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섬의 동쪽 자락에, 한줄기 빛이 지평선까지 멀리 뻗어 있었다.

물결도 잘 일지 않는 밤, 셀 수 없는 별이 흐르는 강의 밤하늘은 고요하다. 흩어지는 푸
른빛으로 차갑게 빛나던 달은 그저 지상을 조용히 관조할 따름이었다. 공기는 무척 차갑
다. 이따금 바다가 땅으로 밀려와 부수어지면 새들은 깜짝 놀라 푸드덕거리며 마침 시들
어가던 흙빛 잎들을 흔들어 떨어뜨린다. 섬에는 겨울이 일찍 찾아온다. 따뜻한 바람을
타고 날아온 새들은 이미 떠난 지 오래였고, 그들을 따라 노랫소리도 저 멀리 아스라하
게 흩어져버렸다. 새가 울지 않는 숲은 그저 을씨년스러울 뿐이다.

낙원을 꿈꾸며 남쪽의 섬을 찾은 여행자들은 따뜻한 바람을 타고 내려왔다가 새들과 함
께 왔던 길을 되돌아 떠나버린다. 그래서 사람이 많지 않은 섬은 그저 조용할 뿐이나, 또
한 북적거렸다. 문득 밀려온 바다가 단단한 바위에 부딪혀 오는 소리에 새 한 마리가 멀
찍이 날아가 버린다. 섬의 동쪽 끝자락, 낮은 절벽이 있는 숲의 끝자락엔 바람도 잘 불지
않았다. 그래서 온통 조용하다.

겨울이 다가온다. 아무도 기대한 적이 없는 겨울이 다가오자, 섬사람들은 모두들 분주
한 모습이다. 사람이 많지 않은 섬에서 일 년 동안 분주히 곡식을 거두면, 겨울을 그럭저
럭 날 수 있을 만큼의 곡물을 얻을 수 있다. 그런 일들이 세대를 지나면서 유지되고, 비
슷한 하루하루가 지나가도 사람들은 불평 하나 하지 않는다. 몇 대에 걸친 기억들이 그
일과를 본능으로 만들고 나면, 그것은 곧 삶이 되는 것이다. 섬 밖으로 항해한 적이 없는
그들은, 미처 불평할 수 있을 기준 자체를 얻지 못했다. 그래서 그들을 나무라는 사람조
차 없다.

차갑고 다소 을씨년스럽게 다가오는 겨울에, 순찰자들은 더욱 말이 없다. 그저 고요히
밤을 지내고, 말없이 섬의 끝자락에서 불을 지키며 바다 저 너머를 바라볼 따름이다. 계
절이 지나가도 넓은 남쪽의 바다는 변함이 없다. 결코 얼지 않으며 봄 노래를 속삭여주
지도 않는다.  

그래서 순찰자들은 결코 노래를 부르는 법이 없다.

저, 오라비.

목소리는 낮고 청아하다. 밤의 장막을 살짝 흔들며 다가오는 아스라한 목소리에 '오라
비'는 고개를 돌렸다. 입이 없는 벗들과 너무 오래 지내 온 순찰자는 말이 없다. 다만 그
저 밤새 지켜야만 할 모닥불 너머로 대답을 기다리는 듯 소녀를 가만히 바라볼 따름이었
다. 소녀는 가만히 그를 바라보다 문득 깨닫고는 고개를 푹 숙이며 말을 이어간다.

다시 봄이 오면, 이번엔 또 다른 여행자들이 섬을 찾아오겠지요, 오라비? 그러면 저도
다시 눈이 와도 홀로 남아있지는 않게끔 짝을 찾을 수 있을까요? 오라비도, 빨리 그렇게
되었으면 좋겠는걸요. 오라비보다 말이 많고, 오라비 옆이 잘 어울리는 그런 사람.

아내를 맞으면 나는 더 이상 순찰자가 못 돼, 항상 말했듯 그러지도 않을 거고.

소녀는 입술을 비죽 내밀고는 고개를 안고 있던 두 무릎 사이에 파묻었다. 다시 바다가
섬을 향해 다가와 부수어졌지만 소리는 그저 아스라했다. 순찰자는 말없이 저 너머를 관
조하면서도 도무지 말이 없다. 이후 이따금씩 바다가 섬에 다가와 부딪쳐 흩어지는 소리
가 몇 번 이어지고, 소녀는 문득 눈을 감았다. 주위는 상상하기 힘들 정도로 조용했다.
이따금씩 순찰자가 몸을 일으켜 모닥불에 불을 지피는 소리가 들렸을 뿐이다.

섬의 동쪽 끝자락에서 소녀는 문득 꿈을 꾼다.

마치 오래전부터 몇 번이고 그렇게 꿈을 꾸었던 것처럼 낯설지가 않다. 어두운 밤의 끝
자락에서 소녀의 손을 잡고 서 있는 남자가 있다. 저 끝자락에서 작은 나룻배에 몸을 누
이고 느릿한 물길을 따라 소녀를 찾아온다. 수없이 많은 빛이 반짝이고 있는 밤의 바다
를 지나고, 셀 수 없는 긴 밤이 흐르고 나면 그가 찾아온다. 낡은 나룻배에 몸을 누이고
좌우로 처연하게 흔들리는 그가 있다. 잠을 이루지 못하고 밤을 지새우던 때에 그가 나
타난다.

소녀는 그제야 눈을 뜬다.

묘연, 이제 돌아가. 순찰자의 밤을 지새우는 건 하등 좋을 게 없으니까.

순찰자는 무표정하게 소녀를 바라본다. 새 한 마리가 목을 길게 빼어 울고, 문득 차가워
진 바람이 들풀을 흔들다 아스라이 사라졌다. 풀벌레 소리가 사라진 지 오래인 섬의 동
쪽 끝자락은 찾아오는 이 없이 적막하다. 순찰자는 문득 소녀가 대답 없이 그저 바다 저
너머만을 바라보고 있다는 걸 느끼고 의아해했다. 그러나 정적은 잠시였고, 놀란 듯한
얼굴로 소녀는 입을 열었다. 소녀는 다소 떨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오라비, 저 너머에…

말이 끝나기도 전에 순찰자는 고개를 돌리며 몸을 일으켰다. 검 손잡이에 손을 가져가
며 날카롭게 저 너머를 응시한다. 밤의 바다는 한없이 어둡다가도 수없이 흐르는 별들에
반짝이곤 했다. 끝이 보이지 않는 어둠 사이로 순찰자는 저 너머에서부터 문득 찰박거리
는 소리를 내며 느릿하게 떠내려 오는 어떤 물체를 바라본다. 그리고 그 익숙한 모양에
문득 그도 놀라움을 느낀다. 그저 조각배다. 그러나 이젠 물길도 닿지 않을 이곳에?

