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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 상식의 뜰

2004.07.05 08:3907.05

상식의 뜰

*

서우드의 의사 딕슨 씨는 산책을 하던 중 누군가 구조를 요청하는 소리를 들었다. 소년의 목소리였다. 잔뜩 쉬어있었기 때문에 처음에는 어린 짐승이 덫에 걸린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소리가 나는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가까이 가자 사람의 목소리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의사는 미끄러진 자국이 난 쪽으로 고개를 들이밀었다. 그 자국은 길고, 또 위태롭게 쭉 이어지다가 작은 벼랑을 만나 끊어져 있었다. 그는 나뭇가지를 잡고 천천히 내려갔다. 벼랑에서 이 미터 정도 아래 두 사람이 쓰러져 있었다. 아니, 쓰러진 쪽은 하나다. 드물게도 짙푸른 머리칼을 가진 소년이 무릎을 감싸고 앉아 있었다. 딕슨 씨는 어이, 하고 그를 불렀다. 마침 역광이 비쳐서 둘 다 서로의 얼굴을 확인하지 못했다. 소년 쪽이 먼저 여기에요, 하고 대답했다. 그러고는 몸을 일으켰는데 현기증이 나는지 흙벽을 잡고 허리를 숙였다. 딕슨 씨는 숨을 크게 들이쉬고 아래로 뛰어내렸다. 의외로 날렵한 동작이었다.




*

공중에 떠 있는 찰나의 시간 동안 딕슨 씨는 소년의 절망적인 얼굴을 걱정했다. 그는 사뿐히 땅 위에 내려앉은 후 몸을 들었다. 소년은 손으로 햇빛을 가리며 그가 착지하는 것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곤 바지를 탁탁 털고 머리를 쓸어 넘겼다. 권태로운 듯 길게 기지개를 켜고 난 다음에는 놀랍도록 평온한 얼굴이었다. 단지 눈언저리에 피곤한 기색이 맴돌았다. 오랜 산책 후에 따라오는 노곤함 같은 것이었다. 두 사람은 동작도 말도 없이 인사를 나누었다. 그 후 의사는 소년의 발치에 쓰러져 있는 남자를 살펴보았다. 고통과 피로로 의식을 잃고 있었다. 의사는 그를 일으켜 세웠다. 생각보다 건장한 체격이었기 때문에 저도 모르게 끙, 하는 신음소리가 새어나왔다. 세 사람은 서우드를 향해 걷기 시작했다. 땀을 뻘뻘 흘리던 의사가 갑자기 웃음을 터뜨리며 씩씩한 아이로군, 하고 말하자 뒤따라오던 소년이 그러게 말이에요, 하고 대꾸했다.




*

“그런데 시번 군, 그 길은 이제 쓰이지 않네.”

“그런가요? 아무도 알려주지 않던데요.”

“그건 그렇지. 아직 신고를 하지 않았거든. 요새는 서우드를 찾아오는 사람이 없으니까.”

소년은 걸음을 멈추고 딕슨 씨를 바라보았다. 의사는 땀을 닦으며 소년에게 시선을 돌렸다.

“하지만 티어드 씨는 지금 서우드에서 자두파이를 먹어야한다고 말했어요.”

“그렇지.”

“그렇다면 그가 깨어났을 때 사과하세요. 어쨌든 우리는 여기에 왔으니까.”

의사는 다시 이마를 훔쳤다. 셋은, 정확히 둘은 다시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업혀가는 사람은 발을 움직이지 않기 때문이다. 얼마 후 평온한 얼굴로 의사를 따르던 소년이 돌연 얼굴을 찡그리며 입을 열었다.

“이런 말을 했다고 해서 우리 두 사람의 사이가 좋을 거라고 생각하진 마세요. 아마 선생님은 우리가 어처구니없을 만큼 서로를 미워하는 데 놀랄 거예요.”




*

램 티어드는 저녁 무렵 정신이 들었다. 그는 깨끗한 병실과 말끔히 치료되어 있는 몸을 천천히 훑어보았다. 놀랍지 않았다. 애초에 정신을 잃을 당시, 눈을 뜨면 이런 세계가 기다리고 있을 거라고 예상하고 있었다. 아직 산속이었다면 그야말로 놀랐을 터였다. 그는 정상적인 현실 감각을 가진 청년이었지만 추락할 당시에는 절망하고 있었다. 이 미터 아래로 떨어지면서 길을 잃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끔찍한 일이었다. 태어나서 한 번도 길을 잃어본 적이 없었던 것이다. 갑자기 불구자가 된 듯한 기분이 밀려들었다. 실제로도 다리가 너무나 아팠다.

그가 나동그라지고 나서 곧 라비가 뛰어내려왔다. 소년은 사람을 불러올게, 라고 말하며 안심시키려는 듯 그의 어깨를 잡았다. 하지만 그는 세기의 길치였다. 한 발짝 내딛는 순간 자신이 어디에 있는지 잊어버리곤 했다. 램은 가지마, 이곳에서 한 발짝도 나가지마, 하고 말했다. 이 후 두 사람은 등을 마주대고 벼랑을 올려다보며 누군가 지나가기를 기다렸다. 한낮의 햇빛이 나뭇가지 사이로 스며들며 이마를 태우기 시작했다. 라비는 무릎 사이로 얼굴을 묻었고 램은 하늘을 우러러보았다. 길을 잃었다. 그리고 차츰 정신이 혼미해졌는데 완전히 정신을 잃기 직전에는 행복 비슷한 것을 맛보았다. 절망이 바닥에 이르렀던 것이다.

이런 연유로 그는 몹시 편안한 기분으로 현재의 상태를 받아들일 수 있었다. 그래도 아직 몸이 아팠다. 정신이 들자 미처 알아채지 못했던 곳에서 통증이 밀려왔다. 무엇보다 왼쪽 뺨이 따가웠다. 거울을 보고 싶었는데 방 안에는 하나도 걸려있지 않았다.




*

간호사가 컴팩트를 건넸다.

“뺨에 난 건 아니에요. 턱 쪽에 손가락 두 마디만한 길이로 찢어졌어요. 걱정하지 마세요.”

그는 손거울을 주머니에 집어넣는 그녀에게 물었다.

“제 동료는 어디 있습니까?”

간호사는 거울을 집어넣던 손을 멈추고 그를 바라보았다. 앞니로 오렌지 빛 립스틱을 깨물고 있었다.

“아, 그 애는 너무 편식이 심해요. 마치 일곱 살짜리처럼 굴고 있어요.”

그 말을 듣자 청년은 비로소 완벽하게 안심했다. 동료는 무사한 것 같았다.




*

의사와 소년과 청년이 한 자리에 모인 것은 밤이 깊어진 후였다. 병실 안이었다. 램은 침대에서 내려오려다가 자신이 움직일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제야 겨우 불안한 예감이 들었다. 세 사람이 모여 있을 때는 아무 내색도 하지 않았다. 먼저 라비가 들어와 침대 옆에 걸터앉았고 잠시 후 의사가 들어왔다. 그는 양손으로 커다란 쟁반을 받치고 있었다. 자두파이 냄새가 났기 때문에 램은 웃었다. 난 자두파이 별로, 하고 라비가 얼굴을 찡그리며 말했다.

의사는 능숙한 솜씨로 자두파이를 잘라 환자에게 건넸다. 그리고 내 이름은 존이오, 하고 말했다. 그는 서른 후반의 비만한 남자였다. 이마는 벌써 벗겨지기 시작했고 피부는 반질반질 윤이 났다. 배는 조롱박처럼 불룩 튀어나왔는데 이상하게 얄상하다는 느낌이 들었다. 가늘게 찢어진 눈은 어딘가 의학도답고 잔인해보였다. 괴기소설에 자주 등장하는, 냉철한 이성을 가진 주제에 늘 어처구니없는 살인 사건을 저지르는 의사들 같은 얼굴이었다. 그래도 램은 이 의사에게 호감이 갔다. 그는 시큼한 자두 냄새를 맡으며 천천히 몸을 베개 위에 뉘였다. 라비는 먹기 싫다고 했으면서 자두파이를 포크로 찔러보고 있었다.

“올해 자두는 맛있는 모양입니다.”

“네, 색깔이 예쁘네요.”

“다리는?”

“그쪽도 무지막지하게 아프고요.”

의사는 가는 눈을 더욱 가늘게 뜨며 웃었다. 만족한 듯한 모습이었다. 그 얼굴을 보며 라비는 파이 속에서 자두 하나를 끄집어내어 입에 넣었다. 신 맛이 났다.

“정강이뼈에 금이 갔어요. 이제 아주 튼튼한 다리를 갖게 될 거요.”

의사는 커다란 쟁반을 든 채로 다정한 미소를 지었다. 아래층에서 간호사가 부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딕슨 씨는 쟁반을 서랍장 위에 올려놓고 병실에서 나갔다. 느긋한 걸음이었다. 그 후 램과 라비는 오랜만에 서로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소년은 얼굴을 찡그린 채 포크를 내려놓으며 난 어디서 자, 하고 물었다.




*

자두파이 이야기에요, 하고 소년이 심드렁한 목소리로 말한다.

“1745년 칼 바허 씨는 이스턴으로 돌아왔어요. 산기슭에 작은 집을 지은 후 그는 마을 주변의 땅을 조금씩 사들이기 시작했어요. 얼마 가지 않아서 마을 주변의 땅은 대부분 칼 바허의 소유가 되었어요. 그 작업이 어느 정도 진행되자 이번에는 그 땅에 자두나무를 심기 시작했어요. 당시 그의 나이는 여든이 가까웠고 지병인 심장병 때문에 고생하고 있었어요. 결국 그는 자두가 열리는 것을 보지 못하고 죽었어요. 착한 아들 오드 바허는 아버지만큼 열성적으로 자두나무를 가꾸었어요. 1752년에 첫수확한 자두는 말도 못할 만큼 훌륭했어요. 오드 바허는 집집마다 자두를 한 상자를 나누어 주고 집으로 돌아와서 죽었어요. 그도 심장병을 앓고 있었거든요.

이후 바허 집안은 계속 자두를 재배했어요. 법률가였던 번 씨도 교수였던 알트슈마허 씨도 나중에는 고향으로 돌아와서 자두를 키웠어요. 그리고 심장병으로 죽었어요. 자두 농사는 한 번도 망친 적이 없었어요. 여름이 되면 이스턴 사람들은 늘 최고급 자두를 공짜로 먹을 수 있었어요.

선량한 바허 씨들 때문에 곤란을 겪게 된 것은 이스턴 시였어요. 겨울이 되면 자두 썩는 냄새가 온 마을에 진동했던 거예요. 아무튼 자두가 너무 많았으니까요. 바허 씨들은 열심히 자두를 재배할 뿐 그런 문제에는 조금도 관심이 없었어요. 고심하던 이스턴 시장을 구원한 사람이 제프리 마이에요. 이스턴 자두에 홀딱 반한 그는 대량으로 자두를 구매하고 싶어했어요. 주선자는 물론 이스턴 시장이었어요. 이 일은 당시 가주였던 밀 바허를 당황하게 했어요. 결국 그는 모든 일을 시장에게 위임한 채 자두 농장으로 도망가 버렸고 계약은 시장과 제프리 마이 사이에서 은밀하게 이루어졌어요. 아시다시피, 선량한 시민이었던 제프리 마이는 서우드 시민들에게 저렴한 가격으로 자두를 제공했어요. 바허 씨의 자두는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어요. 상관이 있는 일인지 어쩐지는 모르지만 제프리 마이는 1821년에 시장이 되었어요.

