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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 로망스

2005.12.08 04:5612.08

로망스



1

  시희는 오줌이 마렵다. 또 한편으로 그렇지 않다. 오줌이 마렵다는 느낌은 시희가 의식적으로 불러낸 것이다. 그 의지는 유와 유의 두 친구로부터 비롯되었다. 새벽의 밤공기는 아직 차다. 등교시간까지 한참 이른 시각이다. 시희와 유, 그리고 유의 두 친구는 아주 외지고 구석진 골목길에 들어서 있다. 어린아이는 물론 십대에서 삼십대까지 이르는 평범한 사람들은 이 시간, 이곳을 지나갈 턱이 없다. 뿐만 아니라 그 이상의 나이든 사람이나 폭삭 늙은 이들은 더욱이 눈에 띄지 않을 것이다. 오직 이 냄새나고 음침한 공간에는 시희와 유, 그리고 유의 두 친구인 노랑머리와 야구모자가 있을 뿐이다.

  당장 바지를 내려. 노랑머리가 명령하자 옆에 있던 야구모자가 끼득끼득 웃는다. 사실 이들을 마주쳤을 때부터 오줌이 조금씩 마려웠지만 시희는 간신히 참고 있다. 그들이 오줌을 마음 놓고 누라고 했을 때 오히려 안심이 되는 기분을 느낀다. 아무도 오지 않을 텐데 유는 골목길 끝을 자꾸만 주시하며 주변을 살피고 있다. 시희의 눈길이 유를 향하자 야구모자가 웃음을 멈추고 시희의 왼뺨을 세 번 내리친다. 시희를 때리는 그녀의 손은 우악스럽게 크고 못생겼다. 그래서 짝짝, 짝 하는 맑은 소리가 아니라 조금 투박한 소리가 난다. 잠시 머리가 흔들리고 벽이 흔들렸다가 이내 아래로 곤두박질친다. 시선이 향하는 공간마다 그곳은 차갑게 얼어붙는다. 어느 공간도 시희를 환영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어느 것도 시희를 도와줄 수 없다. 하지만 시희는 어떤 도움도 필요하지 않다. 시희가 적을 두고 있는 모든 공간은 시희의 마음을 처음부터 알고 있다. 그곳은 곧 그녀다.

  이윽고 엉덩이를 내밀고 쭈그려 앉아 오줌을 눈다. 뜨뜻하고 지릿한 냄새가 다리 사이로 올라온다. 담배를 입에 무는 유의 뒷모습을 주시한다. 유의 두 친구는 유에게서 담배를 건네받는다. 좁은 골목은 곧 희뿌연 연기로 가득해진다. 야구모자가 시희의 허벅지에 담뱃불을 댄다. 시희는 속옷이 발목에 걸린 채로 한쪽 벽에 기대 쓰러진다. 더 이상 갈 곳이 없다. 노랑머리가 시희의 허벅다리를 벌리자 야구모자가 하트 모양으로 살을 지진다. 살이 타는 냄새인지 노랑머리가 피는 담배 냄새인지 구분할 수 없다. 오줌의 지린내와 뒤섞인 담배 냄새는 차라리 낫다. 자신이 깔고 앉은 바닥이 이미 노랗게 물들여 있다는 것도 시희는 개의치 않는다. 견딜 수 없는 것은 유의 시선이다. 유는 시희를 바라보지 않는다. 지난해부터 유는 시희를 바라보지 않는다. 시희는 기대하는 것이 아무것도 없다. 단지 그녀가 다섯 시 방향으로 조금만 고개를 틀어 자기 쪽으로 눈길을 주었으면 한다.

  유는 공부를 잘 한다. 작년에 전학을 왔을 때부터 담임의 각별한 신임을 받아왔다. 수업에 자주 자리를 비우지만 어느 선생도 유를 찾지 않는다. 양호실에 다녀왔어요. 그 한마디면 담임을 비롯한 각 과목의 선생들은 모든 일을 순조롭도록 처리한다. 시희는 유의 눈과 혀에 최면술이 깃들여 있다고 생각한다. 유의 눈은 까맣고 입술은 아주 빨갛다. 그것들은 흰 얼굴 때문에 대조적으로 두드러져 보인다. 시희는 유의 얼굴에 특별한 흔적이 있음을 발견한다. 전쟁이 휩쓸고 간 폐허처럼 어두운 그늘이 져 있다. 누구에게나 비밀은 있는 법이다. 유의 그것은 피 냄새가 나는 폐허다. 유의 어둠 속에서 시희는 밀월의 달콤함을 느낀다.

  음악 선생은 유의 생김새조차 알지 못한다. 늘 그 시간에 없기 때문이다. 모두 음악실로 이동하는데 유는 마지막까지 교실에 남아 있다. 시희 또한 음악실로 가지 않는다. 혼자가 아니라는 것을 안 유는 자신의 공간을 경계의 색으로 물들인다. 시희의 공간도 그녀와 비슷한 색깔로 뒤바뀐다. 둘은 말이 없다. 누구도 자신의 공간 밖으로 나가려고 하지 않는다. 그 공간을 감싸고 있는 교실이란 물리적 울타리 밖으로도 서로 나갈 생각이 없다. 누군가가 먼저 이 공간을 깨뜨려 버리기만을 바라고 있을 뿐이다. 팽팽하게 오고가는 두 사람의 시선이 은근한 경각심을 불러일으킨다. 시희는 이런 분위기가 즐겁다고 생각한다. 유도 싫지 않아 보인다. 공간을 허물 수는 없다. 허용할 것과 그렇지 않은 것에 대한 경계가 적어도 시희에게 있어선 확연하기 때문이다.

