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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 추월

2012.04.09 11:0504.09

  
추 월





  
시청 앞 사거리에서 촛불을 든 사람들이 소리치고 있었다. 의경버스가 그들의 전진을 저지했고, 가로막힌 이들로 인해 차량의 통행은 불가능해졌다. 차를 돌리는 택시기사가 욕설을 내뱉었다. 사람들의 고함소리와 엎어진 의경버스, 무수히 많은 움직임과 쓰레기들이 거리를 채우고 있었다. 사거리 모퉁이의 건물에는 편의점의 하얀 간판이 환하게 켜져 있었고, 그 곳의 음료 전시대는 맥주로 가득 채워져 있었다. 도로의 가운데에는 무대가 설치되어 있었다. 사회자가 하고 싶은 말이 있는 사람들에게 기회를 주었고, 할 말이 없는 사람들에게 기회를 강요했다. 교복을 입은 학생부터 배가 부른 임산부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사람들이 무대에 올랐다. 관중들 사이로 김밥이 나눠졌다. 무대의 전방에선 무리를 지은 남자들이 굵은 줄을 가져와 의경버스의 앞 범퍼에 묶었다. 그것을 지켜보던 다른 남자들이 남은 줄을 붙잡았다. 버스가 조금씩 끌려나오자 무대 앞의 사람들이 박수를 치며 소리를 질렀다. 흥이 오른 사회자가 노래방 반주에 맞춰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젊은 그대 잠깨어 오라. 젊은 그대 잠깨어 오라. 아 아 사랑스런 젊은 그대. 아 아 태양 같은 젊은 그대. 관중들은 무대의 앞과 뒤에서 크게 따라 불렀고, 커져가는 노랫소리에 맞춰 남자들은 점차 과격해졌다. 청와대 쪽을 전방으로 하여, 모인 사람들의 좌측과 우측, 뒤쪽 도로에서도 사람들의 행렬은 끊임이 없었다. 전방의 버스를 뚫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판단한 사람들은 청와대를 향한 다른 길을 찾기 시작했다. 많은 사람들이 오고 갔다.

무대의 좌측으로 뻗어있는 도로 저 멀리 어느 작은 골목 앞에서 다급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뚫렸습니다. 남자분들. 모두 이쪽으로 와주세요. 주위를 지나던 몇몇의 사람들이 걸음을 멈췄다. 목소리는 자꾸만 뒤에 있는 골목을 가리켰다. 한 사내가 골목으로 들어서자 다른 사내들도 그 뒤를 따랐다. 점점 많은 사람들이 몰렸다. 모인 사람들에 비해 골목이 좁았다. 사람들은 줄을 서기 시작했다.






골목의 뒤편 공터엔 의경들이 모여 있다. 소음의 크기로 보아 가까이에 시위대가 있음을 짐작 할 수 있다. 중대장의 앞으로 한 개 소대 병력의 의경들이 집합했다. 그는 부하들에게 현재의 상황과 지난 며칠 간 진압과정에서 발생했던 뉴스보도들을 상기시킨다. 제대로 잠을 못잔 얼굴엔 피로가 역력하다. 그는 명령이 있기 전까지 절대 반응하지 말 것을 당부한다. 중대장이 사라지자 중대 무전병이 병력을 따로 소집한다. 몸 사리지 말고 명령 떨어지면 가릴 것 없이 조져라. 듣고 있던 각 분대의 수경들이 엄살을 떨며 삐댄다. 그들이 장난을 치고 있는 그 때 열의 뒤쪽에서 고함소리가 들려온다.

씨발놈아. 이병철의 턱이 돌아간다. 수학여행 왔냐. 옷도 제일 늦게 입어, 밥도 제일 늦게 먹어. 미쳤냐. 상경의 입에서 침이 튄다. 이병철은 시정하겠다는 말도 없이 고개를 숙이고 있다. 그는 뒤쪽 벽에 기대어 있는 자신의 방패를 보며 그 방패로 상경의 얼굴을 내리찍는 장면을 상상한다. 이가 부러져 튀겨나간다. 바닥에 쓰러지면 올라타서 계속 머리를 찍는다. 몇 번인가 반복하는 사이 관자놀이 부근에 방패자국이 깊게 패이고, 곧 빠각하며 머리가 부서진다. 피와 살과 뼈가 함께 짓이겨진다.