불을 지키던 순찰자는 문득 생각에 잠긴다. 가장 가깝다고 할 만한 남쪽 반도 주위의 항
구에서는 물길이 이곳으로 닿지 않는다. 노가 없는 저런 조악한 배로 이곳까지 항해하는
건 불가능했다. 그렇다고 물길이 이곳까지 닿으려면 적어도 동쪽의 거대한 만 근처에서
부터 떠내려 왔다고 가정해야 했는데, 그건 더욱더 불가능했다. 그렇다면 저 배는 적어
도 두 달 가량을 항해한 것인가? 식량을 담을 만한 공간이 있을 리 없다. 아, 그러나 그는
문득 다소 안심이 되는 것을 느꼈다. 저 배에 사람이 타고 있으리라는 보장은 없다.

그는 천천히 낮은 절벽 가까이로 다가갔다. 그러나 그저 저 멀리까지 한줄기 불빛을 보
낼 뿐일 모닥불로는 밤의 어둠을 감당할 수 없어서인지 아무것도 보이질 않는다. 배는
아주 천천히 절벽 아래의 해안가로 다가오지만, 그 시간은 차츰 그를 긴장시킨다. 문득
느릿하게 떠내려 오는 조각배에서 눈을 떼지 않은 채 순찰자는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

묘연, 절벽에서 내려오지 말아. 반드시 불 근처에 머물러 있어야만 한다.

대답은 듣지 않았다. 그는 간단히 절벽의 완만한 경사를 찾자마자 능숙한 발걸음으로
바위를 타고 절벽 아래의 해안가로 내려왔다. 바람도 불지 않았고 하늘은 그저 어둡기만
할 뿐이어서 구름 한 조각 떠다니지 않는다. 길디긴 해안가는 굽이치다 멀지 않은 곳에
서 문득 사라졌다. 동쪽 절벽의 해안가는 물이 조금이라도 불면 모두 잠겨버릴 만큼 좁
고 길기만 할 뿐이어서, 배를 정박하기엔 결코 좋은 곳이 아니었다. 이따금씩 바다가 다
가와 부딪칠 때마다 씁쓸한 소금 냄새가 확 하고 밀려오고 다시 아스라이 물러났다.

서른세 걸음 정도, 순찰자는 조심스레 그 거리를 가늠해 보았다.

어둡다. 예상대로 사람은, 적어도 사람과 비슷한 형상은 전혀 보이지 않는다. 그는 다소
안심하지만, 뱃전 안쪽을 들여다볼 수가 없다는 점에서 위험의 소지는 여전히 충분했다.
느릿하게 다가오는 흙빛 조각배는 다 낡아 떨어진 것이었고, 점점 가깝게 다가오는 조각
배에서부터의 삐걱거리는 소리는 무척이나 위협적이었다.

이윽고 배가 해변에 닿자, 순찰자는 천천히 다가가며 검 손잡이를 잡은 손에 힘을 주었
다. 물이 다소 차오른 뱃전 안에는 무언가를 덮은 쥐색 담요 같은 것이 있었다. 경계를
풀지 않은 채 순찰자는 천천히 주위를 살펴본다. 뱃전에 와 닿는 파도와 그 너머의 한없
는 어둠을 제외하면 아무것도 없다. 잠시 고민하던 그는 몸을 돌려 묘연을 불러 불을 붙
인 장작 하나를 가져오도록 했다. 소녀가 조심스레 횃불을 들고 경사가 비교적 낮은 곳
을 찾아 내려오는 동안 순찰자는 조심스레 천 아래에 있을 그 무언가를 가늠해 보았다.

소녀가 다소 뒤에 서서 횃불을 들고 있는 동안 순찰자는 해변가에서 곧고 긴 나무막대
같은 것을 찾아낸 다음 뱃전으로 다가가 조심스레 뱃전 전체를 덮은 천을 걷어냈다. 순
찰자는 말이 없었으나 그 짧은 순간 묘연이 앗, 하고 놀란 듯한 소리를 낸다.

뱃전 안에는 젊은 청년 하나가 정신을 잃은 채 누워 있었다.




해가 뜨면 그들만의 밤을 지새운 순찰자들은 하나둘씩 섬의 마을로 돌아온다. 겨울이
다가오고 있는 섬에는 사람이 많지 않다. 소리 없는 눈과 짙은 소금기를 건초의 텁텁한
냄새로 채우고 나면 여행자들이 곧잘 머물던 창고에서 점차 사람의 냄새가 사라지기 시
작했다. 섬의 가을은 무척이나 짧다. 마치 하루살이처럼 가을이 사라지면 미처 몸을 얼
리는 바람이 가슴속으로 파고들기도 전에 눈이 내리기 시작한다. 올해는 겨울이 서두르
고 있는지 벌써 눈이 온 지도 며칠이나 지난 뒤다. 바짝 얼어 있는 공기가 가슴으로 파고
들었다.

그래, 서두르고 있었다. 미처 덥다고 느끼기도 전에 여름은 이미 저 멀리 지나가 있었
다. 동쪽 절벽의 순찰자는 왼손을 검 손잡이에 올린 채 그의 오두막으로 걸음을 옮겼다.
공기가 얼면 그만큼 검은 날이 선다, 그러나 겨울 담요에 몸을 누인 섬에는 찾아올 이 하
나 없다. 열네 번째 달이 오면 순찰자들도 그들의 밤을 지새우려 하지 않았다. 올해는 그
기간이 조금 더 빨리 찾아올 듯하다. 마지막 배가 들어온 것이 이미 한 달 전이었으니까.

키가 훤칠한 순찰자는 나무가 무성한 숲 속을 가로지른다.

숲의 나무들은 잎이 바늘같이 뾰족하고 줄기가 자를 댄 것처럼 곧다. 동쪽으로 죽 이어
진 오솔길을 따라가면 순찰자가 밤을 지새우던 동쪽 절벽이 나온다. 오솔길은 좁고 어둡
다. 하나의 이름이 몇 사람인가에게로 전해지는 동안에도 사람의 힘으로는 자를 수 없었
기에 오솔길 안에서는 하늘을 바라보는 것조차도 어려운 일이었다. 그렇게 오솔길을 따
라 섬 중앙으로 걷다 문득 하늘이 보이는 곳에 그의 집이 있다. 꼭대기가 보이지 않았던
나무들을 자르고 다듬어 만든 집은 여름의 광폭한 폭풍에도 결코 흔들리는 법이 없었다.
마을과 동쪽 절벽의 중간쯤, 숲의 한가운데에 지은 집은 낡았음에도 결코 흔들리지 않는
그의 유일한 안식처였다. 하루에 세 번 문득 굴뚝 위로 새하얀 연기가 한줄기 하늘로 올
라가면 문득 어디선가 섬의 동물들이 하나둘씩 찾아오곤 하던 그런 곳.

묘연, 하고 순찰자는 누군가의 이름을 부른다.