자두 붐은 제프리 마이가 죽은 다음에도 사그라지지 않았어요. 오히려 기세를 더해갔는데 식후 하나씩 자두를 먹는 게 서우드 사람이라는 증거가 될 정도였어요. 냉장고가 텅 비었을 때도 자두만큼은 두어 개씩 남아 있었어요. 이것도 자두를 아주 좋아했던 캐럿 풀스 양의 일화에요. 어느 날, 정확히 말하자면 1850년 8월 21일 풀스 양은 사과 파이를 만들기 위해 타르트를 굽고 있었어요. 그리고 막 사과를 조리려는데 아무래도 양이 모자랐어요. 당황한 그녀는 냉장고를 뒤지다가 자두가 잔뜩 있다는 것을 알아챘어요. 이것이 자두파이의 탄생이에요. 풀스 양의 자두파이는 마침 놀러와 있던 쿠노 부인을 크게 감동시켰어요. 자두파이에 관한 소문은 순식간에 서우드 전체로 퍼져나갔어요. 얼마 지나지 않아 자두파이는 서우드의 명물로 자리 잡았어요.

서우드로 자두파이를 먹으러 오는 사람이 늘어나면서 자두파이 가게를 해보려는 사람들도 자연스레 생겨났어요. 이게 탈이었어요. 가게들이 경쟁이 붙으며 가격을 마구잡이로 내리기 시작했거든요. 자두파이의 맛도 점점 나빠졌어요. 도산하고 서우드를 떠나는 사람도 늘어났고요. 1854년 서우드의 시장이었던 맥 더힐런은 자두파이를 한 조각 먹고 집무실에 들어가서 역사적인 자두파이令의 초고를 완성했어요. 자두파이의 매매를 금지를 골자로 하는 명문이에요. 그 후 자두파이 가게는 모두 사라졌어요. 대신 아주 아주 맛있는 자두파이가 각기 집에서 만들어지기 시작했어요.

그리고 마침내 한 청년이 등장해요. 지금으로부터 3년 전 그는 이스턴과 서우드를 잇는 최단 거리를 찾기 위해 산 속을 헤매고 있었어요. 서우드 산길은 미묘해서 이 초보 패스파인더는 곧 지치고 말았어요. 물도 떨어지고 먹을 것도 없었어요. 그때 긴 수염과 회색 눈동자를 가진 노인이 그의 앞에 나타났어요. 로브 같은 것은 입고 있지 않았지만 마치 동화에 나올 것 같은 할아버지였어요. 그는 아무 말도 없이 자두파이를 꺼내서 청년에게 내밀었어요. 두 사람은 아무 말 없이 자두파이를 나눠먹은 후 아무 말 없이 헤어졌어요. 청년은 기운을 차리고 다시 산길을 오르기 시작했어요. 일은 저녁 무렵에 순조롭게 끝이 났고요. 그 날 이후 청년은 때때로 억누를 수 없는 충동에 휩싸여서 자두파이를 먹으러오곤 하는 거예요.“




*

그날 라비는 딕슨 씨의 집에서 잤다. 병원 뒤에 붙어 있는 작은 저택이었다. 집에 들어서자 의사는 으랏차 하는 이상한 신음 소리를 내며 욕실로 사라졌다. 라비가 머물 방은 이층에 있었다. 그는 가방을 짊어지고 계단을 올라갔다. 한 손에는 장검을 들고 있었다. 두 쪽 다 한숨이 나올 만큼 무거워서 소년은 아아, 하고 길게 한숨을 쉬었다.

방에 도착해서 그는 기절한 것처럼 침대 위로 쓰러졌다. 그러고는 이렇다 할 상념이 들기도 전에 잠이 들었다. 두어 시간 자는 동안은 마치 숨이 끊어진 것 같았다. 새벽이 되자 그는 전조도 없이 일어나 비로소 방을 둘러보았다. 이인용 침대 네 개가 들어갈 만큼 큰 방이었다. 가구는 별로 없었고 침대 맞은편에 역시 이상할 정도로 큰 창문이 있었다. 침대 옆 콘솔에 우유와 과자가 담긴 쟁반이 놓여 있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누군가 들어왔던 기억이 없어서 그것들이 마치 그 자리에서 불쑥 솟아오른 것처럼 느껴졌다. 라비는 과자를 먹고 우유를 마셨다. 아직 온기가 남아 있었다. 과자 두 개는 남겨두었다가 목욕을 하고 나와서 먹었다.

그 후에는 가방을 청소했다. 거죽에는 모래랑 지푸라기 같은 것이 잔뜩 묻어 있었고 가방 주변에도 먼지가 뽀얗게 앉아 있었다. 그는 손으로 바닥을 쓸었다. 가방은 내용물을 빼낸 후 창 밖에서 털었다. 검푸른 하늘로 먼지가 날아갔고 찬바람이 들어와 추웠다. 뒤를 돌아보자 멋대로 꺼낸 잡화들이 꼬리처럼 길게 따라와 있었다. 라비는 무신경하게 눈이 보이는 순서대로 무작정 집어넣기 시작했다. 그 탓에 아직 물건이 남았는데 가방이 꽉 찼다. 빈 곳이 없는 것은 아니었지만 좀처럼 물건이 들어가지 않았다. 그는 가방을 문 옆에 세우고 남은 물건들은 그 옆에 차곡차곡 쌓았다. 그리고 돌아섰다가 맨 아래 깔린 지도를 빼어들고 침대 위로 올라갔다.

여행자용으로 나온 포켓 지도였다. 펼치면 4절 크기로 늘어난다. 지도 여기저기에는 소유주가 남긴 메모들이 빼곡히 적혀 있었다. 라비는 그것들을 읽다가 지루해진 듯 불을 끄고 이불 속으로 들어갔다. 그랬다가 갑자기 고개를 쑥 내밀고 지도를 찾았다. 불은 켜지 않았다. 그는 달빛을 받아 푸르스름하게 빛나는 종이를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손에 잡히는 포켓 지도. 잭슨 사. 발행 날짜는 지난 달로 되어 있었다. 속표지를 확인하고 소년은 지도를 침대 바닥으로 휙 집어 던졌다. 사실 지도 보는 법을 몰랐던 것이다.

이불을 턱까지 올리고 그는 다시 아아, 한숨을 쉬었다.




*

라비는 아침에 하얀 잠옷을 입고 있는 소녀와 마주쳤다. 하얗고 하얗고 하얀 잠옷이었다. 남자애는 어, 하고서 방으로 들어갔다.

그날은 모처럼 일찍 일어났다. 알람시계도 없었는데 눈을 뜨니까 새벽이 하얗게 밝아오고 있었다. 그는 침대에서 나와 일찍 일어났다는 감각을 되새겼다. 그렇다고 해도 놀라워 할 사람이 없었다. 라비는 방안을 둘러보았다. 우유와 과자가 놓여져 있던 쟁반은 이번에도 역시 바닥으로 사라진 듯 보이지 않았다.

밖에서 이제 나와도 괜찮아, 하는 목소리가 들린다.

두 사람은 함께 아침 식사를 했다. 소녀가 빵을 굽는 동안 남자애는 우유를 찾아서 따랐다. 접시도 두 개 꺼내놓았다. 포크는 각자 하나씩 집어왔다. 여자애는 소매를 걷으며 내 이름은 나나 딕슨이야, 하고 말했다.

“의사 선생님의 딸?”

“아니, 작은 아버지. 넌? 누가 입원했니?”

“아아.”

“가끔 이런 일이 있거든. 작은 아버지는 나한테 아무 말도 안 해. 내가 실수하는 걸 즐기시는 거지.”

“아, 미안해.”

“괜찮아.”

두 사람은 조용히, 그리고 빠르게 식사를 마쳤다. 그 후 나나는 학교를 갔고 라비는 방으로 올라와 이부자리를 정리했다. 의사의 집을 나왔을 때는 열 시경이었다. 교복 입은 남자애 서너 명이 그의 앞을 스쳐지나갔다. 라비는 그들의 뒷모습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

청년의 안색은 몹시 나빴다. 어제보다 훨씬 안 좋았다. 단지 다리에 금이 간 것만으로 저렇게 괴로운 걸까, 하고 라비는 놀랐다. 얼굴이 창백했고 눈 주위는 다갈색으로 변해 있었다. 입술은 말랐다. 눈이 조금 충혈 되어 있다. 광대뼈가 튀어나오고 턱이 네모나고 입술이 두껍고 눈이 작은 사람이었다면 아무래도 보기 싫을 모습이었다. 그런데 이 사람은 아름다운 얼굴을 하고 있다. 그런 사람은 비참해질지언정 볼썽사나운 모습은 내보이지 않는다. 그는 선하고 아름답고 비참한 얼굴로 좋은 아침, 하고 인사를 했다. 라비는 고개를 까딱하고 여느 때처럼 침대에 걸터앉았다. 신경질적인 동작이었다. 그는 종종 별 것 아닌 일에서 비겁함을 발견하고 신경질 내는 버릇이 있었다.

둘은 이후 행보에 관해 잠시 이야기를 나누었다. 진지한 것은 아니었다. 램 티어드는 자신의 신상이 문제가 되면 중심을 잡지 못했고 라비는 늘 아무래도 좋다는 쪽이었다. 그때 마침 딕슨 씨가 들어와서 간단히 진찰을 했다. 라비는 침대에서 물러나 동료가 인상을 쓰는 것을 바라보았다. 두 눈을 찌푸리고 있다가 꾹 다문 입술을 열며 한숨을 몰아쉬는 모습. 그는 딕슨 씨에게 아무래도 여기 좀 더 있을 것 같아요, 하고 말했다. 그러자 의사가 희극적으로 눈을 둥글게 확대시키며 말했다.

“무슨 말이에요? 그럼 산을 내려갈 생각이었단 말이오?”




*

그래도 대체로 나쁜 일은 생기지 않았다고 두 사람은 생각했다. 그들은 병실 안에서 얌전히 놀았다. 때때로 창 너머를 바라보거나 문 밖으로 고개를 내밀어 간호사들이 왔다 갔다 하는 것을 보거나 혹은 그 모든 것을 한꺼번에 응시하거나 했다. 입맛이 없었기 때문에 병원에서 나온 식사를 나눠먹었다. 그러면서 병원밥은 늘 좀 싱겁고 무언가 빠진 것 같다는 생각을 한다. 청년은 숟가락을 동료에게 완전히 넘기고 베개 위에 기댔다.

“어제 갔던 길, 지난주부터 폐쇄되었대.”

“왜?”

“유령이 나타나서. 웃지 마.”

“안 웃어.”

그렇게 말하고 라비는 다시 숟가락을 움직이다가 아무래도 우스운 듯 입술을 비죽거렸다. 청년은 마치 자신이 비웃음을 당한 듯 불편한 표정을 지었다.

“한 사람만 본 게 아니라 지나가는 사람 족족 그래서 어쩔 수 없었대.”

“누가 그래?”

“간호사.”

아침에 의사와 함께 병실을 돌던 그녀는 살짝 뒤에 남아서 이런 이야기를 해주었다. 그 길에는 귀신이 나온다. 봄부터 그런 일이 있었는데 지금은 그 길을 지나간 마을 사람들 전부가 한 번씩은 보았다. 모습은 모두 다르다. 자기 키의 두 배나 되는 것을 본 사람이 있는가 하면 뱀처럼 땅을 기어가는 것을 본 사람도 있다. 하나를 본 사람도 있고 여러 마리를 본 사람도 있다. 밤에도 나타나고 낮에도 나타난다. 특별히 해를 끼치는 것은 아니지만 기분이 나쁘다. 그러니까 당신도 너무 상심하지 마세요, 유령을 보지 않은 것만으로 얼마나 다행이에요, 하고 그녀는 진심으로 위로하고 싶은 듯 말했다. 라비는 여전히 입술을 비죽거리고 있었다.

“그럼 지금은 어디로 다니는데?”

“이렇게, 비잉 돌아서 내려가지.”

“안 불편할까.”

“불편해.”