  
그의 아버지는 밥솥으로 어머니의 머리를 찍었다. 벌겋게 달아오른 아버지의 입에서 침과 밥알이 흘렀다. 하필 손에 걸린 것이 밥솥이었다. 바닥에 펴진 이불엔 파란색 선원복을 입은 오리가 활짝 웃고 있었다. 어머니는 아버지의 밥솥을 그 이불로 막으려 했다. 밥솥의 속도가 점차 빨라졌다. 4번째인가, 5번째인가, 내리치던 밥솥이 열렸다. 보온 중이던 밥 덩어리들이 튀어나왔다. 주먹만 한 것도 있었고, 엄지손가락만 한 것도 있었다. 이불 여기저기에 흘러넘친 밥알들이 붙었다. 밥알들은 어머니의 머리와 아버지의 밥솥 사이에서 찐득하게 뭉개졌다. 이불이 번들 거렸다. 밥알과 이불 때문인지 아무리 찍어도 어머니의 머리는 깨지지 않았다. 어머니는 자꾸만 소리를 질렀는데 이불에 막혀 그 소리가 잘 들리지 않았다. 꿱. 꿱. 마치 오리가 우는 것만 같았다. 아버지의 손에 뜨거운 밥알이 묻어 밥솥이 바닥에 떨어졌다. 밥솥을 놓친 아버지는 어머니를 발로 찼다. 숨이 막히는지 꿈틀대던 어머니가 움직임을 멈췄다.



  
수하나의 중대 무전기에서 다급한 소리가 들린다. 새문안교회 뚫렸다. 빨리 막아. 이 새끼들아. 뛰어. 수하나가 병력을 정렬한다. 상경이 멍하니 서있던 이병철의 배를 걷어찬다. 이제 말하면 쳐듣지도 않는구나. 이병철은 천천히 방패를 들고 열에 섞인다. 상경이 이를 간다.



  
새문안교회 옆길, 시위대의 좌측과 전방에서 의경들이 길을 막고 있다. 의경들은 버스로 통로를 좁히고, 좁혀진 통로를 두텁게 막아선다. 버스 위엔, 몇몇의 사람들이 카메라를 들고 올라가 악을 쓰고 있다. 때려보라고, 모두 보고 있다고. 카메라의 플래시가 연신 터지면서 사방이 번쩍번쩍 했다. 격렬한 현장의 뒤편 주차장 건물에는 몇 명의 연인들이 모여 그 모습을 구경하고 있다. 최전방의 시위대는 투명한 방패 사이로 의경들의 긴장한 얼굴을 발견한다. 시위를 하는 남자들은 의경을 한명씩 끌어내기 시작한다. 간신히 버티던 한 의경이 끌려나온다. 끌려 나온 의경이 방패를 바닥에 거칠게 집어던진다. 사람들 사이로 길이 생기고 의경은 사나운 몸짓으로 그 길을 걸어 좌측의 무리에 도착한다. 사람들은 그런 의경을 보며 박수를 친다. 시위대는 전방의 의경들을 모두 끌어내 좌측으로 옮기려 한다. 이병철은 의경 측의 2열에 서 있다. 2열의 의경들은 1열의 의경들이 끌려가지 못하도록 허리춤을 손으로 붙잡고 있다. 혼란스러운 와중에도 상경은 집요하게 이병철을 괴롭힌다. 이병철의 앞에 있는 의경이 시위대에게 잡혀 쓰러진다. 의경을 잡고 있던 이병철의 손이 뒤틀린다. 이병철이 의경을 놓치자 상경이 주먹으로 옆구리를 때린다. 정신 안차리냐. 쓰러진 의경을 시위대가 끌어내려 한다. 이병철은 앞 의경의 허리춤을 다시 붙잡는다.



