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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 불광동 수정씨

2018.11.17 11:1011.17

  

* 이 이야기는 극지인이 등장한 세계를 배경으로 합니다.

1999년 인류는 충격적인 발견을 하게 된다. 남극, 북극의 얼음 속에서 수백만의 살아있는 지적생명체를 찾아낸 것이다.

공식명칭은 극지인(polar alien, 劇地人)이지만 적지 않은 사람들이 그들을 외계인이라고 부른다. 길쭉한 머리통에 커다란 눈, 하얗고 미끈한 팔다리까지 영화나 텔레비전에서 흔히 보아온 외계인의 전형적인 모습 때문이다. 곤충처럼 겹눈에 딱딱한 겉껍질을 갖고 있으며 상당한 수준의 지능과 언어 구사 능력을 갖추고 있다. 하지만 인류는 그들이 어디서 왔는지, 언제부터 있었는지 밝혀내지 못하고 있다.

인류는 극지인에 대해 아는 게 없지만, 그들과 함께 사는데 아무런 불편이 없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영화 속 외계인들과 달리 극지인은 지능이 낮고 순종적이어서 사람이 시키는 일을 묵묵히 했으며, 어떤 대우를 받아도 부당함을 호소하지 않았다. 극지인은 마치 노예나 가축이 되기 위해 태어난 존재들처럼 보일 지경이었고, 인류는 그런 그들 앞에서 유감없이 본성을 드러냈다. 덕분에 세상은 2010여 년 경까지 외계인 호황 시대(AEE-Alien Earning Era)를 맞았다. 싼 인건비에다 극지인 유전자를 이용한 새로운 사업들까지 그야말로 무궁무진했다.

물론 명만큼 암도 있었다. 극지인들이 허드렛일에 도맡는 바람에 값싼 노동력을 제공하던 국가들은 어려운 시기를 맞았고, 로봇산업 역시 발전속도가 더뎌졌다. 그리고 인류는 극지인 없는 삶은 상상할 수 없게 되었다. 그들에 대해 거의 모르는데도 말이다.

 

 

 

 불광동 수정씨

 

 

곽수정씨는 자신의 미래가 조금 밝아졌다고 느꼈다. 2050년 어느 날, 서울시 은평구 불광동의 신축원룸아파트에 입주했기 때문이다.

작년 이맘때만 해도 수정씨는 자신의 인생이 ‘우울’이란 단어 자체라고 여겼다. 불광동의 가난한 집(그것도 전세-전세제도는 2040년경부터 거의 사라졌으며 저소득층 일부와 국가의 임대주택에만 남아있다.)에서 외동딸로 태어났고, 아버지는 중학교 때 암으로, 어머니는 수정씨가 고등학교를 졸업하자마자 뺑소니 사고를 당해 돌아가셨다.

수정씨는 자기가 공부 쪽으론 재능이 없다는 걸 잘 안다. 어차피 사립대학을 갈 형편도 아니라 진학은 일찌감치 포기했다. 그래서 변변한 알바도 구할 수 없는 처지였다. 어쩔 수 없이 기본소득(정확히는 시민소비장려금-2038년부터 중앙정부와 지방정부가 5:5 비율로 전 국민에게 지급 중.)에 의지해 살았다. 한달치 라면과 생리대, 생수를 살 수 있는 금액이다.

노력을 안 한 건 아니다. 열심히 알바천하를 뒤졌지만, 이력서에 알바경력을 넣으려는 고학력 취업준비생들을 당할 수 없었다. 가게 사장이나 매니저들은 저학력에 별로 똘똘해 보이지 않는 수정씨를 알바로 쓰려 하지 않았다.

알바구하기에 지쳐 약 먹고 엄마 곁으로 갈까 고민할 무렵 통장 아줌마가 수정씨를 찾아왔다. 수정씨가 저소득청년 일자리 캠페인의 지원대상이라는 거였다. 앞뒤 볼 것 없이 꼭 하고 싶다고 했고 다행스럽게 뽑힐 수 있었다. 그래서 지금은 고양시의 신산업 공단에 다니는 중이다.

