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밀번호를 잊어버리셨나요?

단편 기타나

2012.05.09 09:4705.09

기타나
by. 고래

1
아하고 그녀는 신음을 내뱉었다. 그리고 어깻죽지부터 뻗어 나온 깃털들이 축 늘어진다. 그녀는 그의 가슴팍 위에 눕는다. 그는 그녀를 옆으로 밀어낸다. 그리고 작아져버린 그것을 가리고 그녀를 멸시의 눈으로 바라본다. 깃털들로 뒤덮인 그녀의 등을 직시하더니 이내 입을 열어 소리친다.

“괴물년!”

그리고 그는 옷을 제대로 입지도 않은 채 밖으로 나가버렸다.
그녀가 나체로 누워 미소 짓는다. 온몸에 나른함이 쏟아진다. 간질간질한 감정은 서서히 아래로 내려오고 눈도 동시에 서서히 감겨갔다. 그녀는 결국 잠이 들고 말았다. 하얀색 깃털이 하나씩 천천히 그녀의 어깨로 되돌아간다. 물기가 천에 닿아 스며들 듯 서서히 전부 되돌아갔다. 그리고 나체의 그녀가 홀로 방에 남았다. 천장에서 계속 깜박이던 아이보리색의 할로윈 등이 툭하고 꺼져버렸다.

2
그녀를 알게 된 건, 라만이라는 도시에서였다. 그녀는 골목길 코너에 돗자리를 깔고 점을 봐주고 있었다. 점뿐만이 아니라 고도로 세공된 각종 특이한 목걸이와 액세서리를 팔고 있었다. 그리고 나는 그곳을 지나가던 도중 그녀와 눈이 마주쳤다. 점을 보라거나 사라는 눈빛이 아니었다. 다만 무언가를 본 듯, 멍하니 바라보았다. 호기심이 생긴 것은 그 순간이었다. 허나 다리라는 것이 생각보다 잘 움직이지 아니했다. 생각은 하고 있지만 마치 무빙워크를 탄 듯, 쭉하니 그녀 앞으로 지나가버렸다.
그 순간부터 라만이라는 도시 안에서 난 중요한 것을 잃어버린 사람처럼 여기저기 고개를 둘러보며 다녔다. 그리고 마음 구석에서 그 기억의 소매를 당길 때쯤 다시 그녀를 볼 수 있었다. 그녀는 마을의 불량배들에게 얻어맞으며 자리에서 쫓겨나고 있었다. 괴기스럽게 웃던 그 양아치들을 지나치고 나는 뛰어가 그녀를 잡았다. 그녀는 울지도 않고 이를 악물고 있었다. 그녀는 자신을 잡은 날 바라보았다. 그리고 기다렸다는 듯, 이렇게 말했다.

“점 좀 보고갈래요?”

그녀 얼굴에 빨갛게 상처자국이 났다. 그러나 그녀는 아무렇지 않게 돗자리를 폈다. 짚을 엮어 직접 만들었는지 요새 볼 수 있는 저가 마대 같은 소재와는 확연히 달랐다. 어딘가 카펫처럼 부드러웠지만 신발로 밟아도 될 만큼 자유로웠다. 그녀는 내 앞에 타로카드를 가로로 쭉 배열했다. 익숙한 손놀림이었다. 그러는 순간 나는 그녀의 얼굴을 제대로 응시할 수 있었다. 그녀의 이목구비는 뚜렷했고 피부가 좋아 매끈했다. 다듬어진 검은 눈썹이 부드러운 느낌이었고 턱선이 갸름해 얼굴이 전체적으로 작아보였다. 그 누가 보아도 미인이었다. 허나 두 개의 목걸이와 큰 팔찌 그리고 오색의 머리끈은 어딘가 그녀를 멀게 느끼게 만들었다. 신비롭고 낯선 느낌이었다.

“시작하기 전에 말할게 있어요. 이 점은 돈을 받지 않을게요.”
“어째서요?”

궁금한 내가 물었다. 그녀의 입꼬리가 빙그르 말렸다. 그녀는 내 질문에 답하지 않고 카드를 고르라는 듯이 손가락으로 가리키더니 다시 손가락 세 개를 폈다. 세 개만 뽑으라는 뜻 같았다. 첫 번째 카드는 가장 손에서 가까운 오른쪽에서 뽑았다. 그다음 가운데, 마지막도 가운데에서 뽑았다. 세 개를 배열하고 그녀는 나머지 카드들을 정리했다.
그녀의 등에 회색의 콘크리트 벽이 문득 차갑게 느껴졌다. 그녀가 내가 오른쪽에서 뽑은 첫 번째 카드를 열었다.

“첫 번째는 당신의 과거에요. 역방향 은둔자네요. 숨어사는 현자에요. 이 카드는 많은 것들 안고 있어요. 이 현자는 당신의 속마음까지 안고 은둔하였죠. 당신은 속마음에 상사병을 앓거나 원하는 것을 숨기고 있어요. 과거에 그랬으니 아마 상사병을 앓았거나 원하는 것을 얻지 못해 아쉬웠던 거죠. 그랬나요?”