  
그가 잠에서 깼을 때 집안은 조용했다. 해가 지기 직전이었다. 창문으로 들어온 붉은 빛이 네모나게 바닥에 묻었다. 라디오에선 피아노 소리가 흘러나왔다. 그는 눈을 뜨고서도 한참이나 몸을 움직이지 않았다. 현관에서 시원한 바람이 불어왔다. 어머니는 문 밖에서 쌀을 씻고 있었다. 물에 비친 노을이 어머니의 손에 부서지고 일렁였다. 집을 나간 아버지는 돌아오지 않았고, 그 사이에도 밥솥은 날마다 밥을 지었다. 어느새 밥이 익는 냄새가 바람에 실려 불어왔다. 그는 깍지 낀 손을 풀어 머리를 긁었다. 짧은 머리카락이 손가락을 찔러 따끔거렸다. 입대한지 100일이 넘었음에도 그 느낌은 도무지 익숙해지지 않았다.

그 날 밥솥에 맞아 어머니는 왼쪽 시력을 잃었고, 앞니가 모두 부러졌다. 이가 아파서 밥을 씹지 못했다. 한 달 조금 넘는 사이에 16킬로그램이 빠졌다. 눈은 붓기가 가라앉으면서 완전히 보이지 않게 되었다. 밤이면 이가 아파 진저리를 치면서도 어머니는 끝내 병원에 가지 않았다. 돈이 없는 것이 첫째 이유요, 돈을 벌어야 하는 것이 둘째 이유였다. 살이 그렇게 빠지는 와중에도 어머니는 가게에 꼬박이 나갔다. 겨울이라 성수기라고 했다. 어머니는 이제 한쪽 눈으로 순대를 썰었는데 그런 정성에도 불구하고 사장은 어머니를 해고했다. 어머니는 눈에서 피가 배어나올 때면 붕대를 감고 순대를 썰었다. 사장은 피 묻은 붕대를 감은 어머니의 머리가 손님들에게 불쾌함을 줄 것이라 판단했다. 그와 어머니는 살 길이 막막했다. 막막해도 살아야 했다. 그는 우유와 신문을 배달했다. 도토리묵을 팔았고 벽돌을 날랐다. 정수기 통을 수거했다. 행인지 불행인지 사장들 중 누구도 아직 연소자인 그를 거부하지 않았다. 몇 년간 잡일을 하던 그는 18살 무렵 조그만 연도공장에 취직을 하게 되었다. 하지만 몇 년이 지나도록 형편은 나아지지 않았다. 돈을 모으기엔 월세가 너무 비쌌다.



  
앞에 있는 의경이 결국 끌려 나가고 그를 붙잡고 있던 이병철이 빈자리를 채운다. 상경이 뒤에서 이병철을 붙잡는다. 시위대와 뒤쪽 의경들의 미는 힘이 점점 강해진다. 이병철은 자신의 방패에 눌린 남자의 얼굴을 멍하니 바라본다. 대학생처럼 보이는 남자가 볼이 눌린 채 이병철을 보며 웃는다. 남자는 즐거워 보인다. 이병철을 비롯한 1선 의경들의 발이 땅에서 들린다. 그들은 뒤쪽의 동료들과 앞쪽의 시위대 사이에서 허우적거린다. 상경이 뒤쪽의 의경들을 보며 소리친다. 씹새끼들아. 왜 니들이 밀어. 죽으라는거야? 점점 의경과 사람들의 경계가 불분명해지는 순간이 잦아진다. 대열이 불안정해진다. 이병철은 웃고있는 남자를 바라본다.



  
그는 계속 돈을 벌어야 했다. 따라서 마음만 먹으면 군 복무를 면제 받을 수 있었지만 그것은 그가 원하는 일이 아니었다.

