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밀번호를 잊어버리셨나요?

단편 르네상스

2004.08.11 22:5808.11

문을 열어준 사람은 아내였다.
"일찍 왔네요, 오늘은?"
나는 말없이 구두를 벗었다.
10월 회식이 취소된 건 아니었다. 점심때부터 속이 쓰리기 시작해서 퇴근할 때까지 좋지 않았던 것이다. 오는 길에 위장약을 사 먹긴 했지만, 아무래도 효과가 없는 것 같았다.
"밥은 먹었어요?"
"안 먹어."
나는 마지못해 대답했다. 이런 날은 괜히 짜증이 나기 마련이다. 사실 약국에서도 짜증이 나긴 마찬가지였다. 인상을 찌푸리며 속이 쓰리다고 했을 때, 약사는 차분하게 구체적인 증상을 묻기 시작했던 것이다. 나는 아무래도 좋으니까 위장약이나 달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그땐 그래도 참을 만했다. 약을 먹으면 나을 거라는 기대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약사는 아내처럼 안경을 쓰지도 않았었다.
하지만 집에 오는 동안 통증은 오히려 악화되었고, 테가 없는 안경을 쓴 아내가 문을 열어주지 않았는가. 이게 얼마나 짜증이 나는 일인가. 그리고 '일찍 왔네요, 오늘은?' 이라니. 그럼 내가 늦게 왔는데 그 시간에 문을 두드릴 수가 있을까.
"먹고 왔어요?"
넥타이를 풀고 와이셔츠를 벗으며 대답했다.
"안 먹어."
바지를 벗어서 걸이에 거는 동안 아내는 꼼짝도 않고 내 옆에 서 있었다. 나는 반바지를 꺼내 입으면서 고개를 돌려 그녀를 바라보았다.
"당신, 무슨 일 있어요?"
평소 같았으면 그저 말없이 저녁을 준비할 아내였다. 오늘처럼 안 먹는다고 하는 날에는 과일을 깎거나 뭔가 다른 일을 할 테지만. 아무튼 이런 반응은 처음이었다. 무슨 일이 있냐니. 무슨 일이야 늘 있는 게 아니던가.
"없어."
속이 안 좋다는 말을 하면 분명 또 그 원인을 찾아내느라 이것저것 물어볼 게 뻔했다. 지금 같은 상황에서는 정말 피곤한 일이다. 차라리 아까 먹은 약이 늦게라도 효과가 있길 바라는 편이 나았다.
"그런데 왜 그래요?"
"뭐?"
아내는 전에 없던 행동을 계속하고 있었다. 가만 보니 눈빛에 미미한 분노의 흔적까지 묻어 있었다. 나는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아내를 쳐다봤다.
"왜 그러냐구요?"
"내가 뭘?"
아내의 표정은 금세 울음을 터뜨릴 듯한 어린아이처럼 바뀌었다. 다음 순간 입을 벌리고는 무언가를 말하려고 했다. 하지만 망설이는 듯했다.
"...아니에요. 씻어요."
그리고는 마루 소파에 앉아 TV를 보기 시작했다. 나는 그날 따라 아내가 좀 이상하다고 생각했지만, 곧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고 욕실로 들어갔다.
그리고 그것은 나에게 있어서 가장 큰 실수였다.

처음 그 소식을 들은 것은 며칠 뒤 내가 회사에 있을 때였다. 휴대폰을 집에 두고 왔기 때문에 회사 전화로 담당 의사의 이야기를 전해 들어야만 했다. 통화를 마친 뒤에도 나는 덤덤한 표정으로 업무를 계속했다. 처리해야 할 빌어먹을 서류가 산더미 같았던 것이다. 늘 있는 일이지만 그럴 때면 정말 짜증이 났다. 나는 보고 있던 서류만 대충 처리한 뒤에 일어나려고 했다. 그러나 어느 순간 갑자기 손이 떨렸다. 그 뒤로는 같은 부분만 계속해서 읽어댔다. 도저히 일을 할 수가 없었다. 분노의 눈빛이 금세 눈물로 번지던 아내의 모습이 자꾸만 떠올랐다. 나는 결국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무런 보고도 없이 회사를 나섰다. 회사 주차장에 차를 놓아두었다는 사실을 깨달은 건 내가 탄 택시가 출발한 지 5분쯤 지난 뒤였다.
집 앞에서 택시는 멈췄다. 돈을 계산하고 내리자, 차는 사라져 버렸다. 나는 또 한 번의 실수를 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아내는 이제 집이 아니라 병원에 있을 터였다.
차는 회사에 놓아둔 상태였다. 일단 집으로 들어갔다. 집안에는 당연히 아무도 없었다. 나는 욕실에 들어가서 물을 틀었다. 얼굴에 물을 묻혔다. 거울에 비친 바닥에는 아무렇게나 팽개쳐 버린 약병이 보였다. 표면에는 'Seconal'이라고 적혀 있었다. 그리고 무언가가 세면대 옆에 놓여 있었다. 그건 약병과는 달리 조심스럽게 놓아둔 것 같았다. 혹시나 바닥에 떨어질까 봐 안전한 곳까지 밀어놓은 그것이 무엇인지 나는 알 수가 없었다. 생전 처음 보는 물건이었다. 나중에야 나는 그 물건이 뭔지 알게 되고 깜짝 놀라지만, 처음에는 그것을 일단 주머니에 넣고 욕실을 나왔다.
두통이 왔을 때처럼 머리를 손가락으로 누르며 방으로 갔다. 혼란스러웠다. 침대는 아내가 말끔하게 정리해둔 상태였다. 그녀가 마치 방금 전까지만 해도 그곳에서 침대보를 매만지고 있었던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 물론 그럴 리는 없었다.
내 책상에는 뚜껑이 열린 펜과 휴대폰이 놓여 있었다. 액정에 부재중 통화 그림이 표시되어 있었다. 병원에서 여기로 전화를 했으리라. 나는 휴대폰을 안주머니에 넣으면서 시계를 봤다. 회사에서 엄청난 양의 서류 속을 헤매다가 전화를 받은 지도 한 시간이 조금 더 지나 있었다. 이젠 집을 나서야만 했다. 차 키를 들고 나가려다가 내 차는 여전히 회사에서 자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내던져 버렸다. 허탈한 웃음이 나왔다. 글쎄, 이런 상황에서 웃는다는 것은 말도 안 되는 일이었지만, 그래도 웃음이 나왔다.
병원으로 가는 버스 안에서 나는 욕실에서 발견한 그 이상한 물건을 다시 꺼내 보았다. 여전히 알 수가 없었다. 삼십 여 년을 살아온 내 지식으로는 모르는 것이었다. 분명히 아내가 사용한 물건인데 나에게는 너무나 생소했다. 립스틱 같기도 했다. 그러나 크기가 너무 컸다. 어떻게 보면 뭔가를 담아놓는 통처럼 보이기도 했다. 나는 손에 힘을 주고 그것을 열어 보려고 했지만 열 수가 없었다. 도무지 열리지를 않았다. 이리 저리 돌려서 살폈지만 '10개 세트' 외에는 아무 글씨도 없었다.

누워 있는 사람은 아내가 맞았다. 혹시나 했던 말도 안 되는 기대는 그대로 사라져 버렸다. 나는 충격과 공포와 슬픔을 동시에 느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내 머릿속을 가득 채운 것은 충격을 받아 생긴 후유증이나 두려움 따위가 아닌, 단 한 글자였다.
'왜?'
왜 아내는 자살이라는 비극적인 결말을 선택했던 것일까. 남편인 나로서는 도저히 알아낼 수가 없을 것만 같았다.
"맞습니까?"
담당관이 내게 물었다. 의사인 것 같기도 했고, 아닌 것 같기도 했다. 그건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나는 대답을 해야만 했다.
"네."
나는 줄곧 아내의 텅 빈 눈동자만 보고 있었다. 실제로 시체가 그렇게 창백한 줄은 미처 모르고 있었다. 그나마 영화에서 나오던 장면들은 좀 혈기가 도는 편이었다. 아내의 살은 새하얗다 못해 거의 투명해 보일 정도였다. 죽어버린 피가 피부 위로 전부 투시되어 보이는 것 같았다. 아내는 그렇게 죽어 있었다.
"너무 늦게 발견하는 바람에, 위 세척도 소용이 없었습니다."
그 의사인지 뭔지 하는 담당관은 안경을 고쳐 쓰며 말했다. 그는 뭔가 하기 싫은 말을 꼭 해야만 할 때 그런 식으로 안경을 고쳐 쓰는 습관이 있는 것 같았다.
"그럼 바닥에 있던 통이 수면제였군요."
나는 여전히 아내의 눈을 보며 중얼거렸다.
"네?"
그가 되물었다.
"욕실... 바닥에 있던..."
"아, 그런가요? 욕실에 수면제 통이 있었나요?"
"네, 세코날이라고 적혀 있던데요."
그는 내 말에 썩은 미소를 지었다.
"세코날은 마취제입니다. 사실, 수면제로는 그리 쉽게... 생명을 잃게 되지는 않거든요."
그게 수면제든 마취제든 상관없이, 나는 줄곧 눈을 보고 있었다. 아내의 초점 없는 눈은 아무 것도 보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면서 동시에 모든 것을 보고 있는 것 같았다.
"부인께서 마취제를 어디서 구하셨을까요?"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 대신 영화처럼 생생한 한 장면을 머리에 떠올리고 있었다. 내가 출근하고 나서 아내는 TV를 보고, 청소를 하고, 빨래를 하고... 뭐 이런 장면은 대충 넘어가자. 나는 그 영상의 빠르게 감기 버튼을 눌렀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 다시 제 속도로 재생을 시작했다.
아내의 얼굴에는 극심한 슬픔이 서려 있다. 어쩌면 불안일지도 모른다. 어찌 되었든 간에 자살충동에 시달려 막다른 골목에 이른 사람의 마지막 표정이다. 아내는 손에 약통을 쥐고 있다. 카메라가 그 통을 클로즈업한다. 수면제, 아니 마취제다. 대충 봐도 많은 양이다. 거대한 코끼리라도 그 한 통이라면 그대로 잠들 수 있을 것 같다.
"괜찮으세요?"
멍한 내 얼굴을 보고 담당관이 물었다. 나는 고개를 돌려 그를 쳐다보았다. 뭔가 말하려고 했지만 다시 영상이 흐르기 시작했다.
아내는 어느 순간 일어나서 욕실로 향한다. 문을 열고 잠시 망설인다. 거울이 보인다. 숨이 차 오르는 것을 느낀다. 자신의 끔찍한 표정이 고스란히 눈에 들어온다. 숨을 고르고 나서 아내는 약통을 열고 마취제를 두 알 집어서 입에 넣는다. 그리고 물을 틀어 그대로 마신다. 이 동작은 재빠르다. 다시 두 알을 집고, 또 물을 마신다. 그 정도라면 충분하다는 생각이 들었는지, 아내는 남은 알약을 변기에 쏟아 버린다. 그리고 발작적으로 웃으며 약통을 바닥에 내팽개친다.
담당관은 내가 큰 충격에 빠졌다고 판단을 했는지 내 눈앞에 손가락을 보이며 흔들었다. 나는 시선을 그 손가락에 따라보냈다.
"어디에 있었나요?"
갑자기 내가 던진 질문에 그는 약간 당황하는 듯했다.
"소파에 누워 있었습니다."
나는 그 말을 듣고 마지막 장면을 재생했다.
아내는 욕실을 나와 소파로 달려간다. 처음에는 제대로 앉아서 TV를 켠다. 화면에는 슬픈 영화의 한 장면이 나오고 있다. 남자 주인공이 총알에 맞고 쓰러진다. 여자 주인공은 비명을 지른다. 그 비명에 맞춰 아내는 또 한 번 발작적인 웃음을 터뜨린다. 아까보다 훨씬 강하고 소름끼치는 웃음소리다. 한참을 웃고 나서 아내는 묵묵히 TV를 본다. 조금씩 눈이 감기기 시작한다. 그러다가 결국 고개를 떨구고, 이내 옆으로 스르르 누워 버린다. TV는 계속 켜져 있다. 아무 것도 나오지 않고 지직거리는 TV화면이 서서히 작아지면서 곧 마루 전체의 풍경이 한 장면에 들어간다. 아내가 소파에 누워 있는 모습도 보인다. 그녀는 잠이 들어서 편하게 누워 있다. 아주 편하게. 세상의 모든 축복을 한 몸에 받고 잠든 아기 같다.
그런데, 또 다른 그 통은? 그건 언제 나오는 거지?
"약을 먹고 소파에 누워서 기다렸던 거죠. 편하게 죽..."
담당관은 뒤에 오는 말을 얼버무렸다. 나는 그 말이 '편하게 죽었어요' 내지는 '편하게 죽으려고 했어요' 일거라는 생각을 했다. 주머니에 있는 그 통이 만져졌다. 이건 왜 방금 전의 영상에 없었던 것일까. 영상은 내 지식을 통해서만 재생이 가능하기 때문에? 그래서 내가 알지 못하는 물건들은 아예 등장하지 않았던 것일까? 아내가 조심스레 놓아둔 그 물건처럼? 갖가지 질문들이 끝없이 피어올랐다. 나는 그 질문들이 결국 하나를 말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 통은 도대체 무엇일까.
담당관은 그것을 알 수 있을지도 몰랐다. 그러나 나는 끝내 주머니에서 그 통을 꺼내지 않았다. 몇 번이나 물어보고 싶은 욕구가 생겼지만, 왠지 아무에게도 보여주기가 싫었던 것이다. 나 혼자 알아내고 싶었다. 그것이 아내를 위한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유는 알 수 없었다. 그냥 그런 생각이 들었다.
그는 아내의 몸 위로 하얀 천을 덮었다.