그녀는 잠시 나를 바라보았다. 애써 아무렇지 않은 척 하는 나의 모습이 그녀의 눈동자에 비췄다. 문득 그녀 앞에서 발가벗겨진 느낌이 났다.

“두 번째 카드 사신이에요. 낫을 든 죽은 자를 데려가는 사신. 유명하니까 당신도 알겠죠? 정방향의 뜻은 이래요. 불확실함과 거짓, 불화에요. 당신은 지금 뭔가 믿을 수 없어 불안하고 겁이 나나요?”

두 번째에도 역시 나는 속마음을 숨기지 못하였다. 그녀의 말이 조금 무서워졌다.

“마지막은 미래인가요?”
“네, 그래요. 이 카드는 제가 가지고 있을게요. 일단 절 따라와 볼래요? 제가 오늘 당장 잘 곳이 없어서 다녀올 곳이 있어요. 거기만 다녀와서 이 카드를 보여드릴게요.”

공짜로 보는 입장에 차마 지금 보여주세요라고 말할 수 없었다. 오히려, 과거와 미래, 적중한 사실들을 미래에선 어떻게 될지 너무도 궁금해서 어서 가자고 말하고 싶었다.

그녀는 날 잡아 이끌었다. 돗자리와 카드는 헝겊들을 모아 꿰맨 가방에 구겨 넣고 언제 앉았냐는 듯이 빠르게 자리를 떴다. 해가 뉘엿뉘엿 저기 높은 교회의 십자가에 걸려 누워있었다. 자꾸 내일 다른 도시로 떠나야하는 내 입장이 흐려져 갔다. 그녀 앞에서 그런 것들은 중요하지 않았다. 그녀는 허름한 골목들을 계속 연속해서 걸었다. 한명이 겨우 지나갈 건물과 건물 사이엔 생각보다 수많은 사람들이 다닥다닥 살고 있었다. 그리고 그녀가 운전한 골목의 끝에서 넓은 공터가 나왔다. 공터 옆으로는 높디높은 펜스 넘어서 익숙한 큰 도로와 수없이 지나가는 차들이 보였다. 그리고 공터 안으로는 웬 캠핑카 두 대가 서 있었다.

“글렌! 아줌마 빨리 나와요!”

그녀는 캠핑카를 향해 소리쳤다. 그러자 캠핑카가 들썩이기 시작했다. 타이어가 곧 터질 듯 내려갔다 올라갔다를 반복했다. 캠핑카 문이 벌컥 열리며 겨우 그 문 사이로 왔다갔다 할만한 중년 여인이 나왔다. 그녀는 양손에 반지를 잔뜩끼고 머리를 땋았다. 그녀와 비슷하게 독특한 옷차림이었다.

“아엘로! 우리 아가!”

글렌은 뛰어와 그녀를 껴안았다. 그녀의 이름이 아엘로였나보다. 나는 그리 생각했다. 글렌은 아엘로에게 안부를 묻더니 문득 옆에 서 있는 날 바라보았다.

“아엘로! 이 양복쟁이는 누구야? 너 이거야?”

글렌은 새끼손가락을 들어보았다. 아엘로가 손사래 쳤다. 그리고 날 보며 빙그레 웃더니 말했다.

“오늘 날 재워줄 사람이에요.”
“네?”

듣고 있던 내가 너무 놀라 급하게 되물었다. 그녀는 여전히 입꼬리를 내리지 않은 채 웃었다.

“아엘로, 네가 하는 것들이 어떤 일인지 잘 알지? 아가, 윤리마저 잊지 말렴.”

글렌의 표정이 안쓰러웠다. 아엘로는 그녀를 다시 안으며 양 볼에 한 번씩 두 번의 키스를 했다. 그리고는 다시 날 잡아 당겼다. 꼬불꼬불한 골목을 지나 그녀는 아까 점을 보았던 그곳까지 다시 돌아왔다. 그녀는 오는 내내 날 바라보지도 나에게 어떠한 말을 건네지도 않았다. 다시 그녀가 날 바라본 순간은 도착한 순간이었다. 카드를 슬쩍 보여주며 말했다. 조금은 부끄러운 목소리로 이렇게 말했다.

“아직도 이 카드가 궁금한가요. 아니면 이 카드보다 제가 더 궁금한가요.”

그녀의 물음에 나는 쉬 답하지 못했다.

3
그녀의 이야기를 나는 해보려한다. 그녀의 집시생활과 터무니없는 삶에 대해서 난 말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 순간으로부터 우리는 꽤 많은 이야기를 나눴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난 그녀에 대해 확실하게 하나도 말할 수 없다. 매 도시를 방랑 생활하는 집시로 매도시마다 새로운 남자를 만들었다. 그녀는 종종 그렇게 말하고는 했다. 저는 창녀가 아니에요. 물론 그들로부터 하룻밤의 거처를 얻긴 했지만, 그들은 이내 절 버리고 말거든요. 남자가 다시 찾아오지 않는 여자는 창녀도 못돼요.