그는 소문난 효자였다. 누구하나 보는 사람 없었지만 그는 어머니를 위해 그의 10대를 바쳤다. 친구들이 술을 마시고, 여자 친구와 노닥거릴 때 그는 공장에서 연도를 만들었다. 커다란 건물에는 그 크기에 맞는 보일러가 필요했고, 보일러는 그 크기에 맞는 연도가 필요했다. 연기가 하늘에 이르는 길. 그는 그 길을 만들어 현장에 설치했다. 용접기를 돌렸고, 허리가 뽑히도록 찍어낸 연도를 트럭에 실었다. 강릉, 목포, 대구, 양구 가릴 것 없이 출장을 돌며 연도를 설치했다. 담배는 태우지 않았다. 현장 일이 없을 때는 집안을 돌봤다. 어머니를 위해 죽을 끓였고 틈나는 대로 팔과 다리를 주물렀다. 설거지를 했다. 그 무렵 이미 어머니는 일을 하지 않는 것에 익숙해져 있었다.

그의 인품은 공장 사람들에게 널리 퍼져 있었다. 나이가 어리다는 것이 그 효과를 극대화시켰다. 그는 일에 요령을 피우지 않았으므로 좋아하지 않는 사람이 드물었다. 사장에게도 평판이 좋았다.

평판은 좋았지만 월급은 오르지 않았다. 그리고 변함이 없는 것은 그의 월급만이 아니었다.

그는 실은 오래전부터 도망치고 싶었다. 어머니가 먹기 좋게 죽을 후후 불 때에도, 어머니의 팔다리를 주무르거나 공장에서 허드렛일을 도맡아 할 때에도 그는 늘 그 곳이 아닌 다른 곳에서 낯선 사람들과 함께 있는 자신의 모습을 꿈꿨다. 그리고 언젠가는 그러한 날이 꼭 올 것이라고 굳게 믿었다.

허나 스무 살이 되던 해에서야 비로소 그는 자신이 진실로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게 되었다. 그것은 어머니와 공장으로부터 벗어난다고 해서 해결되는 문제가 아니었다. 그는 그의 본질에서, 그의 뿌리에서 도망치고 싶었다. 할 수만 있다면 몸 안의 피를 모두 뽑아 새것으로 바꾸고 싶었다. 그는 그의 어미와 아비를 바꾸고 싶었다. 그는 그가 태어나기 이전을 바꾸고 싶었다. 그것은 채워질 수 없는 갈증이었다. 그의 바람은 그의 손이 닿지 않는 곳에 있었다. 그는 그가 아니고 싶었다. 갈증은 깊어만 갔다. 어떻게든 변화가 필요했고 군 복무는 적당한 기회였다. 무엇보다 자연스러웠고 여러 가능성에 대비 할 수 있는 선택이었다.

처음 말을 꺼냈을 때 어머니는 그를 잡고 매달렸다. 가지 말라고. 네가 가면 나는 어떻게 사느냐고, 애인이 아닌 어머니가 그렇게 그를 붙잡았다. 그는 대답하지 않았다. 의경을 지원한 그는 입대 날짜를 받고 머리를 깎았다. 언젠가 그는 그가 떠나고 어머니가 할 수 있는 일을 손꼽아 보았다. 힘이 들겠지만 아주 없는 것만도 아니라고 생각했다.



  
시위대는 점점 더 거칠어진다. 의경들의 머리 위로 물병과 먹다 남은 김밥, 그 김밥을 싸던 랩 쪼가리들이 쉼 없이 날아다닌다. 방패에는 땀에 젖은 시위대의 얼굴이 늘러 붙는다. 땟국물이 흐른다. 시위대와 의경 모두 땀으로 범벅이다. 시위대는 이제 의경들을 끌어내려 하지 않는다. 주먹질이 오고 간다. 앞에서 웃던 남자가 공간을 만들어 이병철의 방패를 걷어찬다. 방패를 잡고 있는 손에 충격이 그대로 전해진다. 손목이 꺾인다. 의경 측 1열이 무너지려 하자 중대장의 윗선에서 검거명령이 떨어진다. 중대장은 중대무전병에게 명령을 하달한다. 몇 초 후, 의경들이 수세를 공세로 바꾼다. 방패조가 일제히 시위대를 쳐내자 시위대와 의경들 사이에 빈 공간이 생긴다. 뒤쪽에 있던 봉조가 그 공간으로 나서서 시위대를 쪼개기 시작한다. 최전방의 시위대는 갑작스러운 상황 변화에 적절히 대응하지 못한다. 뒤에서 밀던 사람들과 앞에서 빠져나가려는 사람들이 가운데에서 출렁인다. 이병철의 몸을 지탱해 주던 힘이 사라진다.