그러면 어느새 집의 뒤켠에서 문득 아끼는 고양이 한 마리를 끌어안은 채 소녀가 반가
운 듯 뛰어나온다. 이제 열일곱이나 되었을까, 소녀는 무척이나 눈이 맑았다. 섬에서는
유일한 고양이를 인형처럼 끌어안은 채 무슨 말을 먼저 해야 할까, 하고 한참이나 고민
한다. 이 자그마한 소녀에게서는 기분 좋은 냄새를 맡을 수 있었다. 잘 익은 보리 냄새일
까, 아니면 갓 구운 빵 냄새였을까는 분명치 않다. 그녀는 문득 웃는다.

오라비, 어서 조반을 드셔야지요. 그 남자가 깨어났었어요.

문을 열고 들어가며 순찰자는 문득 반대편의 침대 위에 누운 남자를 바라본다. 휘장을
쳐 놓은 창문 아래 그의 모습 위로 던져진 그림자는 어둡다. 얼굴의 혈색은 조금이나마
돌아온 기색이었고 한동안 쉽사리 일어날 수는 없겠지만 주의해야 했다. 순찰자가 아닌
자로서도 이방인만은 결코 신뢰하지 못했다. 섬에서 벌어졌던 무수한 사건들을 기억하
고 있는 그가 이방인을 신뢰하는 건 불가능한 일이기도 했지만. 그의 뒤를 따라 소녀가
안으로 들어서며 문을 닫았고 불현듯 무언가 생각난 듯 입을 열었다.

어젯밤에 오라비가 절벽에 나가 있는 동안 홀로 잠이 들었다 깨어났는데, 그가 일어나
있었던 걸요. 이름도 말해 줬고…대륙 동부에서 온 사람이라고 했었어요, 오라비. 제게
몇 번이고 고맙다는 말을 하던걸요. 오라비에게도 그 말을 전해 달라 부탁했었구요.

순찰자는 눈가를 찡그렸다. 그러나 답은 하나일 터였다. 자신이 틀렸거나, 저 누운 채
말이 없는 남자가 거짓말을 하고 있거나. 그가 확신하고 있듯 동부의 그 어떤 항구에서
도 저런 조악한 조각배로는 섬까지 항해해 올 수는 없다. 그러나 다른 가능성은 없는 것
인가? 현재로서는 의중을 가리기가 힘든 상태였다. 순찰자는 천천히 검을 풀어 옆에 내
려놓고 아직은 얇기만 한 외투를 벗어 대충 정리한 뒤 의자 위에 올려놓는다.

저 남자를 발견한 날로부터는 어느새 사흘째가 된다. 죽을 지경으로 보이는, 아니 이미
죽은 상태라고 생각했던 남자를 마을까지 옮겨다 놓기에는 멀고 위험했기에 열흘 정도
는 순찰자의 집에 머물도록 해야만 했었다. 끝까지 마뜩찮아 하던 오라비를 알면서도 묘
연은 왜 그걸 승낙했던 걸까…순찰자는 그렇게 생각하며 눈을 돌려 자그마한 소녀를 바
라본다. 그러다 문득 그녀의 눈이 저편 침대에 가지런히 누워 있는 남자를 향했다가 돌
아오는 것을 눈치채곤 의아해했다. 그러나 그러다가 문득 잊어버리고 그저 수저를 들어
죽을 떠먹기 시작할 따름이다.

그러다 순찰자는 문득 고개를 들어 소녀를 바라본다.

묘연, 집안의 문은 왜 다 닫아 놓은 거지? 햇빛이 전혀 들어오질 않잖아.

그 사람이, 제게 부탁했었어요. 햇빛이 밝아 잠을 방해하면 좋지 않을 테니까.

그런가. 집 안은 온통 어두웠다. 휘장이 드리워지고, 덧문도 단단히 닫아 놓았지만 덧문
과 문틈 사이사이에서 새어나오는 햇빛이 문득 방 안을 밝히고 있었다. 순찰자는 새삼스
레 주위를 둘러본다. 매번 집 밖에서 밤을 지내곤 했던 순찰자에게 이런 어두운 방의 모
습은 무척이나 낯설었다. 당연하다고 믿었던 것이 갑자기 변해버린 것처럼.

찰칵, 하고 시계의 태엽이 돌아간다. 죽은 다소 묽은 느낌이 났다.

무표정하게 빵 한 조각을 뜯어 죽에 담갔다가 순찰자는 발아래에 앉아 목을 죽 뺀 채 그
를 바라보는 고양이의 얼굴을 마주보았다. 옥빛 눈동자. 섬에 단 한 마리밖에 없는 고양
이를 좋아하는 사람은 많지 않았다. 물론 순찰자도 그랬다. 다만 다른 사람들처럼 고양
이를 불길하다고 여겨서가 아니라 묘연이 한참 어릴 적 저 고양이를 안고 들어왔을 때
갑자기 저 고양이가 그를 보고 달려들어 다짜고짜 옷을 죽죽 찢어 놓은 덕택이었다. 그
당시에 고양이라는 동물 자체에 대해서 아무것도 몰랐던 그는 묘연을 다그쳐 고양이를
쫓아내 보려고 했지만 어린 묘연은 고집이 무척이나 셌기 때문에 번번이 실패하곤 했다.

고양이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면서 그렇게 마냥 싫어하는 건 싫다…라고 했던가, 울면서
몇 번이고 화를 내던 묘연의 얼굴은 그때가 처음이었었다. 소녀의 말은 분명 사실이었고
그 때문인지 아니면 그녀의 고집에 꺾였던 건지는 모르겠지만 결국 그는 승낙해 줄 밖에
는 없었었다. 무엇이 소녀를 그렇게 애착을 가지게 했는지는 끝내 불분명했지만.

순찰자는 그런 생각을 하며 문득 고개를 들어 묘연을 바라보았다. 그녀의 눈동자는 왜
인지 버릇처럼 바라보곤 했던 장소를 떠나 미동도 없이 누운 남자를 향해 있었다.




밤이 되면 순찰자는 불을 지키려 또다시 밤을 지새운다. 겨울은 춥다. 동쪽 해안을 끊임
없이 주시하면서 그는 입술을 떨며 망토를 고쳐 걸치곤 했다. 너무나 고요해서, 추위에
입술과 함께 얼어버린 숨소리마저 귀를 메운다. 겨울이 되면 하늘은 마치 샘물처럼 맑
다. 마치 샘물처럼, 반짝이는 빛들이 가득하다. 무수히 많은 별의 바다가 눈앞을 지나 동
쪽으로 뻗어 있다. 그 어떤 양치기라 해도 모두 알아볼 수는 없을 별자리들이었다.

그는 문득 이 하늘을 보기 위해 종종 그를 따라오곤 하던 묘연을 떠올렸다.

