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밀번호를 잊어버리셨나요?

단편 [탄생] Blue

2012.03.31 22:2903.31






    도시는 얼어붙어있다.

    쓰레기들이 굴러다니는 텅 빈 도로, 각종 낙서로 뒤덮여 있는 빌딩의 벽들 그리고 어둠이 내려서야 하나씩 어디선가 기어 나오는 텅 빈 눈동자를 가진 사람들. 세상은 마치 누군가가 더러워진 물을 한 차례 끼얹기라도 한 것처럼 한 톤 어두워 보인다. 암울한 회색으로 가득 찬 겨울의 세상.

    봄이 오지 않은지 벌써 몇 십 년째이다. 누더기를 걸친 사람들이 먹을 것을 찾아 돌아다닌다. 땅이 얼어붙은 탓에 식량이 제대로 보급되지 않은 지 이미 꽤 된다. 참을 수 없는 사람들이 폭동을 일으켰고 치안이 어수선해진 틈을 타서 사람들은 자신들의 이익을 채우기 위해서 제 멋대로 행동했다. 보이는 가게마다 이미 창문이 깨져있고 안은 텅 비었다.

    소년이라고 부르기에는 커 보이고 청년이라고 하기엔 아직 얼굴에 앳된 티가 남아 있다. 애매모호한 얼굴을 한 소년이 이 도시에 들어온 것은 어제 저녁이었다. 이젠 차가 한 대도 다니지 않는 하이웨이를 따라 옆 도시에서 건너온 것이다. 소년의 머리에도 걸친 재킷에도 먼지가 가득 앉아 있었다. 피곤한 기색이 가득하지만 그의 눈은 기묘한 날카로움을 아직 간직하고 있다. 언제 사라질지는 모르지만.

    손에 들고 있던 검은색 케이스를 내려놓고 예전에는 공원이라고 불렸었던 곳에 있는 식수대 앞에 소년이 섰다. 녹슬어 버린 수도꼭지를 돌리자 썩어버린 물이 몇 방울 나오고는 말았다. 체념도 떠오르지 않는 얼굴을 한 소년은 풀도 자라나지 않는 공원에 주저앉았다. 사방은 황폐했고 다시는 예전의 모습을 찾을 수 없어 보였다. 조금 멀리서 보이는 높은 빌딩 사이로 해가 거의 떨어지고 있었다. 힘없는 붉은 노을이 사방을 불길하게 적시다 사라진다. 이 도시도 이미 제 기능을 잃어버린 지 오래다. 전쟁난민들이 얼마나 모여 있는지가 중요했다. 그나마 사람들이 많은 도시에는 먹을 것이 있었다.

    소년은 재킷 주머니에서 비니를 꺼내어 썼다. 겨울밤을 버티기 위해서는 한 부분이라도 더 감싸야 한다. 어디선가 개 짖는 소리가 들린다. 하지만 이미 야생화가 되어버린 개의 울부짖음은 늑대가 우는 소리에 더 가까웠다. 손에 케이스를 들고는 소년이 도시를 향해 움직였다. 그의 그림자가 어둠에 스며들어 보이지 않았다.



    몇 곳을 떠돈 후에야 조금 괜찮아 보이는 식당을 찾았다. 식당이라고 해봤자 유통기한이 지난 구호물품들을 어디선가 얻어 와서 연탄불에 조리를 해서 내놓는 곳에 불과하다. 하지만 그동안 지나온 도시에서 본 식당들 보다는 훨씬 더 안전해보였다. 적어도 누런 이를 보이면서 도시에 들어온 뜨내기들에게 협박을 해서 식량을 갈취해가는 사람들이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언제고 그런 사람들이 들이닥칠지 모르기에 소년은 가장 뒷문과 가까운 자리에 앉았다.

    한 쪽 눈이 뻥 뚫린 중늙은이가 소년 쪽은 힐끗 바라보았다. 소년은 치를 돈이 있다는 표시를 해보였다. 식당 한쪽 구석에 훈장이 놓여져 있는 걸 보니 아마 그 한쪽 눈은 전쟁에서 잃었을 것이다. 허름한 내부, 언제 닦고 안 닦은 건지 작은 테이블 위는 각종 음식 자국으로 더러워져 있었으나 그런 것을 신경 쓰는 사람은 식당 안에 아무도 없었다. 꽂혀 있는 숟가락 중에서 그나마 가장 깨끗한 수저를 뽑고는 소년은 가장 싼 메뉴를 하나 시켰다.

    몇 개의 도시를 지나쳐오면서 벌써 절반 이상의 돈을 썼다. 앞으로 얼마만큼이나 도망칠 수 있을지. 소년의 눈에 미미한 불안이 스쳐지나갔다. 하지만 어쩔 수 없다. 일은 이미 저질러졌고 할 수 있는 건 멀리, 더 멀리 도망치는 것뿐이다. 주방에 놓인 라디오에서 지지직거리는 잡음과 함께 느린 재즈음악이 흘러나왔다. 끈적하고 암울한 멜로디. 한쪽 눈이 없는 주방장은 되지도 않는 휘파람으로 멜로디를 따라했다. 그리고 뭔가를 휘휘 젓더니 한 국자 푼 그릇을 소년 쪽으로 내밀었다.

    별다른 반찬도 없이 나온 탁한 죽 같은 음식 한 그릇만을 앞에 두었지만 소년은 말없이 죽을 입에 퍼 넣었다. 소년의 손과 손목에는 크고작은 상처들이 가득했다. 희무끄레한 불빛 밑에서 보이는 상처만 해도 이 정도인데 아마 옷 아래 있는 몸에는 더 많은 상처들을 숨기고 있으리라. 소년이 절반정도 음식을 먹었을 무렵 식당의 반쯤 나간 문이 쾅하는 소리를 내며 젖혀졌다. 험상궂은 표정의 사내 둘이 들어선다. 소년의 눈빛에 약간의 불안이 어린다. 의자를 살짝 빼 도망치기 쉬운 자세를 하고는 소년이 주방장과 사내의 대화에 귀를 기울였다. 여차 하면 뒷문으로 달려가면 도망은 칠 수 있을 것이다.

    “또 무슨 일이요?”

    한쪽 눈으로 주방장이 사내를 바라보면서 묻는다. 이런 상황에서 식당 같은 일을 하려면 저 정도 배짱은 있어야 한다. 얼굴에 긴 흉터가 나있는 사내가 종이 한 장을 꺼내더니 대답을 했다.

    “여기, 이렇게 생긴 계집애 본적 있나?”

    구깃구깃한 종이에는 긴 머리카락을 지닌 소녀 한 명이 그려져 있었다. 소년은 자신을 잡으러 온 것이 아님에 안도하고 사내가 내민 종이쪽은 힐끔 바라보았다. 평범한 얼굴을 한 소녀가 그려져 있었다. 이 여자애는 어떤 일을 저질렀길래 이런 사람들이 쫓고 있는 것일까. 긴 머리에 조금 슬퍼 보이는 눈동자.  

    “그런 애 온 적 없수다.”
    “잘보고 만약에 오면 이쪽으로 연락해. 만약에 보고도 눈감아줬다간 장사도 종치고 인생도 종칠줄 알아.”

    주인은 고개를 끄덕이는 걸로 말을 대신했다. 남자들은 손님들을 한번 쓱 훑어보았다. 그리곤 저 끝에 있는 소년과 눈이 마주쳤다.

    “씨발, 뭘 봐?”

    소년은 아무런 대꾸도 없이 고개를 그릇 쪽으로 내렸다. 다행히도 사내는 뭐라고 더 시비 걸지 않고 문 밖에 나섰다. 소년은 작은 안도의 숨을 내쉬고는 그릇에 남아 있는 죽을 깨끗이 퍼 먹었다. 소년이 돈을 치르려고 테이블을 뜨려는 데 주방과 가장 가까이 앉아 있던 남자 하나가 주인에게 말을 걸었다.

    “저 치들은 또 왜 이런 여자애를 찾는 거요?”

    소년 역시 답을 듣고 싶었기에 다시 테이블에 앉아 그들의 대화를 들었다.

    “저 새끼들의 마음을 누가 알겠나? 그냥 마음에 안 드는 짓을 했을 수도 있고 아니면 가지고 놀던 계집애일 수도 있지. 얼굴 보니까 반반하던데.”
    “안 그래도 요새 이상한 소문이 돌아서 흉흉하던데. 저런 새끼들이 판치고 있는 거 보면 참 지랄 같다니까.”
    “어디서 왔소?”