  피아노 소리가 들린다. 복도 쪽 창가에 그림자가 서성인다. 시희는 곧 교감이라는 것을 알아채지만 미동도 않는다. 유 역시 마찬가지다. 교감은 헛기침을 하고 곧 지나친다. 피아노 소리에 맞춰 학생들이 로망스를 부른다. ‘하늘은 파랗게 말없이 개이고 구름은 멀리 흘러서 사라져 갈 곳을 모르고 바람 부는 대로 방황하는 소녀……’ 시희도 더듬더듬 노래를 부른다. ‘물방앗간 뒤의 어두운 곳에서 둘만이 즐기며 노는 십자가……’ 유는 시희의 노래를 따라한다. 두 사람의 멜로디는 일치하지 않고 엇나가서 돌림노래 같다. 유는 시희를 쳐다본다. 유는 어디선가 음악은 마음을 한데 묶는다는 우스운 소리를 들어본 적이 있다. 그 이야기에 동의하지 않는 바는 아니지만 가소롭지 않은가 생각한다. 동의하는 측면은 사람보다 사람이 남긴 것이 더 위대하다는 것뿐이다. 사람과 사람은 어떤 방식으로도 하나가 될 수 없다. 자신과 시희 또한 그 수많은 증거 중 하나가 될 거라고 확신한다. 그것은 왠지 모를 연민을 동반한다. ‘기쁨에 넘쳐 즐거워 떠누나, 천진한 마음이여.’

  이것은 살이 타는 냄새가 분명하다. 옷을 입어. 유의 친구는 명령한다. 시희는 속옷을 끌어 올리고 주섬주섬 바지를 입는다. 행동이 빠르지 못하다고 야구모자가 시희의 머리를 때린다. 옷을 입으라고 명령했던 노랑머리가 시희의 가방과 웃옷을 뒤지고 있다. 노란 지갑이 나오자 그 속에 있던 지폐만 챙기고 오줌을 지린 땅에 던져 버린다. 시희는 노란 지갑이기 때문에 얼룩이 생겨도 심하지 않을 거라는 생각을 한다. 유는 세 개째 담배를 물고 있다. 내 살이, 타는, 냄새를, 맡았을까.

  예전보다 훨씬 짧아진 유의 머리카락을 보고 시희는 손가락이 아프다고 느낀다. 무릎이 꿇린 채로 유를 올려다본다. 노랑머리가 시희의 이마를 발로 찬다. 그대로 뒤로 넘어간다면 아마도 목뼈에 이상이 생길 것 같다. 시희는 그녀의 올려진 발목을 잡고 버틴다. 노랑머리는 사정없이 시희의 뒤통수를 밟고 구타한다. 유의 힐끗 돌아보는 시선이― 아아, 시희는 아무래도 좋다. 저 아래 유의 담배꽁초가 떨어지는 것이 보인다. 그리고 골목을 빠져나가려 발길을 돌리는 유의 가느다란 발목이 시야에 들어온다. 야구모자의 운동화가 그녀를 따라가고 있다. 노랑머리는 시희가 바닥에 완전히 쓰러질 때까지 때릴 작정이다. 시희는 그것을 알고 있으면서도 끝끝내 바닥에 눕지 않는다. 아까 야구모자가 골목을 빠져나갈 때 유의 담배꽁초를 밟지 않은 것을 보았다. 시희는 마음이 지극히 안정된다.  

  시희는 기억하고 있다. 그날 담임은 방과 후 시희를 불러 손바닥 다섯 대를 때렸다. 음악시간에 음악실을 가지 않고 교실에 남아 있었다는 것이 그 이유다. 유는 시희와 교무실에 같이 내려오지 않았다. 수업이 끝나자마자 바로 호출당한 것이므로, 유가 먼저 매를 맞았을 리 없다. 시희가 교무실을 나간 후에도 유는 교무실에 불려올 일이 없을 것이다. 유는 분명히 가방을 싸들고 교실 밖으로 나갔다. 그리고 유가 자신을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시희는 예감한다. 기분 좋은 예감이다. 시희의 느낌은 곧 맞아떨어진다. 운동장 끝 느릅나무 아래, 유는 고개를 숙이고 서 있다. 시희는 유 옆에 나란히 선다. 두 사람의 공간은 역시 경계를 두고 있지만 긴장되지는 않는다. 시희는 하늘로 손바닥을 펼쳐 보인다. 바람이 분다. 느릅나무 잎가지는 소리를 내며 흔들린다. 땅은 움직이지 않지만 먼지가 일어나고 있다.  



2  

  무슨 일이 있어도 아버지는 틀리지 않다 ―라고 유는 생각한다. 자신의 몸은 어머니에게서 난 것이 아니라 아버지에게서 났기 때문이다. 유에게 있어 어머니라는 비중은 그다지 크지 않다. 어떤 이유이든 간에 어머니는 유를 버렸다. 반면 아버지는 유를 거두었다. 아버지의 세계가 곧 유의 세계이며 둘의 세계는 다른 어떤 것도 범접하고 들어올 수 없을 만큼 견고하고 단단하다. 적어도 유에게는 그렇게 여겨진다. “우리 공주님”하고 유를 안아 올리는 아버지에게 유는 “공주가 아니라 왕비에요”라고 꼭 충고한다. 유의 아버지는 웃으면서 “예, 왕비님”하고 정정한다. 그래도 아버지는 유에게 곧잘 “우리 공주님”하곤 한다. 그러면 유는 두 볼이 부어 “공주가 아니라 왕비”라고 다시 큰 소리로 알려준다.  

