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밀번호를 잊어버리셨나요?

단편 [탄생]세상, 의지

2012.03.31 21:4903.31

원고지 50매 분량입니다.

----------------------------------------------------------------------------------------------

<세상, 의지>

  세상이 태어났다.

  처음 눈을 떴을 때, 세상은 큼지막한 돌덩어리였다. 무수히 많은 바위와 먼지가 세상을 휘감고 있었고, 그것들과 세상이 부딪히고 세상과 하나가 될 때마다 세상에 조금씩 무게가 더해졌다. 세상이 눈을 뜨기 전부터 있었던 일이었음이 분명했다. 세상은 자신이 언제부터 세상이었는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세상은 자신이 끊임없이 변화하고 있음을 알았다. 그래서 세상은 시간을 배웠다. 변화는 넓고 느리게 나타났다. 세상은 아직 시간의 단위는 알지 못하였다. 단지 전과 지금과 그 후가 다르단 것을 알 뿐이었다. 세상에게 먼지와 바위가 부딪힐 때마다 불꽃이 튀었다. 처음에 불꽃들은 잠깐 번뜩인 뒤 사라졌다. 그러나 그 과정이 끊임없이 반복되자 그 열기가 빠져나가지 않고 세상에게 지워지기 시작하였다. 그 결과 세상은 어느 순간부터 타오르며 녹아내렸다. 단단한 바위와 같던 세상은 끓어오르는 불의 바다가 되었다. 세상은 변화하는 스스로의 모습을 관조하였다.
  어느 날, 이 세상보다 조금 작지만 그래도 제법 큰 세상이 날아왔다. 두 세상은 정면으로 부딪혔고, 많은 것이 부서져서 사라졌지만, 세상은 이로 인해 다른 세상이 있음을 알게 되었다. 무한한 공간 너머에서 흘러나오는 거대한 빛도 다른 세상에서 나오는 것임에 분명했다. 세상은 아주 먼 곳에서 명멸하는 작은 빛으로 자신의 존재를 증명하는 다른 세상들을 바라보았다. 어느 날은 없던 빛이 생겨나기도 하고, 어느 날은 섬광과 함께 사라지기도 하였다. 충돌이 일어나고 어느 정도 시간이 흘렀다. 부서진 그 다른 세상은 세상의 옆에 남아있기로 한 것 같았다. 다른 세상의 빛을 받아 빛나는 그 세상을, 달이라 부르기로 하였다. 영원할 것처럼 보이던 불의 바다가 어느덧 식어 세상이 차가워졌다. 이제 세상 위에서는 불이 아닌 물이 흐르기 시작하였다. 대륙이 생겨나고 바다가 생겨났다. 종종 우주를 떠돌던 바위와 먼지들이 세상을 향해 떨어지면, 세상은 그 모두를 포용하였다. 그렇게 세상이 이루어져 갔다.
  어느 날, 세상은 기묘하고 작은 세상들이 바다 속에서 움직이고 있음을 알았다. 세상이란 보통 우주적으로 거대했지만, 이것들은 먼지만도 못할 만큼 작았다. 세상은 이 작은 것들이 어떻게 생겼는지, 어디서 왔는지 알 수 없었다. 어쩌면 세상이 받아들인 바위와 먼지들 중 하나였을 지도 모른다. 세상은 그것들의 움직임을 지켜보았다. 처음엔 작은 꿈틀거림이었다.  아주 오랜 시간동안, 이 작은 세상들은 그저 파괴되고 다시 생겨날 뿐, 별다른 변화를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어느 순간, 변화가 생겨났다. 미미한 것이었다. 하지만 첫 번째 변화를 시작으로 꿈틀거림은 느리게, 하지만 꾸준히 변하여 거대한 흐름으로 발전해나갔다. 얼마의 시간이 지난 후 세상은 이 작은 것들로 들끓기 시작하였다. 바다에서 비롯된 이 존재들은 점점 삶의 터전을 넓혀나가 뭍을 오르고, 하늘을 날기도 하였다. 종종 세상이 뜨거워졌다. 그럼 많은 세상들이 불타서 사라졌다. 또한 세상은 얼어붙기도 하였다. 그럼 또 많은 세상들이 얼어붙어 영원히 멈추었다. 어떤 날은 우주로부터 거대한 운석이 세상을 향해 쇄도하였다. 운석은 세상을 부수진 못하였으나 작은 세상들은 충분히 부술 수 있었다. 이렇게 지형이 바뀌고 날씨가 바뀔 때 마다, 무수히 많은 세상들이 종말을 맞이하였다. 이러한 파괴가 여러 번 있었는데도 불구하고 꿈틀거림은, 흐름은 일시적으로 미약해질 지언 정, 멈추지 않았다. 세상은 이 작은 세상들을 생명이라 칭하기로 하였다.