장례식은 조촐하게 치렀다. 외동딸이었던 아내를 찾아온 사람들은 그녀의 몇몇 친구들과 그들보다 더 적은 수의 외가 식구들이었고, 친가에서 온 사람은 형뿐이었다.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는 사실 때문일까. 마땅히 와야 할 만한 핏줄들 중 일부는 오지 않았다. 이상한 점은, 평소 왕래가 잦았던 사람들일수록 모습을 나타내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나는 그들을 이해할 수 없었다. 하긴, 이런 식으로 사라져 버린 아내조차 이해하지 못했는데 그들이라고 가능하겠는가.
6각형의 관은 땅 속으로 들어갔다. 나는 삽으로 흙을 한 번 떴다. 다른 사람들도 한 번씩 삽을 떴다. 흙이 관 뚜껑에 부딪혀 좌르르 부서졌다. 그러고 있는 동안 여기저기에서 훌쩍이는 소리가 들렸다. 흐느끼는 사람도 있었다. 나는 멍한 얼굴로 구덩이에 흙을 계속 퍼 담았다. 관 표면에 흙이 쌓이면서 점점 부셔져 내려가는 소리가 둔탁해졌다. 그 땅은 습기가 많아서 흙이 덩어리가 진 채로 삽에 묻어 나왔다. 나는 자꾸만 아내의 관에 흙을 던졌다. 땀이 흐르는 것도 모르고 있었다. 검은 양복에 흙이 묻었다. 나의 손놀림은 빨라졌다. 흙을 퍼담고, 또 퍼담고, 또 퍼담고, 또 퍼담고... 경사로를 미끄러져 내려가는 스케이트보드처럼 나의 움직임에도 가속도가 붙기 시작했다.
결국 사람들은 나를 붙잡았다. 나는 그들을 뿌리치고 계속 흙을 펐다. 미친 듯이 삽을 흙 속으로 휘둘렀다. 이미 관은 묻혀서 보이지 않을 정도였다. 결국에는 여럿이 나를 붙잡았고, 삽은 땅에 떨어졌다.
"왜, 묻어 주는 것도 안 됩니까!"
"뭘 잘 했다고 큰 소리야!"
장인이었다. 그의 표정에는 냉기가 묻어 있었다. 나와 나를 붙잡은 사람들은 가만히 서 있었다.
"내 딸을 죽여놓고, 뭐가 더 부족한가?"
그의 입에서 나오는 말들은 얼굴에 나타나 있던 냉기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훨씬 차가웠다. 그대로 그곳의 공기를 얼려 버리는 것 같았다.
나는 역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게 무슨 헛소리냐고, 내가 아내를 죽이다니 말도 안 된다면서 받아치고 싶었지만 입은 벌어지지 않았다. 그저 사람들의 손을 빼고 뒤로 물러나 한 쪽에 서 있을 수밖에 없었다. 옷을 털자 흙이 흩어졌다.
순식간에 나는 아내를 죽인 놈이 되어버렸다. 모두가 나를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을 것이다. 겉으로는 동정의 눈길을 보였지만, 속마음은 한결같이 나에게 이렇게 말했으리라.
'뭐가 더 부족해?'
나는 잠시 그렇게 서 있다가, 혼자서 묘지를 빠른 걸음으로 나와 버렸다. 아무도 나를 잡지 않았다. 한 손은 주머니에 들어 있는 그 통을 꼭 쥐고 있었다. 형은 말없이 저편에 서서 그런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회사는 나에게 사흘의 휴가를 주었다. 그 동안 아내를 가슴속에 묻어 버리라는 뜻이었다. 세상에, 사흘이라니. 땅 속에조차 제대로 묻지 못했는데.
첫날은 하루 종일 집에 틀어박혀 TV를 봤다. 아무런 생각도 없었다. 아무런 일도 하지 못했다. 심지어 그 동안 나는 아내가 하던 설거지를 한 번도 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결국 식사는 중국요리를 시켜먹었다. 그릇을 닦는다는 것은 내게 시도조차 할 수 없는 어려운 일이었다. 한순간에 바보 천치가 되어버린 느낌이었다.
TV에서는 약물 중독에 관한 다큐멘터리 프로그램이 나오고 있었다. 코카인, 마리화나, 엑스터시, 필로폰 등의 마약들이 각각 증상을 표시한 굵은 자막과 함께 화면을 가득 채웠다. 그 뒤로 고통스런 미소가 담긴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는 얼굴이 있었다. 약물에 반응을 일으키는 그들은 하나같이 텅 빈 눈동자를 가지고 있었다. 왠지 모르게 낯이 익었다. 어디선가 본 그 눈동자...
그 순간 누워있던 아내의 모습이 떠올랐다. 그녀의 눈동자가 바로 그랬었다. 곧이어 시체를 확인시켜 주던 담당관의 얼굴이 떠올랐다. 그는 '맞습니까?' 라고 물었다. 발음까지 정확하게 머리 속에 흘러들었다. 나는 리모컨의 전원 버튼을 누르고 눈을 감았다. 그러자 죽은 아내가 더 선명하게 보였다. 하얀 천을 목까지 덮고 있었다. 손이 천을 마저 잡아당겨서 그녀의 얼굴을 덮었다. 물론 손의 주인은 그 담당관이었다. 그는 계속해서 '맞습니까?' 라고 묻고 있었다.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뭐가 맞느냐는 건지 되묻고 싶었지만 역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할 수가 없었다. 기억 속에서는 다른 이들만 말할 수 있는 법이다. 나는 침묵으로 일관했다. 그러나 담당관은 집요하게 '맞습니까?' 라고 물었다. 내가 대답을 하지 않으면 영원히 그 질문만 반복할 것 같았다. 그를 보내기 위해서는 무슨 말이라도 해야만 했다.
나는 대답하는 대신 그에게 손을 펴서 내밀었다. 손에는 그 통이 있었다. 그는 몸을 숙여 그것을 살펴보았다. 이리 저리 보더니 고개를 들고 나에게 말했다.
"맞습니까?"
나는 폈던 손을 다시 쥐었다. 그 통에는 관심이 없는 듯 보였다. 하는 수 없이 다시 주머니에 넣었다. 그 동안 담당관은 그 끝없는 질문을 반복했다.
"맞습니까?"
내가 대답하지 않자, 그는 천을 잡고 있던 손을 움직여 다시 아내의 얼굴이 드러나게 해 주었다. 눈은 이제 감겨 있었다. 그걸 보니 마음이 약간 편안해졌다. 사실 아내라고는 하지만 이미 죽은 사람이었고 그 텅 빈 눈은 무섭기까지 했었던 것이다. 나는 그의 손을 잡아서 다시 천을 덮게 했다. 그러자 그가 웃었다. 이런 상황에서 웃다니. 나는 약간 당황해하며 그를 쳐다봤고, 그는 그런 내 시선을 향해 똑같은 질문을 던졌다. 아니, 이번에는 생략된 단어가 채워진 완전한 문장이었다.
"당신이 죽인 게 맞습니까?"

"아니야!"
눈을 떠보니 소파였다. TV를 보다가 그대로 잠이 든 모양이었다. 더 이상 신호를 받지 않아 아무 의미가 없는 화면은 끝없이 파도치고 있었다. 9월의 달력이 뻐꾸기 시계와 함께 TV 뒤쪽 벽에 자리잡고 있었다. 그 옆에는 창문이 있었고, 창문을 가린 커튼 틈으로 새벽빛이 발자국을 남기지 않으면서 살며시 들어오고 있었다. 언제나 나의 아침을 깨우던 것은 커튼을 제치며 들어오던 그 빛이었고, 그 커튼을 치워주던 사람은 바로 아내였다. 순간 아내가 사뿐사뿐 들어와 커튼을 걷어내는 것이 보였다.
"여보?"
나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창가로 다가갔다. 한 손으로 커튼을 거칠게 걷어버렸다. 기다렸다는 듯이 빛이 우르르 몰려왔다. 하지만 아내는 없었다.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당연한 일이었다.
당연한 일인데도 나는 울었다.
눈물은 뺨을 타고 가슴속으로 떨어져 내렸다. 가슴에 금이 가는 것만 같았다. 그 순간 절실히 아내가 보고 싶었다. 늘 상냥한 웃음으로 대해 주던 그녀였다. 나의 의견에는 거의 무조건 따랐고, 싫어도 내색하지 않던 그녀였다. 회사 일 때문에 짜증을 내도 언제나 잘 받아주던 그녀였다. 오래 전 생일날 사 준 목걸이를 절대로 벗는 법이 없던 그녀였다. 신혼 때 선물했던 코트도 중요한 날이 아니면 절대 입지 않고 아껴두던 그녀였다. 무엇보다도 나를 진심으로 사랑하던 그녀였다. 갑자기 모든 것이 서러웠다. 소리 없이 나를 지켜보는 동녘의 빛도 서러웠고, 집안 구석구석에 배어 있는 우리 삶의 흔적도 서러웠다. 나는 소파에 엎드려 그렇게 어린애처럼 한참을 울었다. 눈물이 멈추지 않았다.

