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밀번호를 잊어버리셨나요?
텅 빈 우주를 마주한 당신

  남자는 캔버스와 물감을 구입한 후 집으로 향했다. 붓이나 목탄 연필 같은 다른 도구들은  며칠 전에 사두었다. 남은 것은 그림을 그릴 대상뿐이었다. 밤이었지만, 세상은 온통 인공적인 불빛으로 뒤덮여 있었다. 낮보다 더 휘황찬란한 시간이었다. 남자는 문득 밤하늘을 쳐다보았는데 불그스름한 하늘은 마치 이른 저녁대처럼 보였다. 지금이 저녁 열 시가 넘었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았다. 별빛 따윈 찾을래야 찾을 수가 없었다.
  멍하니 서 있는 남자를 사람들이 툭툭 치면서 지나갔다. 길 한복판에서 왜 바보같이 서 있고 지랄이야. 불만 섞인 목소리들이 사방에서 쇄도했다. 시선을 정면으로 옮기고 걷기 시작하자, 거리를 메운 사람들에게 시선이 갔다. 아직 봄이 오려면 한 달은 남은 시점이었지만, 여자들은 미니스커트를 입고 새하얀 다리를 내보이고 있었다. 술에 취해 비틀거리는 사람들이 거리에 늘어났다. 왠지 눈이 올 것만 같았다.
  집에 도착하자마자 웨어러블 컴퓨터(Wearable Computer)를 벗지도 않고 침대에 누웠다. 그러나 잠이 오지 않았다. 남자는 다시 일어나서 집에서 사용하는 메인 컴퓨터의 전원을 켜고 요즘 빠져 있는 가상현실(VR: Virtual Reality) 온라인 게임에 접속을 시도했다. 헬맷처럼 생긴 몰입형 HMD(Head Mount Display)를 머리에 쓰자, 또 다른 세계가 눈앞에 펼쳐졌다.
  이 가상 세계에서 남자는 집에서는 글을 쓰는 작가이고, 평소에는 출판사에서 근무하고 있으며, 새로 들어온 신입사원과 묘한 설렘이 시작되고 있었다. 남자는 퇴근 후 집에서 마감 중이던 작품을 마저 끝냈다. 몇 달이나 질질 끌던 작품이라 가슴 속까지 후련했다. 그때 마침 신입사원인 여자에게 문자가 왔다. 도심 속에 만들어진 인공숲에서 만나자는 내용이었다. 남자는 정확히 약속시간에 맞춰서 도착했다. 인공숲에 수많은 나무들은 전부 진짜 나무처럼 보였다. 이 게임이 컴퓨터로 만들어낸 가상 환경에 현실감이 풍부한 실세계 환경(RE: Real Environments)을 혼합한 기술을 완벽하게 적용했기 때문이었다. 그리하여 마치 실세계 환경과 같은 현실감을 주고 있었다.

  새하얀 원피스를 입은 여자가 밝은 미소를 띠고 다가왔다. 남자는 우연찮게 여자와 대비되는 검은 일색의 옷차림을 하고 있었다. 둘은 공원을 거닐면서 이야기를 나누었다. 오늘은 쓰던 소설을 마저 끝냈어요. 남자의 말에 여자가 호기심을 나타냈다. 무슨 내용이에요? 남자는 차분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저 그런 이야기에요. 남자와 여자가 나오고 사랑에 빠지고 헤어지고 다시 만나는 이야기. 여자는 살짝 고개를 숙이며 힘없이 대답했다. 전 그런 이야기 싫어하는데. 남자는 곧장 되물었다. 왜요? 여자가 대답했다. 헤어진다는 게 싫어요. 남자가 얼굴에 웃음을 띠며 말했다. 그럼 우리도 헤어지지 않겠군요. 여자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럴까요?
  몇 시간 뒤에 남자는 온라인 게임의 접속을 종료했다. 이 게임을 만든 회사가 제한하고 있는 게임 시간에 불만이 많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사용자의 건강을 위해서 하루 최대 여덟 시간 이상은 접속할 수 없게 만들어진 게임이었다. 남자는 건강을 생각할 필요가 없는 존재였으므로 24시간 내내 온라인 게임 속에 살고 싶었지만, 그럴 수 없었다.
  남자는 이제 몇 시간 전에 사온 캔버스를 노려보았다. 하얀 캔버스 역시 무서운 기세로 남자를 마주보고 노려보는 듯했다. 남자는 어느새 목탄 연필을 들고 있었지만, 빈 캔버스에 긋지 못했다. 캔버스는 자신의 몸에 어떠한 흠집도 나기를 원치 않는 것 같았다. 이미 팔레트에 물감도 짜두었고, 물감 녹일 테레핀유도 한 통 가득히 채워놓았지만, 캔버스에 목탄 연필을 긋는 것은 불가능했다. 남자는 기껏 팔까지 걷어붙인 옷소매가 민망하다고 느꼈다. 이건 답이 나오지 않는 문제를 마주한 기분이군. 언제쯤 첫 터치를 할 수 있을까? 어떤 형상을 그려 넣을 수 있을까? 남자는 옷소매를 다시 풀러내렸다.
