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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 평행우주

2006.10.27 05:1810.27


평행우주



평행우주, 라는 이론을 아시는가. 우리 우주를 설명하고자 하는 무수한 이론들 중 하나로, 처음에는 전혀 관심 받지 못했지만 양자역학의 발전으로 최근 새롭게 부각되고 있는 학설이다. 전문적인 부분으로 들어가면 상당히 복잡해지긴 하지만 그 핵심 개념 자체는 굉장히 단순한데, 간단히 말하면 존재하는 모든 가능성의 수만큼 평행한 우주가 여럿 존재한다는 것이다. 이해가 안 간다고? 그럼 쉬운 예를 들어보자. 당신이 공중으로 100원짜리 동전을 튕겨 올렸다고 가정하는 것이다. 그럼 땅에 떨어진 동전은 앞면을 가리키고 있을까 뒷면을 가리키고 있을까? 이 평행우주 이론에 따르면, 답은 ‘둘 다’ 이다. 당신이 땅에 떨어진 동전을 보는 순간 앞면을 보는 당신과 뒷면을 본 당신은 각각 평행한 우주 속에서 동시에 존재하게 된다는, 그런 말이다.

그런데, 나는 어째서 이런 해괴망측한 이야기를 하고 있느냐? 그건 이 이론에 조금만 관심을 갖는다면 찾아낼 수 있는 아주 사소한 사실 때문이다. 난 앞서 평행우주를 ‘존재하는 모든 가능성의 수만큼’ 존재하는 우주라고 정의했다. 그렇다면 이곳이 아닌 수많은 평행우주 중 어딘가에는, 내가 로또에 당첨되어 억만금을 누리며 살고 있는 우주 또한 존재할 수도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 사소한 사실에 관심을 가진 것은 사실 내가 아니다. 이런, 조금만 차분히 생각하면 완전히 뜬구름 잡는 소리에 완전히 흥분해 버린 사람은, 지금도 내 옆에서 신나게 평행우주에 대한 이론을 떠들고 있는 이 녀석이다.

“그러니까, 생각해봐. 너와 나는 지금 이렇게 버스를 타고 집으로 향하고 있지만, 동시에 다른 우주에서는 너와 내가 서로 총격전을 벌이고 있을 수도 있다는 말이야!”

굳이 대답할 가치를 느끼지 못한 난 그냥 창밖을 바라보았다. 어째서 저런 이론에 저렇게 흥분하는지 난 도무지 짐작을 할 수가 없었다. 수많은 가능성이 있고, 설사 지금 이 우주를 제외한 모든 우주의 내가 인생의 황금가도를 달리고 있다 해도, 나는 관심이 없다. 그 녀석은 그 녀석이고, 나는 나일뿐인데, 도대체 존재하는 게 확실치도 않은 그런 녀석 따위에게 도대체 어떻게 대리만족을 느끼라는 거냐. 내 투덜거림을 들은 녀석은 ‘뭐 저런 놈이 다 있냐. 라는 표정으로 날 쳐다보았다. 하지만 그런 표정으로 쳐다보셔도 말입니다…….
“그게 바로 네 문제야. 이 감수성이라고는 눈곱만큼도 없는 자식. 이런 건 그냥 순수하게 즐거워해 주는 게 예의라고.”

아아, 그러셔요…….

대체 왜인지 화까지 내고 있는 녀석을 바라보며 난 심드렁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신 정훈. 7살 때부터 거의 10년을 함께한, 흔히 말하는 소꿉친구이다. 말이 많다는 것과 너무 유치하다는 것이 흠이긴 하지만 그런대로 꽤 괜찮은 녀석이다. 평행우주라. 그렇다면 우주 어딘가에는 말 없고 어른스러운 이 녀석과 함께하는 나도 존재하겠지. 거기까지 생각한 나는 웃음을 터뜨렸다. 나쁘지는 않은데…….

말없이 바라보는 창밖으로 별이 없는 익숙한 도시의 밤 풍경이 스쳐 지나갔다. 사람은 누구나 이상을 꿈꾼다. 그건 인간인 이상 누구나 마찬가지일 것이다. 그리고 이 평행우주라는 이론은 자신의 이상이 한낱 공상이 아니라고 다독여주고 있지 않은가. 그래봤자, ‘이 그림 속의 떡은 가상이 아니라 진실일지도 몰라’ 수준이긴 하지만, 그렇다는 건 역으로 그런 정도에도 만족할 수 있는 것도 역시 인간이라는 얘기 아닐까?