아직도 졸린 기운이 남아 있는 남자는 아침부터 음식을 시켜먹는 나를 한심하다는 듯이 쳐다보았다.
"얼마죠?"
"사천 원입니다."
주머니에 손을 넣어 지갑을 꺼내는 순간 뭔가 같이 나와서 바닥으로 떨어졌다. 나는 일단 돈을 건네고 남자를 돌려보냈다. 남자가 나가고 나서 나는 몸을 기울였다. 마룻바닥을 뒹굴고 있던 것은 두말 할 것도 없이 빌어먹을 그 통이었다.
나는 그것을 집어서 대충 훑어본 뒤에 방금 배달된 음식이 놓여진 식탁 위에 올려놓았다. 그리고 앉아서 수저를 들었다. 먹다 보니 왠지 울화가 치밀었다. 나의 손놀림은 빨라졌고, 덕분에 금세 목이 메어버렸다.
"물..."
나는 아무도 없는 맞은 편 의자 쪽으로 말을 던졌다. 그리고는 일어나서 물을 컵에 받았다. 벌컥벌컥 들이키고 나서 다시 물을 가득 채웠다. 컵을 식탁에 놓으려는데 적당한 자리가 없었다. 그 통이 자리를 차지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나는 그 통을 집어서 벽 쪽으로 아무렇게나 내던져 버리고 말았다. 그리고 나서 통이 있던 곳에 컵을 놓으려다가 멈추고 날카로운 소리에 고개를 들었다.
벽에 부딪힌 통은 깨져서 바닥에 내용물을 쏟아내고 있었다.

아내가 갔을 만한 병원은 많아야 두 군데 정도였다. 우선 가장 가까운 내과가 있었고, 조금은 멀지만 큰 병원 중에서는 가장 가까운 곳이 있었다. 아내는 주로 가까운 병원에 갔지만, 어쩌면 일부러 큰 병원에 갔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나는 일단 내과를 향해 차를 몰았다. 10분 정도면 도착할 거리였다. 그러나 내 감정의 시계로는 벌써 한 시간이 넘게 걸리고 있었다. 신호등마다 빨간 불에 멈췄고, 유난히 많은 차들이 도로를 가득 메웠다.
가는 동안 계속해서 내 머리에 맴돈 생각은 한 가지였다.
왜 내가 모르고 있어야 했을까.

의사는 고개를 저었다.
"글쎄요, 부인께서는 최근에 여기 오시지 않았습니다."
말하는 그의 표정이 어두웠다. 아내의 죽음을 알고 있는 것 같았다. 하긴, 동네 전체에 소문이 퍼졌을 게 당연했으니까.
"그럼, 마지막으로 온 게 언제였죠?"
"잠시만요..."
의사는 서류를 뒤적였다.
"아, 여기 있네요. 1월 22일. 감기 때문에 오셨네요."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역시 큰 병원에 갔던 것이다. 의사에게 인사를 하고 나오려는데, 그가 내 등을 향해 한 마디를 던졌다.
"부인되시는 분 일은 참 유감입니다."
나는 역시 대답하지 않고 문을 닫았다. 유감이라. 아내가 여덟 달 전에 감기에 걸린 것이 유감이라고? 아니면 최근에 병원에 오지 않아서? 그것도 아니면 아내가 마취제를 너무 많이 먹어버려서? 도대체 그 빌어먹을 유감이라는 말에 무슨 의미가 있다는 말인가. 나는 성큼성큼 걸어서 병원 주차장으로 나왔다. 그리고 열쇠를 꺼내기 위해 주머니에 손을 넣었다. 먼저 잡히는 것은 깨진 그 통이었다. 나는 그것을 꺼내서 한동안 보다가 조수석에 놓고 시동을 걸었다.

큰 병원에서는 의사에게 이런 질문을 하기가 까다로울 것이었다. 가뜩이나 진료를 기다릴 환자도 많은데, 나 같은 사람은 그들에게 할 일 없는 놈으로만 보일 테니까. 그러므로 협조적이지 않을 게 뻔했다.
하지만 나에게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이미 묻어버린 아내를 다시 파낼 수는 없었던 것이다. 만약 그렇게 된다면 두 번 다시 그녀를 묻지 못할 것만 같았다. 묘지에는 물론, 내 가슴속에도 그건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역시 환자들은 많았다. 대기실에서 자기 차례를 기다리는 사람들은 의자에 앉아서 재미도 없는 TV화면에 넋을 놓고 있었다. 나도 그들 곁에 가서 앉았다. 휠체어를 탄 여자가 복도 쪽으로 움직였고, 환자복을 입은 아이는 금방이라도 넘어질 것처럼 뛰어다녔다.
"얘, 뛰지 말라니까."
아이는 부모의 말에 아랑곳하지 않고 깔깔 웃어댔다. 그리고 계속 뛰었다. 어린아이는 절대로 지칠 줄을 모른다. 아이가 하던 일을 그만두는 이유는 힘들어서가 아니라 지루해서, 흥미를 더 이상 느낄 수 없어서다, 라는 말을 어느 책에선가 읽었던 기억이 났다. 그 아이의 표정이 그 말을 증명하는 것 같았다.
"정동현 님?"
간호사가 내 이름을 불렀다.
  
의사는 난감한 표정으로 계속해서 안경을 매만졌다. 날카롭고 빈틈이 없는 인상의 그는 의사치고는 나이가 젊은 축에 들었다. 나보다도 대강 서너 살 정도는 어린 것 같았다.
"그러니까, 부인되시는 분께서 여기 오셨는지를 알고 싶으시다구요?"
"네. 부탁합니다. 중요한 일이라서요."
의사는 생각에 잠기는 듯했다.
"대체 그 중요하다는 일이 뭡니까?"
그의 말투에는 짜증이 섞여 있었다. 하긴 그럴 만도 하겠지.
"아내는 얼마 전에 세상을 떠났습니다. 마취제 과다 복용으로요."
"그래서요?"
갑자기 나타나 귀찮은 질문을 해대는 남자의 아내가 살아있든 아니든, 그는 별로 중요하게 여기지 않는 것 같았다.
"그런데 뭔가 이상해서요. 혹시 당뇨에 걸렸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부인의 나이가 어떻게 됩니까?"
"서른 넷입니다. 물론 그럴 가능성이 적은 건 알지만..."
"아이는 몇 명이나 낳았습니까?"
"네?"
"아이 말입니다. 몇 명이나 낳으셨냐구요."
나는 잠시 머뭇거렸다.
"우리는 아직... 아이 계획이... 없었습니다. 아내도 동의했구요. 조금 늦더라도..."
"그럼 가족 중에 당뇨에 걸린 사람이 있습니까?"
아내 쪽에서 누가 당뇨에 걸렸다는 말은 들어본 적이 없었다.
"제가 알기로는 없습니다."
그러자 의사는 안경을 만지던 손을 내리고 말했다.
"글쎄요, 최근에 당뇨로 온 환자는 몇 명 있지만... 아이도 없는 30대 여자는 이곳에 오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그런 분이 당뇨에 걸릴 확률은 일반적으로 높지가 않아요. 뭐, 식생활 습관이 많이 안 좋거나 한 게 아니라면 말이죠. 당뇨 환자 중에 대부분은 나이가 지긋하신 분들이란 말입니다. 그나마 유전적 요인으로 걸리는 경우가 대부분이에요."
나는 그의 거침없는 설명에 말문이 막혀버렸다.
"그래도..."
의사는 건너편 벽 쪽을 향해 말했다.
"간호사, 다음 환자 오시라고 해."
나는 하는 수 없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문고리를 잡았다. 그때 떠오르는 것이 있었다. 아내가 이 곳에도 오지 않았을 경우를 대비한 것이었다.
나는 안주머니에서 그것을 꺼냈다.
"그런데 왜... 아내는 이걸 가지고 있었을까요."
의사는 그것을 받아들더니 대충 살펴보았다. 그 동안 내가 다시 말했다.
"당뇨가 아니더라도, 아내가 당뇨를 의심한 건 사실이 아닙니까."
그러자 그가 픽 웃으며 나에게 도로 건넸다. 나는 그것을 받아 의사가 한 것처럼 대충 앞뒤로 돌려보았다.
"소변 검사 도구라고 해서 전부 다 당뇨를 대비한 건 아닙니다."
"네? 그게 무슨..."
내가 바보처럼 되묻자 의사는 다시 안경을 매만지더니 말했다.
"그건 용도가 다르다구요."
"다르다뇨?"
결국 의사는 다시 짜증이 섞인 목소리를 내뱉었다.
"아, 참 답답하네. 그러니까 그건, 자가 임신 테스트 기구란 말입니다!"

아.

그 순간 나는 아무런 생각도 할 수가 없었다. 누군가 나의 뇌를 끄집어내서 사고를 정지시킨 느낌이었다.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진찰실을 나와서 1층으로 내려갔다.
서둘러 병원을 나서는 내 머리 속에서 누군가 내게 같은 말을 반복하고 있었다.
너는 아내를 모르고 있었어.
그랬다. 나는 모르고 있었다. 아내의 존재는 어느 날부터 사라져 버렸다. 아내의 이름조차 집안 어디에도 남아 있지 않았다. 그 대신 나의 말에만 따르는 한 여자가 나와 같이 살고 있었다. 청소하는 여자, 설거지하는 여자, 빨래하는 여자... 그리고 문 열어주는 여자. 온통 그런 사람들뿐이었다. 신혼이 지나면서 고개를 들던 나의 무관심이 마침내 극에 달했던 것이다. 아내가 죽기 며칠 전만 해도 나는 그랬었다.
그리고 아내는 마취제를 먹었다.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나는 차 열쇠를 꽂은 채로 손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손이 부르르 떨렸다. 쥐고 있던 열쇠를 놓았다. 라디오를 틀었다. 지지직거리는 소리가 잠깐 들리더니 음악이 흘러나왔다. 피아노 곡이었다. 느리고 슬픈 연주였다. 나는 그것을 가만히 듣고 있었다.
오래 전에 끊은 담배 생각이 났다. 아내는 다 좋지만 담배가 싫다면서, 그걸 끊으면 결혼해 주겠다고 했었다. 그래서 끊었고, 결혼에 성공했던 것이다. 그때의 기억들이 하나 하나 네모진 차창을 채우며 지나갔다. 나는 씁쓸한 미소를 머금고 그것들을 바라보았다. 비록 빛은 바랬지만 모두가 순수한 날들이었다.
한동안 그러고 있는데, 갑자기 기억의 네모꼴이 부서져 버렸다. 빗방울이 차창에 부딪히기 시작했던 것이다. 나는 급히 와이퍼를 작동시켰다. 하지만 이미 기억들은 어디론가 사라져 버린 뒤였다. 흐려진 차창 밖이 더 뿌옇게 변했다. 눈물이 고이고 있었다. 손가락으로 눈물을 닦아낸 다음 고개를 옆으로 돌렸다. 또 다시 그렇게 울 수는 없었다. 창문을 내리고 밖을 쳐다보았다. 그곳에는 검게 그을린 하늘이 있었다. 열린 창으로 빗물이 들어왔다. 와이퍼는 흐느끼는 소리를 내며 계속해서 움직이고 있었다. 나는 마침내 액셀러레이터를 밟았다.
그날처럼 빗방울이 차갑게 느껴진 적은 이제껏 없었던 것 같다.

