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밀번호를 잊어버리셨나요?

단편 성스러운 외출

2005.11.04 01:4011.04

꽤 유쾌한 저녁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유린은 도저히 유쾌할 수 없었다. 그녀는 키보드를 두드리던 손을 멈추고 오른 쪽에 놓인 머그컵을 쥐었다. 그리고 다른 손으로는 피곤한 눈두덩을 눌렀다.
기자채용통지메일이 날아온 날에 친구가 선물한 버섯무늬 머그 컵을 이마에 가져다댔다. 안에 가득 담긴 아이스커피가 찰랑거렸다. 그녀는 아이스커피를 조금씩 마시며 자신이 쓴 기사의 일부분을 다시 읽어 내렸다.
[……한국여성총연합(이하 한여총)은 북한을 비방하기에 이르렀다. 발단은 2003년 대구유니버시아드대회의 미녀응원단을 문제 삼은 한 인터넷신문사설이었다. 한여총은 북한에게 ‘여성을 정치적 무기로써의 도구로만 사용한다.’ ‘한국이 남성에 의해 주도된다는 착상에서 만들어진 전근대적인 군사작전.’ 등을 입에 올리며 언론을 통한 공격을 멈추지 않았다. 그러나 2년여 간에 걸친 ‘폭격’의 최종적인 요구사항은 ‘미남응원단을 내보내라.’이었다. 공식석상에서 미남응원단요구에 대해 비아냥거린 야당대표가 다음날 사체로 발견되어 1면 기사로 다루어 졌었다. 2년 동안 한여총은 언론과 정계를 완전히 장악한 것 이었다…….]
“……”
그 뒤는 극단으로 치달았다. 북한까지 지배한 한여총은 즉시 여성차별철폐위원회 CEDAW의 회장을 맡았으며 이에 자극 받은 각 국의 여성단체들은 더욱 적극적이고 공격적인 활동을 펼쳤다. 그리고 전 세계의 지배층은 여성으로 바뀌었다.
불과 60여 년 전의 일이다. 21세기가 중엽을 넘어서려고 하는 지금까지 여성우월주의는 사회의 확고한 사상으로 자리 잡고 있다. 남자는 소수를 제외하고는 일정구역에 격리되어 살게 되었다.
그런데 약 7개월 전, 그런 사회의 흐름 속에 유린이 현 세태를 완전히 부정하는 내용의 기사를 썼다. 여자와 남자는 동등하며 남자에 대한 차별대우를 그만두어야 한다는 내용이었다.
그 탓에 그녀는 한국 최고의 신문 ‘여성일보’에서 쫓겨나 3류 잡지에 기사를 연재하고 있는 실정이었다.
물론 그 기사가 사회적 센세이션을 불러 일으켜 그녀는 일약 유명인이 되어 버렸고, 모험을 감행한 잡지는 베스트셀러를 웃도는 판매고를 올렸다. 유린은 감사장까지 받았지만 어쨌든 3류는 3류. 하나도 기쁘지가 않았다.
그 것도 몇 개월 전의 일. 지금 기사는 그녀가 봐도 도저히 흥밋거리가 되지 못하는 것 같았다.
“……젠장.”
그녀는 자신이 읽었던 부분을 삭제하려다가 짜증이 치밀어 전체삭제를 클릭했다. 모니터에는 하얀 화면과 입력을 기다리며 깜빡거리는 커서만 남았다.
…그 당시만 해도 뉴스기자가 찾아올 정도였는데.

-유린 씨는 남자를 옹호하는 입장이신 것 같은데요.
아니오. 전 한쪽 성의 권리만 주장하고자 하는 게 아닙니다. 많은 사람들이 저를 남성우월주의자라고 몰아세우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60여 년 전만 해도 세계는 여성의 사회 진출이 미미한 수준이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남자를 누르고 여자가 사회의 기득권을 가지게 되었지요.
