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밀번호를 잊어버리셨나요?

단편 정상에서 1

2012.04.09 11:0404.09

정상에서 1

  

1.

  

기차가 들어온다. 아주 먼 곳으로부터 출발해 오랜 시간을 달려온 듯 종착역에 도착 할 즈음에서야 힘 빠진 기적소리를 풀어놓는다. 모퉁이를 돌아 천천히, 도시의 접경을 지나 터덜터덜 굴러오는 기차의 모습이 하늘에 고인 회색의 먹구름 아래에서 더욱 피로해 보인다. 터덜터덜. 터덜터덜. 부우우. 마지막일 것이 분명한 긴 울음소리가 지금 들려온다.

  
소리는 기차의 몸 안에서 더 깊고 확실하게 울린다. 누군가에 관한 험담이나 자신의 신세를 과장해 만들어낸 무용담으로 시간을 죽이던 사람들은 자리에서 재빨리 일어나 옷매무세를 단정히 하며 아무데로나 주위의 한 곳으로 시선을 돌리고는 이제 막 무엇인가가 끝났다는 듯이 깊은 한숨을 내쉰다. 곤한 잠에 빠져있던 사람은 슬며시 눈을 뜨고 정면에 있는 좌석의 목 받침대를 보며 입맛을 다신다. 선반에서 가방을 내리는 사람. 그 사람에게 아직도 애처로이 말을 잇는 사람. 사람. 사람. 그러나 결코 모든 승객이 기차가 멈춰선 다음의 일을 예비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예를 들면, 멍하니, 그저 멍하니 앉아 마치 아무 소리도 듣지 못했다는 듯이, 창밖의 풍경을 계속 바라보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 대부분은 이제 곧 내리게 될 종착역에서 자신을 기다리고 있는 사람이라곤 아무도 없다는 것을 안다. 그들은 이러한 순간에 가끔, 기차의 안과 밖, 혹은 기차에 타는 것과 내리는 것 사이엔 결국 아무런 차이도 존재하지 않는다고 생각하면서(그 중 어떤 이는 으스대면서) 그렇게 기차에서 내리는 일이 자신들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는 것처럼, 혹은 자신은 그런 일에는 어떤 관심도 없다는 것처럼 행동한다. 그들은 대개 자신의 이름을 떠벌리고 싶어 하지 않는다. 조용하고 책임을 마다하고 투명하며, 자신이 계속 투명한 상태로 있기를, 여기와 저기 사이에 벌어진 틈새에, 쉽게 발각되지 않을 또 다른 은신처에 굴을 파놓고, 바로 그 곳에 계속 머무르길 희망한다. 그는 꼭 그런 심정으로 얼룩덜룩한 유리창의 바깥을 바라보고 있다. 누런 먼지와 어둑한 하늘이 스쳐가는 건물들을 더욱 우울하게 만든다. 강아지 병원, 부동산, 세탁소, 이발소, 편의점, 다시 부동산, 교차로, 나무, 나무 초등학교, 편의점, 치킨집, 미용실, 기둥, 기둥, 기둥. 기둥, 기둥, 기둥, 기둥, 치이이이, 기차가 멈춰선다.

  
제일 늦게 기차에서 내린 그는 그러나 그런 노력도 아무 부질없이,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거대한 사람의 물결 속으로 흘러들어간다. 이런 부대낌이 그에겐 여간한 고역이 아닐 수 없다. 소면다발처럼 빽빽하게 들어찬 사람들 사이로, 이리 밀리고 저리로 당겨져서 겨우 기차역을 벗어나 첫 발을 내딛자마자 그는, 뒤를 돌아 자신이 빠져나온, 여전히 우람하게 서있는 기차역을 올려다본다. 어떤 것으로도 쓰러뜨릴 수 없이 강건해 보이는 그 거대한 건물은 때때로 크게 울부짖고는 후에 이내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인간들을 토해낸다. 종이가방을 주렁주렁 매달고 한마디라도 더 해야겠다는 듯이 씨근덕거리는 여자와 남자. 이어폰을 귀에 꽂고 걸어가는 학생들의 발걸음, 어디선가 불어오는 뜨거운 바람과 그 바람을 피해 이리저리 굴러다니는 종이컵들. 도시는 한없이 거대한 것에서부터 조그만 것까지, 한없이 많은 것에서부터 적은 것까지 그 수많은 것들을 품고 그에게로 전진해 온다. 그는 순간 높은 곳에서 떨어지고 있는 것과 같은 착각에 아찔하여 깨어난다. 그러나 여기서 돌아갈 수는 없다. 아니다. 애초에 그는 이곳으로 돌아온 것이다.

  

그는 지금 막 이 도시에 돌아왔다.

  

함부로 걸음을 옮길 순 없다. 도시는 아주 오랜만이기 때문에 익숙해지기 전까지는 경계를 늦추지 말아야 한다. 무턱대고 가다간 길을 잃기 십상이다. 그는 이리로 다시 저리로 눈알을 굴리다가 말고 문득 매고 있던 가방에서 사과가 담긴 비닐봉지를 꺼낸다. 봉지 안으로 손을 넣자 축축하고 뜨뜻한 물이 팔에 묻는다. 그는 사과를 한 입 크게 깨물고는 아삭하지 않고 슬슬 허물어지는 사과의 살을 녹이며 주머니에서 꼬깃하게 접힌 쪽지를 한 장 꺼내든다.