내가 향한 곳은 아내가 마지막 순간에 실려갔던 병원이었다. 그곳은 주로 급성 뇌졸중이나 심장마비 때문에 구급차에 실려 들어오는 환자들을 받고 있었다.
여기에서도 얻을 만한 정보는 별로 없을 게 뻔했다. 하지만 나에게는 더 이상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자가 임신 테스트 기구(그래, 분명 '자가'였다)를 산 사람이 산부인과에 갔을 리는 없으니까. 그리고 산부인과는 치과만큼 많이 퍼져 있는 병원이다. 혹시나 아내가 그 수많은 곳 중에서 하나를 택했다고 하더라도 내가 거길 전부 돌아다니며 물어본다는 것은 너무나 많은 시간이 걸리는 일이었다. 게다가 아내는 임신의 가능성을 나에게 숨기고 있었다. 어쩌면 내가 짐작도 할 수 없는 곳에서 검사를 받았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아무튼 지금으로서는 아내의 임신여부를 알아내는 것이 가장 중요했다.
세 번째로 도착한 병원 주차장에서 차를 멈추고, 심호흡을 했다. 나는 분명히 단서를 찾는 형사가 아니라 아내의 의문사를 궁금해하는 한 남자였다. 할 수 있는 일이 있고, 그렇지 못한 일이 있는 것이다. 말하자면 아내의 기록을 보는 것쯤은 병원에서 흔쾌히 허락할지도 모르지만, 그러나 그게 아닐 수도 있다는 것이다. 그럴 땐 어떻게 해야 하지?
나는 그 질문에 대한 답을 찾지 못한 채로 일단 차에서 내렸다. 비는 서서히 그치고 있었으나 어두운 하늘은 그대로였다. 날이 저물기 시작한 것이다. 나는 정문으로 걸어갔다.
어느 곳이든 응급차는 때를 가리지 않고 오게 되어 있다. 그러나 대개 밤이면 더 많은 사고가 일어나기 마련이다. 이런 생사의 갈림길을 넘나드는 환자들 틈에서 이미 죽은 사람의, 그것도 땅에 묻혀버린 사람의 일을 묻는다는 건 그들을 방해하는 일밖에 되지 않을 것이다. 나는 그 사실을 명심하며 접수 창구로 갔다. 간호사가 대기하고 있었다. 나는 용건을 말하기 시작했다.

"어차피 봐도 모르실 텐데요. 의학 용어들로 되어 있어서..."
이곳의 의사는 예상보다 친절한 사람이었다. 개처럼 숨을 헐떡이며 지금 막 실려온 환자가 아직 없기 때문일 수도 있었지만, 아무튼 그는 협조적이었다.
"궁금한 점이 있어서요."
"그게 뭡니까?"
나는 의사에게 그 망할 놈의 자가 임신 테스트 기구를 보여줬다.
"아내가 이걸 사용하고 있었던 것 같아요."
의사는 서류 캐비닛을 열고 사망자 기록을 뒤지면서 아내의 이름을 살폈다. 잠시 후에 그 중 하나를 꺼낸 그는 안경을 닦은 다음 페이지를 넘겼다.
"임신을 했었나요?"
의사는 서류의 특정 부분들로 시선을 옮기며 읽었다.
"글쎄요, 그 당시에 소변검사를 하지 않아서 임신 여부를 확인하기는 어려울 것 같습니다. 이미 사망한 분이니 다시 검사를 할 수도 없구요."
예상했던 답이었다. 죽은 아내는 당연히 소변은커녕 타액이나 눈물조차 흘리지 않을 테니까, 그리고 무엇을 물어보든 침묵하기만 할 테니까. 하지만 그 말을 막상 듣고 나니 기운이 빠졌다.
"그럼 어떻게든 확인할 방법도 없을까요?"
의사는 생각에 잠겼다.
"한 가지 시도는 해볼 수 있겠네요. 이 근방의 산부인과에 연락을 취해서 아내 분이 검진을 받으러 오셨는지 알아보는 건 가능할 것 같으니까요."
"그래 주시겠습니까!"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이었다. 시간이 부족했다. 결국은 내가 직접 돌아다녀서라도 모든 산부인과에 가야만 했을 것이다. 모레부터는 다시 회사에 나가야 했다. 그때가 되면 시간은 더 부족할 것이고, 나는 어쩌면 진실을 알아내지 못할지도 몰랐다. 그런데 의사 덕분에 시간을 번 것이다. 나는 몇 번이고 그에게 고맙다는 말을 했다.
병원을 나서는 하늘은 이미 완전히 어두워져 있었다.
나는 집을 향해 차를 몰았다.

사람이 없는 집은 가끔 그 자체가 어떤 생물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바로 그 밤이 그런 날이었다. 불을 켜고 집안에 들어서는데, 벽을 비롯하여 창문, TV, 탁자, 전등 같은 것들이 모두 눈을 뜨고 나를 바라보는 듯한 느낌이 들었던 것이다.
나는 그런 묘한 기분을 떨쳐버리기 위해 TV를 켰다. 방송국에서는 심야영화를 상영하고 있었다. 소파에 누워 멍하니 화면을 응시했다.
어둠 속의 살인자와 쫓기는 미녀. 아무도 없는 밤길을 통해 점점 다가오는 그림자. 겁에 질린 미녀의 얼굴. 상황과는 상관없이 유난히 짧은 스커트. 일부러 그런 것처럼 점점 으슥한 곳으로 도망가는 미녀. 한 줄기 빛조차 침범하지 못하는 골목길. 자꾸 뒤를 돌아보며 뛰다가 그만 넘어지는 미녀. 그 뒤에 바짝 다가온 그림자. 다시 힘겹게 일어나는 미녀. 그리고 앞에는 막다른 골목. 밤하늘에 퍼지는 비명소리. 차가운 달빛. 그림자. 미녀.
채널을 돌리다가 TV를 끄고 눈을 감았다.
눈을 뜨니 다른 곳에 와 있었다. 왜 내가 이 곳에 와 있는지 기억할 수 없었다. 낯선 곳이라고 생각했지만, 전에 와본 적이 있는 것도 같았다.
"맞습니까?"
담당관이 뒤에서 물었다. 나는 황급히 돌아보았다. 그는 이 세상에서 가장 차가운 표정으로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맞습니까?"
나는 그를 향해 '맞습니까' 외에는 아는 단어가 없냐고 쏘아붙이고 싶었지만, 그의 표정은 만약 내가 그렇게 말한다면 그것은 어처구니가 없을 만큼 이 상황에 어울리지 않을 거라고 말하고 있었다. 아니 경고하고 있었다.
"맞습니까?"
그의 옆에 있는 침대에는 희고 낡은 천으로 덮인 한 사람이 누워있었다. 분명 아내일 것이다. 나는 그리로 다가가서 천을 걷어내려고 했다. 그런데 그가 내 팔을 잡았다. 힘이 무척 셌다. 조금 더 힘을 주면 내 팔이 힘없이 축 늘어질 것만 같았다.
"맞습니까?"
"뭐... 가요?"
나는 얼떨결에 그렇게 대답했다. 그러자 그는 결국 걸려들었다는 듯한 눈빛으로 미소지으며 나에게 말했다.
"당신이 죽인 게 맞습니까?"
그러더니 그가 직접 천을 걷어서 한 쪽에 던져버렸다. 11월의 낙엽처럼 바닥에 떨어진 하얀 그것을 보다가 나는 침대로 시선을 옮겼다. 싸늘하게 식어서 침대에 누워 있는 아내의 모습이 보였... 아니, 아니었다.
침대에 있는 건 아내가 아니라, 어떤 아기였다. 아직도 탯줄에는 핏기가 남아 있었다. 내가 쳐다보자 창백하게 죽은 사람처럼 누워있던 아기가 눈을 떴다. 그리고 아기의 시선이 나와 마주쳤다. TV에서 가끔씩 보던 외계인의 눈처럼, 아기의 큰 눈은 온통 새까맣기만 했다.
아기는 나를 향해 싱긋 웃더니 입을 벌렸다.
"아빠, 나앙 노라조!"

"여보세요?"
나를 악몽에서 깨운 건 전화벨 소리였다.
"정동현 씨?"
"접니다. 누구시죠?"
"네, 여기 병원입니다."
"네?"
등이 땀에 흠뻑 젖은 나는 병원에서 왜 전화가 왔는지 기억해내는 데에 시간이 오래 걸렸다. 아직도 귓가에서 '맞습니까' 라고 누가 속삭이는 것만 같았다. 나는 침을 삼켰다.
"아아, 예. 벌써 알아내셨나요?"
그렇게 말하며 벽에 걸린 뻐꾸기 시계를 봤다. 점심때가 다 되어가고 있었다.
"다임 산부인과라고, 그렇게 멀지는 않은 곳이더군요."
나는 계속해서 고맙다는 인사를 하고 전화를 끊었다. 다시 시계를 봤다. 시침이 12를 갓 지나고 있었다. 점심을 먹고 출발해도 될 것 같았다. 생각보다 일이 쉽게 풀리고 있었다.
찬장을 열었더니 다행히 라면이 한 봉지 있었다. 그 덕분에 오늘은 입에도 맞지 않는 외부 음식을 면할 수가 있었다. 차라리 라면이 낫지. 물론. 그렇고말고.
그러나 라면 한 봉지조차 나에게는 벅찼다. 냄비에 물을 얼마나 넣어야 하는지도 몰랐고, 면과 수프를 넣고 나면 또 얼마나 기다려야 하는지도 몰랐던 것이다. 나는 망설이면서 봉지를 만지작거리다가 뒷면에 있는 설명을 발견했다. 물은 세 컵, 약 5분 정도 끊인다... 생각보다 간단했다. 나는 유리컵에 수돗물을 받아 세 컵을 냄비에 붓고 가스레인지의 불을 켰다. 불을 켜는 방법은 쉬웠다.
금세 냄비 안에서는 라면이 보글보글 끊기 시작했다. 나는 불을 끄고 냄비를 식탁으로 옮겨놓았다. 계란은 감히 깨뜨려 넣을 엄두가 나지 않았다. 끓여놓고 보니 물이 너무 많았다. 그리고 면은 지나치게 익어서 흐물흐물했다. 하지만 이 정도면 만족이었다. 적어도 먹을 수는 있으니까.
나는 걸신들린 사람처럼 라면을 먹어치웠다. 배가 불렀다. 입안에 온통 라면 수프의 매운 맛이 남아 있었다. 정수기로 유리컵에 물을 받아서 마셨다. 시원했다. 반쯤 마셨을 때 나의 시선이 벽에 걸린 달력에 닿았다.
내일은 회사에 나가야 했다.
어쩌면 내일이 오기 전에 모든 걸 알아낼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고마운 의사의 말대로 병원은 가까운 곳에 있었다. 버스를 타고 서너 정류장이면 도착할 거리였다. 이렇게 가까운 곳이었다니. 왠지 억울한 기분이 가슴을 훑고 지나갔다. 시동을 끄고 차에서 내려 입구로 걸어갔다. 비가 또 내리려는지, 하늘에는 까만 잉크를 머금은 스펀지가 어느 한 곳을 중심으로 뭉쳐 있었다.