-다음 내리실 역은…….

나는 이 정거장에서 내린다. 정훈 이는 다 다음 정거장. 벨을 누르고, 나와 마찬가지로 내리기 위해 몰려든 사람들 속에서 힘겹게 중심을 잡으며 정훈이 에게 손을 흔들었다. 그렇게 떠들던 녀석도 말을 마치더니 씩 웃으며 마주 손을 흔들었다. 난 버스에서 내려, 정훈이가 탄 버스가 내 시야에서 사라질 때 까지 한참을 바라보았다. 이렇게 버스에서 내리면 항상 묘한 기분이 들었다. 뭐랄까. 말하자면 오늘의 일과도 무사히 끝 맞췄구나, 하는 생각이랄까. 아니면 오늘도 아무 일 없이 지나갔구나, 하는 생각이랄까. 그런 안도인지 아쉬움인지 모를 감정을 밟으며 난 천천히 집으로 향했다.

“아, 아들 왔니.”

집에 들어서자 반가운 어머니의 목소리가 제일 먼저 나를 맞았다. 다녀왔습니다, 하고는 피곤한 몸을 이끌고 곧바로 내 방에 들어가 옷을 갈아입었다. 그리고는 씻지도 않고 침대에 몸을 던졌다. 그리고 익숙한 어둠을 바라보며 찬찬히 오늘 하루 일과를 되짚었다. 그리고 이렇게 잠이 들면, 또 다시 익숙한 아침이 오겠지…….

그렇게 생각하며, 난 눈을 감았다.

*

그런데, 동물은 왜 잠을 자지 않으면 살 수 없는 걸까. 난 항상 이런 생각을 했다. 잠을 자지 않을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싫다. 인생의 1/3을 아무것도 못하고 잠만 자야 한다는 것이, 그리고 오늘과 내일을 너무도 간단히 연결시켜버린다는 것이. 하지만 아쉽게도, 지금 내게 가장 중요한건 이런 철학적인 고찰이 아닌 당장 눈을 떠야한다는 사실이었다. 내가 평소대로 일어난 것이 맞다면, 더 이상 침대 위에서 꾸물거리다간 분명히 버스를 놓치고 말 테니까.

“……아.”

시계를 보니, 평소보다 20분이나 빨리 일어난 6시 10분이었다. 아침의 20분이라니, 엄청나게 아쉽긴 했지만 막상 눈을 뜨고 일어나 앉으니, 방금 전까지만 해도 도저히 일어나지 못할 것 같았던 기분은 어디론가 싹 가셨다. 그런데 그 대신,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뭐라고 해야 하나. 갑자기 방 안의 공기가 2-3도 정도 낮아진 것 같은 오싹한 느낌. 아니, 그렇다기 보다 공기가 조금씩 무거워져 온 몸이 갑갑하게 둘러싸인 느낌이랄까. 하지만 동시에, 난 ‘아침에 공기가 왠지 이상했어요.’ 라고 담임선생님에게 지각 혹은 결석의 사유를 말하는 나를 상상해 보지 않을 수 없었다. 그것까지는 크게 어렵지 않았지만, 그러고 나서 세 시간 뒤를 상상하는 건 도저히 불가능했다.

뭐, 그렇게까지 생각하고 나서는 더 이상 앉아있을 기분도 가시고 말았다. 이왕 조금 일찍 일어난 것, 평소보다 여유 있게 씻고 밥을 먹었다. 부모님은 모두 나보다 일찍 직장에 가시고, 원래라면 내가 다 씻고 난 뒤 자기 방에서 자고 있을 동생을 깨워야 했지만 지금 동생은 수학여행을 가서 돌아오지 않았다. 아마, 오늘 학교에서 돌아와 보면 자고 있겠지. 이래저래 학교란 게 참 재밌다. 꽤나 여유를 부렸는데도 평소보다 준비를 마친 시간이 평소보다 10분이나 빨랐다. 하지만 아무도 없는 집에 계속 있자니 왠지 묘한 기분이 들어, 조금 일찍 출발하기로 했다. 뭐, 괜찮겠지. 왠지 정훈이 녀석도 빨리 일어났을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아침의 거리는 한산했다. 중학생들은 아직 집에서 꾸물거리고 있을 테고, 요 근방의 고등학생들은 좀 더 늑장을 부리고 있을 것이다. 그래서 버스 정류장엔 나까지 포함해서 네 명이 고작이었다. 난 좀 외각 지역에서 시내 쪽으로 고등학교를 다니기 때문에, 조금만 늦으면 직장에 출근하는 어른들과 시간대가 겹쳐서 매우 괴롭다. 그래서 오늘처럼 한산한 버스를 타게 되는 날에는 내내 기분이 좋다. 버스는 얼마 기다리지 않아서 도착했다. 난 혹시나 하는 마음에 버스 안을 둘러 봤지만, 아쉽게도 꾸벅꾸벅 졸고 있는 승객들 중에 내가 찾는 얼굴은 없었다. 하지만 크게 신경이 쓰이지는 않았다. 어차피 학교에서 볼 건데. 그래봐야 한 버스 먼저 탄 것뿐이다.