소녀가 웃는 모습은 문득 그를 답답하게 한다. 그녀가 네 살이 된 이래, 묘연은 또래의
남자를 만나 본 일이 전혀 없었다. 여행자들은 새를 따라왔다 새를 따라 곧잘 돌아가 버
리곤 했고 섬에 단 하나 남아있는 소녀에게 관심을 가지는 마을사람도 많지 않았다. 모
두들 그녀에 대해 걱정은 했지만, 도울 길이 없으니 그저 잊어버릴 따름이었다. 기나긴
사춘기가 지나면, 소녀는 그것을 눈치 채고 짝을 열망하기 시작한다. 마을사람 중에는
대륙까지 다녀온 자가 얼마 되지 않았기에, 대륙에의 긴 여행을 마치고 돌아온 그녀의
오라비를 귀찮게 하면서까지 소녀는 그곳의 이야기를 듣고 싶어 했었다. 녹옥 빛의 눈을
반짝이며. 또래의 여자아이가 없었던 묘연은 이따금씩 혼자서 그런 상상에 잠겼다. 이야
기를 꾸미면서도, 보장이 없는 꿈을 꾸면서도 소녀는 그저 가슴 설렐 뿐이다.

그래, 그게 문제였다.

출신도 나이도 이름도 불분명한 이방인이란 그 얼마나 위험한 것이던가, 그 어떤 방법
이 되건, 그가 묘연에게 해를 끼치려 마음만 먹는다면 그것은 손쉬운 일이 될 거라는 점
은 분명 명백했다. 꿈을 꾸는 여자아이란 또 얼마나 위험한 존재인가. 소녀는 그 꿈이 허
황되리라는 것을 이미 짐작하고 있지만 그 허황됨을 믿는 자체가 달콤한 일이기에 미처
떨쳐 버리지 못한다. 그러나 그것이 독이 되어 그녀에게 해가 될 거라는 걸 짐작해도, 그
때문에 자그마한 누이동생의 꿈을 망쳐도 좋은 것인가? 순찰자는 입술을 깨문다.

하루하루 밝아져 가는 묘연은 이따금씩 순찰자에게 이런저런 이야기를 들려주곤 한다.
홍조가 어린 얼굴을 숨기지도 않은 채로 환하게 웃는 얼굴은, 그에게 무척이나 복잡한
심정을 안겨주고 있었다. 그녀가 기뻐하고 있으니 좋아해야 하는 건지 아니면 불안해해
야 하는 건지 그는 결코 알 수가 없었지만, 복잡한 심정만큼은 어쩔 수가 없는 것이었다.

순찰자는 저녁 즈음에 모아 둔 마른 나뭇가지 두엇을 집어 불 속으로 던져 넣는다. 그러
다 문득 코에 닿는 냄새가 무척이나 맵다는 걸 느끼곤 얼굴을 찡그렸다.

몇 년이고 바랐던 꿈은, 어쩌면 허무한 것일지도 몰랐다. 아무것도 모르는 묘연이 바라
는 것은 어쩌면 순찰자에게는 무의미한 것일지도 모른다. 순찰자는 문득 바다 저 끝자락
에 어스름하게 빛나는 지평선 너머를 바라본다. 짝을 바라는 열망이라는 것을 상상해 보
지도 않았었던 아이에게로 찾아온 것은 본능이었을까…. 모든 위험을 헤치고 살아남은
여행자들도 항해하기 꺼리는 이 바다를 건너 찾아와 마음의 문을 두드리고 꿈을 꾸게 했
던 건 도대체 무엇이었을까, 하고 순찰자는 문득 생각해 보았다. 아무것도 모르던 녹옥
빛 눈동자의 자그마한 어린아이가 짝을 기다리는 소녀가 될 때까지는, 긴 시간이 걸리지
않았었다. 대륙에서 돌아왔을 때에, 그저 선물을 바랄 줄 알았던 어린아이가 사랑 이야
기에 관심이 있다는 사실은 그를 당황시키기에 충분했다.

문득 나뭇잎 사이를 스치는 바람 소리가 들려오면, 순찰자는 버릇처럼 하늘을 올려다보
곤 했다. 그러면 숲의 관목들과, 키가 무척이나 큰 나무들이 그를 따라 고개를 든다. 바
닥에는 온통 푹신하게 쌓인 낙엽들이 파르르 떨고 있다. 땅은 보통 그랬던 것보다 다소
단단하게 얼어 있었지만, 바다는 도도하게 얼지 않은 채 그 추위를 껴안아 버린다. 세상
은 어둡다. 혹여 자만심이 지나쳐 섬을 지나 남쪽으로 항해하는 뱃사람이 없도록 경고하
듯 모닥불은 바다 저 너머로 빛을 던지곤 했다. 환한 빛줄기 하나가 태양이 떠오를 때까
지 세상 저 너머의 어스름을 비추면, 순찰자의 하루는 끝난다. 그러나 왜인지 오늘은 모
닥불의 빛도 지평선 너머의 푸르스름한 어스름도 순찰자 주위를 맴돌던 옅은 물안개도
무척이나 어두워 보인다. 기분 탓일까, 그는 의아해하며 밤하늘을 바라본다.

그리고 그는 자신도 모르게 벌떡 일어나며 탄성을 지른다. 녹옥이다.

한눈에 다 들어오지도 않을 밤하늘을 가로지르는 녹옥빛 강이 있었다. 남쪽의 저 어스
름으로부터, 그리고 밤하늘 한가운데의 높고 어두운 곳까지를 가로지르는 한 줄기 빛의
강이 있었다. 녹옥빛 극광, 빛의 강은 마치 옅은 빛깔의 휘장처럼 대지에 닿을 듯, 닿을
듯 길게 늘어뜨려져 있었다. 녹옥빛 사이로 문득 가장 밝은 별이 빛나는 게 보였지만 그
것은 한낱 강가에 비치곤 하는 한줄기 반짝임에 불과하지 않다. 그러나 그 반짝임은 시
선을 빼앗아 버리기에는 충분한 것이어서, 순찰자는 눈을 뗄 수가 없었다.

세상에서 가장 부드러운 비단처럼 거대한 빛의 강은 하늘 저 너머를 가로질러 흐른다.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빛은 정교한 모양새로 강이 되어 떠나간다.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듯 빛이 흩날리면, 그것은 대지에 닿아 숲이 될 것만 같다. 그렇게 거대한 빛의 강은 또
한 녹옥빛 휘장이 되어 얼어붙기 시작한 대지를 덮는다.

섬의 동쪽 끝자락에서, 절벽 끝에 걸터앉아 바다를 마주한 순찰자는 빛의 강을 올려다
본다. 동쪽의 어스름에서부터 뻗어나온 거대한 녹옥빛 극광이 있다. 무한한 침묵으로 그
를 마주하면 그것은 또한 무한한 침묵으로 그를 환영하곤 했다.

순찰자는 언제나처럼 저 너머를 바라본다.




그는 눈을 감은 채 묘연의 녹옥빛 눈동자를 바라본다. 밤하늘을 바라보는 소녀의 눈동
자에 극광이 비치면, 그것은 다만 소녀의 눈동자 안에서 하릴없이 부수어질 따름이다.
멍하니 창 밖을 바라보던 묘연이 문득 고개를 돌려 미소 짓는 그의 얼굴을 바라보고 자
신도 모르게 확 달아오른 얼굴에 고개를 푹 숙인다. 고개를 들어 청년을 바라보는 시간
은 길지 않지만, 다소 긴장되는 입술을 깨물면 소녀는 그제야 망설이며 입을 연다.