일을 시작하면서 수정씨의 암울했던 인생이 조금씩 풀리기 시작했다. 직장이 정해지자 임대아파트 신청자격이 생겼고, 마침 불광동에 원룸형 임대아파트 공고가 떠서 바로 신청을 했다. 부모를 여읜 데다 직장이 있으며 불광동 토박이라서 많은 가점을 받았고, 그 덕에 엄청난 경쟁을 뚫고 임대아파트에 당첨될 수 있었다.

 

수정씨의 삶은 아파트로 이사 오고 난 후 업그레이드되었다. 전에 살던 반지하는 온종일 어두웠고, 변기는 자주 막혔으며, 장판 위에 물이 고여서 걸레를 방 한쪽에 쌓아두고 살았다. 그래서 집에 누구를 부를 수도 없었고(부를 사람도 없었지만), 그럴 마음도 들지 않았다. 하지만 지금은 다르다. 깨끗하고 환한 원룸을 볼 때면, 집에 사람을 초대해도 좋겠단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미지의 손님을 상상하다 보면 종종 가슴이 뛰었다.

가슴이 뛰는 이유야 누구나 떠올리는 바로 그것, 로맨스에 대한 갈망이지만 수정씨는 깨닫지 못하고 있다. 워낙에 눈치가 없는 편이기도 하고, (성적인 의미를 포함해서) 사랑하거나 사랑받을 가능성 자체를 떠올려 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평화로운 토요일 아침, 수정씨가 이부자리에서 누운 채로 창 너머 파란 하늘을 보고 있다. 배시시 웃음이 나온다. 전에는 이런 고요함이 두려웠다. 세상이 자길 버린 것 같아서다. 하지만 이젠 아니다. 토요일의 평온하고 느긋한 아침은 지루했던 평일을 무사히 넘긴 보상이다.

문득 수정씨는 일탈하고 싶어졌다. 마트에서 장 보는 것 이상의, 혼자 먹을 음식을 쟁여놓는 것보다 훨씬 과감한 무언가를 하고 싶었다. 그런데 그게 무엇인지 막연했다. 뭐가 좋을까? 힌트를 얻을 겸 TV를 틀었다. 하지만 도움이 되지 않았다. 깜빡 잊고 있었다. 예능프로그램에서도 외계인에 관해 떠들고 있는 상황이란 걸.

 

한 달 전 수정씨의 회사 모니터에 오류 메시지가 떴다. 수정씨는 깜짝 놀랐다. 웹서핑이든 독서든 모니터 앞에서 기다리다가 삐삐- 소리가 나면 휴대폰으로 전송된 수식(대부분 126+37 수준의 단순 계산)의 답을 화면에 입력하는 게 수정씨의 업무다. 제한시간 내에 입력을 못 하면 패널티를 받는다.

수정씨가 태어날 무렵부터 거의 모든 공장이 자동화되었다. 이 때문에 일자리가 사라져 사회문제가 되었고, 정부에서는 십여 년 전부터 무조건 인력을 투입하라고 기업에 강제했다. 그 혜택을 지금 수정씨가 보고 있다. 하지만 공장에선 사람이 할 일이 없다. 그래서 제품생산과 아무 상관 없는 더하기 빼기를 하고 있다.

노동청에서 전국 공장의 노동자들 개인 휴대전화로 랜덤하게 수식을 보내면 노동자들이 공장의 단말기에다 답을 입력해 노동청으로 전송한다. 이 과정이 출근해서 성실히 일하고 있다는 증빙이다. 따라서 한 번이라도 입력을 빠뜨리면 근로자들에게 패널티가 가해진다. 혜택을 받는 주제에 빈둥거리면 안 되니까 벌을 주는 거다. 그래서 모두 이 수식 메시지를 놓치지 않으려고 애쓴다.

그런데 한 달 전에 회사 단말기에 오류 메시지가 뜨면서, 입력이 멈추는 사고가 발생했다. 한 번도 본 적 없는 사고에 사람들이 동요했다. 수정씨 역시 당황하고 있는데 누군가 뉴스를 보라고 외쳤다. 얼른 인터넷으로 뉴스채널을 틀었다. 앵커마저도 놀란 게 역력한 표정으로 원고를 읽고 있었다.