    남자는 여기서 조금 멀리 있는 도시 이름 하나를 말했다. 소년은 거쳐 오지 않은 곳 중 하나였다.

    “무슨 소문이 돌길래?”

    주인이 한쪽 눈을 껌벅이며 남자에게 물었다. 입가를 더러운 소맷부리로 쓱 닦은 남자가 이야기를 계속했다.

    “겨울을 끝낼 수 있는 방법이 있다는 소문이 돌고 있소. 어디서 나온 이야기인지는 모르겠지만 몇몇 사람들이 그런 이야기를 하더구만.”
    “겨울을 끝낼 수가 있다고? 허, 참. 그 전에 사람들이 모두 죽는 게 먼저겠군.”

    비아냥거리는 투로 주인이 대답했다. 그동안 사람들의 마음을 이용한 신흥종교의 사이비교주들이 겨울을 몰아낼 수 있고 말하면서 사람들에게 숭배를 받는 것을 본 적이 몇 번 있었다. 하지만 모두가 거짓말이었고 교인들에게 돈이며 식량을 뜯어낸 교주들은 대부분 어디론가 사라져버렸다. 그런데 또 겨울을 끝낼 수 있다고 믿는 사람이 나오다니. 주인이 비아냥거린 것도 이해가 갔다.

    “그런데 본 사람이 있단 말이요. 그 증표를.”
    “어떤 개놈이 또 헛수작을 부리고 있는 거겠지. 그래, 뭐 시간도 많으니 이야기나 한 번 들어봅시다. 대체 그 증표가 뭐요?”
    “꽃을 피워낸다고 합디다.”

    이야기를 듣고 있던 주인의 한쪽 눈이 찡그려졌다. 소년 역시 이런 이야기는 처음 들어봤다. 새로 생긴 신흥 종교인가? 아니면…, 정말 누군가가 이 겨울을 몰아내고 봄을 불러들일 수 있다는 걸까? 이제 식당 안에 있는 사람들 모두가 남자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였다. 남자는 모두가 자기 이야기에 귀 기울이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는 거들먹거리는 말투로 이야기를 이어나겠다.

    “사실 나는 전에 있던 도시에서 잘나가던 사람이었소. 그런데 그런 이상한 소문이 돌자 다른 도시에서 사람들이 몰려들었지. 그 사람을 찾으려고 혈안이 된 타 도시 녀석들이 우리가 숨기고 있는 줄 알고 우리 편을 친거요. 대체 있지도 않는 사람을 가지고 싸움을 한다니 말이나 되는 소리요, 이게? 어차피 나는 슬슬 도시를 떠나려고 마음먹고 있었으니까 큰 싸움이 나기 전에 슬쩍 빠져나와서 다치지 않았지만. 상대편에서도 나랑 비슷한 마음을 먹는 녀석이 있어서 같이 도망쳐 나왔지. 그때 그 녀석에서 들었소. 우연히 보스의 방에서 꽃을 보았다더군.”
    “정말인건가?!”

    뒤에 앉아있던 남자가 외쳤다. 식당 내는 벌써 이 소문 때문에 술렁이는 분위기였다.

    “우리보다 훨씬 서쪽에 있는 도시에서 온 녀석들이었소. 나 역시 도망치면서 소문을 확인해보니 서쪽에서부터 퍼지고 있더군. 그 후에서 몇 명인가 비슷한 이야기를 하는 것을 들었지. 아직 여기에는 퍼지지 않은 모양이군 그래?”
    “일단은 그 이야기가 진짜인지 아닌지 알 수가 없으니까 뭐라고 말을 못하겠군. 예전에 그랬던 사람들도 나중에 다 알고 보면 사이비가 아니었나.”
    “진짜면 좋은 거고 아니면 또 헛 지랄을 떤 게 되겠지.”

    이야기를 마친 사내가 앞에 놓인 술을 벌컥벌컥 들이켰다. 물론 가짜합성 알코올로 만들어진 거겠지만 지금으로는 그런 술밖에 남아있지 않을 것이다. 테이블에 있는 사람들은 제각기 이야기를 하면서 신빙성을 따졌다. 사방이 어수선한 틈을 타서 소년은 값을 치르고 밖으로 나왔다. 차가운 겨울밤 공기가 밀밀하게 소년을 감쌌다. 온 몸에 오한이 쫙 드는 그런 냉기였다.

    “봄, 이라….”

    소년의 입김이 하얗게 부서졌다.
    봄. 낯선 단어였다 마치 희망이나 사랑 같은 이 세상에 없을 것만 같은 단어였다. 이론적으로는 그게 무엇인지 알고 있다. 날이 따스했고 꽃이 피고, 만물이 생동하는 시간이라는 것이라고. 하지만 소년은 평생을 살면서 그런 것을 본 적도 느낀 적도 없었다. 도시는 언제나 얼어붙어 있었고 무채색으로만 가득했다. 풀이나 꽃은 아무데서도 찾아볼 수 없는 세상이었다. 과연 그런 날이 오긴 올까? 봄을 불러들이는 사람이라. 정말 그런 때가 온다면 세상은 새로워질 수 있을까?

    “야, 눈 좀 뜨고 다녀라?”

    생각에 잠긴 소년의 머리 위에서 거친 억양의 목소리가 들렸다. 넋을 빼고 길을 걷다가 마주 오는 사람의 어깨에 부딪힌 것이다. 소년은 말없이 고개를 숙였다.

    “뭐야. 머리만 숙이면 다냐? 미안하다고 해야 될 거 아냐, 버르장머리 없는 새끼야.”
    “죄송합니다.”
    “얼굴도 안보고 하는 게 사과냐? 제대로 좀 해라?”

    남자가 소년의 머리를 쿡쿡 찌르면서 토를 달았다. 소년이 다시 사과를 하려고 남자의 눈을 바라본 순간, 소년의 얼굴에 낭패감이 스쳤다.

    “어? 이거 봐라, 야, 너….”

    소년의 주먹이 남자의 말보다 빨랐다. 정통으로 한 대 얻어맞은 남자가 비틀거리는 사이 소년이 잽싸게 거리로 내달렸다. 어둠이 소년을 감쌌다.

    “야이 씨발! 너 거기 안서?!”

    바람이 에일 듯이 소년의 뺨을 스치고 지나갔다. 내닫는 지면의 딱딱함이 발부터 전해져 올라왔다. 숨이 차오르고 심장이 미칠 듯이 뛴다. 하지만 여기서 잡힌다면 그동안 도망친 것이 모두 헛수고가 된다. 원래부터 뛰는 것 하나는 자신이 있었다. 그렇기에 전에 몸담고 있던 조직에서도 치고 빠지는 역할을 맡았던 게 아닌가. 뒤에서 쫒아오는 발소리가 희미해질 때쯤 소년은 사거리에 있는 빌딩 중 한 곳으로 들어갔다.

    “…이 정도면 잡히지는 않겠지?”

    오랜만에 달렸더니 숨이 턱턱 차올랐다. 빌딩 안쪽에 있는 비상구로 가면서 소년은 천천히 숨을 골랐다. 아무리 ‘빠른 발’이라고 불렸지만 아까 거기서 조금만 더 공격이 느렸었더라면 그대로 잡혔을지도 모른다. 잡히고 난 뒤는…, 그닥 상상하고 싶지 않다. 아마 도망쳐 나왔던 도시로 다시 끌려가 몰매를 맞고 황야에 버려지지 않았을까? 발가락 끝부터 얼어붙고 결국은 눈도 제대로 감지 못한 채 말라붙을 것이다. 가끔 내리는 더러운 눈만이 위에 덮힐테고 그렇게 언제 내가 이 세상에 존재하고 있었는지도 사람들은 기억하지 못할 것이다.

    소년의 여동생이 그런 죽음을 맞이했기에 소년은 이런 죽음을 눈앞에 생생히 그려낼 수 있었다. 지금도 잠이 들면 꿈에서 동생이 나온다. 선연한 납빛의 얼굴을 하고 부르튼 입술로 소년을 부른다. 동생의 차가운 손끝이 소년의 뺨과 목덜미에 닿으면 소년은 어쩔 수 없이 부르르 진저리를 치며 잠에서 깨어나는 것이다. 절대 그렇게 죽지 않기로 다짐했다. 동생을 위해서라도 살아야 했다. 동생이 그렇게나 소망하던 봄이라는 녀석을 두 눈으로 똑똑히 보고 싶었다.

    “봄을 부르는 사람…, 이라고.”