예, 유린 씨는 남자에게 그 것을 넘겨야 한다는 기사를 쓰신 것으로 압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전 양도하자는 게 아니라, 균등하게 나누자는 것입니다. 고대에는 여자가 남자를 지배했습니다. 그러던 것이 남자가 여자를 지배하고 다시 여자가 사회를 지배하고 있습니다. 만약 이대로 간다면… 언젠간 다시 남자에게 지배당하겠지요. 그리고 악순환은 반복될 것입니다. 저는 그 고리를 끊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바로 남녀의 완전평등이지요.
남녀평등이 가능하다고 생각하십니까?
예. 물론 그 전에 남자와 여자의 차이를 서로 알아야겠지요.

하지만 이제는 유린 스스로도 알 수 없었다. 정말로 남자와 여자가 평등해질 수 있을까? 유린은 아이스커피를 홀짝였다.
그녀는 언론의 공적이 되었지만 무료함에 빠져 있던 사회는 그 것을 하나의 자극으로 받아들였다. 그 덕에 다행히도 유린은 아직 매장 당하지 않을 수 있었다. 물론 자신의 기사가 시들해지면, 곧바로 죽는다는 것은 그녀 스스로가 알고 있었다.

기사가 실린 바로 다음 날이었다. 벨소리에 무심코 전화를 받은 그녀는 수화기 너머로 터지는 굉음에 귀머거리가 될 뻔했다. 그 후에도 간간이 이런 악질적인 전화가 걸렸다.
뿐만 아니라 각종 음란사이트에선 외설적인 사진에 그녀의 얼굴을 합성시킨 것을 게재해 놓았다. 얼마 안 가서 공식사이트에까지 그 사진이 올려졌다. 기가 막히는 일이었다. 더군다나 사람들은 그녀의 기사보다도 음란한 낭설에 더 관심을 보였다.
그녀를 저하시키는 허무맹랑한 사진을 모은 사진첩이 베스트셀러 8위에 오르는가 하면 어느 한 저질 TV프로그램에선 자신과 얼굴이 비슷한 여자를 등장시키기까지 했다. 웃기는 것은 아무도 상대해주지 않던 그 프로그램이 그 편만 황금시간대에 방영된 것이다.
그런 게 반복되자 각종 성인용품점에서 모델제의와 물건매매를 요구하는 전화가 심심찮게 걸려왔다. 더군다나 레즈비언, 사회적 위치가 비교적 높은 남자들이 시도 때도 없이 전화를 해대었다. 그들이 ‘야한 사진을 찍게 해달라’, ‘같이 호텔에서 놀아보자’, ‘클럽에 가입해라’ 등등을 지껄여대는 바람에 그녀는 골머리가 지끈할 정도였다.
전화번호를 바꿔봤자 하루도 지나지 않아 다시 전화벨이 시끄럽게 울어댔다.
신문과 뉴스에서 자신에 대해 험한 얘기를 지어내는 것까진, 그래도 그 것까진 차라리 건전하다. 인기잡지 ‘여성주간’에서는 유린을 남자들에게 강간당하고 싶어 하는 변태성욕자라고 몰아세웠고, 뿐만 아니라 자신이 매일 한 시간씩 성인용품으로 자위를 한다고까지 적혀 있던 것이다. 유린은 이에 항의하려 했지만 소용없었다. 그녀는 오히려 몸을 사려야하는 입장이었다.
울고 싶었다.
유린은 여성주간의 정기구독을 바로 취소해버렸다. 매일 사람들에게 성추행을 당하는 것 같다. 하지만 다른 정보수단까지 차단할 수는 없었다. 적들이 원하는 것은 그런 식으로 차차 자신이 사회와 단절되는 것이다.
어쩌면 이런 일을 버틸 수 있는 것은 가끔씩 놀러오는 성영이가 위로를 해주는 덕분일 수도 있다. 동성애자인 그녀와 학생시절 같이 잔 적도 있지만 유린은 그녀에게 특별한 감정을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니었다. 성영도 그 것을 아는지 더 이상 요구를 하지 않았다.