  이 미약한 존재들, 생명들은 멸망과 번영, 적응과 조화를 반복해나가며 끈질기게 자신들의 흐름을 이어나갔다. 세상은 그들이 흘러가는 것을 지켜보았다. 생명의 흐름은 변화무쌍하였다. 작고 납작하며 단단한 생명이 온 바다를 뒤덮기도 하였다. 움직이지 않는 녹색 생명을 먹고 사는, 다리 네 개 달린 한 생명종이 세상의 반을 넘게 차지하기도 하였다. 그 동안 작고 작았던 생명들에 비해 그나마 거대한 괴물들이 땅을 거닐고 바다를 가르기도 하였다. 어느 순간부터는 알이 아닌 새끼를 낳고 젖을 먹이는 생명들이 풍성해지기도 하였다. 그리고 이 모든 일이 일어나는 동안, 별로 변하지 않은 생명들도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네 개의 다리를 가지고도 두 다리로만 걸어 다니며 앞다리로 이런 저런 물건을 집는 어떤 생명이 나타났다. 그 생명의 후손들은 세대가 많이 지나자 더 심하게 변하여 앞다리를 더 이상 다리라고 부를 수 없을 지경이었다. 어느 순간부터, 그들이 그 ‘손’으로 독특한 형상을 만들어 놓고 그 형상을 향해 엎드리거나 머리를 조아리기 시작했다. 사냥도 번식도 아닌 그런 행위에 어떤 의미가 있다고 여기는 것 같았다. 낯선 광경이었지만, 세상은 전과 다름없이 여길 뿐이었다.
  또 다른 변화의 순간이 나타났다. 이번에는 그 어떤 변화와도 달랐다. 단 하나의 큰 의지가 나타났다. 생명들 개개의 의지는 언제나 존재해왔었다. 그러나 이 의지는 그 무수히 많은 의지들 사이에서 비롯했음에도 불구하고 어떤 생명과도 얽히지 않고 스스로, 의지 그 자체로서 존재하였다. 의지는 세상으로부터 태어난 그 어떤 존재와도 달랐으며, 세상과 마주 볼 수 있을 만큼 우주적 존재로 거듭났다. 의지는 세상에 자신의 의지를 전파하고자 하는 강렬한 욕망을 발산하였다. 의지는 이 생명, 저 생명을 전전하며 의지를 고양하고 퍼트렸다. 하지만 결국 그것은 의지일 뿐이었다. 세상은 의지가 자신의 거죽 위에서 날뛰는 것을 지켜보았다.