  

지하철은 아까와는 또 다른 사람들로 꽉 들어차 있다. 아주 빽빽이 들어찬 사람들의 밀도는 차라리 방금 전에 씹은 사과살의 그것보다도 높아 보인다. 한 입 베어 물면 아삭 할 정도다. 손잡이에 매달리다시피 하여 차가우면서도 땀으로 끈적거리는 자기의 비대한 팔뚝이 옆에 있는 여자의 볼에 닿을 때 마다, 그리고 사람들 사이에 전혀 존재한다고 볼 수 없는 그러한 틈새(라고 말할 수도 없다.)를 비집고 기적처럼 움직이는 사람들로 인해 매고 있는 가방이 뭉개질 때 마다, 그는 안절부절 못하고 불안해한다. 서류가 행여나 구겨지는 것은 아닌지 걱정이 되는 한편 여자에게 자신이 마치 이 차갑고 끈적거리는 팔뚝처럼 여겨지고 있는 것은 아닌지, 하는 그런 생각 때문이다. 목이 늘어난 갈색 줄무늬 티셔츠에, 그렇기 때문에 목 언저리가 드러나 보이는, 짧은 단발머리에, 정면에 나있는 창문 밖의 어둠을 바라보며, 팔이 닿을 때 마다 인상을 찡그리고 가방을 고쳐 매기 때문에, 그렇기 때문에 그에게는 이 여자가 자신보다 너무도 우월한 사람처럼 생각이 들어 자기도 모르게 태도가 공손해 지고 마는 것이다. 그는 최대한 여자에게 닿지 않으려고 있는 대로 힘을 주고 버티지만 그러한 모든 노력이 아무런 소용도 없이 그녀의 볼은 그의 팔뚝에 붙었다가 쩍하고 떨어지기를 반복한다. 전동차가 속력을 높이거나, 혹은 줄이거나, 커브를 돌거나 할 때 마다 발끝이 찌릿찌릿하다.

  
  
그는 열차에서 튕겨져 나와 역사 안의 의자에 앉아서 거친 숨을 쉭쉭 내쉰다. 의자로 걸어 올 때 항문근처가 땀인지, 뭔지 모를 물기 때문에 비누를 칠한 것처럼 미끄덩거린다. 기진맥진한 그는 잠시 앉아서 물기를 말릴까, 아니면 남들이 보지 않는 곳으로가 닦아낼까 잠시 고민하다가 결국 화장실로 걸음을 옮긴다. 변소에서 그 움푹 들어간 부분을 닦아내려고 하자 휴지가 물기에 젖어 뭉치면서 엉덩이에, 정확히는 그 움푹 들어간 부분 주위로 들러붙는다. 그는 쭈그려 앉아 들러붙은 휴지를 손으로, 왜냐하면 잘 때지지 않아서, 마치 지우개 가루를 뭉치듯 문지르면서 말아 떼어낸다. 휴지를 떼어내면서 그는 참 마음이 좋지가 않다. 그러나 어쩔 수 없다. 어쩔 수 없다. 어쩔 수 없다, 를 속으로 몇 번인가 반복하고 나서야 조금 편안해진다.

  
  
도시는 지하철에 타기 전보다 훨씬 짙은 회색빛으로 잠겨있다. 이 회색은 너무나 짙은 회색이어서 아직 해가 지기 전임에도 도시는 밤하늘보다 오히려 더욱 어두워 보인다. 종이를 꺼내자 꺼낸 종이도 이내 회색으로 물든다. 짙은 회색. 아주 두껍게 칠한 것 같은 회색. 그와 그의 옆을 지나는 사람들과 그들 옆으로 서있는 건물들, 그 모든 것이 회색으로 물들어 살짝 손을 대는 것만으로도 부서져 흩어질 것만 같다. 이미 조금씩 부스러지고 있는 것만 같다. 그는 용기를 내어 우아한 원피스 차림의 한 노파를 붙잡고 길을 묻는다. 실례하겠습니다, 라는 그의 말에 고개를 돌린 노파는 그러나 움푹 쪼그라든 입모양으로 보아 이가 없어서 말을 하지 못할 것 같다. 뭐라 알아들을 수 없는 첫마디에 그는 허겁지겁 아, 아는 사람인 줄 알았네요, 라고 말하고는 다시 얼마간 노파와 반대 방향으로 걷다가 약속시간에 늦은 그 누군가를 찾는 것처럼 주위를 두리번거리면서 흘끗 노파가 사라진 것을 확인하고 걸음을 멈춘다.

  
  
옷과 살이 끈적끈적해져 들러붙을 정도의 날씨 때문인지 거리와 도로에는 사람들이 보이지 않는다. 그는 꼼꼼하게 도로와 건물과 사람들을 살핀다. 자세히 보니 모든 건물의 입구에는 네모난 모양의 현판이 붙어 있었는데 그 곳에 아마도 그 건물의 주소가 적혀있는 것 같다. 그는 먼저 앞에 있는 상점의 현관과 그 옆 건물에 적혀있는 숫자들로 거리의 방향성을 확인한다. 숫자는 어느 방향으로 증가하고 있는가. 마침내 그는 한 쪽 방향으로 걷기 시작하지만 가다보니 그 끝에서 다시 반대쪽으로 나있는 길로 숫자들이 이어지는 것을 깨닫는다. 길과 그것을 둘러싼 건물들이 차곡차곡 꼬여있다. 옷은 곧 물이 뚝뚝 흘러내릴 듯이 흥건하게 젖어있고 도시의 아스팔트에서는 역겨운 냄새가 풍겨 나온다. 이발소. 슈퍼. 정육점. 무수한 가게들이 지나쳐 간다.

