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밀번호를 잊어버리셨나요?

단편 배심원들

2004.09.12 21:0409.12

- 1 -



내가 지하철을 택한 이유는, 그것이 빠르고 쉽기 때문이다.

고요하던 역내에 조금씩 바람이 술렁이기 시작한다. 바람은 금세 거세지고, 그와 함께 저 안쪽 철로에서부터 환한 빛이 쏟아져 들어온다. 그리고 마침내 열차가 모습을 드러낸다. 나는 그 동안의 꿈 같은 과거들을 회상하기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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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그 사실을 알았을 때 나는 뼈를 베어내는 듯한 절망과 함께, 아니러니하게도 묘한 안도감을 느꼈다. 그 안도감의 원인은 부모님들이 그 사실을 모른다는 것이었다. 얼마든지 숨기고 싶은 일은 숨길 수 있는 것, 그것이 혼자 사는 사람의 특권이다. 글쎄, 지금 돌이켜 보면 과연 그것이 안도감을 느낄 만한 일이었는지는 모르겠다. 그리고 내가 왜 안도감을 느꼈었는지, 그것도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다. 그들이 모른다고 해서 치료의 가능성이 조금이라도 높아질 수 있다면 이야기가 다르겠지만, 아직 그런 경우는 어디에서도 들어본 적이 없으니까.
병명은 '전립선 암'이었다. 전립선이라니, 세상에, 그런 병도 있었던가. 의사의 말에 나는 뭐라고 대답해야 할지 몰라 그저 가만히 앉아 있기만 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전립선... 이라구요?"
"그렇습니다. 상당히 오래 진행되었어요. 지금으로서는 힘듭니다."
의사는 계속해서 안경만 닦아대고 있었다. 자기가 마치 고목을 앞에 두고 이야기라도 하는 줄 아는 모양이었다. 그 고목이 날마다 피가 섞인 (어쩌면 순전히 피일지도 모르는)소변을 흘리고, 그럴 때면 뿌리가 뒤틀리는 고통을 느껴야 하는 줄도 모르고. 아마 그 의사가 허기에 지쳐 식당으로 가면 이런 식으로 말할 것이다. '배고픕니다. 상당히 오래 굶은 상태요. 지금으로서는 힘듭니다.' 그래, 만사가 그런 식이겠지. 빌어먹을.
나는 절대로 입원은 하지 않겠다고 말했다. 의사는 당혹해했지만, 어차피 사라져 버릴 운명이니 입원해도 어쩔 수 없다는 듯한 어조로 내 의견을 존중해 주었다. 마지막까지 그의 표정에 아쉬움이 담겨 있었던 이유는 아마 내가 입원하면서 지불할 치료비가 사라지는 것이 아깝기 때문이었으리라.
한 번도 비밀이 없었던 어머니에게조차 나는 결국 차마 사실대로 말할 수 없었다. 이제 30대를 막 넘어선 나이에 이 꼴이 되었다는 것을 도대체 어떤 식으로 설명해야 하는지 알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나는 젊은 나이에 그럴 듯한 기업의 부장 자리에까지 올라와 있는 상태이지 않은가. 대관절 그게 무슨 상관이 있냐고? 누군가가 내게 묻는다면, 글쎄, 딱히 대답할 말은 없다. 지금껏 '보란 듯이' 올라온 인생인데, 끝까지 오르기도 전에 보이지 않는 누군가에게 머리가 깨질 정도로 뒤통수를 얻어맞고 바닥으로 떨어지는 그 기분, 나는 도저히 그것을 말로 설명할 자신이 없다.

아무리 치료가 어렵다고 해도, 자신의 의지만 있다면 얼마든지 회복이 가능하고 또한 약을 복용할 경우 그 가능성은 더 높아지는 법이라면서 의사는 미소를 지었다.
의사가 준 약은 6개월 치였다. 그 엄청난 양의 첫 알을 목구멍으로 삼켰을 때, 나는 문득 이런 섬뜩한 생각이 들었다.
- 만약 6개월이 지나도 더 이상 약을 주지 않는다면?
곧바로 병원으로 달려가 의사를 붙들고 그 의문의 답을 듣고 싶었지만, 생각해 보라. 한 남자가 뛰어들 듯이 병원 문을 열고 들어와 땀을 뻘뻘 흘리며 의사의 멱살을 잡고 한다는 말이 '내 전립선 약 더 줄 거야?'라면, 얼마나 우스울까. 갑자기 분노의 웃음이 터져 나왔고, 나는 약을 확실히 삼키기 위해 물을 더 마셔대야만 했다.

약을 먹기 시작하고 일 주일쯤 지나자 통증이 절반 이상 줄었다. 물론 그것이 회복의 의미는 아니었다. 그저 약효과일 뿐이니까, 한 마디로 버티게 하는 것이었다. 그래도 통증이 줄어드니 견딜 만 했다. 통증이 줄어든 덕분에 회사를 그만두지 않은 것은 아니었지만, 뭐, 어쨌든 견딜 만 했다. 그 사실만으로도 내게는 엄청난 축복이었다.
의사의 말이 옳다면 나에게는 최소한 아홉 달의 수명만이 남아 있는 셈이었다. 어린애 같은 생각일지 모르지만, 나는 그것을 내 삶의 정리를 위한 시간보다는 그 동안 못해본 일을 하는 데에 보내고 싶었다. 나에게 있어 아홉 달 뒤면 세상이 멸망하게 되는데, 누가 그런 날 비난하겠는가.



- 2 -



열차가 멈추고 문이 열린다. 몇몇 사람들이 내리고, 다른 몇몇은 열차를 탄다. 나는 자판기 옆에 있는 플라스틱 의자에 그대로 앉아서 사람들이 타고 내리는 모습을 지켜본다. 잠시 후 문이 닫히고, 열차는 서서히 다시 움직이기 시작한다. 나는 다시 기억 속으로 빠져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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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작정 지하철을 탔다. 막상 목적지도 없이 가려고 하니 도무지 어디로 가서 무엇을 해야 할지 떠오르는 것이 없었다. 오죽했으면 서울대공원을 가려고 했을까.
내가 대공원을 가려고 했던 이유는 간단하다. 이상하지만 한 번도 가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결국 도착한 곳은 생각도 못한 곳이었지만.
대공원이 두 정거장 남은 지점이었다. 여인의 안내방송이 흘러나왔는데, 난 그 방송을 듣는 순간 마음을 바꾸고 말았다.
"이번에 정차할 역은, 경마공원, 경마공원 역입니다. 내리실 문은 왼쪽입니다."
내가 그곳에서 내렸다는 사실은 설명할 필요도 없다. 오히려 내가 왜 이제껏 이 곳을 생각 못했을까 하는 마음까지 들 정도였던 것이다. 곧 죽고 말 운명의 남자가 있었고, 그는 경마장에서 내렸다. 그렇게 되어버린 것이다. 그때의 나에게 선택권은 없었다. 죽을병에 걸린 사람이 경마라니? 라는 식의 질문 따위는 내 안의 어느 누구도 꺼내지 않았다.
처음에는 그저 말이 달리는 그 모습이 보고 싶을 뿐이었다. 그럼 왠지 마음이 가벼워질 것 같았다. 정말 그것뿐이었다. 정말.