    달빛이 내려오는 건물의 비상계단에 앉아 소년이 중얼거렸다. 정말로 그런 사람이 존재할까? 얼어붙은 이 넓은 세상에 봄을 가져다 줄 수 있을까? 어쩌면 봄은 사람들이 만들어낸 허상일지도 모른다. 유토피아 같은. 눈이 내리지 않고 따뜻한 산들바람이 분다는 그런 이상향.

    “너도 그런 사람을 찾는 거니?”
    “뭐, 뭐야?!”

    어둠 속에서 한 사람이 모습을 드러낸다. 긴 머리, 슬픔에 잠긴 듯한 두 눈동자. 소년은 그 아이가 아까 식당에서 사람들이 찾던 그 여자애라는 걸 곧 눈치 챘다. 얇은 원피스 위에 올이 나간 스웨터를 걸치고 있는 남루한 행색이었다. 소녀의 맨발을 바라보는 소년에게 소녀가 재차 물었다.

    “너도 그런 사람을 찾는거냐구.”
    “아니. 그런 사람이 있을 리가 없잖아?”
    “다들 찾던데. 넌 안 믿는 거야?”
    “정말 그런 사람이 있고 다른 사람들이 찾아다닐 정도라면 이미 봄이 왔을 거야.”

    소녀가 이해했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차림새로 여기서 뭐하는 거야? 그런 차림새로는 얼어 죽기 딱 좋겠다.”
    “하지만 시내에는 나를 잡으려는 사람들이 있는걸.”
    “나도 봤어. 너는 왜 쫒기고 있는 건데?”
    “내가 도망쳤기 때문에.”
    “너도 뭔가 잘못한 게 있는 모양이지?”

    글쎄, 라고 중얼거리면서 소녀가 가볍게 어깨를 올려보였다. 소년은 더 자세히 물어보지는 않기로 했다. 이런 차림으로 거리를 떠돌아다니는 데에는 다 그만한 이유가 있는 법이다. 그리고 아마 그 이유는 평생에 걸린 하나의 이야기가 될 수도 있었다. 소년처럼.

    “꽤나 열심히 찾고 있는 모양이던데. 이런데서 어영부영하다가는 잡힐 걸.”
    “너는 왜 날 신고하지 않지?”
    “나도 너처럼 쫓기는 신세니까. 그런데 들어갔다간 나도 잡아갈걸.”

    소녀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소년은 지명 수배자였고 잡히는 걸 피해 밤낮으로 도시를 가로지른 사람이었다. 죽은 지 오래된, 무덤과도 같은 도시들을 몇 개나 지나쳤고 아무것도 없이 얼어붙은 땅을 칠일밤낮으로 걸었다. 정신을 잃고 쓰러져 까마귀 떼의 습격을 받은 적도 있었고 이따금 보이는 피난 행렬에 끼어가기도 했었다. 파란색 달빛 아래 소녀의 피부로 파랗게 빛나보였다. 마치 수정으로 만들어진 인형 같다는 생각을 하면서 소년은 소녀를 바라보았다.

    “사람을 하나 죽였어. 나 같은 놈이었더라면 아무도 신경 쓰지 않았겠지만 말이야. 내가 죽인 게 내 그룹의 보스였어. 덕분에 지명 수배가 내려졌지.”

    소녀는 다시 말도 없이 고개만 끄덕였다. 왠지 소녀의 앞에서는 이런 이야기도 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그녀가 가지고 있는 슬픔에 잠긴 두 눈동자가 소년이 거울을 볼 때마다 느끼는 익숙한 것이었기 때문일지도 몰랐다.

    “안 무서워?”

    고개를 가만히 좌우로 흔들던 소녀가 대답했다.

    “나도… 비슷하니까.”

    이런 어린 나이에 사람을 죽이고 도망쳐야만 하는 세상. 소년은 잠시 소녀를 바라보다 자신이 쓰고 있던 비니를 그녀의 머리에 씌워주었다.

    “어차피 나도 도망쳐야 해. 갈 곳은 있어?”
    “아니. 어딜 가나 똑같을 거니까.”
    “그럼…, 나랑 같이 갈래?”

    소녀가 가만히 소년의 눈을 들여다보았다. 소녀의 깊은 푸른빛을 띤 눈동자가 소년의 마음 깊숙한 곳까지 살펴보는 듯이 천천히 빛났다. 그리고 고개를 끄덕였다. 이렇게 쉽게 사람을 따르는 건 그녀가 순진해서가 아니라 오히려 모든 것을 체념했기 때문일지도 몰랐다. 하지만 소년은 뭐든 괜찮았다. 저 아이를 여기에 두고 가는 것보다 데리고 가는 것이 마음 편했으니까.

    “나는 남쪽으로 갈 거야. 그래도 그쪽이 여기보단 좀 더 기후가 좋다는 소문을 들었어.”
    “남쪽이면 시리우스가 뜨는 방향이지?”

    소녀가 손을 들어 별 하나를 가리켰다. 검푸른 하늘엔 겨우 몇 개의 별만이 반짝이고 있었다. 소년은 어떤 별이 소녀가 말한 시리우스인지 알지 못했으나 그냥 고개를 끄덕였다. 소녀가 말한 그 별이 앞으로의 길에 미약한 빛이라도 비춰주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곧게 뻗은 하이웨이에는 이제는 쓸 일이 없어 나뒹구는 고철 덩어리들과 쓰레기가 군데군데 널브러져 있었다. 또한 여기서 치고 박고 싸우다 죽은 건지 알 수 없는 시체들 몇 구가 앙상하게 고꾸라져 있었다. 시체를 발견한 소년이 황급히 소녀 쪽을 바라보았으나 소녀는 아무런 표정도 짓지 않고 걸음을 계속할 뿐이었다.
원래 하이웨이는 차가 다니는 길이지만 이제는 제 용도로 쓰이지 못했다. 아무도 없는 적막한 길을 걸으며 소년은 저번 도시 식당에서 슬쩍한 말라비틀어진 빵조각을 소녀에게 건네주었다. 소녀와 같이 길을 걸은 지는 삼일도 넘었지만 소년은 소녀의 이름도 아직 모르고 있었다. 굳이 지난 이야기들을 뒤집어가며 시간을 보내고 싶지는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들의 짧은 과거를 뒤집어 본들 무슨 소용이겠는가. 애써 덮어둔 상처만을 후벼 파는 격일 것이다. 소년은 그저 같이 걸어가는 것만 해도 만족스러웠다. 누군가가 나와 함께 한다는 그 조용한 파문이 소년에게는 분에 넘치는 사치 같았다. 꽤나 강행군인데도 소녀는 용케 따라왔다. 소년에게 마시던 물통을 건네주던 소녀가 물었다.

    “그런데 그 등에 맨 케이스에는 뭐가 들어 있어?”

    소녀가 뒤에 짊어진 검은색 케이스를 가리켰다.

    “바이올린.”
    “바이올린?”

    그게 뭔지 모르겠다는 표정의 소녀를 보고는 소년이 케이스를 열어 내용물을 보여주었다. 여기저기가 긁히고 부서진 곳을 대충 붙여놓은 오래된 고물 바이올린이었다. 하지만 소녀는 그런 것마저 신기하다는 듯 바이올린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예쁘다…. 근데, 뭐하는 거야?”
    "악기야. 소리를 낼 수 있어.”
    “이게 소리를 낸다고?”

    소녀의 얼굴에는 놀람이 가득했다. 왠지 모르게 그 얼굴을 보면서 소년은 뭔가 자랑스러운 기분이 들었다. 사실 이 바이올린은 어린 자신과 여동생을 보살펴주었던 할아버지의 유품이었다. 난리 통에 만난 그 할아버지는 친손자들도 아닌 남매를 거두어 키워주었고 그들은 몇 년을 같이 했고 가족이 되었다. 거리의 악사라고 불리던 할아버지는 도시의 부유계층에게 불려가 바이올린을 켜주고는 음식을 받아와 생계를 꾸렸었다. 그리고 소년에게도 어딘가 써먹을 데가 있을지 모른다며 바이올린 켜는 법을 가르쳐 주었던 것이다.

    “보여줘?”

    소녀가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케이스에서 바이올린을 꺼내 턱밑에 가져다 대었다. 실로 오래간만의 바이올린이었다. 그동안은 계속 도망치느라 바이올린을 꺼낼 시간도 없었을 뿐더러 바이올린을 켜는 자신을 알아보는 사람이 있을까봐 켜지 못했었다. 하지만 지금은 이렇게 자신을 바라봐주는 청중도 있으니 켜볼 맛이 났다. 소년이 잡은 활이 바이올린 줄 위를 부드럽게 훑고 지나갔다. 지잉, 하고 울리는 현의 떨림이 소년에게 기분 좋게 전해졌다.

