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밀번호를 잊어버리셨나요?

단편 이름

2005.09.01 00:3509.01


나는 긴 시간을 기다려왔다.




나는 이름없는 학생이다. 내 진짜 이름은 모두가 잊어버렸다.
나는 내 이름 대신 너 또는 야 또는 이봐로 불린다.

"야, 휴지."
"응."

나는 휴지이다. 나는 샤프이다. 나는 지우개이다.
때때로 나는 휴대폰이기도 하고 돈이기도 하다.

"비켜."
퍽.

비켜 꺼져 짜증나 새끼, 새끼, 새끼. 내 진짜 이름을 바꾼 댓가로는 도통 마음에 들지 않는 이름들. 하지만 내가 진짜 싫어하고 무서워하는 이름들은 따로 있다.

"따라와."
"..."

애들이 나를 따라와라고 부른 날이면, 몸이 성하지가 않았다. 이번에는 어디로 끌고 가는 것일까. 어디로 날 데려가는 걸까. 나는 수 명의 아이들에게 둘러싸여 불안에 떨었다. 나를 따라와라고 부르는 녀석들만큼 나를 두렵게 만드는 아이들은 없다.
퍽, 퍽, 퍽.
왜 사냐 멍청이 병신 또라이 더러운 새끼.
하지만 내 이름은 그게 아닌데, 내 이름은 그게 아닌데...

내 이름을 지은 사람들이 사라져버린 이후로 내 이름은 영영 잊혀져 버렸다. 나를 뭐라고 부르든 나는 상관없다. 나를 아프게 하는 것도 아무런 상관이 없다. 그러나 단 한번, 단 한 번만 내 진짜 이름을 듣는 것이 내 최후의 소원이었다.
나는 도움을 청하고 싶었다. 누군가의 바짓 가랑이를 붙잡고 절실하게 이름을 불러 달라고, 내 이름이 무엇이라고 그렇게 구걸하고 또 애원하고 싶었다. 그러나 내밀어진 손은 커녕, 이 손끝이라도 가 닿을 곳 하나 존재하지 않았다.
사람 한 둘 없어져도 관심없는 세상에서 내 이름 따위는 아무런 가치를 가지지 못했다.

나는 간절한 눈빛으로 선생님을 바라보았다. 선생님은 나와 눈을 마주치더니, 내 속내를 다 안다는 듯이 푸근한 웃음을 지어주셨다.

"29번, 읽어." "네."





긴 시간을 기다려왔다. 익숙한 울림을 참아왔다.
가슴이 떨리는 순간을, 나는 기다려왔다.
많은 이름들이 많은 무관심으로 묻혀가고 따듯해야 할, 정겨워야 할 음새들이 딱딱한 익숙함 속에서 윤색해 간다.
나는 그 과정들을 긴 시간동안 관찰해 왔다.
이 곳에서 사람들은 그것을 너무 당연하게 여겼다. 이 곳에서 사람들은 당연한 것을 너무 당연하게 여기고, 받아야 할 것을 너무 당연히 받았다. 그들은 고마워 할 줄을 모랐다.
나는 눈물을 흘렸다. 울음을 터뜨렸다. 결론을 내리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진실은 너무도 극명했다.
세상은 온통 무애(無愛)했다.

"병신, 왜 사냐? 더러운 새끼."

그 이름들은 마음에 들지 않았다. 내 진짜 이름은, 다른 곳에 있다. 다른데, 어떤 소중한 곳에 잠들어 있다. 나는 그것을 찾고 또 빌어야 했다. 그러나 몸이 말을 듣지 않았다. 피비린내가 났다. 아스팔트 바닥의 차가운 감촉이 뺨을 타고 흘렀다.
나는 지난 3년간 암모니아 냄새가 가득 찬 화장실을 나의 교실로 삼았고 주먹의 가르침으로 폭력을 배웠다. 배움의 흔적이 멍과 상처로 온 몸에 남았다.
웃음소리, 웃음소리, 욕하는 소리. 듣기 싫은 침 뱉는 소리.

나는 죽고 싶지 않았다. 이름이 없어지는 것은, 죽는 것과 다름없었다. 나는 아이들에게 가르쳐 줘야만 했다. 나는 29번이 아니라는 것을. 나는 너희들이 부르는 것처럼 병신이나 더러운 새끼가 아니라, 또 하나의 소중한 이름이라는 것을.
그러나 내가 입을 벙긋거렸을 때, 나의 입에서는 아무런 소리도 새어나오지 않았다. 내 이름이 발음나지 않았다.

나는... 내 이름을 잊어버렸다!

나는 내 뇌를 뒤지고 수십 번 찾아보았다. 그러나 내 세계에서는 29번이, 야가, 너가, 이봐가, 휴지, 지우개, 휴대폰, 돈, 병신, 더러운 새끼, 시팔놈이 번갈아 튀어나올 뿐이었다.
내 이름은 뇌의 한 구석, 귀퉁이에조차도 존재치 않고 있던 것이다.

