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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 [꽁트?]시한폭탄.

2006.11.01 23:1711.01




눈을 떴을 때 느낀 점은 일단 목이 마르다는 것이었다. 시야가 제대로 돌아오기도 전에 엄청난 갈증을 느꼈
고, 난 말라버린 혓바닥을 이리저리 굴리며 내 것이라고는 믿기지 않은 목소리로 말했다.

「무, 무. 물.」

이 고통스러운 말하기가 끝나고, 벌레 한 마리가 들어온 것처럼 어지럽던 시야가 차츰 돌아오기 시작했다. 콧
속으로 알코올냄새, 지독한 소독약냄새 따위가 들어왔다. 난 켁켁 거리고 킁킁 거리고 웩웩 거리며 고개를 들
어 내 앞에 선 사내를 바라보았다.

이런.

「퍼억.」

녀석의 주먹질에 입술이 터졌다. 사막처럼 메말라 있던 입술에 한 줄기 피가 흘렀다. 난 수분을 섭취하기 위
해 급히 혀로 피를 핥았지만 찢어지는 듯한 고통을 느껴야 했다. 난 고개를 휘휘 내저으며 다시 녀석을 올려다
보았다. 녀석은 특유의 한 쪽으로 일그러뜨리는, 그 묘한 웃음을 나에게 보여주며 말했다.

「기분이 어때? 배신자.」

배신자라는 말에 딱히 변명이나 대꾸를 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다. 그래서 난 그냥 멍하니 녀석의 얼굴을 바
라보고 있었다.

「할 말이 없다 이거군. 어쨌든 좋아. 너도 우리 조직의 법을 알고 있겠지? 지금, 그것이 실행되었다.」

녀석은 아마 내가 충격에 빠지기를 기대했던 모양이다. 하지만 난 녀석이 기대하는 모습을 보여줄 수 없었
다. 그것이 뭔데?

「으엉?」

「······. 진짜 모르는 거냐? 네가 그 로이인가 오이인가 하는 여자 때문에 조직을 팔아먹었으니, 법대로 처리했
다. 지금 네 놈의 머리에는 5분 뒤에 폭발하는 폭탄이 설치되어 있다. 자. 여기 이 리모컨의 빨간 버튼만 누르
면 이제 카운트다운이 시작된다. 하하하······!」

난 녀석의 손에 들려있던 리모컨을 어렵지 않게 빼앗을 수 있었다.

「어?」

순간 녀석과 나의 눈이 마주쳤다. 째깍. 일 초가 흘렀을까. 난 곧바로 뒤돌아 달리기 시작했다.

「으. 더. 저! 빼, 뺏어!」

이걸 뺏기 전에 말을 다시 배우라고 권유하고 싶군, 플루오린.

「타앙!」

윽. 이렇게 가까운 곳에서 총질을 해? 난 뒤를 돌아보았다. 타앙! 타앙! 으아아아악!

다섯 명이 넘는 놈들이 각자 권총을 들고 날 겨냥하고 있었다. 난 곧바로 창문 밖으로 몸을 날렸다.

「쨍그랑!」

창문이 깨지며 떨어진 곳은 과일가게 천막 위였다. 운이 좋게 2층이었군. 난 굴러다니는 과일 속에서 사과 하
나를 주어 일어난 다음 다시 뛰기 시작했다. 아삭. 사과가 잘 익었군그래. 뒤를 보니 놈들은 이제야 막 건물 문
에서 뛰쳐나오고 있었다. 느려터진 놈들.








놈들을 따돌리고 도착한 곳은 로이의 집이었다. 로이는 검은 민소매티를 입고 있었다. 그녀 특유의 깊고 큰
눈이 날 멀뚱히 바라보고 있었다.

「어? 이든. 어떻게 빠져나왔어?」

「뭐야, 로이? 내가 빠져나온 게 싫어? 어쨌든 들어가자.」

로이의 집은 난장판이었다. 입구에서부터 프라이팬이 발에 걸렸다. 내가 징검다리를 건너는 심정으로 깡충깡
충 뛰어다는 것에 비해 로이는 발에 걸리는 것들을 무조건 차거나 밀면서 길을 만들며 걷고 있었다. 겨우 자리
에 앉을 정도의 공간이 생기자 난 로이에게 리모컨을 건네며 말했다.

「야. 이게 뭔지 아냐? 이게 바로 그것인데. 그 빨간 버튼을 누르면.」

꾸욱.

「누르면?」

「으아아아아아아악! 뭔 짓을 한 거야! 그게 내 머릿속에 폭탄을 시동하는 리모컨이란 말이야! 」

「뭐? 이 바보야! 미리 말을 했어야지!」

「말을 하기는 개뿔! 으악. 시간 흐른다. 지금 얼마나. 잠깐. 4분 40초? 4분 39초? 로이야. 나 죽겠네!」

「야야야. 이든. 진정해. 이거 진짜 폭탄이야?.」

「진정이고 진석이고! 4분 34초, 4분 33초!」

「이든. 너 이렇게 죽는 거야?」

「그걸 왜 나한테 물어. 흐으윽. 4분 25초. 4분 24초. 우와아아! 어떻게 해!」

「잠깐. 진정해. 일단 심호흡을 좀 하고.」

「후으으읍. 후으으으읍. 지금 몇 분 남았지? 후으으윽. 아아. 정말 길고도 짧은 내 인생. 이렇게 허무하게 가
는구나. 흑흑.」

「이든. 정확히 3분 12초 남았어. 힘내.」

그걸 세고 있다니······. 뭔가 기분이 이상한데.

「로이야. 너 이런 거에 전공이잖아. 어떻게 안 되겠니?」

「아무리 나라도 보지도 않은 폭탄을 어떻게 해. 게다가 이제 2분 49초 밖에 안 남았는걸.」

······정확하게 세고 있어.

「야. 잠깐만. 나 생각 좀 하자.」

후우. 난 엄지손가락으로 양 관자놀이를 문지르며 생각에 잠겼다. 어떻게 해야 할까. 살아날 길은 없을까? 젠
장. 그 리모컨. 로이 저 바보가 누르지만 않았더라면! 아니. 내가 건네지만, 건네기 전에 설명만 해줬더라면! 아
아. 이렇게 허무하게, 죽는구나.

「이제 몇 초 남았지?」

「30초 남았어.」

「로이야.」

「응?」

「나 죽기 전에, 이거 하나만 물어보자. 넌, 정말 날 사랑했었지?」

「흐음.」

뭘 그렇게 생각해! 으윽. 시간 흐른다. 그냥 그렇다고 대답해.

「글쎄······.」

「글쎄는 무슨 글쎄! 날 사랑했었잖아!」

「아냐. 아니. 아니라는 건 아니고. 잘 모르겠어.」

「정말, 정말 모르겠어?」

「흐음······ 헤에. 미안해. 정말 모르겠어.」

「잘······. 모르겠다고?」

「응.」



에이.



펑.





JINSUG
댓글 2
  • No Profile
    날개 06.11.10 22:33 댓글 수정 삭제
    모르겠다니, 머리가 터질만도 하네요! 잘 읽었습니다.
  • No Profile
    가예 06.11.30 22:26 댓글 수정 삭제
    <정확히 3분 12초 남았어. 힘내.> 조직원보다 여자쪽이 더 무섭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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