제가 이승에서 다른 사람들과 맺은 아주 사소한 인연 때문에 역사의 흐름에 영향을 미칠 수도 있구요. 지금까지는 시간선의 흐름에 큰 문제가 없었지만, 제가 체류하는 기간이 길어지면서 조금씩 오차가 생기기 시작했어요. 이제 더 이상 제가 이승에 머무는 건 위험해요. 자칫하면 하늘나라 전체가 붕괴될 수도 있어요...”

무슨 말인지 잘 모르겠어요. 그럼 같이 지상으로 가자고 하지 않을게요. 절 하늘나라에서 살게 해 줘요.”

선녀는 그의 애원하는 눈동자를 더 볼 수 없어 눈을 질끈 감았다.

시간 모순을 일으키지 않는 방법은 하나 뿐이에요이승으로 내려가셔서, 저를 잊고 살아가 주세요. 제발 부탁이에요.”

어떻게 그렇게 말할 수 있어요!”

당신의 인생에 끼어들 수 있어서 행복했어요. 하지만 더 이상은 안되어요. 당신이 저를 잊지 못하고 원래 운명의 아가씨를 맞이하지 않은 채 살아간다면 제 존재가 사라질 지도 몰라요…”

어떻게 이제 와서그랬다면 애초에 당신을 마음에 두지 않았을 것을…”

미안해요…”

큰 공을 세우면하늘나라로 승천할 수도 있을 거라더니…”

“….”

제발….”

선녀는 고개를 힘없이 떨구었다. 그리고는 아주 천천히, 뒷걸음질로 물러났다. 입술이 파르르 떨리는 것을, 피가 나도록 억지로 깨물었다.

정말 미안해요. 부디 다 잊어주세요.”

그 말을 마지막으로, 그녀는 아이를 데리고 집에 들어가 버렸다. 주변에 서 있던 하늘나기들이 가엾다는 듯 나무꾼을 바라보았지만, 그를 도울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뒤에서 기다리고 있던 순라꾼들이 다가왔다. 모두가 지켜보는 가운데, 그들은 돌처럼 굳어져 있던 나무꾼의 야윈 몸을 붙들고 두레박이 있는 나루를 향해 끌고가기 시작했다.

아무런 저항 없이 조용히 끌려온 나무꾼은 두레박 안에 앉혀졌다. 순라꾼들은 두레박을 매달고 있는 도드래를 작동시키기 위해 분주했다. 나무꾼은 영혼 없는 눈동자로 까마득히 아래 펼쳐진 이승을 내려다 보았다. 이제 영원히 그녀를 볼 수 없을 것이다. 이승에 도달하는 순간, 그녀를 잊고 살아야 한다. 그녀와의 모든 추억을 짧은 꿈이라고 생각해야 한다. 아예 없었던 일이라고 여겨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그녀와 하늘나라 전체가 사라질지도 모른다.

나무꾼은 홀로 체념의 미소를 지었다. 그녀가 존재하려면 그녀를 잊어야 하고, 그녀를 기억하려면 그녀 자체가 사라져야 한다는 잔인한 배타적 선택지 앞에서 그가 택할 수 있는 것은 절망 밖에 없었다. 인생이라는 나무에서 그녀와 함께 할 수 있는 선택지는 모두 가지가 잘려 나가고, 외로이 남은 밑동만이 앙상하게 시들어버릴 날을 기다릴 뿐이었다.

두레박 아래서 이승의 어두운 풍경이 어지러이 일렁인다. 이제 저 땅으로 내려가면, 그는 그녀 없이 살아가야 할 것이다. 나무꾼은 조용히 심호흡을 하며, 앞으로 자신이 살아갈 모습을 머리 속에 그려보려 노력했다. 그는 지금까지 그래 왔듯이, 앞으로도 계속 나무를 하고 장작을 패다 시장에 내놓아 쌀 등과 교환하며 살아갈 것이다. 언젠가 당나귀도 구하고, 그녀가 좋아했던 저 이름 없는 언덕 위에 큰 집도 지을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 모든 것은 그녀 없이 이루어지게 될 것이다. 속세의 여자들과 달리 그가 천하디 천한 나무꾼이라는 것을 전혀 개의치 않던 그녀의 애교 섞인 달콤한 목소리 없이, 그는 일어나야 할 것이다. 시간 가는 줄 모르고 한없이 늘어놓던 시덥잖고 소소한, 하지만 그녀의 입에서 나왔다는 이유만으로 너무도 부드럽고 사랑스럽게 귀를 간질이던 저 비단결 같은 수다들 없이, 그는 밥을 먹어야 할 것이다. 짓누르는 지게의 무게를 단번에 가볍게 만들어 주던 그녀의 해맑은 박수 소리 없이, 그는 귀가해야 할 것이다. 그녀 없이 나들이를 가고, 그녀 없이 마을에 다녀오고, 그녀 없이 잠들어야 할 것이다. 그리고 그녀와의 사이에서 낳은 세 아이들 없이, 그는 늙어가야 할 것이다. 그의 머리 속에, 큰 집에서 걸어나오는 늙은 자신의 모습이 어른거린다. 무의미한 인연들 사이에 둘러싸인, 처량한 흙빛 얼굴의 그 자신이.

다음 순간, 나무꾼은 바닥을 박차 올라 벽을 넘더니, 두레박의 바깥쪽으로 뛰어내렸다.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었다. 주변에 서 있던 이들이 그의 돌발적인 움직임에 깜짝 놀라는 사이, 나무꾼의 육체는 이미 하늘과 땅 사이의 거리를 가로질러 한없이 아래로 떨어지고 있었다.

몇 초 걸리지 않아 나무꾼의 몸은 땅에 도달해 산산히 부서져 버렸다. 그는 몰랐겠지만, 그의 느닷없는 죽음이 시간선의 인과율을 깨뜨려 버렸기 때문에, 이승과 하늘나라 할 것 없이 우주 전체가 붕괴되어 완전한 혼돈과 무의 상태로 쪼개져 버렸다. 그것은 죄 없는 세상과 슬픔에 빠진 아내에게 바치는 더없이 잔혹한 복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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