  남자의 직업은 작가도 화가도 아니었다. 남자는 현실에서는 특별히 내세울만한 직업이 없었다. 정확히 말해서 직업이 필요치 않았다. 돈은 썪어날만큼 있었으며 또한 계속 늘어나고 있었다. 게다가 여러 직업들을 경험해보기도 했기 때문에 더 이상 가지고 싶은 직업도 없었다. 그렇게 직업이 없는 남자였지만, 최근 자신이 가진 상당량의 재산을 사용하여 한 회사를 인수하는 행동을 하기도 했다.
  남자는 혼자 살았기 때문에 집은 언제나 텅 비어 있곤 했다. 어두운 조명 아래 책장을 비롯한 몇 가지 기본적인 물품만 있을 뿐, 다른 가구들은 찾아보기 힘들었다. 한 마디로 사람 사는 집 같지가 않았다. 남자는 어둡고 처량한 집안을 개의치 않아 했다. 누구도 찾아올 리가 없었기 때문일까? 요즘 사람들은 애완용 동물을 키운다거나 메이드 로봇을 구입하기도 했지만, 남자는 관심이 없었다. 남자의 관심은 오로지 가상 현실 게임이었다.

  이 가상현실 온라인 게임의 타이틀은 「지구」였다. 바로 이 지구라는 행성의 90년대를 가상 현실로 재현한 것이었다. 마치 타임머신을 타고 과거로 가듯, 몇 십년 전 과거의 지구를 체험할 수 있는 온라인 게임으로 수십 만 명의 동시 접속자를 기록하는 인기 온라인 게임이었다. 남자는 가상 현실의 거리를 오가는 수많은 사람들을 보며 다들 무슨 생각을 하며 가상의 삶을 살아가고 있는지 궁금했다. 현실 세계와 가상 세계 중 어떤 것이 더 의미를 가질 수 있는 것일까? 둘 사이의 가치를 따지는 일이 과연 의미가 있을 것인가? 갑자기 여러 의문들이 떠올랐지만, 곧 의미없는 질문이라는 것을 깨닫고 그만두었다.
  남자는 출판사에 가서 교정 작업을 하고 회식 자리에 참석했다. 현실에서는 한 번도 참석해 보지 못한 자리였지만, 이곳에서는 얼마든지 일반 사람들과 똑같은 생활을 영위할 수 있었다. 남자의 아바타는 거하게 취해서 제대로 몸을 가누지 못했다. 서둘러 택시를 타고 집으로 귀가하자마자 핸드폰이 울렸다. 그녀다. 이 시간에 만나자고 한다. 남자는 알았다고 대답한다. 24시간 편의점에 가서 술 깨는 음료를 마시고 정신을 회복한다. 공원에서 그녀는 갈색 코트를 입고 벤치에 앉아 있었다.
  보고 싶었어요. 여자가 말한다. 가상인 여자의 붉은 입술을 바라보며 남자는 생각했다. 지금 자신은 실체가 아닌 게임 속 아바타일 뿐이다. 그런데도 자신을 보고 싶었다는 것은 무슨 뜻일까? 자신의 존재 자체를 보고 싶다는 것일까? 이 아바타 내면에 위치한 자신의 영혼을 보고 싶다는 소리일까? 하지만 그동안 온라인상의 대화가 전부 꾸며진 것일 수도 있는데, 그녀는 어떻게 내 실체를 믿거나 바라볼 수 있는 것일까?
  왜 대답이 없나요? 여자가 물었다. 남자는 그제야 조심스럽게 대답했다. 제가 보고 싶었다고요? 그런데 진짜 저를 알지 못하잖아요? 여자가 말했다. 그냥 지금 제가 아는 당신을 보고 싶었어요.
  남자는 생각에 잠겼다. 지금 게임 속 자신은 어떤 모습일까? 평범한 인간일 것이다. 출판사를 다니고, 글을 쓰면서 연애를 하는 지극히 평범한 남자. 모험이라고는 해본 적도 없고, 이상한 일에 휘말린 적도 없이 오로지 하루하루 연명하고 있는 삶. 누군가는 그 평범한 삶을 부러워 할 터이고, 누군가는 그 평범한 삶을 하찮게 여길 것이다. 남자는 어떤 쪽도 아니었다. 그저 자신이 원하는 모습대로 살아가면 그뿐이었다. 그에게는 다른 삶을 동경한다는 개념이 없었다. 남자에게는 자신의 마음대로 살아갈 능력이 있기 때문이다. 불현듯 남자는 여자에게 자신의 정체에 대해 말하고 싶었다.
  저는 뱀파이어에요. 여자는 한동안 말이 없다가 잠시 후에 대답했다. 그럼 저는 늑대인간이에요, 라고 말했으면 좋겠지만 불행히도 전 보통 인간이랍니다. 남자는 여자가 반신반의한다고 생각했다. 믿지 않으셔도 됩니다. 그러자 여자는 생각지도 않은 반응을 보였다. 믿지 않긴요. 얼굴도 보이지 않는 이런 가상 세계에서 하는 말인데 믿어야죠. 물론 그렇기 때문에 더 거짓말을 하는 사람도 있지만, 반대로 진실만을 말하는 사람도 있지요. 그거 아세요? 당신이 지금 처음으로 진짜 자기 이야기를 꺼냈다는 거. 그것만으로도 놀라운 일이에요. 항상 글을 쓰고 있다거나, 출판사 이야기만 했지, 실제 자기 이야기는 전혀 하지 않았잖아요. 처음에는 놀라기도 했어요. 그렇지만, 생각해 보면 그런 놀라운 이야기였기 때문에 쉽게 얘기 하지 못했던 게 아닐까요? 아무튼 간에 그래서 전 당연히 믿어요. 저를 속일 이유가 없으니까.