  

서쪽 하늘에서부터 스며들어오는 황금빛이 도시의 회색하늘과 만나 뭐라 말하기 힘든 색을 만들어낸다. 하루 종일 달궈진 아스팔트의 열기가 뜨겁고 습한 바람을 거리로 내몬다. 축 늘어진 살과 삶아내는 것 같은 더위에 지칠 대로 지친 그는 이제 자신이 어디로 가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넥타이를 풀어헤치고 바지를 걷어 올린 채 물집 잡힌 발을 질질 끄는 모습이 꼭 걸래같다. 그는 이미 자포자기한 심정이다. 왜냐하면 어느 순간엔가 건물에 더 이상 현판이 걸려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숫자는 아무런 단서도 남기지 않은 채 도중에 뚝 끊어졌다. 다음 건물부터 이어지는 것인지, 혹은 전혀 다른 새로운 곳에서 다시 시작되는 것인지 알 길이 없었다. 결국 길을 잃었다. 단독주택이라 부르기 민망한 가건물들이 울긋불긋 돋아나 있다. 그는 현판이 어느 지점부터 갑자기 사라졌던 것처럼 그와 마찬가지로 어느 지점에선가 불쑥 다시 나타날 것이라 기대한다. 그러나 아직 나타나지 않았다. 아이들의 웃는 소리도 어느새 들리지 않는다. 남은 것은 바람소리다. 바람도 소리도 그의 눈엔 보이지 않는다. 바람에선 대신 아스팔트 냄새가 난다. 이제는 고운 봉숭아 빛으로 물든 길과 아스팔트 냄새와 아직 식지 않은 대지의 열기와 끝도 없이 늘어선 무허가 건물들과 무엇보다 정면에 펼쳐진 골목길의 괴괴한 모습에서 문득 알 수 없는 공포가 휘몰아든다. 그는 두려움에 뒤를 돌아본다.

  
그가 고개를 뒤로 돌릴 때, 마치 그 돌아가는 목에서 나는 것과 같은 끼이익 하는 소리가 들린다. 끼이익. 깜짝 놀라 다시 앞을 보자 검은색 모자를 쓴 사내가 가건물에서 비닐로 된 문을 열고 막 나오려 하고 있었다. 사내는 고개를 숙인 채 딴 생각을 하는 중이었는데 완전히 밖으로 나왔을 때 문이 저절로 쾅하고 닫히자 그 소리에 놀라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그 때, 둘의 눈이 마주친다. 사내는 키가 작고 몹시 말랐는데 청바지와 검은색 바탕에 흰 줄무늬가 들어간 티셔츠를 입고 머리에는 검은색 비니를 뒤집어쓰고 있다. 그는 그제야 그 사내가 노인임을 깨닫는다. 쭈글쭈글한 얼굴에 비해 허리가 곳곳이 서 있었지만 눈은 허여멀건한 것이 꼭 죽을 발라놓은 것 같다. 비니가 심하게 늘어나서 쓰고 있다기보다 얹혀놓은 것 같다. 그를 발견한 노인은 새삼스러울 것 없다는 듯이 이내 뒤를 돌아 맞은편의 길로 가려 했는데, 문득 걸음을 멈추고 다시 뒤를 돌아본다. 노인은 그를 유심히 쳐다본다.

  
「뭘 봐.」

  
「예?」

  
「왜 쳐다보냐고.」

  
갑작스러운 시비에 그는 마땅히 대꾸 할 거리가 없다. 머뭇거리다가 종이쪽지를 내민다.

  
「혹시 여기가 어디쯤인지 아시나요?」

  
노인은 쪽지는 거들떠도 안보고 계속 그를 쳐다본다. 손을 거둬야 할지 아니면 계속 들고 있어야 할지 감을 잡을 수가 없다. 그 긴 시간을 충분히 곱씹을 만한 시간 뒤에 노인은 그의 손에 쥐어진 쪽지를 본다.

  
「여긴 왜 가려고?」

  
「저희 아버지집이거든요. 오랜만이라 도저히 찾을 수가 없네요.」

  
「아버지집은 왜?」

  
「몸이 편찮으셔서 올라왔습니다.」

  
노인은 그의 대꾸에도 아무런 반응이 없다.

  
「무암동. 무암동이라. 그런 동네가 있긴 했지. 그런데 이젠 없어. 벌써 한 십년됐나. 이 주위 마을이 합쳐지면서 무암동이란 이름은 사라졌어. 그래서 현판들도 모두 떼놓았지. 그런데 사람들이 게을러서 아직 집주소를 적지 않고 있어. 그러니 살던 사람이 아니고선 어디가 어딘지 알 길이 없는 게지.」

  
그의 어깨가 한층 늘어진다.

  
「그런데 어째 낯이 익은 얼굴인데, 이름이 뭔가?」

  
「최경훈입니다. 저 그럼 혹시 위치가 어디쯤인지도 전혀 짐작이 안가시나요?」

  
「경훈이라.」

  
그의 얼굴을 찬찬이 뜯어보던 노인은 이내 길을 가르쳐준다.

  
「114번지면 저 쪽으로 가다가 갈림길에서 왼쪽으로 좀 가다보면 옆에 빨간 대문이 있을거야. 거기가 114번지네.」

  
노인은 말을 마치고 돌아선다. 이 노인이 가리킨 길은 그가 이미 걸어왔던 길이다. 갈림길이라고 했는데 그 곳에는 갈림길이 없다. 그는 죽 외길을 따라왔다. 노인은 이미 저만치 가고 그는 어찌해야 할 바를 모르겠다. 앞으로 더 가는 것도, 뒤로 돌아서는 것도 큰 차이가 없는 것만 같았다. 하여간에, 그는 돌아선다. 그리고 되돌아 나오는 길에 갈림길을 발견한다. 그것은 반대방향에서 보지 않는 한 발견 할 수 없도록 만들어 놓은 길이었다. 그는 노인의 말대로 빨간 대문을 발견한다.

  

2.

  

아버지의 집은 원룸건물의 어느 작은 방이었다. 손잡이에 열쇠를 꽂아 왼쪽으로 돌리자 철컥하는 소리가 들린다. 주소가 변했어도 문짝은 변하지 않았다. 문을 열기 전에 그는 잠시 망설인다. 열어야 하나. 열어도 되는 건가. 문을 열자 오래된 나무 냄새가 푹하고 그의 코를 찌른다.