대충 지식으로 알고 있던 것과 실제 경마장의 모습은 많이 달랐다. 땅콩과 팝콘 냄새가 실내 관람석을 가득 채웠고 그곳의 사람들은 모니터를 통해 말이 달리는 모습을 보고 있었다. 느끼한 냄새를 피해서 야외 관람석 쪽으로 나간 나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것은 그야말로 폭풍전야였다. 사람들은 웅성거리며 각자의 표를 들여다보기도 했고, 이리 저리 돌아다니며 초조한 듯이 계속해서 뭔가를 먹기도 했다. 그렇게 산만한 가운데서도 흐르는 어떤 긴장감이 바로 이곳을 통제하는 기운인 것 같았다.
끊임없이 돌아다니던 사람들은 어느 순간부터 각자 자리를 잡고는 들여다보던 표를 한 손에 꼭 움켜쥐고 채 비지 않은 팝콘 봉투도 내버린 뒤에 코스 쪽으로 시선을 고정시켰다. 잠시 후에 사이렌 소리가 내려치듯 울리기 시작했다. 영원히 웅성거릴 것만 같던 사람들은 이제 숨조차 죽인 채로 한 곳을 응시하고 있었다. 기수를 태운 말들이 라인에 섰다.
문이 열리고, 한꺼번에 튀어나오는 사람들의 외침과 동시에 말들도 뛰어나왔다. 숫자 5번이 쓰여진 안장을 달고 있는 말이 선두로 달려나왔다. 많은 사람들이 5번을 응원하고 있었다. 하지만 나에게는 안장에 써 있는 숫자 따위는 중요하지 않았다. 바람의 저항으로 인해 휘날리는 갈기, 매끈한 근육이 넘치는 다리, 발굽이 땅을 박차고 나올 때마다 피어오르는 흙먼지. 중요한 것은 그것이었다. 말 그대로 그것은 생명의 힘이었다.
이제 5번 말은 다른 말보다 거의 반 바퀴 이상 앞서고 있었다. 기적이 일어나지 않는 이상 지칠 줄 모르는 그 말이 우승하는 것은 이제 막 경마장의 분위기에 익숙해진 나의 눈에도 너무나 뻔했다. 5번 말에 건 사람들이 흥분하여 외치는 소리가 들렸다.
"나와! 나와! 차고 나와!"
"빨리! 그대로 끝내버려!"
"달려나와! 더!"
5번 말이 마침내 골인을 했고, 그 순간 사람들의 희비가 엇갈렸다. 5번 말에 돈을 건 사람들은 기뻐 날뛰며 어쩔 줄을 몰라하던 반면, 나머지의 패배자들은 그들을 부러움과 허망함의 눈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물론 나는 그 둘 중 어느 쪽도 아니었기에 덤덤할 수 있었다.

그날 나는 말이 달리는 그 게임을 세 경기나 더 보고서야 집으로 돌아왔다. 그 뒤로 나는 매주 경마장에 들렀다. 그리고 하루에 최소한 다섯 경기를 보고 집으로 돌아갔다. 경기가 거듭되는 동안 한 밑천을 따낸 사람이 있는가 하면, 모든 것을 잃고도 미련이 남아 돌아가지 못하고 어슬렁거리는 사람들도 있었다. 당연히 결과적으로는 두 번째 부류의 사람들이 훨씬 많았다. 그렇다. 말 그대로 당연한 일이었다.
그때까지는 단지 보는 것으로 충분했다. 강인한 몸의 말들이 땅을 치며 달리는 모습. 그 모습 속에 생명이 보였던 것이다. 그것은 사이렌이 울리고 말이 뛰어나가는 그 순간에 가장 뚜렷하게 느껴졌고, 마침내 모든 말들이 코스를 돌아 골인을 하고 난 뒤에는 정말 내가 그런 느낌을 받았었는지조차 의심이 들 정도로 한 순간에 사라져 버리고 말았다. 그것은 일종의 중독성까지 실린 느낌이었다. 생명의 흥분을 그대로 보여주는 말들의 모습. 하지만 그 어떤 경기도 그런 흥분이 끝까지 남아있지는 못했다. 끝. 그렇다. 경기는 누가 우승을 하든, 누가 꼴찌를 하든, 결국 끝나게 되어 있는 것이다.

매주 아침마다 경마장을 향한 전철에 앉아 있는 내 머리 속에는 오로지 두 가지 생각뿐이었다. 어서 빨리 도착해서 말들이 달리는 모습을 보고 싶다는 생각과, 어떻게 하면 경주가 끝나고 나서도 허탈감이 전혀 없이 그 흥분을 고스란히 마음속에 간직할 수가 있을까 하는 생각.
그에 대한 해결책이 떠올랐을 때 나는 그 동안 얼마나 멍청한 고민을 하고 있었는지 깨닫게 되지만, 아무리 간단한 문제라도 그 답이 떠오르기 전에는 난해한 문제와 싸워야만 하는 것이 아니었던가?

내가 허탈감을 느끼지 않는 방법을 찾아낸 순간은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경마장 안에서 다음 경기를 기다리고 있던 무렵이었다. 관중석에 앉아서 이번엔 어떤 말이 이길까 하고 나름대로 골똘히 생각하고 있는데, 한 중년의 남자가 내게 말을 걸었던 것이다.
"몇 번 말에 거셨소?"
나는 부끄러운 짓을 하다가 들킨 소년처럼 얼굴을 붉히며 고개를 저었다.
"저, 저는 그냥 경주만 봅니다."
"보기만 한다고? 아니, 그게 뭔 재미야?"
키가 작은 그 남자는 별일이라는 듯이 나를 물끄러미 쳐다보고 나서 말을 계속했다.
"돈이 없어 보이지는 않은데 뭘. 한 번 걸어 보쇼. 다들 이번 판에는 '돌개바람'이 이긴다고 하던데."
"돌개... 바람이요?"
"응. 전문가들이 죄다 분석해서 그 무슨 컴퓨터로 결과 뽑았다니까, 못해도 3등 안에는 들 거라고 하던데. 한 번 걸어 보쇼. 이름도 좋잖아, 7번 말, 돌개바람!"
남자는 그렇게 내게 처음으로 경주마에 돈을 걸어 볼 것을 권유했다. 그것이 시작이었다. 시작이면서 동시에 끝이었다. 그리고 내겐 돈이 있었다.
가장 짧은 줄에 서서 기다렸다. 금세 내 차례가 되었다.
"저... 7번, 돌개바람에 걸겠소."
나는 만 원 짜리 지폐를 들이밀고 말했다. 매표원은 나를 쳐다보지도 않고 되물었다.
"뭘로요? 연승?"
나는 그게 무슨 뜻인지 몰라서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있었다. 내가 그렇게 당황하고 있자 매표원은 드디어 고개를 들고 나를 쳐다보더니 말했다.
"뭘로 걸 거냐구요?"
"7번 말... 돌개바람 말이오."
그러자 매표원은 짜증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여기 처음 왔어요? 그러니까 7번 말을 연승, 단승 중에 뭘로 걸 거냐구요?"
"아, 그... 단승으로."
매표원은 다시 나를 쳐다보지 않은 채로 표를 주었다. 나는 뭐가 뭔지 도무지 알 수 없었다. 표를 손에 쥐고 돌아오자, 아까 전의 그 남자가 웃으며 말을 건넸다.
"연승?"
"네?"
"아, 그럼 복승?"
"단승... 인데요."
그러자 남자는 조금 허탈해 보이는 웃음을 내뱉었다. 그것은 마치 꼬마가 던진 공이 채 날아오지도 못하고 중간에 땅으로 떨어지는 것을 보는 프로 야구선수의 표정 같았다.
"저런, 1등표는 확률이 적어. 연승표가 적당한데... 처음이니까 뭐, 아무튼 가서 앉읍시다. 이번 경기는 참 재미있을 것 같으니까."
남자와 나는 경기장에 나가 앞쪽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그저 말이 뛰는 모습을 보기 위해 구경하던 느낌과 실제로 돈을 걸었을 때의 느낌은 천지차이였다. 불안하거나 나쁘다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경주에 더 몰입할 수 있었고, 또한 돈을 따게 된다면 느낄 환희의 미소가 나를 기다리는 것만 같았다.
그 와중에서도 여전히 긴장감은 모든 것을 통제하고 있었다.
매번 보는 모습이지만, 돌아다니던 사람들이 어느 순간 일제히 자리를 잡고 앉는 광경은 참으로 묘한 느낌이었다. 나는 그들과 마찬가지로 표를 꼭 움켜쥐고 코스 쪽을 바라보았다. 아주 잠깐 동안 정적이 흘렀다.
사이렌 소리가 울리기 시작했다. 나는 숨죽인 소리와 함께 7번 라인을 응시하고 있었다. 기수를 태운 말들이 달릴 준비를 했다.
문이 열리자 우렁찬 말발굽 소리가 사람들의 외침을 뚫고 들려왔다. 순식간에 3번 말이 혼자 선두로 달려나왔다.
"달려! 달려!"
나는 돌개바람이 어디 있나 살펴봤다. 그 녀석은 뒤에서 세 번째로 달리고 있었다.
"달려! 달리라니까!"
나와 함께 돌개바람에 돈을 건 남자는 목이 터지도록 7번 말을 응원하고 있었다. 하지만 반 바퀴가 남을 때까지도 그 녀석은 앞으로 달려나올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선두로 달리던 3번 말은 지쳐버린 것 같았다. 점점 속도가 느려지더니 마침내는 2등으로 달리던 8번 말과 비슷한 위치가 되었다. 그러나 지칠 대로 지친 3번은 그 위치마저 지키지 못했다. 골인지점에 다가오면서 그 녀석은 급격하게 뒤로 쳐졌다.
"달려! 뭐 하는 거야! 저런 빌어먹을!"
7번 말은 아직도 뒤에서 세 번째 자리를 지키고 있었는데도 남자는 매우 아까운 경기인 것처럼 끝까지 흥분해 있었다.
"저런!"
결승선을 넘은 것은 8번 말이었다. 그 순간 사람들의 환호성과 탄식이 여기 저기에서 쏟아져 나오기 시작했고, 나는 그 남자를 쳐다보았다. 그는 분한 표정으로 표를 내팽개치고는 매표원이 있는 쪽으로 걸어가며 나에게 말했다.
"자, 다음 경기에 겁시다. 이번에는 확실해."
나는 대답을 하지 않고 지갑을 열어보았다. 만 원 짜리 지폐 한 장은 8번 말이 결승선을 넘어가 버린 것처럼 공중으로 사라져 있었다.

