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밀번호를 잊어버리셨나요?

단편 아늑한 빗줄기

2005.09.09 19:3909.09

“이런, 제기랄.”
어쩐지 무언가 차가운 감촉이 얼굴을 핥는 느낌이 든다 했더니 빗방울이 하나 둘씩 떨어지기 시작했다. 택배 아르바이트를 하는 내게 있어서 비는 그다지 반가운 존재가 아니다. 그것도 벌써 배달할 물건을 오토바이 뒤에 실은 채 목적지를 향해 출발한 상황이라면 더욱 더 그렇다. 하지만 속력을 낼 마음은 없다. 이것도 다 먹고살자고 하는 짓인데 사고라도 나면 나만 손해 아니겠는가. 만약 물건이 젖어서 고객이 항의전화를 하든 말든, 그건 나중의 일임과 동시에 나와는 상관없는 일이다.

지금 오토바이 뒤에 실린 물건을 전해주어야 할 집은 거리가 약간 있었지만 찾기 쉬운 편이었다. 산 중턱에 위치하지만 길이 잘 닦여 있고, 으리으리한 집 한 채 만이 쓸쓸히 홀로 서있는 곳이기 때문이다.
순식간에 하늘이 먹구름으로 물들고 위태로운 바람이 불어왔다. 재수 없으면 비가 꽤 거세질 판이었다. 가파른 언덕을 오르는 길에 양옆으로 늘어선 커다란 나무들이 비바람에 춤을 추고 있었다. 그들은 미친 듯이 춤을 추며 으스스한 비명을 질러 댔다. 그야말로 신들린 듯한 춤사위였다. 순간, 충동적으로 헬멧을 벗어 던지고 저 비명소리를 여과 없이 온 몸으로 느끼고 싶었다. 그들은 아득한 절망을 노래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어째서 비명을 지르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기나긴 길을 지나 집 앞에 도착하자마자 오토바이를 세우고 급히 끈을 풀어 상자를 감싸 안은 채 -다행히도 많이 젖지는 않았다- 뛰어가서 초인종을 눌렀다.
  
“택배입니다.”
  
연신 벨을 눌러도 대답이 없다. 비는 점점 더 거세졌으나 다행히도 현관 밑에 서 있었기 때문에 비에 젖지는 않았다. 뭔지도 모를 물건이 젖을 까봐 다시 돌아가기도 힘들 것 같아, 회사에 전화를 해서 비가 그치면 돌아가겠다고 했다.
통화를 끝낸 다음 담배를 꺼내 자리에 주저앉았다. 마지막 남은 하나였다.
이 비가 그치고 나면 날씨가 급격히 추워질까. 이곳은 숲 속에 덩그러니 놓여 져 있는 것만 같았다. 적막감이 산 속에 울려서 기분이 멍해지는 느낌이다. 주위를 끝없이 둘러싼 나무들이 어딘지 모르게 우울해 보인다.
그때였다. 담배를 두 모금 정도 빨았을까, 갑자기 스피커에서 말소리가 들렸다.
  
“어머, 정말 미안해요. 잠시 다른 일을 하느라 말이죠.. 물건을 안으로 좀 가져다줄래요?”
  
나이를 짐작하기 힘든 여성의 목소리였다. 나는 깜짝 놀라 벌떡 일어나서 스피커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제길, 누구 심장 멎게 할 일 있나.
대문이 열리자 나는 몇 번 빨지도 못하고 내던진 마지막 담배를 아쉬워 할 겨를도 없이 상자를 감싼 채, 정원을 열심히 가로질러 뛰었다. 집 밖에 서있는 풍성한 나뭇잎을 자랑하던 나무들과는 달리, 정원에 심어져있는 꽤 많은 양의 나무들은 하나같이 잎이 하나도 남아있지를 않고 죽은 듯이 온통 새카맸다. 그리고 나무들은 말 그대로 침묵하고 있었다. 깊은 잠에 빠진 듯이.

  
“비도 이렇게 많이 내리는데 정말 수고하셨어요.”
  
집주인으로 보이는 30대 가량의 여성이 미소를 지며 말했다. 그녀는 집안에서도 챙이 넓은 우아한 검은 모자를 쓰고 있어 얼굴이 잘 보이지 않았으나 창백한 피부만큼은 기묘한 빛을 발산하고 있었다. 장례식에나 입을 법한 짙은 검정색의 원피스 또한 이상하리 만치 잘 어울렸다. 그야말로 절망적인 느낌을 주는 색인데도 불구하고.  
  
“아닙니다. 그나저나 물건이 안 젖었는지 모르겠네요.”
  
내가 확인증에 사인을 부탁하자 그녀는 물건부터 확인하고 싶어 했다. 그녀는 의자에 앉아 잠시 쉬라고 말했다. 굉장히 비싸 보이는 의자에 앉아있자니 왠지 어색하고 불안해 쭈뼛쭈뼛 앉았다. 의자는 편인하기는커녕 마치 죽은 나무에 걸터앉은 듯한 느낌이 들었다.  