  
「계세요?」

  
그러나 비어있는 집은 아무 소리도 내지 않는다. 집은 예상대로 비어있다. 바닥에는 찢어진 신문지가 구르고, 담배꽁초가 잔뜩 짓이겨진 페트병이 굴러다니고, 한쪽 벽에는 거뭇거뭇하게 말라비틀어진 곰팡이가 묻어 있다. 세간이라곤 아무 것도 없다. 대신 먼지가 있다. 그리고 오랫동안 쌓여있었던 것 같은 공기. 그 공기에도 먼지가 쌓여간다. 먼지는 아주 작은 틈새에서 들어온다. 계속 들어온다. 들어오고 또 들어와 마침내 쌓인다. 째깍거리는 소리가 들리는 것으로 보아 시계는 아직 살아있는 것 같다. 그는 혹시 있을지 모를 누군가를 다시 불러본다.

  
거실 한 구석에 가방을 놓고 하나씩 옷을 벗는다. 넥타이를 풀려고 하니 손 위로 땀이 한바가지 흐른다. 본래 시계가 걸려있던 못에 옷을 건 후, 팬티차림으로 바닥에 앉는다. 덕지덕지 붙은 부적들이 바람에 흔들려 부즈즉 부즈즉 낙엽 갈라지는 소리를 낸다. 몹시 졸리다. 가방을 열어 노트북을 꺼내 이메일을 확인한다. 내일이 틀림없다. 그는 이번엔 커다란 파일철을 꺼낸다. 도서관에서는 여러 가지 서류들을 원했다. 이력서, 자기소개서, 자격증 사본, 사서도우미 과정 수료증, 보험증명서, 사망증명서. 가지가지의 서류들이 가지런하게 꽂혀있다. 그는 지하철에서 혹시 구겨지거나 찢어진 서류는 없는지 확인하고 혹시 빠뜨린 것은 없는지 다시 확인한다.

  
정리가 끝난 서류들을 가방에 집어 놓고 바닥에 벌렁 들어 눕는다. 파격적인 면접이 필요했다. 왜냐하면 도서관 측에서 만들어 놓은 가산점 대상 목록에서 그가 해당되는 사항은 하나 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그가 준비한 서류들 대부분은 그래서, 정직하게 말해 아무런 쓸모가 없는 것들이다. 그 가운데 딱 하나, 그래서 무엇보다 중요한 딱 하나의 해당사항이 가족부양자에 관한 항목이었다. 도서관에선 가족의 생계부양자에 한해 가산점을 준다고 했다. 그가 그 항목에 해당한다는 것을 입증하기 위해선 아버지의 사망증명서가 필요했다. 그는 며칠 전부터 그 사망증명서란 것을 생각 할 때면 조그맣게 미소를 지었다. 요즘은 자격증을 아주 많이 갖고 있는 사람들도 있기 때문에 그에겐 그 증명서가 무엇보다 더 소중했다. 그러나 그럼에도 승산은 희박하다고 보는 것이 옳다. 남은 것은 면접이다. 면접관이 말을 할 때에는 조용히 미소를 머금어야 한다고 했다. 노크 소리에 문을 열고 피자를 받는다. 그런데 콜라가 없다. 문을 열자 시원한 에어컨 바람이 분다. 뒤적거리다 콜라를 한 병 사서 돌아온다.

  

그렇게 밤이 될 때까지 꾸역꾸역 밀어 넣었다. 사무소는 내일 아침이나 되어야 문을 열 것이다. 도서관에 도착하면 검은 옷을 입은 남자가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웃으면서 남자의 상냥한 목소리를 따라 복도를 걷는다. 발걸음 소리가 텅텅 복도에 울린다. 복도는 낮인데도 어두컴컴하다. 사무실에서, 왜냐하면 대기번호가 5번이기 때문에(5번은 가장 좋은 대기번호다.), 낮은 목소리로 감사합니다, 라고 말하며 자리에 앉으면 도망 갈 곳이라곤 아무대도 없다. 문을 열자 냉장고에는 아까 사온 콜라가 반쯤 채워져 있었다. 아버지께선 라디오의 지직거리는 소리가 싫으시다면서 핀잔을 주시곤 했다. 분명 야단치고 싶은 마음은 조금 밖에 없었는데 너무 조용히 있었던 것 같아 자기도 모르게 좀 더 크게 극적으로 말하셨을 것이다. 돌아보면 그도 역시 그런 적이 없었던 건 아니다. 화를 내고 이내 슬며시 시간을 물어보는 따위의 나약함을 느낄 때 마다 그는 아버지를 떠올린다. 침대에 누울 때 그런 생각이 들었다. 보일 듯 말 듯한 아버지의 목소리가 들린다.

  
그는 불안했다. 불안한 마음은 어딜가나 새싹처럼 돋아난다. 천정 형광등의 푸른 불빛이 물에 녹은 것처럼 허공에서 넘실거린다. 그는 그 일렁임이 두렵다. 초인종을 누른 사람은 어디로 가버린걸까. 왜 하필 오늘 눌렀던 걸까. 혹시 매일 눌러왔던 걸까.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2년 동안. 아니, 그 전부터 밤마다 이 방에 들어왔던 것일까. 그들은 거실에서 파티를 벌였다. 고래고래 소리를 치는 사람들 때문에 잠들 수가 없다. 아니, 내일 있을 면접을 위해서라도 그러나 참아야 한다. 어쩌면 저 중에 면접관이 있을지도 모른다. 내가 이미 몇 차례나 당부했건만 그들은 아무런 배려도 하지 않았다. 도서관은 비밀이 아주 많은 곳입니다. 다른 곳에서 입 밖으로 꺼내선 곤란한 이야기가 많아요. 그런데 저는 일전에 당신의 입이 아주 가볍다는 소리를 들은 적이 있습니다. 그러니 이쯤에서 그만두고 나가주세요, 라며 소리칠 때 나는 그 소리에 맞장구치며 잔을 들어야 하는가, 아니면 순응해야 하는가. 아니다. 돈을 벌어야 한다.