유린은 잠시 쥐고 있던 머그컵은 내려봤다. 무직여성으로 등록되어 있는 성영이 선물용 머그컵을 살만한 돈이 있다는 것도 알 수 없는 일이었다. 그녀는 항상 특별한 분위기가 감돌았다. 그녀가 동성애자였기 때문이라고 한때는 생각했으나 아무래도 그것 때문인 것 같지도 않다.
유린은 성영의 붉은 기가 적은 입술을 떠올려 보았다.

-‘재미있었어?’
‘그냥…’
성영은 커튼이 처진 창문을 바라보며 머리를 묶어 올렸다. 그녀의 등허리는 완만한 곡선을 그리고 있다. 그 위에 방울진 땀이 흐른다. 한낮이었다. 커튼을 투과한 햇빛이 방안을 노랗게 물들이고 있었다. 성영은 가슴을 쓸어내리면서 고개를 돌렸다.
‘우리 둘 중 누가 남자인 것 같아?’
‘어째서 그런 걸 묻는 거야?’
성영은 머리 묶은 게 마음에 안 드는지 다시 풀어헤쳤다.
‘원래 섹스라는 것은 남자와 여자가 하는 것인데. 우린 둘 다 여자잖아.’
‘어? 뭐… 하지만……’

-유린은 퍼뜩 정신을 차렸다. 그녀는 대충 씻으려고 했지만 수도에서 허여멀건 물만 나왔다. 어쩔 수 없이 옷만 갈아입은 뒤, 닫힌 통조림처럼 갑갑한 단칸방에서 나왔다. 평소에는 잘 쓰지 않던 모자를 꾹 눌러쓰고 계단을 내려갔다. 그리고 곰팡이 핀 시멘트 통로를 지나쳐 건물을 나섰다.
수명이 다 된 가로등의 창백한 불빛이 산만하게 흔들렸다. 봄이라는 것을 알리는 전광판 광고들이 밝게 빛났다. 어둠 사이의 스크린들에는 하나같이 색색의 꽃들이 피어있는 사이로 역시 화려한 색색의 나비가 한가롭게 날아다니고 있었다. 정교한 영상이었지만, 어두운 저녁에 창백한 빛과 함께 나오는 영상은 오히려 인공적인 어색함만 배가시킬 뿐이었다.
“……”
그녀는 남자들이 살고 있는 구역을 밀착취재하기로 했다. 남자들의 인권을 신장하고자 하는 기사를 쓰는 주제에 정작 남자에 대해서는 거의 모르고 있으니 점점 재미가 없어지는 것이라는 성영의 말을 듣기로 한 것이다.
버스나 지하철을 이용할 수는 없었다. 노선에 포함되지 않을 뿐더러, 남성격리구역에 내렸다가는 이상한 의심을 사기 십상이다. 차를 타고 가는 것도 내키지 않았다. 도로에 빼곡하게 박힌 톨게이트에서 관문 검사를 하는데, 유린의 얼굴은 너무 많이 알려져 버렸다.
어쩌다 이렇게 얼굴까지 알려져 버린 걸까. 속으로 작게 한탄하던 유린은 순간 두려운 생각이 들었다. 내가 지금 남성격리구역으로 가고 있는 것을 정부에서 보고 있다면? 주민등록증의 형태로 시민의 정보를 저장하는 기술은 발전을 거듭해서 이제는 모든 시민들의 사생활을 정부가 확인할 수 있다. 단지 필요성이 없기 때문에 역으로 사생활보장이 아닌 사생활보장이 이루어지고 있을 뿐이다. 하지만 유린은 살펴볼 필요성이 없는 대다수의 시민 중 한 사람이 아니다.
