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밀번호를 잊어버리셨나요?

단편 요즘 이러진 않습니까.

2004.09.03 20:3609.03

“없어졌어요!”

내 말에 할아버지는 시큰둥하게 대답했다.

“뭐가?!”
“뭐라니?! 없어졌다고요! 《어릿광대》가 말이에요!”
“허! 그거 참 안됐구나.”

할아버지는 내 등을 토닥이곤 책에 다시 눈을 옮겼다.

“그 말 밖에 할 말 없어요?”
“왜?! 어릿광대는 네 거지 이 할애비게 아니라구!”

할아버지는 책갈피로 표시한 뒤 책을 덮으며 말했다.  

“그래도! 할아버지가 어릿광대하고 더 많이 놀았잖아요!”

내 말에 할아버지는 바로 코웃음 쳤다. “헤헹!”

“그래서 나간 걸 수도 있지! 새파랗게 어린놈이 옆에 있는데 쉰내 나는 늙은이하고 같이 있어봐! 나라도 당장 뛰쳐나가고 말지. 캬아아아악!”
“아악! 창 밖에 뱉지 말고 화장실에다 뱉어요!”

내 비명에 할아버지는 화장실에 가래침을 퉤! 뱉고는

“하여간 요새 어릿광대 표정이 좋지 않기는 했지.”

할아버지의 말에 나는 얼른 물었다.

“좋지 않았다니요?”
“아! 그걸 내가 어떻게 아냐고!” 소리친 할아버지는 지팡이와 중절모를 꺼내셨다.
“에잉, 노인정 좀 다녀오마. 그런데 오늘이 아, 거 갑자기 기억 안 나네. 그래, 그 초콜릿 주는 날. 발렌티논가 뭔가 그 날 맞지?”
“…발렌타인데이요. 누가 초콜릿 준데요?”

내 물음에 할아버지는 낄낄 웃고는 집을 나섰다. 나는 초라해져서 어릿광대를 찾아 집안을 뒤지기 시작했다. 장난감 통에는 보이지 않았고, 혹시 목욕을 좋아하니까 욕실에 가보아도 없었다.
한동안 그렇게 찾다가 나는 잃어버린 줄로만 알았던 팽귄 인형을 찾았다.

“어라? 이게 여기 있었네?”  먼지가 잔뜩 엉겨 붙어 까만 회색빛을 띄고 있었다. “진짜 오랜 만이다!”
“그렇지.”

팽귄이 말했다.

“무려 11년 만이지! 그때 너는 일곱 살이었지!”
“나도 알고 있어.”

나는 우물쭈물하며 말할 거리를 찾지 못하다. 그동안 어디 있었는지 궁금해 물었다.

“그동안 어디에 있었던 거야?”

내 물음에 팽귄은 바로 빽! 소리를 질렀다.
  
“어디에 있었냐니! 나는 처음부터 여기에 있었어!” 팽귄은 씩씩거렸다. “네가 나를 잊어버려 놓고는 왜 내 탓으로 돌리는 거니!”

그 성난 목소리에 나는 미안해져서 순순히 사과했다. “응, 미안해.” 그러나 팽귄 인형은 더 이상 이야기 하지 않았다. 나는 팽귄인형을 빨아다 내 방에서 가장 잘 보이는 곳에 놓아뒀다. 그런데 생각해보니 이 팽귄인형이 있던 곳은 7 살 당시의 내게 가장 눈에 잘 띄는 곳이었다는 거다.

나는 어릿광대를 한참이나 더 찾다 포기하고는 컴퓨터 옆에 앉았다. 주위가 어두워 스탠드를 켰다. 그리고 다소곶이 앉아있는 어릿광대를 발견했다.

“한참 찾았잖아! 도대체 어디 있었던거야!”
어릿광대는 고개를 갸웃하더니 바로 대답했다.
“어디에 있었냐고요? 저는 처음부터 여기에 있었죠. 그런데 이 컴퓨터라는 놈은 도무지 말을 할 줄 모르는 군요. 아무리 말을 걸어도 대답하지 않아요. 게다가 모든 장난감이 저에게 말 한번 걸어보려 발악인데 이 녀석은 말하는 법도 모르는지 제게 인사말하나 건네지 않는군요!”

그리고 잠시 생각하는 듯 고개를 다시 갸웃.