  남자는 또 다른 여자를 생각했다. 그녀는 굉장히 외모가 아름다운 거리의 화가였다. 많은 남성들이 그녀에게 초상화를 부탁했다. 남자 또한 매일 그녀에게 그림을 그려달라고 부탁했다. 그렇게 몇 년이 지나면서 둘은 사귀는 관계로 발전했다. 남자는 그녀를 전폭적으로 지원했다. 화구를 사주고, 미술 평론가들을 소개해 주었으며, 개인전도 열어주었다. 여자의 명성은 점차 높아져 갔다. 남자는 여자에게 자신이 뱀파이어라고 밝히지 않았다. 그러나 남자가 다른 사람들과 다르다는 것을 눈치챈 듯했다.
  거리의 화가라는 직업을 버린 후, 여자는 더 이상 초상화를 그리지 않았다. 그러나 그전까지 그녀가 그린 남자의 초상화는 몇 백편이나 되었다. 전부 복사라도 한 듯이 똑같은 초상화가.
  여자는 나이를 먹으면서 시력을 급속도로 잃어갔다. 나중에는 치매까지 오는 듯 정신을 놓아버리기 일쑤였다. 젊은 나이에 높은 명성을 쌓은 미모의 화가 치고는 안타까운 말년이었다. 남자는 한적한 시골에 집을 짓고 여자를 보살폈다. 여자가 죽고 나서 남자는 추모전을 열면서 그녀의 죽음을 기렸다. 그 추모전에 남자의 초상화는 없었다. 그건 데뷔 전의 그림들이었고, 전부 똑같아서 가치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 후에 남자는 그녀와 살던 집에 자신의 초상화를 모든 벽에 걸어두었다. 넓은 2층집이었지만, 벽을 전부 채워도 모잘라서 방 마다 잔뜩 쌓아두어야 했다. 자신의 초상화로 뒤덮인 집에서 남자는 며칠을 보냈다. 왠지 수 백년 간의 삶이 자신을 노려보는 것 같았다. 그 삶은 지나치게 똑같았고, 무표정했으며, 시선은 방향을 못 잡고 있었다. 빈 허공을 노려보는 것 같은 눈빛. 허무를 지켜보는 듯한 수백 개의 눈이 남자를 옭아맸다. 마지막 날, 남자는 집과 함께 그림들을 전부 불살라버렸다.

  뱀파이어라면 영원히 살겠군요? 여자가 물었다. 남자는 상념에서 벗어나 가상현실에 집중했다. 잠시 여자의 아바타가 불타는 듯한 환영을 보았지만, 곧 다시금 가상현실에 몰두할 수 있었다. 그렇습니다. 여자의 아바타는 환한 미소를 지으면서 핑그르르 몸을 한바퀴 돌렸다. 그녀의 연보라 빛 플레어스커트가 너풀거렸다. 재미있겠어요. 무한히 계속되는 삶 속에서 재미있는 일들이 얼마나 많을까요?
  남자는 처음으로 비행기를 탔을 때를 떠올렸다. 당시에는 한창 돈을 벌 때라 직접 외국에 나가야만 했다. 비행기에 탑승하자 그는 긴 세월을 보내는 동안 잃어버렸던 흥분감을 느꼈다. 신기한 체험이었다.
  비행기가 서서히 이륙하기 시작하자 안색이 창백한 남자에게 스튜어디스가 몸이 불편하시냐고 물어보았다. 남자는 불펴하기는커녕 오히려 건강한 편이라고 말해주었다. 비행기는 가끔씩 기류에 흔들렸다. 그때마다 남자의 옆에 앉은 한 여자가 심하게 겁을 집어먹었다. 그녀는 두 눈을 질끈 감고 양 손으로 팔걸이를 꼭 붙잡고 있었다. 그리고 가끔가다 알 수 없는 소리를 질렀다. 남자는 걱정하지 말라고 말을 건넸다. 그러자 여자는 서슴없이 남자의 팔을 붙잡으며 품속으로 파고들었다. 살려주세요. 남자는 당황했지만, 그녀를 떼어내지 않은 채 품에 안아주었다. 잠시 후, 극심한 긴장이 갑자기 풀린 까닭인지 여자는 새근새근 잠에 빠져들었다. 남자는 어정쩡한 자세를 계속 유지했다. 비행기가 착륙할 때도 여자는 기겁을 하며, 남자에게 달라붙었다. 공항에서 내린 뒤, 그녀는 남자의 연락처를 받아갔고 나중에는 식사를 함께 했다. 그녀는 비행기에서의 모습과는 달리 차분하면서도 밝은 여자였다. 쉴새없이 자신이 읽은 책과 영화에 대해서 풀어놓았다. 남자 또한 오랜 세월을 살아오면서 많은 책을 읽어왔기에 능숙하게 대화할 수 있었다. 둘은 금세 친한 친구가 되었다. 서점과 영화관을 돌아다니며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남들이 보기에는 사이좋은 남매나 연인 사이 같이 보였다. 그렇게 그녀가 죽기 전까지 그들은 외지에서 서로 기대며 시간을 보냈다. 그녀는 어느 어두운 골목길에 버려졌다. 옷은 전부 찢겨져 있었고, 음부는 형체를 알아보기 힘들 정도로 망가져 있었으며, 얼굴엔 죽기 직전까지 겪은 고통이 새겨져 있었다. 감기지 않고 부릅뜬 눈은 허공을 보고 있었다. 그녀가 최후까지 보고 있었던 것이 무엇일까? 텅 빈 허공 속을 보고 있었을까? 아니면, 이 세계 너머를 바라보았을까? 어쩌면, 누군가의 모습을 그리고 있었을 지도 몰랐다. 남자는 여자의 장례식을 독단적으로 치러버린 뒤, 자신이 누군지 밝히지 않고 여자가 근무하는 출판사에 짧게 사망 통고를 했다. 한 달뒤, 그 골목길에는 열 명의 사내가 목에 이빨 자국이 난 채, 전신의 피가 사라진 미라 같은 시체로 발견되었다.

