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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 선택의 이유

2005.09.25 22:3609.25

written by D.yohan
to my love


선택의 이유


0.


"어떤 선택을 해야 할지 모르겠군."

제롬은 '어떤걸 말씀이십니까.' 라고 묻지 않았다.
평소의 그라면 물어볼만 했지만, 충직한 부관이라면 그러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 제롬도 묻지 않았다.
요한은 읽고 있던 편지를 접어 자신의 셔츠 주머니에 집어넣었다. 그리고 제롬을 바라보았다.

"어떻게 해야 하지?"

"어떤걸 말씀이십니까?"

결국 묻고 말았다. 요한이 그것을 원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에. 요한은 피식 웃으며 말했다.

"그녀를 잡아야 할지. 버려야 할지."

"사람이 버려지고 잡아지는 것이라 생각하지 않습니다."

"마음의 방향은 언제나 손밖이라는 말을 알고는 있어. 하지만 이것같은 경우에 내가 선택해볼수는 있는 문제잖아."

"그렇겠지요."

"그렇다면 나는 어떤 선택을 해야 할까. 내 선택과 무관한 방향으로 가겠지만, 적어도 내 의사표시는 할 수 있을테니."

"잡아야합니다."

너무 대답이 빨랐다. 요한은 한참쯤 침묵할거라 예상했기에, 제롬의 대답에 의외라는 표정을 지었다. 제롬은 생각할 필요도 없다는 식으로 말했기에.

"대답보다는 자네의 빠른 대답이 더 의외로군. 자네가 항상 빠른 판단을 내린다는 것을 알고는 있지만, 좀 당황인걸."

"사실은 편지를 읽기 시작할때의 표정을 보며 이미 생각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다 읽고 난뒤의 장군님은......평소의 장군님이라면 그저 정했겠지요. 물어보는 것 자체가 장군님에게 마음이 남은 것 아닙니까."

"내 마음이 무슨 소용이겠어."

"적어도 의사표시는 할수 있지 않겠습니까."

요한은 제롬의 대답에 할말을 잃었다. 그리곤 졌다는 듯 손을 들어 보였다. 하지만 왠지 심술이 일었다. 자신을 거부하는 연인에 대한 미묘한 감정.

"자존심은 어떻하지. 명색이 장군인데."

"때려드릴까요?"

"......부관에게 맞는 장군이라면, 자존심따위 신경쓰지 않는다 이거군. 하지만 의사표시를 한다고 해서 달라지는 것은 없잖아. 그녀가 날 좋아하지 않는것 같은데? "

"좋아하게 만들어야 합니다."

요한은 단순명쾌한 제롬의 대답에 어쩐지 시원함을 느꼈다. 반대로 답답함도 느꼈지만.

"자네는 연애를 해본적이 있나?"

"저를 연애도 하지못한 팔푼이 취급하는 것은 나쁘지 않지만, 이미 많은 연애를 해보았습니다."

"휴."

요한은 한숨을 내쉬었다.
자신을 버리려는 연인에 대해 배신감같은 것은 들지 않았다. 몇년째 떨어져있는 자신을 생각한다면 어쩌면 당연할지도 모를 일이다. 오랜 전쟁은 사람을 지치게 하니까. 자신 역시도 가끔 연인에 대해 잊어먹을때가 있었다.

"이제 그만 끝내야겠군."

"전쟁말씀이시죠?"

"물론. 연인에 대해서는 천천히 생각해보자고."

"참모회의를 준비하겠습니다."

"그래."

제롬이 천막밖으로 나가버리자, 요한은 다시 연인에 대해 생각하기 시작했다. 어쩔수 없는 일이었다. 마음의 방향은 언제나 손밖에 있는 것이니까. 아무리 잡으려 해도 다잡아지지 않는 것이지 않는가.

"휴."


1.


진격로는 열려있었다.
3미터의 넓이로 활짝 열려있는 성문을 바라보면서 요한은 다시금 이를 바득 갈았다. 원래 계획대로라면 히아신스부대는 그대로 진격해서 저 성문을 열고 들어갔어야 했다. 그러나 히아신스부대를 들어가지 못하게 하고 있는 것은, 바로 그것이었다. 문은 열려있었다. 열고 들어가야하는 과정이 빠져버렸다. 이미 문은 열려있는 것이다.

"어떻게 해야 하지?"

"총공격을 나왔으니 두드려는 봐야되지 않겠습니까?"

"아냐."

"예?"