저기, 오라비도…저걸 보고 계시겠지요?

남자는 잠시 생각에 잠긴 듯하다 문득 웃으며 고개를 끄덕인다.

홍조가 돋은 묘연의 자그마한 입은 꼭 닫힌 채 옅은 미소를 띄었다. 그러나 극광보다도
찬연하게 반짝이는 눈동자는 그대로 그의 미소를 비춘다. 청년은 말이 없다. 그저 침대
에서 상체만을 힘겨운 듯 일으킨 채로 침대맡에 의자를 끌어당겨 가만히 앉은 소녀를 바
라볼 따름이다. 묘연은 무척이나 자그마하다. 그렇게 청년이 침대 머리맡에 등을 대어
그녀를 찬찬히 내려다보면 소녀는 몇 번이고 눈을 피하다 다시 마주친다.

한없이 길디긴 일주일의 밤이었다. 그러나 서로 망설였던 시간도 그만큼 길었다. 마치
사흘째 되던 날 그가 깨어나도 소녀가 말을 붙이기마저 어려워했던 것처럼. 남자는 여태
껏 두 눈을 가볍게 감고 있는 채였고, 여태껏 소녀에게 눈동자를 보여 준 적이 없었다.
묘연은 의아해하며 몇 번이고 물었지만 그 어떤 답변이라도 흔쾌히 답해 주던 남자도 그
에 대해서는 말이 없다. 다시 한번 물어볼까 하는 마음에 묘연이 고개를 들어 남자를 바
라보면 그는 눈을 감은 채 천천히 손을 더듬어 소녀의 손을 꼭 잡는다. 그의 손은 단단하
다. 마치 몇 년이고 검을 잡아왔던 순찰자들의 손처럼.

흙빛 머리칼 아래 숨겨진 두 눈동자는 어떤 색일까 하고 곰곰이 생각해 보았지만 이미
소녀의 마음은 온통 그가 쥔 소녀의 왼손에 가 있었다. 어떻게 해야 하나, 라고 자신에게
되물어보지만 머리가 혼란스러워질 지경이다. 입술을 깨물고, 고개를 들어 그를 바라보
려고 할 때쯤 남자는 그녀의 손을 끌어당기며 몸을 숙여 자그마한 목소리로 소녀의 귓가
에 무언가를 속삭인다.

찰칵, 하고 시계의 태엽이 다시 한번 돌아가면 어둠 속에서도 그녀의 얼굴을 볼 수 있
다. 홍조가 어린 얼굴과, 입술을 깨문 채 대답을 찾지 못하는 곳에 소녀가 있다.

다만 묘연은 그의 잡은 손을 놓지는 않는다.

많이 춥군요, 섬은.

앞으로 훨씬 추워질 텐데, 대륙으로 나갈 배가 없었기에 소녀는 이 추운 겨울을 이곳에
서 지내야만 할 그의 모습을 떠올리곤 잡은 손에 힘을 꼭 주었다. 그러나 여전히 그녀는
망설이고 있었다. 그를 처음 만난 이후 일주일간 그래왔던 것처럼. 몇 번이고 꾸었던 꿈
에서만큼 그에게 적극적으로 대할 수가 없었다. 그것은, 그녀가 꿈이라는 걸 어느 정도
짐작하고 있어서였을까. 묘연은 다만 그를 바라보며 입을 열 따름이었다.

앞으로 훨씬 더 추워지는 걸요. 그렇게 되면 앞으로 아는 하나 사람 없는 섬에서만큼은
겨울을 나기가 무척이나 힘들 텐데요. 배는 이미 끊긴 지 오래에요.

여기 앞에 있잖아요, 묘연. 그리고 저는, 떠날 생각을 한 적도 없고.

남자의 말에 소녀는 문득 놀란다. 잠시간 정적이 오가고, 소녀도 청년도 마땅히 할 말을
찾지 못한 듯 그대로 멈추어 서로를 바라볼 따름이다. 서투른 듯한 대화가 흐르고 나면
창 밖으로 보이는 숲의 그림자 너머 빛의 휘장이 대지로 늘어뜨려지고, 곧 아스라이 사
라진다. 바람이 한바탕 열린 덧문을 흔들고 나면 문득 예전에 느껴왔던 겨울과는 새삼
다른 추위를 느낀 그는 몸을 떤다. 새삼스럽다.

소녀는 더 이상 그에게 물어볼 말이 없다. 더 이상 대답할 말이 없이 떨던 남자는 묘연
의 손을 조심스레 끌어당기고, 머뭇거리던 묘연은 새삼 그의 몸이 무척이나 차갑다는 걸
느끼고 그의 목을 끌어안는다. 차다. 문득 꿈에서처럼 그를 꼭 끌어안던 소녀는 그가 얼
마나 추워했었던 걸까, 하고 걱정하며 그의 손을 더듬어 쥔다. 한없이 얼어붙은 듯한 세
상에 그가 있다. 한줄기 바람이 또다시 창가에 밀려와 창문이 파르르 떠는 소리가 들리
면 남자는 겁이 나는 듯 꼭 잡은 손에 힘을 준다. 무엇에 그렇게 겁을 먹고 있는 걸까, 하
고 묘연은 생각했지만 금세 추위가 가시는 듯한 그의 품에서 소녀는 문득 눈을 감는다.

말로는 다 할 수 없는 어떤 단어들을 그는 귓가에 속삭이고 있었다. 그러다 언젠가 문득
속삭임이 멈추면 지진 듯 소녀의 가는 목덜미에 와 닿는 남자의 뺨과 입술이 있다. 차다.
소녀는 문득 몸을 떨다 그가 했던 것처럼 작은 목소리로 속삭인다.

몸이 차요, 아직도 몸이 안 좋으신 것 같아요.

남자는 대답이 없다. 다만 잡은 손을 놓지 않은 채 자그마한 소녀를 끌어안고 침대 맡에
앉아 있었을 뿐이다. 묘연은 자그마했지만 난로처럼 따뜻했다. 창문 너머에는 새카만 숲
의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다. 떠나버린 새들의 울음소리는 날카롭게 나뭇잎 사이를 스쳐
지나가고 이따금씩 창문을 흔들어대곤 했다. 녹옥 빛의 강은 끊임없이 흘러간다. 그는
눈을 뜨지도 않은 채로 저 너머를 올려다보았다.

그의 품속은 소녀의 체온으로 따뜻해지고, 현실이 된 그녀의 꿈속에서 묘연은 문득 깊
게 잠이 든다. 두 번 다시 깨어나지 않을 것처럼 편안하게.




아침이 되어도 잠든 대지는 쉬이 깨어나지 않았다.