유린은 재빨리 그런 생각을 지웠다. 어차피 아무것도 하고 있지 않으면 어떻게 될 지 뻔하다. 잠깐 멈춰 섰던 유린은 다시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긴 시간동안 침묵과 함께 걸었다. 밤공기의 농도가 점점 더 짙어가는 것 같다. 그러고보니 은은한 악취도 나는 게 느껴졌다. 유린은 어느새 가로등의 수가 뜸해졌다는 것을 깨달았다. 뿐만 아니라 전광판 스크린도 안 보인지 한참 지난 것 같았다. 고개를 돌려보니 스크린은 먼 곳에서 뿌옇게 빛을 뿌리고 있었다.
남성격리장소에 거의 다 온 듯 했다. 다행히도 상상했던 것처럼 관문이나 경찰 같은 것은 전혀 없는 듯한 분위기였다. 유린은 한참 더 걸어서야 남성격리구역의 입구에 도착할 수 있었다. 그곳은 인도와 차도의 구분 없이 모두 아스팔트로 깔려 있었다. 네모나게 각진 건물들만 늘어서 있었다. 녹슨 자국 투성이였고 깨진 흔적투성이였다.
이제 악취는 매우 뚜렷하고 자극적이었다. 배설물의 냄새와 씻지 않은 부랑자의 몸에서 나는 냄새가 섞인 악취였다. 하지만 유린은 씻지 않는다거나 길거리에 배설물 냄새가 난다는 것은 상상도 하지 못했다. 그녀는 알 수 없는 냄새에 눈썹을 찌푸리다가 결국 싸구려향수를 뿌린 손수건으로 코를 막았다. 그런 대로 견딜만해졌지만 계속 갈 엄두가 나지 않았다. 20세기말에 나왔던 다크시티라는 영화를 연상시키는 거리였다. 공기마저 음랭하게 느껴졌다.
그녀는 용기를 내어 발걸음을 옮겼다. 그러나 그 순간 건물 사이사이에 숨어있던 남자들이 튀어 나왔다. 너무도 갑작스러운 한 순간이었다. 짐승들이 먹이감을 노리고 있다가 일시에 달려드는 듯한 모습이었다. 그녀는 뒷걸음질을 치려고 했지만 마음대로 되지 않았다. 다리가 떨리는데다가 휘청거렸다. 유린은 주저앉지 않으려고 노력하며 남자들을 살펴봤다.
그들의 전체적인 얼굴윤곽은 광대뼈나 구륭근 근처에서 각이 져 있었다. 턱과 귀밑에서 이어지는 턱 선이 발달했고 그 턱 선을 따라서 다듬지 않은 수염이 돋아있는 모습은 너무도 이질적이었다. 뿐만 아니라 입은 누구나 컸고, 눈썹 또한 대체로 진했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공통적인 것은 그들의 얼굴에 음흉함이 묻어 있다는 점이었다.
더러운 행색의 남자들은 이미 유린을 거의 포위하고 있었다.
‘내가 왜 성영이 말을 들었을까. 그 기사를 쓴 것도 걔 말을 들어서 쓴 거였는데……’
유린은 눈물이 흘러나왔지만 닦지 않았다. 그런 모습을 보였다간 정말로 끝장날 것 같았다. 무엇이 신호였는지는 알 수 없었다. 그저 갑자기, 어둠 속에서 나온 수 십 개의 손이 덮쳐왔다. 비명도 지르지 못했다. 남자들의 손은 모자를 벗기고 외투를 잡아 당겨댔다. 선글라스가 떨어져 쨍그랑하는 소리를 냈다. 우연스럽게도 그와 동시에 그녀를 둘러싼 포위망의 바깥쪽으로부터 소란스러운 소리가 들렸다.
그 시간은 짧았다.
남자들은 곧 조개가 입을 벌리듯 비켜 늘어섰다. 유린을 잡고 있던 손도 모두 풀렸다. 유린이 안도하는 한편 어리둥절해 하는 사이, 벌려진 대열사이에서는 올백머리의 미남이 걸어 왔다. 베이지 색의 정장이 주변 남자들의 행색과 대조되었다. 그는 단지 걸어오는 것만으로 주위를 진정시켰다. 부랑자들은 올백머리에게 복종하는 관계인 듯한 눈치였다.