사실 그것보다 중요한건 일어날 때 느꼈던 이상한 기분이 아직도 찝찝하게 떨어지지 않은 것이었다. 그리고 간신히 알아챘다. 내가 느끼고 있는 이 기분은, 공기 따위의 문제가 아니라는 걸. 모든 게 조금씩 낯설었다. 처음 와봤다거나, 그런 느낌은 아니다. 난 분명히 이곳을 알고 있다. 이곳에서 태어나, 17년 동안 다른 곳에서 살아본 적도 없다. 버스가 오는 시간도, 얼마쯤 가면 어디가 나올 것이라는 것도 전부 알고 있다. 하지만 무언가가 달랐다. 마치 겉은 그대로지만 속은 전혀 다른 색으로 칠해진 공처럼……, 같은 듯 하면서도 무언가가 미묘하게 어긋나 있는 것 같은 그런 기분…….

그런 찝찝한 기분은 버스에서 내릴 때까지 사라지지 않았다. 잠이 좀 깨고, 친구들과 어울리다 보면 나아지겠지 하고 생각했었지만, 정작 버스가 학교 앞 정류장에서 멈췄을 때 나는.

어떻게 해야 할지 도무지 종잡을 수가 없었다.

*

오전 10시 30분. 나는, 아침에 출발했던 우리 집에 있었다. 그리곤 거실에 앉은 채로, 깊은 생각에 잠겨 있었다.

상황이 참 묘했다. 따지고 보면 굉장히 급박한 일인데, 왠지 전혀 그런 느낌이 들지 않았다. 핸드폰을 갖고 계신 엄마와 아빠, 그리고 몇몇 친구가 전혀 전화를 받지 않았다. 정훈이의 경우는, 특히 심했다. 정훈 이는 핸드폰을 가지고 있지 않았기 때문에 집전화로 할 수 밖에 없었는데, 수화기에서는 정훈이의 목소리가 들리는 대신 결번이라는 황당한 소리가 튀어나왔기 때문이다. 이래서야, 대책을 세우기는커녕 현상 파악조차도 힘들다. 구체적으로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짐작할 최소한의 단서조차 없는데, 어떻게 대책을 세운단 말인가.

하지만 몇 가지 고무적인 사실이 있었다. 일단 아침에 일어난 곳이 우리 집이라는 것. 그리고 약간 이상하게 느끼긴 했지만 겉으로 알아챌 정도의 변화는, 적어도 우리 집 내에서는 없었다는 것. 그리고 부모님이 전화를 받지는 않으시지만 결번은 아니라는 것. 대충 이 정도였다. 아버지와 어머니는, 출근을 일찍 하시는 대신에 다른 직장인들에 비해 퇴근시간이 좀 빠른 편이시다. 아무리 늦어도 오후 5시가 되면 둘 중 한분은 집으로 오실 것이다. 뭐, 5시가 지나도록 아무도 귀가하지 않는다면……, 그때야 말로 정말 비상사태다.

하지만 아직은 여유가 있다. 그렇게 생각한 난 거실의 카펫에 대자로 드러누웠다. 열린 배란다 사이로 들어오는 공기엔 이미 아침의 이슬과 함께 찬 기운도 사라져 있었다. 따스하게 데워진 바람은 녹아버릴 정도로 부드러운 햇빛과 함께 불이 켜지지 않은 거실을 가득 메웠다. 집 안에는 어떤 소리도 없었다. 웃고 떠드는 TV소리도, 사랑을 얘기하는 노랫소리도, 웅웅 울어대는 컴퓨터 소리도 없었다.

나 혼자.

오직 나 혼자였다.