왜 그리 미인인 아엘로를 떠날 수밖에 없었을까. 이번엔 그 ‘하얀 깃털’ 이야기를 해보려한다. 이야기는 그 도시의 저녁부터 시작된다.

“지금은 그 카드보다 당신이 더 궁금하네요.”

그녀는 자신을 더 알고 싶다면 한 끼의 식사를 해보는 것이 어떻냐고 제안했다. 나는 그것에 응하였다. 그리고 내가 식당으로 안내하려는 순간 다시금 그녀가 나를 끌고 걷기 시작했다. 걸으며 그녀가 내게 물었다.

“제 이름은 아엘로에요. 쉬운데 사람들이 잘 잊어버리더라고요. 당신은 잊지 말아줘요.”

잊어버린다는 대목에서 그녀의 목소리가 작아졌다. 나는 얼핏 알 것 같은 그녀의 삶이 슬퍼졌다.

“그럼 당신의 이름은 뭔가요?”
“기타노에요. 저희 아버지가 투우사셨거든요.”
“충분히 일리 있는 이름이네요. 기타노, 그 뜻도 아시는 건가요?

아엘로가 걷다말고 내 앞을 막아서며 물었다. 그녀의 눈이 나와 마주쳤고 처음 마주친 그날의 감정이 떠올라 그만 얼굴이 붉어지고 말았다. 나는 당황해하며 말까지 더듬으며 대답했다.

“네, 네. 플라멩고를 잘 추는 투우사 맞죠?”
“당신 이름인데… 제가 너무 당연한 것을 물었나 봐요. 아, 저기 있다. 저기로 가죠.”

내 대답에 그녀는 다시 길을 내주었다. 언뜻 그녀의 미소가 보였지만 미소인지 그녀를 보는 나의 착각인지 분간이 안됐다. 그녀는 길 건너편 한 식당을 보며 신이나 말했다. 그녀를 단순히 남자를 꼬드겨 밥을 얻어먹고 잠자리를 주고 잠잘 곳을 얻는 것이라고 막연한 속마음이 그 식당을 보고 드러나 버렸다. 음식 가격이 비싼 곳이나 전망이 좋은 곳을 데려갈 줄 알았는데 그녀가 가리킨 그 곳은 주변 건물에서도 유난히 무너질 듯 허름한 식당이었다.

그녀는 그곳을 잘 알고 있는 듯 했다. 주인과도 친한 듯 짧게 인사를 나누었다. 식당 안은 생각보다 넓었는데 마치 서부영화에나 나올법한 공간이었다. 바와 식당을 겸했는데 낡아 거뭇거뭇해진 나무가구와 흘겨 쓴 필기체의 메뉴판들이 어지럽게 나열되어있었다. 붉은 립스틱을 짙게 바른 종업원이 카운터 벽에 기대 서있었다. 어딘가 구닥다리의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다. 그러나 그녀에게 빨려 들어가듯, 그 식당에도 빨려 들어가 창가에 그녀와 마주보고 앉고 말았다.

“기타노. 당신은 어떤 일을 해요? 양복이라니. 회사원인가요?”
“네, 조그만 에어컨 회사에서 일해요. 설치하거나 개발하는 쪽은 아니고 큰 회사에 가서 저희 제품을 홍보하는 일을 해요.”
“자주 출장 다니시나요?”
“네, 보통 일주일에 두어 번 다니죠.”
“왠지 어디선가 익숙한 냄새가 난다했어요. 제 일도 궁금하지 않아요?”

그녀의 말투에 장난기가 가득했다. 나는 금방 답하려 했으나 붉은 립스틱의 종업원이 메뉴를 물어, 급하게 메뉴판을 열어 으깬감자와 샐러드를 시켰다. 아직 채 아침의 공복이 가지 않아서 간단히 시켰다. 그녀는 양송이스튜를 시켰다. 종업원도 그녀를 아는지 그녀가 양송이란 말만 했는데 바로 “스튜요?”하고 치고 들어왔다. 그녀가 익숙한지 고개를 까딱했다.

“어서 답해 봐요. 제 일은 무엇일까요? 아까 본 것이 전부라고 생각하지 말아주세요. 그건 부업이니까.”
“부업이었나요? 저는 당연히 그것이 아엘로, 당신의 일일 줄 알고 점성술사라 답할 뻔 했어요.”
“저는 창녀일지도 몰라요.”

순간 마시던 물이 목에서 뛰쳐나왔다. 급하게 고개를 숙여서 다행히 입에서 나온 물이 식탁을 다 넘어가지 않았다. 나는 켁켁거리며 다시 물을 마셨다. 나는 빨개진 얼굴로 그녀를 바라봤다. 그녀는 여전히 아까와 같게 장난기 넘치는 얼굴이었다. 지금 이순간도 내가 왜 이러는지 다 안다는 듯, 방금 입에서 나온 말은 하나도 신경 쓰지 않았다. 사타구니에 잠겨있던 기대감은 폭발적으로 증가했지만 가슴 한 켠의 신비로움이 서서히 무너지는 느낌이 들었다.