올백머리는 유린의 손목을 낚아챘지만 그녀는 너무 놀란 나머지 그가 이끄는 대로 따라 걸음을 옮겼다.

유린이 정신을 차린 것은 차에 태워진 후였다. 올백머리가 차문을 닫자마자 차가 출발했다. 그녀는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정리가 되지 않았다. 아니, 말을 해야 하는 상황인지 아니면 할 수 있는 상황인지조차 알 수 없었다. 유린의 혼란스러움을 자르듯이 남자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놀랬을 거요.”
그랬다. 그녀는 창문 너머로 스쳐 지나가는 건물들에서 남자에게 시선을 옮겼다. 유난히 턱 선이 고운 남자로, 전체적인 인상은 깔끔하다. 하지만 그녀는 금방의 일 때문에 남자에 대해 더욱 꺼림칙하고 불쾌한 기분이 몸 안을 감돌았다.
“안심해. 난 당신에게 흥미가 없으니까.”
“여성주간에선 남자가 하는 말은 모두 거짓말이라던데요.”
“나도 여성주간정도는 읽지. 그렇다면 당신이 변태성욕자란 것도 사실인가?”
유린은 얼굴을 붉히며 인상을 찌푸렸다. 남자는 별로 웃는 기색도 없이 말을 이었다.
“난 동성애자이기 때문에 당신에게 성적인 흥미가 없다는 말이었어.”
“……”
유린은 못 믿겠다는 표정을 지어줬지만 남자는 창 밖을 보고 있었기 때문에 아무 소용이 없었다. 대신 그는 자신과 부랑자들을 대조시키듯 냉소하며 말했다.
“하. 사실 방금 부랑자들은 당신에 대해 성적인 환상을 품고 있었을 테지. 그 자들은 당신이 기꺼이 자신들과 자줄 거라고 생각하고 있어.”
“…어째서죠?”
“그들도 신문정도는 읽으니까.”
비웃음이 섞여있진 않았지만 유린은 불쾌해졌다. 괜히 그의 말에도 신용이 가지 않았다.
유린은 왼쪽안구의 열감지렌즈를 작동시켜 그의 하반신을 살폈지만 아무 이상 없었다. 그녀의 행동을 눈치 챈 남자는 자신의 바지를 가리키며 말했다.
“스펙트럼굴절섬유 재질로 만든 바지니 그런 것 써도 소용없고, 쓰나마나 상관없을걸. 난 실제로 신사도 아니거든.”
“…흥.”
유린은 창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올백머리가 자신을 구해준 것은 맞지만, 그의 태도는 마치 마지못해 데리고 왔다는 듯한 식이었다. 아니, 그보다 더 근본적인 무언가가 그녀에게 거부감을 일으키게 하고 있었다. 난생 처음 대화해보는 남자라서 그런 것인지, 그가 동성애자라서 그런 것인지는 알 수 없었다. 하지만 그녀는 그 둘 모두 이유가 되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차가 멈추었다.
여전히 거리는 지저분했지만 악취는 없었다. 시간이 꽤 지났는지, 아니면 가로등이 없어서인지 주변은 매우 어두웠지만 올백머리는 거침없이 바로 앞의 건물을 향해 걸어갔다. 내키진 않았지만 유린은 그의 뒤를 따라 갔다. 그러면서 건물을 살피던 유린은 그 건물이 게이클럽이라는 것을 알아챘다. 장식은 화려했지만 네온사인 같은 것은 없고 길을 밝히는 전구만 을씨년스럽게 매달려 있을 뿐이었다. 퇴락한 거리에 어울리는 건물이다.
“일단 같이 들어가도록 할까. 남자들에 대해 취재하려고 온 것이지?”
유린은 고개를 끄덕이고 건물에 들어갔다.