  이만 가봐야겠어요. 일이 많네요. 가상현실 속 여자가 말했다. 지금 이 가상현실에서 여자는 남자가 일하는 출판사에 막 들어온 신입사원이었다. 그러나 과연 현실에서도 그럴까? 남자처럼 여자도 현실에 관한 이야기는 거의 하지 않았기 때문에 알 수 없었다. 남자는 접속을 종료했다. 그리고 곧바로 캔버스를 마주보았다. 침묵을 지키면서도 무언가 말하는 듯한 캔버스가 묘하게 마음에 들었다. 그렇기 때문에 더욱 더 첫 터치를 시작하지 못하는 걸지도 몰랐다. 남자는 허공에 선을 그었다. 선은 곧 면이 되고 빛과 그림자가 되었다. 허공 속에 보이지 않는 그림들이 채워졌다. 남자는 눈을 감고 자신이 그린 그림을 감상했다.
  다음 날, 남자가 인수하기로 한 회사에서 전화가 왔다. 회사 인수는 순조롭게 진행되고 있는 중이었다. 이번에 걸려온 전화는 인수와 관련된 내용이 아니었다. 회사 인수와 동시에 남자는 한 가지 프로젝트를 추진했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회사를 인수한 목적이 바로 그 프로젝트였다. 전화를 한 사람은 여자였는데, 신경질적인 목소리로 직접 대면을 원했다. 남자는 검은 정장을 차려입고 저녁 약속을 가졌다. 눈이 참 흐릿하시네요. 여자의 첫마디부터 공격적이었다. 남자는 가벼운 말투로 대응했다. 그런데 제 흐릿한 눈으로도 땀구멍이 꽤 크게 보이네요. 피부 관리를 못하실 정도로 바쁘시다니 부럽습니다. 여자의 인상이 찡그러졌다. 둘은 말없이 식사부터 했다. 시간이 지날수록 조급해 하는 것은 여자였다. 결국 느긋한 남자보다 여자가 먼저 본론을 꺼냈다. 그 열정은 높이 사겠지만, 이번 프로젝트는 문제가 많습니다. 남자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얼마 만에 열정이라는 단어를 듣는 것인지, 생경하게까지 느껴졌다. 자신이 지금 열정을 가지고 있던가? 남자는 차분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무엇이 문제죠? 하나하나 해결해 나갑시다. 그러자 여자는 미리 준비한 듯한 말을 쏟아냈다. 우선 신체검사를 받지 않는다는 것부터 말이 안 돼요. 아무리 자기가 인수한 회사라지만, 회사에 불이익이 갈 수 있는 일은 신중해야 합니다. 마음대로 결정해선 안 되지요.
  남자는 여유로운 표정을 지었다. 훈련은 받도록 하겠습니다. 제가 원하는 몇 가지만 제외하고 말이죠. 과학 상식 테스트도 필요하다면 받겠습니다. 그러나 제 신체는 아무런 문제가 없으니 검사 받기를 거부합니다. 자체적으로 검사한 서류로 합의를 보도록 하죠. 여자는 차가운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만약, 무슨 사고라도 발생한다면, 우리 회사는 큰 타격을 받게 됩니다. 5년 전, 스타시티 회사의 유인 우주왕복선에 탑승했던 에밀리 콜린이 출발 후 여섯 시간 만에 돌연사한 것은 한동안 우주관광사업에 크나큰 악재였어요. 특히, 신체검사가 잘못되었던 탓이 컸죠. 우리 회사는 그때의 참사를 재현하고 싶지 않아요.
  남자는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무슨 일이 있어도 저는 물러나지 못합니다. 애초에 이 회사를 인수한 목적이 이것 때문이었으니까요. 혼자서 우주에 나가는 것 말입니다. 미국의 계획대로라면 삼십 년 후쯤에는 우주 엘리베이터를 이용해 우주에 나갈 수도 있겠지만, 역시 신체검사 등이 까다롭겠죠. 여자는 그쯤 되면 무엇보다 나이가 많아서 힘들 거라고 생각했지만, 말하지 않았다. 그저 인상을 잔뜩 찌푸릴 뿐이었다.