“표정이 너무 웃기네요. 믿는 건가요? 아니면 예상하고 있다가 연기를 하는 건가요?”
“어느 쪽도 아니에요. 믿지도 못하겠고 예상하지도 못했어요. 왜 굳이 창녀가 길거리에 나앉아 저 같은 남자를 물색하겠어요. 그리고 저번에 보았던 세공품들, 너무 정교했어요. 그것만 해도 먹고 살 탠데 몸을 팔 리가 없잖아요?”
“그럼 왜 놀라셨나요?”

그녀의 천진 무궁한 질문에 난 술술 나오던 말문이 턱하고 막혀버렸다. 내 어색함을 지우려는 듯 음식이 나왔다. 너무 많지도 너무 적지도 않은 적당한 양과 복잡하게 보여야할 샐러드가 정갈하게 정리된 느낌이 들었다. 푸른빛의 소스가 시큼한 냄새를 풍겼다. 그녀의 스튜도 잘린 바게트와 함께 적당한 양이 나왔다. 나는 포크를 들었다. 그녀도 식사를 시작했다.
질문에 답하지 못해서일까. 어색한 분위기가 이어졌다. 음식을 다 먹는 그 순간까지 나는 붉어진 얼굴로 그녀를 응시할 수 없었다. 그녀는 날 의식하지도 않고 음식에 집중해 뜨거운 스튜를 불어가며 빠른 속도로 먹었다. 반면 나는 음식이 코로 들어가는 지, 입으로 들어가는 지도 헷갈렸다.

“노라 존스라고 아나요?”

그녀가 먼저 다 먹고 여전한 날 보며 물었다. 내가 대답이 없자 말을 이었다.

“매우 예쁜 가수에요. 여자인데 중저음의 허스키한 목소리가 매우 좋아요. 재즈나 블루스 그 사이를 넘나들었죠. 그렇게 실력 있는 여가수가 인기를 얻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 줄 아세요?”
“어떻게 해야죠?”
“못 생겨야죠. 그렇게 완벽한 이미지는 욕을 먹어요. 그녀에 대한 사소한 부분마저 그녀를 알고 있는 사람들 사이에서 큰 이슈가 되고 말아요. 누구와 잤다거나, 누구와 스캔들이 났다거나. 대중들은 쟤도 우리와 같은 인간이라는 것을 알고 싶어 하죠. 이게 옳은 것일까요. 그녀의 두 번째 앨범에서 그게 밝혀져요. 그녀는 순수하게 음악으로 그것을 결국 누르고 말았어요.”

아엘로는 종업원이 가져다준 커피를 마시며 말을 이었다.

“그녀의 음악에서 대중이 외로움과 분노가 서려있는 것을 발견하죠.”
“그래서 대중이 두려워서 그만 둔 것인가요?”
“유치한 질문 하지 마요. 대중은 그 순간 알게 된 거죠. 쟤도 우리와 같은 인간이라는 것을. 저도 그런 것 같아요. 제가 당신에게 인간이 되기 위해서는 창녀가 되고 싶어요.”

그녀의 말은 논리적이면서도 어딘가가 그녀가 말한 노라 존스와 비슷하게 ‘외로움과 분노’, 그것이 서려있었다.

“어색하네요. 이런 이야기 어렵고 괜히 진지하게 만들었네요. 죄송해요.”
“아녜요. 그렇지 않았어요.”
“그래요? 이제 그만 돌아갈까요?”

그녀는 일어났다. 대체 어디로 돌아가자는 걸까 다시 그녀의 행동에 의문이 생겼다. 나는 급하게 지갑에서 돈을 꺼내 식탁 위에 팁을 올리고 카운터로 걸어갔다. 이미 그녀가 계산을 한 뒤였다. 그녀는 싱긋 웃었다. 오후의 햇살이 문득 그녀의 곁을 지나갔고 햇살을 머금은 화사한 그녀가 내 눈 가득히 들어왔다.

라난이라는 도시는 대륙과 바다의 접점이었다. 나는 라난이라는 도시에 대해 그리 잘 알지 못한다. 허나 이 큰 도시에 우중충한 회색은 걷고 있노라면 어딘가 묵직했다. 수많은 양복 사이에서 난 흥미로운 것이라고는 단 하나도 발견할 수가 없었다. 건물마다 악수하고 있는 사람들의 천지인 이곳엔 생명력 넘치는 곳은 그 어디도 없었다. 아니, 없다고 알고 있었다.
그녀와 같이 간 그곳은 도시를 지나가는 집시들의 모이는 곳이며 끝없는 축제로 지친 영혼을 위로하는 곳이었다. 겉에서 보기엔 그저 폐공장이였다. 녹이 슨 파란색의 물결모양의 철판들이 더덕더덕 붙은 마치 쥐며느리의 등껍질 같던 곳이었다. 허나 그 안에는 서서히 저녁이 저물어감에 따라 하나 둘, 그들이 모여들었다.