“중요한 물건은 아니지만 그래도 어디 한 번 확인해 봐야겠죠? 따뜻한 차로 몸을 녹이고 계세요.”
  
나는 어색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금세 따뜻한 차를 가져다주었다. 차의 향기가 은은히 퍼져 나갔다. 순간 모든 것이 아득해 질 정도의 멋진 향이었다. 여전히 밖에서 들리는 세찬 빗소리와 차의 아늑한 향이, 나를 놀랍도록 압도했다.  
그녀는 미소를 짓고는 상자를 들더니 어디론가 사라졌다. 집 구조가 특이한지 그녀는 내가 바라보는 정면의 복도로 들어갔지만 순식간에 모습을 감췄다. 그러고 보니 기묘한 구조의 집이었다.  
적막한 집안의 분위기에 압도당해 조심스레 차를 마시면서 주위를 둘러보았다. 박제된 온갖 동물들이 여기저기 전시되어 있고, 독특한 모양의 장식품이 눈에 많이 띄었다. 그 모든 것들이 일제히 나를 바라보는 것만 같았다. 한없이 차디찬 시선으로.
나는 머리를 긁적이며 이내 고개를 돌려 창밖을 바라보기로 했다.  
그 때, 소리 없이 2층 계단에서 새카만 고양이 한 마리가 내려왔다. 어떤 우아한 여성보다도 매혹적인 자태였다. 이 세상에 저 고양이만큼 계단을 우아하게 내려오는 동물-내지는 인간-은 아마 없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고양이 역시 밤에 보면 눈 밖에 안 보일 정도의 진한 검정색 이었으나, 집안에 있는 무엇보다도 생기가 있는 색이었다. 내가 잠시 숨을 멈추고 쳐다보는 사이, 고양이는 계단을 모두 내려온 뒤 가만히 서서 날카로운 눈으로 나를 불쌍하다는 듯이 쳐다봤다. 그래, 분명 그런 느낌이었다.
‘꺄르르르’ 라는 웃음소리와 함께 다시 그녀가 나타났다. 그녀는 누군가가 보내온 물건이 마음에 들었다고 했다. 나는 다행이라 말하며 고양이가 상당히 예쁘다고 칭찬했다. 그러자 그녀는 눈을 반짝이며 벽난로가 있는 쪽을 가리키며 말했다. 벽난로 위에는 박제된 채, 힘겨운 눈으로 나를 바라보는 동물들이 있었다.
  
“저기 저 박제된 검은 고양이가 보이죠? 그게 이 녀석의 어미죠. 어느 날, 모든 게 맘에 안 들어서 박제 시켜버렸어요. 그래서 이 녀석은 늘 나를 증오해요.”
  
그녀가 손을 뻗어 고양이를 끌어안으며 묘한 미소를 지었다. 그녀의 말과 달리 고양이는 발버둥치지 않고 가만히 그녀의 품에 안겨있었다. 나는 머쓱해져서 화제를 돌렸다.
  
“저기 저 시계도 상당히 신기하네요. 시간이 거꾸로 가는군요. 장식품으로는 좋겠지만 시간을 확인할 때는 불편하지 않나요?”
  
“어머? 저 시계는 정상이에요. 이 집에서는 모든 게 어긋난 정상이죠.”
  
그녀의 얼굴이 한층 더 창백해졌다. 어릴 적 읽었던 동화책에 나오는 마녀가 실제로 있다면 바로 그녀가 아닐까 생각될 정도였다. 나는 왠지 섬뜩해서 비오는 거리라도 좋으니 빨리 회사로 돌아가고 싶어져 차를 한숨에 들이키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차는 아직 상당히 뜨거웠으나 혀를 데는 것쯤은 이 집에 계속 있는 것보다는 견딜만했다.
  
“차 잘 마셨습니다. 이제 돌아가 봐야겠네요.”
  
“벌써 가시게요? 아까 벨 누르실 때 제가 힘들게 지하로 내려가서 늪에 있는 삐에로를 초대했는걸요. 그를 만나고 가지 않겠어요?”
  
“예? 삐에로요?”
  
“그래요 삐에로. 커다란 녹슨 낫을 들고 삐꺼덕 거리며 계단을 올라와서 당신의 목을 벨 거죠. 당신의 해골은 검은 색으로 칠해서 꾸민 다음, 그의 서커스 도구가 될 예정이에요. 어때요? 기분이 묘하죠?”
  
내가 무슨 장난을 하는 거냐고 화를 내려고 하는 순간, 어디선가 낡은 계단을 올라오는 발소리가 들렸다. 그것은 심연 깊숙한 곳에서부터 들려오는 소리였다. 순간 온 몸에 소름이 쫙 퍼졌다. 발자국 소리를 듣고 있자니 점점 발이 늪 속으로 빠져 들어가는 느낌이었다. 나는 힘겹게 입을 벌린 채로 머리를 감싸 쥐었다. 미소 짓는 그녀의 얼굴을 보자마자 나는 재빨리 뛰어가 현관문을 열었다.
  