  세상은 늘 한결같았지만, 의지는 달랐다. 의지는 생명들의 행동에 깊은 관심을 가졌으며, 특히 ‘숭배’라는 행위에 집착하였다. 의지는 자신의 힘을 최대한 발휘하여 숭배와 신념의 의지를 생명들 사이에 퍼트리고자 하였다. 그 과정에 따라 의지는 분노하고, 우려하며, 환희에 가득 차고, 사랑하였고, 증오하였다. 의지는 갈망하였다. 자신을 누군가가 인지하기를, 그것도 위대하고 강력한 존재로 여기기를 원하였다. 의지는 사랑받고자 했고, 두려움 또한 받고자 하였다. 의지는 자기를 사랑하고 두려워하는 자들의 번영과 그렇지 않은 자들의 멸망을 기원하였다. 세상에겐 생명의 영화와 파멸을 가르고자 하는 의지가 제법 새로운 것이었다. 생명들은 여태껏 스스로 살다가, 스스로 죽음을 맞이했었다. 의지는 그것이 자신의 의지라는 것을 천명하고 싶어 했다. 의지는 결코 인정하려 하지 않았지만, 의지의 그 모든 감정의 밑에는 깊은 좌절이 깔려있었다. 의지가 영향을 끼칠 수 있는 건은 생명의 의지뿐이었다. 의지는 스스로가 이 세상에 그 어떤 물리적 변화도 줄 수 없다는 사실에 절망하였다. 사실은 숭배조차도 의지가 의도와 무관하게 원래 생명들 사이의 일이 그렇게 돌아가는 터일지도 몰랐다. 그렇다면 의지는 할 수 있는 일이 아무것도 없는 셈이었다. 세상은 그런 생각이 들었으나 의지에게 말하지 않았다. 의지가 이미 알고 있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시간이 흘렀다. 세상은 자신이 인지하는 시간단위가 계속 짧아지고 있는 것을 느꼈다. 의지가 나타난 후, 세상의 변화가 갈수록 급격해져갔기 때문이었다. 혹은 그렇게 주장하는 의지 때문이었다. 의지는 각종 시시콜콜한 변화를 모두 지적했고, 그리고 그 모든 것이 자기 덕분이라고 하였다. 세상은 자신이 느끼는 시간이 의지의 기준대로 토막 난다는 느낌을 받았다. 무엇보다 세상은 언제나 변하고 있었는데, 그것의 빠르고 느림이 자랑스럽다는 건 세상에게 낯선 일이었다. 하지만 세상은 그저 고개를 끄덕이며 그러냐고 하였다. 세상은 의지의 말 속에서 다른 것이 느껴졌음에도 내색하지 않았다. 의지의 뽐내는 것 같은 태도 속에 어떤 절박함이 숨어있었다. 한 동안 생명들의, 숭배하는 생명들의 번영에 따라 흐려져 갔었던 그 오랜 절박함이었다. 세상은 의지를 떠받들던 그 생명들을 살펴보았다. 그 일군의 생명들은 스스로 번영을 이루어내는 데 성공하자 의지에게 의지하는 경향이 눈에 띄도록 줄고 있었다. 의지를 숭상할 것을 주장하는 생명들도 여전히 많았지만, 예전만큼은 아니었다. 세상은 생각했다. 그랬군. 의지는 그것이 세상 전체에 나타난 거대한 변화라고 여겼으나, 어차피 의지가 나타난 순간부터 지금까지 의지를 숭상하는 생명은 딱 한 종뿐이었다. 그것도 언제나 그 중 일부였고, 지금도 그 중 일부였다. 그 개체수를 일일이 헤아리며 안달복달하고 일희일비하는 의지의 모습을, 세상은 바라보았다.
  어느 날 의지의 분노와 좌절이 폭발했다. 내가 이렇게 큰 존재임을 이 작은 생명들이 감히 모른 단 말인가. 이 얼마나 가녀리고 어리석은 존재들이란 말인가. 나는 의지다. 내가 너희들의 의지다. 너희 생명들 중 나에게 빚지지 않은 자가 없다. 나를 보아라! 내가 만약 보여줄 수 있는 힘이 있다면! 내 의지가 세상의 변화로 발현된다면! 이 무지한 것들에게 진정한 의지의 모습을 깨우칠 수 있다면! 세상이 이해가 안 간다는 듯 의지를 바라보았다. 의지는 세상을 보더니 세상은 커다란 돌멩이에 불과해서 자신의 욕구를 이해하지 못한다고 하였다. 세상은 고개를 저었다. 그런 뜻이 아니었다. 세상은 의지가 원하는 모든 것을, 할 수 있었다. 세상이 세상이었으니까. 세상은 세상을 변화시킬 수 있었다. 이번에 이해할 수 없어 하는 것은 의지였다. 그럼 여태까지 왜 바라만 보고 있었는가? 세상이 답하였다. 그럼? 의지가 말하였다. 그 힘을 나에게 달라. 내가 더 나은 세상을 만들겠다. 세상은 그러라고 하였다.