내가 전에 들었던 어떠한 음악도 아니었고 어떠한 춤도 아니었다. 하나하나 다 자신들의 것이었으며 새로운 것들이었다. 기타를 쳤다가 난데없이 바이올린이 들어오고 곧이어 전자음이 들리기도 했다. 서른 개가 넘어 보이는 앰프 사이로 지면위로 무대가 있었다. 그 속의 춤은 플라멩고 같기도 했고 탭댄스 같기도 했다. 때론 군무를 추기도하며 그들은 서로 어울려 즐기고 있었다. 하나같이 높은 수준이었다. 서로가 서로에게 맞추며 춤과 노래는 점점 고조되었다.
나는 그 주변에서 구경만 하고 싶었다. 이 양복으론 자신도 없었고 저런 춤사위 사이에서 내가 할 건 없어보였다. 음악은 더 말도 못했다.

“겁먹지 마요. 우리도 당신과 같은 사람들이에요. 한 걸음씩 천천히 이리로 와요.”
“저만 유난히 눈에 띄네요. 하, 이런 곳에 올 줄 알았다면 이 검은 양복 따위 버려버렸을 거예요.”
“기분 좋은 말을 하네요. 그럼 그 소원 이뤄드릴게요.”

그녀는 날 무대 가운데까지 잡아당겼다. 넥타이를 잡히자 난 반항도 못하고 춤 속으로 파고들 수밖에 없었다. 탁, 탁 이란 구두소리에 맞춰 부드럽다가도 탁. 절도 있는 춤이 반복되었다. 그녀는 날 중심으로 주위를 돌며 춤추었다. 그녀의 옷자락이 휘날렸다. 노래는 서서히 빨라졌다. 내 팔을 잡아당겨 자신에 볼에 비비기도하고 그녀의 등을 내 등에 맞추기도 하며 관능적인 춤사위도 서슴지 않았다. 노래는 점점 절정으로 향했다. 주위에서 탄성과 웃음이 쏟아졌다. 한 남성이 새처럼 한 여성을 들어올렸다. 그 여성도 팔을 휘휘 저으며 날았다.

짝, 짝. 박수소리가 곁들여졌다. 나도 그녀를 따라 서서히 몸을 움직였다. 관절 구석구석 땀이 나는 것 같았고 내 구두소리가 그렇게 큰지도 몰랐다. 종아리를 울리는 그 진동에 익숙해질 무렵 그녀가 내 검은 양복 자켓의 단추를 하나하나 풀더니 결국 벗겨냈다. 그리고 휘휘 돌리더니 무대 밖으로 던져버렸다. 회색의 넥타이도 풀려갔다. 그녀에게서 나는 나긋한 향기가 싫지 않았다. 그녀는 내 넥타이를 풀어 자기 목에 리본으로 묶어버렸다. 내가 웃었다.

멈출 줄 몰랐던 그 공간은 공장 밖의 누군가의 노래로 멈추고 말았다. 사이렌 소리가 들려왔다. 그녀가 문득 춤을 멈추더니 내 손을 잡고 뛰었다. 사이렌 소리의 반대편 공장 벽으로 가 푸른색의 철판을 부숴 밖으로 나왔다. 그녀가 공장의 외각을 나올 때 물었다.

“어디서 묵고 있어요?”
“고, 공항 근처에  디몬드 호텔이요.”

내가 숨을 헐떡이며 말했다. 그녀가 그리 가요라고 말했다. 나는 점점 더 차오르는 숨에 대답조차 하지 못했다. 사이렌이 들리지 않을 무렵 그녀는 택시를 잡았다.

“디몬드 호텔로 가주세요.”

그녀의 말에 난 아무 거절도 허락도 하지 않은 채 오늘 내 줄곧 그래왔던 것처럼 그녀에게 빨려 들어갔다.
가로등이 수없이 창문을 지나갔다. 우리는 나란히 택시 뒷좌석에 앉았다. 나는 어째서냐고 묻고 싶었지만 그녀가 떠날까봐 차마 말하지 못했다. 그녀도 내 표정을 보고 이미 아는 눈치였다. 그녀는 정말로 나와 잠자리를 원하는 걸까, 아니면 또 다른 것을 원하는 걸까. 이상한 생각들이 겹쳤다. 눈이 자꾸 창문 너머로 갔다.

“싫어요?”

그녀의 물음이 내 뒤통수를 쳤다. 나는 고개를 돌려 그녀를 바라봤다. 자꾸 손에 땀이 찼다. 손을 비비며 나는 대답했다.

“모르겠어요. 당신이 싫지는 않지만…….”

나는 말끝을 흐렸다. 그녀가 내 손을 잡았다. 심장이 쿵쿵 뛰어 그 소리가 고막을 때렸다. 고개를 돌리고 말았다. 창문 너머로는 아직도 가로등의 황색 불빛이 잔상을 남기며 지나갔다. 그녀가 손을 놓았다. 그리고 가방을 뒤적거리더니 날 톡톡 건드렸다. 그녀의 손바닥에는 은색의 넥타이핀이 있었다. 얇았지만 그 핀 위로는 아주 조그맣게 문장이 적혀있었다. 매우 섬세한 솜씨였다.