“그런데 다들 잘도 견디고 있군.”

“유령한테 화내봤자 이쪽만 손해잖아.”

램은 태평하게 말하고는 드롭스를 하나 입에 집어넣었다.




*

“난 이제 그 집에서 안 자. 거기 여자애가 있어.”

병실을 나가며 소년이 말했다. 램은 보고 있던 책에서 눈을 떼고 실로 궁금하다는 듯 물었다.

“예뻐?”




*

사실 나나 딕슨은 아주 예쁜 소녀였다. 무엇보다 은빛으로 빛나는 금발이 예뻤다. 곱슬거리는 머리카락을 허리까지 늘어뜨리고 석양이 내리는 포도를 걷고 있을 때 이 소녀는 마치 다른 세계에서 온 존재처럼 보였다. 춤추듯 가볍게 뛰어오르는 걸음은 다시 그 세계로 돌아가기 위한 도약 같았다. 딕슨 씨를 보고 나나를 다시 보면 그녀가 유전학을 뛰어넘어 신의 뜻으로 이곳에 왔다는 것을 확실히 알 수 있었다. 라비와 나나는 병원 로비에서 다시 마주쳤다. 그녀가 먼저 인사를 건넸다. 그러자 로비에 있던 사람들이 모두 둘을 바라보아서 소년은 불편한 기분이 되었다. 그는 나나가 원장실에서 나오기를 기다렸다. 먼저 돌아가야 할 적당한 이유가 생각나지 않았던 것이다. 나나는 밖으로 나와서 용돈 받았어, 하고 웃었다.

둘은 곧바로 집에 가지 않았다. 다섯 시경이었다. 병원 뒤쪽으로 해가 지고 있었고 역광을 받으며 나나가 앞으로 뛰어나갔다. 라비는 금색 머리카락이 반짝반짝 빛나는 것을 바라보았다. 그녀는 손을 흔들며 마을을 구경시켜줄게, 하고 인심 쓰듯 말했다.







*

소년 소녀, 모두 단 것이 못 견디게 좋았다. 반 정도 남은 크레페를 바꿔 먹으며 각자 상대가 좋은 녀석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그들은 사방이 완전히 깜깜해질 때까지 시내를 걸어다녔다. 나나는 괜찮은 가이드였다. 큰 건물이나 동상이 나올 때마다 제법 진지하게 설명을 했다. 그것을 듣던 라비는 문득 뭐야, 너도 다른 곳에서 온 주제에, 하고 얼굴을 찡그렸다. 소녀는 입술을 내밀고 짐짓 토라진 표정을 지었다. 둘은 퍽 닮아보였다. 그들은 주먹 두 개만큼 사이를 두고 서로의 얼굴을 힐끔 들여다보았다.

저녁 메뉴는 아침과 비슷했다. 단지 시간이 남아서 계란 후라이가 곁들여졌다. 모양은 엉망이었다. 나나는 태연하게 못생긴 계란을 빵 위에 얹어놓았다. 그 동안 소년은 접시와 포크를 날랐다. 우유가 없었기 때문에 오렌지 주스를 꺼냈다. 아침과 마찬가지로 그릇 부딪히는 소리만 들리는 조용한 식사 시간이었다. 그런데도 기분이 한층 가벼웠다.

저녁 식사 후 라비는 방으로 돌아가 짐을 꾸리기 시작했다. 뒤따라온 나나의 그림자가 문 쪽에서 길게 드리워졌다.

“그 사람은 다 나았니?”

“아니, 오래 걸리나봐.”

“얼마나?”

“모르겠어.”

나나가 움직이자 그와 함께 그림자도 라비를 거쳐 반대쪽으로 천천히 이동했다. 소년은 가방을 챙기던 손길을 멈추고 한쪽 무릎을 바닥에 댄 채 고개를 돌렸다. 불은 꺼진 상태였다. 방 안에서는 바깥쪽에 있는 사람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검게 형체만 보일 뿐이다. 그는 눈을 찌푸리고 나나를 올려다보았다.

“학교 갔다 와서는 늘 이래?”

“그래. 아무 것도 안 해,”

그리고 라비는 가방과 장검을 들고 딕슨 씨의 집을 나왔다. 뒤에서 자물쇠 거는 소리가 찰칵하고 들렸다.




*

소년이 다시 병실로 돌아왔을 때 그의 동료는 침대에 누워서 책을 읽고 있었다. <세계의 토양 탐험-붉은 흙을 따라서>라는 제목이었다. 진지한 얼굴로 시선을 고정시키고 있던 그는 라비가 들어오자 몸을 일으키며 아까 이런 일이 있었지, 하고 입을 열었다.

“네 시쯤이었어. 낮잠을 자고 일어나서 창밖을 보고 있었는데 병실이 흔들리는가 싶더니 집이 찾아왔어.”

소년이 입을 삐죽거리는 것을 무시한 채 그는 말을 이었다.

“밝은 색 벽돌로 지은 이층집이었어. 세모꼴 지붕을 얹은 다락방에는 반달형 창문이 트여 있었고 창틀에는 은은한 푸른빛이 돌았어. 빛바랜 나무문이 부드럽게 반짝이고 있었고, 간단히 말하자면 몹시 아름다운 집이었지. 내가 지긋이 바라보자 그(그녀?)는 헛기침 같은 것을 했어. 창문이 반짝이는 게 어쩐지 쑥스러워하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어. 나는 목소리를 가다듬고 무슨 일이십니까, 하고 물었어.

-무슨 일이십니까.

-들리는 이야기로는 조금 곤란하시다고. 어쩌면 제가 도움을 드릴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그때 나는 정말 고민하고 있었어. 밖으로 나가려던 시도가 좌절되었거든. 이대로는 숙소도 찾지 못하고 밤이 되겠구나, 하고 생각했어. 아무튼 나는 너를 병원에서 재우고 싶지는 않았던 거야. 그는 내 마음을 알고 있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더군. 우아하면서도 무게 있는 몸짓이었지. 나는 그의 이야기를 좀 더 들어보기로 마음먹었어.

-도움이라면 어떤?

-아아, 결국 제 이야기입니다만. 어떻습니까? 무슨 거래를 하자는 것은 아닙니다. 호의라고 생각해주세요.

-호의?

-아니, 부탁이라고 할까요. 주인이 죽은 후로는 영 적적해서요.

그는 자신과 그 안에 살고 있는 사람에 대해 이야기했어. 원래는 노부부가 살았는데 올 봄에 할아버지가 덜컥 죽고 말았대. 할머니는 상냥하고 아름다운 분이지만 워낙 조용한 성격이라 이웃들과 잘 어울리지 않는 모양이야. 더구나 귀가 어두워진 이후로는 거의 외출을 하지 않게 되었어. 요리를 잘했지만 이제 먹어줄 사람이 없어. 얼마 전에는 모처럼 만든 요리를 모두 버렸대. 슬펐던 거지. 집은 침통하게 창문을 들썩였어. 그러다가 너무 저자세라고 생각했는지 짐짓 근엄한 투로 목소리를 바꾸었어.

-손해 보는 건 아닐 거예요. 지금은 같이 오지 않았지만 냇물이 지나가는 정원도 있습니다. 거길 바라보고 있으면 기분이 아주 상쾌해져요. 당신이 퇴원한 후에도 머물 수 있어요. 방은 얼마든지 있으니까. 물론 돈 같은 것은 받지 않습니다.

확실히 나쁜 제안은 아니었어. 나는 그를 향해 몸을 돌리고 진지하게 탐색하기 시작했어. 볼수록 호감이 가는 집이었어.

-당신 같은 집에 머물 수 있다면 정말 기쁠 겁니다. 상냥하고 요리를 잘하는 부인이 계시다니 더욱 그렇고요. 그런데 문제가 하나 있어요.

-문제요?

그는 깜짝 놀라서 되물었어. 단 한 번도 그런 말을 들어 본 적이 없다는 태도였지. 나는 얼른 손을 저어보였어. 당신의 문제가 아닙니다, 하고 말이야.

-그 애는 길눈이 아주 어두워요. 찾기 힘든 곳에 있다면, 그러니까 골목을 돌거나 길을 건너거나 해야 한다면 아무래도 힘들 겁니다. 집을 나설 때마다 길 안내를 부탁할 수는 없으니까요.

내 말이 끝나자 그는 몹시 즐거운 듯 웃음을 터뜨렸어.

-제가 강조하고 싶은 것이 바로 그 부분입니다. 당신은 기억하지 못할 테지만 병원 정문에서 이어지는 큰 길이 있어요. 그 길을 따라 내려가면 나오는 집이 바로 저입니다. 딱 열 번째이지요. 병원은 서우드에서 가장 높은 곳에 있으니까 혹 숫자를 잊어버리더라도 다시 돌아오면 되요. 자, 다른 문제가 있습니까?

그야말로 혀를 내두를 수밖에 없는 집이었어. 나는 거의 압도당한 기분으로 고개를 저었지. 그러자 그는 기다리겠습니다, 라는 말을 남기고 병실을 나갔어.“

이렇게 그는 말을 마쳤다. 한 손에는 가방을, 한 손에는 장검을 든 채 서 있던 라비는 숨을 들이킨 후 천천히 입을 열었다.

“거짓말하는 거야?”

램은 어깨를 으쓱 해보이고 다시 침대에 기댔다. 대단한 농담을 한 사람치고는 몹시 피곤해 보였다.




*

래비어트 시번이 다섯, 하고 세었을 때 일이다. 그는 걸음을 멈추고 뒤를 돌아보았다. 조금 전에 다섯이라고 센 것 같은 기분이 들었기 때문이다. 앞서 지나온 집은 이미 보이지 않았다. 그는 담장 아래 멈춰 서서 허리를 숙였다. 문득 피곤함이 밀려왔다. 절벽에서 떨어졌을 때 묻어둔 피로가 지금 쏟아져 나오려는 것 같았다. 머리를 감싸고 한숨을 쉬자 더욱 기분이 나빠졌다. 바로 그때 정체불명의 생명체가 그를 습격해왔다.

처음에 그는 자신이 정신을 잃고 있는 중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손으로 벽을 집으며 이 정도 절망한 것으로 기절해버리다니, 하고 자조했다. 두 번째 충격이 왔을 때는 곧 생각을 바꾸었다. 아팠던 것이다. 라비는 짧은 신음 소리를 내며 주저앉았다. 차가운 거리의 감촉이 바지를 뚫고 전해지자 울컥 화가 났다.

“무슨 짓이야!”

크고 날카로운 목소리였다. 그 자신조차 명확하게 화를 내고 있다고 감탄할 정도였다. 상대 역시 기세에 눌려 뒷걸음질 쳤다. 먼 가로등 빛에 습격자의 모습이 아스라이 드러난다. 어린애 같이 작은 키에 발목까지 오는 망토를 두르고 그 위에 커다란 모자를 눌러쓴 괴이하기 짝이 없는 형상이었다. 얼굴은 잘 보이지 않았지만 어린애 같다. 그는 어깨를 움찔움찔하더니 다시 무작정 라비에게로 돌진해왔다. 소년은 저도 모르게 장검을 들어 습격자의 머리를 내려쳤다.

그러자 녀석은 냐아옹, 하고 길게 울며 풀썩 쓰러졌다.




*

그는 갈색 줄무늬가 그려진 뾰족한 귀를 쫑긋거리며 저는, 고양이입니다, 하고 말했다. 라비는 내리깔고 있던 눈을 천천히 올리며 어깨를 으쓱했다.

“그 정도는 보면 알아.”

때는 자정 즈음. 그들의 두 번째 대면이었다.

