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밀번호를 잊어버리셨나요?
11

어느새 밤이 되었다. 도플겡어 필립은 여전히 숲속을 서성이고 있었다. 상처는 어떻게든 소매를 찢어 출혈을 막았지만, 이제부터 어떻게 해야 될지 몰랐다. 그저 아무 생각 없이 숲속을 서성일 뿐이었다.

짧은 시간이었지만, 즐겁게, 나름 행복하게 지냈던 잭의 집으로도 돌아가지도 못하고, 그렇다고 그 곳을 떠날 생각도 하지 못하고 그저 숲속을 서성였다.

숲을 서성이다가 잭의 집을 향해 발걸음을 돌려봤었지만, 곧 다시 발걸음을 돌리길 수십 번.. 겨우 용기를 내어 잭의 집 근처로 걸어갔다. 밤이 늦었지만 잭의 집에는 여전히 불이 밝혀 있어 혹시 자신을 기다리는 것이 아닐까 하고 필립은 생각을 했다.

하지만 그 것은 자신만의 생각일거고 생각하고는 다시 발걸음을 돌려 숲속으로 향했다. 하지만 다시 얼마가지 못하고 잭의 집 앞에 서 있는 도플겡어 필립이었다. 한참을 문 앞에 서성이다가 용기를 내어 문을 열었다.

거실에는 불만 밝혀져 있고 아무도 없었다. 그리고 문틈으로 잭의 방에도 불이 켜져 있는 것이 보여 필립은 천천히 그 곳으로 걸어가 문을 열었다. 침대에 잭이 온몸을 붕대로 칭칭 감은 채 누워 꼼짝달싹 못하고 있었다.

눈은 감고 있었지만, 고통스러운 듯 움찔 거리는 모습이 다행히 살아 있는 것 같았다. 그리고 그 침대 옆에 의자를 가져다 놓고 앉아 있는 레이첼의 모습이 보였다.

레이첼은 문소리를 들었지만 고개를 돌리지 않고 누워있는 자신의 아버지를 바라보고만 있었다. 필립이 천천히 그녀의 곁에 가서 섰지만, 그녀는 여전히 고개를 돌리지 않았다.

그렇게.. 긴 침묵이 시작되었다. 그 침묵 속에서 소리를 내는 건 잭의 고통스러워하는 신음 소리뿐이었다. 결국 필립이 먼저 입을 열어 침묵을 깼다.

“미안해..”

하지만 레이첼은 여전히 입을 다물고 아무 말도 하지 않으며 고통스러워하는 잭을 안타까워하는 눈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다시 필립이 침묵을 깨고 말했다.

“이렇게 될 줄은 몰랐어..”
“....”
“원래는.. 여기에 돌아와선 안 되는 건데.. 잭이 걱정되고... 또..”

필립은 그렇게 말하며 레이첼을 바라보았지만, 레이첼은 여전히 움직이지도 않고 말하지도 않았다. 그래서 필립은 하는 수 없이 고개를 푹 숙이며 다시 한 번 미안하다고 레이첼에게 말하고는 다시 입을 다물었다. 다시 한참동안 침묵이 계속 된 뒤, 레이첼이 한숨을 쉬며 침묵을 깼다.

“딱 한번.. 아빠가 정신을 차렸었어.. 그런데.. 널 찾더라.. 네가 괜찮으라고..”

레이첼은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필립을 바라보며 말을 이어갔다.

“그래서.. 나도 네가 걱정이 됐어. 아빠가 말하기 전엔 네가 너무나도 원망스러웠지만.. 아빠가 널 걱정하자 나도 걱정이 되더라고..”

필립은 고개를 들지 못했다. 레이첼은 다시 고개를 돌려 잭을 바라보며 필립에게 물었다.

“도플겡어가 뭐야?”

레이첼에 그 물음에 필립은 가슴이 찢어질 것만 같은 고통을 느꼈다. 하지만 레이첼에 물음에 대답했다.

“인간이 아니야.. 아마.. 괴물일거야.. 난.. 지금은 이름이 기억나지 않지만.. 한 마법사에 의해 만들어졌어. 목적은 하나지.. 진짜를 죽이고.. 대신 그 자의 모습을 베낄 수 있는 도플겡어인 나로 바꾸는 것.. 하지만 그 계획은 실패로 돌아갔고.. 그 마법사는 죽었지..