도대체 이렇게 있어본 적이 얼마만인지……. 그도 그럴 것이, 지금 시간이라는 게 평일이라면 학교에 가있을 시간이고, 주말이래야 늦잠을 자던가 아니면 가족들과 함께 웃고 떠들며 TV, 기껏해야 컴퓨터 게임을 하느라 이런 시간을 가져볼 틈이 없었던 것이다. 물론 학교가 끝나고 집에 돌아와 내 방에 누웠을 때도 고요하긴 하지만, 낮의 정적이란 밤의 그것과는 또 다른 맛이 있었다. 그렇게 처음 느껴보는 고요함은 내게 안도감을 주었다.

그리고 안도감은 차츰 긴장됐던 몸과 정신을 나른한 수면의 늪으로 이끌고 있었다. 난 그것을 분명히 느꼈지만, 별로 저항할 생각이 들지 않았다. 어차피 5시까지 뭘 하고 싶은 마음도 의욕도 없다. 고민해서 답이 나오는 것도 아니고, 일단은 자두는 게 도움이 될지도 모르니까.

그리고 그렇게……, 나른히 잠이 들었다-라고 생각한 순간이었다.

눈을 감았다고 생각한 바로 그 순간, 난 뒤통수를 망치로 맞은 것 같은 강렬한 충격을 느꼈다.

학교가 없어지다니.

세상에. 학교가 없어지다니. 말이나 될법한 소린가? 그야말로 기절초풍할 일이다. 생각해 보라. 1년 동안이나 다니던 학교가, 어느 날 자고 일어났더니 사라져 있었다니……! 아무리 한치 앞을 알 수 없는 게 세상사라지만, 이건 그것과는 좀 많이 다르다. 이건 보통의 상식선에선 도저히 용납될 수 없는 대 사건인 것이다. 하지만, 그래. 그것이 비록 비상식적인 일이라 할지라도 모든 일에는 이유가 있는 법이다. 그럼 대체, 이유가 뭘까. 도대체 무엇이 학교를 사라지게 하고, 부모님과 연락이 끊기게 하고, 가장 친한 친구도 사라지게 한 걸까. 대체 무엇이, 어떤 이유로 날 최소한의 도움조차 구할 수 없는 상황에 던져버린 것일까.

전혀 황당한 상황이었지만, 난 이 상황을 타개할, 아니 최소한 이 상황이 일어나게 된 근본적인 원인은 알고 있다는 애매한 확신이 들었다. 경험해본 일도 아니고, 어디선가 들어본 일도 아닌데. 무언가 결정적인 힌트가 생각이 날듯 말듯 끈적끈적하게 내 머리 속에 달라 붙어 떨어지지 않았다. 글쎄. 그게 도대체 뭘까. 그리고 끈질긴 추적 끝에, 난 결국 결정적인 실마리를 찾아낼 수 있었다.

「그러니까, 생각해봐. 너와 나는 지금 이렇게 버스를 타고 집으로 향하고 있지만, 동시에 다른 우주에서는 너와 내가 서로 총격전을 벌이고 있을 수도 있다는 말이야!」

……그래, 그랬다. 도대체 왜 눈치 채지 못했을까. 학교가 사라진 것이, 단지 나에게만 대 사건일 리가 없지 않은가! 꼭 학교를 다니는 학생들이 아니라도, 그곳을 지나치는 수많은 사람들은 어째서 한 번도 이상하다는 소리를 하지 않은 걸까? 답은 간단했다. 그건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게 정답이다. 그리고 이상한 건, 사라진 학교가 아니라 바로 나였던 것이다!

*

오후 5시. 그래도 일말의 희망 같은 것을 걸고 누군가가 오지 않을까 기다려 봤지만, 결국 아무도 오지 않았다. 하지만 그건 오히려 내 추측을 확인시켜 주는 것이나 다름이 없었기 때문에 크게 실망하지는 않았다.

난 5시간 정도, ‘이쪽 세계의 나’ 에 대한 정보를 모았다. 방 여기저기에 널려있는 메모지에서부터, 앨범, 일기장, 전화번호부까지. 한마디로 가관이었다. 부모님은 4년 전에 돌아가셨고, 동생은 애초부터 있지도 않았다. 부모님이 돌아가신 직후 학교를 그만 두고, 보험금과 원래 있던 재산, 그리고 간간히 나오는 보조금으로 살아가고 있었다. 잠깐 동안 친구였던 애들과는, 원래 학교를 그만두기 전에도 굉장히 소극적이고 존재감 없이 살았던 탓에 학교를 그만두고 한 달이 채 지나지 않아 연락이 끊겼던 것 같다.