  사람이 영악하다는 것은 환영받을 일이다. 잇속에 애바르고 재바르다면 살아가는 데 손해 볼 일이 적다. 유는 어려서부터 새로운 사람을 사귀는 데 익숙해지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 사람들의 대부분은 유의 아버지가 데려온 여자들이다. 유는 그 여자들로부터 사생활의 많은 부분을 침해당한다. 유는 몹시 기분이 나쁘다. 여자들은 보통 유에게 어머니 행세를 하려 든다. 유의 고정관념으로 어머니란 존재는 아예 없는 편이 낫다. 매번 외양이 달라지는 이 가짜 어머니들은 더욱 그렇다. 그러나 열 살도 채 되지 않은 유가 조치할 수 있는 일에는 한계가 있다. 자신만의 영역을 지켜야 한다는 것, 어린 유에게는 필사적일 수밖에 없다. 유는 자연히 영악하고 약삭스러워진다. 타인에게 감정을 모두 드러내 보이면 당한다. 여자들은 남자들보다 속이기 쉽지 않다. 그녀들도 어린 유만큼 혹은 그 이상으로 약빠르다. 사람이 양면성만 가지고 있다면 그것은 얼마나 다행한 일인가. 문득 유는 그런 생각을 하면서 자기 자신을 지키는 데 투쟁적이 된다.

  부엌에서 자신을 위해 요리를 한다던 여자. 유는 한껏 웃어 보이며 음식이 맛있다고 해준다. 여자는 여유만만하다. 이 어린것에게 이만하면 합격점이라고 생각하겠지. 아버지에게 온 전화를 받기 위해 여자는 자리를 비운다. 유는 여자의 찌개 그릇에 길러오던 민달팽이를 넣는다. 유는 슬며시 조소한다. 냄비에 민달팽이들을 더 넣을 수도 있다. 하지만 저녁에 돌아오는 아버지가 식사를 할 수도 있기 때문에 그렇게 하지 않는다. 아버지가 푹 익은 민달팽이를 먹는 것은 싫다. 저 여자는 얼마든지 괜찮다. 여자의 온몸에 달라붙는 살색 원피스가 마치 민달팽이 같다. 전화를 마치고 돌아온 여자는 찌개를 몇 숟가락 들다가 입을 틀어막고 화장실로 향한다. 열한 살의 유는 자신의 방으로 올라간다.

  그날 밤 여자는 아버지의 방에 있다. 그 방에서 무슨 일이 벌어질 것인지 어린 유도 잘 알고 있다. 유는 할아버지의 방으로 간다. 할아버지는 자신의 침대에 유를 받아준다. 할아버지가 유의 등허리와 엉덩이를 쓰다듬을 때, 유는 특유의 포만감을 얻는다. 어려서부터 곧잘 할아버지의 이불 속으로 파고들었던 유는 이런 기분이 어색하지 않다. 일찍 초경을 시작한 유는 가슴이 조금씩 나오고 허리도 들어갔다. 할아버지는 “숙녀가 다 되었구나”하면서도 유를 쓰다듬는 손길을 멈추지 않는다. 마음이 한결 나아진 유는 이제 아버지의 방에서 일어날 일을 상상한다. 여자는 아버지의 어느 곳을 만지고 있을까. 유의 팬티는 이미 축축하게 젖어 있다. 할아버지가 자신의 상태를 알고 있을까. 할아버지가 자신의 깊은 곳까지 손을 댈 리는 만무하다. 왜냐하면 유가 자신의 아들의 딸이기 때문이다. 할아버지의 품에 안겨 있으면서 아버지를 상상하는 것은 묘한 쾌감을 일으킨다. 한편으로 아버지의 방에 있는 그 여자에 대한 증오심으로 유는 가슴이 떨린다.