습격은 라비에게 도움이 되었다. 넋 없이 자신의 두 손을 내려다보던 그는 이내 고개를 들고 골목 한 쪽에 넘어져 있는 고양이 소년을 불렀다. 그는 야옹 야옹 울다가 뒤늦게 입을 막았다. 그러곤 수가 없다고 생각했는지 라비 쪽으로 다가왔다. 자, 이런 집을 알고 있어, 하고 물어보자 순순히 고개를 끄덕인다. 둘은 입을 다문 채 골목을 따라 내려가기 시작했다.

집 앞에 이르자 라비는 습격자의 머리를 딱 소리나게 때렸다. 이번에 꼬마는 아야, 하고 소리를 질렀다.

안내받은 방에서는 밤의 냄새가 났다. 그는 까끌한 면베개에 얼굴을 묻고 쏟아지는 잠을 뱉어냈다. 눈을 떴을 때는 두 개의 시계 바늘이 12자에서 겹쳐지고 있었다. 반달형 창문으로는 개나리색 달빛이 들어왔고 어디에선가 희미한 계피향이 느껴졌다. 라비는 끌어당겨지듯 창가 쪽으로 가서 창문을 밀어올렸다. 그리고 몸을 내밀어 골목을 바라보았다. 담벼락 아래 웅크리고 있던 고양이 소년이 기다렸다는 듯이 이쪽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그를 방으로 데리고 오는 것은 별로 어렵지 않았다. 1층의 동태를 살피던 라비는 식탁에 놓인 시나몬 롤을 접시에 담았다. 옅은 어둠이 깔린 방 안에서 두 소년은 얌전히 빵을 먹었다. 그러다가 마침내 고양이 소년이 더 이상 견딜 수 없다는 듯 일어나 모자를 벗고 말했다. 저는 고양이입니다. 어쩐지 슬프고 비장한 어조였다.




*

자정쯤이었지, 고양이가 나를 찾아왔어.




*

방 안의 분위기는 잠시 소강상태로 들어갔다. 아니, 점점 긴장되는 것 같기도 하고 지금이 바로 최고조에 이른 순간 같기도 했다. 고양이 소년은 침대 맡에 세워 놓은 장검을 유심히 보고 있었다. 라비는 그 뒤에서 좌우로 살랑살랑 움직이는 줄무늬 꼬리를 바라보았다. 그는 거의 고양이었다. 열대여섯 되어 보이는 얼굴도 꼭 고양이 상을 하고 있었다.

이윽고 그가 이건 당신의 검이 아니군요, 하고 말했다. 라비는 담백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고 해서 또 달려들거나 하진 마.”

화를 낼 수도 있지만 내지 않겠다, 딱히 내고 싶지도 않다. 말하자면 기력의 문제였다. 라비가 이렇게 결론을 내렸을 때 고양이 소년이 기세 좋게 몸을 돌렸다. 그 바람에 목에 매고 있는 붉은 리본이 크게 흔들렸다. 이제 와서 하는 말이지만 이 고양이는 훌륭한 옷차림을 하고 있었다. 요 근래 라비가 본 그 어느 사람보다 멋진 모습이었다.

“하지만 나는 화가 났던 거예요.”

그가 입을 열었다.

“제 이름은 호퍼 베빗입니다. 건너편 기슭에 살고 오래 전부터 어느 마법사의 고양이 노릇을 하고 있어요. 서우드에는 가끔 놀러와요. 지금은 아주 자주 오고 있어요.”

“왜 화가 났는데?”

호퍼 베빗은 붉은 리본을 매만졌다.

“왜 자주 오느냐면.”

“호퍼 베빗.”

“그러니까 서우드에 가끔 놀러오던 호퍼 베빗은 어느 날 어떤 아가씨를 보았어요. 그 날 이후 아주 자주 오게 된 거예요. 말하자면 그런 이야기지요. 오늘 저녁 당신과 함께 크레페를 나눠먹은 그 아가씨 말이에요. 그 아가씨가-.”

이쯤 되면 래비어트 시번도 당황하고 만다.




*

“그래서 화가 납니다.”

“잠깐만, 너는 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

“당신이야말로 발뺌을 하다니. 그 분을 좋아하지 않는 게 가능할 리가 없어요.”




*

다음 날 라비는 늦게 일어났다. 두 줄기 날카로운 선으로 변해서 들어오는 빛을 맞으며 그는 눈을 깜박였다. 이것은 무슨 일인가. 방 안에는 아직 미미한 계피향이 떠다니고 있었고 자리에서 일어나 주변을 둘러보자 돌연 작고 아담하고 따뜻한 방이 나타났다. 소년은 이런 방에서 잠든 기억이 없다고까지 생각했다.

문을 열고 나가자 계단 난간 사이로 상냥하고 친절한 노부인이 보였다. 귀가 어두운 그녀는 손님이 나온 것을 알아채지 못하고 주방과 거실을 오갔다. 그러다가 머리 위로 그림자가 드리워지자 이내 고개를 돌렸다. 아침 인사를 건네는 목소리가 다정해서 라비는 오히려 부끄러워졌다.

두 사람은 늦은 아침 식사를 했다. 아직 김이 올라오고 있는 식빵과 계란 요리와 푸른 샐러드, 가운데 초콜렛이 가득 채워진 케이크, 우유가 있는 식탁이었다. 그녀는 종종 고개를 들고 맛이 있느냐고 물어왔는데 그 때마다 소년은 각기 다른 말로 맛이 있다고 대답했다. 정말 맛이 있었다. 배가 부른데도 손을 멈출 수 없어서 괴로울 정도였다.

이렇게 맛있게 먹어주어서 얼마나 기쁜지 몰라요, 하고 그녀가 말했다.

라비가 집을 나선 것은 한낮을 넘긴 늦은 오후였다. 친절하고 상냥한 노부인은 병원으로 가는 그에게 과자 바구니를 들려주었다. 땅콩과 아몬드 냄새가 나는 커다란 바구니였다. 정원을 빠져나온 라비는 뒤를 한 번 돌아보고는 담장 아래 앉아 과자를 먹기 시작했다. 입안에서 오드득 오드득하는 소리가 났다. 바구니가 밑바닥을 드러내기 시작했을 때 그는 문득 한 손으로 입을 가리고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이상하게 여겨질 만큼 좋은 날씨였다. 소년은 한참동안 고개를 젖히고 있다가 이윽고 원래의 세계로 돌아와 손에 들고 있던 과자를 마저 먹어치웠다. 남은 것을 양쪽 호주머니에 반씩 나누어 넣고 바구니는 정원 한 구석에 숨겼다. 그러곤 다시 걷기 시작했다.




*

고양이 이야기를 하지 않기로 마음먹으며 라비는 대단한 일을 해치운 듯한 기분에 휩싸였지만 램에게도 숨기고 있는 일이 있었다. 그 역시 딱 한밤중에 일어난 일이었다.

시계를 확인하지는 않았지만 정확히 두 시였다고 단언할 수 있다. 종종 새벽에 눈을 떴을 때, 그것은 틀림없이 두 시였다. 그는 다리가 아픈 것 같다고 생각했다. 다리가 아파서 깨버렸다. 그렇게 생각하면서 천장을 바라보았다. 어두워서 보이지 않는 천장은 있는 것 같기도 하고 없는 것 같기도 하고, 있다면 아주 멀리 있는 것 같기도 하고 바로 코 위에 내려 앉아 있는 것 같기도 해서 기분이 나빴다. 창 너머 불이 켜져 있는 집은 한 채도 없었다. 복도를 걸어가는 간호사의 발걸음 소리도 지금은 없고 오직 자신의 낮은 숨소리가 고막을 울렸다. 이것이야말로 혼자라고 생각했다. 다리가 아프고 혼자다, 다리가 아픈데 혼자다, 이런 감상을 되풀이하자 어쩐지 울고 싶었다.

그러나 막상 울자고 결심하니 식상한 기분이 들었다.

그는 손을 뻗어 커튼을 치고 베개를 바로 했다. 그리고 다시 잠들기 위해 눈을 감았다. 발소리가 들려온 것은 그때였다. 둔탁하고 뒤꿈치를 끄는 듯한 소리. 간호사의 것과는 전혀 달랐다. 램은 몸을 일으키고 문 쪽을 바라보았다. 어떤 전조, 음침하다거나 등골이 서늘해진다거나 어깨가 무겁다거나 하는 것은 없었지만 그는 유령이 나타났다는 것을 알았다. 저것이 유령이다. 이렇게 생각한 순간 손가락 마디만큼 열린 문틈 사이로 희끄무레한 형상이 스쳐지나갔다.

“그런데 다리, 전혀 나은 거 같지 않잖아?”

라비는 이불 위에 과자를 늘어놓다가 문득 입을 열었다. 그 중 하나를 집어 올리며 램이 차분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아직 이틀 밖에 지나지 않았으니까.”

건성으로 고개를 끄덕이는 소년은 아무래도 납득하지 못한 것 같다.




*

“그래서 화가 났습니까?”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화를 내고 있는 건 아니지.”

“그럼 화가 나지 않았어요?”

“엄밀히 말하자면 그런 것도 아니야.”

“자, 그럼 대체 어떻다는 거예요.”

“망설이고 있는 거지. 화를 낼까 내지 말까. 끊임없이 망설이고 있지만 어느 쪽으로 정하든 결국 마찬가지일 거라고 생각해.”




*

병원을 나설 무렵 라비는 그다지 기분이 좋지 않았다. 특별히 나쁜 일이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그런데도 방을 나와서 문을 등지자 갑자기 침울해졌다. 이럴 줄 알았으면 오지 않는 편이 좋았을 테다, 그는 이런 생각을 하며 회전문에 몸을 실었다. 두 손으로 힘껏 손잡이를 밀었을 때 유리 위로 수상한 형체가 나타났다. 그는 문에 탄 채 한 바퀴를 돌아 다시 병원으로 들어왔다. 그리고 입구 맞은편에 있는 대기실로 가서 그 인물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모자 속에 감추어진 두 귀가 쫑긋 움직였다.

벌떡 일어나는 호퍼 베빗을 피해 라비는 한 발짝 뒤로 물러섰다. 안심시키기 위해 두 손을 들어보인다.

“뭐, 이렇게 돌아다녀도 괜찮은 거야?”



“나는 문병 왔어.”

입을 벌린 채 굳어 있던 호퍼 베빗이 이윽고 큰 숨을 내쉬며 주저앉았다. 모든 기를 빼앗겼다가 일시에 되돌려 받은 듯한 모습이었다. 라비는 어째서 이 고양이에게 말을 걸었는가 생각해보았다. 후회라고 할만한 감정은 아니었지만 난감했다. 그 동안 몇몇 사람들이 둘 사이를 지나갔다. 그 중에는 환자도 있었고 보호자도 있었으며 무슨 이유로 이 곳에 왔는지 알 수 없는 부류도 끼어 있었다.

자신들은 일견 세 번째 부류에 들어갈 것이라고 소년은 생각했다.

나중에 입을 연 것은 호퍼 베빗이었다. 그는 모자를 고쳐 쓰며 그만 나갈까요, 하고 말했다. 그 목소리가 아주 의젓했기 때문에 라비는 실소했다.