"총공격은 아냐. 히아신스부대만 진격했으니까. 아직 후속에 레몬트리부대가 남아있잖아. 문제는 저게 작전이라면 히아신스부대는 전멸돼."

"하지만 저 문을 열어둔채 다른곳에 있을지도 모르지 않습니까? 도망친 것일지도 모르고."

"그렇다면 밤에 알았겠지. 흐음. 골치아픈 선택을 해야하군."

"의사를 타진해보지요."

"좋지. 일단은 1포대의 포격을 해봐."

제롬은 전령을 통해 1포대의 진격을 명령했고, 1포대는 천천히 진군했다. 그 뒤를 따르는 창병의 지원까지 있었기에, 부대의 절반이 떨어져나가는 기분이 들었다. 그리고 곧 포격이 있었다. 성안에서 쏘아지는 포격은 높이 차 때문에 더 사거리가 멀기때문에 미묘한 거리에 멈춰서 쏠수 밖에 없었다. 그래서 포는 성앞의 공터로 떨어졌다. 말그대로 의사타진이다.

조용한 성을 보며 요한은 낭패감이 들었다. 저래서는 이길수도 없는데 기성을 해서 어쩔 셈인가. 하지만 요한은 곧 생각을 바꿀수 있었다. 이길수는 없지만 지지도 않는다. 시간을 끌어야만 하는 이유가 무엇이 있을까.

"어떻게 할까요?"

"아쉽군. 일단은......후퇴."

"전군 후퇴합니까?"

"그래. 내일은 후속의 레몬트리부대까지 포함해서 싸워야겠어."

제롬은 전군에 후퇴를 명령했다. 그러자 곧 나팔수의 뿔나팔이 울리고 전군은 몸을 돌려 로즈성에서 멀어졌다. 부대의 후열까지 물러난 요한은 혼자 남아서 로즈성을 바라보았다. 부대가 차츰 차츰 멀어지고 위협이 되지 않을 거리가 되었을때에도 성문은 닫히지 않았다. 요한은 약간의 조바심이 이는 것을 느꼈다. 닫힌다면, 열고 들어가야 하는 것일까. 그러나 부대가 완전히 멀어진 다음에도 성문은 닫히지 않았다. 요한은 한참동안 아쉬움을 느끼다가, 결국은 돌아섰다.

돌아오는 길에 요한은 제롬에게 말했다.

"후퇴를 명령하는 순간 후회해버렸어."

"당연한 겁니다."

"하지만 만약에 진격을 했었어도 후회했을꺼야"

"당연한 겁니다."

"......어느쪽도 당연하다고 말하는 자네의 말에 왠지 인생은 그런법 이라는 속담이 떠오르는군. 어쨌든 나는 오늘 왠지 후회만 하는 선택의 기로에 선것 같았어. 그런 선택의 기로에서 어떤 이유로 선택을 하게 되는 건지 의심스럽더군. 특히 내 자신이 이유라고 생각되는 수많은 가지들 중에 결정적인 무언가는 없었거든."

"의사표시는 할수 있지 않습니까."

요한은 한숨을 내쉬었다. 부대는 이미 저만치 떨어져있었다. 그랬기에 이렇게 솔직할수 있는거다. 요한은 장군이었으니까.

"기시감이 드는군."

"인생은 그런법 아닙니까."

"내일에는 올바른 선택을 하고 싶어. 그래서 빨리 승리하고 그녀에게 돌아가고 싶고, 행복을 누리고 싶다네."

"들어가는 대로 참모회의를 준비하겠습니다."

"그래. 내일은 총공격을 하자. 로즈성의 꽃잎을 갈가리 찢어놓아야겠어."

제롬은 분해하는 요한의 모습 뒤로 불안감을 느꼈다. 오랜 전쟁으로 약간은 성급해 진것이 아닐까. 하지만 오늘 요한은 수많은 군세를 가지고도 성앞에서 물러섰다. 신중한 장군의 표본에 가까웠다. 어느쪽이 요한의 진짜 모습일지 제롬 역시 몰랐다. 제롬은 그 평가를 일단 보류라는 사고속에 집어넣었다. 얼마간은 잊고 지낼 것이다.


2.