-중요한건, 이유야 어찌 됐건 간에 세상이 한순간에 바뀌어버린 것이 아니라 내가 원래 나의 세계와 평행한 어떤 우주로 이동하게 됐다는 것이다. 그렇기에 사태의 변화에 초점을 두어야 할 지점은 ‘세계’가 아닌 ‘나’가 된다. 그럼, 나에게 있어선 무엇이 변하고 무엇이 그대로인가. 학교가 사라지고, 부모님이 사라지고, 동생도 사라지고, 가장 친한 친구도 사라졌다. 하지만 그것들 외에 다른 것들은 너무나 훌륭하게도 전의 세계와 일치한다. ‘그것들’ 외에. 이쯤 되면, 인정하기 싫어도 도저히 어떤 결론이 도출되는 것을 막을 수가 없다.

이곳에 ‘나’라는 존재는 없다.

그게 핵심이다. 나와 관련된 모든 것이 없다. 하지만 나와 관련이 없었던 모든 것은 그 자리에 그대로 존재한다. 그렇다면 그것은 내게서 어떤 의미를 가지는가?

나는 베란다로 나가, 창밖을 바라봤다. 아름다운 황혼과 함께 해가 거뭇거뭇 넘어가고 있었다. 황혼은 낮을 뚫고 새어나온 밤의 흔적이다. 그리고 난 그 화려함 속에 묻어있는 차가움에 오한을 느꼈다. 하지만 어쩌면 황혼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지도 모른다. 난 단지 희열에 떨고 있는지도 모르는 것이다.

이상하게도, 난 두려움에 떠는 대신 내가 꿈을 접기까지의 과정을 차분히 생각해 보았다. 꿈을 가졌고, 꿈과, 그 꿈을 가진 나를 사랑했지만, 나를 점차 옭아매는 현실의 사슬 속에서 삶이 아닌 생존을 택하기까지의 과정을. 난 아무렇지도 않은 척 연기했지만, 학생이라는 신분 때문에 하루의 반 이상을 학교에서 보내고, 장남으로써, 내가 아닌 부모님을 봉양하기 위해 내가 원하는 직업보다 좀 더 안정적이고 돈이 많이 되는 직업을 선택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 마음에 들었다고 하는 건 아무래도 억지일 수밖에 없었다. 어디론가 사라져 나만의 삶을 살고 싶은 것이 한 두 번이 아니었지만 인연이라는 보이지 않는 끈이 가장 단단하게 내 발목을 묶었다.

하지만, 이곳에는 아무것도 없다. 고리타분한 규칙도, 나를 옭아매는 의무와 인연도 없다. 난 지금부터 음악을 다시 시작해, 더 이상 활을 들 수 없을 때 까지 바이올린을 켜는 나를 상상해 보았다. 세상이 아무리 많아도, 우주가 아무리 넓어도, 설혹 내가 살아있다는 것이나, 내가 켜고 있는 바이올린과 활조차 거짓이라 해도, 허공에 울려 퍼지는 아름다움만큼은 진실이었다. 그게 진실이다. 그리고 난 진실을 알고 있다. 그런데 왜 그것을 추구할 수 없는가?

인간이 날 수 없는 이유는, 지고 날아야 할 것들이 너무 많기 때문이다. 하지만 난 이 세계에 빚진 것이 없다. 어떤 의무도, 제약도 없는 것이다. 난 문득, 4년 전이란 시간을 생각했다. 내 추측이 맞다면, 이 세계에서 부모님이 돌아가시기 전까지는 이쪽 세계의 나와 내가 원래 있던 세계의 나 사이엔 거의 차이가 없었을 것이다. 그리고 4년이라…….

난 혹시나 하는 마음에 원래 세계에선 쓰지 않았던 작은 방에 들어가 보았다.

거기엔, 내가 원하는 게 있었다.