시내로 나가는 동안 호퍼 베빗은 많은 이야기를 했다. 이런 이야기들. 오늘은 저녁 늦게까지 청소를 해야 했어요. 주인의 성격은 나날이 나빠지는 것 같아요. 아니, 밤마다 외출하고 있는 것을 알아챈 것인지도 모르겠어요. 아무튼 갑자기 까다로워진 주인의 마음에 들 때까지 집안을 쓸고 닦는 것이 얼마나 지루했는지 몰라요. 이제 이 집 고양이 노릇은 그만할까 생각했지만 혼자 지내는 주인을 생각하면 역시 안 되어서. 호퍼 베빗은 고양이치고 정이 많은 펀이었다. 마당 청소까지 마치고, 주인이 서재에서 선잠에 빠진 것을 확인하고 집을 나섰을 때는 이미 늦은 시간이었다. 서둘러 학교 앞으로 가보았지만 하교 행렬은 거의 끝나 있었다. 그 아가씨는 항상 첫머리로 학교를 나온다. 학교 같은 것은 별로 좋아하지 않는지도 모른다. 그 후 호퍼 베빗은 아가씨가 좋아하는 사탕 가게를 거쳐서 공원을 지나 병원으로 왔다. 언제나 한발 늦는 것 같은 기분이 들어서 슬펐다. 여기까지 들은 라비는 혀끝을 차며 그럴 바에는 애초에 집 앞에서 기다리면 좋았잖아, 하고 대꾸했다. 호퍼 베빗은 정도에 넘는 짓은 하고 싶지 않다고 딱 잘라 말했다. 이제 와서 새삼 정도 같은 게 있다는 건가. 그러나 소년은 이렇게 말하는 대신 찻잔 위로 소복하게 올라온 우유 거품을 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니까 나나를 좋아한다는 거지, 정말.”

“그 분은 나의 여신이에요.”

호퍼 베빗의 열정에 찬 목소리를 들으며 소년은 다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는 머쉬멜로우를 입에 넣은 채 창문 밖의 하늘을 바라보다가 문득 할 말이 생긴 듯 고양이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런데 너, 여신하고 사귀는 게 얼마나 피곤할지는 생각해 봤어?”

그 후 두 사람은 카페를 나와 노부인의 집 앞에서 헤어졌다. 그 때에는 인사도 하지 않고 동시에 등을 돌렸다. 소년은 마당에 숨겨두었던 바구니를 들고 잔디를 털어냈다. 집에 들어가자 마침 거실에 앉아 있던 부인이 그를 맞이했다. 쪽지 하나가 손에서 손으로 전해졌다. 발신자는 램 티어드. 작고 둥근 글씨로 “나나 존슨 양이 내일 함께 식사하길 바람,” 이라고 쓰여 있다. 라비는 쪽지를 원래대로 접어서 품속에 집어넣었다. 2층으로 올라가려고 할 때 노부인이 식사하지 않겠어요, 하고 물어왔다. 소년이 고개를 저어보이자 그녀는 무척 당황한 얼굴로 그럼 차라도 한 잔 마시는 게 어때요, 하고 되물었다.




*

“이상하게 생각하지 마세요.”

“생각 안 해요.”

제인은 허리를 숙이고 단단히 묶어진 구두끈을 풀기 시작했다. 그 바람에 곱슬거리는 금발이 이마 앞으로 쏟아졌다. 두 손은 구두 안쪽으로 들어가서 꽉 조여진 끈을 느슨하게 당긴다. 매일 구두끈 풀기 연습을 따로 하는 것처럼 섬세한 몸짓이었다. 일련의 동작이 끝나자 그녀는 천천히 등받이에 몸을 붙였다. 한데 모은 두 발 끝에서 흰 색 구두가 흔들렸다.

이윽고 그녀가 이야기를 시작했다. 낮고, 조금 떨리는 목소리였다. 빨간 빛을 내며 타들어가는 담배에서 시종 연기가 흘러나왔다. 늦은 오후. 병원 꼭대기 구석에 있는 병실에는 아무도 오지 않는다. 간호사의 속삭이는 목소리만이 발자국 같고 인기척 같이 들려왔다. 램은 침대에 기댄 채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녀는 이렇게 말했다.

“옛날이야기에요. 그때 이곳은 성이었어요. 주인은 어느 패기 없는 사내로 중앙에서 작위를 받자마자 아내와 함께 이곳으로 내려왔어요. 야망 같은 것은 너무 무겁다고 생각했어요. 소원이 있다면 침대 위에서 안락사하는 것 정도였어요.

부부에게는 딸이 하나 있었어요. 남자는 이 딸을 아주 사랑했어요. 그는 항상 이 세상이 딸에게 위험하다고 생각했는데 작은 사고가 일어날 때마다, 그러니까 그 애가 넘어지거나 잔병치례를 할 때마다 그 믿음은 깊어졌어요. 결국 남자는 딸을 성 밖으로 나가지 못하게 했어요. 그 애의 방은 성의 맨 꼭대기 층에 있었어요. 아이는 작은 창문을 통해 바깥을 내려다보며 노래를 부르곤 했어요. 아가씨가 될 때까지, 계속.

그 애가 열일곱 살이 되었을 때 일이에요. 숲 너머에 살던 젊은 마법사가 노래 소리를 들었어요. 그는 사랑에 빠졌어요. 목소리만 듣고. 그런 게 가능했대요. 매일 같이 편지를 썼는데 답장은 받을 수 없었어요. 노랫소리는 밤마다 놀리듯 그의 귀로 전해졌고요. 아흔 아홉 번째 편지를 보낸 날 그는 성벽 아래서 새벽을 보냈어요. 노랫소리도 들리지 않았고 달은 이상할 정도로 새파랗게 빛나던 날이었어요. 해가 뜨자 그는 울면서 반쯤 웃으면서 집으로 돌아갔어요. 그리고는 기묘한 병에 걸려서 가슴이 타는데도 물 한 모금 넘기지 못하다가 죽었어요. 그리하여 비로소 죽었다, 이제 끝이다, 이렇게 생각하며 눈을 떴는데 성 앞이었어요. 마음을 가다듬고 몇 번이고 죽어보았지만 정신을 차리면 항상 성이었어요. 나중에, 아주 오랜 시간이 지난 후에 젊은 마법사는 자신이 유령이 되었다는 것을 깨달았어요. 그래서 자기도 모르는 새 명부에서 끌려나와 성 앞에 서고 마는 거예요. 모처럼 죽은 보람도 없이.

이것이 서우드의 유령이야기에요. 어때요, 잘 들으셨어요?“

램은 눈을 깜박이며 당신도 만났습니까, 하고 물었다. 제인은 문득 간호사다운 미소를 짓고 담배를 껐다. 그리고 흐트러진 머리에 핀을 꽂았다.

“아니오, 저는 아니에요.”

다시 신발 속에 발을 끼워 넣은 후 그녀는 차트를 들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목발은 지금 가져다주실 건가요, 하고 묻자 고개를 끄덕인다. 그녀는 담배 연기와 함께 병실에서 물러났다. 램은 베개 깊숙이 머리를 파묻으며 복도를 빠져나가는 구두 소리를 들었다.




*

새벽 두 시. 이것은 수면 장애가 아니다. 누군가 병원 안을 돌아다니고 있다. 무게가 느껴지지 않는 가벼운 발소리. 램은 침대 주변을 더듬으며 목발을 찾았다. 손에 닿는 감촉이 이상할 정도로 딱딱했다. 그것을 겨드랑이에 끼고 움직이자 전진할 새도 없이 몸이 휘청거렸다. 이제 깨달았다. 목발을 사용해 본 적이 없었다. 목발을 사용하는 게 어려운 일이라고 생각해 본 적도 없다. 그러는 동안 발자국 소리가 점점 가까워졌다.

그는 목발을 들고 밖으로 뛰어나갔다. 다리에서 올라오는 고통 때문에 이봐요, 하고 부르는 소리는 비명 같이 울렸고 한 밤의 산책자는 슬로우 모션처럼 걸음을 멈추었다. 어둠이 차오른 병원 복도 속에서 방문객의 모습이 투명하게 보였다. 램은 목발을 잡은 손에 힘을 주며, 만약 저 자가 유령이라면, 하고 생각했다.

그렇다면.

그는 숨을 들이키며 누구십니까, 하고 물었다. 누구십니까? 안 들립니까? 목발이 새된 소리를 내며 바닥과 마찰했다. 그러자 불현듯 남자가 이쪽을 돌아보았다. 몸을 감싸고 있는 검은 옷이 출렁이며 공기 중으로 녹아드는 것처럼 보였다.




*

남자의 입에서 낮고 조용하고 그리고 부드러운 목소리가 흘러나온다. 그는 고양이를 찾아 이 병원에 왔다. 밤에, 담을 넘어서. 그게 왜 이상한지 설명하기 위해 램은 몇 번이고 입을 달싹거렸지만 좀처럼 말이 나오지 않았다. 이야기가 끝났을 때 단지 고양이를 찾고 계셨군요, 하고 되물었을 뿐이다. 남자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며 웃었다. 수채화처럼 옅은 미소였다.

램은 서랍에서 노부인의 과자를 꺼냈다.

“호퍼 베빗이 수상한 낌새를 보이기 시작한 것은 올해 봄부터예요. 말하자면 밤의 냄새 같은 겁니다.”

“하지만 고양이는 원래 야행성이지 않습니까.”

“아, 맞아요. 그 애는 절충형이에요. 잠은 아침에 잡니다. 낮에는 할 일이 있으니까.”

남자는 미소를 머금은 채 집게와 엄지손가락을 사용해서 과자를 부러뜨렸다. 누르듯 힘을 주는 우아한 동작 끝에 과자는 부스러기 없이 깨끗하게 두 조각으로 나뉘어졌다. 그 동작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램은 저도 모르게 인상을 찌푸렸다. 움직임이 이상할 정도로 완벽하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그는 침침한 눈을 깜박이며 의자 깊숙이 몸을 밀어넣었다. 그러자 얌전히 과자를 우물거리던 남자도 문득 인상을 쓰며 말했다.

“그런데 왜 여태껏 깨어있었습니까?”

“깨어있던 게 아니에요. 방금 일어났어요.”

그는 남자의 말을 부정하듯 몸을 앞으로 당겼다. 머뭇머뭇거리면서, 남자가 눈을 크게 뜨자 결국 고개를 떨어뜨렸다. 그러고는 피곤한 목소리로 실은 그래요, 나는 유령 이야기를 들었어요, 하고 자백했다.




*

젊은 마법사 이케아는 웃으면서 말했다.

“알았어요, 당신은 내가 유령이라고 생각했군요? 이런, 세상에!”




*

오후 네 시, 노부인이 관절염 때문에 병원에 갔을 무렵 라비는 거울 앞에 서 있었다. 흰색 셔츠와 짙은 색 바지 차림이었다. 바지를 한 번 털었다. 눈 아래가 어두워 보여서 두 손으로 얼굴을 쓸어내렸다. 갑자기 피곤이 몰려왔다. 거울에서 뒷걸음을 치던 소년은 침대에 부딪혀서 그대로 주저앉았다. 그리고 거울 같은 것을 들여다본 자신을 힐난했다.

집을 나온 그는 일부러 정원을 쭉 둘러보았다. 늦은 오후의 풀잎은 어딘가 지쳐 보이고 잎 끝에 달린 이슬도 위태롭게 흔들리고 있었다. 호퍼 베빗은 보이지 않았다. 라비는 목 뒤로 깍지를 낀 채 이쪽저쪽 기웃거리다가 이내 거리로 나왔다. 그러고는 불필요한 동작 없이 병원 쪽으로 걸어갔다. 병원에는 들르지 않았다. 길을 살짝 빠져나와서 의사의 집 창문을 힐끔거리자 주방에 서 있는 나나가 보였다. 설마 자기가 만든 음식을 먹일 작정인가, 라비는 미간을 찌푸리며 현관문을 두드렸다. 앞치마를 두른 채 밖으로 나온 그녀는 라비의 손에 들린 진저에일을 받아들었다. 마샤 할머니의 진저에일 정말 좋아해. 이렇게 말하고 웃는 그녀는 전혀 모르는 사람 같았다. 라비는 나나의 뒷모습을 바라보다가 쫓기듯 집 안으로 들어갔다.

저녁 식사는 전반적으로 달았다. 식사 후 소년이 맛있게 먹었어, 하고 인사하자 나나 쪽이 오히려 정색을 하고 바라보았다.