  인 체크. 유의 아버지는 자신의 아버지에게 당신이 위기임을 선언한다. 체스에서 가장 강한 힘을 가진 퀸이 포로가 되는 동시에 킹은 궁지에 몰리는 것이다. 퀸의 부재는 킹의 죽음과 직결된다. 킹을 지킬 힘을 가지고 있는 것은 오직 퀸이다. 비숍과 나이트, 룩 따위는 퀸이 하는 일을 보조할 뿐이다. 퀸이 없기 때문에 킹은 위험에 처하고 만다. 아버지의 무릎에 앉은 유는 포로로 잡힌 할아버지의 화이트 퀸을 손에 꼭 쥐고 있다. 화이트 퀸은 자신을 놓아달라고 말한다. 애원해 봐. 유는 몸을 들썩거리며 웃는다. 화이트 퀸은 도도하게 고개를 쳐든다. 유는 웃음을 멈춘다. 넌 이제 여왕이 아니잖아. 화이트 퀸은 입을 여전히 다문 채다. 자신도 모르게 유는 얼굴이 일그러진다. 화이트 퀸을 쥔 주먹에 더 힘이 들어간다. 손바닥에는 패배하기 직전의 여왕의 흔적이 남는다. 가벼운 통증. 유는 그제 잘라버렸던 페르시안 고양이의 꼬리를 생각한다. 그 고양이는 같은 반의 친구의 것이다. 그 친구는 다른 친구들과 함께 유의 집에 자주 놀러온다. 어느 날, 유의 보물인 아버지의 사선 무늬의 붉은 넥타이를 그 아이가 가위로 잘라버렸다. 그녀가 왜 그랬는지 유는 알고 있다. 유는 언제나 붉은 넥타이를 목에 감고 알몸으로 자기 때문이다. 한낮의 선잠에서 깨어나 보니 그 친구가 옆에 서 있었다. 그녀는 아버지의 넥타이를 빼앗으려고 한다. 빼앗기지 않으려는 유의 힘도 만만치 않다. 급기야 그녀는 가위를 들고 넥타이를 자른다. 유는 소리를 지른다. 눈에는 독기가 서린다. 그녀는 유의 집을 서둘러 빠져나온다. 유는 그 뒤로 뜬눈으로 밤을 지새운다. 며칠 밤을 그렇게 뒤척이다 어느 새벽, 그 친구의 집으로 달려간다. 유의 손에는 빨간 넥타이를 네 조각으로 잘라냈던 가위가 들려있다. 막무가내로 초인종을 누르자 친구의 어머니가 파자마 바람으로 나온다. 유는 친구의 방안으로 돌진한다. 친구가 어떻게 손쓸 틈도 없이 유는 자신이 마음먹은 그대로 행한다. 유는 당시를 회상하며 웃는다. 이윽고 할아버지는 수세에 몰렸음을 알고 두 손을 든다. 유는 적을 겨냥하고 있던 블랙 비숍을 들어 화이트 킹을 쓰러뜨린다. 승리감에 도취된 아버지는 그런 딸이 귀여워 어깨를 쓰다듬는다. 체크메이트.

  애야, 어차피 중학교 1년은 다른 학교에서 보내게 할 생각이었단다. 공부도 잘 하고 뭐 하나 빠지는 것이 없으니 너무 버릇이 없을까 봐. 그런데 이제는 이 학교에서 편하게 지내도 될 것 같구나. 친구들도 새로 사귀고 모든 것을 새로운 마음으로 시작하렴. 고양이를 사줄 수도 있단다. 그해 겨울이 끝나고 새로운 학기가 돌아올 즈음, 할아버지는 자신이 교감으로 있는 학교로 유를 전학시킨다. 유는 할아버지의 말을 잘 이해할 수 있다. 그리고 열네 살 소녀다운 미소로 화답한다. 할아버지, 고양이는 필요 없어요.  

  자신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유는 달리 알 방법이 없다. 무엇이 갖고 싶은데 못 가진 적이 없기 때문이다. 반면 자신이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잘 안다. 원한다는 것과 필요하다는 것은 다르다. 전자는 감정이 앞서지만, 후자는 감정보다 목적이 앞선다. 간혹 원하는 것과 필요한 것이 겹치는 경우도 있다. 이는 대부분 ‘원하기’ 때문에 갖는 감정일 경우가 많다. 원하기 때문에 나중에 목적성을 갖게 되는 것이다. 목적은 붙이기 나름이다. 우선 원한다는 것과 필요하다는 것은 감정적이라는 데 근본이 같다. 목적이 먼저 성립되었다면 그것은 분명히 ‘필요하다’는 이성적 판단이다.

  유에게는 애완동물이나 친구가 필요 없다. 사람으로 따지면 아버지와 할아버지를 제외한 친인척 및 그 외의 타인은 불필요하다. 유가 돌을 지내기도 전에 모습을 감춘 어머니는 말할 것도 없다. 하루 세끼의 식사와 점심시간 이후의 간식시간 외에 더 이상 먹는 행위는 필요 없다. 어깨 아래로 내려오는 머리카락은 지저분하다고 생각한다. 수업시간에 자리에 곧게 앉아 있는 것은 불필요하지만 성적은 최상위권을 유지해야 한다. 학습서 이외의 책은 일주일에 한 권 정도 읽어두는 것이 좋고 한 달에 두어 번 오페라나 뮤지컬 등의 무대공연을 관람해야 한다. 그래야 감성이 길러지기 때문이다. 열다섯 살의 유는 감성이 있어야 필요한 것과 원하는 것을 명확하게 구분 짓는 판단력이 길러진다고 믿는다. 만약 그것이 편향되면 스스로를 지탱하는 데 무리가 올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런 측면에서 같은 반이었던 친구의 고양이의 꼬리를 자른 것은 이성적으로 합당하지 못했다고 생각한다. 유는 자신이 필요하기 전까지는 그 친구와 화해하지 않을 생각이다. 그것은 이성적인 생각이기 때문에 안도의 한숨을 내쉰다.