  이후 한 시간이 넘는 설전이 오갔다. 결국 남자가 원하는 시설에서 회사측 사람들과 함께 신체 검사를 하는 것으로 결론이 났다. 여자의 의지가 강했기 때문에 남자가 많이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여자는 남자가 많이 물러서도 끝내 만족하지 못한 표정으로 헤어졌다.

  남자는 집으로 돌아와 다시 가상현실에 접속했다. 가상의 삶이 펼쳐졌다. 직장에서 일을 하고, 잡지에 실을 환경 보호에 관한 사설을 썼다. 저녁 시간에는 신입사원인 여자를 만났다. 여자는 상의에는 흰 티셔츠에 갈색 자켓을 껴입고, 하의는 짧은 청치마를 입어 매끈한 다리를 내보이고 있었다.
  그런데 왜 그랬어요? 갑작스런 여자의 말에 남자는 의아한 목소리로 되물었다. 무슨 소리죠? 여자는 살풋 웃음을 지으면서 말했다. 왜 저에게 뱀파이어라고 고백하셨냐고요. 남자는 잠시 생각에 잠겼으나 만족할만한 대답을 생각해내지 못했다. ……음, 글쎄요. 모르겠군요. 세상에는 설명할 수 없는 일이 많지요. 여자는 마치 진짜 같은 가상의 꽃을 꺾어서 손가락으로 핑그르 돌렸다. 요즘 제가 그것 때문에 얼마나 분한지 아세요? 남자는 영문을 몰라서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러자 여자가 지체 없이 말을 이었다. 저는 네트 속을 돌아다니는 슬픈 영혼이라든가, 우주를 떠돌아다니는 먼 미래의 사념체라든가, 자신의 정체성을 고민하는 인공지능 프로그램이라든가, 그런 멋진 비밀이 하나도 없단 말이에요. 그래서 당신을 죽이고 싶을 정도로 부럽고 질투가 나요. 알겠어요?
  남자는 난처한 표정을 지은 채 말했다. 어쩌면 저 역시 당신을 질투하고 있을 지도 모른다는 생각은 안 해보셨습니까? 여자는 당당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네. 그렇게까지 감정이 풍부하지 않으실 거라 생각했어요. 맞죠? 그러나 그건 당신이 착각이에요. 그렇게 생각할 뿐이죠. 사실은 부러워하고 있지만, 스스로 부정하고 있는 거예요. 남자는 고개를 끄덕였다. 맞습니다. 감정이 풍부하지 않죠. 부러워하는 감정은 없습니다. 그리고 무의식 중에 그런 감정을 부정하고 있지도 않습니다. 여자는 새침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부정하지 않는다고요? 뱀파이어가 이런 가상현실을 한다는 게 증거 아니에요? 여기서는 모두가 동등해지죠. 노인이든, 어린이든, 외계인이든. 모두 동등한 위치에서 시작하고, 죽음도 겪지 않고, 남을 죽일 수 있지만 금세 되살아나죠. 당신이 여기서 뱀파이어 캐릭터로 설정해서 다른 사람들의 피를 빤다고 해도 아무렇지도 않아요. 당신은 얼마든지 뱀파이어 캐릭터로도 자유롭게 융화되며 살 수 있죠. 현실과 다르게 말이에요. 그래서 당신은 여기서 위안을 얻는 게 아닌가요? 남자는 이번에는 부정하지 않았다. 어쩌면 그럴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결국 이 가상현실은 허구입니다. 실체가 존재하지 않죠. 허무하고 무의미한 세계일뿐입니다.

  남자는 회사측 여자와 한 시간에 걸친 설전을 떠올렸다. 이 우주여행이 의미가 있어요? 어째서 그렇게 우주선을 타고 우주여행을 하고 싶으신 거죠? 가상현실로도 충분히 우주를 경험할 수 있지 않나요? 거기서도 얼마든지 우주를 바라볼 수 있어요. 뿐만 아니라 실제보다 더 광범위한 우주를 탐험할 수도 있죠. 태양계 끝까지 갈 수 있고, 그 너머도 가능하다고요. 그런데 어째서 이렇게까지 직접 우주선을 타려고 막대한 자금을 쏟아 붓는 거죠? 디저트를 먹으면서도 여자는 쉴새없이 말을 쏟아냈다. 남자가 매번 당황하지 않고 묵묵히 여자의 논리를 꺾으려 들었기 때문에 화가 난 것일지도 몰랐다. 남자는 이번에도 침착하게 대답했다. 허상과 실상의 구분은 의미가 있을 수도 있고 없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저에게는 큰 의미를 가집니다. 제 존재가 허상에 깃들어 있는 불합리한 존재기 때문에 더욱 더 이 세계의 진짜 모습을 보고 싶은 겁니다. 모든 것이 헛되고, 헛된 세계일지라도, 진리는 우주처럼 변함없이, 오롯이 존재합니다.