*

식사 후에 있었던 작은 에피소드. 다시 설거지를 하는 래비어트 시번. 식탁에 턱을 대고 엎드려서 소년의 뒷모습을 바라보는 나나 딕슨. 너는 입맛이 마음에 든다, 하고 소녀가 말하자 라비는 어깨를 으쓱했다.

“정말이야. 우습게 생각하지마. 게다가 요즘은 기분이 나빠. 밤이 되면. ”

“밤이 되면?”

“밖에서 이상한 소리가 나.”

라비는 그릇을 헹구며 대꾸했다.

“신경 쓸 거 없어. 고양이 같은 거겠지.”




*

그때 램 티어드는 유령 이야기를 듣고 있었다. 이번 상대는 옆 병실의 환자이다. 팔이 부러져서 입원한 그는 램을 보자 몹시 반가워하며 이렇게 말했다. 당신이 유령의 길에서 다리가 부러졌다는 그 남자로군?

두 사람은 재활 센터가 내려다보이는 베란다에 서서 이야기를 나누었다.

“유령에 대해서는 알고 있나?”

램은 간호사에게 들은 이야기를 간단히 말해주었다. 그러자 남자는 인상을 쓰며 고개를 저었다.

“그 여자는 아무 것도 몰라. 서우드 사람이 아니니까. 몇 달 전에 갑자기 나타났지.”

그는 문득 입을 다물고 상대방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램은 예의 바른 목소리로 실제 일어난 일은 어땠는지 물어보았다.

“그 이야기에는 중요한 인물이 빠져 있어. 그러니까 뒤로 갈수록 내용이 이상해지지. 마법사가 아가씨에게 반했을 때 그녀는 이미 어느 기사와 약혼한 상태였어. 실로 훌륭한 가문의 기사였지. 전하의 먼 먼 친척 누구누구의 아들이라는 말도 있고 왕비님의 먼 먼 친척 누구누구의 손자라는 말도 있고, 아무튼 아가씨와 잘 어울리는 청년이었어.

결혼식 날, 마법사는 바람처럼 나타나서 아가씨를 데리고 사라졌어. 습기 차고 춥고 달빛이 들지 않아서 무서운 숲. 말하자면 마법의 성으로. 기사는 사흘 밤낮을 그 안에서 헤매었어. 마침내 성 안으로 들어갔을 때, 아가씨는 이미 마법에 걸려서 잠에 빠진 후였어. 마법사는 그녀를 돌려달라는 기사의 요구를 거부했어. 기사는 마법사에게 결투를 신청했고 훌륭한 솜씨로 그의 가슴에 칼을 꽂았어. 그런데 마법이 풀리지 않았어. 영주는 슬픔에 잠긴 채 그녀를 성에 감추었고 세월은 흘렀어. 영주도 죽고 기사도 죽었어. 그 당시를 살았던 사람들은 모두 깨끗이 다른 세계로 가버렸지. 그런데 이상하게 마법사만은 유령이 되어서 성 근처를 떠도는 거야. 병원이 들어선 후에도 계속. 그리곤 아가씨가 있는 곳을 찾지 못해서 우는 거지.“

녹색 잔디가 깔린 재활 센터 안에서는 관절염 환자들이 가벼운 운동을 하고 있었다. 곧 간호사가 따라 나와서 그들을 지도한다. 램은 그런 장면을 내려다보며 물었다.

“당신도 보았나요?”

남자는 고개를 저으며 웃었다. 그리고는 진지한 표정으로 다리는 괜찮은 건가, 안색이 아주 안 좋은데, 하고 말했다.




*

이케아의 단평.

“로맨틱 호러로군요. 하지만 기사를 등장시킨 것은 칭찬할 만합니다. 그럴싸해요.”




*

엿새 째 아침은 소요와 함께 시작되었다. 창문을 열자 웅성대는 소리가 한층 크게 들렸다. 더불어 서우드의 강렬한 아침 햇살도 쏟아져 들어온다. 이 동네는 아무리 생각해도 햇빛이 너무 밝다.

“무슨 일이 일어났나요?”

램의 물음에 의사가 대답했다.

“대단한 일은 아니에요. 이스턴의 자두 농장주가 땅을 팔기로 결정해서 자두파이 애호가들이 화가 났습니다. 이미 나무를 모두 베어버렸어요.”

“그럴 수가. 어째서 그런 짓을 했을까요.”

“대단한 이유야 없겠지요.”

의사는 창 밖으로 몸을 내밀고 사람들 무리를 바라보았다. 뒤꿈치를 내리자 배가 창틀에 걸려서 덜컥 소리를 냈다. 침대 옆으로 돌아온 그는 시큰둥한 얼굴로 말했다.

“그건 그렇고 당신은 나를 무능한 의사로 만드는군요. 얼굴색이 아주 안 좋아요. 밥을 먹긴 하는 겁니까? 잠은 자고 있어요? 낮에는 무슨 생각을 하지요? 티어드 씨, 단지 다리를 다친 것뿐이라는 사실을 잊으면 안 됩니다.”

그는 만년필을 꺼내서 능숙한 솜씨로 차트를 채워나갔다. 은색 필기구와 안경과 청진기가 빛을 받아 반짝반짝 빛이 났다. 의사는 반짝반짝 빛나는 손수건을 꺼내 땀을 닦았다. 반짝반짝 빛나는 땀. 그리고 마지막으로 산책을 좀 하는 게 좋겠소, 하고 충고했다.




*

램 티어드는 의사가 말한 대로 산책을 하기로 마음먹었다. 어깨 아래 목발을 끼우고 아래를 향해 천천히 내려간다.

“아니오. 항상 나쁜 건 하인들이오. 그들이 마법사의 말도 전하지 않고 기사의 말도 전하지 않고 영주의 말도 마님의 말도 전하지 않자 결국에는 모두 질려서 대충 이야기를 끝내기로 했소.”

604호 환자의 말.

“사실은 따님이 춤바람이 났습니다. 빨간 구두가 문제였지요.”

501호 환자의 말.

“그건 영업 마법사였습니다. 기사가 변변치 않았어요. 아무래도 그냥 파혼시키기는 무안하니까요.”

402호 환자의 말.

“마님이 문제였다는군요. 매일 매일 따님에게 결혼 따윈 하지마라, 결혼 따윈 하지 마라, 이렇게 말해서 따님은 결혼하는 게 싫어졌대요.”

305호 환자의 말.

“아닙니다, 아니에요. 영주의 딸이 아니고 공주였습니다. 사실 유령의 정체는 영주입니다.”

206호 환자의 말.

1층까지 내려온 램은 대기실에 앉아서 사람들이 약국 앞에 줄지어 있는 모습을 바라보았다. 그때 환자복을 입은 꼬마가 그의 앞으로 다가왔다. 오른쪽 눈에 안대를 하고 있다. 그는 어른스럽게 한숨을 쉬며 청년을 내려다보았다.

“유령 이야기를 묻고 다닌다는 사람이 바로 형인가요?”

“그래.”

“그럼 잘 들어요. 이제까지 들은 이야기는 모두 틀렸어요. 영주와 마님은 밤마다 싸웠어요. 비싼 화병을 집어 던지면서 서로를 향해 욕을 했어요. 누나는 그게 지겨워서 가출한 거예요. 남부끄러웠기 때문에 마법사도 만들어내고 기사도 갖다 붙여 보았을 뿐 사실 아무 일도 없었어요.”

꼬마는 안대를 들어 파랗게 멍든 눈을 보여주었다. 그때 마침 약국 앞에서 소동이 일어나 대기실에 있던 환자들이 모두 앞으로 몰려나갔다.




*

여기, 유령에게 신경 쓸 겨를이 없는 한 사람. 네 시부터 다섯 시 사이 라비는 스무 번 정도 시간을 확인했다. 시계 바늘은 점점 느려지더니 나중에는 거의 움직이지 않게 되었다. 그 사이 소년은 동료의 검을 손질했다. 무거운 쇠붙이는 그 순간 더욱 둔하고 비대해져서 한 손으로 움직일 수도 없었다. 분투 끝에 검을 제자리에 돌려놓은 라비는 시계를 보았다. 창가로 달려가서 골목을 살피자 모자를 쓴 호퍼 베빗이 보였다.

이 날은 전처럼 운이 좋지 않아서 방으로 올라가던 두 사람, 정확히 한 사람과 고양이 한 마리는 집주인과 마주치고 말았다. 모자를 누르며 라비 뒤로 숨는 고양이 소년을 보고 노부인이 말했다.

“벌써 친구를 만들었나요? 세상에, 기특하기도 하지.”

그녀는 티테이블을 들고 그들을 따라 올라왔다. 부인이 나가자 호퍼 베빗은 창백한 얼굴로 이렇게 물었다.

“제, 제가 고양이처럼 보이지 않습니까?”




*

갑자기 쳐들어온 티타임을 물리친 것은 참된 고양이 호퍼 베빗이었다. 그는 얼른 차를 털어 넣고 이야기를 시작했다. 고양이 소년은 이 날 그 어느 때보다 말이 많았다. 쏟아지는 호퍼 베빗의 말. 어제는 역시 집에 있었다. 하루 종일 주인과 놀아야했다. 사람과 노는 것, 특히 주인과 노는 것은 지루하기 짝이 없는 일이지만 착한 고양이마냥 얌전하게 굴었다. 요즘 주인의 기색이 심상치 않다. 우울하고 신경질적으로 변해서 눈 아래는 움푹 패이고 말았다. 기본적으로 정이 많은 고양이인 호퍼 베빗은 아침 일찍 일어나서 정원 청소를 했다. 정원에는 사계절의 꽃들이 모두 피어 있고, 놀라지 마라, 자두나무도 한 그루 있다. 장미, 사루비아, 아마릴리스, 제라늄, 이런 꽃들 하나하나 손으로 어루만지며 물을 주었다. 주방에 난 창에서 버터와 통후추를 넣은 크림 스프 냄새가 새어나왔다. 그 옆에는 갓구운 호밀빵과 땅콩 크림이 놓여있다. 당신, 이런 과자를 알고 계세요? 흐트러진 낙엽처럼 여러 겹으로 층진 파이 위에 커스터드 크림을 바르고 산딸기를 올린 다음 다시 파이를 얹고 또 크림을 바르고 산딸기를 올리고 다시 파이를 얹는 그런 과자. 그렇게 몇 층이나 쌓았습니다. 호두를 잔뜩 넣은 쿠키도 만들었어요. 이어서 그가 붉은 와인 소스에 재운 스테이크에 대해 말하려고 하자 라비는 어깨를 움츠리며 입을 열었다.

“그만해, 호퍼 베빗. 대체 무슨 일이 있었지?”

“일, 아무 일도. 주인님은 이제 지쳤어요. 아주 먼 곳으로 가서 다신 돌아오지 않을 겁니다.”

고양이는 넋 없이 중얼거렸다. 그리곤 여태껏 지켜왔던 침착함을 잃고 방을 서성이기 시작했다. 긴 코트 사이로 얼룩무늬 꼬리가 살랑거렸기 때문에 라비는 상황이 정말 심각한지 어떤지 알 수 없게 되었다.

그는 일단 호퍼 베빗, 하고 이름을 불러보았다. 고양이 소년은 하얀 장갑을 낀 손으로 미간을 세게 문질렀다.

“주인님이 가시면 저도 떠나야합니다. 이제 아가씨를 볼 수 없어요. 아니, 괜찮아요. 그건 괜찮지만 한 번 정도는 꼭 만나고 싶습니다. 시번 씨의 도움이 필요해요.”

“나의?”

뜻밖의 전개에 소년은 성급하게 되물었다. 그러곤 곧 입을 다문 채 탁자 끝을 응시했다. 그 동안 호퍼 베빗은 창가에 서서 라비가 그랬듯 바깥을 내려다보았다.

“진심이야? 나에게 이런 부탁을 하고 싶지 않을 텐데.”