게이클럽이라고 하면 디스코텍정도의 분위기를 연상해왔던 유린은 어둠침침하고 담배연기가 그득히 배인 우중충한 건물 내부를 보고 깜짝 놀랐다. 입구왼편의 벽에 바가 마련되어 있었는데, 바텐더가 카운터담당도 하는 듯 했다. 바텐더는 유린을 보고 제지하려 했다.
“손님. 이 곳은 이성간의 교합은 금지되어 있습니다. 레즈비언클럽으로 가시거나, 여관 촌으로 가시도록 하십시오.”
말을 하는 동안 바텐더가 보낸 시선은 유린을 매우 짜증나게 했다. 그의 눈에 담긴 혐오가 너무 노골적으로 드러났기 때문이다. 그는 한 손으로 턱을 만지작거리면서 이어 말했다.
“그러고 보니 여성주간에 나오신 분이군. 조명이 어둡지만 확실한데. 이봐요. 당신 건물 잘못 찾았소.”
곧 건물 안이 웅성거렸다. 간간이 성유린이라는 이름이 들리는 것으로 보아 그녀에 대한 조소가 섞인 음담이 분명했다. 그녀는 불편한 심기를 드러내기 위해 헛기침을 했으나 소용없었다. 실제로 그녀는 성교나 음담패설에 관심이 없는 쪽이었고, 정확하게는 현재 완전히 질려있는 상태였다.
바텐더가 다시 한번 나가라고 말을 하자 결국 유린은 참지 못하고 소리를 꽥 내질렀다.
“이-나라 인간들-머리통엔-섹스만-꽉-차-있냐-?!!”
워낙 큰소리였기에 삽시간에 주위가 조용해졌다. 소파 위에서 ‘머리통에 꽉 차 있는 것’을 말없이 행하는 중이었던 남자들은 머쓱한 얼굴로 서로를 쳐다보았다.
식식거리며 의자에 털썩 앉는 유린을 보고 올백머리가 우스갯소리를 하며 술을 주문했다.
“이 분이 좀 많이 시달려서 그래. 바텐더. 가벼운 것으로 두 잔 내 줘.”
“아, 영신씨도 오셨군요. 알겠습니다.”
올백머리-영신에게 대하는 태도는 매우 깍듯했다. 곧 위스키인 듯한 술이 담긴 잔이 둘 나왔다. 유린은 화풀이하듯 잔을 비웠다. 기침을 콜록거리기도 하고 분한 듯 숨을 몰아쉬기도 하면서 계속 잔을 비웠다. 결국 유린은 잔을 비우던 도중 곯아떨어져 버렸다.
“제길…… 젠장… 난 평범한 여자란 말야… 으음…… 난 그저 눈에 틔어보려고… 그 기사를 썼던 거란 말이야…… 빌어먹을……”
영신은 유린이 완전히 제정신이 아닌 것을 확인하고 그녀를 옮기기 시작했다. 그녀의 집으로 옮기려는 의도는 전혀 없었다. 영신은 바텐더에게 눈치를 보내고 함께 유린을 지하 계단으로 끌고 갔다. 구두가 벗겨지려고 하자 바텐더는 거치적거린다는 듯이 벗겨 던져버렸다.

유린은 눈을 떴다. 머리가 띵하다. 하지만 숙취 때문은 아닌 것 같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녀는 쿠션이 설치된 유리관 안에 갇혀 있었다. 이내 그녀는 자신의 몸이 발가벗겨져 있다는 것도 깨달았다. 그 너머에 바텐더가 지켜보고 있는 것을 발견하고 수치심에 소리를 질러댔지만 별 소용없었다.
그 때 문이 열리며 영신이 들어왔다. 그는 트렌치코트를 입은 채 말없이 그녀를 응시했다.
유린은 이를 바득바득 갈며 그를 노려보았다.
“술에 약을 탔나 보지?”
“약을 탄 것은 사실이지만 당신에게 흥미가 없는 것도 사실이니 안심해. 물론 난 흥미가 없는 정도가 아니라 너의 그 흉측한 몸에 혐오감까지 느끼고 있지.”