단임 산부인과 - 여의사가 진료합니다.

의사가 잘못 알고 있는 것 같았다. 분명히 설명해 준 곳은 여기인데, 다임이 아니라 단임이었다. 이상한 이름이었다. 뭐, 그럴 수도 있겠지. 아무튼 간판 옆의 안내문을 보니 아내가 이 곳에 온 이유가 가깝기 때문만은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나는 회전문을 밀고 안으로 들어갔다. 회전문? 산부인과에? 안될 건 없지만, 혹시나 아기를 곧 낳으려는 임산부가 사고로 회전문 안에 몸이 끼이기라도 하면 그땐 어쩐단 말인가. 회전문 안에서 아기를 낳는다? 문만 지나면 산부인과인데도? 나는 진료 대기실의 TV를 보며 그게 허튼 걱정이라는 것을 알았다. 그런 식의 출산이 단 한 번이라도 있었다면, 벌써 신문이나 뉴스에서 난리를 쳤을 테니까.

임산부는 여의사가 진료합니다.

대기실 한쪽 벽에도 적혀 있는 이 문구는 마치 '우리는 오늘 구운 빵만 판매합니다'와 같은 뉘앙스를 풍기는 듯했다. 그런 빵집에서는 대개 당일 구운 빵만을 팔지 않는다. 일단 만든 건 상하기 전까지는 팔아야 하는 것이 사업의 원칙이다. 거짓말인 것이다. 마찬가지로 여의사가 진료를 하되, 간호사가 남자일 수도 있다. 광고는 언제나 거짓을 말하고, 병원은 언제나 치료비를 원한다. 저 '여의사가 진료합니다'라는 말이 이 모든 것을 말해 주고 있었다. 물론 나에게만 말이다.
나는 익숙하게 간호사에게 용건을 말했다. 남자 간호사는 아니었다. 예쁘장한 얼굴에 키도 크고 피부는 약간 검은 여자였다. 그녀는 잠시 망설이다가 내부 전화를 돌렸다. 의사에게 물어보려는 것 같았다.
"네, 여쭤볼게 몇 가지 있다고 하셔서요. 네? 네, 알겠습니다."
전화를 끊더니 그녀는 희미하게 웃으며 말했다.
"저기 앉아서 기다려 주세요."
간호사가 시키는 대로 가서 앉았다. 진료를 기다리는 사람은 온통 배가 커다란 여자들뿐이었다. 그 사이에 내가 있으려니 머쓱해졌다. 그래서 일어났다.
창가에 서서 하늘을 보았다. 회색의 구름은 당장이라도 비가 올 것처럼 물기를 가득 담고 있었고, 그 아래로 도시 전체가 회색의 그림자에 스며든 채 움직이고 있었다. 단순히 움직이는 게 아니라, 그것은 멈춰버린 흑백사진들이 과거를 향해 달리고 있는 모습과도 같았다. 멈추지 않는 시간 덕분에 사진으로밖에 남지 않는 기억들. 이미 어떤 사진들은 저 뒤까지 달려가고 있고, 지금 막 생겨난 새로운 사진도 그것들을 따라 달리고 있다. 그리고는 망각의 경계선을 지나는 순간, 금세 어디론가 사라져 버리는 것이다. 언제 존재하기라도 했었냐는 듯이. 다 그렇지. 세상 어디서나 그런 것이다. 망할.
"정동현 님?"
간호사는 내 차례가 온 것을 알리고 있었다. 나는 그녀의 안내에 따라 진료실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남자 혼자서 산부인과 진료실에 들어가는 것을 보고 몇 명의 여자들이 수군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그러나 그런 것쯤은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진료실 안에는 40대 초반쯤 된 것 같아 보이는 여의사가 앉아 있었다. 한 쪽 옆에는 침대가 있었고, 침대 오른쪽으로 초음파 검사기와 각종 기구들이 설치되어 있었다. 나는 주위의 것들에 잠깐씩의 시선을 주고 나서 의사 앞으로 갔다. 아까부터 그 여의사는 나에게 눈길 한 번 주지 않으면서 서류들을 뒤적이고 있었다.
"물어보실 게 있다구요?"
계속 서류를 넘기면서 의사가 물었다.
"그렇습니다."
그녀는 펜으로 뭔가를 적었다. 그러더니 다시 서류를 넘겼다.
"이런 곳에서 알고 싶으신 게 뭐죠?"
"제 아내가, 여기서 진료를 받은 적이 있습니다."
"그런데요?"
"아내는 얼마 전에 세상을 떠났습니다. 혹시 아내에게 아이가 있었다면..."
"없었어요."
여의사는 내 말을 자르며 간단히 대답했다.
"네?"
"아내 되시는 분한테는 아이가 없었다구요."
"...아, 그렇습니까?"
나는 왠지 힘이 빠졌다. 그때 의사가 느닷없이 질문을 던졌다.
"모르시고 있군요?"
"뭘요?"
갑자기 가슴이 뛰기 시작했다. 의사는 가볍게 한숨을 내쉬더니 역시 나를 쳐다보지 않으면서 말했다.
"불임입니다."
"네?"
나는 그녀가 한 말이 무슨 뜻인지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불임이라는 말의 의미를 도저히 파악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가슴이 더 크게 뛰고 있었다. 터져 버릴 것만 같았다. 진실을 안다는 것은 언제나 이렇게 아프도록 가슴이 떨리는 일이라는 것을 몸 전체로 깨닫고 있었다. 나는 무슨 말을 더 해야 할지 몰라서 의사를 쳐다보기만 했다. 나중에 든 생각이지만, 의사가 불임이 아니라 그 어떤 말을 했어도 나는 알아듣지 못했을 것이다.
"불임이라구요. 임신을 하지 못한다는 말이에요."
너무나도 냉정하게 들렸다. 내가 여전히 할 말을 잃고 가만히 있자, 드디어 의사는 나를 보면서 입을 열었다.
"그래도 가능성이 전혀 없는 경우는 아니었어요. 많이 희박하긴 했지만."
"아, 그렇습니까."
맥없이 답하는 나를 의사는 한심한 눈으로 보고 있었다. 나는 그 눈을 감히 마주칠 수가 없었다. 그 눈은 어쩌면... 그렇다. 의사의 눈은 아내가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내게 분노의 빛을 보내던 그 눈과 비슷했던 것이다.
'왜 그래요?'
그렇게 말하며 아내는 내게 잠시 동안 화를 냈었다.
"대개 이런 여자들의 경우에는 주위에서 따뜻한 배려의 태도를 보여야 해요. 그렇지 않으면 우울이 극에 달할 수도 있거든요. 이를테면..."
"고맙습니다."
나는 가까스로 그렇게 대답한 뒤에 돌아보지도 않고 진료실을 빠져나갔다. 성큼성큼 걸어서 로비를 지나 회전문을 밀고 밖으로 나왔다. 공기가 아까보다 더 차갑고 어두워져 있었다. 나는 자동차 키를 꺼내려고 주머니를 뒤적였다. 그러나 손에 잡히는 것은 전혀 다른 물건이었다. 임신 테스트 기구였던 것이다.
나는 그걸 땅에 던져버렸다. 그리고는 다시 손을 넣어 키를 찾으려고 했다. 이상했다. 분명히 주머니에 있어야 하는데, 어디에도 없었다. 안주머니와 바지 뒤 주머니에도 손을 넣었지만 아무 것도 없었다. 나는 병원에 두고 왔을 거라는 생각이 들어서 입구 쪽으로 몸을 돌렸다. 뭔가 이상했다. 다시 몸을 돌려 차 문 쪽을 향했다. 차창 앞으로 얼굴을 대고 안을 살펴보았다.
키는 조수석에 놓여 있었다.
비가 천천히 내리기 시작했다.

흠뻑 젖은 채로 집에 도착했다. 다행히 집 열쇠는 따로 두고 다녔었다. 나는 수건으로 몸을 닦으면서 방으로 들어갔다. 옷을 벗어서 마르도록 걸어 놓고 부엌으로 갔다. 배가 고팠다. 무슨 일이 있어도 시간이 지나면 배가 고플 수밖에 없다. 나는 대상도 없이 비웃으며 저녁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이번에도 라면이었다.
배가 고팠다. 라면은 낮때보다 더 잘 끓였다. 물의 양도 적당했고, 너무 많이 익히지도 않았다. 그런데도 이상하게 먹고 싶지가 않았다. 배가 고픈 것과 뭔가를 먹고 싶어하는 것은 다르다는 사실을 나는 바로 그때 깨달을 수 있었다.
알록달록한 김이 모락모락 올라오는 냄비를 닫아버렸다. 그대로 두면 불어버리겠지만, 어차피 먹지 않을 테니 상관없었다. 나는 TV를 켰다. 그것 외에는 아무 것도 할 일이 없었다.
뉴스를 하고 있었다. 아나운서가 진지한 표정으로 오늘의 사건들을 하나 하나 설명하고 있었다. 일 주일 전에 한 은행을 털었던 2인조 강도가 잡혔다, 영국 의학계에서 인간 유전자에 대한 새로운 가설이 제시되었다, 코코아의 원료인 카카오 열매에 우울증과 정서불안 증세의 치료 효과가 있다는 연구가 발표되었다, 일본에서 유명한 외팔 첼로 연주자가 내한공연을 가진다, 모 의원이 얼마 전에 공식적으로 밝혔던 입장을 번복했다, 약물치료의 치명적인 부작용에는 이런 저런 것들이 있다... 나는 한 귀로 그것들을 흘려버리면서 보고 있었다.
"내일도 오늘처럼 비가 오겠습니다. 우산 준비하셔야겠습니다. 내일 낮 최고 기온은 서울 이십 이 도에서 남부 지방 이십 육 도로, 오늘보다 약간 춥거나 비슷하겠습니다. 내일 아침기온은..."
뉴스가 기상 예보와 함께 마무리를 하고 있었다.