  
그는 입맛을 다셨다. 어머니는 무슨 일을 시작했을까, 그는 알 수 없었다. 바닥의 빨간 빛은 이제 많이 옅어져 있었다. 라디오에선 피아노 연주가 끝나고 어떤 여자 아나운서가 책을 소개하고 있었다.

  
… 지글러는 유엔 인권 인원회의 자문위원으로서 세계의 곳곳을 직접 뛰어다니며 이 책을 만들었다고 합니다. 그는 여기서 국경을 초월한 거대 시장 시스템의 문제점을 비판하고 있는데요. 조금만 읽어드릴께요. 2005년 기준으로 10세 미만의 아동이 5초에 1명씩 굶어 죽어가고 있으며, 비타민 A 부족으로 시력을 상실하는 사람이 3분에 1명 꼴이다. 그리고 세계 인구의 7분의 1에 이르는 8억 5000만 명이 심각한 만성적 영양실조 상태에 있다. 기아에 희생당하는 사람들이 2000년 이후 1200만 명이나 칙. 칙. 치이익. …

  
그가 주파수를 돌렸다. 어머니가 밥상을 들고 들어왔다. 상 위엔 밥과 김치와 삼겹살이 놓여 있었다. 삼겹살은 그가 처음 보는 접시에 담겨 있었다. 어머니는 말이 없었다. 어머니는 고기를 전혀 씹지 못하므로 그것은 그를 위한 고기 일 것이었다. 그는 어머니에게 접시와 삼겹살을 어디서 구하였는지 묻지 않았다. 떠난 것은 자신이었으므로, 그도 역시 할 말이 없었다. 둘은 함께 밥을 먹었다. 그는 고기를 씹었고 어머니는 밥을 물에 말아 함께 마셨다. 어머니의 머리카락이 불어오는 바람에 살랑거렸다. 니 아버지가 너 온다고 사오셨다. 오랜 침묵을 깨고 어머니가 말했다. 그의 고기 씹는 속도가 급격히 느려지다 멈췄다. 어머니의 눈에서 물이 흘렀다. 물은 아주 천천히 볼을 타고 미끄러졌다. 눈물이라기엔 너무 찐득했다. 그것은 진물 같았다. 진물은 어머니의 보이는 눈과 보이지 않는 눈에서 새어나왔다. 그는 씹던 고기를 뱉었다. 그는 씹혀진 고기를 바라봤다. 그때서야 어머니의 침묵을 이해 할 수 있었다. 어머니의 자구책은 일이 아니라 아버지였다. 그의 몸 속 깊은 곳이 뜨거워졌다. 그가 버리고 싶어 했던 피가 뜨거움에 들끓기 시작했다. 그는 상을 들어 던졌다. 밥그릇과 접시가 깨지고, 고기가 쏟아졌다. 그는 뜨거워서 소리를 질렀다.



  
의경들이 진압봉을 내리친다. 앞 사람들은 뒤 사람들 때문에 그 봉을 피하지 못하고, 뒤 사람들은 그 뒤 사람들 때문에 달아날 수가 없다. 정체되었던 힘이 터져 나오고 상황은 급격해진다. 시위대는 도망치려는 사람과 남으려는 사람으로 나뉜다. 뒤쪽의 시위대가 사태를 깨닫고 슬금슬금 도망치기 시작한다. 처음 몇 걸음은 느리지만 그 속도가 점차 빨라진다. 많은 사람들이 주차장 건물을 지나 달리고, 그 뒤를 의경들이 쫓는다. 의경과 시위대 모두 매우 빠르다.