*

며칠이 지났다. 그리고 새로운 세계에서의 며칠을 아무 생각도 없이 그저 기계적으로 바이올린을 켜거나 멍하니 누워 천장을 바라보며 지내는 동안, 난 조금씩 내가 이 세계에 적응해 가고 있는 것을 느꼈다. 그것은 마치 내게 어떠한 카운트다운 같은 걸로 느껴졌다. 이 세계에서 더 이상의 낯설음을 느끼지 못하는 순간, 이 현실은 영원히 고정되어 버리고 만다고. 어떠한 근거도 없었지만 그 추측은 내게 이상하리만치 사실적으로 느껴졌다. 하지만 동시에 더더욱 회의적인 생각이 나태한 정신을 감싸고돌았다. 만약 그게 사실이라 해도, 내가 할 수 있는 게 뭐가 있다는 말인가.

글쎄. 이 전 세계에서 날 알던 사람들은 이런 날 보면 어떻게 생각할까. 웃을까? 평소엔 아무렇지도 않은 척 하고 있다가 정작 혼자인 상황이 오자 슬픔보단 해방감을 느끼는 내가 웃기다고 생각할까? 그들의 생각은 알 수 없었지만, 나 스스로 보기에 지금 이 상황은 매우 웃겼다. 아니, 왠지 비겁하다고 생각한 것 같다. 이 세계에서의 하루하루가, 점점 이전의 나를 부정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리고 그런 모든 감정 속에 담담한 깨달음이 있었다. 아아. 난 이렇게나 이기적인 놈이었구나. 사람은 누구나 이기적이라는 말이 있다. 하지만 그것이 어떤 행동에 대한 면죄부가 된다고 생각한 적은 없다. 그리고 아마도. 지금 날 이렇게 초조하게 하고 있는 것은, 그런 멋드러진 말이 아닌. 그저 외로움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난 이 세계로 온지 처음으로. 아니, 두 번째로 문 밖을 나섰다. 그리고 내가 항상 내리던 버스 정류장엘 갔다. 그게 사실이라고 해도, 내가 할 수 있는 게 뭐가 있다는 말인가. 글쎄.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분명히 말하건대 내가 해야만 할 것은 분명히 존재했다.

난 하늘을 봤다. 차가운 별이 반짝이고 있었다. 이 세계엔 빚이 없다고. 난 작게 실소했다. 하지만 난 여전히 이 전의 세계를 완전히 부정할 수 없었다. 내가 그들과 함께 기뻐하고, 슬퍼하고, 추억을 만들어갔던 기억조차 완전히 지워지지 않은 이상, 그들과 나를 연결하고 있는 끈이 완전히 끊어졌다고는 말할 수 없었다.

난 천천히 앞으로 걸어 나갔다. 그리고 걸음을 멈췄다. 그렇게 조금의 시간이 지나자, 내가 뭘 하려는 지를 알아채고 비명을 지르는 사람이 생겼다. 시선이 집중된다. 모두 술렁이지만, 선뜻 나서는 사람은 없었다. 나를 향해 다가오는 두 개의 불빛이 이상하리만큼 선명히 보였다. 무엇을 할 수 있는가. 무엇을 해야 하는가.

……답은 하나였다. 난 거부할 수 있다.

*

“어이, 무슨 생각을 그리 하시나요.”
“아아. 별거 아닌데.”

그 선택이 옳았는지 어떤지는 알 수 없었다. 하지만 내가 알고 있는 건, 최소한 표면상으론 내가 이전의 세계로 돌아왔다는 것이다. 저쪽의 세계에 떨어졌을 때와 마찬가지로, 마지막 순간이 지나고 정신을 차렸다고 생각한 순간 난 내 방의 침실에 누워있었다. 그리고 혹시나 하는 마음에 준비를 하고 탄 통학 버스에서 이 녀석을 만난 것이다. 그리고 그 친숙한 얼굴을 직접 마주본 순간……, 난 형용할 수 없는 안도감에 휩싸였다.

“이봐, 너. 정말 딴 세계에라도 갖다온 거 아니야?”

실감나는 비유였다. 난 친구의 이런 수다에 대응하는 오랜 방법을 알고 있었지만, 오늘은 고개를 돌려 녀석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그리고 입을 열었다.

“너 말야. 정말로 그런 일이 생겨서, 평행우주 말이야. 네가 지금도 간절히 원하는 세상에 너 혼자 뚝 떨어졌다고 해봐. 그럼 넌 어떻게 할 거냐?”

정환 이의 눈이 휘둥그레 해 졌다. ‘얘가 갑자기 왜이래?’ 라는 표정이군. 질문의 내용 때문이었을까, 아니면 내가 자기의 수다에 말을 맞춰줬다는 사실 때문이었을까. 뭐, 아무래도 상관없겠지. 난 계속 답을 원하는 표정으로 녀석의 눈을 마주봤다. 그러자 녀석이 피식 웃기 시작했다.