  

돈을 벌어야 한다. 내가 왜 돈이 없는가, 하는 것은 내게 그것을 주는 사람이 없기 때문이다. 나는 돈을 만들어 낼 수가 없기 때문에 누군가가 내게 줘야 한다. 아마 돈도 사람을 만들 수는 없을 것이다. 혹시 우린 어쩔 수 없이 헤어진 연인처럼, 혹은 서로 다른 곳을 바라보고 있는 무전병과 관측병처럼, 약속 시간에 엇갈린 친구들처럼 서로 어느 순간 그렇게, 아니면 마치 아주 오래도록 함께한 포주와 창녀처럼 그렇게 서로를 내다팔고 있는 것은 아닐까. 돈이 생기면 따뜻한 솜이불을 한 장 사고 싶다. 여름인데도 해가 지자 방이 싸늘하게 식었다. 이불이 하나 있긴 한데 아래 위, 좌우의 길이가 모두 짧다. 굳이 따지자면 이불과 방석의 중간 정도랄까, 가슴팍으로 올리면 발이 시리고, 발을 덮으면 가슴 안으로 바람이 들어온다. 아래, 위로 올렸다, 내렸다 를 반복 하다 보니 잠들어서는 이 짓도 할 수 없을 거라는 생각이 든다. 시계소리가 들린다. 한번 들은 시계소리는 좀처럼 사라지지 않는다. 그는 다시 일어나 가방에서 서류를 꺼낸다. 굳이 하지 않아도 될 일이 아니다. 사무소는 아직 열지 않았을 텐데. 편지를 다시 꼼꼼히 읽는다. 아버지는 돌아오지 않는다. 미리 도서관에 가 계신 것일까. 문을 열자 밖에서부터 눈을 마주쳤던 남자가 눈인사를 건넨다. 남자는 금방이라도 소리를 지를듯한 표정으로 용건을 물어본다. 자신도 그 이유를 알지 못한 채 남자는 몹시 화가 나있다. 나는 면접실이 어디인지를 알고 있던 터라 그런 남자를 지나쳐 2층으로 가는 계단을 오른다. 남자의 표정이 뒤에서 금세 풀린다. 2층 복도를 나는 걷는다. 복도에 울리는 발자국 소리가 좋아 나는 좀 더 힘을 주어 걷는다. 한참을 걷다 보니 길이 두 갈래로 나뉜다. 여기서 길을 잊는다. 가운데에 앉아있던 꼬마가 용건을 물어본다. 그 꼬마를 무시한 채 오른쪽으로 걸어간다. 도서관은 예전보다 넓어진 것 같다. 막다른 복도의 마지막 문 앞에는 대기자들이 웅성거리고 있다. 기도를 하는 사람. 옆 사람과 이야기하는 사람. 그 사람과 이야기하는 사람, 그 사람들 말을 엿듣는 사람. 웅얼거리는 소리가 간간히 나에게까지 들린다. 이야기를 나누던 사람이 고개를 들고 내 이름을 부른다.

  
문을 열자 작은 의자와 커다란 테이블이 보이고 그 뒤로 3개의 큰 의자가 놓여 있다. 그 위에 두 명의 노인이 앉아 있다. 한자리가 빈다. 이것은 예측하지 못한 일이다. 나는 내 앞의 의자에 앉아야 할지 그들 옆의 의자에 앉아야 할지 망설인다. 창의적인 면접을 위해선 그들의 옆자리에 앉는 것이 옳지 않을까, 그러나 도서관은 창의가 필요한 곳일까. 이것도 면접의 일부일 것이다. 나는 결국 앞에 놓인 의자에 앉는다. 왼쪽에 있는 노인은 연필을 깎고 있다. 노란색 연필깎이는 심하게 낡아서 상표가 얼룩덜룩하게 지워져 있다. 노인은 연필을 넣고, 손잡이를 돌리고 연필을 빼는 동작을 반복한다. 그르륵, 그르륵 하는 그 모습이 연필을 깎는 것처럼 보이진 않는다. 가운데 앉은 노인은 고개를 숙이고 서류 더미를 뒤적이고 있다. 서류를 뒤적이던 노인이 고개를 들어 마치 이제야 내가 눈앞에 있는 것을 깨달았다는 표정으로 아, 소리를 낸다. 아, 나는 미끄러진다.

  

3.

  

사무소의 직원은 친절하게 도서관의 위치를 알려줬다. 도서관은 어느 나지막한 언덕위에 홀로 서있었기 때문에 멀리서도 쉽게 찾을 수 있었다. 하지만 거리는 좀처럼 줄어들지 않았다. 금방 도착할 것 같았던 언덕에 가 닿은 것은 정오가 훨씬 지나서였다. 면접시간에 늦지는 않았다. 여유를 둔 것이 다행이었다. 가까이서 본 도서관은 생각보다 훨씬 커서 웅장한 느낌마저 들었다. 길쭉하고 늘씬한 기둥이 도서관의 입구 옆으로 늘어서 있었고 그 앞에는 거대한 대리석 계단이 쌓여있었다. 또 주위에는 이름 모를 나무들이 빽빽하게 심어져 있었는데 그 곳에서 새들의 울음소리가 들리기도 했다. 잘 손질이 되어 있는 잔디가 싱그러웠다.