태양은 꾸물대는 벌레처럼 타오르고 있었다. 한여름의 태양이다. 로즈성은 햇살을 받아 하얗게 발색하고 있었다. 그리고 로즈성의 성벽과 망루에는 병사들이 도열해있다. 그러나 그 모습 어디에도 철저한 방어라는 느낌은 전혀들지 않았다. 그랬다면, 성문이 열려있을리는 없을테니까. 그리고 로즈성의 하늘에는 수십개의 연들이 날고 있었다.
날씨를 알기 위해서라는 것은 말이 안된다. 그랬다면 저렇게 낮게 날고 있을리가 없다. 저것은 분명 연락용의 연이었다. 하지만 주변에 로즈성을 도와줄 군세가 있을리 만무했다. 아무래도 고민을 만들어 내는 것이 목적인 듯했다. 그럼에도.

"오늘도 열려있군요."

"그렇군. 저 연들은 무슨 목적에서 저렇게 떠있는지 짐작할 수 있겠나?"

"전혀 짐작할수 없군요. 저렇게 낮게 떠있고 많이 떠있는 것을 보면, 연락용인것 같지만.....근처에 로즈성을 도와줄 군세가 없지 않습니까. 아무리 봐도 저건 그저 위장성세인것 같습니다만."

"내가 보기엔 아닌것 같아."

요한의 말에 제롬은 요한을 바라보았다. 요한은 손가락으로 두가지 표시를 해보였다. 문득 그 의미를 생각하던 제롬은 그 의미에 깜짝놀라며 말했다.

"'하늘'을 부르는 거란 말입니까?"

"그런 의미로 밖에 해석이 안되잖아."

"하지만 '하늘'이 로즈성을 도와줄 이유가 전혀없지 않습니까!"

"하지만 이렇게까지 방어에만 목숨을 거는 이유가 없지 않나. 아무리봐도 뭔가 뒤에 믿을만한 구석이 있다는 것일테지. 또는 우리가 그렇게 여기길 바라는 것일 수도 있고."

"하지만 '하늘'은....."

"워커남작이라면 재미있다는 이유만으로 충분히 전쟁을 시작할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하는데?"

"가능성과 실리는 전혀 다릅니다! '하늘'이 참가할 이유가 전혀 없습니다."

"그럼 저 연들은 무엇으로 설명할껀가?"

"위장성세입니다. 쳐들어 가야 합니다."

요한은 로즈성을 다시 한번 바라보았다. 그리고 자신의 군대를바라보았다. 히아신스부대와 레몬트리부대의 모습은 한편으로 장엄하게 보이기까지 했다. 3년여의 전쟁동안 닳고 닳은 군인들에게서는 짙은 허무의 냄새와 뒤이어 그것을 감춘 엄격함의 냄새가 난다. 엄격함으로 허무를 감춘다. 전투로 하루를 보내고 한달의 반이상을 피로 얼룩지다 보면, 결국 허무감만이 남는다. 이제는 그만 해야 될때가 되었다.

선택해야 했다. 어떤 형식으로든 선택을 해야 했다. 항상 선택이 강요되는 상황에 빠지지 말자고 다짐했건만 요한은 결국 선택을 강요당하고 말았다. 모두가 원하고 있었다.

제롬은 요한의 표정을 보고는 선택의 순간이 왔다는 것을 깨달았다. 결론은 한가지밖에 없었다.
제롬은 연설이라도 해야 하지 않을까 생각했다. 마지막 전투가 될꺼라는 확신을 주어야 한다. 그러나 요한은 그러지 않았다. 평소의 모습 그대로. 요한은 손을 내밀었다. 요한의 옆에 서 있던 깃수병은 그 의미를 잘 이해하고 있었다.

깃발이 높게 솟았다. 피를 머금은 바람이 먼지결에 날렸다. 깃발은 그 바람을 타고 펄렀였다.

"진격!"

비슷한 의미의 고함소리가 벼락처럼 치솟았다.

수만의 군인들이 로즈성을 향해 달리기 시작했다. 어차피 성문은 열려있었고, 그 안으로 들어가기만 하면 되는 것이었다. 전투에 의해 다져졌던 흙더미가 먼지를 일으키며 일어났다. 흡사 흙폭풍이 들이닥치는 모습이었다. 그것은 오롯이 성문을 향해 수렴되었다.

그리고 비밀스럽게 몇명의 전령이 달려나갔다. 그것은 또다른 움직임을 주었다. 히아신스 부대에 소속되어있던 몇몇 중대들이 슬그머니 속도를 늦추기 시작했다. 그리고 크게 성을 우회했다. 우회하는 모습그대로 그 중대들은 성벽을 에워싸기시작했다. 안팎에서 던져지는 칼날들에 로즈성은 무너질수 밖에 없을것이다.