겨울이 되면 대지는 잠에 든다. 몸을 얼릴 듯한 바람이 남쪽에서부터 불어오기 시작하
면 미처 치우지 못한 낙엽의 이불 아래에서 잠이 들곤 오랫동안 깨어나지 않는다. 잠든
대지는 그러나 미처 잠자리를 구하지 못할 동물들을 품에 안는다. 그리하여 경솔한 겨울
의 바람이 그들을 앗아가지 않도록. 집이 없는 생명은 대지의 품 안으로 기어들어가 미
처 남쪽의 바람이 그들의 털을 빗어 내리기도 전에 사라져버린다.

그리하여 숲 속의 오솔길은 무척이나 조용하다. 갈 곳을 잃어버린 듯한 바람만이 문득
숲 언저리를 가볍게 훑고 지나갈 따름이다.

겨울의 태풍을 예비하는 차고 눅눅한 동쪽 바람에 순찰자는 문득 걸음을 빨리 했다. 날
씨는 놀랄 만큼 맑아서 미처 춥다는 것을 느끼기도 어려웠지만, 저 먼 동쪽 하늘의 지평
선에서 일단의 구름들이 밀려오고 있는 것만은 똑똑히 볼 수 있었다.

얼마쯤 갔던가, 그는 오솔길 가장자리를 따라 난 어떤 붉은 흔적을 발견했다. 이미 타오
르는 불꽃과도 같은 색으로 물들어버린 낙엽들 위로 그 흔적들을 찾을 수 있었던 것은,
아마 그것이 놀랄 만한 인상을 지니고 있어서일지도 모른다. 점점이, 문득 말라버린 핏
자국들은 지나다니는 이 하나 없는 오솔길 가장자리를 따라 길게 늘어져 있었다. 이 길
을 지나는 자가 그와 묘연을 제외하고 더 있었던가? 알 수 없다. 그러나 가능성도 적다.

천천히 흔적을 추적하던 순찰자는 문득 그 흔적이 그의 오두막으로 향해 있다는 걸 발
견하고 문득 걸음을 서두르다 뛰기 시작한다. 능숙한 순찰자의 걸음은 보통 사람들이 전
력으로 뛰는 것만큼이나 재빨랐고, 지붕이 없는 방처럼, 낙엽이 떨어진 오솔길의 눈부신
정경들이 마치 그림처럼 빠르게 흩어진다. 초조함은 걸음을 재촉하고, 날카로운 이성은
그런 가운데에서 피의 흔적을 찾아낸다. 오솔길 저편으로 이어지는 숲의 중심으로부터
문득 와 닿는 풀빛은 무척이나 차다. 어둡고, 차가운 빛이 끊어지는 곳에 그의 오두막이
있다. 곧 흔적들이 끊어지고 순찰자는 주위를 둘러본다.

집 오른편 나뭇단을 쌓아 놓은 뒤편으로 이어지던 숲의 경계에서 그는 문득 무척이나
많은 피의 흔적을 발견한다. 누구의 혈흔인지는 알 수 없었다. 온통 피가 흐르다 경솔한
바람이 찾아온 듯 굳어 있는 숲의 경계에서 그는 불안함에 몸을 떤다. 새삼스레 밝아진
햇빛에 반짝이는 건 온통 핏자국이었지만 그 피의 원천만은 보이지 않았다.

누이동생의 이름을 부르며 순찰자는 집 주위를 빙 돌다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선다. 무
척이나 어둡다. 방은 창문으로부터 흩어지는 한줄기 빛에 의지해 있었다. 인기척은 없
다. 순찰자는 온통 신경을 곤두세우며 한걸음 안으로 들어가지만 아무런 소리도 나질 않
는다. 그저 비릿한 냄새와 시큼한 냄새가 반쯤 섞인 느낌이 날 뿐이다. 그는 얼굴을 찡그
리며 열린 문으로부터 흘러들어오는 빛에 의지해 이미 오래 전에 꺼진 양초에 붙을 붙였
다. 그제야 방의 모습이 하나하나 분명히 드러났다.

눈앞에 놓인 탁자 아래를 바라보던 순찰자는 문득 죽어 쓰러져 있는 고양이 한 마리를
발견한다. 섬에는 단 한 마리밖에 없는 녹옥빛 눈동자의, 묘연이 그렇게도 아끼던 고양
이를 바라보자 문득 울며 화를 내던 그녀의 모습이 떠올랐다. 조심스럽게 고양이의 시체
를 뒤집어 본 순찰자는 문득 고양이의 배에 난 상처를 발견한다. 두 개의 날카로운 구멍
이 있다. 마치 사나운 맹수에게 물린 것처럼, 상처는 어둑한 불빛 아래에서 분명히 드러
났다.

순찰자는 몸을 일으켜 조심스럽게 주위를 둘러보다 걸음을 옮긴다.

침대 위에, 어두운 가운데 깨어나지 않는 남자는 미동조차 없다. 촛불 아래에 누운 남자
는 조금이나마 혈색이 돌아온 듯 얼굴에 홍조가 돋아 있는 것이 보였다. 흙빛 머리칼은
어지럽게 늘어져 있었지만 무표정한 얼굴은 눈을 감은 채 천장을 향해 있다. 아직 깨어
나지 않았던가, 하고 중얼거리다 문득 순찰자는 이불 밖으로 나와 있는 남자의 손을 잡
는다. 따뜻하다. 그러나 움직임 없는 손을 잡아 이불을 덮어 주려다 순찰자는 무언가를
퍼뜩 깨닫고 손을 놓아버렸다. 단 한 번이라도 그걸 의심했었던 적이 있었던가? 놀란 표
정으로 그는 천천히 남자의 목 언저리로 손을 가져다 대어 본다.

뛰질 않는다. 그의 몸은 그저 차가웠다.

순찰자는 몸을 돌려 걸음을 재촉하려 했다. 삶은 가볍다. 남자는 마치 어떤 맹수에게 물
린 듯 쓰러져 떠나버린 고양이처럼 소녀의 애정을 저버린 듯 미동이 없지만 그저 가볍
다. 불분명한 흔적들을 따라오고, 처소에는 고양이가 죽어 있고, 이젠 사람까지도 그랬
지만 집안은 그저 조용하다. 그러다 문득, 한순간 그는 그의 손에 있는 열쇠를 바라본다.
온몸에 소름이 돋아 그는 걸음을 멈추어 선다. 왜 한번도 의심하지 않았던가?

입을 다문 그는 말없이 들고 있던 촛대를 탁자에 올려놓는다. 맹수가 자물쇠를 열고 들
어왔을 가능성은 없다. 그렇다고 이 안에 다른 무언가가 있는 것도 분명 아니었다. 아무
것도, 그 누구도 믿지 말라는 순찰자들의 가르침은 분명 중요한 것이었다. 대륙의 북쪽
지역만큼이나 남쪽 끝자락에 놓인 섬도 쉽사리 인간의 어떤 기준을 허용하지는 않는 곳
이다. 마치 애초에 인간이 살아가야 할 곳이 아닌 것처럼. 양초가 잠시 사그라지는 듯 약
해졌다가, 금세 다시 돌아온다. 살아있는 어떤 것들의 바스락거림도 없다.