  
도서관의 문은 유리로 되어 있었다. 그는 문을 열면서 밖에서부터 눈을 마주치고 있던 남자에게 인사를 건넸다. 남자는 몸이 매우 말라서 검은색 정장이 헐거워 보였다. 부드럽게 웃으면서 어떻게 오셨나요, 라고 묻는 남자의 말에 가방에서 주섬주섬 서류들을 꺼냈다. 남자는 알겠다는 듯이 서류들을 책상에 탁탁 두들기고는 가운데 계단으로 2층에 올라가셔서 오른쪽 맨 마지막 방이 면접실이라고 일러준다.

  
정중히 노크를 하고 문을 열었다. 예상과 달리 그 곳은 대기실이 아니었다. 이상하게도 대기자들은 한 명도 보이지 않았고, 대신 면접관으로 보이는 나이 든 남자와 여자가 커다란 책상 뒤로 앉아있었다. 의자는 3개였는데 그들 옆의 한자리는 비어있었다. 책상 앞에는 또한 작은 의자가 있었다. 면접관들의 뒤로 10미터쯤(방은 몹시 컸다.)에 작은 창문이 보였다. 방안에는 창문이 그것 하나뿐이었다. 오른쪽에는 내가 들어 온 문과는 또 다른 녹색의 문이 보였다. 벽은 벽지가 없이 흰색 페인트로 칠해져 있었다. 책상에는 연필꽂이와 연필깎기가 놓여 있었다. 나는 앞에 있는 의자에 앉았다. 의자는 작고 왜소하게 보였다. 그 위에 앉으려니 어쩐지 더 신경이 쓰였다. 벨트 밖으로 살이 접혀졌다. 나는 또한 의자에 퍼진 내 허벅지가 드러나 보일까 걱정스러워 내려가지도 않는 남방을 계속 아래로 끌어 내렸다. 일부러 의자의 끝부분에 앉았다. 둥그런 어깨선이 생각나 최대한 어깨를 폈더니 가슴이 나올까 싶어 또 불안해졌다. 나는 살찐 사람들을 볼 때면 그들이 피자를 먹는 모습을 상상했다. 치즈가루로 범벅이 된 피자가 쳐진 턱 앞에서 늘어나고 아랫입술 밑으로는 붉은 핫소스가 뚝뚝 흐른다. 순간 나는 이것이 나만의 생각이 아닐 수도 있음을 깨닫는다. 면접관들의 눈치를 살펴야 한다.

  
그들은 늙었다. 오른쪽에 앉은 나이 든 여자는 웃을 때 마치 한쪽 입고리를 옆에서 누가 당기고 있는 것처럼, 혹은 맞은편에서 누군가 밀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그녀의 긴 생머리는 삶은 미역줄기처럼 암담했다. 그녀는 또한 알이 둥근 안경을 쓰고 있었는데 그것은 그나마 네모난 얼굴에 잘 들어맞아 보였다. 수수한 화장을 하고 낡은 갈색 구두를 신은 것으로만 보면 침착하고 조용한 성격이라 짐작 할 수 있겠지만 그녀의 웃음은 그런 모든 추측을 단번에 뒤엎었다. 그녀는 질문하기 전에 늘 먼저 활짝 웃었다. 매번 물을 때 마다, 여행자가 길을 물어보기 위해 품는 미소와도 같이 항상, 만면에 웃음을 띄우고 내게 질문했다. 그러나 이상한 것은 질문이 끝나고 난 뒤였다. 질문이 끝난 후의 그녀의 입은 애매했다. 웃는 것도 무표정도 아닌 그런 표정. 그 눈매와 입매에서 그녀의 간사함이 드러났다.

  
옆에 있는 남자의 눈도 여자 못지않게 빛나고 있었다. 그것은 무지한 자의 눈빛이었다. 사태를 정확히 파악하지 못하는 인간이 나는 절대로 이 상황을 파악하고 있다는 확신을 가지거나, 혹은 하고 말겠다는 의지에 차있거나, 그도 아니면 하고 있다고 기만하려 들 때에 드러나는 번뜩임이었다. 그 두 개의 눈빛을 마주하고 보니 벌써부터 피곤한 기분이 들었다. 오른쪽의 여자가 날 물끄러미 보다가 이내 앞에 놓인 연필을 깎기 시작했다. 그녀는 고개를 들지 않았다. 즉, 마음에 드는 지원자가 들어 올 때까지 연필이나 깎자는 수작이었다. 아마 가장 길게 남은 연필을 선택 할 것이다. 두 노인은 모두 머리를 숙이고 있었다. 드르륵, 드르륵. 손잡이를 돌릴 때 마다 연필이 갈려나갔다. 하나를 깎고, 다른 하나를 깎았다. 오른쪽의 노인이 마침내 고개를 들고 내게 물었다.

  
「이름이 어떻게 되시죠?」

  
이 남자가 내 이름을 모를 리가 없다. 고개를 드는 속도와 들고 나서 말하기까지의 시간, 그리고 말의 억양으로 보아 이 노인은 아마 첫 지원자가 들어왔을 때부터 지금까지 이렇게 면접을 시작해 온 것 같았다. 또한 노인은 질문을 한 후에도 계속 나를 보고 있었는데 그 눈빛에서 의도적으로 눈을 피하지 않으려 하는 부자연스러움이 느껴졌다. 나는 그와 같은 사고방식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이 무식하고 오만한 노인이 싫었다.