  남자는 상념에서 깨어났다. 쌀쌀한 공원. 여자의 날카로운 목소리가 들렸다. 그럼 저도 무의미한 건가요? 무의미한 세계에 있기 때문에? 여자는 벤치에 앉은 채, 자켓 주머니에 양손을 찔러 넣고 도발적인 시선으로 남자를 바라보고 있었다. 남자는 문득 실제 현실이나 가상현실이나 여자들은 자신에게 질문을 참 많이 한다고 생각했다. 그건 자신이 그만큼 그들에게 질문이 없다는 소리일지도 몰랐다. 어차피 곧 죽어 헤어져야 할 인간들이기 때문에 관심이 적은 탓일까? 남자는 차갑게 대답했다. 그건 스스로 판단해야 할 문제지, 제가 판단한다고 해서 그렇게 결정되는 것도 아니지 않습니까?

  며칠 뒤, 남자는 우주 유영 훈련을 받았다. 남자의 신체능력은 보통 인간보다 월등히 뛰어났기 때문에 우주공간 활동 능력, 오지 생존능력 테스트는 그리 어렵지 않았다. 완벽하게 테스트를 마치고 난 뒤 우주비행훈련센터 앞에서 무인 택시를 잡으려는 순간, 누군가 남자의 팔을 붙잡았다. 남자가 고개를 돌리자, 거기에는 가상현실 속에서 신입사원으로 만난 여자가 서 있었다. 남자는 지금이 실제 현실인지 가상현실인지 혼란을 일으켰다. 어째서 그녀가 눈앞에 있는 것일까? 게다가 게임 속 아바타가 실제 그녀의 모습을 투영한 것이었다니. 워낙 다양한 아바타가 지원되는 가상현실 게임이었기 때문에 남자는 그녀의 모습이 실제 모습일 거란 생각을 하지 않았다.
  보고 싶었어요. 여자는 눈웃음을 치며 말했다. 남자는 여자가 자신을 어떻게 찾았는지가 궁금했다. 여자는 별것 아니라는 듯이 말했다. 전 컴퓨터 프로그래머이자, 해커에요. 낮에는 프로그램 개발 회사에서 일하고, 밤에는 앨리스라는 닉네임으로 해커로 활동하지요. 당신 같이 특이한 사람을 찾는 것은 일도 아니죠, 뭐. 헤헤.
  남자는 뜬금없이 여자에게 모델을 제안했다. 드디어 캔버스에 그릴 대상을 찾은 것은 아니었다. 단지 무언가를 선물하고 싶었기에 생각난 것이 그림이었던 것이다. 여자는 흔쾌히 수락했다. 남자의 집에 처음 발을 딛은 여자는 마치 빈집 같다고 얘기했다. 남자는 어떤 면에서는 그 말이 맞을 거라고 대답했다. 여자가 의자에 걸터앉으면서 물었다. 누드에요? 안 씻었는데……. 남자는 고개를 저으며 캔버스를 앞에 두고 구도를 맞췄다. 여자가 질문을 던졌다. 그림을 배우셨나요? 남자가 대답했다. 아니요. 여자는 얕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그럼 초보 화가의 세계관이 담긴 명작이 하나 탄생하겠군요. 남자는 여자의 말을 무시했다. 여자는 인상을 찡그리고 있었다. 남자가 웃으라고 말하자, 여자는 계속 인상을 찡그린 채 대답했다. 왜요? 특이한 게 좋잖아요. 증명사진도 아니고, 꼭 웃어야만 해요? 웃고 싶지 않은데? 지금 제가 짓고 싶은 표정 그대로를 그리세요. 명령이에요. 남자는 그 누구에게도 명령을 받아본 적이 없다고 대답했지만, 여자는 그럼 지금 처음 받으라고 대꾸했다. 남자는 할 수 없이 목탄 연필을 집어 들고 캔버스에 첫 터치를 했다. 검은 가루가 묻어나는 굵은 선이 그어졌다.
  내 초상화를 그릴 때 무슨 생각해? 남자가 물었다. 이제 거리가 아닌, 넓은 저택에서 그림을 그리는 그녀는 긴 머리카락을 귀 옆으로 쓸어 넘기면서 슬쩍 미소를 지었다. 잔잔하면서도 고요한 미소를. 어떻게 하면 당신을 다르게 그릴 수 있을까, 생각해요. 남자는 표정을 바꿨다. 눈을 동그랗게 뜨고 놀란 듯이. 이러면 되는 거야? 아니요. 전 당신의 겉모습을 말하는 게 아니에요. 어떻게 하면, 당신 내면의 영혼을 그릴 수 있을지 고민해요. 남자는 어깨를 으쓱거렸다. 모르겠군. 그릴 수 있을까? 내면의 영혼이라는 게 있을까? 아무것도 없지 않을까? 모든 건, 사실은 존재하지 않는 게 아닐까?