“아, 물론 싫어요. 하지만 달리 방법이 없습니다. 이제 고양이라는 것을 들키면 안 되니까요.”

지친 얼굴로 그의 말을 듣던 라비는 인상을 쓰며 대꾸했다.

“설마 들키면 다신 사람이 될 수 없다, 그런 건 아니겠지.”

호퍼 베빗은 사레에 걸렸다.




*

정체를 아는 사람이 셋이면 마법이 풀린다는 것은 상식이다.




-왕실 마법사의 핸드북 中-




*

이 때 라비는 드물게도 감정에 억눌려 말했다.

“그러니까 이런 이야기지. 그 애는 여기 주인하고 달라서 대면하자마자 네가 고양이인 것을 알아차릴 거야. 그러면 주저하지 않고 고양이라고 말할 거야. 그게 끝이야. 왜 그런 짓을 하려고 하지?”

“게다가 그 애는 결코 네 마음을 받아주지 않아. 모르는 척 하지마.”

그리고 힘겹게 손을 뻗어서 호퍼 베빗의 어깨를 잡았다. 처음으로 고양이의 몸에 닿은 것이었다. 의외로 말랑말랑하고 부드러웠기 때문에 저도 모르게 손에 힘을 주고 말았다.

“호퍼, 이런 짓은 그만 두자.”

고양이는 위로하듯 그 손을 어루만지며 대답했다.

“나는 합니다. 그리고 완전한 고양이로 돌아가겠습니다.”




*

그날 저녁 라비는 의사의 집에 찾아갔다. 나나는 집에 있었다. 숙제를 하던 중이라고 했다. 그는 창가에 서서 나오지 말라고 손짓하고 밤에 다시 오겠다고 말했다. 그러니까 오늘 새벽에. 소녀는 놀라는 기색도 없이 고개를 끄덕이고 2층으로 사라졌다. 집으로 곧장 내려가던 라비는 마음을 고쳐 병원에 가보았으나 병실은 비어 있었다. 그 사이 돌아다닐 수 있을 만큼 좋아진 걸까, 이렇게 생각하자 기분이 이상해져서 더 이상 그 곳에 있을 수 없었다. 병실은 부재중이라기보다 습격을 받은 것 같았다. 아주 깨끗했기 때문에 더욱 이상했다.




*

시간이 더디 간다. 시계를 바라볼 때마다 약속 시각과의 갭이 커지는 느낌이었다. 라비는 완전히 녹초가 되어서 침대 위로 쓰러졌다. 손가락도 움직이기 싫었다. 이대로 점점 뒤로 밀려나서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식사 생각이 없다고 말하자 노부인은 순순히 고개를 끄덕이고 방에서 나갔다. 문이 닫히자 귀에서 윙 하는 소리가 날 정도로 조용했다. 괴이쩍은 느낌에 벌떡 일어나서 주변을 둘러보았지만 역시 아무도 없었다.




*

소년은 자정 경에 눈을 떴다. 잠이 든 것이었다. 열려진 창으로 들어온 바람이 방 안을 축축하게 맴돌고 있었다. 공기가 몇 배나 무거워져서 숨을 쉴 때마다 몸이 가라앉는 것 같았다. 그는 비틀거리는 걸음으로 창가에 섰다. 호퍼 베빗은 아직 오지 않았다.

머리가 안개에 잠긴 것 같다.

라비는 인상을 쓴 채 방 안을 걸어다녔다. 마루바닥이 삐그덕거렸다. 거북하고 과장된 소리였다. 걸음을 멈추자 이번에는 바깥에서 묘한 속삭임이 들려온다. 달그닥거리는 소리, 부서지는 소리. 무슨 일이 일어났는가. 조심스럽게 방문을 밀고 나가 난간 아래를 내려다보니 주방에서 나오는 불빛으로 거실이 희끄무레하게 빛나고 있었다. 계단을 향해 발을 내딛었다. 그러다가 문득 멈춰 서서 얼굴을 한 번 쓸어내렸다. 이번에는 고양이처럼 뒤꿈치를 들었다. 주방 앞. 소년은 선뜻 안을 들여다보지 못하고 망설였다. 그 때 낄낄대는 소리가 들렸다. 머리채를 잡힌 것처럼 안으로 고개를 들이밀자 노오란 불빛 아래 노출된 주방의 정경이 한 눈에 들어왔다. 주방에 있는 것은 노부인 혼자였다. 그녀는 입을 가리고 웃다가 무표정으로 돌아가서 머리를 손질했다. 그리고 커다란 비닐봉지 안에 음식이 담긴 접시를 버리기 시작했다. 벌어져 있는 봉지 입구에서 검붉은 액체가 흘러나왔다. 이상한 덩어리도 섞여 있었다. 구역질나는 광경이었다. 실제로 라비는 입을 틀어막았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방 안은 달콤하고 고소한 냄새로 진동했고 불안한 활기와 유쾌함으로 포화 상태였다. 식탁 위에는 아직도 음식들이 산만큼 쌓여 있었다.

소년은 천천히 그곳에서 물러났다. 2층으로는 가지 않는다. 현관문을 연다. 넋이 나간 채 정원을 가로지르던 그는 무언가에 걸려 넘어졌다. 넘어진 채로 뒤를 돌아보자 병원으로 찾아와 말을 걸었다던 그 집이 배가 뒤집어지도록 웃고 있었다.




*

그 병원. 새벽 두 시. 5층 끄트머리 병실. 두 남자가 탁자를 가운데 두고 마주앉아 있다. 한 사람은 턱이 가슴에 닿도록 고개를 숙인 채였다. 맞은편에 앉은 사람은 허리를 반듯이 세우고 그를 바라보고 있다. 그가 낮은 목소리로 무언가 이야기하자 고개를 숙인 남자가 입을 열었다.

“이런 꿈을 꿉니다. 절벽에서 떨어지는 꿈. 그 절벽이에요. 낮아요. 위험하지도 않아요. 그런데 나는 계속 거기서 발을 헛딛고 떨어지고 마는 거예요. 그렇게 낮은 절벽인데 일단 떨어지면 바닥에 닿지 않아요. 그러면 계속 실패했다, 실패했다, 하고…….”

남자, 침묵.

“오늘은 의사 선생님의 권고를 따라 산책을 했습니다. 이 병원의 환자들, 유령을 만난 사람은 아무도 없지만 모두 유령 이야기를 알고 있었어요. 그런데 내용이 제각각이어서 모두 듣고 나자 뭐가 뭔지 알 수 없게 되었습니다. 대체 그 마법사는 왜 유령이 되었을까요?”

“당신, 그런 이야기에는 신경을 쓰지 않는 게 좋아요. 왜 그런 건 묻고 다니는 겁니까?”

남자, 침묵.

“기분은 어때요? 식사는 했습니까?”

“입맛이 없어요. 물에서는 비린내가 나요.”

남자, 침묵.

“물에선 비린내가 나고 숟가락을 물면 피가 배어나오는 것 같고 과일은 시고 채소에서는 비냄새가 났어요. 들어보세요, 나는 실패했어요. 이것만은 잘 할 수 있다고 믿어왔던 일에서, 그것도 공공연하게 실수했어요.”

남자가 대답했다.

“그렇게 골몰하지 마세요. 당신은 열심히 했습니다. 누구나 실패를 합니다. 그러나 곧 기억에서 사라지는 순간이 옵니다.”

램은 고개를 들어 상대를 바라보았다. 이때 그의 눈에서는 이채가 감돌았다. 그는 적당한 단어를 찾으려는 듯 입술을 달싹거리더니 이내 기묘하게 열성적인 목소리로 말했다.

“잊는 순간? 그렇지 않아요. 실패는 성공보다 강합니다. 결코 성공의 씨앗으로 존재하는 게 아니에요. 만약 그런 일이 생긴다면, 눈부신 성공을 거두고 만인의 앞에서 웃을 수 있게 되는 날이 온다면, 그런 영광된 순간에 마지막으로 내 머릿속에 떠오르는 것은 언제나 과거의 대실패일 것이고 나는 결국 입술을 깨물며 고개를 떨구고 말 겁니다. 그게 진실이에요.”

남자는 자세를 고치고 램을 바라보았다. 그러더니 갑자기 웃음을 터뜨렸다.

“맞습니다, 그럴지도 모르겠습니다.”




*

“그런데 아직도 유령 이야기가 궁금하십니까? 사실 전말을 알고 있는 사람이 이 병원에 있습니다. 어때요, 재미있는 사람이에요.”




*

라비는 정원을 빠져나와 의사의 집으로 달렸다. 뒤늦게 딕슨 씨가 집에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이미 방도가 없다. 집에 도착한 그는 숨을 삼키고 창가를 기웃거렸다. 얼굴을 유리창 가까이 붙여 소파에 앉아 있는 희미한 형상을 확인한다. 창문을 두들기자 그 형상은 주저 없이 자리에서 일어나 현관으로 향했다. 자물쇠 푸는 소리가 들린다. 그쪽에서는 소년이 보일 리가 없는데 그녀는 작은 아버지는 오늘 안 들어오셔, 하고 그를 불렀다.

라비는 현관 앞에 서서 하얀 옷을 입은 나나를 바라보았다. 하얗고 하얀 그 옷. 어깨에 두른 카디건 위로 곱슬거리는 금발이 제멋대로 늘어져 있었다. 소년이 머뭇거리는 사이 그녀는 수면등을 가지고 내려와 거실을 밝혔다. 병원에서 거실이 보이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그러고도 마음이 놓이지 않는지 단단히 커튼을 쳤다. 겁먹은 기색은 조금도 없었다. 실제 의사 선생이 나타났다고 해도 전혀 놀라지 않을 것 같았다.

“이제 됐어, 시번. 무슨 일이니?”

그녀는 소파에 몸을 기댄 채 물었다. 얇은 치마 밑으로 덜 여문 무릎이 드러났다. 라비는 의미 없이 쿠션을 만지막거리며 대답했다.

“누가 널 만나고 싶어해. 그러니까 밤마다 바스락거리던 그 애 말이야. 놀라지 마. 위험한 일은 아니야.”

나나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소년을 바라보았다. 호퍼 베빗이 있었다면 분명히 이런 말을 했을 것이다.

그녀는 나의 여신입니다.




*

“어디 가는 겁니까?”

“유령 이야기를 들으러 갑니다. 목발은 필요없어요. 오랜만에 마법사인척 해볼까.”

이케아는 유쾌한 목소리로 말하며 램을 잡아끌었다. 두 사람은 병원 복도를 나아갔다. 주변이 조금씩 변하기 시작하더니 더 이상 병원이라고 할 수 없는 곳이 나타났다. 매끈한 타일 대신 요철과 균열로 뒤덮인 오래된 벽이 통로를 감싸고 있었다. 곰팡내도 감돌았다. 램은 계속 이케아를 다그쳤지만 아무 대답도 들을 수 없었다. 그리하여 소름이 돋을 정도로 추운 곳에 도착했을 때, 마법사는 걸음을 멈추고 아무 말 없이 전방을 가리켰다. 그 곳에는 흰 가운 차림의 의사가 있었다. 의사 역시 이쪽을 알아차리고 야릇한 표정을 지었다.

“티어드 씨로군요. 놀랄 만한 전개이지만 저는 어쩐지 당신이 여기 올 것 같은 예감이 들었습니다. 유령 이야기를 묻고 다니신다고요? 환자들은 아무 것도 모릅니다. 자기가 생각하고 싶은 대로 말하는 것뿐이지요.”

딕슨 씨는 흥분한 듯 빠른 어투로 말했다. 그의 모습을 보던 이케아는 희미한 미소를 띤 채 램의 뒤로 물러났다. 의사는 마법사가 있는 것을 전혀 모르는 눈치였다. 그는 손수건을 꺼내 안경을 닦고 조형물이 사라진 대리석 받침대에 걸터앉았다.