“아, 그런 말이냐. 너랑 온갖 부귀영화 중에서 하나를 선택하라고?”

뭐 꼭 나를 말하는 건 아니었지만. 녀석은 웃음기를 약간 거두더니 말을 이었다.

“글쎄. 난 전제 자체가 잘못됐다고 보는데? ‘내가 원하는 세상’에 혼자 떨어지다니. 말이 안 되잖아.”

아아. 그것도 그렇군.

난 다시 녀석에게서 눈길을 돌려 창밖을 바라보았다. 이제와 든 생각이지만, 나 역시 전제가 잘못 됐었다고 생각한다. 난 활시위 없이 화살을 쏠 수 있는 사람이 아니다. 내 미래를 위해 이제까지 살아온 삶 전체를 부정하라는 건, 아무리 머리를 굴려 봐도 씁쓸한 블랙코미디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뭐, 그런 것 치고는 많이 흔들리긴 했지만.

난 이때까지의 내가 얼마나 우스웠는지에 대해 생각했다. 그 생각 중엔 내가 누군가를 위해 꿈을 버렸다고 변명하던 것이 얼마나 구차한 일이었는지에 대한 것도 있었다. 그래. 아무도 나에게 희생을 강요하지 않았다. 인간은 모두 자신의 선택으로, 자신을 위해 남에게 자신의 일부를 바치는 것이다. 그 선택의 결과로 살아가고 있는 주제에, 내 지난날은 너무 이기적이었다.

난 별이 없는 도시의 밤하늘을 떠올렸다. 하지만, 별은 사라지거나 하지 않는다. 우리가 만들어낸 뿌연 먼지 속에 가려 보이지 않을 뿐. 그 먼지를 걷어내는가 아닌가 하는 것은 결국 자신의 선택인 것이다. 버스가 도착했다. 난 지금도 보이지 않는 곳에서 내게 던져지고 있을 파란 별빛을 듬뿍 받으며 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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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오랫만에 쓴 단편입니다. 항상 똑같은 주제. 게다가 이번편은 식상한 소재까지.

글쎄요, 처음 구상할땐 '아 신선하다' 라고 느꼈었는데, 어째 완성하고 보니 그야말로 하루히 동인지 버전이랄까...

하지만, 발상의 기초가 같을 뿐이라고 자위하고 있습니다. 저도 미치오 가쿠의 '평행우주' 를 읽고 떠올린 발상이었거든요.

..아아. 비겁한가요?
리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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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날개 06.10.29 13:06 댓글 수정 삭제
    잘 읽었습니다. 확실히 소실편을 뛰어 넘는 거침없는 이야기라면 더 좋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이 드네요.^^ 하루히는 쿈에게 감정 이입이 되면서(그건 그전까지 3권의 책이 있었기에 더욱 가능한 일이겠지만) 바뀐 세계와 이전 세계에 대한 쿈의 고민도 함께 하고,(독자도 고민하게 되죠. 어디가 나은 것인가) 또 쿈이 어떤 선택을 하게 되고 어떤 노력을 하게 되는지 모두 애정어린 시선으로 긴박하게 보게 되죠. 그런데 이 소설에서는 그려진 모습들이 너무 없기 때문에(작가에게는 모두 머릿속에 있었던 설정들이겠지만, 독자들에게는 마치 추리소설에서 범인을 잡고 나서 탐정이 독자들은 알지 못했던 단서들을 언급하며 잡았다고 할 때의 소외감이 느껴져요.) 주인공이 원했던 세계 모습도 불분명해서 공감도 되지 않고, 이전 세계를 그리워하고 원한 모습도 몇 줄로 설명되어 있어서 잘 다가오지 않는 듯해요. 그래도 문체는 차분하고 잘 읽히는 듯합니다.^^(후반에 오타가 하나 보였습니다. 갖다온 거 -> 갔다온 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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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리안 06.10.29 16:20 댓글 수정 삭제
    ㅠㅠ 감사합니다. 저도 소실편을 읽을때는 가슴이 덜컹 했거든요. 그정도의 충격을 줄수 있을거라 생각하지는 않았습니다. 게다가 학교가 없어졌다는것을 밝히는 기술도 엄청 미숙했던것 같고... 좋은 평 감사드립니다 ;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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