  새로운 학교로 전학을 한 후 몇 개월이 지난다. 유는 휴양을 온 것처럼 한결 마음이 편안해진다. 톱을 달리는 성적은 여전히 확고부동하다. 수업은 원하는 것만 들으면 된다. 어느 선생도 유를 꾸중하거나 탓하지 않는다. 비행을 일삼지도 않을 뿐더러 외양도 단정한 학생인 동시에 교감의 손녀딸이기 때문이다. 그 무엇보다 선생들에게 중요하게 각인되는 것은 유가 공부를 잘 한다는 사실이다. 교감의 손녀딸이라는 것은 신중하게 검토되지 않는다. 어느 선생이나 그렇게 말한다. 게다가 유는 시희라고 하는 동급생과 사귀고 있다. 시희는 어느 누구하고도 어울리지 않는 학생이다. 말을 더듬는데다 얼굴에 화상흉터가 있어 학생들이 일부러 다가가는 경우는 거의 없다. 선생들은 입을 모아 유의 사교성을 칭찬한다. 유는 이 사실을 아는지 모르는지 시희와 지내는 시간이 많다. 솔직히 유가 타인에게 투자하는 시간이 그토록 많았던 적은 일찍이 없다. 적어도 여름방학이 시작되기 전까지는 그렇다. 여름방학이 시작되면서 유는 이전의 자신을 찾은 듯한 느낌을 받는다. 유는 이전 그 고양이의 주인에게 화해의 뜻으로 야구모자를 선물한다. 친구는 조금 망설이다가 야구모자의 상표를 보고 받아들인다. 그해 여름은 너무 더웠을 뿐 아니라 지리멸렬하였다.



3

  시희는 절뚝거리고 있다. 집으로 가지 않고 온 길을 되돌아간다. 걸어서 가기에 집이 너무 멀다. 차비조차 없다. 여기서는 이모의 가게가 더 가깝다. 피와 땀 탓인지 비릿한 냄새가 진동한다. 가게 내부는 붉은 조명이기 때문에 고개만 들지 않으면 된다. 시희의 이모는 시희를 자세히 쳐다보는 일이 없다. 상처는 들키지 않을 것이다. 설사 이모가 알아차린다 하더라도 별다른 말이 없을 것을 시희는 알고 있다.

  한집에서 있으면서도 두 사람은 얼굴을 마주할 일이 거의 없다. 시희가 등교하기 직전에야 이모는 가게를 닫고 들어온다. 방과 후 조카가 돌아와도 이모는 자신의 방에서 꼼짝하지 않는다. 잠으로 체력을 보충할 때가 대부분이지만 가끔 손님과 함께 있는 경우도 있다. 저녁 아홉 시가 되면 이모는 시희에게 만 원을 쥐어주고 가게로 나선다. 이모의 눈은 언제나 붉다. 화장 탓인지 원체 눈에 물기가 많아서인지 알 수 없다. 손님이 이모의 방을 종일 차지하고 나가지 않을 때도 있다. 이모가 가게로 가고나면 그들은 대다수 시희를 끌어안는다. 시희는 아무런 행동도 하지 않는다. 처음부터 끝까지 꿈틀대는 것은 그들이다. 일을 마치고 나면 손님은 다시 이모의 방으로 들어가 방주인이 돌아오길 기다린다. 이모는 돌아오자마자 씻지도 않고 오래도록 방에서 나오지 않는다.

  시희가 이모의 가게를 찾기 시작한 것은 작년 칠월부터이다. 그날에도 손님은 이모의 방에서 홀로 남아 있었다. 밤이 깊어지자 남자는 뱀처럼 기어 나온다. 시희는 그가 자신에게 물어올 것을 알고 있다. 이름은 무엇이냐, 나이는 어떻게 되느냐, 얼굴은 왜 그렇게 되었느냐. 그러면서 손목을 부여잡고 끌어당길 것을 알고 있다. 남자는 짐짓 웃고 있지만 힘은 거세다. 시희는 웃는다. 시희의 목에 남자가 얼굴을 묻을 때 그녀는 남자의 옆구리에 과도를 꽂는다. 남자가 외마디 비명을 지르고 쓰러진다. 그가 곧 일어날 것을 알고 있다. 시희는 앞으로 일어날 두 가지 일을 예상한다. 그가 밖으로 뛰쳐나가거나 자신에게 폭력을 휘두르거나. 후자일 가능성이 더 크므로 시희는 선수를 친다. 그의 등에 한 번 더 과도를 꽂고는 맨발로 뛰어 나간다. 그 시각 그녀가 갈 곳은 한 군데밖에 없다.

  시희에게선 시큰한 내가 풍긴다. 이모는 땀에 젖은 조카를 흘긋 쳐다보고 만다. 담배 연기가 자욱한 복도에 그대로 시희를 세워둔다. 여자들의 노래 소리가 들리고 남자들은 술에 취해 비틀거린다. 다섯 평이 조금 넘는 공간에 손님들이 혼잡하게 오간다. 그러나 시희의 시야에는 카운터에 서 있는 이모만이 들어온다. 정확히 이모의 미간에 잡혀 있는 두 개의 주름살을 아까부터 주시하고 있다. 서른다섯 살의 이모는 실제 나이보다 더 들어 보인다. 이모의 공간은 시희를 완전히 무시하고 있다. 이모는 마치 숨을 쉬지 않는 것 같아 보인다. 이모가 발을 딛고 서 있는 곳은 무중력 상태로 존재한다. 이모의 모든 체액은 몸 구석구석 고루 퍼진다. 얼굴이 붓고 관절 사이의 간격은 약간 벌어지면서 몸이 늘어난다. 심장, 폐, 간 따위를 움직이는 생체에너지가 조금씩 활력을 잃는다. 이모의 노출된 가슴은 고무처럼 늘어나면서 윤기가 사그라진다. 지난초봄 새벽 불을 켜놓고 자는 이모를 본 적이 있다. 옷을 벗다 말았는지 발목에 구겨진 원피스를 걸어둔 채다. 땀을 흘리며 노곤한 표정으로 잠든 이모의, 흉터가 선명한 배. 납작하게 들어간 그것이 오르락내리락할 때마다 살아 있다는 생의 증거를 찾는다. 시희는 그 배를 만지고 싶은 충동을 느낀다. 그 배 아래 자신의 고향이 있다. 조명이 점차 붉어진다. 시희의 눈에 눈물이 어린다. 이모는 소파에 앉으라고 짤막하게 명하고 어딘가로 사라진다. 그 후에도 시희는 새벽 늦게 이모의 가게를 찾곤 한다. 그러나 이모로부터 특별한 제지를 당한 적은 없다.  