  
「최경호입니다.」

  
노인은 내 대답에도 가타부타 말이 없었다. 그저 계속 나를 보고만 있었다. 나는 내 대답을 그가 제대로 들었는지 알 수가 없었다. 그러고 보니 조금 작게 말한 것도 같았다. 다시 말해야 할 지 아니면 되물을 때까지 기다려야 할 지 판단이 되지 않았다. 노인은 아무런 변화도 없이 나를 빤히 쳐다봤다. 이건 무슨 수작일까. 듣고서도 모르는 척 하는 건 아닐까. 더 크게 말하라는 소리일까. 처음에 내게 어떤 수치감을 주어 자신의 위치가 나보다 위에 있음을, 일자리를 얻는 다는 것이 그리 만만치 않은 일임을 보여주려는 걸까. 그러나 아무래도 내 대답이 작은 것 같다. 왜냐하면 노인의 태도에는 어떠한 거들먹거림도 없었기 때문이다. 오히려 내가 무슨 말을 하길 기다리는 것처럼 보였다.

  
「최경호입니다.」

「이미 들었네.」

  
노인은 다시 고개를 숙였다. 나는 무안해서 얼굴이 빨개지는 것만 같았다. 나를 왜 쳐다본 것인가. 들었으면서. 어쩌면 자신감? 자존감? 혹은 그 비슷한 것들을 알아보기 위해 물었던 것일 수도 있다. 노인의 표정에서 그러한 낌새가 있었던 것도 같다. 아니다. 거짓말을 해서 나를 가지고 놀려는 사람의 속은 빤히 보이지만 진심으로 나를 위하거나 혹은 자신이 나를 가지고 놀고 있음을 스스로 밝히는 사람은 위험하다. 그것에서 시작 된 문제는 그 원인을 규명하기 어렵고, 밝힌다고 해도 별달리 뾰족한 수가 없는 것이다. 이것은 노인의 어떤 소신에 관한 문제인 것 같았다. 나는 이 노인을 잘 모르겠다.

  
「자기소개를 해보게나.」

「.」

기묘한 침묵이 흘렀다. 그는 자신의 면접이 이미 실패한 것만 같은 불안감에 바로 대답 할 수가 없었다. 앞으로의 대답이 그리 중요하지 않을 것만 같았다. 자신이 단추를 만지작거리고 있는 걸 아는지 모르는지. 그는 거의 의식을 잃은 상태로 지껄였다.

  
「면접관님이 제 이름을 제대로 들으셨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저는 소심한 사람이 아닙니다. 다만 제 이름을 다시 말하는 것이 말하지 않는 것보다 더 바람직하다고 생각했을 뿐입니다. 확실하다고 생각한 일도 다시 확인해보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조심성이 많은 사람입니다.」

  
손이 끈적해 진 것을 알았을 때, 이미 노인들의 눈이 나의 그것을 보고 있다는 것도. 그리고 내가 시종일관 상의 단추를 조물거리고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좀처럼 면접은 진행되지 않는 것 같았다. 나는 점점 이들이 사람을 뽑고자 한다는 사실을 의심하다가 나중엔 잊었다. 오른쪽의 노인이 다시 물었다.

  
「그럼 지원 사유를 말해보게. 어째서 우리 도서관에 원서를 접수했지?」

  
나는 자신감 없이 말을 꺼냈는데 긴장해서 그만 크게 소리치고 말았다. 뒤에 마치 누가 서있는 것처럼, 나를 누군가 부른 것처럼 고개를 두리번거리고 말을 계속했다.

  
「저는 이 곳 토박이입니다. 타지에서 대학 생활을 하다가 졸업을 하고 일자리를 찾던 중에 우연히 고향의 도서관에서 사람을 뽑는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8년 만에 고향에 돌아온 감회가 새롭습니다. 사실 저는 꼭 이 곳에서 일하고 싶다는 생각을 하진 않았습니다. 저는 그저 도서관에서 일해보고 싶었던 것입니다. 우리나라는 전국 어느 도시에나 도서관이 있습니다. 그 전국의 도서관에서, 말하자면 유독 이 도서관만이 제게 어떤 특별한 의미를 주진 않습니다. 제겐 도서관이라는, 어떤 특정 양식이 끌리는 것입니다. 저의 아버지는」

  
「잠깐만.」

  
노인이 말을 끊었다.

  
「자네는 지금 내 질문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 같네. 자네가 여기에 지원하게 된 이유와 자네의 그 어떤 특정 양식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네. 자네는 그럼 그냥 여기 있으면 될 것이네. 굳이 일하지 않아도 여기서 하루 종일 있을 수 있지. 내가 물어본 것은 그게 아닐세. 이를테면 자넨 돈이 없지. 왜 돈을 벌어야 한다는 것을 얘기하지 않는가? 그게 우리 둘 사이의 암묵적인 동의나 공통의 이해 아래에 있는 전제인가? 그리고 또 하나. 도서관과 도서관에서의 일은 전혀 다르네. 자네는 우리가 어떤 사람을 필요로 하는지 알고나 있나? 그러니까 어떤 일을 할 사람을 뽑고 있는지 알고 있느냔 말일세.」

  
나는 더듬거리면서 대답했다.

  
「저희 아버지께서 살던 집이 이 근처여서 집세를 아낄려고 이 주위의 일자리를 찾다보니 마침 도서관이 눈에 띄었습니다. 책 읽는 것을 싫어하는 편이 아니라서 그저.」

  
이번엔 연필을 깎던 여자가 말을 끊었다.

  
「이야기를 듣고 있자니 굉장히 감성적인 사람인 것 같네요. 그런데 여긴 그런 사람들을 뽑는 곳이 아닙니다. 아마도 경호씨는 적응하기 힘들 것 같군요. 여기서 하는 일은 책과는 전혀 아무런 상관도 없는 종류의 일뿐입니다. 더구나 이번에 뽑을 인원은 계속 몸을 움직여야 하는 직책을 맡을 겁니다. 예를 들면 책을 읽는 것과 나르는 것은 다르다는 얘기예요. 그리고 참기 힘든 모욕을 거의 매일 같이 들어야 할지도 모릅니다. 이야기해보세요. 그런 일을 하려고 지원하신 것은 아니잖아요? 욕을 듣길 좋아하세요?」

  
만지작, 만지작. 침묵을 깨고 빗방울이 창문을 두들기기 시작한다. 두두두두. 연필이 자꾸 부러진다. 연필은 이미 그 안쪽에서 부러져 있었다. 겉으로는 알 수가 없다.