어떤 남자가 의경에게 맞으며 소리친다. 미국산 소고기 물러가라. 폭력경찰 물러가라. 아이가 바닥에 넘어져 울고 있다. 도망치던 어떤 남자가 아이를 발견하고 걸음을 멈춘다. 남자가 아이를 일으키는 사이 이병철을 괴롭히던 상경이 달려와 남자의 팔을 잡는다. 남자가 잠시만, 애 좀, 이라며 소리친다. 상경은 힘으로 손을 풀려는 남자의 머리를 내리친다. 아이는 운다. 다른 어떤 남자가 상경의 옆구리를 걷어찬다. 상경이 넘어지자 맞고 있던 남자와 옆구리를 때린 남자가 함께 상경을 발로 차기 시작한다. 아이가 운다. 군복을 입은 예비역들이 소리친다. 폭력정부 물러가라. 어떤 여자는 어떤 의경의 따귀를 때린다. 바닥엔 꺼진 초들이 의경과 시위대에게 밟혀 뭉개져 있다.

이병철은 멍하니 서있다. 아까 방패를 차던 그 대학생이 보인다. 대학생은 앞을 막는 시위대를 밀치며 도망치고 있다. 이병철은 초점이 없는 눈으로 천천히 걸음을 옮기기 시작한다. 대학생이 시위 현장을 거의 빠져 나갈 즈음, 이병철이 달리기 시작한다.



  
그는 집을 나와 달렸다. 벌겋게 달군 쇠가 몸 안을 지지는 것 같았다. 배 쪽에서 시작된 뻐근함이 나중엔 손가락 끝으로 저릿저릿하게 밀려왔다. 그로서는 처음 겪는 일이었다. 생각 할 시간이 없었다. 그의 몸은 본능적으로 움직였다. 하지만 소용없었다. 뜨거운 것은 그의 몸 안에 있었기 때문에 달린다고 해서 벗어 날 수는 없었다. 그의 달리기는 무용했지만 그것을 알면서도 그는 보다 더 빨리 달리려 했다. 지금 내딛는 발보다 조금 더 빠르게 다음 발을 내딛으려 했다. 그의 발이 빨라지는 것만큼 몸 안의 뜨거움도 점점 더 커졌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달릴수록 가슴이 답답했다. 벗어날 수가 없었다.

아버지는 술을 마실 때 입버릇처럼 속에서 열불이 난다 했다. 아버지가 집을 나간 이후로는 어머니가 그랬다. 순댓집 사장에게 해고당한 날 밤, 어디서 마셨는지 술에 만취한 어머니를 부축하며 집에 들어오는 길에 그는 분명히 들었다. 내가 그 새끼한테 어떻게 했는데. 열불이 나서 못살겠다고. 그는 이제야 그 말의 뜻을 정확히 이해할 수 있었다. 불은 실제로 있었다. 불은 실제로 아버지에게서 어머니로, 어머니에게서 그에게로 전해져 그의 가슴에서 타올라 몸 안에서부터 그를 지졌다. 고통이 너무나 선명했다. 소리를 지르고 싶었으나 목에 무엇이 걸린 듯 꺽꺽거리는 소리만 났다.

뜨거움은 그가 다음 날 오후 4시에 중부지구대로 복귀 할 무렵에도 남아있었다. 복귀한 그는 신고를 하고 선임들의 전투화를 털었다. 등서명령이 떨어진 6시에 그는 걸레를 빨고 있었다. 7시에 춘천경찰서에 도착 하여 내무반에 들어섰다. 기마대를 타고 광화문에 도착한 것이 10시였다. 아직도 미열은 남아 있었다. 싹싹하고 말 잘 듣던 그의 얼굴에서 왜 표정이 사라졌는지, 밥도 빨리 먹고 걸레도 빨리 빨던 그가 왜 느려졌는지 선임들은 알지 못했다. 그들의 관심은 서울 나들이에 있었다.



