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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 Robotta

2005.09.08 22:3009.08

 Robotta



 그것은 방 한 구석에 놓여있었다. 마치 지구가 태어날 때부터 그곳에 있었다는 듯 아주 자연스러운 모습을 하고서 떨어져나간 팔 한 짝은 그렇게 아무렇게나 방 한 구석에 널부러져 있었다. 파랗고 맑은 하늘에 떠다니는 하얗고 뽀얀 구름처럼, 푸른 벽지를 배경으로 창백하게 질린 채 반쯤 구부린 채로 방바닥에 손바닥을 짚고 있었다. 어깻죽지부터 시작한 경계선은 점점 흐려지더니 이윽고 방과 구별해낼 수 없을 정도로 자연스럽게 그 팔은 방과 하나가 되었다. 그리고 그 팔은 내 것이었다.

 아니, 사실 나는 그것이 내 것이라고 말할 자신이 없다. 그것이 떨어져 나간지 퍽 오랜 시간이 흘러갔고, 이미 방과 하나가 되었으며, 무엇보다 더 이상 나와는 어울리지 않는다는 점에서 그것은 더 이상 내 팔이라고 할 수 없었다. 그렇다고 나의 팔(으로 추정되는 것)이 떨어져 나갔다는 사실이 내게 기쁨을 주는 것은 아니었다. 단지 팔이 하나 떨어졌다는 하나의 사실과, 거추장스러웠는데 잘됐다는 상쾌함이 잠시 나를 휘감았을 뿐이었다. 그리고 나서는 어땠냐면, 전과 다름없이,


 외로웠다.


 팔이 떨어져 나간 것은 며칠 전의 사고였다. 나는 좁은 골목을 지나가면서 문득, 나는 로봇이 아닌가 하는 의문을 품게 되었다. 일 년에 손가락 한 두 마디 정도나마 자라던 키도 더 이상 클 기미가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기도 했고, 게다가 집-학교-집으로 요약할 수 있는 단순한 생활 주기가 로봇의 그것과 꼭 닮았기 때문이기도 했다. 아니, 인간 같은 로봇이 나오는 시점에서 로봇 같은 인간이 나오지 말란 법도 없지 않나- 싶을 때, 갑자기 좁은 골목으로 새카만 대형 자동차가 한 대 들어오는 것이었다. 노려보는 듯한 헤드라이트와 눈이 마주쳤을 무렵, 나는 그 자동차의 웅장한 차체에 놀라고, 우람한 사이드 미러에 한 번 더 크게 놀랐다. 그것은 마치, 표범 가죽 옷을 입은 흑인이 아프리카 초원에서 거대한 코끼리에게 쫓기다가 앞쪽에 앞니가 날카로운 사자가 있다는 것을 알아 챈 것과 같은 놀람이었다. 그 새카만 대형 자동차는 내가 미처 눈을 한 번 깜박 하기도 전에 다가와 문제의 오른팔을 툭 치고 반대편 저 멀리로 어울리지 않게 나약한 뒷모습을 보이며 사라져갔다. 붉은 눈을 번득이며 퇴로를 살피는 녀석에게 감자를 날리려다가 나는 그만 오른팔이 사라진 것을 알아챘다. 고개를 숙여 땅을 바라보자 그곳에는 반쯤 구부린 누군가의 오른팔이 어깻죽지부터 손바닥까지 땅에 닿은 채로 떨어져 있었다. 그리고, 그 주변엔 피 대신 수십 수백 개의 자그마한 기계부품들이 떨어져있었다. 떨어진 나사 하나가 나를 비웃는 듯 번뜩였다. 그렇지만, 그래서인지 나는 눈물이 나도록 아프거나 슬프다기보다는,


 외로웠다.


 사실 눈치 채지 못한 것은 아니었다. 나는 언제나 소화가 되지 않아 속이 더부룩했고, 언제인가부터 끼이익 삐걱 하는 소리를 들어왔으며, 무엇보다 나 스스로가 로봇이라는 의심을 품어왔었다. 그렇지만 막상 로봇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자 나는 정말 외롭다는 말이 우스울 정도로 외로워졌다. 인간들은 탄소와 산소, 질소로 이루어진 살이 없다는 것이 얼마나 외로운지 느끼지 못할 거야. 별안간 학교 따위 가고 싶지 않아졌다. 그래서 학교 따위 가는 것을 그만두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나는 길거리를 지나가는 그 어느 인간과도 눈을 맞추지 못했다. 정말이지,


 외로웠다.


 집으로 와서 나는 떨어져 나온 오른팔을 방 한 구석에다가 아무렇게나 던져두고 침대에 누웠다. 따지고 보면 모든 인간은 로봇이다. 모두들 판에 박힌 듯한 생활을 하고 판에 박힌 듯한 말을 하며 판에 박힌 듯한 삶을 살아간다. 가는 곳은 정해져있고, 만나는 사람도 정해져있다. 감정을 삭제하고 싶어 하고, 모든 일이 예정대로 진행되리라고 믿는다. 올바른 부품이 아닌, 예를 들어 나같이 지각하거나 결석하는 부품은, 가차 없이 내쫓아버린다. 그리고 폐기시켜버린다. 그리고 곧 다른 부품이 그 자리를 메운다. 모두 같은 모습이 되기를 원하고 모두 같은 생각을 한다고 기대한다. 혈관은 회로이고, 눈은 카메라이다. 시스템에 따라 피 흘리고, 먹고, 잔다. 시스템에 따라 숨쉬고, 돈을 벌고, 사랑을 한다. 구조상으로 보나 개념상으로 보나 모두 같은 로봇이다. 인간들, 이 정도라면 머리에 안테나라도 달아야 하는 것이 아닐까. 정말이지 그런 생각을 다 할 정도로


 외로웠다.