남자가 팝콘을 사러 간 동안 나는 처음으로 경마장에서 샀던 표를 다시 찬찬히 들여다보았다. 그러다가 그것을 두 번 접고 나서 쓰레기통에 던졌다. 돈을 잃은 표는 그런 식으로 버리는 것이 이곳 사람들의 습관이었다. 두 번씩 접힌 뒤에 바닥에 내버려진 수많은 표들이 그 사실을 증명하고 있었다. 말하자면 일종의 주술과도 같은 행위였다. 우습지만 왠지 나도 모르게 그 주술적인 행위를 따라하고 싶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그곳에는 온통 경마를 숭배하는 주술사들로만 가득했으니까. 농부가 평생을 소들과 함께 농사만 지으며 산다면 그도 결국 소가 되어버리고 마는 법이다.
남자는 종이 봉지에 든 팝콘을 손에 들고 돌아왔다.
"오면서 다음 경기 리스트를 봤는데, 2번에 그 녀석이 있더군. 그 녀석한테 겁시다."
"그 녀석이요?"
"응. 우습지 않아요, 말 이름이 '그 녀석'이라니. 아무튼 그 녀석은 못해도 3등 안에 무조건 드는 놈이거든. 이번엔 예감도 좋고..."
나는 그와 함께 매표소 앞에 줄을 섰다. 그가 내 앞이었다.
"2번 연승(후에 알았지만 돈을 거는 법칙도 여러 가지가 있었다. '단승식'은 돈을 건 그 말이 정확히 1등을 해야 따는 것이고, '연승식'은 돈을 건 말이 3등 안에만 들면 따는 것이고, '복승식'은 두 마리의 말에 돈을 걸어 순서는 상관없이 그 두 마리가 1등과 2등을 하면 돈을 따는 것이고, 마지막으로 '쌍승식'은 두 마리에 돈을 걸되, 1등과 2등의 순서까지 정확히 맞춰야 돈을 딸 수 있는 것이었다.)으로 주쇼."
2만원을 낸 그는 표를 받아들고 소리 없이 웃으며 날 돌아보았다. 나는 매표소 직원 앞으로 갔다.
"뭘로 드릴까요?"
전 경기와는 다른 직원이었다.
"저..."
나는 만 원 짜리 지폐를 들고 잠시 망설였다. 그가 뭘 머뭇거리고 있냐는 듯한 표정으로 나를 보고 있는 것이 매표소 유리에 비쳤다. 유리 옆쪽에는 매 경기의 리스트가 붙어 있었다. 1번 '마왕', 2번 '그 녀석', 3번 '몽키 블루스', 4번 '통쾌마', 5번 '사이클론', 6번 '적토질주', 7번 '말벌의 춤', 8번 '불(火)치병'.
- 8번 불(火)치병.
"빨리 말씀하세요. 뭘로요?"
직원이 보채는 소리에 나는 얼떨결에 대답해 버리고 말았다.
"8... 8번, 불치병에 걸겠소. 단승으로."
표를 받고 돌아서는 내게 그가 다가오더니 눈을 크게 뜨고 말했다.
"아니, 2번으로 하라니까! 갑자기 왜 그래요? 게다가 또 1등표야?"
"그냥... 말 이름이 끌렸어요."
그는 어쩔 수 없다는 듯이 관중석으로 가면서 말했다.
"이번에도 잃으면 난 몰라. 알아서 하쇼."
마치 그는 나의 돈을 책임이라도 지고 있는 사람처럼 말하고 있었다. 나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고 그의 옆자리에 나란히 앉았다.
"그래, 얼마를 걸었길래? 10만 원?"
"아니, 9만 원 걸었어요. 9만 원."
'불치병'에 9만 원. 그것은 내게 남아 있는 아홉 달을 의미했다.

종이 팝콘 봉지는 남자의 손에서 무참히 구겨지고 있었다. 나의 표가 부르르 떨렸다.
"젠장, 가끔 이런 경우가 있거든. 아무도 예상 못한 놈이 1등을 해 버리는 거야. 말 그대로 빌어먹을 경우지."
나는 아무 말 없이 표를 바라보았다. 9 만원. 그리고 천천히 고개를 들어 전광판을 바라보았다. 배당률 324. 믿어지지 않았다. 324 배라니. 9만 원이나 걸었는데.
기수는 거침없이 결승선을 통과한 자신의 말 '불(火)치병'을 쓰다듬어주며 활짝 웃고 있었다. 붉은 기운이 감도는 털을 가진 그 말은 기수의 손길에 기분이 좋은지 그 자리에 가만히 서 있었다.
"빌어먹을... 사, 삼백 이십 사 배라고! 이봐요, 얼마 걸었다고 했었지?"
남자는 휘둥그래진 눈으로 나에게 물었다.
"구만 원이요."
내가 차분하게 대답하자, 그는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내 표를 쳐다보았다.
"그럼 그게 도대체 얼마야? 삼 구 이십 칠... 이 구..."
"2916 만원이에요."
그는 충격을 받은 것 같았다. 그러다가 갑자기 입을 벌리고 무언가 말을 하려고 했지만 그렇게 하지 못했다. 생각대로 말이 나오지 않는 모양이었다. 그의 입은 물고기처럼 뻐끔거리기만 했다. 나는 그가 무슨 말을 하고 싶은 지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아마도 그 기적 같은 행운의 당첨금을 자기에게 얼마 정도 나누어 달라는 말일 것이었다. 그 말을 할 때 그는 어쩌면 나를 친구라고 부를는지도 몰랐다. 하지만 그렇게 말할 명분이 없었고, 따라서 망설이고 있는 것이었으리라. 요컨대 그의 입장에서는 기뻐하기도, 아쉬워하기도 애매한 상황이었던 것이다.
결국 그는 입을 다물어 버리고 말았다. 내가 돈을 받으러 갈 때에도 그는 아무 말을 하지 않았다. 한 순간에 거액을 거머쥔 나는 솔직히 말해 기분이 좋았다. 기분이 너무 좋았다. 그것은 당연했다. 하지만 차분하게 행동한 이유는 단지 실감이 나지 않기 때문이었다.
그는 '그 녀석'에 건 이만 원 짜리 표를 손으로 구겨 버리다가 멈추더니 다시 폈다. 그리고는 그것을 두 번 접어서 바닥에 가볍게 팽개쳐 버렸다.