“그 이야기는 약 150여 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영주의 이야기는 사실이에요. 그의 성품을 확인할 방법이 없지만 부인과 딸은 있었습니다. 그 소녀는 열일곱이 되던 해 마법사와 사랑에 빠지게 되지요. 오, 놀라지 마세요. 실수한 게 아닙니다. 마법사의 짝사랑이 아니었어요. 마법사를 우습게보면 안 됩니다. 그들은 편지를 보내고 노래나 부르는 족속이 아니에요. 게다가 숲 속의 마법사는 풋내기도 아니었습니다. 어쩌면 영주의 하인이 성실했던 건지도 모르지요. 영주는 이 사랑에 꽤 만족했던 것 같아요. 마법사를 사위로 둬서 나쁠 건 없으니까요. 둘의 관계에는 거칠 것이 없었어요.

자꾸 의아한 얼굴을 하시는군요. 어떻게 이런 걸 알고 있느냐, 그런 거지요. 무엇 하나 숨길 생각은 없습니다. 앞으로 등장할 기사, 아, 물론 기사도 있었어요, 그 기사가 저희 고조부가 되십니다. 놀라시는군요. 놀랄 만한 일이에요.

당시 기사의 가문은 세도가였습니다. 그는 서우드를 통해 남쪽 지방의 별장으로 가려던 참이었어요. 그곳에서는 정혼자가 기다리고 있었지요. 서우드까지 올라오자 밤이 되었고 그는 위풍당당하게 성으로 찾아가 하룻밤 묵어가겠노라고 말했습니다. 그날 저녁은 성찬이었습니다. 영주의 가족은 모두 나와 기사를 환영했고 소녀도 물론 그곳에 있었어요. 사랑을 하는 열일곱의 아름다운 아가씨. 기사가 그녀를 만난 겁니다.

생각해보면 그것을 사랑이라고 해도 좋을는지. 격정이라고 할까, 아니, 광기 같은 것이었지요. 맞아요. 기사는 일견 미친 것 같았어요. 그는 별장에 가려던 계획을 취소하고 성에 머물며 몇날 며칠 소녀에게 구애했습니다. 그럴수록 아가씨는 기사가 싫어졌어요. 마지막에 그녀가 무슨 말을 했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당신은 같은 사람은 최악이라고 했을지도 모르지요. 일주일째 되던 날 기사는 소녀를 납치해서 성을 빠져나왔어요. 일대의 센세이션이었지요. 기사의 명예와 가문의 영광이 한순간에 날아갔어요. 그 뿐만이 아닙니다. 기사는 소녀를 협박했고 그녀가 끝까지 거절하자 어설프게 배운 마법으로 그녀에게 저주를 걸었어요. 기사의 가족들이 그를 찾았을 때는 이미 모든 일이 끝난 상태였어요. 그들은 마지막 남은 권력으로 영주를 추방시키고 성을 사들였습니다. 아가씨는 성 지하에 숨겨버렸지요. 각색된 이야기가 세상에 퍼져나갔어요. 나쁜 마법사와 저주에 걸린 공주. 이 편이 훨씬 그럴싸하지요. 허나 진짜 이야기는 아니었습니다.“

입을 벌린 채 그의 이야기를 듣던 램이 물었다.

“그, 그래서 기사는 결국 어떻게 되었습니까?”

“기사? 그 기사! 그는 정혼자와 결혼해서 아들딸을 낳고 잘 살다가 어느 날 갑자기 다리 위에서 뛰어내렸어요.”




*

그러나 나는 목숨을 걸고 그대를 사랑했소.




*

노크 소리가 들리자 현관으로 달려 나간 것은 라비였다. 호퍼 베빗의 등장이다. 그는 모자도 망토도 벗어버린 가벼운 차림으로 날아오르듯 들어왔다. 당혹스러워하는 소년을 향해 가볍게 고개를 숙이니 보드라운 귀가 쫑긋거렸다. 나나는 거실에 서서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무슨 이야기를 할 수 있을까. 호퍼 베빗은 그녀를 향해 정중하고 기품있는 동작으로 인사를 했다. 고양이의 인사를 받은 소녀는 밤중에 난 수상한 소리, 갑작스러운 방문, 이 모든 것의 단숨에 이해했다는 듯 우아하게 미소지었다. 막간의 침묵. 호퍼 베빗은 감격에 젖어 거의 체념한 목소리로 말했다.

“당신은 얼마나 아름다운 모습을 하고 계신지 모릅니다.”




*

“그럼 이 아래 그 아가씨가 잠들어 있겠군요.”

램은 기괴한 마법 도구로 막혀 있는 계단을 가리키며 물었다. 의사는 손수건으로 땀을 닦았다. 그들이 있는 곳은 바깥보다 5도 정도는 추웠는데도 그는 연신 땀을 흘렸다. 그럴 때마다 조금씩 늙어가는 것 같았다. 의사는 램을 지긋이 바라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여태껏 침묵을 지키고 있던 이케아가 웃음을 터뜨렸다.

“이보게, 딕슨. 나에게도 거짓말을 하려는가? 그게 무슨 소용이 있지?”

그러자 대리석 위에 앉아 있던 의사는 벌떡 일어서 주위를 둘러보았다. 몇 번이나 휘청거린 후 마침내 마법사가 있는 쪽을 바라본 그는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소리쳤다.

“이케아!”

“그렇게 소리 지르지 말게. 거짓말쟁이인 자네로서는 꽤 분투하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역시 어쩔 수 없군. 왜 사실대로 말하지 않는 건가. 이 분은 들을 만한 권리가 있어.”

“이케아, 빌어먹을 마법사! 잘도 그런 말을 지껄이고 있군! 사실 모든 문제의 원인은 자네가 아니었던가? 티어드 씨, 이자가 바로 그 마법사요. 그때, 그러니까 기사가 소녀를 납치했을 때 자네는 충분히 그녀를 되찾아 올 수 있었어. 그런데 그렇게 하지 않았지. 왜일까? 그녀의 마음이 변했을까봐 무서웠나? 아니면 다른 남자를 따라나선 여자는 믿을 수 없었나? 이도저도 아니면 단지 싫어졌던 건가? 마치 저 바허씨가 자두를 잘라버리듯이. 어쨌든 자네는 오지 않았어. 기사가 종국까지 기다리고 있던 것은 소녀의 사랑이 아니라 자네였네. 자네가 와서 자신을 죽이고 소녀를 되찾아가길 바랬지. 그럼 그의 사랑은 진짜가 되니까. 그런데 자네가 오지 않았기 때문에 모처럼 낸 용기, 그가 명예와 가족을 버리고 또 목숨을 버릴 각오로 낸 용기가 한낮 비열한 행동으로 전락하고 말았어. 이케아, 이게 자네가 한 짓일세. 자네가 가장 비열한 인간이었네.”

젊은 마법사는 쏟아지는 비난에 아랑곳하지 않고 물었다.

“그리고 자네는 뭘 했는가?”

창백하게 질린 의사는 혼신의 힘을 다해 손수건을 놀렸다. 한층 차분해진 목소리로 이케아가 말을 이었다.

“폭로하려는 게 아니야. 도와주려고 하는 거지. 자네는 이 성에서 태어나서 그 이야기를 듣고 자랐네. 물론 각색된 쪽이지. 웬만큼 나이가 찬 후에 북쪽 지방으로 가서 의학을 공부했어. 그 때 우연히 마법을 배울 기회가 있었네. 자네는 꽤 소질이 있었지. 의사가 되어 고향으로 돌아온 자네는 성을 개조해서 병원을 만들다가 전설의 장소를 발견했어. 거기에는 물론 잠에 빠진 소녀도 있었지. 기사는, 이름이 뭐였더라, 이제 이런 것도 생각이 나지 않는군. 아무튼 그 남자는 자네 생각처럼 자신의 용기가 비열함으로 남게 내버려두는 자는 아니었네. 그러니까 진짜 이야기가 저 방에 숨겨져 있었지. 자네는 그걸 봤어. 동시에 잠이 들어 있는 소녀에게 사랑을 느꼈네. 그리고 자네의 선조가 했듯이 어설픈 마법으로 그녀를 깨우기에 이르렀지. 허나 그 뿐이었어. 존 딕슨에게는 전설의 아가씨와 결혼해서 살아나갈 용기가 없었네. 왜일까? 세상의 시선이 무서웠나? 아니면 그녀가 마녀이기라도 할까봐 겁이 났나? 아무튼 자네는 도망쳤어. 이젠 말해보게.”

공포에 질린 듯 이빨을 딱딱 부딪치던 의사는 가까스로 대답했다.

“뭘 말인가. 그녀는 죽었을 거야.”

“딕슨.”

“정말이야! 대체 내가 뭘 기억해야한다는 거지?”

이케아는 연민에 가득 찬 목소리로 말했다.

“우리가 사랑했던 여인은 지금 남국에서 일광욕을 즐기고 있네. 물론 자네 형과 말이지. 이걸 기억해야 하네. 결국 나를 깨운 것도 자네가 아닌가?”




*

마법사 이케아, 그가 고소를 머금은 채 램에게 말했다.

“유령이라는 것이 얼마나 괴로운 직업인지 아십니까? 과부 노인이 만든 음식을 먹어주어야 하지요, 양부를 죽이고 도망친 여자를 위로해야 하지요, 짝사랑에 빠진 청년의 하소연을 들어야하지요, 무책임한 부모에게 학대당하는 아이를 돌봐야하지요. 그리고 그 자신들이 잊고 싶어하는 일까지 모두 기억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지쳤어요. 저는 오늘 밤 고양이와 함께 이곳을 떠나겠습니다.”




*

“그래서 어떻게 됐어?”

“그게 끝이야. 나나는 호퍼 베빗에게 고마워 고양이 군, 하고 말했어. 호퍼 베빗은 완전한 고양이가 되었지. 얼마 지나지 않아서 형과 마법사가 들이닥쳤어. 그 후로는 형도 보았잖아. 오히려 내가 도망쳤지. 마법사는 질색이니까.”

“아, 그랬지. 그러고 나서 이케아 씨는 고양이를 안아들고 나나 양에게 마법을 걸었어. 물론 평범한 수면 마법이야. 그 아가씨는 곧 잠이 들었어. 깨어나도 무슨 일이 있었는지 기억하지 못할 거야. 그것만큼은 이케아 씨가 가지고 갔으니까.”

두 사람, 즉 램과 라비는 이스턴으로 내려가는 길을 걷고 있었다. 램은 목발을 집고 있다. 아침이 되자 이케아의 마법과 서우드의 저주가 동시에 풀린 듯 그는 평범한 골절 환자로 돌아갔다. 이제 썩 익숙해진 것 같다. 그들은 느긋한 걸음으로 자두 농장 부지로 들어섰다. 아침부터 구경꾼과 일꾼들이 북적이는 가운데 여기저기서 나무가 넘어가는 소리가 들렸다. 한 편에서는 서우드의 자두 파이 애호자들이 데모하는 소리가 들려온다. 그 사이를 아슬아슬하게 피해나가던 램은 문득 걸음을 멈추고 물었다.

“그런데 라비. 우리가 그렇게 빨리 가진 않았을 텐데. 호퍼 베빗이 고양이가 되고 난 다음에 무슨 일이 있었지?”

“일? 아무 일도. 그보단 이제 슬슬 이케아 씨의 스크롤을 사용하는 게 어때. 자두나무는 이 정도 봤으면 충분해.”

램은 의심스러운 얼굴을 한 채 동료에게 낡은 양피지를 건넸다. 소년은 두루마기를 읽어 본 후 절취선을 따라 찢었다. 밝은 빛이 두 사람을 감싸 안는다. 잠시 후 그들은 자두나무와 전설의 도시를 빠져나와 낮선 곳에 서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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