  
「당신은 우리가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알지 못해요.」

  
여자가 힘없이 말했다. 노인이 다시 말을 꺼냈다.

  
「그런데 서류를 보니 아버지께서 돌아가셨다고 되어있는데 어떻게 돌아가셨나?」

  
「차사고로 돌아가셨습니다.」

  
「언제?」

  
「3년 전에 돌아가셨습니다.」

  
「거짓말!」

  
노인이 소리쳤다. 나는 입을 다물었다.

  
「자네는 하는 말마다 온통 거짓말뿐이군. 그래도 하나 있는 자식이라고 죽기 직전까지 자네를 찾던 아비가 불쌍하구만. 자네 아버지가 여기서 근무한 것은 알고 있었나? 그 친구가 밤낮으로 이야기하던 둘째 아들이 바로 자네인 것을 알고 내가 얼마만큼 화가 났는지 알고 있느냔 말일세. 자네는 도시 아무 것도 모르는 것 같은 표정을 짓고 있군. 참 뻔뻔하기 그지 없어. 이름이 경훈이라고? 아버지를 돌봐드려? 오늘 이렇게 면접실에서 나를 만날 줄은 몰랐겠지. 나도 몰랐어. 자네는 마치 억울하다는 표정을 짓고 있는데 역겨울 뿐이네. 전혀 아무런 죄책감이 없군? 최경호. 어디서 낯이 익었다 했지. 그런데 오늘 와선 아버지가 차사고로 3년 전에 돌아가셨다고? 도대체 어떤 배짱이 있으면 자네처럼 행동 할 수 있는건가? 지금 당장 자네를 쫓아버릴 수도 있지만 그러기엔 내가 너그럽지 못한 것 같아. 자네는 우리를 모르네. 그리고 또한 자네의 아버지가 우리에게 자네에 대해 어떤 이야기를 했는가도 모르고 있네. 앞으로는 그 점을 유의하고 대답하도록 하게.」

  
그는 노인이 아버지의 이름을 꺼낸 순간부터 그와 그가 속해 있는 이 면접이 전혀 새로운 방향으로 전개 될 것이라 생각했다. 그러나 변한 것은 그를 둘러싼 상황이었을 뿐 그는 아무 것도 변하지 않았다. 실제의 현장 속에서 그는 벌어지는 일의 그 의미를 이해 할 수가 없었다. 그는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할지, 어떤 감정을 느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불안함도 사라졌다. 그는 한순간 백지처럼 하얬다. 면접관들이 그에 대해 무엇을 알고 있는지 알 길이 없었다. 그가 이제껏 한 말들은 그가 생각지 못한 배경 위에 쓰여지고 있었다. 어디로 피할 것인가. 어디로 피할 수 있단 말인가. 그는 아직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다. 두두두두.

  
그 때였다. 녹색의 문이 열리고 흰 체크무늬 티셔츠를 입은 사내가 면접실 안으로 들어왔다. 앉아있던 두 노인보다는 한참 연배가 아래인 듯이 보였다. 사내는 매우 흥분한 듯 얼굴이 붉게 상기되어 있었는데 그럼에도 걸음만큼은 침착해 보였다. 사내가 자리에 앉자 그 옆의 노인이 그제야 눈에 들어왔다. 화난 표정은 어느새 사라져 있었다. 노인은 대신 매우 긴장한 것 같았다. 상기된 표정으로 들어 온 사내에게 귓속말을 하던 노인은 사내가 역시나 귓속말로 대답하자 옷을 추리고 무언가 결심한 듯한 표정을 짓고는 일어서서 녹색의 문으로 향했다. 그는 경호를 쳐다보지도 않았다. 노인이 방문을 열고 나가자 새로 들어온 사내가 말했다.

  
「수고하셨습니다. 면접 결과는 차후에 개별적으로 연락드리겠습니다.」

  

4.

  

그 거리에서 비는 더욱 세차게 내리기 시작했다. 그는 우산도 없이 걸었다. 아마 떨어졌겠지. 그렇게 생각하니 마음이 조금 편해졌다. 오히려 붙었다고 생각하는 편이 훨씬 끔찍했다. 그러나 좋든 싫든 그는 떨어진 것이 확실했다. 비는 점점 더 세차게 퍼부었다. 그는 비에 잔뜩 젖었다. 뭔가 허전한 기분이 들었다. 어제는 텅 비어있던 그 거리에 이제는 비가 내린다. 비가 내린다.

  
어느 순간.

  
문득 그의 머릿속에서 어떤 풍경이 되살아난다. 그의 몸 속 깊은 곳에서 별안간 솟구쳐 오른 그 풍경은 지금 눈앞의 장면과 정확하게 일치했다. 꼭 이렇게 비가 내리고 있었다. 그리고 이 길. 오른쪽에 나무, 그 밑에 퍼진 쓰레기들, 맞은편으로 죽 늘어선 판넬 건물들, 그리고 왼편의 교문. 그는 마치 무엇인가에 홀린 것처럼 교문으로 들어갔다.

  
텅 빈 운동장은 하염없이 비를 맞고 있었다. 정글짐도 시소도 모래판도 그네도 그대로였다. 그는 천천히 비 내리는 운동장을 가로질렀다. 봉인이 풀리듯 그의 머릿속에서 무언가 하나 둘 터져나갔다. 그는 정글짐에 올라 비가 내리는 운동장을 지켜봤다. 마치 그 언젠가 꼭 한번 똑같은 일이 있었던 것처럼 비가 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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