그러나 그곳엔 절망이 있었다. 산중턱에 있는 집이 어느 샌가 물에 잠겨 있었다. 죽은 나무들의 앙상한 뼈마디가 허우적거리고 있었다. 그 나무들 위에는 까마귀들이 앉아 있었다. 까마귀들은 절정에 달한 즐거운 비명을 지르고 있었다. 아늑한 정신으로 그 광경을 지켜보는데 등 뒤에서 고양이의 울음소리가 들렸다. 뒤를 돌아보자 그녀는 차가운 미소를 지으며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팔에 안긴 고양이는 그녀의 팔을 마구 할퀴기 시작했다. 그녀의 팔은 점점 피로 물들었지만 그녀는 전혀 신경 쓰지 않고 나에게 말했다.
  
“좀 더 공포를 느껴 봐요. 심연의 공포를. 공포가 뭔 줄 알아요? 그것은 인간이 느낄 수 있는 가장 큰 환희이자 쾌락이죠. 사람들은 자신이 죽는 순간 편하게 마음을 가지려다가 마지막에 눈을 감을 때 진정한 공포를 느껴요. 그들은 이미 되돌리기에는 늦었다는 것을 알고서 어쩔 수 없이 공포에 몸을 내 맡기죠. 그리고 어둠 속으로 서서히 빨려 들어가는 거 에요. 당신들의 공포가 나의 음식이에요. 나는 그것을 먹으면서 지내죠. 당신은 재미없게도 너무 일찍 뭔가 이상하다는 것을 눈치 채서 많은 공포를 발산해내지 못했어요. 아마 당신이 겁쟁이기 때문이겠죠. 그러나 당신 같은 사람이 일순간 뿜어내는 공포는  다른 이들의 것보다 훨씬 맛이 좋아요. 나에게 더 많은 공포를 주지 않겠어요? 아, 저기 삐에로가 도착했나 보군요.”  
  
어디선가 낡은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리자마자, 나는 비명을 지르며 지체 없이 물에 잠긴 정원으로 뛰어 들었다. 그녀의 날카로운 웃음소리와 묵직한 발소리, 그리고 하늘을 정신없이 날아다니는 까마귀들의 울음소리가 내 정신을 혼미하게 만들었다. 나는 넋이 나간 상태에서 아무 생각 없이 열심히 팔을 저어 대문에 다다라, 문을 향해 손을 뻗었다. 팔이 부들부들 떨리며 자꾸 손이 미끄러졌지만 비명을 지르며 필사적으로 문을 열려고 애썼다.
마침내 문을 열고 세상 속으로 돌아왔다. 헐떡이는 숨을 몰아쉬며 그렇게 나는 땅 바닥에 널부러져 점차 약해져 가는 빗줄기를 맞았다. 그녀는 내가 정원을 헤엄쳐 나오는 사이에 느꼈던 극한의 공포를 마음껏 섭취했을까? 도대체 나는 저 안에서 뭘 본 거지?
미친 듯이 춤을 추는 나무들이 있는 길을 다시 지나가야 한다는 생각에 몸이 부르르 떨렸다.
  
제기랄, 나는 비가 싫다.


-------------------------------------------
아, 처음 올려보는군요. 이 단편은
스티븐킹의 IT을 읽고 삐에로가 참을 수 없이
좋아져서 한 번 써본 글입니다. :)
roland
댓글 0
번호 분류 제목 글쓴이 날짜 추천 수
공지 2024년 독자우수단편 심사위원 공고 mirror 2024.02.26 1
공지 단편 ★(필독) 독자단편우수작 심사방식 변경 공지★5 mirror 2015.12.18 1
공지 독자 우수 단편 선정 규정 (3기 심사단 선정)4 mirror 2009.07.01 3
817 단편 로망스2 제이 2005.12.08 0
816 단편 가면3 날개 2005.12.01 0
815 단편 어느 한 속어의 유래2 azuretears 2005.11.27 0
814 단편 이상향2 C.T 2005.11.26 0
813 단편 촛불1 異衆燐 2005.11.17 0
812 단편 화려한 신부2 시레인 2005.11.10 0
811 단편 성스러운 외출2 블루베리 2005.11.04 0
810 단편 손수건1 이중 2005.10.31 0
809 단편 머나먼 별에서 온 손님 요한 2005.10.26 0
808 단편 슬프지만 행복해져야 하는 이유 아카스트 2005.10.17 0
807 단편 작은 문학도의 이야기-수형(獸形) 미소짓는독사 2005.10.08 0
806 단편 이세계 드래곤 슬레이어 이지문 2005.09.28 0
805 단편 선택의 이유2 요한 2005.09.25 0
804 단편 고양이의 눈2 감상칼자 2005.09.18 0
803 단편 파도 - 퇴고작1 제이 2005.09.16 0
802 단편 급습 감사는 신속하게 푸른깃 2005.09.16 0
단편 아늑한 빗줄기 roland 2005.09.09 0
800 단편 Robotta2 외계인- 2005.09.08 0
799 단편 드림스케이프(Dreamscape)1 gordon 2005.09.03 0
798 단편 이름 가명 2005.09.01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