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밀번호를 잊어버리셨나요?

나는 지금 인생 최대의 위기에 처해있다. 이겨도 죽고 져도 죽을 수 밖에 없는 상황이다. 다 불어놓고 죽자고 생각하기엔 나는 너무 젊다. 나는 일을 막 시작한 KGB 요원일 뿐이고  독일 주재 미국 대사관의 대사 말단 비서로 잠입했다. 비서 중에서도 말단, KGB 요원 중에서도 말단. 기껏해야 첩보원끼리 연락을 중계하는 정도의 잡무를 할 뿐이다. 앞으로 3년은 더 일해야 그럭저럭 괜찮은 일을 받을 수 있을 것이다. 나를 대사관 직원들은 동유럽 출신 미국인으로 알고 대놓고 무시한다. 실제론 러시아인이지만. 크게 대단한 정보도 없는 주제에.

내가 목숨의 위기에 처해있는 건 내가 담당하던 미국 대사, 휴 브래들리가 어제 죽어버린 것이다. 사인은 독살. 음료에 독이 섞여있었다고 한다. 재수없게도 나는 휴 브래들리의 마지막 모습을 본 3명 중 한 명이었다. 당연히 이 3명에는 철저한 조사가 가해질 것이고 다른 2명도 타 국의 스파이가 아닌 이상 내가 제일 수상한 사람으로 취급 받는 건 당연하다( 불행하게도 그 둘은 스파이가 아니다. ). 그냥 스파이로 걸렸을 경우 나를 죽이진 않을 것이다. 감옥에 가두거나 이중 첩보원을 제안하겠지. 하지만 살인한 첩보원은 얘기가 다르다. CIA 지하벙커로 끌려가서 고문당한 후 총살형이다. 러시아의 가족들도 목숨이 위태로워질 거고.

"저는 미국 FBI 요원, 조지 파커라고 합니다. 독일 대사관 주재 FBI 경관들의 연락을 받고 벨기에에서 급히 파견되었습니다. 어제부터 취조 당하셨을 텐데, 다시 한 번 협조 부탁드립니다. 이 쪽은 미스터 쿠. 알렉산더 게틀러 박사님의 추천으로 CIA에서 일해 온 과학자이십니다. 범죄 해결에 여러 번 도움을 주셨는데, 마침 독일에 계셔서 모시게 되었습니다."

처음에는 눈을 의심했다. 건장한 미국 경찰인 조지 파커 옆에 웬 동양인 한명이 서있던 것이다. 우스꽝스러운 콧수염에 땅딸막한 키. 게틀러라면 레닌그라드 대학에서 잠시 배운 적 있다. 미국 놈들의 법의학자였지 아마.

“웃기지 마. 동양인 따위에게 조사당하라고? 나 참.”

용의자 중 한 명인 빅토리아 시대 전문 역사학자, 에드워드 칼라일이 화를 냈다. 대사 휴 브래들리는 빅토리아 시대에 푹 빠져있었기에 죽은 채로 발견된 집무실도 칼라일의 도움으로 빅토리아 시대처럼 꾸며 놓았다. 고급스러운 샹들리에에, 꽃 장식, 화사한 에메랄드 빛 벽지……. 칼라일은 브래들리의 제일 친한 친구였으므로 시시때때로 이 대사관을 드나들었다.

“내가 동양인인건 당신에게 안타까울 수도 있겠구먼. 하지만 칼라일 씨? 최초 증언과는 다르게 브래들리 대사한테 빚진 게 좀 많더군. 이 액수만 해도…….”

“윽, 알겠어. 조사든 뭐든 맘대로 하라고.”

미스터 쿠라는 작자, 오자마자 칼라일의 증언이 거짓이라는 것을 알아채다니 대단한 사내다. 스파이 교육을 받은 나도 알아채지 못 한 건데 눈으로만 봐도 알 수 있는 건가?

“먼저, 이반 드미트리에 씨? 7시에 차를 브래들리 대사에게 가져다 준 것 맞습니까?”

나를 불렀다. 이반 드미트리에는 내가 쓰는 가명이다. 긴장했지만 이내 자연스럽게 조지 파커의 답변에 응했다.

“네, 음료를 가져다 드렸습니다. 저녁 후에 항상 마실 것을 내오거든요.”