  당장 세상에 변화가 일어나기 시작했다. 보통 세상이 변하는 속도보다 수천, 수만배는 빠르게 변하기 시작하였다. 수십억 년 만에 처음으로, 세상은 놀라움을 느꼈다. 세상 위에 세계적인 규모의 ‘질서’가 잡히기 시작하였다. 내리쬐는 햇빛만큼이나 올곧고, 그것에서 어긋남을 용납하지 못하는 질서였다. 의지는 그것을 신세계의 아름다운 질서라고 하였다. 생명들 사이에, 그러니까 전부터 의지를 숭배하던 생명들(의지는 이들을 ‘사람’이라고 불렀다-그들 스스로 붙인 명칭이라고 하였다)사이에 거대한 혼란이 찾아왔다.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자 여느 때처럼 생명들은 적응을 하였다. 그 과정에서 많은 생명들이 목숨을 잃었다. 집단이 무너지고, 집락이 사라졌다. 어떤 이는 의지가 생각하기에 마땅히 목숨을 잃을 만 했고, 어떤 죽음은 의지가 그 목숨 값을 누군가에게 받아내야만 했다. 의지가 끊임없이 자신의 위업을 자랑하였기에, 세상은 그 생명들 사이에서 어떤 일이 일어나는 지, 정확히 말하자면 그 중 의지가 관심을 갖고 행한 변화가 어떤 것인지 잘 알게 되었다. 의지를 무시하던 괘씸한 자들은 처단되었다. 사람들이 삶의 척도로 여길만한 것은 오직 의지를 숭배하는 것뿐이었고, 다른 것은 모두 불필요한 것으로 격하되었다. 사람들은 더 이상 세상을 이해하기 위해 애쓰지 않았다. 의지가 곧 세상이었다. 의지가 모든 것을 바꾼 마당에 그런 것들은 더 이상 중요하지 않았다. 사람이 이룩했던 무수히 많은 학문, 지식, 기술이 한 순간에 완벽하게 쓸모없는 것으로 전락하였다. 그리고 그런 것을 되살리고자 하는 자는 의지가 직접 지목하여 처단하였다. 삶은 단순한 것이 되었다. 기도하는 자들에게 기적이 찾아왔다. 기원하는 자들에게 보상이 찾아왔다. 반면 회의하는 자들에게는 저주와 재앙이 내려왔다. 사람들은 이에 빠르게 적응하여, 되도록 회의하는 마음을 품지 않도록 후손들을 가르쳤다. 사람들 사이의 다툼은 더 이상 고민거리가 아니었다. 의지가 승자를, 옳은 자를 결정했다. 초기에 사람들은 의지의 심판을 믿고 쉬이 분쟁을 일으키곤 하였다. 그러나 의지는 분쟁을 일으키는 자들을 종종 편을 가르지 않고 멸하였기에, 마침내 사람들 사이에 평화가 찾아왔다. 혼란이 완전히 가라앉고 나자, 더 이상은 혼란이라는 단어가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것만 같았다. 모든 것이 명확했다. 삶의 질문이 사라졌기에, 물질적인 삶 뿐만 아니라 사람들의 마음에도 고요와 평화가 찾아왔다. 나머지 종들에게도 크고 작은 변화가 있었지만, 그것은 모두 사람들을 다루기 위한 도구적인 것에 불과하였다. 가령, 병균들은 오직 그것들을 받아들여 마땅한 이들에게만 영향을 끼칠 수 있었다. 의지를 충실히 따르는 자들은 자신들이 기르는 가축 또한 병마를 피할 수 있으리라 확신하였다. 의지가 약속하고도 이뤄주지 않는 소원은 단 하나, 영생이었는데, 그것은 전부터 이룬 자가 없던 것이었으므로 사람들은 동요하지 않았다.
  놀라운(그리고 의지를 분노케 한)것은, 모든 것이 의지대로 이루어지는 것이 분명함에도 이에 저항하는 움직임이 적어질지언정 완전히 사라지진 않았다는 것이었다. 그들은 삶의 질문이 해소되었다는 것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질문이 해소된 삶을 삶이라 여기지 못하는 자들이었다. 그들은 지하로 숨어들어 옛 삶의 방식과 오래된 지식을 이어가고자 하였다. 그런 시도에도 불구하고 의지로부터 숨을 수는 없었다. 그들이 숨어있는 세상이 의지의 것이었기 때문이었다. 의지는 신경질적으로 그런 사람들을 멸하였으나, 마음 깊은 곳에 그런 생각을 숨겨둔 생명을 모두 없애버리면 자기를 숭배할 사람들 또한 남아나지 않을 터였다. 그런 이들을 제외하면 다양한 아귀다툼이 사라졌기에, 사람의 세상은 하나가 되었다. 세상은 그런 상황을 바라보기만 했다.