    드넓은 하이웨이에 소년의 바이올린 소리만이 가득 찼다. 세련된 연주법은 아니었지만 소년의 멜로디는 몸을 흔들거리게 만드는 매력이 있었다. 자연스러운 리듬, 속삭이는 듯한 선율, 갑자기 밀어치다 순식간에 저 멀리로 빠지는 강약조절. 소년은 무아지경 속에서 연주를 끝냈다.

    “이, 이런 건 처음이야!”

    말까지 더듬어가면서 소녀가 감탄사를 뱉었다. 소녀의 눈에서 어느새 슬픔이 가시고 미미한 온기가 자리 잡았다. 소년은 멋쩍은 듯이 머리를 긁적거렸다. 할아버지가 갑자기 지병으로 돌아가셨기에 반절정도는 혼자서 체득한 바이올린 주법이다. 물론 엉망진창이라는 것 정도는 안다. 하지만 소녀의 칭찬이 나쁘지만은 않았다.

    “그런데 굉장히 슬픈 느낌의 노래네. 제목도 있어?”

    몇 개의 멜로디를 갈고 닦아 소년이 만들어낸 노래이니만큼 제목이 없는 것은 당연했다. 하지만 자신을 바라보는 소녀의 푸른빛 눈망울을 보면서 소년은 즉석에서 떠오른 제목을 댔다.

    “블루. 블루야.”
    “…블루.”

    소녀의 입술이 발음하는 블루는 동그랗고 포근한 느낌이었다. ‘우울한’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는 단어였지만 소녀가 말할 때는 전혀 그런 느낌이 들지 않았다. 소녀는 금방 블루의 후렴구를 휘파람으로 낮게 불었다. 오므려 모은 소녀의 입술에서 나온 휘파람은 금세 바람에 실려갔다.



    소녀는 금방 여기저기서 폐지를 주워 왔다. 소년은 옆에 있던 폐차를 바람막이로 소녀가 모아온 종이더미 위에 불을 붙였다. 그나마 온기를 전해주었던 해가 지면 기온은 뚝 떨어진다. 밤이 되면 길을 걷는 것보다 오히려 쉬는 것이 더 나았다. 반나절 이상을 걸었으니 휴식도 필요하고 이런 추운 밤에 걸어 가봤자 몸만 상하기 때문이었다. 커다란 박스 안에 폐휴지를 줍던 소녀가 잠시 손에 들린 종이를 바라보았다.

    “뭘 그렇게 쳐다봐?”

    소년이 물었다.

    “그냥. 내 얼굴이 있어서.”

    소녀가 단조로운 목소리로 대답했다. 아마 저번에 소년이 식당에서 봤던 것과 같은 내용의 전단지일 것이다. 소녀는 자신의 얼굴이 그려진 종이를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마치 자신의 얼굴을 처음으로 본 동물처럼. 그리곤 조그맣게 종이를 접어 주머니에 집어넣었다.

    소녀는 말없이 소년 곁으로 와 불을 쬐었다. 그녀의 푸른 눈동자 속에 타오르는 불꽃이 타닥거리면서 반짝였다. 주위에 널려 있던 쓰레기를 모아서 대충이나마 바람을 막을 수 있게 해놓았다. 하지만 눈이라도 내리면 말짱 꽝이다. 하늘을 보니 저쪽 끝에서 구름이 꾸물거리고 있었다.

    “한 사람이 희생해서 많은 사람들이 행복해진다면 너는 어떻게 할 거야?”

    갑작스런 소녀의 질문에 소년은 대답을 하지 못했다. 무엇에 대한 질문인지도 깨닫지 못했다. 소년이 뭐라고 대꾸할 틈도 없이 소녀는 평소와 같은 어조로 말을 이었다.

    “이거, 전단지에 내 얼굴 말이야. 실제보다 못생기게 그려놨어.”
    “뭐야. 그게 마음에 안 드는 거야?”
    “좀 예쁘게 그려주면 어디가 덧나나?”

    너무나 여자다운 발상이었기에 소년은 헛웃음을 지었다. 하지만 한번 보고 널 알아 볼만큼 꽤나 잘 그려졌다고 라는 말은 차마 하지 못했지만. 그러고 보니 소녀를 찾는 전단지 아래에는 소녀가 지은 죄목이 써져 있지 않았다. 소년을 찾는 전단지 밑에는 큼지막한 글씨로 ‘살인죄’라고 써져 있는데. 소년은 그게 맘에 들지 않았다.

    그것은 살인이 아니다. 정당한 댓가를 치르게 해줬을 뿐이다. 자신과 동생, 그리고 수많은 사람들이 그 인간에게 받았던 고통을 생각하면 그렇게 쉽게 죽인 것은 두고두고 한이 될 만큼. 휘두른 블랙잭에서부터 전해졌던 둔탁한 감각. 터져 나왔던 피와 부러진 목뼈. 크게 치뜬 흰자위가 소년을 노려보았으나 소년은 그치지 않았다. 몇 번이나 생각했던 대로 휘둘렀다. 무릎이 꺾여 모래 위에 주저앉은 놈의 머리를 다시 한 번 쳐내려 완벽하게 숨을 끊어놓았다.

    그리고나서 기억은 모두 도망침의 연속이다. 놈이 두목으로 있었던 무리들은 다른 도시에서도 꽤나 잘나가는 축이었고 많은 다른 무리들과 관계를 맺고 있었던 덕에 탈출하는 것이 힘들었다. 하지만 죽지 않고 이렇게 살아남을 수 있었다. 하지만 소문은 빠르게 퍼져 소년이 도망치고 있다는 사실을 안 사람들이 소년을 잡기 위해서 쫒아오고 있었다. 소년의 목에 걸린 현상금이 그 이유였다. 소녀에게도 현상금이 걸려있는 것일까. 대체 이런 자그마한 여자애가 무슨 죄를 지었길래 이렇게 도망쳐야만 할까.

    “…살아있는 것만으로도 죄가 되는 사람도 있는 거야.”

    자신을 바라보는 소년의 눈길을 알아챘는지 소녀가 우는 듯 웃는 기묘한 표정을 지어보이면서 가만히 대답했다.

    “그런 사람이 있을 리가 없잖아!”
    “내가 살아서 다른 사람이 불행하다면 그것도 죄라고 할 수 있지.”

    소녀는 무릎을 그러모으고 중얼거렸다. 그 옆모습이 너무나 깊은 슬픔의 수렁에 빠져 있는 것 같아 소년은 더 이상 뭐라고 말을 잇지 못했다. 소녀는 아주 작은 충격에도 깨어질 것만 같은 알 속에 갇혀 있는 것 같았다. 얇은 껍질 속에 무방비로 내쳐진 소녀가. 그녀의 푸른색 눈동자가 더 짙은 색을 띄었다.

    소년은 가까스로 손을 내밀어 소녀의 어깨를 가만히 짚어줄 수 있었다. 바르르 떨리는 소녀의 체온이 손가락 끝을 통해 전해진다. 툭 하고 건드리기만 하면 넘실대는 소녀의 몸을 타고 눈물이 흘러내릴 것만 같았다. 이렇게 온 몸 가득히 눈물이 고여 있는 데도 소녀는 끝내 울지 않았다. 그녀 안에는 흘리지 않은 눈물이 바다처럼 고여 있을 것이다. 그녀의 목구멍 안으로 억지로 밀어 넣은 비명은 과연 몇 개나 될 것인가. 소년은 상상하지 못했다.

    얼어붙은 도시와 하이웨이들의 틈새에서 소녀는 가만히 울음을 삼켰다. 소년은 그저 그런 소녀 옆에 앉아있는 것 외에는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비정한 세상의 시간은 느리게만 흘러갔다. 일 분 일초가 칼날처럼 그들 주위를 스쳐지나갔다. 짙은 어둠은 그들을 삼키려고 밀물처럼 들이닥쳤고 그들이 의지할 수 있는 것은 작은 모닥불과 서로뿐이었다.

    “…여기로 와.”

    소년이 자신의 외투를 최대한 넓게 벌려 자리를 만들었다. 소녀가 느릿하게 안으로 들어왔다. 작은 새끼 동물 같은 연약함, 그리고 그 연약함에서 느껴지는 새큼한 향기. 소녀의 긴 머리칼이 소년의 뺨에 닿아 소년을 간지럽혔다. 소녀의 입에서 흘러나온 하얀 입김이 마치 솜털처럼 보였다. 소년은 소녀의 손을 가만히 감싸 쥐었다. 차갑지만 그 안에 흐르는 피가 작게 팔딱이고 있다. 심장이 뛰는 소리가 손을 통해 느껴진다. 작지만 규칙적으로.