그 시간에 나는 소파에 누운 채로 다시 낯익은 그 곳에 와 있었다.
앞에는 검은 천으로 덮인 침대가 있었다. 머리카락을 엮어 만든 것처럼 새까맣고 윤이 나는 천이었다. 나는 한동안 그것을 바라보았다. 왠지 숨이 막힐 것만 같았다. 손을 침대의 머리 쪽으로 뻗었다. 심호흡을 한 뒤에 그 검은색을 손에 쥐고 천천히 잡아당겼다.
천 밑에는 아무 것도 없었다.
나는 침대를 가만히 보고 있다가 인기척을 느꼈다. 갑자기 불이 환하게 켜졌다. 그 남자였다. 담당관은 얼음처럼 차갑게 웃으며 내 쪽으로 걸어왔다. 그의 구둣발 소리가 실내에 가득 울려 퍼졌다.
주위에는 검은 천으로 덮인 침대가 수십 개나 더 있었다. 나는 옆에 있는 침대로 가서 천을 끌어당겼다. 역시 아무 것도 없었다. 맞은편 침대로 가서 천을 벗겼다. 그 침대도 텅 비어 있었다. 담당관의 웃음소리가 커졌다.
"전부 다 뒤집어봐도 마찬가집니다."
나는 그를 쳐다보고 있었다.
"옮겨놓았습니다."
나는 어디로? 라는 표정으로 계속 쳐다보았다.
"지하실에 있을 겁니다. 죽은 사람은 지하로 보내게 되어 있거든요."
"아이도 지하실에 있소?"
그러자 그는 더 크게 한바탕 웃더니 숨을 고르고 나서 말했다.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아이는 멀쩡히 살아있는데."
담당관은 '멀쩡히'라는 부분에 묘한 뉘앙스를 주면서 말했다. 그래서 내 귀에는 아이가 멀쩡히 살아 있다는 말이 조금 다르게 들렸다. 내 표정을 주시하던 그가 다시 말했다.
"내 말을 못 믿는군요."
그리고는 계속해서 쿡쿡 웃었다. 뭐가 그렇게 우스운지 묻고 싶었지만, 나는 가만히 있었다.
"지하실이 어디에 있소?"
그는 실내가 쩌렁쩌렁 울릴 만큼 크게 껄껄대며 웃더니 말했다.
"지하실은 당연히 지하에 있지요!"
나는 그를 지나쳐서 그가 들어온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다. 복도가 나왔다. 오른쪽 복도 끝에는 달빛이 쏟아지는 곳에 위로 올라가는 계단이, 왼쪽 끝에는 내려가는 계단이 있었다. 지하를 향한 곳에는 암흑의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었다. 나는 그쪽으로 갔다.
막상 내려가려고 보니 계단은 끝이 없어 보였다. 어두워서 잘 안 보이는 거라고 생각했지만, 발은 떨어지지 않았다. 왠지 내려가면 다시는 올라오지 못할 것만 같았다. 갑자기 두려움의 물결이 발끝에서부터 차오르기 시작했다.
그때 저 아래에서 아이의 울음소리가 들렸다.
다음 순간 나는 생각할 겨를도 없이 계단을 내려가고 있었다. 계단이 천 개든 만 개든 상관없었다. 빛이 거의 없었으므로 나는 넘어지지 않도록 속도를 조절해야만 했다.
계단은 정말로 끝도 없이 이어져 있었다. 적어도 삼백 개는 지나온 것 같았다. 그런데도 끝날 기미가 보이지 않았던 것이다. 도대체 지하 몇 층이길래? 나는 숨을 고르며 속도를 급격히 줄였다. 이대로 가다가는 도착하기도 전에 지쳐 넘어질 수도 있었다. 그리고 이렇게 깊은 계단에서 한 번 넘어져 구르기 시작한다면... 상상도 하기 싫었다.
다시 아이의 울음소리가 들렸다.
나는 충분히 쉬지 않았다고 생각하면서도 발을 움직였다. 이렇게 깊은 곳에 아이가 울고 있다니. 그 울음소리는 나를 저절로 움직이게 만들었다.
발을 헛디뎌 넘어질 뻔한 순간, 나는 난간을 붙잡은 손에 힘을 주고 몸을 옆으로 틀었다. 덕분에 구르는 대신 그 자리에 털썩 주저앉게 되었다. 계단에 그대로 부딪힌 엉덩이뼈가 전기에 감전된 것처럼 강하게 저려왔다. 역시 쉬었다가 가는 게 좋겠다고 판단했다.
주위를 둘러보았지만 아무 것도 보이지 않았다. 내려갈수록 빛의 양이 줄어들었던 것이다. 이제는 내 손조차 보이지 않을 정도였다. 이런 곳에서 제대로 일어날 수나 있을지 걱정이었다. 잘못하면 충분히 쉬어 놓고도 일어나면서 넘어질지도 몰랐다. 그렇지만 선택권은 없었다. 나는 결국 조심스럽게 다시 몸을 일으켰다.
사백 계단 정도 더 내려왔을 때 들리는 아이의 울음소리로 봐서는 이제 반쯤 왔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직도 칠백 계단이나 더 내려가야 한다니! 나는 다시 쉬기로 하고 천천히 그 자리에 걸터앉았다. 땀이 비오듯 흘러내렸지만, 이상하게 덥지는 않았다.
어둠에 눈이 익숙해지니까 사물의 윤곽은 보이고 있었다. 나는 손을 펴고 앞뒤로 돌리면서 움직임이 얼마나 보이는지 확인을 했다.
그때 저 뒤에서 웃음소리가 들렸다.
그 소리를 듣는 순간 내 몸은 얼어붙었다. 그렇게 끔찍할 만큼 소름끼치는 소리는 처음이었다. 공포에 휩싸인 내 머릿속에는 수백 개의 촉수가 꿈틀거리는 괴물의 그림이 있었다. 그 웃음소리에 가장 어울리는 그림이었다.
'그것'은 낮게 웃으며 계단을 내려오고 있었다. 발소리로 보니 백 계단 이상 차이가 나고 있었다. 어쩌면 이백 계단일 수도 있었다. 이렇게 깊고 막힌 곳에서는 멀리 있어도 가까이 나는 소리처럼 들리는 경우가 있으니까.
'그것'이 얼마나 가까이 있든, 나는 일어나서 다시 계단을 밟고 내려가기 시작했다. 그래야만 했다. 아이가 갑자기 목이 터져라 울기 시작했던 것이다. 내려가는 동안 아이의 울음소리와 '그것'의 낮고 가래 섞인 웃음소리가 귀에 윙윙거렸다. 정신을 잃을 것만 같았다.
아이의 울음소리가 점점 크게 들려오고 있었다. 그와 동시에 '그것'의 웃음소리도 커졌다. 나는 이렇게 내려가다가는 아이보다 '그것'과 먼저 만날 것만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몸을 돌려 난간을 두 손으로 잡았다. 그리고 뛰어내려갔다. 몇 번이나 발을 헛디뎠지만 그럴 때마다 손에 힘을 주어 난간을 이용해서 넘어지는 대신 다음 계단 위를 뛰었다. 그렇게 하니까 훨씬 빨랐다. 나는 계속 내려갔다. 마치 롤러코스터를 타고 가는 느낌이었다.
어느 순간 머리에 아찔한 충격이 왔다. 쿵 하는 소리가 크게 울렸다. 나는 손으로 머리를 감싸며 뒤로 물러났다. 눈물이 핑 돌았다. 처음에는 너무 빨리 가다가 원심력에 의해 벽에 부딪힌 줄 알았다. 하지만 그게 아니었다.
철로 만든 커다란 문이 내 앞을 가로막고 있었던 것이다.
저 뒤에서 웃음소리가 점점 크게 들려오는 동안, 나는 문을 더듬으며 손잡이를 찾아보았다. 그러나 손잡이는 잡히지 않았다. 아무래도 없는 것 같았다. 생각을 바꿔서 문을 밀기 시작했다. 꿈쩍도 하지 않았다. 사람이 가까이 온 것을 알았는지 아이는 이미 쉰 목을 억지로 써 가며 꺽꺽 울기 시작했다. 나는 남아있는 모든 힘을 쏟아 부었다. 그러나 문은 그대로 그 자리에 있을 뿐이었다.
"빌어먹을!"
힘이 빠지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나는 그 자리에 앉아버렸다. '그것'이 이제 가까이 있었다. 백 계단도 채 남지 않은 것 같았다. 그때쯤 되자 그 음울한 웃음소리는 훨씬 더 소름끼치게 들렸다. 식은땀이 이마에서 턱 아래로 흘러내렸다.
이제 '그것'은 바로 저편에 있었다. '그것'과 나 사이에는 열 계단쯤 남아 있었다. 나는 머리를 뒤로 젖혀 문에 기댔다. 이대로 끝나는구나. 말도 안 돼. 저 뒤에 아이가 울고 있는데. 그리고 여기는... 여기는...
여기는 꿈속이잖아.
나는 그 사실을 깨닫자마자 일어났다. '그것'은 너무 가까이 와 있었지만, 아직은 해볼 만했다. 잘하면 승산이 있었다. 나는 다시 문을 더듬었다. 놀랍게도 손잡이가 잡혔다. 나는 그게 애초부터 거기에 있지는 않았을 거라고 생각하며 손잡이를 힘껏 돌렸다. 문이 쉽게 열렸다.
안으로 들어가는 순간 빛이 눈부시게 쏟아졌다. 어둠 속에 한참 동안 있었던 나는 눈을 뜨지 못하고 그 자리에 엎드렸다. 빛 때문에 눈을 감고 있어도 눈꺼풀 밑에서 앞이 빨간색으로 보였다.
잠시 후에 억지로 눈을 뜨고 일어선 나는 '그것'이 들어오지 못하도록 열린 문을 닫았다. 눈이 아팠지만 곧 괜찮아졌다. 나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리 넓지는 않은 방이었다. 벽은 온통 흰색으로 빛났고, 바닥에도 흰색 타일이 깔려 있었다.
그리고 방 한가운데에 하얀 천으로 덮인 침대가 놓여 있었다.
나는 그리로 다가가서 손으로 천을 쥐었다. 실크의 매끈한 감촉이 손가락에 전해졌다. 잠시 망설이다가 천을 끌어내렸다. 밑에 있는 사람들을 발견한 내 얼굴에서 눈물이 흘렀다. 볼을 타고 흘러내리는 눈물이 뜨거웠다.
침대에는 아내가 눈을 감고 누워 있었다. 전에 보던 것과 달리 피부에 혈색이 돌고 있었다. 그리고 품에는 한 아이가 안겨 있었다. 언젠가 꿈에서 나에게 놀아달라고 말했던 아이였다. 나는 눈물이 흐르는 것도 느끼지 못하고 아이의 볼을 어루만졌다. 어린 아이 특유의 부드러움이 느껴졌다. 코끝에 맺힌 눈물이 아이의 이마에 떨어졌다. 아이는 눈을 깜박이며 나를 보았다. 그리고 미소지었다. 아, 이렇게 아름다울 수가. 아내와 아이의 모습을 바라보는 나의 눈에서 눈물이 한층 더 솟구쳐 올랐다. 아내의 팔에도 눈물이 떨어졌다. 갑자기 아내가 눈을 떴다.
"여보..."
눈앞이 흰 색으로 뿌옇게 흐려졌다.
나는 눈물 때문에 방에 이미 '그것'이 들어와 있다는 것을 알아차리지 못했다.
돌아서는 순간 '그것'이 달려들었다. 나는 그대로 넘어지면서 눈물을 바닥에 뿌렸다. '그것'이 내 몸을 짓누르기 시작했다. 나는 꼼짝할 수가 없었다. 눈을 감았다 떠서 눈물을 밀어낸 나는 비명을 질렀다.
'그것'은 부스럼에 뒤덮인 담당관의 얼굴을 가지고 있었다. 게다가 눈이 있어야 할 곳에는 꿈틀거리는 다른 무언가가 있었고, 입에서도 그와 비슷한 것이 움직이고 있었다. 다른 점이 있다면 입에서 나온 그 촉수 비슷한 것에는 작은 입이 또 달려 있다는 것이었다. 그 작은 입이 쩍 벌어지더니 안에서 톱처럼 날카로운 이빨이 드러났다. 그리고 입을 벌린 그 촉수가 내 얼굴을 향해 뻗어져 나왔다. 나는 얼른 고개를 돌려 피했다. 눈 옆에 작은 상처가 났지만, 다음 번에는 그걸로 끝나지 않을 것이었다.
다시 촉수가 뻗어져 나왔고, 나는 목을 물렸다. 끔찍한 통증이 밀려왔다. 그 촉수에 달린 작은 입이 내 목을 씹어먹기 시작했던 것이다. 피가 목을 타고 흘러내리는 게 느껴졌다. 나는 다시 한 번 비명을 지르며 몸을 움직이려고 애썼다.
여기는 꿈속이잖아.
그 생각이 다시 머리에 파고드는 순간, 나는 믿을 수 없을 만큼의 힘으로 '그것'을 밀쳐냈다. '그것'은 저 뒤로 나가떨어져서 벽에 몸을 부딪히며 삵쾡이의 꼬리를 밟았을 때 날 만한 째지는 소리를 냈다. 나는 일어났다. 목에서 피가 철철 흘러나와 바닥에 떨어졌다. 다시 힘이 빠졌다. 내가 비틀거리자 '그것'은 벽에 몸을 기댄 상태에서 입을 크게 벌렸다. 입 속에서 아까 내 목을 물었던 촉수가 다시 길게 뻗어져 나왔다. 나는 겨우 몸을 숙여 그것을 피했다. 그러자 촉수는 허공을 지나 침대 다리를 감았다. 그리고는 내가 막을 새도 없이 침대를 기울여 넘어뜨렸다. 힘겹게 누워 있던 아내와 아이가 쿵 소리를 내며 바닥에 팽개쳐졌다. 촉수가 다시 나를 향해 날아왔다. 아내에게 신경을 쓰던 나는 미처 피하지 못했다. 내 발을 휘감은 촉수는 엄청난 힘으로 나를 넘어뜨리더니 '그것'의 본체 쪽으로 잡아당기기 시작했다. 나는 저항할 기력도 없이 바닥의 피를 등으로 밀면서 끌려갔다.
그 동안 또 다른 촉수가 아내 쪽으로 뻗어갔다.
"안 돼!"
나는 다시 비명을 질렀다. '그것'의 촉수는 그런 나를 무시하며 아내의 목을 휘감았다. 내가 악을 쓰면서 끌려가는 동안 촉수가 하나 더 나왔다. 그것은 아이에게 날아가서 목을 감았다.
아내가 컥컥거리는 소리를 냈다. 아이도 신음했다. 촉수가 목을 조르기 시작한 것이었다. 나는 몸을 뒤집어 엎드린 자세를 취했다. 그리고 앞으로 기어갔다... 그러나 실제로는 기어가는 시늉만 할뿐이었다. '그것'의 힘은 강했다. 나는 가까스로 손을 뻗었다. 아내도 창백한 얼굴로 내게 손을 내밀었다. 손가락이 닿을 듯 말 듯 했다.
눈물이 다시 왈칵 쏟아져 나왔다. 아내는 그런 나를 보며 흐느끼고 있었다. 아이는 이미 몸이 굳어져 버린 것 같았다. 나는 그걸 지켜보는 동안 아무런 일도 할 수 없었다. '그것'이 더 힘을 줘서 내 몸을 당기려는 순간, 나는 손을 앞으로 쭉 뻗어서 아내의 엄지손가락을 잡았다. 아내가 숨이 막혀 파랗게 변한 얼굴로 나를 쳐다봤다. 그녀의 눈빛은 이렇게 말하고 있었다.
'밥은 먹었어요?'
나는 아내의 엄지손가락을 꼭 쥐고 고개를 끄덕였다. 눈물이 콧물과 함께 계속해서 흘러내렸다. 아내는 엄지손가락에 힘을 주어 움직였다. 그리고 다시 말했다.
'울지 말아요.'
하지만 눈물은 강물처럼 줄줄 흐르고 있었다. 나는 서럽게 울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아내는 더욱 파래진 얼굴로 미소를 지었다. 엄지손가락이 내 손에서 미끄러져 나왔다. 그녀의 손이 바닥에 툭 떨어졌다. 나는 안 된다고 악을 썼지만 목에서는 아무런 소리도 나지 않았다.
아내는 죽었다.
'그것'이 나를 더욱 세게 당기기 시작했다. 나는 아내를 향해 시선을 둔 채로 가만히 끌려갔다. 촉수가 내 목 언저리에 다가왔을 때에도, 그리고 내 목을 감았을 때에도 나는 아내만 쳐다보고 있었다. 그녀는 미동도 하지 않고 있었다.
이제는 촉수가 내 목도 조르고 있었다. 나는 그때서야 눈을 돌려서 '그것'을 보았다. '그것'은 내 시선을 의식하고는 징그럽게 씩 웃었다. 나도 미소를 보내면서 말했다.
"망할 자식!"
나는 목을 감싸고 조여드는 촉수를 두 손으로 꽉 쥐었다. 미끌미끌한 점액이 손끝에 닿았다. 그때까지도 무슨 일인지 모르는 '그것'은 내 목을 조이며 계속해서 썩은 미소를 짓고 있었다.
"네가 죽였어!"
나는 죽을힘을 다해 촉수를 양쪽으로 잡아뜯었다.
낡은 고무장갑을 찢는 소리와 함께 뜯겨나간 부분에서 검은 녹색의 액체가 쏟아져 나왔다. 형언할 수 없는 소리를 내지르며 '그것'은 촉수를 자기 몸 속으로 감아버렸다. 나는 점액에 얼룩진 목을 손바닥으로 한 번 훑고는 일어섰다. '그것'은 비틀거리더니 뒤로 쓰러졌다. 나는 누워있는 '그것'의 가슴을 세게 짓밟았다. 너무 많이 익어버린 수박이 깨지는 소리가 났다. 그와 동시에 '그것'의 가슴이 그대로 무너졌다. 나는 검게 물든 발을 들었다가 다시 내려쳤다. '그것'의 몸이 구역질나는 냄새와 함께 뭉개졌다.
그런데 '그것'은 갑자기 그 소름끼치는 웃음소리를 냈다.
뭔가가 이상했다.
나는 '그것'의 얼굴을 잡고 손에 힘을 주었다.
얼굴이 벗겨져 나갔다.
그러자 그 밑에 있는 사람의 얼굴이 나타났다.
그건 바로 나였다.
쿵.