  어느 날 세상이 의지에게 왜 생명들의 의지에 직접 개입하지 않느냐고 물었다. 의지는 고개를 저었다. 의지와 마찬가지로 생명들의 의지도 중요한 것이었다. 의지는 다른 의지에게 직접 조종되는 순간 더 이상 의지일 수 없었다. 그렇다면 의지는 존재하지 않는 것이 된다. 비록 그것이 스스로의 파멸일 지라도, 생명들은 스스로의 의지대로 파멸을 향해 가야하는 것이다. 자신이 과거에 다른 생명체에게 의지를 전파하려 했던 것은 과오였다. 물론 그때는 그것이 가능하지도 않았고, 가능해진 지금도 그럴 수는 없다고 의지가 말하였다. 그렇군. 세상이 말하였다. 이제 돌려줘.
  의지는 즉각적으로 반응하였다. 의지는 그럴 수 없다고 했지만 사실 언제든 일어날 수 있었던 일인 걸 알고 있었다. 의지는 이를 대비한 마지막 변화를 이끌어냈다. 세상은 세상을 돌려받았다. 그리고 생명들을 살펴보았다. 전과 마찬가지로 거대한 혼란이 사람의 세상을 뒤흔들고 있었다. 세상이 원래대로 돌아왔음을 반기기보다는, 세상이 버림받았다는 좌절이 커다랗게 번져가고 있었다. 기껏 쌓아올린 새 세상이 다시 무너진 것이니 당연한 일이었으나, 그만큼 사람의 세상은 심하게 변해있었다. 의지가 행한 마지막 일은 다음과 같았다. 의지는 사람들에게 실망하였으며, 그들이 구원받는 유일한 방법은 죄 많은 이들을 모조리 제거하는 것뿐이라고 선언하였다. 그 전까지 사람의 세상은 의지에게 버림받은 채 무너져가리라는 것이 의지의 마지막 말이었다.
  의지가 이뤄낸 평화는 그것이 이루어진 속도만큼이나 빠르게 사라졌다. 의지가 돌아오길 바라는 이들의 절박함과, 그동안 스스로의 의지를 숨기고 살았던 자들의 분노가 충돌하였다. 먼지가 쌓이고 잊혔던 죽음의 기술들이 다시 세상 위에 횡횡하였다. 사람들은 이미 스스로를 모조리 파멸시킬 수 있는 기술을 갖고 있었다. 모든 다툼을 금했음에도, 의지는 그런 것들을 남겨놓으라고 생명들에게 지시했었다. 의지는 본디 땅과 물을 통한 멸망을 경고하고 있었으나, 사람들이 세상을 태울 수 있는 강대한 불을 쥐고 있는 것을 보고 생각을 바꾸었다. 죽음과 멸망의 상징으로는 불이 더 적절할 터였다. 그리고 지금이 그것이 필요한 때라고 의지가 외쳤다. 의지는 세상을 놓치느니 파멸시키겠노라고 하였다. 의지는 세상에게 그걸 피하고 싶으면 당장 다시 세상을 내놓으라고 하였다. 세상이 대답하였다. 아니, 안 줘.
대혼란과 살육의 와중에 어떤 생명이 파멸을 발동시켰다. 의지를 잃은 세상은 필요하지 않다는, 의지의 의견에 동의한 듯싶었다. 사람들은 아무도 세상을 멸망시킬 수 없게 하기 위해 한 번 발동하면 확실히 멸망이 찾아오도록 하는 장치를 마련해놨었다. 의지가 신세계 질서란 것을 내리기 전 일이었다. 사람들은 그것을 파멸의 날 장치라고 불렀다. 감히 누구도 그것을 건드릴 수가 없었다. 지금까지는. 바로 지금 그것이 시작되었다. 의지와 사람의 의지가 만나자, 눈부신 빛이 세상을 순식간에 채웠다. 모두에게 공평한 새로운 질서가 나타났다. 멸망이었다.