  몇 시간이 흘렀는지 알 수 없었다. 다만, 여자의 초상화 밑스케치는 이미 끝나 있었다. 남은 것은 자잘한 세부선의 수정과 입체감을 살리는 채색 정도였다. 굳이 모델이 필요하지는 않았기 때문에 여자는 남자의 등뒤로 돌아가 자신의 모습이 그려진 그림을 감상했다. 이런, 저를 그린다면서 왜 미의 여신을 그렸어요? 여자는 스스로 말하면서도 민망했는지 피식 웃음을 터트렸다. 남자는 한 번 어깨를 으쓱거릴 뿐, 딱히 대꾸하지 않은 채 그림 작업을 계속했다. 여자는 남자의 어깨를 쓰다듬다가 그의 가슴까지 매만졌다. 고개를 숙여 그의 목을 감싸더니 살짝 혀를 내밀어 핥기 시작했다. 뱀파이어가 인간에게 물린다면 재미있겠어요. 남자는 짧게 대답했다. 그건 수치겠지요. 여자는 다시 한 번 그의 목을 핥은 뒤에 말했다. 저를 물어주세요. 남자는 곧장 대꾸했다. 왜요? 여자는 뒤에서 남자의 머리를 두 손으로 번갈아 쓰다듬으며 말했다. 어렸을 때, 저는 제가 특별한 사람이라고 생각했어요. 신이 선택한 사람이라고 생각했고, 세상은 저를 중심으로 돌아간다고 여겼죠. 주위 사람들은 전부 저를 위해서 하늘이 만들어준 존재라고 생각했고, 저는 어떤 일이 있어도 결코 다치거나 죽지 않을 거라 생각했어요. 죽기 전에 신이 하늘로 부르거나 새로운 세계가 도래할 거라고 생각했죠. 뭐랄까, 자신이 하고 싶지도 겪고 싶지도 않은 일은 절대 자신에게 닥치지 않을 거라 생각하는 경우가 많잖아요. 사고가 있었어요. 기계가 잘못된 건 아니었고, 사람들의 부주의 때문이었죠. 사람이 사람들을 죽인 셈이에요. 부모님과 언니가 죽었어요. 전 두 다리를 모두 잃었죠. 지금 이건 의족이에요. 물론 원래 다리보다 훨씬 뛰어난 능력을 가지고 있죠. 똑같은 사고를 겪어도 이제는 절단되지 않을 거예요. 그렇지만, 그 날 다리뿐만 아니라 모든 게 바뀌었어요. 세상이 저를 위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았고, 저는 한없이 연약하고 보잘 것 없는 존재라서 금세 허무하게 죽어버릴 거라는 사실이 생생하게 다가온 거예요. 체득했다고 할까요? 그래서 죽고 싶지 않아요. 저를 뱀파이어로 만들어 주세요.
  남자는 붓을 놓고 양 손을 머리 위로 올려 여자의 두 손을 맞잡았다. 여자의 손은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남자는 잡은 손에 힘을 주고 꽉 쥐었다. 뱀파이어가 된다는 건, 이미 죽는다는 거예요. 저는 이미 죽은 존재죠. 결코 살아있는 존재가 아니에요. 전 당신을 물 수 없어요. 당신을 죽일 수 없어요. 여자는 남자의 손을 뿌리쳤다. 제가 원하는 것이니, 양심의 가책 같은 거 필요 없어요. 남자는 코웃음을 쳤다. 양신의 가책이라니요? 몇 백년을 살아온 제게 그런 감정이 남아있다고 생각하나요? 그런 게 아니에요. 이제 더 이상 문다고 해서 뱀파이어로 만들 수 없어요. 이 백년 전부터 뱀파이어들은 그 능력을 잃고, 급속도로 수가 줄어만 갔어요. 이제 전 세계에 살아있는 뱀파이어는 몇 남지 않았죠. 수많은 뱀파이어들이 인간들에게 사냥당하거나 서로 죽이거나 혹은 불의의 사고로 사라져갔어요. 뱀파이어에게 남은 것은 멸망이에요. 우리가 보고 있는 세계는 당신들과는 달라요. 당신들은 2세를 낳으며 종족을 보존해 가겠지만, 우리는 무의미한 삶을 살아가며, 종족의 멸망을 지켜보고 있어요.

  남자는 우주선에 탑승했다. 사실 이 우주선은 우주관광을 목적으로 개발된 것은 아니었다. ‘LXZ-1012’라는 이름이 붙은 이 우주선은 최대 3명 밖에 탑승하지 못하는 소형 우주선이었다. 오래전에 러시아에서 국제우주정거장에 물품을 나르는 목적으로 만들어진 것이었다. 이 회사의 주력 관광 우주선은 최신식 우주선이 따로 있었다. 그러나 남자는 끝까지 이 우주선을 고집했다. 오로지 혼자서 타고 싶다는 이유 때문이었다. 낡은 탓에 정비에만 몇 달이 소요될 정도로 문제가 많았지만, 남자는 개의치 않았다. 마치 우주선이 돌연 폭발을 하더라도 상관이 없다는 태도였다.
  여자는 집으로 돌아갔다. 둘은 그 뒤로 다시는 실제로 만나지 않았다. 가상현실 속에서 계속 대화를 나눌 뿐이었다. 남자는 여자의 모습이 현실과 똑같은 것을 확인했기 때문에, 볼 때마다 현실과 가상현실이 혼동되었다. 점점 구분하기가 힘들어지는 기분이었다.
  어느날, 남자는 여자에게 주소를 알려달라고 했다. 완성된 초상화를 보내기 위해서였다. 그런데 여자의 표정이 미묘했다. 웃고 있는지, 울고 있는지 분간이 가지 않았다. 복잡한 심정인 것 같았다. 곧이어 들리는 그녀의 말소리는 차분하지만 어딘가 떨리고 있었다. 두렵지만, 이 길밖에 없었어요.