  시희는 이모 앞에서 되도록 걷지 않으려고 한다. 절뚝거리는 것을 보이지 않기 위해서다. 미적거리고 서 있는 시희에게 이모는 카운터의 지폐뭉치를 꺼내 만원을 빼낸다. 이모에게 돈을 건네받으면서 시희는 이모가 자신을 바라보고 있지 않다는 것을 깨닫는다. 낙담하는 연회색 대기가 이모를 감싼다. 그 빛깔은 시희로부터 파생되었는지 모른다. 조명이 점차 붉어진다. 이모의 눈은 더 붉다. 시희는 고개부터 돌려 이모에게서 서서히 등을 돌린다. 느린 동작으로 가게를 나선다. 붉은 조명이 뒤통수까지 따라붙어 뜨겁게 가라앉는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 택시를 기다리면서 시희는 욱신거리는 허벅지를 한 손으로 옥죈다. 노랑머리가 담배로 지진 흉터자국이 하트 모양이었던 것을 기억한다. 유가 시켰던 걸까. 시희는 숨을 가다듬으면서 허벅지 안쪽을 쓰다듬는다. 무릎 아래와 발뒤꿈치에도 비슷한 모양의 흉터가 있는 것을 생각한다. 무릎 아래 아무렇게나 부풀어 오른 흉터 자국은 이제 하트 형태를 띠지 않는다. 그것은 무척 아쉬운 일이다. 시희는 집으로 돌아가자마자 발뒤꿈치에 있는 상처가 그때 모양을 유지하고 있는지 확인해 봐야겠다고 생각한다. 노랑머리와 야구모자가 발뒤꿈치에 생채기를 냈던 것은 작년 여름이다. 노랑머리는 염색을 하지 않았고, 야구모자는 오늘 봤던 모자를 쓰고 있었다. 야구모자와 유는 꽤 오래 전부터 친밀한 사이인 것 같다. 왜냐하면 야구모자는 늘 유의 머리카락을 만지작거리며 유 또한 그것을 거북해하는 기색이 없기 때문이다.

  ‘유예기간’이라는 것에 대해 유가 말했던 것을 시희는 기억하고 있다. 유는 타인이 자신의 맨살을 만지는 데에는 특정 신체부위마다 유예기간이 있다고 했다. 그중에서도 머리카락은 유예기간 5년이다. 과정과 계기가 어찌되었든 5년 이상을 알고 지낸 지인은 유의 머리카락을 만질 수 있다. 시희가 기억하고 있는 신체부위의 유예기간은 머리카락과 눈뿐이다. 눈은 자그마치 10년이라고 했기 때문이다. 머리카락은 그것의 이분의 일이어서 기억하고 있다. 유는 자신이 만나는 모든 사람들마다 언제, 어디서, 어떻게 만났는지 정확하게 안다. 유의 기억은 단 한 번도 틀린 적이 없다. 유예기간에는 어떤 예외도 두지 않는다. 그러나 유의 모든 지인이 그러한 유예기간을 알고 있을 리 없다. 유는 타인의 살갗에 자신이 닿지 않도록 조심한다. 상대방이 고의로 부딪친 것이 아니라고 해도 마찬가지다. 자신의 영역을 타인에게 절대 허용하지 않는 것이다. 그 유예기간이 무너졌을 때는 결코 그냥 두고 넘어가지 않는다. 예를 들어 대청소를 하다가 우연히 유의 팔에 부딪친 동급생은 그 이후 각별히 조심해야 한다. 어느 체육시간에 유의 배구공이 그 동급생의 팔만을 겨냥할지 모르기 때문이다. 유의 그런 태도에는 평생의 신조와도 같은 단호함과 자부심이 깃들어 있다. 시희에게는 유의 그것이 이 세상 그 무엇보다 순결하고 아름다워 보인다.

  시희는 여태 그래왔던 것처럼 유가 자신을 냉정하게 다루어주었으면 한다. 유의 아름다움을 따라갈 수 없다는 것을 시희는 안다. 또한 유보다 강해질 수 없기 때문에 언제나 보호받기를 원한다. 유에게서 보호를 받기 위해서는 ‘유가 보는 앞에서’ 가해를 받아야만 한다. 유 모르게 받는 위악은 필요 없다. 악은 진짜 악이어야 하며, 선은 진짜 선이어야 한다. 진실만이 유가 자신에게 다가오게 할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시희가 받는 시련은 더욱 혹독해져야 한다. 하지만 유가 자신의 눈과 마주치지 않는 것은 견딜 수 없다. 온몸으로 유를 느낄 수 있는 힘의 근원은 ‘그것’에 있다. 바다의 눈물 같은 검푸른 아우라. 그리고 유의 눈.

