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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 라이벌

2004.07.20 14:3207.20

2004.7/18


  어느날, 전세계의 마법사들이 모여 얼핏 사소해보이지만

  결과적으로는 이 세상에 엄청난 영향을 끼칠 결정을 했다.

  비전의 지식들을 특정계급에게 한정시키지 않고

  모든 이에게 공개하여 인류복지에 이바지한다는

  내용이었다. 물론 효율적인 분배를 위해 시장의 논리를

  따르면서.

  허름한 호텔에서의 회의 이후, 수 많은 비전지식과 마법주문,

  시약제조법들이 특허를 얻어 지적재산법을 따르며 공개되기

  시작했고, '두꺼비 한숨을 섞은 사마귀 제거약'에서부터

  '만드라의 비명만큼 강력한 사랑의 묘약'등이 대량생산되어

   약국에서 판매되었으며, 신기하고 기묘하고 종종은 사악한

   마법아이템들이 일반소매점과 편의점에서 구입가능케

   되었다. 이른바 신마법주의의 세기의 그 경과와 결말에

   대해서는 매우 길고도 복잡한 얘기를 해야한다.

   하지만 지금부터의 얘기는 이 시기 초기, 마법윤리위원회도

   없고, 판매등급시비도 없으며, 마법관련서적과 물품들이

   장난감과 그다지 구별이 가지 않던 시절의 것이므로

   상당히 간단하고 짧게 끝낼 수 있을 것 같다.

   그러니 안심하시라.


   당연히 이 이야기는 한 평범한 소년으로부터 시작된다.

   아직 이런 얘기에 한국식 이름을 붙이면 어색해하는

   사람이 많으므로 그냥 소년이라고 하자.

   대략 고등학생. 남중, 남고를 거친 평범한, 그 평범함이

   불만인 우리의 주인공 소년은 오늘도 이른 아침 수업을

   받으러 집을 나서는 중이다. 15층 아파트의 중간지점에서

   사는 그는 지금 엘리베이터 앞에 서 있다.

   물론 평범한 엘리베이터. 문이 열려도

   괴물이나 마법사의 저주를 받은 기사가 흔치 않은

   시대인지라 오늘도 그 안에서 학교가는

   방향이 비슷한 또래 여자아이를 만날 뿐이다.

  
   "어, 안녕!"

   어색한 그의 인사.

   "응, 안녕. 날이 참 덥네"

   나름 귀여운 그녀의 대답.

   "이제 장마 끝나고 무더위 시작된데."

   그 뒤로 보충수업 얘기, 친구와 선생님 흉보기,

   곧 가족과 함께 떠나게 될 바캉스..같은 얘기들이

   이어졌다. 그간 우연한 만남들로 어느정도 친밀감이

   생겨난 상태였지만, 늘 이 나이때가 그렇듯 소년의

   감정은 그 친밀감을 앞서 나간 상태.

   '조금 더 능숙하게 해야 해, 자연스럽게.

    오늘 보충수업 끝나고 시간있는지 물어볼까.'

   남중,남고를 나와 이후 공대를 가게 될 여복제로의

   우리 주인공은 이런 어줍잖은 생각을 하다가

   그녀의 인사를 놓칠 정도로 풋내기이다.

   "안녕, 수업 잘 들어. 나 간다"

   "응? 어어..아, 안녕!"

  
   꼭 하이틴물의 순정적인 주인공처럼 손을 흔들어보는

   그였지만, 그런 역할에 도취되어 있는 것도 잠시.

   이런 저런 달콤한 망상 조금, 이런 저런 후회 약간.

   그리고 불가항력의 잠으로 무더위 수업을 보내고

   학원에서 그런 시간 조금 더 보내다가

   지쳐서 집에 돌아오는 것이 이 이야기의

   기본서사를 이룸을 여기서 밝힌다.

   그래요, 이번 얘기에서는 그다지 화려한 액션은 없답니다.

  
   여름이면 히어로 영화는 필수. 평범한 고교생답게

   만화와 영화를 즐기는 우리 주인공은 (아, 이름을

   붙여줘야 할터인데) 늘 자신의 평범함에 불만을

   느낀다.

   ' 나도 거미가 물어줬으면 좋겠는데.

   쳇, 모기도 슈퍼모기면 얼마나 좋아.
  
   가려워죽겠네..'