아직 두 경기가 더 남아 있었다. 그러나 우리는 더 이상 돈을 걸지 않고 경마장을 나섰다. 지하철역 입구의 계단을 내려가는 동안 남자는 줄곧 나에게 한 턱 내야 한다고 말했다. 나는 그럴 수가 없었다. 아무리 돈을 많이 땄다고 해도 언제 죽을 지 모를 정도로 망가진 몸을 가진 사람이 술을 마실 수는 없는 노릇이었으니까. 그 대신 나는 그에게 혼자서는 다음날 해가 밝을 때까지 마셔도 다 쓰지 못할 만큼의 돈을 직접 손에 쥐어주었다. 그러자 갑자기 남자의 태도가 돌변하기 시작했다. 반말과 존댓말을 섞어서 사용하던 그가(사실 반말을 훨씬 많이 썼었다.) 철저하게 존댓말만 사용했고, 쳇바퀴를 도는 다람쥐와 경마장을 달리는 말은 둘 다 우리의 인생과 같다는 식의 허튼 소리를 하면서 실실 웃어댔다. 나는 그렇게 변해버린 그가 불쾌했다. 서둘러 매표소 앞으로 가서 노선도를 보았다. 다행히 그 남자와는 처음부터 반대 방향이었다. 나는 작별을 하고 집으로 가는 열차에 몸을 기댔다. 남자는 마지막 순간까지도 연신 허리를 굽히며 인사를 해댔다.
창 밖으로 한강이 보였다. 북극성이 빛나고 있었다. 별빛은 도시의 여러 불빛들과 함께 한강의 야경에 아름답게 수를 짜고 있었다. 검은 물결 위를 비추는 빛들, 혹은 어두운 그 물결에서 반사되는 빛들.
- 만약 빛만을 보고 그 시커먼 물 속으로 뛰어든다면?
왠지 바로 내가 그러고 있는 중이라는 느낌이 들었다.
물은 깊고, 컴컴했다.

집에 도착했을 때는 생각보다 밤이 깊어 있었다. 나는 저녁을 먹지 않고 자리에 누웠다. 잠에서 깨면 무엇을 해야 할까. 나는 어둠에 익숙해진 눈으로 천장을 바라보았다.
잠이 막 들려고 했을 무렵에 전화가 울렸다.
"네."
"아이구, 이제 받네. 어째 하루종일 전화를 안 받드라."
어머니였다. 무슨 일이 있었는지 저녁때부터 전화를 걸었는데 통 안 받았다는 말이었다.
"오늘... 일이 있어서 늦었거든요. 무슨 일 있어요?"
"으응, 별 일은 아니구, 돈 좀 부쳐줘라."
"네?"
어머니의 목소리는 갑자기 작아졌다.
"네 애비가 글쎄, 왜 있잖아, 옛날에 하던 거..."
"노름이요?"
"으응, 화투짝으로다가 하는 거. 그 짓을 다시 해 가지고 논을 잡혔단다. 어이가 없어서..."
나는 수화기를 통해 어머니가 내쉬는 한숨을 그대로 느꼈다.
"얼만데요?"
두말없이 액수를 묻자 어머니의 목소리가 밝아졌다.
"으응, 사백만 원 정도. 괜찮겠니?"
"네."
나는 간단하게 대답해버렸다. 어머니는 미안하다는 말과 함께, 이번에는 아버지의 버릇을 단단히 고쳐 놓겠다고 다짐에 다짐을 거듭하며 전화를 끊었다.
사백 만원은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았다. 자리에 다시 누우면서 나는 오늘 있었던 수입을 생각해 봤다. 2916만원. 퇴직금과 비슷한 액수였다. 몇 년 동안 일하고 나서 받은 퇴직금이 고작 경마 한 경기로 얻을 수 있는 돈이라니.
그 순간, 말에 돈을 걸던 기억은 모두 조금 전의 꿈이었을 뿐이며, 경마장 같은 곳에는 애초에 가지도 않았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그 생각이 맞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경마장에서 그런 식으로 돈을 번다는 일은 불가능하다. 꿈일 뿐이다. 꿈이다.
나는 다시 몸을 일으켜 옷장에 걸어둔 양복을 꺼내고 주머니에 손을 넣었다. 손은 잠시 움직이다가 멈췄다. 나는 다시 빠르게 주머니를 뒤졌다. 그러다가 황급히 손을 꺼내서 반대편 주머니로 옮겼다.
돈이 없었다.
분명히 아침에 입고 나갔던 그 옷이었다. 경마장의 팝콘 냄새도 배어 있었다. 갑자기 머리가 복잡해지기 시작했다. 나는 불을 켜고 옷장 안을 이리 저리 뒤져봤다. 그러나 돈 봉투는 어디에도 없었다. 정말 꿈이었다는 말인가. 아니면,
- 그 남자.
경마장에서 나에게 돈을 걸어 보라고 부추기던 그 남자. 어느 말에 돈을 걸면 딴다고 장담하던 그 남자. 결국 내가 승리하자 술을 사라고 하던 그 남자. 내가 돈을 조금 쥐어주자 곧바로 존댓말을 쓰던 그 남자. 바로 그 남자가 내 돈을...
그렇게 생각하며 책상으로 무심코 시선을 돌렸을 때 나는 그것을 발견했다. 그때서야 집에 오자마자 주머니에서 돈이 든 봉투를 꺼내 책상 위에 던져놓았다는 사실을 기억해 낼 수 있었다. 나는 허탈하게 웃음을 한 번 내뱉었다.
꿈이 아니었던 것이다.