    “이기적이지만 좀 더 살고 싶었어. 겨울뿐이라는 세상도 나는 괜찮았어. 내리는 더러운 눈도, 이제는 부서져가는 빌딩들도, 그 아래에 살아가는 수많은 사람들도. 조금 더 보고 싶었어.”
    “괜찮을 거야.”

    소년은 자신도 장담할 수 없을 말로 소녀를 안심시켰다. 허황한 말인 것을 알지만 소녀는 다시 묻지 않았다. 그런 말도 안 되는 소리에라도 매달리고 싶었다. 불꽃 위에 하얀 눈송이가 녹아내렸다. 또 눈이 내린다. 얼어붙은 도시와 세상 위에 또 눈이 내린다. 소년이 불이 꺼지지 않게 위에 판자를 덮어놓고는 소녀에게도 좀 더 옷으로 잘 감싸주었다.

    그 모습을 보던 소녀가 나지막한 목소리로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서늘한 단조의 노래가 마치 염원을 올리는 것처럼 나긋하게 퍼진다.

    소녀의 노래를 들으며 눈을 감자 소년의 눈앞에 연두색의 숲과 하얀 꽃이 피어난 들녘이 보였다. 가만히 한들한들 부는 봄바람, 하롱하롱 그림자를 만들며 떨어지는 연분홍 꽃잎. 태어나서 한 번도 본적이 없는 광경인데도 마치 본 것처럼 소년의 마음에는 봄날이 그려졌다. 나룻배에 실린 가는 겨울에게 작별인사를 고한다. 겨울이 가고 봄이 찾아온다. 우리는 과연 그런 광경을 볼 수 있을까.

    소녀의 목소리가 잦아들고 마법 같은 시간도 끝이 났다. 느끼지 못했던 한기가 외투 사이로 스며들었다. 그들의 위에는 눈이 소리도 없이 쌓이고 있다. 모든 세상을 정적에 감싸이게 만들려고 하는 듯 눈은 앞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내렸다. 이제 몸은 추운 것을 느끼지 못하게 됐다. 오늘 밤에 눈이 오다니. 생각보다 너무 빨랐다. 이런 때에 잠이 들면 틀림없이 얼어 죽을 것이다. 소년은 내려오는 눈꺼풀을 밀어내려고 애쓰면서 소녀에게 말을 걸었다.

    “자면 안 돼.”
    “알고 있어.”

    대답이 돌아온다. 이곳에 자기만 있지 않다는 것에 왠지 마음이 놓인다. 그동안 쫓기는 시간을 보내면서 자신의 마음도 상당히 나약해진 모양이다. 하지만 지금은 나약해졌대도 괜찮다. 소녀가 그의 나머지 몫을 잘 해줄 것이다.

    “아까 바이올린으로 해줬던 노래, 그거 불러줘.”

    소년이 작게 허밍으로 멜로디 부분을 흥얼거렸다. 소년의 음색 위에 소녀의 목소리가 한 겹 더 입혀진다. 손가락으로 박자를 맞추면서 화음을 만들어본다. 아슬아슬하게 떨어져서 어울리는 화음의 소리처럼 소년과 소녀도 아슬한 평형 위에서 중심을 잡고 있었다. 자칫하면 모두가 나락으로 떨어지는 세상이라는 오선지위에서 위로 아래로 움직이면서 자신만의 멜로디를 만들어 내고 있다. 어쩌면 일생은 그저 한번 불리는 노래일지도 모른다. 부르고 나면 다시 부를 수 없다. 앵콜은 없는 단 한 번의 무대.

    내리는 눈을 보면서 그들은 나지막이 노래를 부른다. 차가운 푸른빛을 띠고 있는 노래를. 불길은 사그라들고 눈이 그 위를 덮는다.




    또 새로운 도시에 들어서게 되었다.
    도시는 도시마다 각각의 냄새가 있다. 뭐라고 말로 할 수 없는 도시만의 체취. 차가운 눈 냄새와 함께 오래된 건물들이 풍기는 냄새가 이리저리 섞여서 나는 그런 냄새가. 소년은 뒤로 둘러매었던 케이스를 다시 잘 매고는 소녀 쪽을 바라보았다. 어느 도시를 가도 소녀의 표정은 항상 비슷하다. 어딜 가나 똑같다는 것을 미리 안 사람들이 짓는 특유의 무표정이다.

    “오늘 내일은 이 도시에서 보내야겠어.”

    소녀가 고개를 끄덕거리면서 찬성을 뜻한다. 여기까지는 소문이 퍼지지 않았을 것이다. 되도록 사람들이 적은 도시를 택해서 루트를 짠 만큼 오늘은 조금 휴식을 취해도 될 것 같았다. 하이웨이를 거쳐 오면서 주운 넝마로 둘러싸인 소녀의 모습은 마치 작은 폐기물이 걸어 다니는 것 같아 보였다. 저런 차림새를 하고 무뚝뚝한 표정을 하고 있으니 소년은 웃음이 났다.

    “왜 웃는 거야?”
    “그냥, 니가 웃겨서.”

    대답을 한 소년은 소녀가 뭐라고 한 마디 할 것 같아서 어깨를 움츠렸으나 소녀는 자신을 한 번 휘 보고는 이게 웃기는 거구나, 라고 중얼거렸을 뿐이었다.

    “뭐, 나도 비슷한 꼴이지만.”

    그래서 소년은 이렇게 말을 덧붙였다. 하지만 그 말을 들었는지 듣지 못했는지 소녀는 도시의 입구에 서 있는 지도를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일단은 내가 사람들이 많이 있는 쪽으로 가서 이야기를 들어볼게. 내 이야기는 퍼지지 않았지만 너는 아직 어떻게 될지 모르니까.”
    “그래.”
    “그런데 말이야, 사람들이 네 이야기를 하는지 안하는 지 어떻게 알지?”

    소년의 물음에 소녀가 고개를 들었다. 짙은 파랑색 눈동자가 소년을 잠시 바라보다가 흩어졌다.

    “아니, 다른 뜻이 있는 건 아니고. 그저 여자애 이야기를 하는 것만으로는 네 이야기를 하는지 아닌지 알기가 어려워서. 나 같은 경우에는 북쪽 도시에서 두목을 죽이고 도망쳐 나온 소매치기 꼬마라고 하면 알 수가 있잖아.”
    “… 아마 고위층의 도망친 사생아라거나 노예라고 그럴 거야.는 사람이라고 부를거야. 워낙 이런 저런 이야기들이 많으니 나도 대체 어떤 소문으로 내 이야기가 떠도는 지 알 수가 없네.”
    “그렇군. 알았어. 그럼 일단은 저기 있는 건물 안에서 기다려. 여기까지 나오는 사람은 별로 없을 테니까. 한 서너 시간 후에 다시 올게.”

    소녀가 고개를 까닥해보이고는 빌딩 쪽으로 발걸음을 돌렸다. 절대로 뒤를 돌아보지 않는 단호한 발걸음이다. 소년은 소녀가 들어간 빌딩을 바라보다가 도시의 중심부로 걸음을 옮겼지만 소녀가 말한 내용이 귓가에 맴돌았다. 도망친 사생아나 노예. 충분히 있을 법한 이야기다. 어느 도시에나 한 명은 있을 법한 흔한 내용. 하지만 그렇기에 소년은 더 궁금증이 일었다. 그런 뻔한 이유라면 소녀와 만났던 그 도시에서 소녀를 찾던 사람들도 그런 이유를 말했을 것이다. 또 소녀를 찾는 전단지에도 아무런 말도 써져 있지 않았다. 찾는 사람들에게 소녀를 찾는 것을 숨기고 싶은 무언가가 있거나 아니면 소녀가 거짓말을 하고 있는지도 몰랐다. 아무튼 둘 중 하나는 진실을 말하지 않고 있었다. 하지만 소년은 소녀에게 뭔가 다그쳐 묻고 싶은 마음이 들지 않았다. 어떤 진실이 있건 그것은 소녀의 이야기였고 이제 와서 새삼스럽게 과거를 물어서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희미한 가로등불이 켜진 거리로 접어들면서 소년은 잡생각을 머리에서 밀어놓고 사람들이 주고받는 이야기에만 집중하기로 했다. 이런 도시에서 가장 이야기가 빨리 나도는 것은 아무래도 유흥가가 밀집해 있는 장소이다. 그런 곳에서 사람들은 할말 안 할말 가리지 않고 입 밖으로 꺼내댄다. 머릿속에 새겨놓은 지도에서 유흥가가 있을 법한 곳을 찾아내었다.