  여자는 영원한 생을 얻었다. 어쩌면 뱀파이어인 남자보다 더 오래 살지도 몰랐다. 남자는 가상현실 속에서 여자의 손을 맞잡았다. 따스한 촉감이 느껴졌지만, 저번에 집에서 쥐었을 때와 같은 느낌은 아니었다. 당연했다. 이건 감촉을 재현하는 것뿐이니까. 남자는 여자의 손이 차갑지 않다는 것이 이상했다. 여자는 냉동인간이었으니까. 손이 차가워야 할 텐데……. 그녀의 정신은 가상현실 온라인 게임 「지구」에 얼마든지 접속할 수 있지만, 지금 여자의 몸은 얼어붙어 지하 깊숙한 곳에 보관되어 있다. 여자는 훗날 먼 미래에 인류가 노화까지 극복하여 남자와 같이 영원한 육체를 얻게 되었을 때 동면에서 깨어날 거라고 말했다. 그 때에는 누구나 죽지 않을 텐데, 이 시대에 태어난 죄로 자신만 짧게 살다 죽는 것은 싫다고 했다. 남자는 할 수 없이 완성된 초상화를 스캔해서 여자에게 전송했다. 선물하려고 액자에 넣은 실제 그림은 자신의 집에 걸어두었다. 허전했던 빈 벽에 액자 하나가 채워졌다.

  남자는 마침내 지구를 떠났다. 홀로 우주선에 탑승할 때부터 자연스레 노래를 흥얼거릴 정도로 남자는 기분이 좋았다. 카운트다운이 시작되고 우주선이 출발하자 남자는 오랜만에 가슴이 두근거리는 느낌을 맛보았다. 신기했다. 우주선을 모방한 시뮬레이터를 통해 진짜 우주선이 이륙해 가속할 때와 똑같은 경험을 했지만, 그때와 느낌이 달랐다. 기억도 나지 않는 과거에 느껴던 희열을 경험하는 듯했다. 훈련 때의 불쾌감이 아닌 새처럼 하늘을 나는 쾌감. 이대로 온몸이 부서져버린다고 하더라도 기쁠 것 같았다. 모든 것에서 해방되는 느낌이었다. 이제 더 이상 중력이 나를 억압하지 못하리라. 누구도 내게 접근하지 못하리라. 아무도 없이 오로지 나만 존재하리라. 세계를 굽어보리라. 무한한 자유를 얻는 순간이로다. 세상이 파랗게 빛나다가 하얗게, 붉게, 노랗게 그러다 검게 물들었다. 몸이 붕 뜨기 시작했다. 벨트를 풀자, 더 이상 중력은 느껴지지 않았다. 가벼운 몸놀림으로 헤엄을 치듯 창가로 다가갔다. 창문을 가리던 엄폐물이 사라지고 또 다른 세계가 모습을 드러냈다. 새까만 우주와 그 속에 빛나는 새파란 지구. 자신이 태어나고, 몇 백년을 살아온 세계의 모습이 한 눈에 들어왔다. 거대한 새파란 빛 덩어리가 눈을 압도한다. 저 별이 폭발한다면? 아니, 세상 모든 흰 별들까지 모조리 폭발한다면 어떨까? 남자는 문득 그런 상상을 해보았다. 푸른 별이 거대한 폭발을 일으키며 산산조각이 나고, 모든 인류는 전멸한다. 텅 빈 우주. 그 속에 외계인이든, 뱀파이어든, 인공지능 로봇이든, 냉동인간이든 상관없이 모든 것이 허무하게 사라진다. 아무것도 남지 않는다. 애초에 아무것도 없었듯이, 다시 전부 없어진다. 우주의 시간 속에 작은 순간으로 남을 뿐, 사실은 없었던 것과 같다. 서버가 망가져 모든 데이터가 지워진 온라인 게임같이.
  태초에 시간과 공간이 없었던 무(無)는 한낱 가능성만을 품고 있었을 것이다. 그것이 발현되고 다시 사라지고 또다시 다른 모습으로 발현되고……. 어쩌면 자신이 상상한 모습대로 된 세계도 있었거나, 있는 중일 것이다. 어쩌면 자신이 최초로 달을 밟은 인간으로 살아가는 세계도 있었을 지도 모른다. 또 있거나 있는 중일 지도 모른다. 모든 세계는 의미가 없으며, 또한 의미를 잃어가고 어쩌면 의미를 채워가고 있을 수도 있다. 그것 자체가 전부 허무한 것일 수도 있겠지만. 지금 이 모든 게 존재하는 것인가? 아니, 이런 물음이 의미를 가지는가? 남자는 차분히 흰 빛과 파란 빛이 섞인 보석같은 지구를 응시했다. 그리고 준비해 간 캔버스를 설치했다. 이제야 정말 그리고 싶은 대상을 찾은 것 같다고 생각했다. 남자는 예전에 그녀가 말한 내면의 영혼이라는 게 있다면, 지구의 영혼을 그려보고 싶다고 생각했다. 세계의 바깥에서 남자는 지구의 초상화를 그리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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