- 3 -



다음 열차가 도착한다는 안내방송이 흘러나온다. 나는 여전히 자판기 옆 플라스틱 의자에 앉아서 허공을 바라본다. 어차피 하기로 했지만, 아직은 몸이 내키지 않는다. 조금 더 지켜볼 생각이다. 열차의 빛을 보며 나는 중독이라도 된 것처럼 다시 한 번 회상에 잠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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늘 그렇게 가서 보고 싶었던 말들의 경주였는데, 정작 엄청나게 돈을 따고 나니 마음이 시들해져 있었다. 결국 그날 하루는 경마장에 가지 않기로 하고 집을 나섰다. 나는 지하철역에 들어가서 다시 무작정 열차를 탔다. 처음 경마장에 간 날 그랬던 것처럼. 그리고 자리에 앉아 졸기 시작했다.
"승객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굳은 공기를 울리는 남자의 목소리에 나는 잠에서 깼다.
"...시중에 가시면 이런 디지털 초시계는 아무리 싸도 만 원은 받습니다. 하지만 저는 이 자리에서 여러분들께 단 돈 이천 원만 받겠습니다. 이런 기회 또 없습니다."
그의 논리대로라면 정말 다시는 없을 기회였지만, 승객들의 반응은 무심했다. 단 한 사람도 시계를 사지 않았다. 남자는 초시계가 잔뜩 들어 있는 가방을 끌고서 조용히 옆 칸으로 갔다. 그와 함께 내 시선도 그쪽을 향했다. 그는 옆 칸에서 다시 초시계를 들고 있었다. 아마 이런 기회가 또 없을 거라는 말을 하고 있을 터였다. 하지만 역시 그 칸의 승객들도 관심이 없다는 표정을 지키고 있었다. 이중으로 된 칸막이 문 때문에 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잠시 후에 남자는 또 한 번 칸막이 문을 열고 저편으로 한 칸 더 들어가 버렸다. 나는 아무 생각 없이 옆 칸의 사람들을 쳐다봤다. 내가 있는 칸과 다를 건 없었다. 양팔을 벌리고 신문을 읽는 사람, 책을 읽는 사람, 자리에 앉아서 몸을 기대고 잠이 든 사람, 이야기를 주고받는 사람들, 누군가와 통화를 하는 사람, 그리고...
- 잘못 본 거야.
하지만 분명히 보였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칸막이 문으로 다가갔다. 그러자 더 확실하게 보였다.
착각이 아니었다. 그는 나를 닮은 사람이 아니었다. 빛 때문에 유리에 비친 내 모습도 아니었다. 옆 칸에는 내가 있었다. 분명히 그는 나였다. 그리고 나는 곧 한 가지 사실을 더 깨달았다.
그는 바로 경마장에 처음 가고 있을 때의 나였다.
나는 칸막이의 문고리를 잡은 채로 망설이고 있었다. 저편에 멀쩡히 있는 그를 붙잡고 도대체 당신은 누구냐고 묻고 싶은 마음은 주체할 수 없었지만, 왠지 두려웠다. 문을 열고 들어가면 나올 수 없다는(정말로 들어가면 나올 수 없다는 식의 구체적인 것이라기보다는, 그와 비슷한 식의 알 수 없는 느낌이었다.) 불안감이 마음 한 곳에 자리잡고 있기 때문이었다. 그것은 이제 막 자리잡은 것이 아니라, 마치 오래 전부터 그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던 것 같았다.
"이번에 정차할 역은, 경마공원, 경마공원 역입니다. 내리실 문은 왼쪽입니다."
안내방송이 흘러나오면서 열차의 속도가 줄기 시작했다. 또 하나의 내가 자리에서 일어나 출입문 앞에 가서 서는 것이 보였다. 나는 손에 힘을 주고 문고리를 쥐었지만 끝내 돌리지 못했다.
그는 경마공원에서 내렸고, 나도 서둘러 열차를 빠져 나왔다.

당연하게도 경마장은 변하지 않고 있었다. 병에 걸린 한 남자가 삼백 배의 배당금을 손에 쥐었다고 해서 임시 휴일을 지낸다거나 경기 횟수를 줄일 이유는 없었던 것이다. 전날 그랬던 것처럼, 또한 그 전날에도 그랬던 것처럼 실내 관람석에 들어서면서 맨 처음으로 느꼈던 것은 바로 그 기름진 팝콘과 땅콩 냄새였다. 사람들은 이제 막 시작한 첫 경주를 모니터로 주시하고 있었다.
나는 야외 관람석으로 나가서 사람들을 찬찬히 살펴보기 시작했다. 분명히 실내에는 없었던 것 같았다. 그러므로 이곳 어딘가에 자리를 잡고 앉아서 말들이 달리는 것을 보고 있을 게 확실했다. 만약 그가 경마장을 나갔다면 입구에 서서 실내 관람석을 둘러보던 내 눈에 띄었을 테니까.
하지만 사람들은 너무 많았다. 말이 결승선을 앞두고 달려가자 그들은 일어나서 손을 흔들며 마구 고함을 질러대기 시작했고, 그 때문에 나는 얼굴을 제대로 볼 수가 없었다.
"달려! 달려! 달려 나와!"
"뛰란 말이야!"
마침내 한 마리의 말이 결승선을 뛰어넘었고, 모두의 함성이 경마장 안을 가득 메우던 그 순간 나는 놀랍게도 그를 발견할 수 있었다. 뒷모습이었지만 한 눈에 알아보았다. 길을 막고 있는 사람들에게 양해를 구하며 점점 그에게로 다가가던 나는 뭔가 이상하다는 것을 느꼈다. 그의 키가 나보다 작았던 것이다. 게다가 가까이 갈수록 허를 찔린 듯한 기분이 심장에서 흘러나오는 것 같았다. 분명히 그는 나였었는데, 옷차림까지 완전하게. 나는 그의 어깨를 잡았다. 그러자 그가 돌아보았다.
"어! 반갑네요! 또 온 거요?"
아. 이럴 수가.
그는 바로 내가 말에 돈을 걸도록 해 준 그 남자였다.

"그래, 그 돈으로 뭘 했수?"
남자는 한 손으로 빵을 먹으면서 물었다. 다른 손으로는 두 번 접은 표를 쥐고 있었다.
"그냥 집에 두고 있어요."
그러자 남자는 속의 빵이 보일 정도로 크게 입을 벌리며 말했다.
"그걸 집에 둔다고! 아니 좀 굴려 보지요."
"굴리기는요..."
남자의 표정이 갑자기 멈췄다.
"그, 곱하기 한 거에 또 곱하기 한 거를 뭐라고 하더라..."
"제곱이요?"
"아, 제곱. 그거요. 어때요? 이번엔 내 말대로 하면 딸 텐데."
그의 눈에서 생기가 돌기 시작했다. 나머지 빵을 단숨에 입에 넣고 일어나면서 그는 쥐고 있던 표를 던져버렸다.

말들은 다시 한 번 달리고 있었다. 나는 그와 함께 '몽키 블루스'에 돈을 걸었다.
"달려 나와! 더! 더!"
침묵으로 지켜보는 나와는 달리, 죽어라 외쳐대는 그의 목에 선 핏발은 마치 거머리가 목덜미에 붙어 피를 빨아먹는 것처럼 보였다. 남자는 달리는 말에만 시선을 집중하다가 피가 몽땅 빨리는 것도 모르고 죽어갈 것이다. 고작 목에 붙은 거머리 한 마리 때문에.
"달리란 말이야! 그래!"
몽키 블루스는 선두를 지키고 있었다. 거머리가 더욱 굵어졌다.
"달려! 달려! 더! 나와라! 나와!"
세상을 모두 걸었다는 듯이 그는 외쳐댔다. 그 덕분인지 몽키 블루스는 점점 앞으로 달려 나오고 있었다. 결승점은 얼마 남지 않았고, 잠시 후면 승리는 몽키 블루스에게 돌아가도록 되어 있었다.
흙먼지가 자욱하게 피어오르면서 땅을 차고 달리는 말들을 바짝 추격하고 있었다. 하지만 결국에는 따라잡지 못할 것이다. 밟지도 않은 땅에서 먼지가 올라오는 법은 없으니까. 그대로 삼십 초만 지나면 되는 것이다.
- 삼십. 이십 구. 이십 팔...
몽키 블루스는 초보적인 실수를 범했다. 나는 한 순간 그것을 직감했다. 모든 경주에서는 결승점을 지나기 전에는 절대로 무리를 해서는 안 된다. 그럼 십중팔구 지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가 돈을 건 이 말은 무리를 하고 만 것이었다. 점점 뒤쳐지기 시작한 몽키 블루스는 순식간에 5등으로 밀려나고 말았다. 결승점이 코앞인데. 트럭 운전사가 야간에 차를 몰다가 하품 한 번 할 시간만큼만 더 달리면 되는데.
기막힌 순간에 경기의 흐름이 바뀌자, 이곳 저곳에서 온갖 잡음이 들려왔다. 나는 인상을 찌푸렸다. 그것은 몽키 블루스의 배신이나, 한 경기 최대 액수인 십 만원의 돈이 허공으로 사라진 것 때문은 아니었다. 사람들의 그 동시다발적인 변화가 나를 짜증나게 했다. 말이 무리해서 뛰다가 지쳤을 뿐이다. 그것은 펜이 책상 밑으로 떨어지는 것만큼이나 당연한 일이었다. 그런데 왜 그렇게 호들갑을 떤다는 말인가.
몽키 블루스는 여섯 번째로 결승점을 지났고, 뒤이어 흙먼지들이 차례로 천천히 따라오고 있었다. 나는 그것을 바라보다가 남자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목에 있던 거머리는 이미 흔적도 없이 사라진 뒤였다.
"이런 젠장할. 갑시다. 다음 경주는 '그 녀석'이 나온답디다."
남자와 나는 각자의 표를 두 번 접고 일어났다. 그 녀석은 7번이었다. 행운의 7이라. 느낌이 좋았다.