소파에서 떨어지는 바람에 악몽에서 깨어날 수 있었다. 나는 눈가에 물기가 가득한 채로 눈을 떴다. 소파 밑이 뿌옇게 보였다. 손으로 눈을 닦아내었다. 긴 꿈에서 깨어났기 때문인지 정신이 없었다. 그래서 소파 밑에 있는 두 가지 물건을 보고도 나는 그게 뭔지 깨닫지 못하고 한동안 가만히 있어야만 했다.
그것은 수첩 한 권과 또 다른 임신 테스트 기구였다.
나는 쓰러져 있는 채로 팔을 뻗어 그 두 가지 물건을 집었다. 수첩은 맨 뒷부분이 펼쳐져 있었는데, 거기에는 떨리는 필체로 휘갈겨 쓴 네 글자가 나를 보고 있었다. 나는 그게 무슨 글자인지 읽으려고 한참을 들여다봐야 했다.

의사는 E

E의 맨 아래 행은 뒤로 길게 늘어뜨린 상태였다. 의사는 E? 그게 무슨 뜻일까. E로 시작하는 단어는 수천 가지도 넘을 텐데.
나는 그 부분을 보다가 수첩을 접고 맨 앞장을 펼쳤다. 그리고는 거기에 있는 것을 소리내어 읽기 시작했다.
"1월 7일. 그이의 생일이다. 선물은 뭘 줄까. 그이는 비싼 걸 싫어한다. 내가 좀 비싼 걸 사면 매번 화를 낸다. 그래도 생일선물이니까 비싼걸 사줘야지. 청소를 끝내고 백화점에 가서 그이한테 어울릴 만한 걸 찾아보다가..."
나는 수첩을 다시 덮어서 앞표지를 보았다. 그리고 몸을 일으켜 소파에 앉았다. 그것은 분명 아내의 일기였다.

1월 7일.
그이의 생일이다. 선물은 뭘 줄까. 그이는 비싼 걸 싫어한다. 내가 좀 비싼 걸 사면 매번 화를 낸다. 그래도 생일선물이니까 비싼걸 사줘야지. 청소를 끝내고 백화점에 가서 그이한테 어울릴 만한 걸 찾아보다가 적당한 걸 발견했다. 넥타이핀이다. 금이 들어가서 비쌌다. 물론 처음에는 그이도 왜 이런 걸 샀느냐고 할 테지만, 결국은 좋아하겠지. 괜히 나도 기분이 좋아진다.

나는 그 넥타이핀이 어디에 있는지 생각해내기 위해 읽는 것을 멈췄다. 가끔씩 그걸 달고 회사에 갔던 기억이 났다. 작은 변화라서 알아주는 사람은 없었던 것 같다. 그래도 자주 달았었는데.
갑자기 생각이 났다.
회식 후에 술을 마시다가 잃어버렸었다. 별로 아까워하지는 않았었다. 그런 것쯤이야 언제든지 사면 그만이었으니까.
그러나 이제는 아니었다.

1월 22일.
감기에 걸린 것 같다. 감기 약을 먹었지만 나을 기미가 전혀 보이지 않는다. 감기 가지고 병원에 가야 할까? 그이가 걱정이라도 하면 어쩌지? 가야겠다.

2월 4일.
수현이한테서 전화가 왔다. 영화를 보러 가자고. 고등학교 때는 정말 친한 친구였는데, 나는 가볍게 거절했다. 왜냐면 오늘은 그이가 일찍 오는 날이니까.
그이는 오늘도 늦는다.
그이가 왔다. 밤이다.

2월 25일.
오랜만에 백화점에 갔었다. 옷을 한 벌 살까 했는데 적당한 가격이 없었다. 4층에서 돌아다니다가...

나는 페이지를 죽 넘겼다. 읽고 있기가 벅찼다. 거의 끝 부분에 가서 나는 넘기는 것을 멈췄다. 아니, 느낌상으로는 페이지 자체가 내 손을 붙잡은 것 같았다. 믿을 수 없지만 그렇게 표현하는 것이 가장 정확할 것이다.

9월 20일.
그이는 회사에서 스트레스를 많이도 받는가보다. 나라도 따뜻하게 대하지 않으면 누가 풀어줄까. 점점 차가워지는 그이지만, 나는 늘 잘 대해 줄 것이다. 동현씨 파이팅! 아자!

9월 21일.
그이는 오늘 나랑 눈을 한 번도 마주치지 않았다. 속상해하면 안 되는데...

9월 29일.
그이는 나를 사랑하지 않는 걸까? 아이라도 있다면 좋을 텐데.

10월 1일.
한참 울었다. 눈이 퉁퉁 부었다. 불임이라니. 너무해.
그이한테는 언제 말할까. 말했는데 화내면 어떡하지?

10월 15일.

나는 내용을 읽기 전에 대충 훑어보았다. 다음 날짜가 적혀 있지 않은 걸로 보아 이날의 일기가 마지막이었다. 그걸 알고 있었는지, 이날의 일기는 상당히 길었다.

10월 15일.