다른 비서들은 서류 정리로 바쁘기에 음료를 타는 건 말단인 내 몫이었다.

“이반 씨, 음료수의 종류는 뭔가? 홍차? 그리고 용기의 종류는?”

“달걀술이었습니다. 브래들리 씨가 드시고 싶다고 하셔서요. 용기는 아마 도자기였던 것 같은데요.”

미스터 쿠는 의외의 질문을 했기에 잠시 당황했다. 저런 걸 알아서 어디에 쓸려는 것일까?

“다음은 앨리스 양. 브래들리 대사의 따님이시군요. 7시 반 쯤에 브래들리 대사님을 만나 뵈었다고요?”

“네, 아버지는 그때만 해도 건강해 보이셨는데……. 어머니 일로 잠시 상담하러 갔거든요. 아버지와는 10분 정도 대화하고 나왔습니다. 이상한 점은 없었고 달걀술은 조금씩만 들이키셨어요. 어쨌든 저는 범인이 아니에요. 꼭 아버지를 해친 범인을 잡아주세요!”

앨리스 브래들리는 과장스럽게 이야기를 늘여 놓는다. 오히려 더 수상하지만 설마 친딸이 부모를 죽였을까?

“앨리스 양. 브래들리 대사와는 피가 섞여 있지는 않군. 재혼한 아내가 데려왔어. 최근 그 아내와의 불화를 겪고 있다네. 이런 상황에서 브래들리 대사가 죽으면 그 재산은 당신 모녀 차지 맞지 않은가?”

앨리스는 미스터 쿠의 말에 얼굴이 벌겋게 되었다. 그녀도 확실한 동기가 있는 셈이다.

“마지막으로 방문한 칼라일 씨는 8시쯤에 대사를 방문한 것 맞죠?”

“그래. 저 동양인 말하기 전에 다 말하지. 돈 문제로 찾아 갔어. 파산 직전인데도 나를 안 도와주겠다고 했다고. 씩씩거리며 나왔지. 그 잘난 음료수를 홀짝대면서 나를 기만하다니.”

본인이 격에 맞지 않는 사치스러운 생활을 즐기는 칼라일 자업자득이라는 생각이 들지만. 조지 파커는 꼼꼼히 취조 내용을 적고 있었다. 미스터 쿠는 그 잘난 콧수염을 쓰러 내렸고 말이다.

“그리고 11시에 비서 분들이 방문했을 때 이미 숨이 끊어지셨고요.”

“저기, 대사님을 죽인 범인이 누군지 알 것 같습니다.”

비서 중 우두머리 격되는 남자 비서가 조심스럽게 조지 파커와 미스터 쿠에게 말을 꺼냈다.

“누구인가?”

“저 이반 드미트리에라는 녀석입니다. 대사님과 우리는 그가 소련의 스파이라는 걸 알고 있었지만 잔챙이로 보이 길래 나중에 써 먹을까 하고 지켜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저 놈이 공에 눈이 멀어 대사님을 독살한 게 분명합니다! 음료수에 독이 들어 있었다면서요? 그 음료수도 저 녀석이 타온 것 아닙니까?”

조지 파커는 이야기가 끝나기도 전에 나를 붙잡고 수갑을 채웠다. 이제 끝이구나. 마지막 변명이라도 해보도록 하자.

“제가 소련의 말단 스파이라는 건 사실입니다. 그렇지만 저는 죽이지 않았습니다! 저는 연락망일 뿐인데 왜 사람을 죽입니까!”

일동 모두 나를 냉랭하게 노려볼 뿐이었다. 소련에 대한 미국 사람의 증오는 이렇게 깊었다. 그때 미스터 쿠가 정적을 깨뜨렸다.

“제가 분석한 결과 달걀술에 타진 비소는 치사량이었습니다. 홀짝이며 달걀술을 마시던 브래들리 대사는 마시자마자 죽지 않았지요.”

“미스터 쿠, 그렇지만 이 자는 소련의 스파이에요. 캡슐에 비소를 넣어 놨을 시도 있지 않습니까?”

“아뇨, 캡슐 따위는 없다고 단언할 수 있다네. 범인이 대강 어떻게 브래들리 대사를 살해했는지 이제야 알 것 같으니까. 범인은 바로…….”