모두 열 번의 경기에 돈을 걸었다. 한 경기 당 십 만원씩, 그와 나 두 명. 하루 종일 달려라만 외치다가 이백만 원을 날려 버린 셈이었다. 단 한 경주도 이기지 못했던 것이다.
"오늘은 뭐가 안 되도 한참 안 됐나 봐. 젠장."
남자는 투덜거리며 나와 작별을 했다.



- 4 -



다음 열차가 도착한다, 사람들은 다시 어디선가 몰려나와서 문이 열리기를 기다린다. 잠시 후에 문이 열리고, 몇 명의 사람들이 열차에서 내린다. 그리고 다른 사람들이 탄다. 열차의 문이 닫히고, 천천히 가던 방향으로 움직이기 시작한다. 나는 비로소 다음 열차가 오기를 기다리기로 한다. 계속 이런 식으로 보내다가는 아무 데도 가지 못할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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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식으로 한 달이 지났다. 나는 경마장에 갈 때마다 그 남자를 만날 수 있었다(물론 만나기로 한 적은 전혀 없었다). 그러면 그는 약간의 비굴한 미소를 지었고, 나는 덤덤하게 매 경기마다 십만 원을 건네주었다.
그리고는 잃었다.
경마장에 갈 때마다 200에서 300만 원의 돈을 날렸다. 나는 그 어처구니없는 사실을 한 달이 지나서야 알아차릴 수 있었다. 돈 봉투에 손을 넣었는데, 달랑 만 원짜리 지폐 여섯 장만 남아있었던 것이다. 그날부터 경마장에 가지 않기로 했다. 돈이 없어서 갈 수도 없었다. 미리 집에 돈을 부쳐놓은 것이 다행이라면 다행이었다. 나는 적어도 그 만큼은 남겼으니 되었다고 생각했다. 노름으로 난 구멍을 노름으로 막았던 것뿐이었지만, 어쨌든 그 사실만큼은 뿌듯했다.

십 만원의 돈을 '불(火)치병'에 걸었다. 남자는 '그 녀석'에 걸어야 한다고 말했다. 이번에는 이길 수 있다면서 그는 씩 웃었다. '그 녀석'은 열 번의 경주에서 일곱 번은 꼭 우승하는 말이었다. 본 적은 없었지만 그는 그렇게 말했다. 하지만 그 어느 사실도 내 고집을 꺾을 수는 없었다.
우리는 맨 앞자리에 앉아서 관람했다. '불(火)치병'은 4번 말, '그 녀석'은 7번 말이었다. 관람석이 어느 순간 조용해지면서, 사이렌이 길게 울렸다.
문이 열리는 둔탁하면서도 날카로운 소리가 났고, 모든 말들은 일제히 앞으로 뛰어나오기 시작했다. 흙먼지가 빠르게 솟아나며 뒤쪽으로 깔렸다. 거센 말발굽들은 땅을 팔 기세로 강하게 차고 올라왔다. 다리를 내디딜 때마다 우악스럽게 움직이는 근육은 금방이라도 터져서 그 안에 있던 나의 팔뚝만한 힘줄이 가죽을 뚫고 나올 것만 같았다.
선두 그룹은 '그 녀석'과 '불(火)치병'이었고, 저 뒤쪽으로 나머지 여섯 마리가 달리고 있었다. 남자의 목에는 다시 거머리가 달라붙었다. 그는 '그 녀석'에게 모든 힘을 다해 소리를 지르고 있었지만, 나는 그가 패배할 거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누군가 그가 패배하는 이유를 말해보라고 하면 나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할 것이고, 혹시나 총을 들이댄다면 나는 긴장된 목소리로 해가 뜨면 아침이 오는 것처럼 자연스럽게 그냥 알았다고 말했을 것이다. 살다보면 가끔씩 이렇게 설명할 수는 없지만 결과를 알 수 있는 일들이 생기게 마련이다.
결국 '그 녀석'이 조금씩 지쳐가기 시작했다. 우리는 그것을 눈치챘지만, 나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고, 그 역시 마찬가지로 거머리만 더 굵게 키워댈 뿐이었다.
갑자기 말들이 느리게 달리기 시작했다. 아니, 단순히 느리다기보다는 완벽한 슬로모션이었다. 말들만이 아니라 남자도 느리게 움직이고 있었고, 나 또한 마찬가지였다. 원래 시간보다 다섯 배 정도는 느리게 세상이 돌아가는 것 같았다. 공기가 흐르는 소리가 아주 크게 들리고 있었다. 나는 내 머리가 이상해졌다고 생각했다. 경마에 빠져서 미쳐 버린 거라고.
- 미쳤어. 너는 미쳤어.
아무도 이 세상의 시간 변화 따위에는 관심을 두지 않고 있었다.
- 그게 바로 네가 미쳤다는 증거지.
주위를 둘러보았다. 단지 고개를 옆으로 돌리는 데에만도 십여 초가 걸렸다. 그리고 나는 더욱 이상한 사실을 알아차렸다.
관람석에는 목에 거머리가 늘어붙은 한 남자를 제외하고는 아무도 없었다. 단 한 명도. 경주를 시작하기 전까지만 해도 북적거렸던 것 같았지만, 나는 그것을 당연하게 받아들였다. 정답은 둘 중 하나겠지. 말이 달리는 순간부터 전부 가버렸던가, 아니면 애초부터 사람들이 없었던가.
- 그리고 너는 미쳤어.
'그 녀석'이 이제는 눈에 띄게 느려지고 있었다. 나는 웃으면서 남자 옆으로 다가갔다. 여전히 슬로모션이었다. 그의 얼굴에서는 절망의 꽃들이 하나 둘씩 피어나고 있었다. 내 웃음소리를 들었는지 그는 이쪽을 돌아보았다. 그것도 역시 십여 초가 걸렸다.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이제 '불(火)치병'이 이기는 일은 불을 보듯 뻔했다. 나는 약간의 동정이 섞인 비웃음으로 바라보면서 그의 어깨를 툭 쳤다.
그러자 거머리가 움직였다.
피를 가득 삼켜서 불어난 거머리는 웬만한 뱀의 크기 정도였다. 나는 기겁을 하며 뒤로 물러났다. 거머리가 관람석의 지저분한 바닥으로 내려오자, 기생을 당하고 있던 남자는 그대로 쓰러져 버렸다. 그 놈의 몸집으로 보건대 아마 남자의 피 절반은 빨아먹은 것 같았다.
삐죽하게 나온 이빨에서 비릿한 피 냄새가 났다. 천천히 다가오는 그 놈을 견제하며 나는 더듬더듬 뒤로 갔다. 두려움에 식은땀이 온 몸에서 흘러나왔다. 손에 꼭 쥐고 있던 표가 눅눅해질 정도였다.
갑자기 거머리가 자기 몸을 스프링처럼 감았다. 나는 그 놈이 무엇을 하려는지 눈치채고 얼른 옆으로 피하려 했지만, 그 퉁퉁 부은 거머리의 속도는 나의 상상을 초월했다. 무릎을 굽히고 뛰려는 순간에 그 놈이 내 가슴팍에 덮쳐든 것이었다. 거의 보이지도 않는 속도였다. 그대로 옆구리에 박힌 그 놈의 이빨이 느껴졌다. 꽤 깊숙이 들어온 것 같았다. 그리고는 다음 상황을 생각할 여유도 주지 않은 채 무자비한 거머리는 내 피를 빨아들이기 시작했다. 기운이 쭉쭉 빠져나갔다. 금세 다리의 힘이 풀리고, 나는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그 놈이 옆구리에서 이빨을 뽑자, 엄청난 고통이 신경세포를 타고 전율했다. 얼마나 빨아먹었는지 피는 별로 나오지도 않았다.
그 놈은 두 번째로 내 가슴 부분에 이빨을 박아 넣었다. 나는 비명도 지르지 못하고 그대로 쓰러졌다. 심장 부근에서 엄청난 양의 피가 빨려나가는 느낌이 들었다. 괴물 거머리는 아마도 내 피를 모조리 빨아먹을 모양인 것 같았다. 나는 힘을 짜내서 손으로 그 놈을 쥐고 흔들어 보려고 했지만, 손에서도 힘이 빠지기 시작했다. 결국은 저절로 손바닥이 펴졌고, 팔은 축 늘어지고 말았다. 아직 제대로 기능을 발휘하는 건 눈과 귀뿐이었다. 몸이 점점 차가워지고 있었다.
남자와 내 피를 빨아서 몸을 가득 채운 거머리는 이제 나보다 커져 있었다. 나는 눈조차 깜박이지 못하고 허공을 응시했다. 눈꺼풀에도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서서히 소리들도 작아지기 시작했다. 나는 그 놈이 나를 뜯어먹는 소리를 듣지 못하게 되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아직까지 손에 미세한 통증이 있는 걸 봐서는 손목이나 손가락 부근에서도 피를 빨고 있을 것이었다.
'불(火)치병'이 우승했다는 소리가 아주 작게 들렸다. 나는 쓰러진 상태에서 마지막으로 온 힘을 다해 고개를 옆으로 약간 돌렸다. 전광판이 보였다. 갑자기 모든 사물이 붉은 톤으로 보이기 시작했다. 슬로모션이던 세상은 이제 아예 멈춰버린 듯했다.
4번, '불(火)치병' 우승, 배당률 365.5.
- 너는 미쳤어.