유린은 기가 막혔다. 하지만 뭐라고 외칠 틈도 주지 않고 영신의 말은 계속 이어졌다.
“놀랄 것 없어. 우린 그저 너를 포섭하려는 것이다. 너의 기사는 남자와 여자가 평등해야 한다는 내용을 담고 있었다.”
영신은 말을 하면서 자신의 가슴을 쓸어 내렸다. 그는 순간 매우 행복한 표정을 지었다. 아니, 그것은 아주 순간적인 착시였던 것 같다. 그는 조소를 얼굴 가득히 담으며 말했다.
“그런 것은 불가능해.”
영신의 태도는 거침없었다. 그는 자신이 입고 있던 트렌치코트를 벗었다. 그러자 영신의 알몸이 드러났다. 안에 아무 것도 입고 있지 않은 모양이었다. 유린은 경악했지만 영신은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
“어때? 아름답지?”
유린은 그를 정신이상자라고 판단하기에 이르렀지만 영신은 자랑스러운 듯 계속 말을 이었다.
“우린 양성, 중성, 혹은 새로운 성을 가지기 위해 호르몬을 연구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결과물이 이것이지.”
영신은 넓은 어깨에서 허리에 걸쳐 유려한 곡선을 따라 손바닥을 쓸어내렸다. 어깨와 가슴은 분명한 남자의 것인데 골반 또한 벌어져 여자처럼 엉덩이가 펑퍼짐했다. 게다가 약간의 지방도 있어 뱃살이 튀어 나와 있었다. 그러면서 가슴근육과 팔 근육이 발달되어 단단하고 각이 져 보였다. 곡선과 각이 절묘하게 어우러진 몸이었다.
유린은 여자의 성기와 남자의 몸을 한 영신에게 비아냥거리듯 말했다.
“혹시 그냥 신체부위가 튀어나온 것을 싫어하는 거 아냐?”
“성기능 담당 기관 중에서 말이지.”
영신은 유린의 말을 맞받아치면서 눈을 가늘게 떴다.
“그리고 당신이 동의한다면 곧바로 테스토스테론을 주입해 줄 수 있어.”
아닌 게 아니라 유린의 바로 위에 설치된 분사기는 마취가스를 뿌릴 준비가 완료된 듯이 보였다. 마취가 되면 저들이 호르몬 주사를 놓으리라. 유린은 이 상황을 벗어나야겠다고 생각했지만 어떻게 해야 할지 머릿속에 떠오르지 않았다. 유린의 사정을 아는지 모르는지 영신은 계속 떠들어댔다.
“그럼 당신의 그 흉측한 가슴이 납작해지겠지. 그리고……”
영신의 말은 채 끝나기도 전에 묻혔다. 갑작스럽게 진동과 함께 폭음이 울렸다. 콰쾅!!
“꺄앗!”
건물파편 때문에 유리관은 깨졌다. 영신과 바텐더는 기절한 채 바닥에 엎어졌다. 유린은 너무 놀란 나머지 바닥에 주저앉았다. 다행히도 별 상처는 없었다.
무너진 벽 너머로 사람들이 몰려왔다. 그 가운데 성영이 있었다. 그녀가 특수요원 복장을 하고 있었지만 유린은 그저 ‘성영이 실업자가 아니었구나.’라는 정도밖에 떠올리지 못했다.
“괜찮니?”
유린은 고개를 끄덕이다가 퍼뜩 생각이 난 듯 영신을 가리키며 말했다.
“…저 자식 양성이야.”
“뭐?”
성영은 유린이 뭐라 하기도 전에 깔깔 웃었다. 유린은 어리둥절해서 성영을 쳐다보았다. 그녀는 계속 웃다가 유린을 돌아보았다. 그러나 그 얼굴에는 웃음기가 없었다.