요한은 불안하게 떠있는 연을 바라보았지만, 당연한 생각밖에 할 수 없었다.

선택은 끝났고 이제 전쟁도 끝이 난다.


3

뭔가 이상했다. 가장 용감하다는 이유로 가장 먼저 성안으로 들어섰던 병사들은 뭔가 이상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들의 임무는 단순했다. 성안으로 들어서며, 자신들을 막아서는 사람들을 하나 하나 베어나가면 되었다. 그러다 자신의 몸이 더이상 움직이지 못할때까지. 그것이 그들의 임무였다. 물론 그런 생각은 하지 않겠지만.

그런 그들이었기에, 그들은 당황할 수 밖에 없었다. 그들은 모조리 바닥에 엎드려 절을 하는 사람들을 대하는 방법에 대해서는 전혀 알지 못했다. 치열한 전투를 예상하고 왔기에 그들의 당황은 컸다. 욕설을 퍼붓고 칼을 휘두르리라 생각했던 그들은 서툴은 말투로 그들에게 말을 걸어야 했다. 갑자기 칼을 빼들어 자신을 공격해주기를 바라는 마음도 어느정도 있었다.

"어. 어. 왜 이러는 거요?"

그러나 그들은 대답이 없었다. 죽었나 생각했지만, 그것은 아니었다. 그들은 바들바들 떨고 있었다. 얼마전까지 자신들과 치열하게 싸웠던 사람들이라고 생각되지 않았다. 성벽위에 있던 병사들도 마찬가지였다. 돌을 던지거나 뜨거운 기름을 퍼부어야 할 그들은 칼을 던진채 서있기만 했다.

"도대체 뭐야!"

결국은 화가 나고 말았다.

"대답하란 말이야. 이게 무슨 짓이야. 항복인거야?"

그들중에 한사람이 죽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기다려야 합니다."

"뭐야?"

"기다려야 합니다. 오고 있습니다."

그때였다. 한두사람의 입에서 외침이 터져나왔다.

"하늘!"

"구름속에서!"

"온다!"

그 외침들과 함께 모두의 고개는 하늘을 향했다. 과연 그러했다. 용감한 병사는 칼을 늘어뜨린채 그것을 바라보았다. 로즈성의 사람들이 기다리는 것이 무엇이건, 저것인게 분명했다. 엎드려있던 사람들도 고개를 들어 그것을 바라보았다.

"오셨다!"

그리고 거대한 외침이 들렸다.

"오셨다!"

그 뒤로 동시다발적인 고함들 때문에 내용을 전혀 이해못할 소리가 들렸다. 함성인지 비명인지 모를 소리들이었다. 하지만 요한의 군인들은 어떻게 행동해야 할지 전혀 파악하지 못했다. 퇴각을 해야 하는지, 싸워야 하는지. 하지만 싸운다고 해도 어떻게 싸워야 할지 몰랐다. 칼을 높이 들어봐야 그것에 닿을수는 없을 것이다.

여름의 희디 흰 구름을 천천히 흩어내며 마치 깃털처럼 가볍게 그것이 내려오고 있었다. 그러나 그 존재감만은 컸다. 거대한 산같은 느낌이었다. 하지만 산의 봉우리는 땅을 향하고 있었다. 그리고 수십가닥의 밧줄들이 팽팽하게 늘어져 하늘의 어딘가로 연결되어있었다. 아마 그 끝에는 이해못할 기계장치들이 하늘로 뜨는 부력을 만들어내고 있을 것이다. 하늘성. 스카이 워커 남작의 이동성. 그것이 오고 있었다.


밖에서 전투를 지휘하던 요한 역시 그 하늘성을 바라보았다. 자신의 짐작이 맞아들어가는 씁쓸한 경험이었다. 제롬은 이를 아득물며 성을 노려보았다. 저것이 저곳에 있으면 안되는 것이었다.

"것봐. 라고 말하고 싶지만 그럴 기분이 아니군."

"저게.......저것이 왜!"

"직접 물어볼 수 있겠군."

"예?"

요한은 저것을 보라는 듯 하늘성을 가리켰다. 하지만 그것을 하늘성을 가리킨 것이 아니었다. 하늘성의 끝부분쯤에서 점같은 것이 천천히 움직이고 있었다. 아마도 그 목적지는 요한이 있는 장소일 것이다. 오래걸릴 것이라는 요한의 예상은 틀린 것이었다. 그것은 순식간에 요한의 지척까지 나타났다. 그리고 요한을 찾는듯 요한의 주변을 맴돌다 결국 깃수병 연변에서 멈추어섰다. 깃수병 근처에는 장군이 있다.