끔찍한 악몽이었다. 베개가 온통 땀에 젖어 있었다. 아무런 생각도 할 수 없었다. 정말 소름끼치는 경험이었다. 지금까지 꾼 악몽 중에서 가장 끔찍했을 거라고 나는 생각했다. 어쩌면 앞으로의 악몽 중에서도.
달력을 봤다. 경마장에 안 간지 정확히 2주째 되는 날이었다. 그리고 그 빌어먹을 경주가 있는 날이기도 했다. 나는 망설임 없이 옷을 챙겨 입고 집을 나섰다. 봉투 속의 지폐 여섯 장은 안주머니에 집어넣어 두었다.
지하철역까지 가는 길에, 나는 현금인출기에서 수표와 현금이 섞인 800만원을 뽑았다. 그것은 퇴직금을 포함하여 내게 남아있는 전 재산이었다.



- 5 -



다음 열차가 들어온다는 안내방송이 또 흘러나온다. 심호흡을 하고 자리에서 일어난다. 저 안쪽 어디에선가 바람 소리와 철로의 마찰 소리가 점점 크게 들려온다. 그리고 빛이 흘러 들어오기 시작한다.
빠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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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번째 경기는 그냥 지켜보기로 했다. 사이렌 소리는 거대한 괴물이 배가 고프다며 내는 울음소리처럼 들렸다. 그것은 정말로 무시무시한 소리였다. 배가 고플 땐 무엇이든 먹게 되어있는 것이다. 주인의 눈알을 파먹었다는 어느 충실한 개처럼.
시작과 동시에 사람들은 자신이 돈을 건 말에게 소리를 질렀다. 늘 그랬다. 경주 초반에는 어느 말이 이길지 예측하기 어려우므로, 모든 사람들이 희망을 가질 수 있는 것이다. 나는 맨 앞좌석으로 갔다. 처음 이 곳에 왔을 때의 그 벅찬 마음을 다시 한 번 느끼고 싶었다.
말발굽이 힘차게 땅을 내칠 때마다 땅에서 흙먼지가 일어났다. 거칠게 몰아쉬는 말들의 숨소리가 내 귀까지 들리는 것 같았다. 거친 갈기는 바람에 휘날렸고, 꼬리는 곧게 서 있었다. 나는 그 광경을 보며 한참 동안이나 지난 그 감정을 느껴보려고 애썼다. 하지만 쉽지 않았다. 이미 이 곳의 모든 것에 익숙해진 나에게는 그것도 그저 달리는 말들일 뿐이었다. 그 거대한 생명의 힘 따위는 어디서도 느낄 수가 없었다. 숨을 깊이 들이쉬어 보았지만 기름진 냄새들만 코로 들어왔다.
어느 순간 4번 말이 치고 나왔다. 그러자 4번에 건 사람들이 엄청난 함성을 질러댔다. 그도 그럴 것이, 4번에게 걸린 배당률은 94배나 되었던 것이다. 4번은 죽을힘을 다해 달렸다. 앞가슴에 두드러진 근육이 빠르게 움직였다. 나는 그 근육이 터질 것만 같다고 생각했다. 터지면 그 안에 있을 내 팔뚝만한 힘줄이... 오, 맙소사.
꿈에서 보았던 바로 그 근육이었다. 정확히 일치했다.
"오랜만이요!"
누군가 내 어깨를 가볍게 치면서 말했다. 나는 그 목소리를 듣자마자 그가 누군지 알았다. 아니, 어쩌면 목소리를 듣기 전에 이미 알았을지도 모른다.
"네, 오늘도 왔네요."
남자는 말없이 히죽거리며 웃었다. 그리고는 한 손을 들어 검지 손가락을 펴고 말했다.
"4번은 질 거요."
나는 잠시 생각한 뒤에 대답했다.
"네, 그럴 것 같아요."