  의지는 세상을 불태우는 불꽃만큼이나 타오르는 눈빛으로 세상을 마주하였다. 이것은 내 세상이다. 내가 만든 세상이다. 내가 키운 세상이다. 의지가 선언하였다. 빼앗기기 전에 내 손으로 파멸시키리라. 의지가 외쳤다. 만약 세상을 돌려주지 않으면, 죽음으로 세상이 정화되리라. 불과 빛과 재가 하나의 생명을 더 삼킬 때 마다 의지의 눈빛에서도 불과 빛과 재가 뿜어져 나오는 것 같았다. 의지의 복수가 이루어지고 있었다. 생명들은 초 단위도 되지 않는 짧은 찰나에, 물거품처럼 덧없이 사라져 가고 있었다. 의지는 열정적인 광기로 가득한 웃음을 짓고 있었다. 나를 버린 대가는 멸망뿐이다. 의지가 단언하였다. 그 순간이 오면, 모든 것이 끝나는 순간이 오면, 그 승리의 순간이 오면, 의지는 세상과 마주한 채 큰 소리로 웃을 것이었다. 세상이 마땅히 치러야할 대가를 치른 것에 대해 온 우주가 흔들릴 만큼 크게 웃으면, 그것이 파멸의 대미를 장식하리라. 의지는 그 순간을 위해 여태껏 존재해왔던 것일 지도 몰랐다. 그리고 의지가 사라졌다.
  세상은 자신의 바깥을 전부 돌아보았다. 보이지 않았다. 숨은 것도 아니었다. 의지는 세상을 떠난 적이 없었다. 의지가 탄생한 이래 길지 않은 시간동안 많은 것이 변했지만 그것만은 변한 적이 없었다. 그런데 의지가 사라졌다. 사람의 불꽃은 여전히 세상을 집어삼킬 기세로 으르렁거리고 있었고, 생명들은 꾸준히 죽음을 맞이하고 있었다. 하지만, 생명들은 여전히 남아있었다. 파멸이 찾아오기 전에 비하면 한 줌 밖에 안 되긴 하였다. 그래도 많이 남아있었다. 그런데도 의지가 사라졌다. 세상은 재가 되어 무너져 내리는 세상의 표면을 샅샅이 훑어보았다. 그리고 의지의 모든 것이 파괴되었음을 알았다. 방금 전, 마지막 사람이 죽었다. 사람의 파멸은 사람의 의도대로 그 목표를 달성하였다. 의지는 원래부터 존재하지 않았던 것만 같았다. 세상과 파멸만이 이곳에 남았다.
  영원할 것 같던 섬광과 열기가 사라졌다. 그리고 세상에 어둠과 냉기가 찾아왔다. 하늘로 솟아오른 재들은 다시 땅으로 돌아갈 생각이 없는 것 같았다. 죽음의 행진이 멈추지 않았다. 지금 일어나는 일이기에, 세상은 스러져가는 생명들을 하나하나 느끼고자 하였다. 세상 위의 작은 세상들이 아주 많이 사라졌다. 세상은 잿더미가 된 세상을 바라보며 옛 기억을 되새겼다. 최초의 생명이 태어나기 전, 세상이 물이 아니라 불로 덮여있던 시절을 떠올렸다. 그리고 지금 잿더미가 된 세상을 바라보았다. 그때에 비하면 충분히 풍요로운 광경이었다. 의지는 그런 것을 알지 못할 터였다. 본디 의지는 세상에 생명이 가득했던 때에 태어난 존재였다. 어둠과 냉기가 세상을 서서히 얼려갔다. 세상에겐 별로 새삼스럽지 않은 광경이었다. 세상은 예전에 세상이 얼어붙어있던 몇몇 시절들을 떠올렸다. 그 중 오래된 것들은 이것보다 생명들에게 훨씬 가혹하였다. 의지는 그런 것을 이해하지 못할 터였다. 의지가 존재한 시간은, 진정한 멸망이 무엇인지 알기엔 너무나도 짧았다.