그것은 배의 모습을 닮아있었다. 그리고 배의 중심에는 거대한 돌같은 것이 맴돌고 있었다. 맴도는 소리는 크지 않았지만, 예상 못한 돌풍이 불었다. 요한은 눈을 부릅뜨며 그 배를 바라보았다. 올려다 보고 있었기에 사람은 갑자기 불쑥 나타났다. 눈에는 고글을 차고 있었고, 어깨에는 날개를 형상화한 장식이 달려있었다. 물어볼것도 없었다.

"남작."

"장군님."

엄연히 말하자면 요한은 준 공작이었기에, 스카이워커의 존칭은 당연한것이었지만, 위치상 어울리지가 않았다.

"워커 남작. 이게 무슨 짓인가."

"저는 장미를 사랑합니다."

물론 그것이 꽃을 향한 예찬은 아닐 것이다. 요한은 불쾌해하며 말했다.

"장미의 가시가 왕을 불쾌하게 하네."

"씻을때도 장미꽃잎을 쓰곤 합니다."

".......무슨 소리인가."

"장미는 아름답습니다."

"이봐!"

"저는 장미가 필요합니다."

"무슨 생각인가. 왕에게 대적할 생각이라면 그만두게!"

"그리고 당신에게도 장미가 필요할 꺼라 생각합니다."

순간 요한은 멈칫했다. 남작의 말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로즈성이 필요하다는 의미인건가. 아니면, 또 다른 의미가 있는 것인가. 하지만 남작은 요한에게 생각할 시간을 주지 않았다.

"씻을때 장미꽃잎을 쓰면 향이 오래가고 좋습니다."

요한은 남작의 마지막 말을 무시하기로 마음먹었다. 남작의 말에서 새겨들을 건 두개 뿐이었다. 장미가 필요하다는 것과 자신 역시 필요할거라는 것. 두개의 장미가 다른 의미일꺼란 생각이 드는 건 당연했다. 그렇다고 장미가 뭐냐고 물어보기도 웃기는 짓이었다.

모든면에서 남작은 탈법적인 모습이었다. 왕을 멸망 직전까지 몰아붙였다가, 그냥 물어난 전적이 있고, 땅에는 아예 발을 붙이지 않는 기인. 하늘에서만 살아서 사람의 예법에는 무지한 사람이라고 하기엔, 외국인에 가까운 사람. 여기서 외국인은 딴 나라 사람이라는 의미다. 전혀 다른 세상에서 온듯한 사람. 하늘성은 그의 모습을 대변했다. 거꾸로된 산. 높지만 바닥을 향한 거대한 힘.

"남작."

"요한장군님. 얼마전에 아주 좋은 장미를 얻었습니다. 그런데 그 장미가 장군님 소유라고 주장하는 사람이 있더군요."

"그게 무슨 소리인가?"

"직접 물어보시지요."

그리고 불쑥 얼굴이 나타났다. 순간 꿈이라고 생각했다. 요한은 차라리 그게 꿈이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어떻게 그게 현실일 수 있겠는가. 자신의 셔츠주머니에 그녀가 쓴 편지가 담겨있는데. 어떻게 그녀가.

"장군님!"

"에를린."

"장군님! 죄송해요. 어쩔수가 없었어요. 보고 싶었어요. 당신이.......오지 않아서 너무. 너무.......힘들었어요. 힘들어서......"

"그만. 됐어. 그만 말해."

그리고 요한은 제롬을 힐끗바라보았다. 제롬은 요한의 표정에 담긴 절망의 표정을 읽어낼수 있었다. 제롬 역시 '안된다'는 의미의 격렬한 눈빛을 보냈지만, 불행히도 닿지 않은 듯했다. 요한은 다시 워커 남작을 바라보며 말했다.

"무슨 짓이지?"

"장미는 아름답습니다. 그것은 필요한 것입니다. "

"자네에게 그게 왜 필요하지?"

"아름다운것은 그 자체로 보존되어야 합니다. 저는 그렇게 생각합니다. 그게 이유입니다."

"로즈성을 말하는 건가? 그게 무엇의 아름다움이 있지?"

"아닙니다. 장군님. 왕에게 필요한 것은 적입니다. 평화로운 들판은 왕에게 필요한게 아닙니다. 병사가 있어야 왕이됩니다. 로즈성은 왕의 들판에 핀 한송이 꽃입니다. 그것이 핏빛으로 물들어있으니까 아름답습니다."