남자는 이제 나보고 말을 고르라고 했다. 내가 말을 골라서 내 돈으로 걸라는 뜻이었다. 첫 날 그러했던 것처럼, 그렇게 하면 딸 수도 있을 거라고 했다. 나는 조금 전의 경기 결과가 떠 있는 전광판을 보면서 그의 말을 들었다.
2번, '산사태' 우승, 배당률 7.3.
내가 말을 고르고 있을 때 그가 또 말했다.
"그리고 이번에는 백만 원, 아니 천만 원이라도 걸 수가 있어요."
"네?"
"표를 몰아서 맞대기를 하는 거요. 그럼 최대로 걸 수 있는 십만 원보다 훨씬 더 많이 걸 수가 있거든. 그렇게 되면 돈에 제한이 없을 정도요."
"그런..."
남자가 말했다.
"나는 삼백만 원 있소. 그쪽은?"
"저는, 팔백요."
"좋아요. 이번이나 다음 경주에 맞대기로 천만 원을 겁시다. 어때요?"
나는 눈을 크게 뜨고 반문했다.
"네? 하지만 굳이 그럴 필요가..."
그러자 남자는 무슨 비밀이라도 말하는 것처럼 낮은 목소리로 내게 말했다.
"단 한 번, 이런 건 단 한 번 따고 끝나는 거요. 나눠서 조금씩 잃기 때문에 도박을 하면 망하는 거요. 그런데 이렇게 하면 이야기가 조금 다르거든."
그 말이 맞는 것 같았다. 단 한 번. 따지고 보면 나도 단 한 번을 이긴 것이 아니었던가.

한 경주가 더 끝났다. 우리는 이제 돈을 걸기 위해 움직였다.
맞대기를 하기 위해서는 돈이 많은 사람들이 필요하다. 그들도 맞대기를 원하는 사람이어야 더 신뢰할 수가 있다. 여러 사람들이 한 말에 십만 원짜리 표를 산다. 물론 그 돈은 나와 그가 주는 것이고, 그렇게 해서 만약 우리가 건 말이 이기게 되면 그들은 승리의 돈을 받아서 우리에게 도로 주는 것이다. 이것은 신뢰성이 가장 중요한 일이었다.
걱정할 만큼은 아니었다. 맞대기를 원하는 사람들은 많이 있었다. 그들의 조건은 한 표당 10퍼센트인 만 원씩이었다. 우리가 지면 그대로 끝나는 것이고, 이기면 만 원씩만 주면 되는 일이었다. 나는 승리를 확신할 수 있었다. 첫 번째 라인에 선 말이 바로 '불(火)치병'이었던 것이다. 우리는 모두 990만 원의 돈을 그 말에게 걸 수 있었다. 99장의 표였다.
사이렌이 울리는 동안 나는 고개를 돌려 배당률을 확인했다.
1번, 불(火)치병. 배당률 365.5.



- 6 -



빛 때문에 생긴 열차의 그림자가 먼저 빠르게 역 안으로 들어온다. 그리고 조금 뒤에 저 안쪽에서 마침내 열차가 모습을 드러낸다. 나는 안전선 위에 있던 발을 움직여서 조금 뒤로 물러난다.
그리고는 앞으로 뛰어든다.
누군가가 그런 나를 보고 비명을 지른다.
허공에 잠시 몸이 떠 있는 순간, 나는 다시 그날을 회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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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갑자기 이 곳이 경마장이 아니라 무슨 재판소라도 되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관람객들은 모두 경주를 배심하는 배심원들이었다. 그들은 결코 공정한 법이 없다. 나름대로 '정의로운' 어느 한 쪽이 이기기를 갈망하지만, 그것도 결국 자기네들의 이익을 위해서인 것이다. 세상 어디서나 다 그런 것이다.
말들이 달리기 시작했다. 우리가 앉은 곳에서 가장 멀리 있는 1번이지만, 가장 커 보였다. 가장 빨라 보였고, 가장 힘세 보였다. 사람들은 여전히 소리를 질러 대고 야단이었지만, 이번에는 그도 나처럼 얌전히 있었다. 극도의 긴장 때문이었다. 나와 그는 전 재산을 걸었다. 그것은 우리가 인생을 걸었다고 봐도 과언이 아니었다. 어차피 나는 저당 잡힌 인생이었고, 그도 나와 그다지 다를 건 없어 보였다. 그래서 우리는 걸 수 있는 것이었다.
빠르게 달리는 말들 틈으로 '불(火)치병'이 뛰어나왔다. 내 예상이 맞았다. 결승점까지는 아직 반정도 남아 있었지만, 나는 이미 그 말이 이길 거라는 확신에 휩싸여 있었다. '불(火)치병'은 자꾸만 앞으로 나왔다. 정말 엄청난 속도였다. 나머지 말들은 아무리 힘이 많이 남아 있어도 도저히 앞선 그 말을 따라잡지는 못할 것이었다.
"달려! 달려! 그래!"
마침내 그가 참지 못하고 소리를 지르기 시작했다. 가슴이 벅찼다. 힘차게 달리는 그 말을 보자 갑자기 예전의 그 감격이 되살아났다. 땅을 가르는 흙먼지. 미끈한 근육. 바람의 저항을 버티는 갈기. 승패와는 상관없이 그저 달리는 모습만 보면 생명을 느낄 수 있었던 그 때의 그 감격. 나는 처음으로 자리에서 일어나 본능적으로 주먹을 쥐고 외쳤다.
"뛰어!"
내 말을 알아들었다는 듯이 '불치병'은 속도를 더 내기 시작했다. 결승점까지는 삼분의 일 정도만 남아 있었다. 두 번째 순위로 달리는 말만 해도 선두와 50미터는 차이가 나 보였다. 그 어떤 빠른 말이라도 뒤집을 수 없는 경기였다. 누가 봐도 그랬다. 이제 30초 정도만 지나면 '불(火)치병'은 결승점을 지날 것이고, 우리는 멋진 경기였다고 하며 함께 술을 마시거나 식사를 하고, 그 엄청난 양의 돈을 나눌 것이었다. 그 돈으로는 보람있는 일을 할 것이었다. 나처럼 죽어가고 있는 사람들을 위한 기금이라든지, 아니면 남자처럼 떠도는 사람들을 위한 것도 좋았다. 어찌 됐든 좋았다. 꼭 쥔 주먹에 힘이 더욱 들어갔다. 미세하게 떨렸다. 온 몸이 들뜨기 시작했다.
그러나 다음 순간 나와 그의 표정이 바위처럼 굳어졌다.
처음에는 결승점을 코앞에 둔 '불(火)치병'이 갑자기 하늘을 날아오르는 줄로만 알았다. 하지만 그럴 리가 없었다. 거친 숨을 몰아쉬며 달리던 말은 무엇에 그리 놀랐는지 앞다리를 번쩍 들고 뒷다리 두 개만으로 서고 있었던 것이다. 모두가 놀란 표정으로 지켜봤지만, 나의 눈에 그것은 그야말로 장관이었다. 다리를 허공에 내지르며 올라서는 말의 자태가 나를 다시 한 번 흥분하게 만들었던 것이다. 하늘을 향해 손을 펼치면 날아오를 것만 같았다. 나도 모르게 주먹을 들고 '불(火)치병'에게 흔들어 보였다. 말의 야성적인 울음소리가 경기장에 울려 퍼졌다. 그리고는...
그리고는 그대로 넘어져 버렸다.
게임은 끝났다.
나는 주먹에 힘이 들어간 채로 한참 동안이나 계속 서 있었다.
게임은 그렇게 끝났다.



- 7 -



내가 암과의 경주에서 앞서기 위해 지하철을 택한 이유는, 그것이 빠르고 쉽기 때문이다.

앞선다고 이길 수 있는 건 아니지만, 그것으로 충분하다. 전력질주로 달려오던 열차는 사람이 뛰어들었다고 해서 멈추지 못할 것이다. 말이 왜 힘을 아껴두지 않고 전력질주를 하다가 지쳐서 져버리는지 이제야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앞설 수 있기 때문이다. 앞설 수 있는 그 순간에 느낄 수 있는 감정 때문이다. 느껴보지 않은 사람은 결코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그리고 바로 지금, 나도 앞섰다. 나도 그 모든 것을 앞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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