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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 도플갱어

2006.11.04 12:0911.04

M-net과 [V]를 번갈아 돌려보다 OCN으로 채널을 옮겼을 때 초인종이 울렸다. 누구세요?

눈이 아주 많이 내렸던 날이었다. M-net과 [V], OCN을 제외한 나머지 채널에서는 교통사고 사망자를 카운트하고, 눈이 덜 쌓인 도로가 카운트다운 했다. 역시 문을 열어보자 그의 온 몸은 보송한 눈 범벅이었다. 누구세요?

그는 나였다.
왠지 이야기가 현학적으로 흐를 것이 두려워 막 눈을 돌린 분들. 걱정 마시라. 더도 말고, 덜도 말고 그는 나였으니까 말이다. 나 말고 다른 곳에 내가 허락되는 곳은 거울 뿐이었기에 난 세 살 난 아이처럼 그 곳을 똑똑 두드려봤다. 오호라, 말랑말랑한 거울이구나. 난 세게 쳐 보았다. 내가 얼얼한 뺨을 어루만지며 왜 냅다 치고 그러세요. 말한다. 누구세요.

"좀 들어가도 될까요?"

그가 양해를 구하기에 난 살짝 비켜섰다. 신발을 벗고 내 앞에 선다. 난 다시 물어봤다. 누구세요?

"도플갱어라고 합니다."

그런 거 안사요. 그는 계속 말을 이어갔다.
나는 도플갱어고, 알다시피 당신과 똑같은 당신이다. 그런데 씨벌, 어떤 문제가 있어, 당신이나 나나 동시에 '내가 나라구.'라고 하거나 하면 뭔가 골치 아프단다. 그러니 둘 중 하나는 죽어야 겠고, 나는 좀 살아야겠으니, 알다시피 당신을 죽이러 온 것이다.
아, 그러시구나.

그는 날 죽이러 온 것이다. 난 왠지 성격이 급할 것 같은 그에게 한 가지 부탁을 하게 된다. 별 부탁이 아니었기에 성격 좋은 그는 흔쾌히 응했다.

"별로 안 급하죠?"
"뭐, 그렇죠."
"그럼 모레까지만 참아주겠어요?"
"네, 그러죠."

마침 김치찌개가 잘 익었다는 냄새를 풍겨 그를 식탁으로 안내했다. 오랜만에 안 쓰던 나머지 밥그릇들을 꺼내고, 안 쓰던 숟가락과 젓가락을 안 쓰던 의자 앞에 놓았다. 그리고 한 끼 밥을 먹는 것이다. 내 김치찌개는 그도 인정했을 정도로 일품이다.

설거지를 하는 동안, 그는 거실의 소파에 앉는다. 소파에 앉아 CSI를 보며 진지한 표정을 짓는다. 난 OCN과 [V]를 돌려보다 M-net으로, 다시 OCN으로 채널을 돌린다. 벌써 다섯 번째 보는 <달마야 놀자>를 진지하게 보며 웃던 그가 내게 물었다. 어떻게 날 죽이는 거야? 그는 친절히 내게 답한다. 먹어. 이상한 걱정이 든다. 너무 많지 않아? 별 문제 아니라는 듯, 어떻게든 먹겠지. 그렇구나. 그런 거지. 묵언수행을 하던 대봉스님이 삼육구 게임을 구경하다 소리를 지르는 부분에서 우린 한바탕 웃으며 뒹굴었다.

두목 재규가 배신당해 땅에 묻힐 때 까지 우린 몇 마디 말을 더 해보았지만 그건 말이 아니었다. 그에게 나의 말을 듣고, 난 그의 말을 하고, 말은 얽히지 않고 그냥 입에서 귀로 들어가더라. 말 할 필요도 없이 그냥 M-net에서 [V]로, 다시 OCN으로. 말이 간절했던 것도 아니었다. 어차피 더 어색하지도 않았다, 그가 생각했다.

열두시가 지나자 그가 캐치원으로 채널을 돌렸다. 살색 화면 투성이에 걸쭉한 음악, 걸쭉한 신음, 그에게 입을 맞추었다. 그가 나의 옷을 벗고, 난 그의 옷을 벗었다. 그는 그의 몸을 핥으며 허리로 내려간다. 난 그의 것을 핥으며 빨았다. 그는 그의 항문이 아리지 않도록 젤을 듬뿍 바르고 집어넣었다. TV의 여자가 가슴팍에 빨간 물감을 묻히고 죽은 척 할 때 까지 섹스 했다.

다음 아침. 남은 김치찌개를 끓여 아침밥을 먹는다, 어제 쓰던 밥그릇들과 숟가락들과 젓가락들로. 설거지를 하는 동안 M-net에서 [V]로, OCN으로. CSI를 보다 섹스하고, 남은 김치찌개를 끓여 점심을 먹는다. 물기가 덜 마른 밥그릇들과 숟가락들과 젓가락들로 설거지를 하는 동안 M-net에서 [V]로, OCN으로. <미션 임파서블2>를 보다 섹스하고, 새로 된장찌개를 끓여 저녁을 먹는다, 물기가 덜 마른 밥그릇들과 숟가락들과 젓가락들로. 설거지를 하는 동안 M-net에서 [V]로, OCN으로. <가문의 영광>을 보다 섹스하고,

다음 아침. 그가 나를 먹었다.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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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날개 06.11.10 22:34 댓글 수정 삭제
    도플갱어. 정말 여러 곳에서 다룬 매체라 저는 쓸 엄두조차 안 나는데, 이 글은 짧은 글인데도 느낌이 또 새롭네요. 잘 읽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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