“이제 한 가지 고유한 성을 가진 사람은 더 이상 남지 않았어. 남자를 본 적 없는 여자들은 자신이 여성이라고, 여자를 본 적 없는 남자들은 자신이 남성이라고 그렇게 생각하고 있을 뿐이지.”
“무슨 말이야?”
성영은 유린의 말에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하던 말을 계속 이어갔다.
“하지만 사람들은 이제 남자와 여자 둘을 모두 담고 있어. 몸뿐만 아니라 뇌의 구조까지. 저들을 한 구역에 격리한 것은 남자와 여자라는 차이 때문이 아냐. 단지 우리는 합쳐진 성을 부정하고 싶었던 것뿐이지.”
놀란 표정을 숨기지 못한 유린은 성영의 말을 약간 늦게 알아들었다. 유린이 뭐라 입을 열기도 전에 성영은 유린의 다리 사이를 부드럽게 만져주었다. 그리고 입가에 미미한 웃음을 머금은 채, 유린의 딱딱해진 성기를 가리키며 말했다.
“여자의 성기는 돌출 되지 않았어.”
유린은 잠시 못 알아들은 것처럼 멍하게 성영을 올려보다가 다시 고개를 내렸다. 넋이 나간 사람처럼 가만히 있었지만 유린의 눈에는 다리사이의 살덩어리가 섬뜩하리만치 선명하게 보였다.
성영은 어디서 찾았는지 유린이 입고 있던 것과 똑같은 옷을 건네줬다. 성영의 부축을 살며시 밀어내고 유린은 천천히 비틀거리며 걸어갔다. 목이 말랐다. 유린은 빨리 돌아가 아이스커피를 마시며 기사를 쓸 생각이다.
사회는 또 다시 재미있어 할 것이다. 유린은 이제 더 이상 사회를 변화시키기 위한 기사를 쓸 생각이 없으니 말이다.
댓글 2
  • No Profile
    블루베리 05.11.04 01:40 댓글 수정 삭제
    으아악; 정말 오랜만에 올리는 글이군요; 게다가 예전에 썼던 것을 수정한 것...ㅜ
  • No Profile
    배명훈 05.12.05 07:25 댓글 수정 삭제
    아, 좀 더 야하게 갈 줄 알았는데. 그런 면에서 반전이었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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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지 2024년 독자우수단편 심사위원 공고 mirror 2024.02.26 1
공지 단편 ★(필독) 독자단편우수작 심사방식 변경 공지★5 mirror 2015.12.18 1
공지 독자 우수 단편 선정 규정 (3기 심사단 선정)4 mirror 2009.07.01 3
817 단편 로망스2 제이 2005.12.08 0
816 단편 가면3 날개 2005.12.01 0
815 단편 어느 한 속어의 유래2 azuretears 2005.11.27 0
814 단편 이상향2 C.T 2005.11.26 0
813 단편 촛불1 異衆燐 2005.11.17 0
812 단편 화려한 신부2 시레인 2005.11.10 0
단편 성스러운 외출2 블루베리 2005.11.04 0
810 단편 손수건1 이중 2005.10.31 0
809 단편 머나먼 별에서 온 손님 요한 2005.10.26 0
808 단편 슬프지만 행복해져야 하는 이유 아카스트 2005.10.17 0
807 단편 작은 문학도의 이야기-수형(獸形) 미소짓는독사 2005.10.08 0
806 단편 이세계 드래곤 슬레이어 이지문 2005.09.28 0
805 단편 선택의 이유2 요한 2005.09.25 0
804 단편 고양이의 눈2 감상칼자 2005.09.18 0
803 단편 파도 - 퇴고작1 제이 2005.09.16 0
802 단편 급습 감사는 신속하게 푸른깃 2005.09.16 0
801 단편 아늑한 빗줄기 roland 2005.09.09 0
800 단편 Robotta2 외계인- 2005.09.08 0
799 단편 드림스케이프(Dreamscape)1 gordon 2005.09.03 0
798 단편 이름 가명 2005.09.01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