하지만.. 난.. ‘살아서..’ 계속 그 곳에 머물러 있었어. 몇 년을 그렇게 있었는지 몰라.. 몇 십 년이 됐을 수도 있고.. 백년일지도.. 도플겡어는 상대의 모습을 베끼기 전까진 아무것도 아니야.. 물..? 그냥 물 같은 존재지.. 그래서 기다렸어.. 모습을 베낄 상대를..

하지만 내가 있는 숲은.. 아무도 오지 않았어.. 아무리 기다려도 아무도 오지 않았지.. 그러다가 며칠 전.. 드디어 몸을 손에 넣었어.. 오랜 기다림 끝에.. 내가 만들어진 목적중 하나를 달성한 거야.. 모습을 베끼는 거.. 그래서 나는 너무나도 기뻤지.. 너무나도 기뻐서.. 내가 진짜 ‘사람’인줄로 착각했지.. 하지만.. 오늘에야.. 겨우 내 자신이 도플겡어란 사실에 실감했어..”

묵묵히 필립에 말을 듣고 있던 레이첼이 또 다시 물었다.

“네가 베낀 상대가 이 나라의 왕자.. 필립 왕자인 것 같은데.. 네가 말한 대로라면 그럼 이제 그 사람을 죽이고 네가 왕자가 될 거야?”

필립이 담담하게 대답했다.

“그래.. 나도 처음엔 그렇게 해야 하나 고민도 했었어. 난 그와 똑같아. 그의 기억이라면 나도 있고.. 그가 할 줄 아는 거라면 나도 할 줄 알아. 그의 말투.. 생김새.. 모든 게 똑같지.. 하지만.. 그러기 전에.. 나만의 ‘자리’가 생겼잖아.. 네가 만들어준.. 나만의 ‘자리’.. 그래서 이제 남에 ‘자리’ 따윈 상관없어.. 하지만.. 그것도 이젠..”

필립은 고개를 숙이고 입을 다물었고, 레이첼도 입을 다물었다. 그때 잭이 힘겹게 팔을 들어 올리더니 필립의 팔을 잡았다. 필립도 레이첼도 깜짝 놀라 잭의 얼굴을 바라보며 정신을 차렸는지 눈을 뜨고 있었다.

“무사 했구나.. 필립..”

잭이 힘겹게 말했다. 이렇게 돼서 까지 자신을 걱정하는 잭의 모습에 필립은 울컥했지만, 울음을 참아가며 잭에게 말했다.

“잭.. 잭.. 나 때문에 미안해요,. 나한테 이렇게 까지 안 해줘도.. 사실 난.. ”

자신에 대해 이야기 하려던 필립이었지만 잭이 필립의 말을 가로 막고 말했다.

“네가 누구건.. 난 상관없어.. 단지.. 너라면 레이첼을 행복 하게 해줄 수 있을 것 같아서.. 그래서 난 레이첼의 행복을 깨고 싶지 않아 말하지 않은 것뿐이야..”
“아빠..”

옆에서 듣고 있던 레이첼은 눈물을 뚝뚝 흘리며 자신의 아버지의 손을 꼭 잡아주었다. 잭은 레이첼을 바라보며 말했다.

“레이첼.. 미안하구나.. 너한테.. 계속 미안했는데.. 이제야 말을 하는구나.. 이제.. 이 ‘짐짝’은 잊어버리고.. 필립과.. 행복하게 살아라..”

그렇게 말은 잭은 눈을 스르르 감아버렸다. 레이첼을 잡고 있던 잭의 손도 천천히 힘이 없어지고 툭하고 침대에 떨어졌다. 레이첼은 울었다. 잭의 차가워진 손을 다시 붙잡고 큰 소리로 엉엉 울었다. 그 곁에서.. 필립도.. 소리죽여 울고 있었다.


한편.. 그날 밤. 필립 왕자의 방에선.. 이제 막.. 조엘의 부고가 전해졌다.

“뭐..? 지금 뭐라고 그랬어..?”

필립 왕자는 자신이 들은 이야기를 믿을 수 없어 자리에서 벌떡 일어서며 그렇게 물었다. 조엘의 부고를 전한 남자는 흐르는 눈물을 꾹 참으며 다시 한 번 조엘의 소식 왕자에게 전했다.