  소낙비가 내리기 시작한다. 땅바닥과 세차게 맞닿은 빗방울이 다시 튀어 오른다. 날카로운 빗소리는 시희를 책망하는 것 같다. 이 세계에서 비껴나기 위해서 태어난 신의 부속물이라고 탓하는 것 같다. 시희는 주머니 속의 만 원권 지폐를 손으로 꼬깃꼬깃 구긴다. 그리고 로망스를 부른다. ‘따뜻한 말소리 지금은 안 들려. 울면서 불러도 그대의 모습은 찢겨져 사라져, 사랑의 노래를 누군가 노래하네…….’ 시희는 다른 한 손으로 자신의 머리카락을 만지작거린다. 차가운 물기가 자신의 손가락으로 전이된다. 찌릿하게 전기가 흐르는 것 같다. 유를 생각한다. 유를 생각한다.



4

  티볼리에 가본 적이 있니? 유와 시희는 나란히 누워 있다. 느릅나무 아래에서 두 사람은 어떤 이야기도 할 수 있다. 마치 밀회를 나누듯 둘만의 장소가 되어버린다. 시희는 느릅나무 위로 쏟아지는 햇살을 맞잡는다. 주먹 안에서 그 열기를 식힌다. 시희는 유의 이마에 손바닥을 펴고 식은 빛을 뿌린다. 유는 눈을 감았다가 뜬다. 시희는 전학생과 친구가 된 것이 기쁘다. 교실에서 유가 처음으로 말을 붙인 것이 자신이라는 것을 안다. 14년 동안 살아오면서 유와 같은 사람은 본 적이 없다.  

  그곳에 빌라 데스테라고 하는 분수정원이 있대. 언젠가 사진을 본 적이 있어. 그곳에 있는 분수들은 마치 무덤 같았어. 물이 하늘 높이 치솟고 있었지. 강은 위에서 아래로 흐르지만, 분수는 위로 솟아올라. 자연의 섭리를 온몸으로 거부하는 거야. 그것은 뭐랄까, 정화되는 듯한 느낌이었어. 유가 말을 할 때마다 입에서 달금한 우유냄새가 난다. 시희는 유의 눈이 깜빡이는 것을 본다. 유는 종종 무방비 상태이다. 그렇게 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시희는 유의 영역으로 내딛는 것을 그만둬버린다. 시희는 넘어선 안 되는 선을 알고 있다. <너의 의지대로>. 그것이 시희가 유에게 원하는 것이다.

  그래서 죽게 되면 그곳에 묻히고 싶다고 생각했어. 유는 손을 들어 시희의 얼굴을 만진다. 까칠할 것 같은 화상흉터는 말랑말랑하다. 손가락 끝으로 유의 영역이 시희에게로 흘러 들어온다. 유의 공간으로 시희는 초대받는다. 유는 시희에게 있어 완전한 타인이면서 아니기도 하다. 그만 두라고 말하고 싶어도 시희는 자신에게 그럴 자격이 없다고 생각한다. 유를 가로막는 것은 불가능하다. 자신뿐 아니라 모든 사람들이 유를 막을 수 없다. 유와 시희의 시나리오는 거의 완성 단계에 와 있다. 제안과 초안은 유가 했고 시작은 시희가 했다. 당초 시희가 마무리를 맡겠다고 했지만, 유는 고개를 내젓는다. 시작은 아무렇게 해도 되지만 마무리는 그렇게 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 유의 주장이다. 종국의 완결미는 자신만이 나타낼 수 있다고 말한다. 유는 언제나처럼 잘 해낼 것이기 때문에 정말이지 따라갈 수가 없다 ―라고 시희는 생각한다. 유가 시키는 대로 이야기의 시작을 더듬거린다. 뼈대만 앙상한 시놉시스에 유가 살을 붙인다. 마치 창조주라도 되는 것처럼.  

  피부가 하얀 스무 살의 한 여자가 있다. 여자가 임신을 확정 진단받은 날, 여자의 애인은 그 길로 연락을 끊고 잠적한다. 한 달여를 찾아 해맨 끝에 다방 레지와 동거를 하고 있는 애인을 발견한다. 남자는 여자의 아직 밋밋한 배를 보고 힐쭉 웃는다. 그 새끼가 내 새끼라는 걸 어떻게 알아? 고래심줄보다 질긴 지독한 년. 남자는 홧김에 손을 들었다가 자신의 배부터 감싸 쥐는 어미의 본능을 보고 욕설을 내뱉는다. 방 한쪽 구석에서 벌거벗은 다방 레지는 소리 높여 웃는다. 자기, 하던 거 계속 안 할 거야? 한밤중 여자는 애인과 다방 레지의 집에 불을 놓는다. 불은 어둠을 뚫고 연두색 창틀을 집어 삼킨다. 틈과 틈 사이로 자신의 생명력을 마음껏 내뿜는다. 불 앞에서 떠나지 않고 웃어대는 여자는 필사적으로 죽어가는 부나방 같다. 여자의 뱃속으로 붉은 기운과 열기가 들어찬다. 아니, 뱃속의 아기가 기운차게 빨아들이고 있다. 여자는 그대로 정신을 놓는다. 얼마간의 시간이 지나고 여자는 자신이 있는 곳이 정신병원이라는 사실을 깨닫는다. 감옥으로 연행되는 대신 그곳에 감금된 여자는 정확히 팔 개월 후 여자아이를 낳는다. 아이는 고아원에 맡겨진다. 여자는 여자아이가 세 살이 될 무렵 사회로 환원된다. 여자는 아이를 찾는다. 하지만 아이가 어디에 있는지 알아내는 것을 불가능하다. 여러 고아원을 전전하던 아이가 어느 중산층 가정에 입양된 것이다. 고아원의 입장은 단호하다. 여자는 아이가 있었던 마지막 고아원에서 얼굴에 화상흉터를 입은 여자아이를 발견한다. 여자의 아이를 입양시켰다는 말은 거짓말이다. 나는 아이를 기를 자격도 없다는 것이지. 여자의 눈이 빙글빙글 웃는다. 애야, 이리 온. 맛있는 거 줄게. 얼굴에 화상흉터를 가진 여자아이는 여자가 주는 과자를 잘도 받아먹는다. 여자의 내장 안쪽에서부터 열꽃이 피어오른다. 열꽃은 처음부터 거기 있었던 것처럼 여자의 배 밖으로 나와 깊숙이 박혀버린다. 여자는 손톱을 세워 자신의 흉터를 북북 긁는다. 여자는 배를 긁었던 손을 내밀어 아이의 손을 맞잡는다.