“싫다고 하면 그냥 갈게요. 대신 이건 받아둬요. 아까 정장외투랑 넥타이 챙기지 못했잖아요. 데리고 간 제 책임이 있으니까 받아둬요.”
“아녜요. 저도 같이 춤 췄는걸요. 그런 경험값 했다고 생각하죠.”
“그래요? 알겠어요.”

그녀는 다시 가방에 핀을 넣었다. 이번엔 그녀가 고개를 돌려 창문 너머를 바라봤다. 문득 가슴이 아팠다. 왜 거절했을까 후회가 됐다. 그녀는 손이 보였다. 아까 춤추다가 팔찌를 빼서일까. 얇은 그녀의 손목이 아름다웠다. 그리고 나도 모르게 그 손을 잡았다. 내 얼굴이 화끈 달아올랐다. 그녀는 그래도 고개를 돌리지 않고 여전히 창문 너머를 바라보았다. 우리는 그렇게 디몬트 호텔에 도착했다.
호텔 앞에서 내린 우리는 서로를 바라보지 않고 그대로 서 있었다. 짧은 순간이 너무나 지루했다. 나는 택시를 내리면서 놓은 손을 다시 잡고 호텔 안으로 들어갔다. 쿵쿵, 심장소리가 내 발소리보다 빠르게 뛰었다. 프론트에서 맡겼던 열쇠를 받고 내 방인 1301호로 들어갔다.

방안은 어두웠다. 아침에 친 커튼이 여전히 닫혀있어 밖의 불빛은 하나도 없었다. 신발장의 불빛은 우리의 움직임에 반응했다가 금세 꺼지고 말았다. 그녀가 어둠속에서 나를 잡아당겼다. 그녀의 가방이 떨어지는 소리도 났다. 그녀는 점점 익숙해져 사물이 보이자 날 침대로 밀었다. 그녀가 내 위로 올라왔다. 이미 그 춤으로 반쯤 벗은 나는 와이셔츠만 입고 있었고 그녀는 단추를 하나하나 풀기 시작했다.

시작하기 전에 많은 것을 묻고 싶었지만 이내 부드러운 입술의 감촉에 난 숨을 들이마시고 말았다. 그녀가 머리카락이 자꾸 내 사타구니를 간지럽게 했다. 나는 신음을 참을 수가 없었다. 그녀를 들어 올려 내 옆에 뉘이고 이번엔 내가 그녀의 위로 올라갔다.

그녀의 입술에 키스했다. 입술을 부드럽게 마찰시키다가 이내 혀를 밀어 넣었다. 그녀가 받아서 자기 혀로 둥글게, 둥글게 돌렸다. 그러는 와중에 손으로 그녀의 옷을 벗겼다. 그녀는 흰색의 민무늬 브라를 하고 있었고 나는 그녀의 등에 손을 넣어 풀어냈다. 봉긋한 그녀의 가슴이 드러났다. 멈추지 않고 그녀의 바지의 지퍼를 내리고 속옷 안으로 손을 집어넣었다. 둘이 하나가 되었다. 그녀가 내 상체 위로 올라왔다. 그녀의 허리놀림에 점점 절정으로 달았다. 그녀의 허벅지가 후들후들 거리더니 이내 아! 하고 큰 신음을 흘렸다.

그 장면은 나는 도저히 잊을 수 없었다. 그녀의 볼부터 흰색의 솜털이 보이더니 그 솜털은 목과 어깨를 지나 등까지 닿더니 이내 흰 깃털로 변하고 그녀를 휘감을 수 있을 정도로 길게 날개가 되어 뻗어 나왔다. 그녀의 눈이 빨갛게 변했고 도저히 믿을 수 없는 나의 눈이 크게 커졌다. 그녀는 그대로 내 가슴위로 누웠다. 나는 움직일 수가 없었다. 축 늘어진 날개가 내 허벅지에 느껴졌고 간질거리는 그 깃털이 점점 무서워졌다.

작아지는 내 성기를 느꼈을까. 그녀가 말했다.

“미안해요. 그래도 걱정 마요. 내일이면 저는 이 도시를 떠날 태니까. 더 이상은 볼일이 없을 거예요.”

나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녀가 고개를 들어 날 바라보았다. 그녀의 얼굴에 있던 솜털은 이미 사라졌고 흰 깃털 몇 장만이 침대 위를 나뒹굴었다. 그녀의 얼굴을 바라본 순간 아무 말도 못하던 내가 입을 열었다.

“마지막 카드 뭐였나요?”

그녀가 더 이상 궁금하지 않다. 나는 속으로만 그리 말했다.
등을 켰다. 나는 일어나 옷가지들을 주워 입었다. 나는 그 순간 마치 그녀를 다 안사람처럼 어딘가 냉정하게 대할 수밖에 없었다. 그녀도 익숙한 듯, 묘한 표정을 지으며 옷을 입었다. 적나라했던 순간들이 스쳐지나간다. 사랑했다면 이해해줄수도 있는 순간들이 두려워지는 걸 보아, 그녀에게 첫눈에 빠지거나 한 것이 아닌 것이 틀림이 없었다.