 나는 그 뭐더라, 휴보같은 다른 휴머노이드 로봇들보다 성능도 좋고 생각도 할 줄 아니까 9시 뉴스나 뭐 그런 데 나가면 돈을 많이 벌 수 있을 거야. 그런데 우리나라 법은 로봇의 재산권도 보장해주려나? 여기까지 생각하자 더는 누워있을 수가 없었다. 당장이라도 누군가 방문을 따고 들어와 전원을 뽑아버리고 (전원 같은 것이 내 몸 어디에 있는지는 나조차도 알 수가 없지만) 저금통의 돈을 모조리 가져가 버릴 것만 같아 두려워졌다. 그렇지만, 뭐 어디 도망칠 곳이 있을까? 어차피 오른팔이 떨어져나간 조그마한 로보타일 뿐인데. 그런 생각이 들자 눈물이 났다. 참을 수 없을 만큼,


 외로웠다.


 정신과에서도 로봇은 진료하지 않는다고 했다. 로봇에게는 진료받을 마음이 없어요, 하고 가느다란 목소리의 간호사가 친절하게 말해주었다. 그리고는 지금 장난하냐며 깔깔 웃어댔다. 날카롭고 높은, 신경질적인 웃음소리에 나는 기분이 상해서 그만 수화기를 내려놓았다. 덜그럭, 하고 거칠게 떨어진 수화기가 원래 있어야 할 자리에서 튕겨져 나왔다. 별안간 나도 원래 있어야 할 자리에서 튕겨져 나온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날카롭게 깔깔 비웃는 소리가 다시 한 번 들려왔다. 이것 참, 미치겠군. 아니, 벌써 미쳤군. 이젠 환청까지. 차라리 미쳤더라면 할 만큼,


 외로웠다.


 그것은 방 한 구석에 놓여있었다. 마치 지구가 태어날 때부터 그곳에 있었다는 듯 아주 자연스러운 모습을 하고서 떨어져나간 팔 한 짝은 그렇게 아무렇게나 방 한 구석에 널부러져있었다. 파랗고 맑은 하늘에 떠다니는 하얗고 뽀얀 구름처럼, 푸른 벽지를 배경으로 창백하게 질린 채 반쯤 구부린 채로 방바닥에 손바닥을 짚고 있었다. 어깻죽지부터 시작한 경계선은 점점 흐려지더니 이윽고 방과 구별해낼 수 없을 정도로 자연스럽게 그 팔은 방과 하나가 되었다. 그리고 그 팔은 내 것이었다.

 이 괴기한 풍경을 더 이상 바라볼 자신이 없어서 나는 방을 뛰쳐나왔다. 덜컥, 하고 방문이 시끄러운 소리를 내며 열렸다. 현관문을 열고 무작정 달렸다. 한쪽 팔이 없어서인지 균형 잡기가 힘들었지만 왼쪽 팔로 어설프게 몸을 틀어 난간을 잡으면서 계단을 올랐다. 열 바퀴쯤 돌아 숨이 턱을 넘어 코까지 차오를 때 쯤, 옥상으로 통하는 문이 보였다. 달려가서 오른쪽 어깨로 문에 냅다 부딪힐 마음을 단단히 먹고 몸을 날렸다. 문은 의외로 힘없이 열렸다. 때문에 균형을 잃은 나는 옥상에 도착함과 동시에 나뒹굴었다. 두어 바퀴 몸을 굴리다가 나는 하늘을 바라보는 자세로 드러누웠다. 파랗고 맑은 하늘에 하얗고 뽀얀 구름이 떠다니고 있었다. 마치 푸른 벽지를 배경으로 창백하게 질린 채 반쯤 구부린 채로 방바닥에 손바닥을 짚고 있을 방 한 구석의 오른팔처럼. 별안간 눈물이 흘렀다. 시리도록 파랗고 맑은 하늘 때문인지, 아니면 창백하게 질린 오른팔 때문인지. 몸을 일으켜 난간을 붙잡고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아찔한 높이의 저 밑에서, 새카만 대형 자동차가 과속 방지턱을 넘어 천천히 주차장으로 향하고 있었다. 로봇은 자살하지 않아, 하고 하얗고 뽀얀 구름이 속삭였다. 나는 눈물을 삼키며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믿지 않겠지만, 그 때 나는


 외로웠다.


 끼이익 삐걱 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인간의 심장 뛰는 소리처럼 시스템의 정상 신호가 주기적으로 내 안에 메아리쳤다. 시스템은 정상이다. 아직은 어느 부품도 내쫓아 낼 수 없다. 단지, 인간이 자신의 심장 박동을 관심을 기울여 듣지 않듯, 시스템이 자신의 정상 신호를 주의 깊게 듣지 않듯, 로봇도 자신의 끼이익 삐걱 하는 생존의 소리를 듣지 않고 있는 것뿐이다. 다시 한 번 끼이익 삐걱 하는 소리가 울려왔다. 좋다, 그렇다면 살아가야 한다. 비록 그것이 오른팔이 떨어져 나간 조그마한 로보타이더라도. 비록 당신이


 외롭더라도.


외계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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