내가 나의 이름을 심각하게 고민하고 있는 사이, 힘없이 벌어진 나의 입에서는 신기한 단어가 튀어나왔다.

"죽어." 죽어? 그것은 누구의 이름일까?

나는 그것이 누구의 이름인지 다시 고민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누구도 나를 그렇게 부른 적이 없으며 나도 누군가를 그렇게 불러 본 적이 없었다.
그래서 나는 친구에게 주먹으로 물어보았다. 배운듯이 똑같이.
퍽, 퍽퍽퍽.
웃음이 자꾸 새어나왔다. 내 친구도 그것이 누구 이름인지 잘 모르는 것 같았다. 아무 말이 없었다.
퍽, 퍽퍽퍽.
그렇다면 이 이름은 주인이 없는 이름이란 소리였다. 불쌍하게도. 이름없는 사람인 나는 주인없는 이름에게 한없는 동질감을 느꼈다. 그래서 나는 이 이름에게 주인을 찾아 주기로 했다.

"죽어."
퍽, 퍽, 퍽퍽퍽퍽.

너희들이 내게 많은 이름을 지어주었지. 그러니까 나도 너희 모두에게 이 이름을 주겠다.
"죽어." 너도 "죽어." 그리고 너도 "죽어." 너 역시 "죽어."
모두가 죽어이고 또 죽어이다. 하, 하하하하.
나는 마음이 따스해지는 것을 느꼈다. 이만큼 즐거웠던 적이 없었다. 나는 쑥쓰러운듯이 친구들의 이름을 불러보았다.

"죽어, 죽어, 죽어, 죽어, 죽어죽어죽어죽어죽어죽어죽어..."
"기, 끼야아아아아..."
퍽, 퍽퍽퍽, 우득. 콰지직. 뚝.

끼야아악? 그건 또 새로운 이름인가?
죽어는 참 좋은 친구였다.





이제 나를 싫어하는 이름으로 부르는 사람은 없지만 내 이름을 불러줄 사람도 없어졌다.
나는 29번, 휴지, 개새끼, 시팔놈에서 110945번이 되었다. 맘에 드는 이름은 아니지만 아무래도 좋다. 나는 이 고요에 만족했다. 하지만 눈물은 아직도 멎지 않았다.
나는 아직도 내 진짜 이름을, 기억하지 못하고 있었다. 나는 곰곰히 생각했다. 쭉 생각했다.

긴 시간 기다려왔다. 또 참아왔다.
가슴이 떨리는 그 순간을, 나는 기다려왔다.
내 울림이 조용히 불려지는 그 때를, 나는 기다려왔다.
그러나 그 날은 오지 않았다. 아직도, 아직도 오지 않았다.
그리고 앞으로도 오지 않을 것 같다.

  나는 아마 선생이 될 것이다. 운전수가 될 것이다. 작가가 되고 청소부가 되고 인부가 되고 무엇무엇씨 또는 무엇무엇군이 될 것이다. 그리고 1, 2, 3, 4, 29, 18, 666, 110945번이 되었다가, 어쩌면 다시 병신 개새끼 더러운 놈이 될 것이다.
그러나 그 어떤 것도 내 이름은 아니었다.

나는 내 이름을 잃고 말았다. 정말로 잃어버렸다.
이제 누구도 내 이름을 불러줄 수가 없다. 아니, 애초에 불러줄 사람따윈 아무도 없었다.

나는 웃었다. 웃음이 터져나왔다. 봇물처럼 쏟아져서 막을 수가 없었다. 오래 전부터 흐르던 그 눈물처럼 도통 막아낼 수가 없었다. 나는 결국, 나에게 이름을 붙여주기로 했다.

"죽어."

그것밖에는 떠오르지 않았다. "죽어..."

그렇다. 주인 없는 이름이라면 사실 이름없는 사람에게밖에 울리지 않는 것 아닐까? 나는 친구들에게 한 가지 몹쓸 짓을 저지른 것이다. 이름을 잘못 짓다니.

죽어, 죽어, 하고 나는 계속 되뇌었다. 눈물이 고장난 것처럼 새어나왔다. 나는 이름이 절실히 필요했다. 그것을 부르지 않으면 또 없어질 것 같아서 필사적으로 불러보았다.
죽어 죽어 죽어 죽어!
나는 긴 시간 기다려왔다. 간신히 참아왔다.
나는 너무 오랜시간 이름을 듣지 못했다. 더 많이, 더 많이 들을 필요가 있었다. 죽어 죽어 죽어! 나는 내 이름을 끝내 찾아냈다. 평화는 이토록 쉽게 찾아들었다. 나는 고요히, 평화롭게 미소지었다. 물기묻은 입가가 꿈틀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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