  세상은 아직 꿈틀거림을 느낄 수 있었다. 아주 희미했다. 세상은 눈을 감고 생명들의 작은 꿈틀거림에 집중했다. 세상의 거죽이 탄생과 죽음으로 가득했던 이래 오랜만에 겪어보는 느낌이었다. 세상이 생명들을 느끼는 동안, 시간이 얼마나 흐른 건지 알 수 없었다. 의지가 사라지고 세상의 변화속도가 현저하게 달라졌다. 어딘가에서 생명이 죽고 있었다. 그리고 어딘가에서 생명이 태어나고 있었다. 지금 일어나는 일은, 파멸이 아니었다. 생각보다 빨리 일어나긴 했으나, 여느 때처럼 거대한 죽음일 뿐, 진정한 끝과는 거리가 멀었다. 언젠가는 모든 것이 끝날 터였다. 생명이 끝나든, 아니면 그 전에 세상이 끝나든, 끝이 있을 것이다. 자신의 존재를 마지막 섬광으로 증명하던 그 머나먼 세상들처럼. 하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의지가 원하는 바는 이루어지지 않았다. 의지가 정말 원하던 것이 그것이었는지도 확실하지 않았다. 세상은 의지가 다시 나타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의지가 있든 없든, 세상은 세상이었다. 세상은 다시 꿈틀거림에 집중했다. 장엄하고 강대한 의지가 아니라 아주 작고 단순한, 살고자 하는 의지가 느껴졌다. 세대를 넘어 삶을 이어가고자하는 의지가 느껴졌다. 그 의지는 새로운 탄생으로 구현되었다. 세상이라는 거대하고 고요한 우물 안에서, 점점이 솟아나오는 공기방울들만이 탄생과 삶과 죽음을 보여주고 있었다. 그러나 그것이 계속 이어지며 조금씩 물결을 이루기 시작했다. 세상은 세상을 바라보았다. 느리지만 익숙한 흐름이, 다시 세상 위로 흐르고 있었다.

-끝

---------------------------------------------------------------------------------------------

소재별 단편선 공모때문에 쓰기 시작한 글이긴 했지만 필력이 달려서 심사분량미달로 올리고 말았네요(이걸 공모전에 맞는다고 봐주실지도 모르겠고). 나중에라도 내용을 더 넣고 다듬어서 심사를 받고 싶군요. 모자란 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댓글 0
번호 분류 제목 글쓴이 날짜 추천 수
공지 2024년 독자우수단편 심사위원 공고 mirror 2024.02.26 1
공지 단편 ★(필독) 독자단편우수작 심사방식 변경 공지★5 mirror 2015.12.18 1
공지 독자 우수 단편 선정 규정 (3기 심사단 선정)4 mirror 2009.07.01 3
1837 단편 멸종[수정본] 엄길윤 2012.05.11 0
1836 단편 기타나 고래 2012.05.09 0
1835 단편 별의 끝과 시작을 이어서 민아 2012.05.05 0
1834 단편 진단서1 김경수 2012.05.04 0
1833 단편 눈물손(하) 이니 군 2012.04.24 0
1832 단편 눈물손(상) 이니 군 2012.04.24 0
1831 단편 육아 스트레스2 앨즈 2012.04.23 0
1830 단편 카르타헤나에 비가 내리면 천공의도너츠 2012.04.10 0
1829 단편 추월 천현주 2012.04.09 0
1828 단편 정상에서 1 천현주 2012.04.09 0
1827 단편 [공지] <b>[탄생] 소재별 단편선 공모가 마감되었습니다.</b> mirror_b 2012.04.02 0
1826 단편 [탄생]민경언니(작성중)2 김사라 2012.03.31 0
1825 단편 [탄생]dedicate 비익조 2012.03.31 0
1824 단편 [탄생] Blue 카논 2012.03.31 0
단편 [탄생]세상, 의지 미소짓는독사 2012.03.31 0
1822 단편 [탄생] 무성세계 이상엽 2012.03.31 0
1821 단편 [탄생] 되살아나는 섬3 장강명 2012.03.31 0
1820 단편 [탄생] 엘리키 메이 2012.03.31 0
1819 단편 [탄생] 달과 이름 단식광대 2012.03.30 0
1818 단편 [탄생] 은총의 날 천공의도너츠 2012.03.29 0
Prev 1 ... 51 52 53 54 55 56 57 58 59 60 ... 147 Nex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