이렇게 간단한 취조만으로도 진범을 잡을 수 있는 건가? 이곳에 있는 모두 깜짝 놀라 미스터 쿠를 바라보았고 미스터 쿠는 손을 천천히 들더니 그곳을 향해 손가락을 가리켰다.

그것은 천장이었다. 약간의 페인트질이 벗겨진.

“이 천장이야.”

“하지만 미스터 쿠, 말이 안 되잖아요? 저 소련 놈이나 용의자 2명이 죽인 것도 아니고 저 천장이 범인이라고요?”

얼어붙은 관객들 앞에 두고 미스터 쿠는 슬쩍 웃으며 이야기를 시작했다.

“또 다른 범인은 이 달걀술이라고 할 수 있겠군. 아마 3명의 방문이 끝나고 달걀술에는 천장에 벗겨진 꽤 큰 페인트 조각이 떨어졌을 거라네. 칼라일 선생이라면 저 페인트가 뭔지 알겠군. 바로 파리스 그린(Paris Green)이라네. 저런 멋진 에메랄드빛을 내서 빅토리아 시대부터 1960년대까지 대중적으로 쓰였지. 아름답고 쥐까지 죽여주니까. 하지만 파리스 그린은 구리와 산화비소의 화합물로 꽤 위험한 물질이라네.”

칼라일은 머리를 탁 치며 저 페인트가 파리스 그린임을 인정했다.

“그래, 역시나. 아마 우연히 벗겨진 페인트가 자네들이 방문하던 와중 달걀술에 떨어졌겠지. 브래들리 대사는 눈치 못 챘을 것이고. 또 다른 비극은 달걀이라네. 달걀엔 황이 풍부하지. 저런 페인트 조각으로는 죽지 않지만 황하고 파리스 그린의 산화비소가 반응하여 황화비소가 생성되었을 거라네. 자네들하고 얘기 하느라고 달걀술을 늦게 마신게 화근이 되었지. 반응이 일어날 충분한 시간을 주었으니까. 3명의 방문자가 모두 떠난 뒤 술을 꿀꺽한 대사는 비명도 못 지르고 즉사. 자, 내 말이 사실이라는 건 미국의 자랑, 과학 수사 기법으로 충분히 알 수 있을 거라네. 질문 있나?”

일사천리 같은 추리에 모두들 감명을 받은 눈치였다. 칼라일은 동양인이라고 무시했던 자신이 바보라면서 눈물을 흘렸고 앨리스 양도 연일 고개를 숙였다. 그렇지만 나에게는 사정이 다르다. 어쩌면 이 사건의 범인은 나로 공표되어 냉전을 더욱 얼어붙게 할 수 있다. 내 목숨과 내 조국, 모두 위험해진다. 그 때 미스터 쿠가 입을 열었다.

“자, 이제 저 스파이 청년만 남았구먼. CIA는 이런 사건에 얽힌 이상 자네를 실제 범인으로 몰아가서 죽일 수도 있다네. 나는 그런 꼴 못 봐. 조지 파커, 자네가 영국 M16의 이중첩자라는 건 못 본 척해주지. 대사관 비서들? 자네들 은근 슬쩍 동독에 정보를 팔고 있었지? 그냥 넘어가 주겠네. 용의자였던 두 분은 어쨌거나 브래들리 대사가 죽었으니 이득만 남은 거 아닌가! 자, 파커. 청년을 나에게 넘겨주게. ClA에는 이 청년의 존재를 알리지 말고 진짜 사인을 명확히 밝히도록. 나는 이 청년을 러시아 관광도 할 겸 집에 데려다 줘야겠어.”

파커와 대사관 직원들은 잠시 생각하더니 나를 미스터 쿠에게 넘겨주었다. 나는 살았다! 스파이 인생 처음으로 눈물을 흘릴 뻔했다. 우리는 대사관을 빠져 나왔고 공항을 가는 택시를 잡기 위해 걸었다.

“정식으로 소개하지. 한국 출신 CIA와 KGB 무기개발부 외주 과학자인 구라고 하네. 미스터 쿠든 미스떼르 쿠(러시아어로 구씨)든 아무렇게 불러도 좋아. 자네의 진짜 이름은 뭔가?”

“KGB 요원, 푸틴이라고 합니다, 선생님. 블라디마르 푸틴.”

호넷시티

백승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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