집에서 국수를 해 먹었다. 아침부터 국수가 당기는 걸 참고 있을 이유가 없었다.
그런데 먹다가 다 토해버렸다. 속이 안 좋았다. 빨리 먹은 것도 아닌데 체한 것 같았다. 어깨를 주무르고 바늘로 손가락을 따도 속은 울렁거렸다. 무슨 병이 아닐까 하는 생각에 겁이 덜컥 났다. 병원에라도 가봐야 하지 않을까?
집을 나서려고 할 때쯤에 속은 가라앉았다. 혹시 내가 아프다고 하면 그이가 걱정해줄까? 그런 생각을 하고 혼자 울어버렸다.
이상한 날이었다. 파인애플이 너무 먹고 싶었다. 속이 안 좋으니 과일이라도 먹어야겠다는 생각에서 파인애플 대신 냉장고에 있는 사과를 꺼냈다. 텅 빈집에서 깎아먹으려니 왠지 혼자 사는 여자가 된 느낌이었다. 아무렴 어때.
또 구역질이 났다. 처음에는 사과가 상한 줄 알았다. 그런데 그럴 리가 없었다. 바로 어제 사 둔 건데. 나는 세수를 하고 침대로 갔다. 잠을 자면 몸이 나아질 것 같았다.
30분도 안 되어서 깼다. 악몽이었다. 커다란 양 한 마리가 나를 쫓아왔었다. 집채만한 양한테 밟히면 죽을 것 같아서 마구 달렸었다.
다시 구역질이 났다.
그때서야 감이 잡혔다. 그이랑 같이 잔 날이... 나는 희박하다는 걸 알면서도 약국으로 갔다. 생전 처음 사 보는 거라서 머뭇거리긴 했지만, 그래도 의사한테 직접 결과를 듣는 것보다는 나을 것이다. 약사가 사용법을 자세하게 알려줬지만, 5분 뒤에 붉은 색으로 변한다는 것 말고는 별로 중요하지 않은 것 같았다. 빨리 해봐야지.
갑자기 행복이 막 나한테 달려드는 것 같다.

거기에서 일기는 끝나 있었다. 다음 장에는 아까 보았던 '의사는 E'라고 적혀 있었다. 왜 거기에서 끝났을까. 나는 수첩을 덮고 그것과 같이 있었던 테스트 기구를 무심코 보았다.
그러자 모든 것을 알 것만 같았다.
그리고 '의사는 E'라고 쓴 것도 무슨 뜻인지 짐작할 수 있었다. 오, 세상에, 설마 그럴 리가. 말도 안 돼. 안 돼. 그럴 수는...!
하지만 내 의지를 무시한 감각은 이미 아내의 영상을 재생하고 있었다.

아내는 어떤 일을 처음 해 보는 소녀 같은 얼굴로 화장실에 들어간다. 거울을 보고 마음속으로 뭔가 굳은 다짐을 하는 것 같다. 그리고 소변을 묻히기 위해 움직인다.
잠시 후에 아내는 화장실에서 나온다. 고층 빌딩 위를 걷는 고양이처럼 잔뜩 긴장한 표정이다. 그녀는 시계를 본다. 3시 18분. 테스트 기구를 탁자에 놓고 소파에 가서 기댄다. 편안하다. TV를 켜고 화면을 쳐다본다. 그러나 어느 것도 머리에 들어오지 않는다.
3시 20분.
1초 1초가 1분처럼 느껴진다. 그녀는 계속해서 TV를 본다. 리모컨을 만지는 손이 떨린다.
3시 22분.
1분이 남았다. 하지만 아내는 25분까지 기다려볼 생각이다.
3시 23분.
TV를 껐다. 약사가 설명한 대로의 시간이 지났다. 기구는 그대로 색이 변하지 않고 있다. 아내는 리모컨을 만지작거리다가 탁자 위에 내려놓는다.
3시 24분.
1분 초과. 입술이 떨린다. 뭔가 잘못되었다. 이럴 리가 없다. 분명히 난데없는 식욕과 헛구역질을 했었는데. 아내는 미간을 찌푸리며 시계를 보고 있다. 그러다가 자신의 배를 손바닥으로 쓸어보기도 한다.
3시 25분.
어떻게 보면 당연한 일이다. 기구는 여전히 그대로이다. 아내는 기구를 잡고 눈앞에서 자세히 보다가 내팽개친다. 소파 밑으로 들어가 버린다. 눈물이 나온다. 이 상태에서 울면 주체할 수 없다는 걸 알면서도 그녀는 펑펑 울어버린다.
그렇게 울다가 어느 순간 일어나 화장실로 들어간다. 무서운 속도다.
약병에는 'Seconal'이라고 적혀 있다. 아내는 거울을 본다. 눈물과 콧물로 범벅이 되어 있다. 서럽게 울던 아내는 눈물을 삼킨다.
그때부터는 언젠가 보았던 영상과 흡사했다.
아내는 잠시 망설인다. 거울 앞에서 숨이 차 오르는 것을 느낀다. 억지로 울음을 참은 자신의 끔찍한 표정이 고스란히 눈에 들어온다. 숨을 고르고 나서 아내는 약통을 열고 마취제를 두 알 집어서 입에 넣는다. 그리고 물을 틀어 그대로 마신다. 이 동작은 재빠르다. 다시 두 알을 집고, 또 물을 마신다. 그 정도라면 충분하다는 생각이 들었는지, 아내는 남은 알약을 변기에 쏟아 버린다. 그리고 발작적으로 웃으며 약통을 바닥에 내팽개친다.
화장실에서 달려나와 소파에 눕는다. 생의 마지막은 서럽지만 편안하게 갈 것이다. 아내는 TV를 다시 켠다. 한참을 보다가 채널을 돌리려고 했는데, 손가락이 말을 안 듣는다. 마비가 시작된 것이다. 리모컨의 버튼을 살짝 누르면 되는 건데도 TV는 채널을 고정시키고만 있다. 아내는 어깨까지도 힘을 주어 손가락을 움직이려고 했지만, 결과는 몸을 옆으로 기울인 꼴이다. 그녀는 갑자기 밀려드는 죽음의 공포에 얼굴이 일그러진다. 정신이 흐려진다. 기우뚱하다가 소파에서 쿵 하고 떨어져 버린다. 어깨뼈가 그래도 바닥에 찍혔지만 통증은 전혀 없다. 그녀는 팔을 겨우 들어 탁자에 있는 리모컨을 집으려고 한다. 그러나 일기를 썼던 수첩이 펜과 함께 그녀의 얼굴 위로 떨어진다. 역시 통증은 없다. 그녀는 오른손으로 리모컨을 집기 위해 몸을 돌린다. 이 상황에서 누가 아내에게 왜 리모컨이 중요하냐고 묻는다면 그녀는 할 말이 없겠지만(그리고 말을 할 수도 없겠지만), 지금 그녀의 머리에는 리모컨을 집으려는 생각뿐이다.
몸을 돌려 소파 아래쪽에 시선이 가게 되자, 아내는 조금 전에 팽개쳐버린 테스트 기구를 발견한다.
세상에.
기구는 붉은 색으로 변해 있다.

아내는 눈을 크게 뜨고 잠깐 동안 생각한다. 그리고 리모컨 쪽으로 가던 손을 더 움직여 전화기 쪽으로 향한다. 수화기를 집으려고 했지만 정작 그녀의 손은 수화기 위에 털썩 올려질 뿐이다. 왈칵 눈물이 솟구친다. 아무리 애를 써도 점점 굳어지는 손은 그녀의 말을 듣지 않는다. 흐르는 눈물을 닦지도 못한다. 그녀는 손을 내려뜨린다. 눈물 때문에 그녀의 머리 옆에 손바닥만한 웅덩이가 만들어진다. 그것 때문에 뺨이 축축하다.
잠시 후에 그녀는 펜을 집는다.
집는다기보다는 펜을 손에 걸친 모양이다. 그리고 땅에 떨어진 수첩으로 손을 움직인다. 수첩은 맨 뒷장이 펼쳐져 있다. 그녀는 죽을힘을 다해 거기에 뭔가를 적기 시작한다.




E

아니, 그건 E가 아니라 ㅌ이다. 거기까지 쓰고 펜을 놓친다. 그녀는 다시 펜을 집으려 하지만, 이제는 어깨도 마비되는 것을 느낀다. 움직일 수가 없다. 온 몸이 멈춰버렸다. 눈도 깜빡여지지 않는다. 움직이는 것은 오직 눈물샘뿐이다. 그 와중에도 눈물은 끝없이 흘러나오고 있는 것이다. 지금까지 살아온 기억들이 죽음 앞에서 빠른 속도로 지나간다. 나와 따뜻한 시간을 보냈던 날들이 떠오르는 순간, 아내는 맥없이 눈을 감는다.
한 아이의 어머니가 되자마자 눈을 감아야 하다니.
의사는 틀렸다.

이럴 수는 없다. 말도 안 된다. 나는 어느새 다시 뜨거운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붉은 색으로 표시된 테스트 기구를 손으로 꼭 쥐고서 아내가 누웠던 바로 그 곳에 엎드린 채로 미친 듯이 울었다. 울어버렸다.
'밥은 먹었어요?'
꿈에서 말했던 아내의 환청이 들렸다. 나는 울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울지 말아요.'
나는 계속 울면서 고개를 저었다. 세차게 저었다. 눈물이 옆으로 튀었다. 울지 말라니. 그 누가 이럴 때에 울지 않을 수 있다는 말인가. 아내는 마지막까지도 나에게 짜증을 준다.
"왜! 왜 죽었어!"
나는 바닥을 치며 목이 쉰 소리로 울부짖었다. 화가 치밀어 올랐다. 그 분노는 그 누구를 향한 것도 아니었다. 굳이 따지면 꿈속에서 아내와 아이를 죽였던 그 괴물을 향한 거랄까.
그러나 마지막 순간에 '그것'은 나의 얼굴을 하고 있었다. 바로 나의 얼굴을. 나는 그 꿈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고 있었다. 하지만 인정할 수 없었다. 인정하기 싫었다.
"왜 죽었냔 말이야!"
피를 토하듯 외치는 내 말에 아내의 목소리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리고 나는 영원할 것처럼, 그렇게 한없이 울고 있었다.
밤이 깊어가고 있었다.

아침부터 비가 내렸다.
나는 검은 우산을 쓰고 서 있었다.
아내는 그런 나를 보며 침묵하고 있었다.
묻은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아직 흙도 마르지 않았지만, 나는 혹시 정리해야 할 게 있나 자세히 살펴보았다. 역시 아내의 묘에는 내 손길이 필요하지 않았다.
"여보."
대답을 들을 것처럼 기다리다가, 나는 들고 있던 새하얀 국화를 비석 앞에 내려놓았다.
아무런 말도 나오지 않았다.
십여 분이 넘도록 나는 그 앞에 우산을 쓰고 서 있었다. 빗줄기가 굵어서 바지 아랫부분은 더 검게 젖어 있었다.
사실 나는 그 십여 분 동안 단 한 마디를 입안에서 이리 저리 돌리고 있었다. 망설일 이유가 없었는데도 나는 망설이고 있었다.
"여보."
침묵.
"여보."
침묵.
"여보... 미..."
나는 끝내 또다시 울음을 터뜨렸다.
"여보... 미안... 해... 미안해..."
막상 말을 하고 나니 나는 무너진 감정을 조금씩 추스를 수 있었다. 그래. 이 한 마디를 하기 위해 온 것이 아니었는가.
그러나 나는 그 뒤로도 슬픈 표정으로 계속 서 있었다.
떠날 수가 없었다.
차가운 비도 계속해서 내리고 있었다.

하루 종일 내릴 것만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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