    “그래서 정말 그런 인간이 있단 말이여?”

    나이 먹은 여자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옆에서 그보다는 젊어 보이는 여자가 대답을 했다.

    “진짜라니까요. 글쎄, 그 광경을 본 사람도 있다잖아요.”
    “그럼 정말 봄이 올 수도 있는 건감?”
    “일단 한 번 두고 봐야죠. 또 저번처럼 사기꾼들이면 힘만 빠지니까.”

    그 이야기다.
    봄을 가져온다는 사람의 이야기. 이런 미신적인 이야기는 사람들의 마음속에 쉽게 침투해든다. 행여나 있을까 싶은 행운에 대한 가벼운 기대감, 불분명한 출처에 대한 수많은 이야기들.

    “파란 눈물을 흘린다네요.”
    “그게 무슨 소리여?”
    “그 사람이 봄을 가져오는 사람인지 아닌지 알 수 있는 증표래요, 그게.”
    “그것 참 신기하구만. 근데 그러면 울지 않는 이상 그 사람인지 아닌지는 모르는 거네?”
    “뭐…, 그러겠죠?”

    소문은 더욱 구체화되었다. 사람들의 상상력이란 실로 놀라운 것이다. 겨자씨만한 이야기에 이리저리 부풀리고 덧붙여서 솜사탕처럼 만들어 버린다. 하지만 막상 베어 물고 나면 입안에서 순식간에 사라지고 남는 것이 없다는 것에서도 둘은 비슷하다. 파란 눈물이라니. 소년은 코웃음을 쳤다. 눈에 빤히 보이는 수작이다. 그 정도야 연기력만 받쳐준다면 누구나 다 할 수 있다. 눈물이야 물감이라도 섞어서 만들어내면 그만이고. 정말로 파란 눈물을 흘리는 녀석이 있더라고 해도 아마 그건 이런 겨울의 시대에서 태어난 돌연변이일 것이다. 여자들은 잡다한 이야기를 몇 마디 더 나누고는 곧 헤어졌다. 소년은 눈에 띄지 않도록 잠시 그곳에서 볼일이 있다는 듯이 서 있다가 곧 행인들 틈으로 섞여 들어갔다. 그리고 곧 사람들이 많이 다니는 대로변에서 낯익은 얼굴을 발견할 수 있었다. 시커멓게 때가 탄 빌딩의 벽면에 <사람을 찾습니다>라는 란에서 무표정으로 상대를 멍하니 바라보고 있는 소녀의 얼굴을.

    소년이 알고 있는 소녀의 얼굴보다는 확실히 조금 못생기게 그려진 것 같았다. 무표정 뒤에 감춰져 있는 아이 같은 표정도, 몸을 움직일 때 보이는 유려한 곡선도 없어서 그런 것일까. 소년은 잠시 포스터를 쳐다보았다. <사람을 찾습니다>라는 란에 붙어있긴 했지만 말이 좋아서 사람을 찾는 것이지 사실은 도망나간 사람들이나 잡아들여야 할 사람들을 찾는 것이다. 소년은 자기의 얼굴도 어디 있을까 해서 찾아보았으나 다행이도 소년의 얼굴은 아직 붙어있지 않은 모양이었다. 소녀의 얼굴 옆에 다른 여러 표정을 한 얼굴들 몇 개가 붙어 있었다. 다들 밑에는 이 사람의 인상착의와 특징이 적혀 있었다. 소년은 주위를 둘러보다 소녀의 얼굴이 그려져 있는 전단지를 하나 뜯어 주머니에 집어넣었다. 순간적인 충동이었지만 왠지 마음이 둥실 떠오르는 기분이 들었다. 소년은 가벼운 발걸음으로 소문을 전해들을 사람 무리를 찾아서 자리를 떴다.

    술집에 모인 사람들은 도시 간에 일어나는 불화설과 식량난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었다. 곧 몇 개의 도시가 연합해서 싸움을 일으킨다는 소문이 돌고 있었다. 자기들을 군인이라고 칭하곤 하나 사실은 그냥 도시의 불량배 무리나 다름없는 인간들이 요새 흉흉한 분위기를 조성하곤 했다. 민간인들과는 별 상관이 없었지만 -다들 속으로는 지들끼리 그렇게 싸우다가 죽었으면 하는 마음이 있을 것이다- 만약 그들의 싸움 때문에 하이웨이가 막히기라도 한다면 물자교환이 어려워질 건은 뻔했다. 물론 소년 역시 하나의 도시에 고립될 확률이 높았기에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길 바랐다. 먹고 사는 것을 불평하는 말들이 이어지더니 사람들은 떠도는 소문을 입에 올렸다.

    “본 사람도 있다고 하더군.”
    “어디까지 믿어야 하는 거지?”
    “나야 잘 모르겠지만 이번에 일어나는 싸움도 그것 때문이라는 말이 있던데?”
    “봄을 불러들이는 사람을 차지하기 위해서 말인가?”
    “아무래도 먼저 차지하는 사람이 유리하지 않겠어?”
    “그 말도 일리가 있네.”
    “봄이 오면…, 나는 농사라도 짓겠어.”

    주변부에서 이야기를 듣고 있던 남자가 말했다. 그 말을 들은 사람들은 순간 입을 다물었다. 봄이 오면, 봄이 온다면. 꿈같은 이야기이다.

    “적어도 나와 가족들의 입은 풀칠할 수 있지 않겠는가. 지금은 식량을 구할 수 있는 곳이 도시밖에 없기 때문에 이렇게 나와 있는 거지만. 봄이 온다면 얼어붙은 땅들을 개간하면 되니까.”

    남자의 말이 마치 물방울이 떨어진 것처럼 주위에 파문을 그렸다. 봄이 오면 이런 쓰레기 같은 도시 생활을 청산해도 된다. 지금이야 겨울이 몇십 년이나 계속 되기에 씨앗들도 눈을 틔우지 않지만 봄이 온다면 아마 풀들과 꽃이 자랄 것이다. 사람들은 모두 그런 미래를 생각하고 있는 듯 했다.

    “나는 예전에 건축을 공부했으니 그런 사람들을 위해서 도시 밖에 집을 지어주면 되겠군. 어차피 자재야 도시에 가득가득 쌓여있으니까 대충 가져다가 쓰면 되고.”
다른 남자가 웃으면서 대답했다.
    “나야 운송 수단이 있으니 사람들 사이를 왔다 갔다 하면서 필요한 것들을 연결해주는 브로커 짓을 계속 하면 돼. 물론 나도 어느 정도 먹고 살만 해지면 농사라도 지어서 가족들을 부양해야지.”

    자리에 모인 사람들이 제각기 떠들어댔다. 봄이라는 단어가 주는 마법이었다. 사람들은 모두 꿈에 젖은 기분으로 미래를 이야기했다. 이 추운 겨울만 간다면. 이 추운 겨울의 저녁을 이겨낼 수 있는 마법의 주문이었다.

    “그런데 그 봄을 가져다 주는 사람이 여자라고 하지?”

    새로운 소문이었다. 소년은 최대한 그쪽으로 귀를 기울였다.

    “그래? 그건 또 처음 듣는데. 파란 눈물을 흘린다는 이야기는 들은 적이 있어.”
    “꽃을 피운다는 게 그거 때문이라고 하더군. 눈물이 땅에 닿으면 꽃이 핀다는 거야.”
    “동화 같은 이야기일세.”

    소년의 머릿속에서는 아름다운 여자가 파란색 눈물을 흘리고 그것이 닿은 곳에서 꽃들이 피어나는 광경이 그려졌다. 그리고 이유도 없이 그 광경과 소녀가 겹쳐졌다. 푸른 눈동자를 가지고 있는 소녀. 왠지 그 눈에서 흐르는 눈물이라면 파란빛을 띠고 있을 것만 같았다.

    “거기서 뭘 들 그렇게 속삭이고 있는 거야?!”

    모여 있던 사람들이 큰 소리를 치면서 들어온 남자를 보더니 다들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제자리에 가 앉거나 문으로 빠져나갔다. 소년 역시 사람들 사이에 껴서 밖으로 나왔다. 괜히 저런 곳에 계속 있다가 잡혀가는 것보다는 나았다. 이야기를 더 듣고 싶었지만 오늘 수확은 여기까지 하고 가는 것이 좋아보였다. 소녀도 아마 혼자서 몇 시간씩 있으려면 심심하리라.