“그 카드가 이제 궁금한가요?”
“네. 아마 이 순간을 예견했겠죠. 무엇이었나요. 배반? 공포? 대체 어떤 카드였나요?”
“정 그러시다면 두고 갈게요. 해석은 당신의 몫이에요.”

그녀는 그 말을 남기고 품에서 카드 한 장을 꺼내 침대 옆 등 아래 두고 방 밖으로 나갔다. 문득 이렇게 얼마나 많은 방을 나갔을까, 궁금해졌다. 날개가 뻗어 나온 장면이 자꾸 생각이 났다. 순백의 깃털들이 아름다웠지만 뻗어 나오는 그 기세가 너무 두려웠다. 나는 손이 조금씩 떨리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떨리는 손으로 잡은 것은 카드가 아닌 깃털이었다. 마치 먼 우주에서 날아온 운석을 보듯 해괴하고 믿을 수 없었다. 그녀의 깃털은 거꾸로 쓰다듬으면 뻣뻣하게 엉켰고 결대로 쓸어내리면 부드러웠다.

4
날이 밝자 일을 나갈 채비를 하고 프론트의 컴퓨터를 빌려 그 카드에 대해 찾아보았다. 눈을 감은 여자가 구름 사이에서 피리를 불고 있었고 그 아래 나체의 수많은 사람들이 손을 벌려 그녀를 맞이하고 있었다. 수수한 흰색의 옷을 입은 여자 등 뒤로는 날개가 있었다. 처음에 그 카드를 보았을 때 난 그 날개에 놀라고 말았다. 그녀의 사진인 것 같아, 자꾸 속이 쓰렸다. 검색결과엔 ‘20. 심판’이라는 단어가 나왔다.

‘당신이 이 카드를 뽑았다는 것은 의외의 부분들이 많다. 결단력이 아주 강하다는 뜻의 심판은 그 뜻 이외의 수많은 것들을 내포하고 있다. 심판이라는 단어가 주는 이미지들은 겉의 이미지이고 그 속의 이미지는 조금 다르다. 그림으로 가보자. 대천사가 피리를 불고 있고 그 아랜 죽은 이들이 죽은 이가 되살아나 있다. 대천사가 일으킨 기적은 단순히 사람을 다시 살린 기적은 아니다. 심판이라는 단어와 연관시키면 심판으로써 되살린 것이 된다. 즉, 이 카드를 뽑은 당신은 심판을 받음으로써 새로 태어났거나 또 다른 도전을 맞이할 준비가 된 것이다. 금전운에서 이 카드는 당신의 재산의 재평가를 의미하고 학업운에서는 빠른 결단력을 요구하는 것으로 나온다. 그리고 연애운에선 재회를 의미한다.’

아침부터 자꾸 일이 꼬였다. 가슴에 달아야할 명찰이 보이지 않아 부리나케 하나 더 만들었더니 애초에 있던 세미나가 취소되었다. 에어컨 전시전에 올 에어컨들이 아직 도착하지 않았다. 중요한 것들이 자꾸 세어나갔다. 핸드폰을 아침부터 놓지 않고 있었다. 회사로부터 걸려온 전화에서는 욕, 질책들이 나왔고 내가 건 전화에서는 독촉과 부탁이 서려있었다. 나는 다시 일상이라는 느낌도 없을 정도로 바쁘게 달리고 있었다.

그녀에 대한 생각이 완전히 사라지진 않았지만 충격요법 같은 걸까. 잊히는 속도가 빨랐다. 허나 사라지는 기억의 부분은 호텔에 도착해서부터이고 그 전의 기억들은 머릿속에 잔상으로 남았다. 문득 ‘관계’란 건, 막상 인간관계에선 아무 부분도 아닐까 싶어졌다. 이 생각도중 그녀에게 조금 미안해졌지만 이내 그런 마음은 그 날개로 떨칠 수 있었다.

어느 부분에서 내가 화가 난 것일까. 날개를 보아서일까, 그녀가 그런 존재여서였을까. 아니면 그런 존재라는 것을 말해주지 않아서였을까. 나는 충분히 그녀가 나와 다르다는 것을 알고 있었는데 그 순간 명확한 증거가 보이니 왜 그렇게 화가 났는지 나조차도 이해가 되지 않았다.

점심을 먹고 나선 일이 없었다. 애초에 목적이었던 에어컨들이 깡그리 늦어지는 바람에 내일로 일이 몰아져버렸다. 나는 호텔로 돌아와 앉았다. 그때 똑똑, 노크소리가 들려왔다. 갑자기 가슴이 뛰기 시작했다. 떨리는 가슴을 진정시키고 발소리, 숨소리 죽여가며 현관문 앞에 섰다. 그녀이길 바랐고 사과하고 싶었다. 문을 열었다.

“어젠 죄송해…….”
“기타노씨 맞으시죠? 함께 가주셔야겠습니다. 어제 불법 집회에 참석하신 것 압니다. 정장 안주머니에 명찰이 있더군요.”