   외디푸스 컴플렉스니, 남성성이니...이런 좀더 근원적인 분석으로

   들어가는 지점 코 앞에서  멈추면 지금 그의 불만의 원인은

   명백하다. 호감가는 여자에게 '오늘 놀러갈래'라고

   쉽사리 말 못하는 자신이 초라한 것이다. 그 이유가

   남자들만 득실거리는 자신의 환경때문에 경험이
  
   미숙해서라는 '환경결정론'보다는 '내가 특별한 사람이

   아니어서 그래, 좀 더 잘나고 멋지면 얼마나 좋으려나'

   라는 '유전결정론'을 은연중에 택하고 있기 때문인데.

   이런 상황을 알고 있을 때

   주인공이 수업후 친구들과 편의점에서 라면을 먹다가

   약간 유치할 정도로 휘항찬란한 영웅카드에 주목하게

   된 까닭을 더 잘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진정한 영웅은 라이벌이 만든다"

   이런 글귀가 적혀있고

   하나의 뿌리에서 뻗어나온 두 개의 가지처럼

   두 사람의 형상이 서로를 마주보며 으르렁

   거리는 카드. 둘 중 하나는 그저 그림자로

   처리되어 있었다.

   조그마한 제품설명서에는 이 카드는

   한쌍이며 그림자로 처리된 위치는 서로 반대라고

   되어 있었다. 이 쌍들은 서로 라이벌이며

   상대의 캐릭터는 그림자처리를 하고 있다가

   서로 가까워지면 그 그림자처리가 옅어지면서

   점점 상대의 모습이 뚜렷해진다고 되어 있었다.

  
  "야, 신기한데. 무슨 탐지기같은거냐?"

  카드를 들여다보고 있는 주인공과 친구.

  친구의 말에 그 여자애를 사이에 두고

  라이벌과 통쾌한 한 판을 벌이는 망상에서

  간신히 벗어난 주인공.

  "정말일까?"

  "다른 한짝 보면 알겠지. 어? 없잖아?

   벌써 팔렸나?"

친구가 편의점 직원에게 물어보고

예.라는 대답을 듣고 있는 사이

잽싸게 카드를 집어들고 소년은 계산대로

향했다.

"얼마에요?"



편의점에서 한 인간의 치열하고 비극적인 숙명이 탄생한다는

것이 다른 히어로물에 비해 그리 개연성이 떨어지는 것은

아닐 것이다. 물론 이번 경우는 잘못된 구매에서 발생한

것이지만. 어쩌면 이 얘기의 큰 교훈 중에 하나는

설명서를 끝까지 읽어라 일수도 있겠다.

사실 신마법주의 선언의 결과물들 중의 하나인 그 카드는

영웅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라이벌을 만드는 일종의

저주카드였다. 그 카드들을 지닌 사람들은

카드가 기록한 고대인물들의 운명과 마찬가지로

평생의 적수가 될 것이며, 그 신화의 결과와

마찬가지로 죽는 그날까지, 죽은 후

음습한 지옥의 불길 속에서도 서로를 증오하고

파괴하게 된다.


소년 최후의 평범한 날.

다행히도 그는 엘리베이터에서 그녀를 만난다.

"안녕"

그녀는 왠지 신나는 표정.

"어.안녕.."

그녀를 사이에 두고 라이벌과 이런저런 대결을

펼치던 공상에서 빠져나온지 얼마안되는지라

괜히 벌쭘한 그.

늦은 시간이라 엘리베이터에는 둘 밖에 없었다.

"너 7층이지"

그가 자신의 층을 누르고 그녀에게 확인차

물어봤다.

"응. 고마워"

엘리베이터가 올라가기 시작하고..

그가 문득 카드를 떠올렸다.

"너 신기한거 보여줄까?"

그러면서 카드를 내미는데

"어, 나도 보여줄게 있는데.."

라며 그녀가 그와 동시에 꺼낸 것은

바로 그 라이벌 카드.



침묵. 먹물처럼 번져가는 숙명의 분위기.

땡_ 공이 울리듯 벨소리와 함께 엘리베이터의

문이 열렸다. 그의 집 층에 도달한 것이다.

하지만 그는 내리지 않았다.

문이 닫히고도 한참 그와 그녀는 서로를 쳐다보고 있었다.


곧 그는 맨 위층의 버튼을 눌렀다.




마침.





    

    

  
    

  


  
  
  

  

  
moodern
댓글 1
  • No Profile
    양소년 04.07.20 15:28 댓글 수정 삭제
    겨, 결투하러 가는 건가요;? 깔끔하고 매력적인 이야기입니다. 잘 읽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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