  
이병철은 다시 달린다. 대학생은 이병철이 자신을 쫓는 것을 모른다. 주차장 건물을 빠져나와 큰길에 들어서자 얼마간의 사람들이 숨을 고르고 있다. 탁 트인 길을 보니 마음이 놓인다. 마음이 놓이자 잊고 있던 여자 친구가 떠오른다. 시험기간이 끝나고 오랜만에 가진 데이트다. 대학생이 핸드폰을 꺼내 전화번호를 누르려 할 때 골목에서 이병철이 뛰어나온다. 골목 앞에 있던 사람들은 이병철을 보자 다시 사방으로 달리기 시작한다. 대학생도 핸드폰을 쥐고 냅다 달린다. 이병철은 대학생의 뒤를 쫓는다. 그들은 큰길을 따라 달린다. 사람들은 이병철에게 소리를 지르고 쓰레기를 던진다. 막아서는 사람은 없다.

도로에는 교복을 입은 학생들이 서성이고 있다. 술에 취한 남자들이 노래를 부른다. 유모차를 끌고 온 어머니와 아버지들이 보인다. 이병철을 발견하지 못한 어떤 어머니가 유모차를 밀며 그의 길을 가로막는다. 이병철은 간신히 옆으로 피해 멈추지 않고 내달린다. 놀란 아기가 울고, 아기의 어머니가 이병철을 보며 욕설을 내뱉는다. 이병철이 어금니를 깨문다. 대학생과의 거리는 좀처럼 좁혀지지 않는다. 이병철은 달리기에 자신이 있지만 거리는 오히려 점점 더 벌어진다. 이병철은 대학생의 뒤통수를 쳐다보고 달린다. 대학생의 머리는 갈색이다. 이병철은 문득 그 대학생을 잡고 싶다. 그 대학생의 머리를 잡고 싶다. 팔을 잡고 싶고 가방을 잡고 싶다.

대학생과 이병철은 이순신 상을 지나친다. 그들의 호흡은 거칠어지고, 그들의 옷은 땀으로 흠뻑 젖는다. 그들은 어둡고 침침한 골목에 들어선다. 그들은 기나긴 통로를 지나 다시 큰 길에 들어선다. 갑자기 현란한 간판들이 깜박인다. 일상의 거리. 도로에는 차들이 가득하다. 예쁘게 차려입은 젊은이들이 팔짱을 끼고 걷는다. 갑작스러운 풍경에 대학생이 발걸음을 멈추고 무릎을 짚는다. 조금은 안심이 되는 표정으로 뒤를 돌아보는 대학생의 눈에 이병철의 모습이 보인다. 간격이 점점 좁혀짐에도, 대학생의 지척에 이르러서도 이병철은 속도를 늦추지 않는다. 사람들은 놀라 길을 비켜서지만 미처 피하지 못한 몇 명의 사람들이 이병철과 부딪힌다. 그러나 이병철은 잠시 비틀거릴 뿐 끈덕지게 대학생을 향해 달려간다. 놀라 다시 달리려는 대학생이 행인에 부딪혀 넘어진다. 이병철이 불과 한걸음 앞까지 다가오자 대학생은 눈을 질끈 감는다. 마침내 둘이 마주하는 그 순간, 이병철이 대학생을 지나친다. 이병철의 뒷모습이 멀어진다.






누구를 쫓는 것일까. 흘긋거리는 사람들의 눈에 쫓기는 이는 보이지 않았다. 의경은 지치치지 않고 광화문 거리로 내달렸다. 흐려진 시야에는 많은 사람들이 들어오고 사라졌다. 의경은 헬멧을 벗어던졌다. 갑자기 차가운 공기가 뺨에 닿았다. 상쾌했다. 의경은 멈춰서서 하늘을 올려다봤다. 서울의 밤하늘은 붉은색이었다. 씩씩거리던 숨이 천천히 가라앉았다. 뜨거운 것이 점점 서늘해지는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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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21 단편 [탄생] 되살아나는 섬3 장강명 2012.03.31 0
1820 단편 [탄생] 엘리키 메이 2012.03.31 0
1819 단편 [탄생] 달과 이름 단식광대 2012.03.30 0
1818 단편 [탄생] 은총의 날 천공의도너츠 2012.03.29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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