문득 그는 밤새 남자를 간호하며 그의 손을 꼭 잡고 잠이 드는 누이동생을 생각한다. 밤
새, 그리고 하루 종일 떠나지 않고 그의 손을 맞잡은 소녀는 무척이나 절실했었다. 그래
서 마지막 따스함을 그의 손에 남겨 놓았었던 걸까. 마지막, 일말의 생명을.

순찰자는 눈을 감고 고개를 살짝 내렸다가 다시 들며 길게 숨을 한번 내뱉는다.

물어.

처음에 가정했던 것이 틀렸다고 한다면 답은 하나밖에 없다. 생명을 잃은 영혼은 곧바
로 사라지지 못하고 조금씩 사그라진다. 그것은 분명 저주다, 처음에 눈치 채지 못했던
이유는 이곳에 있을지도 몰랐다. 그 어떤 것이든, 한순간에 사라지는 건 없다. 그것은 실
질적인 생명도 영혼도 마찬가지였고. 처음부터 그의 가정이 잘못되었다는 사실을 알아
챘지만 무엇을 어떻게 해야만 하는지는 이제야 분명하게 나타났다.

목소리는 조금씩 떨리지만 순찰자는 단호하게 말을 이어간다. 마음이 약해지면 그에 따
라 몸도 충실해지질 않았다. 마치 두 가지가 다르지 않은 것처럼. 그래서 어느 한쪽이라
도 놓치지 말라는 것이, 순찰자들의 두 번째 가르침이었다.

그렇게 해서 행복해질 수 있다면, 단….

그는 천천히 검 손잡이에 손을 가져가며 몸을 돌려 입을 쩍 벌린 채 그를 노려보는 남자
의 눈동자를 정면으로 응시한다. 끝없는 깊이를 가진 눈동자는 빛이 없이 그저 시커멓
다. 저것을 눈동자라고 할 수 있었던가, 그저 어둠 속에 검은 점을 찍어 놓는 듯한 눈동
자는 촛불의 미명 위로 떠오른 깊은 연못처럼 보였다. 순찰자는 언젠가 본 적 있는 책에
서 묘사한 바로 그대로의 모습으로 번뜩이는 남자의 이빨을 바라본다.

한 발자국 물러서며, 순찰자는 검 손잡이를 쥔다.

행복해지는 건, 분명 묘연이어야겠지.

그가 노려보는 가운데 남자의 표정은 점차 놀랄 만큼 고요하게 변해갔다. 입을 꾹 다물
고 다시 눈을 감은 청년의 얼굴은 단호했지만, 또한 고요한 모습이었다. 날카로운 콧대
와 입술은 다소 냉담하게 보일 수도 있었겠지만 기본적으로 그는 그저 다소 말 없고 점
잖은 청년일 뿐일지도 몰랐다. 어쨌건 그는, 눈가를 찡그리며 입을 열었다. 목소리는 현
악기의 음정처럼 단단하고 분명했지만 동시에 연약한 미묘함을 지니고 있었다.

저는, 사랑하면 안 되는 것이었습니까?

그건 이기적이야.

순찰자의 말에 청년은 다시 눈을 뜨고 그를 노려본다. 한없는 어둠의 우물처럼 검은 눈
동자는 방 안을 온통 메운 어둠과 전혀 구분되지 않았다. 그러나 분노는 없다. 순찰자도
이 이름 모를 청년도 분노에 겨워하지는 않고 있었다. 잠시간의 침묵은 짧지만 청년은
잠시 그의 손을 내려다 본 후에 다시 고개를 들었다. 버릇처럼 숨을 내쉬며.

그렇다면, 저는 어떻게 해서든 당신을 막아야만 하겠군요.

나를 죽이기 전에는 그렇게 하지 못 할 거다.

청년의 눈빛이 문득 바뀌었다. 날카롭게 뜬 그의 눈동자는, 미처 어둠 속을 배회하는 촛
불의 미명도 밝히지 못 했다. 선택권이 없는 선택이란 얼마나 부질없는 것이던가, 라고
속으로 생각하며 순찰자는 다시 한 걸음 물러선다. 몸을 던지면 금세 창문 가로 다가갈
수 있게끔 아주 조심스럽게. 시큼한 냄새가 다시 한번 그의 코에 와 닿지만 그 냄새는 그
저 쓰다. 떨리는 손에 힘을 주어 검을 잡으면 청년은 단호하게 입을 연다.

그래야만 한다면, 해야겠지요.

짧은 한순간, 미처 알아채기도 전에 청년은 순찰자의 눈앞에 와 있었다. 죽음의 냄새는
쓰고 신 느낌이 난다. 순찰자의 본능으로 몸을 돌려 창문 가로 뛰어들면 동시에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재빨리 뛰어든 청년의 몸이 그를 벽으로 밀어붙인다. 검을 잡았던 오른손도
이미 빠져나올 수 없을 만큼 단단히 잡혀 벽으로 몰아붙여진 채 꼼짝할 수가 없다고 느
꼈을 때는 이미 늦어 있었다. 청년의 눈을 노려보면 그도 순찰자를 정면으로 노려보고
있다. 순찰자는 문득 자신의 머리 왼편을 지나쳐 벽을 짚고 서 있는 청년의 팔에서부터
문득 그 쓰고 신 냄새를 맡곤 얼굴을 찡그렸다.

벽에 등을 대고 쓰러져 주저앉아 있는 건 좋은 느낌은 아니었다. 청년은 분명 그를 바라
보고 있었지만 그 상태로 멈추어 서서 아무것도 하지 않을 기색이었다. 정적이 흐르고,
어느 순간 촛불이 잠시 약해졌다 다시 빛을 발하는 그 순간 순찰자는 구속되지 않은 왼
손을 이용해 발목에 매인 단검을 빼내어 청년의 왼팔에 힘껏 꽂았다.

사랑을 하는 것은…

얼마간 영혼을 잃었던 그의 살은 약했으나 새하얀 뼈가 드러나자 단검은 더 이상 상처
를 주지 못하고 튕겨 나간다. 일생에 걸쳐 다듬어진 본능을 잊지 않은 청년은 팔을 빼내
고 그 순간 순찰자는 힘껏 발로 청년의 가슴을 차내었다. 청년은 이상할 정도로 멀리 튕
겨 나가 탁자에 부딪힌다. 벌떡 일어나고, 예의 그 눈으로 순찰자를 바라보면 그도 일어
서서 청년을 마주보고 있다. 그는 다시 검 손잡이를 쥐지만 쉬이 검을 쓰려 하지는 않았
다. 검은 가장 마지막 순간에 사용하는 것이다, 라는 순찰자들의 가르침은 그에게 절대
적인 것이었다. 다만 다시 한걸음 물러서며 입을 연다.

…희생 없이 혼자 뛸 수 있는 심장을 가지게 된 다음에 해도 늦지 않아!