필립은 다시 힘없이 주저앉았다. 조엘이 죽었다.. 조엘.. 조엘.. 조엘.. 조엘이 죽었다. 믿고 싶지 않은 말이다. 필립은 도저히 믿을 수 없어, 조엘의 시신이 안치되어 있는 그의 집으로 서둘러 향했다. 그의 집에는 늦은 시간이었지만, 벌써 많은 사람들이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필립도 재빨리 집 안으로 들어가.. 집 가운데 관에 누워있는 조엘을 바라보았다. 지금 누워있는 것은 정말로 조엘이었다. 언제나 자신의 곁에서 잔소리를 하던.. 그 조엘이었다.

그런데.. 지금 조엘은.. 아무 말 없이 관에 누워있었다. 필립은 믿고 싶지 않았지만.. 이게 현실이었다. 조엘은 죽었다.. 늘 자신의 곁에서 자신을 지켜준다던 조엘이 죽어 이렇게 누워있었다.

“조엘이.. 왜 죽은 거냐..”

필립이 멍한 표정으로 물었다. 곁에 따라온 조엘의 부하가 필립에게 말했다.

“조엘님은.. 도플겡어를 발견하고는.. 그 괴물을 죽이기 위해 직접 나섰다가.. 그만 그 도플겡어에게..”

도플겡어.. 도플겡어.. 필립은 조엘이 도플겡어에 대해 말했을 때 속으로 웃었었다. 지금 자신의 ‘자리’를 빼앗으려는 괴물이라는 말에 말이다. 지금 자신의 자리가 어떤 자리이던가..

왕자이긴 하지만. 늘 여왕에게 살해 위협을 당하는 그런 자리.. 언제 죽어도 이상하지 않는 이런 자리를 빼앗는다니.. 오히려 반가울 정도였다. 그래서 그는 도플겡어에 대해 그렇게 신경을 쓰지 않았던 것이다.

하지만.. 그 괴물이.. 자신을 죽이지 않고 다른 사람도 아니고 조엘을 죽였다. 조엘을.. 필립은 참을 수 없는 분노에 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그래.. 도플겡어는 어디 있는 거냐.”
“글쌔요.. 아직 그 마을에 있을지도..”

필립은 뒤를 돌아 터벅터벅 걸어갔다. 걸어가면서 허리에 차고 있던 검의 손잡이를 꾹 쥐었다.

“당장.. 그 곳으로 날 안내해라.”

그러자 그 남자는 깜짝 놀라며 대답했다.

“아 그렇다면.. 잠시 기다려주십시오.. 지금은 늦었으니.. 내일 병사를 모와..”
“됐다. 나 혼자 간다.”
“네?! 하지만..”

남자가 말 할 세도 없이 필립은 터벅터벅 걸어가 마차에 올라탔다. 조엘의 부하들은 어떻게 해야 하나 고민 했지만 필립 왕자가 큰 소리로 닦달하자 어쩔 수 없이 자신들로만 해서 필립 왕자를 따라가기로 하고는 마차에 올라탔다.

그 모습을 누군가가 보고 있었다. 그 자는 필립 왕자를 감시하기 위해 여왕에게 고용된 사람으로 그의 일거수일투족을 모두 여왕에게 보고 하는 자였다. 그 자는 이 일을 얼른 여왕에게 보고했고, 여왕은 역시 기뻐했다. 왕자가 호위병도 몇 명 없이 어느 작은 마을로 향한다. 이것처럼 좋은 기회는 없어보였다.

그래서 여왕은 씩 웃으며 당장 병사를 모으기 시작했다. 바로 왕자를 죽일 병사들을.. 여왕은 자신을 따르는 최정예병사들 30명을 모은 뒤, 도적처럼 꾸미게 했다. 그렇게 해서 필립 왕자가 호위도 없이 작은 마을로 갔다가 도적들에게 살해당한 것처럼 보이기 위해 그렇게 꾸미게 하고는 바로 왕자의 뒤를 쫓게 했다.

여왕은 병사들이 말을 타고 달려가는 모습을 보면서 나오려는 웃음을 꾹 참으며, 얼른 일을 마치고 병사들이 돌아오길 기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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