    “여기 있어?”

    소년의 목소리가 방안에 웅웅거리면서 퍼졌다. 아무것도 없는 빈 방인지라 목소리가 더 크게 울렸다. 소녀는 항상 빌딩의 맨 위층에 숨어 있곤 했다. 그렇게 위층에 있으면 혹시라도 도망칠 때 문제가 있을 위험부담이 컸지만 소녀는 말을 들으려고 하지 않았다. 이런 곳에 숨어있는 걸 누가 알겠냐면서 맨 끝 층에서 창밖을 열심히 쳐다보고 있기 일쑤였다. 오늘도 창 쪽에서 소녀가 걸어 들어왔다.

    “갔다 왔어?”

    소년이 고개를 끄덕거리고 암시장에서 산 즉석식품을 품 안에서 내놓았다. 혹시라도 오면서 깡패라도 만날까봐 코트 속에 숨겨오느라 소년의 몸이 다른 때보다 두 배는 불어보였다. 소녀가 방안에 있는 쓰레기들을 익숙하게 주워 모았다. 다행이 이 도시는 하수도까지 끊기지는 않은 모양이었다. 한 시간 정도는 틀어놓고 기다려야 겨우 냄비 하나 정도 찼지만 이정도만 해도 감지덕지였다. 하이웨이에서 죽은 사람의 옷을 뒤지다가 발견한 라이터로 쓰레기에 불을 붙이고 종이 상자 위에 물을 끓였다.

    “사람 찾는 란에 니 얼굴 붙어있더라.”
    “그래?”

    그럴 거라고 예상했는지 소녀의 말은 담담했다. 하긴 소년은 벌써 열 몇 개의 도시를 거쳐 왔지만 소녀는 아직 3개의 도시밖에 건너뛰지 못했다. 아직 내 소문은 안 퍼졌으니까 밖에 나갈 때는 내가 나가면 될 거 같아, 라고 말하고서는 소년은 입을 다물었다. 봄을 가져오는 사람 이야기를 해줘야 하나 망설였다. 소녀와 만나기 전에 그 소문을 들어서 일까 왠지 말하면 안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어차피 별 연관도 없는 소문이다.

    “사람들이 봄에 대해서도 많이 떠들고 있던데.”
    “그런 사람이 있다는 거 말이야?”
    “응. 소문이 꽤나 구체적으로 퍼지고 있는 모양이야. 의외로 여자라는 소문도 돌고 있고.”
    “어딘가 근거가 있으니까 그런 소문이 돌겠지.”
    “그리고 파란 눈물을 흘린대.”

    소년은 소녀를 바라보면서 말을 했다. 소녀의 푸른 눈동자가 조금 커진 것 같기도 했다. 소년은 왠지 소녀가 어떻게 반응할지 보고 싶었다. 하지만 소녀는 겨우 ‘그래?’ 라고 대답하고는 불씨 속에 휴지조각을 밀어 넣었다.

    “너는 어떻게 생각해?”
    “뭘 말이야?”
    “봄이 오는 거.”

    소녀가 잠시 묵묵부답으로 있었다. 소년은 소녀가 자신의 이야기를 잘 이해하지 못한 것으로 알고 조금 더 설명을 덧붙였다.

    “오늘 사람들이 봄 이야기를 하면서 이런 말을 하더라고. 봄이 오면 나는 뭘 하겠다, 이런 거 말이야. 하긴, 겨울이 끝나면 이런 도시에 모여 살 필요도 없고. 그냥 농사라도 지으면서 살아도 될 거 아냐. 좋겠다 싶었어. 나야, 봄이 오면 본격적으로 음악을 하고 싶긴 하지만.”
    “글쎄, 내가 봄이 올 때까지 살아 있을 수 있을까.”

    소녀의 목소리가 소년의 들뜬 마음을 가로막았다. 소년은 잠시 멍한 표정으로 소녀를 바라보았다. 봄이 오면 이라는 말을 들으면서 꿈꾼 소년의 미래에는 소녀의 모습도 들어있었다. 이렇게 잘 피해 있다가 봄이 오면 사람들의 추격도 희미해질 것이다. 이미 도시의 효용성이 떨어진 때에 소년을 잡을 수 있는 방법도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소녀와 같이 사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 싶은 마음도 있었다. 소녀 역시 반대는 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었다.

    “무슨 얘기야? 그게? 어디 아파?”
    “아니. 그런 이야기가 아니야. 그저 양립할 수 없다는 거였어.”

    소녀의 푸른 눈동자가 짙게 물들어 갔다. 마치 비가 와서 물방울이 호수에 빠지는 것처럼. 소년은 대답을 기다렸지만 소녀는 더 이상 설명을 해주지 않았다. 종이 박스 안에서 물이 보글보글 끓는 소리만이 두 사람 사이를 메웠다. 소년은 대체 그게 무슨 뜻이냐고 더 묻고 싶었지만 어둠에 잠긴 소녀의 얼굴이 너무나도 슬퍼 보여 그만 두었다. 한참 동안 불만 바라보고 있던 소녀가 물었다.

    “너도 봄이 오면 좋겠지?”
    “좋기야 하겠지? 다들 원하는 거 아냐?”
    “세상을 겨울로 만든 사람들은 따로 있는데 왜 다른 사람이 그걸 책임져야 할까?”

    핵전쟁을 일으켜 핵구름으로 태양을 덮은 것은 자신들을 믿으려고 설득했던 지도자들이였다. 하지만 벌써 그런 일이 있은 지도 몇 십 년이나 흘렀다. 이제 그 어디서도 그 책임을 물을 수 있는 사람은 없다. 오직 남아 있는 사람들만이 이 환경에 적응해서 살아가려고 아등바등하고 있을 뿐.

    “할 수 있는 데도 하지 않는다면 그것도 문제이지 않을까?”

    정말 봄을 불러올 수 있는 사람이 있다면 그래서 이 세상을 바꿀 수 있다면 대체 왜 그 사람은 그렇게 하지 않고 이렇게 잠자코 있는 것일까.

    “할 수 있는데도 하지 않는다….”

    소녀는 소년의 뒷말을 조용하게 따라했다.

    “또 무슨 이야기를 들었어?”
    “뭘?”
    “봄을 가져다준다는 사람에 대해서 말이야.”
    “아. 그리고 또, 파란 눈물을 흘린다고 했어.”

    마치 네 눈동자 색 같은.

    “많이도 떠도네. 결국은 누가 참지 못하고 말해버린 모양이야.”
    “응?”

    소년이 되물었다. 소녀는 예의 담담한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조금은 눈치 채고 있지 않았어? 봄을 가져다준다고 소문이 난 사람말야.”

    왠지 더 듣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소녀의 눈동자가 소년을 찌를 듯이 바라보고 있었기에 고개를 돌릴 수도 귀를 막을 수도 없었다.

    “그게 나야.”

    아니라면 좋았을 걸. 어느 정도 소녀에게 자신이 알지 못하는 이유가 있을 거라고는 생각했지만 이런 식으로 알고 싶지는 않았다. 소녀의 푸른 눈망울이 파도처럼 일렁였다.

    “내가 울면 꽃이 펴.”

    사람들이 떠들던 소문은 소녀의 입술에서 진실로 흘러나왔다. 눈물로 꽃을 피우는 사람이라니. 정말 아이러니하기 짝이 없다.

    “정말 웃기지. 왜 하필이면 울어야 하는 걸까. 내가 웃어야 꽃이 핀다면 사람들이 나를 웃게 만드느라 여념이 없었을 텐데.”

    소녀의 얼굴에 복잡한 감정이 떠올랐다. 그동안 소녀가 살아온 삶이 순간적으로 지나간 듯 했다. 소년은 그 말 한 마디에 소녀의 고단함을 느낄 수 있었다. 물론 지금의 고단함이 소녀가 느꼈던 감정의 전부는 절대 아니겠지만.

    소녀가 울면 봄이 온다는 사실을 안 사람들은 소녀를 울게 만드느라 온 힘을 다했을 것이다. 참으로 무서운 말이었다. 누군가를 괴롭히기 위해서 누군가가 눈물을 흘리게 하기 위해서 사력을 다하는 사람들의 모습을 상상케 하는 그 말은. 소녀의 표정이 언제나 멍하거나 무뚝뚝한 까닭을 소년은 이제야 알 수 있었다. 그런 사람들의 틈바귀 속에서 살아왔다면 누구라도 다른 표정은 짓지 못하게 될 것이다.