청년이 다시 그에게로 뛰어들고, 날카롭게 다듬어진 감각으로 순찰자는 검을 뽑아 순식
간에 올려 벤다. 거리낌 없이 팔로 검을 막는 청년의 모습은 무척이나 생경하나 순찰자
는 그걸 느낄 새도 없이 청년의 어깨를 겨누어 올렸던 검을 다시 내려 베고 달려오는 자
의 배를 걷어찬다. 분명 빠르지만, 그저 평범한 청년일 뿐이었다.

단단한 느낌이 발을 타고 올라온다고 느낀 순간 순찰자는 청년이 손을 뻗어 그의 왼팔
에 긴 상처를 죽 남기는 것을 느끼지만 미처 막을 수가 없었다. 다시 한 걸음 물러나고,
청년의 가슴팍을 향해 오른쪽으로 짧게 베어 내리자 문득 청년은 몸을 멈추어 선다. 순
찰자도 문득 한 걸음을 옮겨 뒤로 물러섰다. 어떤 느낌이 있다. 가볍지만 동시에 무거운,
산 자의 것이라고 생각되지 않는 어떤 힘이 있었다. 그는 길게 숨을 내쉰다.

…그러나 그걸 제외하면 우리는 전혀 다르지 않습니다.

순찰자는 검을 들어 청년을 겨눈다. 그러나 청년은 말을 이어갈 따름이었다.

결국 신에게는, 모두가 같은 것밖에는 없을 터입니다만, 그러나 그것이 제가 사랑하지
말아야 하는 이유가 되는 것입니까? 그건 분명 이기적입니다.

…나는 신도 절대자도 아니야. 나는 인간의 눈으로 보고 인간의 머리로 판단하지. 내게
그들의 시선을 가져야 할 필요 따위는 없어. 내 눈에 너는 인간으로 비치지 않고, 내 판
단에 너는 묘연에게 해가 될 거다. 그러니, 죽어줘야겠어!

한 걸음, 순찰자는 한 걸음 물러서며 달려오는 청년의 팔을 막아낸다. 예의 그 어떤 강
함이 그에게 밀려오자 그는 몸을 낮추며 청년을 그대로 바라본다. 이 느낌이다. 발을 뒤
로 옮기며  그 힘 그대로 몸을 돌려 검을 청년의 가슴팍에 겨눈다. 자신에게로 향했던 그
힘 그대로가 그의 몸 안에서 자연스럽게 방향을 바꾼다.  

순찰자의 검은 청년의 가슴을 깊게 찌르고 지나갔다.

이쯤은, 저도 이미 몇 번이고….

청년은 손을 들어 순찰자의 어깨를 부여잡는다. 그러나 힘이 없다.

잊을 수 없는 유령이라면, 몇 번이고 망각해버려. 수백 년이 지나고 감정이 마모되어 더
이상 사랑하지 않게 될 때 후회하면 누구에게도 늦어. 나는 인간이지만, 너는 아닐 테니
까. 그때가 되어 사랑을 버릴 거라면 아예 지금 망각해 버리는 게 나을 거다.

순찰자는 힘껏 몸을 뒤로 던졌다.

몸을 실은 힘에 문이 부수어지고 그렇게 드러난 겨울의 하늘은 눈부실 만큼 밝다. 순찰
자는 한동안 누워서 일어나지 않는다. 하늘을 바라보면 동쪽 바람의 눅눅함도 이젠 없
다. 그저 한없이 높은 하늘만이 자리 잡고 있었을 뿐이었다. 낙엽이 하늘 높이 띄워지고
문득 차가운 바람이 불어오면 미처 떨어지지 못한 나뭇잎들은 평소처럼 몸을 떤다. 바닥
에 힘을 뺀 채 누우면 바로 눈앞에 있는 태양이 무척이나 눈부시다. 인간은, 내일 보아야
만 할 아침 하늘을 위해 오늘을 살아가고, 다른 사람이 내일 아침을 볼 수 있게 하기 위
해 다른 사람을 지킨다. 영원히 보아야만 할 하늘은 진부하지만, 인간이 볼 수 있을 아침
하늘은 많지 않다. 지루한 생명이란 쓸데없는 거겠지, 라고 생각하며 순찰자는 몸을 일
으켰다. 어디까지고 생명이 이어지면 모든 것은 자루해지고 과거는 마모된다. 지금이라
는 게 쓸모 있어지는 상황은 그다지 많지 않기 때문에….

몸을 일으키면 눈앞에는 한 벌의 옷 무더기가 놓여 있을 뿐이었다. 문득 문이 부수어지
는 가운데 마지막 그의 목소리를 들었던가, 라고 생각하며 순찰자는 옷가지를 들어올린
다. 그러면 달각, 하고 바닥으로 떨어지는 무언가가 있다.

순찰자는 짧게 한숨짓는다.

옷가지를 가져다 치워 놓은 순찰자는 바닥에 놓인 목걸이를 주워 천천히 바라본다. 반
쯤 닳아 있는 목걸이 끝으로는 녹옥이 가지런히 매달려 있었다. 청년의 이름과 어떤 말
이 세공되어 있었지만 천천히 마모되어 가는 보석의 빛은 그리 훌륭한 편이 아니다. 그
는 그것을 주머니에 집어넣고 문득 고개를 돌려 오솔길 저 너머를 바라본다. 오늘은 꿈
에서 깨어나야만 할 소녀에게 어떤 거짓말을 해야만 할까, 하고 생각하며.

열흘간의 꿈이 있었던 동안 대지는 어느새 겨울잠이 들어 있었고, 평소보다 다소 덜 차
가운 바람은 곧 다가올 올해의 두 번째 눈을 예비했다. 오솔길 가장자리에는 더 이상 꽃
들도 낮게 깔린 관목들도 없다. 모든 생명들이 겨우내 이불을 덮듯 낙엽 아래로 사라져
버리면, 그제야 바람은 그 위를 훑고 지나갔다. 매년 같은 일이 벌어지지만, 그의 눈에는
항상 모든 것이 다르다. 그리고 어느새 그것들에 익숙해져 언제고 별이 지나가는 길들을
자연스레 알게 될 즈음에 그는 언제까지고 잠이 들어야만 했다. 마치 겨울을 이기지 못
해 대지 아래로 숨어들어가 있는 생명들처럼. 모든 것은 항상 그곳에서 잠을 자고 깨어
나고, 그것은 그의 시간이 지난 이후에도 언제나 같았다. 문득 순찰자는 겨울이 왔는지
잊어버린 듯 그의 머리를 가로지르는 어떤 새를 바라본다. 그리고 길디긴 울음소리. 한
참이나 슬프도록 찬 바람을 맞고 있다가 언젠가 그 바람이 누군가 돌아오고 있다는 걸
이야기해 주면 문득 새삼스레 순찰자는 목걸이를 꺼내어 본다.

행복해져라…그것은 누구를 위한 말이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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