  유는 시희에게 머리를 잘라달라고 말한다. 내키는 대로 잘라줘, 꼭 네가 해야 해 라고 말한다. 시희는 조금만 더 시간을 달라고 하고 싶다. 하지만 그 어떤 것도 유를 막을 수는 없다. 설사 그럴 수 있다고 하더라도 자신이 그래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유는 시희 이야기의 결말을 알고 있다. 이야기 속의 여자는 좀 더 처절하고 퇴폐적으로 당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것은 유가 바라는 것이기 때문에 시희 또한 원하는 바이다. 유는 이 세상의 모든 어미에 대하여 의심을 품고 있다. 청결하고 곧은, 그리고 고운 증오. 자신의 욕기를 채우기 위해서라면 자식에게 무슨 짓이든 하는 것이 바로 어미란 것이다. 사회에서는 그것을 고결한 희생이라며 그들을 찬양한다. 결국 자식에게 전가되는 것은 어미의 찌꺼기이다. 아주 오래 전 자신과 시희가 만날 수 있었던 근거를 유는 그것에서부터 찾고자 한다. 시나리오에 따라 유의 어머니에게서 시희가 컸다는 사실은 용서받지 못할 죄이다. 어미의 욕망과 그것에 따른 꼬드김을 받든 시희는 유의 푸른 증오를 고스란히 받는다. 그럼으로써 시희는 유에게서 ‘유’를 받는다.

  그날 밤 시희는 유를 따라 병원에 간다. 유의 아버지를 만나기 위한 것이다. 그는 얼마 전 교통사고로 입원했다. 시희와 유가 병실을 찾았을 때 유의 아버지는 깊이 잠들어 있다. 유는 아까부터 무표정하다. 시희는 유의 뒤에 서 있다. 유의 공간은 닫혀 있다. 유 아버지의 공간이 유의 영역과 만났기 때문이다. 유는 아버지의 상태를 잘 알고 있다. 그저께 간호사의 차트에 ‘흉추 5번 부위 척추신경 완전 손실’이라고 써 있는 것을 봤다. 그는 하체의 통증이 극심하기 때문에 통증완화제와 안정제를 많이 복용한다. 하지만 이것도 잠깐이다. 하체의 감각은 이제 곧 완전히 마비될 것이다. 그것은 유에게 내면의 평온과 폭풍을 함께 몰고 올 것이다. 유는 아버지의 이마에 입을 맞춘다. 유는 머리 때문에 마치 남자애 같다. 시희는 유의 머리를 잘 자르지 못한 자신의 손을 원망한다. 유는 머리를 당장 다듬지 않을 것이다. 시희가 유에게 남긴 유일한 흔적이므로. 시희는 덮개를 열고 유의 아버지 옆에 눕는다. 이로써 유의 공간을 체험한다. 시희의 마음이 더 없이 안정된다. 고개를 돌려 자신의 옆에 있는 남자의 옆얼굴을 본다. 유의 고운 선이 묻어나는 것 같다. 유는 두 사람이 나란히 누워 있는 것을 똑바로 바라본다. 시희와의 유희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유는 또 다른 시나리오를 준비할 것이다. 그리고 문을 소리 나지 않게 닫고 병실을 나간다. 이것은 자신이 응당하게 받을 죄라고 시희는 생각한다. 유와 단둘이 교실에 남아 어눌하게 불렀던 로망스가 귓전을 울린다. 시희는 입가에 미소를 함빡 머금은 채, 눈을 감고 암흑 속으로 빠져든다. ◈
제이
댓글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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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배명훈 05.12.08 14:13 댓글 수정 삭제
    예사로운 로망스는 아니네요. <비 오는 날> 같은 손창섭의 단편들처럼, 무의미한 세계에 던져진 자아들이 자기의 삶을 좁은 자신만의 공간에 구축하네요. 시희의 육체는 세계와 자아를 매개하지만, 세계가 무의미할 때 육체에 가해지는 고통과 수치도 무의미하네요. 시희의 실존은 방 구석에서 비로소 의미를 갖기 시작하지만, 남들보다 좀 더 일찍 깨어난 유의 자아는 그 단칸방보다도 좁은 자신의 육체에 스스로를 가두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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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06.01.22 03:20 댓글 수정 삭제
    흔하디흔한 문구 '치명적 사랑' 이 생각나네요. 저걸 사랑이라고 할 수 있을런지 모르겠지만, 그것의 일종이라고 짐작합니다. 세상과 단절하여 함께 침전하는 그들에게 주어지는 건 역시 고립과 절망뿐인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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