    “내게 그런 능력이 있다는 사실을 안 부모는 나를 팔아 넘겼어. 자신들의 입에 풀칠이라도 해 보겠자고, 그리고 자신들이 감당할 수 없는 힘을 가진 자식을 어떻게든 처리하기 위해서.”

    어린 소녀가 부모의 손에서 다른 사람들 손으로 넘겨지는 모습이 떠올랐다. 아직 어린 그녀는 대체 지금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도 알지 못했을 것이다. 하지만 얼마 시간이 지나지도 않아 소녀는 곧 깨닫게 되었다. 자신에게 주어진 운명을.

    “마치 물건처럼 이 손에서 저 손으로 옮겨지는 일이 태반이었어. 어떤 곳에서는 봄을 부르는 사람으로 추앙받기도 했고 또 다른 곳에서는 거짓말쟁이라고 매도당하기도 했지. 뭐가 진짜 나인지 모르겠는 지경까지 왔어. 사람들이 말하는 것처럼 내가 정말로 봄을 불러올 수는 있는 걸까? 사실 정말로 봄을 불러온 적은 없어. 하지만…, 내가 아는 것은 꽃을 피우기 위해서는 눈물이 필요해. 봄을 부르기 위해서는 더 큰 게 필요하겠지.”

    사람들은 쉽게 봄을 이야기했다. 하지만 소녀에게 봄은 자신의 무엇인가와 맞바꿔야 하는 하나의 미래였다. 소년은 높은 곳에서 항상 도시를 바라보던 소녀의 모습이 떠올랐다. 얼음으로 얼어붙어 있는 더러운 도시가 뭐가 그렇게 볼 것이 있다고 시간이 가는 줄도 모르고 바라보았는지 이제야 알 것 같았다. 소녀에게 겨울은 자신이 바라볼 수 있는 세상의 전부였고 어쩌면 아직 자신이 살아있다는 것을 알려주는 하나의 지표였을지도 모른다.

    “다른 방법은 없는 거야?”
    “나도 몰라.”

    소녀의 목소리가 청명하게 방안을 울렸다. 아무런 사심도 없는 그 깔끔한 목소리에 소년은 오히려 커다란 절망을 느낄 수 있었다. 아무것도 붙잡을 수 없을 때 사람들은 욕심을 포기하고 제 모든 것을 비워낸다. 소녀는 이미 하나의 투명한 유리구슬과도 같은 상태였다. 누군가가 건드리기만 하면 산산조각으로 부서져버릴.

    “그래서 도망치는 거야?”
    “도망친다고 되는 건 아니야. 어디선가 사람들은 봄에 대해서 소문을 또 들을 것이고 나를 찾아 나서겠지. 나는 나대로 봄이 오지 않는 것이 내 탓이라고 생각하면서 밤에 잠도 못 이루겠고. 슬슬 지겨워지던 참이었어.”

    봄이 오면 음악을 계속 하고 싶다는 소년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소녀는 무슨 생각을 했을까. 그런 생각을 하면서 꿈을 꾸는 사람들을 방해하고 있는 게 자신이라는 생각은 하지 않았을까? 사람들에겐 마지막 희망이라고 여겨지는 봄이 소녀에게는 자신의 뒤를 쫓아 째깍거리는 시한폭탄처럼 느껴졌을 것이다.

    “그런 표정으로 보지 마. 그래도 나 봄을 오게 할 수 있다는 것에 대해 꽤나 자부심을 가지고 있으니까. 일단은 나밖에 할 수 없는 거잖아. 나름대로 멋져.”
    “너야 말로 그런 소리하지 말고 잠이나 자. 내일부터는 일이라도 해야 할 거야. 수중에 돈도 슬슬 떨어져 가니까.”

    소녀의 말을 가로막듯이 소년이 대답했다.

    “벌써 그렇게 됐나.”

    소녀가 손가락을 들어 날짜를 헤아려보았다. 열손가락이 다 곱히고도 넘는 시간 동안을 소년과 함께 해왔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 도시에서 도망쳐 나온지도 꽤 긴 시간이 흘렀다. 더 이상은 숨을 시간이 없다는 것을 소녀는 직감했다.

    “인생은 재밌지. 그러지 않으려고 나온 길에서 마음을 먹게 되다니 말이야.”

    어느새 밝아오는 새벽이 창문을 어스름하게 비추었다. 소녀의 얼굴이 새벽빛에 잠기어갔다. 소녀의 굳게 다문 입매가 초승달 같은 곡선으로 살풋 휘어졌다.

    “그게 무슨 소리야?”
    “왜 그렇게 무섭게 슬픈 표정으로 쳐다 봐? 이제야 결심이 들었는데.”

    소녀의 말에 소년은 대답할 수가 없었다. 마음 속 한 구석에서는 소녀가 마음을 먹고 결정을 내려줬으면 하는 바람이 있었는지도 모른다. 아니라고, 숨겨왔지만 그건 자신을 속이려는 거짓 눈가림이었을지도. 모두가 바라는 꿈이 한 사람으로 인해 이루어질 수 있다면 사람들은 기꺼이 그를 십자가 위로 올려놓을 것이다. 소년은 자신의 손에 들린 보이지 않는 창이 소녀를 찌른 듯한 느낌이 들었다.

    “괜찮아.”

    소녀가 고개를 돌리지도 않고 가만히 말했다.
    태양은 거대한 환상선을 그리면서 위로 그 몸을 천천히 들어 올리고 있었다. 얼어붙은 도시를 지나 파도가 치지 않는 바다를 건너 이곳에 도착한 햇빛이 소녀의 몸 위에서 황금색 모래처럼 산산이 부서져 흘러내렸다.  

    “오늘은…, 봄비가 내리겠네.”

    소녀의 목소리가 노랫자락처럼 울렸다.
    밀밀하게 밀려들어오는 새벽 공기를 가로지르며 소녀가 창가로 다가섰다. 한 걸음 한 걸음 내딛는 소녀의 발걸음이 가볍다. 소녀의 파란 눈망울에 태양이 담겼다. 소년은 소녀의 볼 위로 그 파란빛이 한 줄기 흘러내리는 것을 본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순간, 짧은 파열음이 들리고 부서지는 웃음소리가 소년의 귀청을 때린다.


    멀리서 천둥 울리는 소리가 빗방울 소리와 함께 들려온다.







보잘것 없는 글을 올리게 되었습니다.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이메일은 ontheearth_@naver.com 입니다.






카논
댓글 0
번호 분류 제목 글쓴이 날짜 추천 수
공지 2024년 독자우수단편 심사위원 공고 mirror 2024.02.26 1
공지 단편 ★(필독) 독자단편우수작 심사방식 변경 공지★5 mirror 2015.12.18 1
공지 독자 우수 단편 선정 규정 (3기 심사단 선정)4 mirror 2009.07.01 3
1837 단편 멸종[수정본] 엄길윤 2012.05.11 0
1836 단편 기타나 고래 2012.05.09 0
1835 단편 별의 끝과 시작을 이어서 민아 2012.05.05 0
1834 단편 진단서1 김경수 2012.05.04 0
1833 단편 눈물손(하) 이니 군 2012.04.24 0
1832 단편 눈물손(상) 이니 군 2012.04.24 0
1831 단편 육아 스트레스2 앨즈 2012.04.23 0
1830 단편 카르타헤나에 비가 내리면 천공의도너츠 2012.04.10 0
1829 단편 추월 천현주 2012.04.09 0
1828 단편 정상에서 1 천현주 2012.04.09 0
1827 단편 [공지] <b>[탄생] 소재별 단편선 공모가 마감되었습니다.</b> mirror_b 2012.04.02 0
1826 단편 [탄생]민경언니(작성중)2 김사라 2012.03.31 0
1825 단편 [탄생]dedicate 비익조 2012.03.31 0
단편 [탄생] Blue 카논 2012.03.31 0
1823 단편 [탄생]세상, 의지 미소짓는독사 2012.03.31 0
1822 단편 [탄생] 무성세계 이상엽 2012.03.31 0
1821 단편 [탄생] 되살아나는 섬3 장강명 2012.03.31 0
1820 단편 [탄생] 엘리키 메이 2012.03.31 0
1819 단편 [탄생] 달과 이름 단식광대 2012.03.30 0
1818 단편 [탄생] 은총의 날 천공의도너츠 2012.03.29 0
Prev 1 ... 51 52 53 54 55 56 57 58 59 60 ... 147 Nex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