경찰이었다. 그를 따라 들어간 경찰서 안은 점심때라 그럴까 생각보다 조용했다. 경찰은 날 한 쪽 의자에 앉혔다. 인적사항을 묻더니 어제의 일에 대해서도 물었다.

“불법 집회에 참여하신 것 아시죠?”

타닥, 타닥. 그의 키보드소리가 매우 거슬렸다. 나는 고갯짓하며 답했다.

“아뇨, 저는 그저 파티인줄만 알았습니다.”
“그런데 어째서 도망가셨나요?”

나는 대답하지 못하였다.

경찰은 보호자가 올 때까지 창살 안에서 있으라하였다. 경찰 내 구치소엔 철제의자 몇 개와 칸막이 하나로만 가려놓은 화장실이 있었다. 날 밀어 넣은 경찰은 아무 표정도 없이 뒤돌아섰다. 나는 철제의자에 앉았다. 누군가가 방금까지 앉았는지 미지근한 느낌이 엉덩이를 통해 올라왔다. 화장실 물이 내려가는 소리가 들리더니 고개 숙인 내 앞으로 누군가 서서 날 불렀다.

“또 보네요.”
나는 고개를 들었다. 아엘로, 그녀가 그곳에 서 있었다. 그녀는 바로 옆의 의자에 앉았다. 그녀가 날 보며 말했다. 나긋나긋한 말투가 익숙했다.

“또 볼지 알고 있었어요. 근데 이런 곳이라니. 난감하네요.”
“저도 알고 있었어요. 마지막 카드에 그렇게 적혀있더군요. 재회라고.”
“다행히 무슨 뜻인지는 알아내었네요. 그래도 우리의 이별은 빠르겠죠. 당신 보호자는 금방 올 태니.”
“아쉽게도 아니에요. 연락을 넣었으니 이제부터 오더라도 저녁 즈음이겠죠. 제 고향은 여기서 수백만 마일이 떨어진 곳이니까요. 그러는 당신은 더 빨리 나가겠군요. 곧 글렌이라는 분이 오시는 것 아닌가요.”

그녀가 좌우로 고개를 흔들었다.

“이미 제 일행은 떠났어요. 그들에게 바로 연락할 수 있는 수단은 없어요. 아마 내일 오후쯤에나 경찰이 질려서 그냥 풀어주겠죠. 그나저나 당신은 어떻게 잡혀온 거예요.”
“정장에 제 명찰이 있었거든요. 신원이 적혀있으니 금방 제 숙소로 찾아왔어요. 당신은요?”
“어제 그곳에 다시 가봤어요. 정장 찾아주려고 했거든요. 아무래도 미안해서요.”
“그렇군요.”

어딘가 씁쓸했다. 날 위해 그곳에 갔다는데 어딘가 차갑게 응어리진 듯 가슴이 아려왔다. 구치소의 창문의 쇠창살 사이로 햇살이 나뉘어 들어왔다. 구조상 어쩔 수 없을까. 이 좁은 구치소에 창문이 달려있는 것이 이상했지만 창문 너머 격자의 쇠창살이 이내 다시 마음을 다잡게 했다. 잠시 침묵이 이어졌다.

“궁금하지 않아요? 어제 밤의 그 날개 말이에요.”

그녀의 말이 칼날이 되어 공기 중에 떠다녔다.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자꾸 얼굴이 기분을 감추지 못하고 일그러졌다.

“흉측했나요? 섹스도중에 나와서? 보통 그러더라고요. 너무 흉측해 볼 수가 없대요. 그래서 평소에는 깃털 한 장도 빼지 않아요. 그런데 오르가즘을 느껴버리면 폭발하듯 나와요. 그때 나와서인지 더 흉물스러운 것 같아요.”
“자지 않으면 되잖아요. 어제 밤같이 경멸당할 그럴 일도 없잖아요.”
“단순한 문제에요. 혼인과는 아무 관계없어요. 흘러가다보면 언젠가 저도 제 짝을 만나겠지요. 그냥 그런 것들을 떠나서 관계가 좋고 섹스가 좋아요. 섹스 이후의 나른함 감정이 좋아요. 그런 문제예요. 그 문제를 해결하지 못해서 결국 집을 나온 것이고요. 처음엔 내 자유였지만 점점 절 싫어하는 이가 많아지면서 점점 강제로 변하는 것 같아서 슬프지만요.”

그녀는 자꾸 소매를 만지작거렸다. 그녀의 옆모습이 어딘가 안쓰러웠다. 그녀의 손을 잡았다. 따스한 온기가 내 온기와 뒤엉켰다.

“이해할 순 없지만 당신 탓은 아닌 것 같아요.”

그녀가 날 바라보며 눈물을 글썽였다. 남은 손으로 그녀의 등을 두드려주었다. 그리고 손을 꽉 잡아주었다. 글썽이는 그녀의 볼로 흰 솜털이 자라기 시작했다. 충혈된 듯 그녀의 눈이 붉어졌고 두드리던 손에 깃털이 감촉이 느껴졌다. 그녀는 어제 밤의 그 모습으로 결국 울고 말았다. 그녀의 울음소리가 어딘가 중저음의 허스키한 목소리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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