“그런데 주인님은 이 녀석하고 하루 종일 이야기를 하잖아요? 아니 같이 논다고 해야 하나요?! 저는 이해가 가지 않아요! 이런 재미없는 녀석의 뭐가 좋아서 주인님이 그렇게 열심인 줄 모르겠다니깐요!”

나는 순간 발끈했다.

“컴퓨터가 재미없다니! 컴퓨터는 굉장히 재밌다고. 이리 와봐,” 나는 어릿광대를 집어 내 옆에 앉혔다. “우선 컴퓨터를 사용하려면 전원을 넣어 줘야해.”

전원을 켜자 쿨러가 돌아가는 소리가 요란하다. 위이잉 하는 그 소리에 어릿광대는 깜짝 놀란 표정을 지었다. “이런! 컴퓨터는 지금까지 잠을 자고 있었나요?”

“뭐 그렇다고 할 수 있겠지만, 실제로 이 녀석은 말을 할 수는 없다고. 그리고 이야기를 나누는 게 아니라. 쌍방향 네트워크 시스템이라고 아니? 흠, 모를 수도 있겠네. 그러니까 이 컴퓨터를 이용해서 다른 사람들하고 이야기를 하는 거야. 그리고 여러 가지 정보를 접한다던가. 말이지. 정말 재밌다고.”
“왜요?”
“음, 이건 좀 어려울지도 모르겠구나.”
나는 얼른 게임을 틀었다.
“너 게임 좋아하니?”
“게임이요? 컴퓨터가 보여주는 그 이미지 말인가요?”
“그래. 이거 말이야. 이 컴퓨터로 조작해서 하는 게임인데 굉장히 재밌다고.”
나는 어릿광대를 집어 키보드 앞에 내려놓았다.
“한번 해보지 않겠어?”
“음, 싫어요.” 어릿광대는 좋지 않은 표정으로 대답을 했다. 그러곤 웃으면서.

“그러지 말고 저와 이야기해요. 컴퓨터란 놈은 입이 없는 건지 혀가 없는 건지 눈도 없는지 저도 주인님도 알아보지 못하는 것 같으니까요. 아주 재미없는 녀석이죠. 네. 그래서 제가 재미있는 이야기를 찾아냈어요. 조그만 언덕의 조그만 통나무집의 조그만 테이블의 어느 조그만 어릿광대의 이야기죠!”

나는 어릿광대가 게임에는 관심이 없자 짜증이 나기 시작했다. 그래도 꾹 참고.

“그래. 그건 나중에 듣기로 하고 너도 한번 해 봐? 정말 재밌다고.”

나는 억지로 어릿광대에게 게임을 시켰다. 어릿광대는 처음에는 마지못한 듯 키보드를 만지작거리며 게임을 하기 시작했다. 나는 그 모습을 흐뭇하게 바라보았다.

“어때 재밌지?”

어릿광대는 이를 왁 다물고 더 이상 말하지 않았다. 팽귄인형 같았다. 나는 컴퓨터를 끄고 어릿광대에게 말을 걸었다.

“왜 아무 말이 없어?”
어릿광대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나는 어릿광대를 집어 팽귄인형 옆에 놓았다. 곧 할아버지가 오셨다. 할아버지는 뭐 씹은 표정으로 연신 에잉! 에잉 소리를 냈다.

“에잉! 팔봉이 자식이 다 쓸어갔어!”
“쓸어가다니? 뭘?”
“쪼꼬렛!”

나는 잠시 멍하니 있다 어릿광대를 할아버지에게 보여줬다. 할아버지는 어릿광대를 보더니 혀를 찼다.

“이런! 안됐구나. 가엾어 죽겠군! 평소에 그렇게 외로워하더니!”
“저요? 안 외로워요.”
“누가 너한테 말했냐! 어릿광대에게 한 말이지. 쯧쯧.”

할아버지는 어릿광대를 측은하게 바라보다 소리쳤다.

“요 녀석아! 이거 어디서 찾았어!”
“컴퓨터 옆에서요.”
“으이구. 네 녀석이 그럼 그렇지 뭐!”

할아버지는 그렇게 말하고는 방으로 들어가 버렸다. 나는 어릿광대와 팽귄인형을 잡고 흔들었다. 대답해. 대답해. 둘 다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나는 한동안 둘 앞에서 서성데다 침대 속으로 기어들어갔다. 다음날 나는 둘에 대해 까맣게 잊어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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