"전혀 이해가 안되는군. 내가 이해력이 부족한건가. 아니면 자네의 설명이 이상한건가."

"아름다운것은 남겨두어야 합니다. 그것이 핏빛이라도. 왕은 그것을 꺾을 권한이 없습니다. 그것은 죄입니다."

"에를린은 어떻게 된거지?"

"오는길에 만났습니다."

마치 길동무를 만나 데려온 듯한 말이었다. 그러나 그것에 담긴 여러가지 의미를 파악하지 못할 요한이 아니었다. 에를린은 인질이었다. 이대로 밀고 로즈성을 친다면, 에를린은 물론이고, 병사들과 자신역시 살아남지 못할 것이었다. 남작에게는 그럴 힘이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남작은 선택의 권한을 요한에게 주고 있었다. 그런 것이 싫었다. 요한은 선택이 주어지는 게 싫었다.

선택은 가혹했다.


4

남작은 오만하게 하늘을 바라보았다. 태양이 저편으로 넘어가고 있었다. 그러나 태양빛은 남작의 얼굴근처에서 붉게 반짝였다. 높은 고도때문이었다. 높은 고도는 태양빛을 오래도록 붙잡고 있었다. 사방에서 닥치는 바람때문에 요한은 에를린을 꼭 붙잡고 있어야만 했다.

남작의 배는 그대로 하늘성을 향해 날아가고 있었다. 아래를 힐끗 내려다본 요한은 제롬이 고함을 내지르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물론 소리는 들리지 않았지만, 그 의미는 대충 이해할 수 있었다. 반역이었다.

요한은 남작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아무런 고민도 없는 듯한 모습이다.

"무슨 이유에서지?"

"무슨 말이에요? 장군님."

"왜 로즈성을 보호하려 하고, 나를 보호하려는 것인지. 또 왜 나에게 선택의 기회를 준것인지. 또 왜 왜. 저렇게 아무런 걱정이 없어보이는지."

"하늘에서 사니까 그런게 아닐까요?"

"......다르다 이거군."

에를린은 살풋 미소를 머금었다. 그리고 한참을 머뭇거리다 말했다.

"그런데 왜 이런 선택을 하신거에요?"

"무슨 선택?"

"......왜 절......."

"글쎄."


요한은 한참이나 고민했었다. 하지만 그것은 찰라의 순간에 지나지 않았다. 오랜 전쟁에 지친 탓이기도 했고, 선택이 강요되는 것에 답답한 탓이기도 했다. 하지만 가장 큰 이유는, 정말 큰 이유는 남작때문이었다. 아니다. 사실은 요한 자신도 몰랐다.

선택의 이유라는것. 여전히 미지수였다. 하지만 적어도 의사표시는 할 수 있는 것이다.

요한에게는 에를린이 필요했다.

장미는 아름다웠다.

요한은 하늘에서 바라본 로즈성이 장미의 모습을 닮아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하늘에서 바라본 로즈성은 정말 아름다웠다. 들판에 핀 장미송이 같았다. 그리고 하늘에서 바라본 세상은 매우 달라보였다. 평소라면 넓은 들판이라고 생각했을 곳도 하늘에서 바라보니, 숲의 끄트머리에 지나지 않았다. 배는 어느덧 하늘성에 가까워져 있었다. 하늘성은 정말 산같았다. 땅을 향해 솟아오른 산. 무언가 시원함이 느껴졌다.

어차피 어느쪽이든 선택했어야 하는 문제였다.

후회는 천천히 생각할 문제였다.

"난 네가 필요해."

"왜요?"

"사랑해."

에를린이 미소지었다.

아름다웠다.


-fin-
댓글 2
  • No Profile
    요한 05.09.25 22:50 댓글 수정 삭제
    원래의 스토리를 이야기하자면, 요한은 에를린을 포기하고 전격적으로 남작을 납치한다. 목숨의 위협속에서 남작은 요한을 사랑하게 되고- 요한은 남작의 사랑을 받아들여 하늘성에서 먼 하늘 저편까지 사랑의 도피행각을 벌인다- 이로써 연인의 행방은 묘연하다. 라는 아주 미묘한 이야기. 슬프도다. 그렇게 쓰지 못한 나자신이-퍼벅!
  • No Profile
    Aube 06.01.12 21:15 댓글 수정 삭제
    간단하게 말해서... 스토리나 문장스타일이 무척 맘에 들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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