 

“혁신적인 나노로봇 기술로 유명한 모던테크의 CEO 마크 아시모프가 자사의 핵심기술이 외계의 존재가 전수한 것이라고 밝혀 논란이 되고 있습니다. CEO 마크 아시모프의 주장에 따르면 조만간 그들이 직접 모습을 드러낼 것이며, 그때를 대비해 차근차근 인류와 대면할 준비를 하고 있다고 하는데요…….”

 

수정씨는 무슨 말인지 얼른 이해가 되지 않아 사람들에게 물었다. 누군가 설명을 시작하자, 사람들이 모여들어 거들더니, 화이트보드에 번호를 매겨 상황을 정리하게 되었다. 수정씨는 흐름을 놓치지 않으려고 스마트폰으로 내용을 찍어두었다.

 

1. 나노로봇회사 모던테크가 기자회견을 열어 외계인의 기술을 전수받았다고 발표했다.

2. CEO 마크 아시모프는 꿈에서 그들을 만났으며 실제로 본 적은 없다고 한다.

3. 마크 아시모프는 외계인이 인류와 비슷하게 생겼다고 말했다.

4. 이런 발표를 하는 이유는 외계인들이 자신들의 존재를 드러내라고 설득했기 때문이다.

5. 그들은 직접 인류 앞에 모습을 드러낼 계획이지만 구체적인 날짜는 모른다.

6. 외계인들은 인류와 평화롭게 공존하길 기대하고 있다.

7. 그래서 외계인들은 평범한 사람을 자기네들의 장소에 초대할 거라고 한다.

8. 초대하는 이유는 자신들이 얼마나 평화와 공존을 원하는지 보여주기 위해서다.

8. 물론 이 초대의 수락 여부는 초청받은 사람과 각국 정부의 의지에 달려있다.

 

한 달 내내 이 이야기가 계속되고 있다. 처음 2주간은 모든 정규방송이 멈추고 그야말로 난리가 났었다. 온라인에서 생필품 주문이 폭주했고 마트에서도 사재기 현상이 나타났다. 온갖 종교단체들이 성명을 발표하고, 종말을 부르짖는 사람들이 길거리에 보이기 시작했으며 자살률까지 높아졌다. 이렇게 세상이 미쳐 돌아갔지만, 수정씨는 열심히 출근해 숫자를 입력했다. 일은 해야 하니까.

한 달이 지나면서 광기가 잦아들고 정규방송도 곧잘 나오지만, 그래도 외계인 얘기는 여전히 톱뉴스다. 특히 모던테크가 외계인과 관련된 사항을 시리즈 광고로 만들어서 전 세계에 뿌리는 중이다. 현재까지 나온 광고는 ‘외계인들은 종말이나 종교와는 관계가 없으며, 원하는 것은 오직 평화뿐이니 안심하라, 초청할 지구인을 정하기 위해 인류의 기술로는 찾아낼 수 없는 방식으로 사람들을 관찰 중이다’라는 내용이다.

시리즈 광고가 나올 때마다 전문가들이 등장해 다양한 분석과 예측을 쏟아내며 열띤 토론을 벌이고 있다. 물론 수정씨는 이런 분위기에 별로 관심이 없다. 그 어느 것도 수정씨의 일상에 영향을 주지 못하기 때문이다.

 

토요일 오후, 수정씨는 연신내 로데오 커피숍에서 회사동료 ㅁ와 ㄹ을 만난다. 세 여자는 자신들이 가진 가장 좋은 옷을 입고 나왔다. ‘계산사’로 보일까 봐 그런 것이다. 하지만 SPA브랜드를 입고 나왔어도 계산사라고 이마에 써 붙이지 않는 한 누가 알까?

계산사는 수정씨와 동료들처럼 공장에서 단순수식 입력하는 사람들을 낮춰 부르는 말이다. 아주 옛날, 사람들이 기계나 로봇이 하던 일을 하던 시절에 ‘공순이, 공돌이’란 말이 있었는데 그것과 같은 계통의 멸칭이다. 당시 공순이, 공돌이들이 공순이 공돌이처럼 보이지 않으려고 애썼던 것처럼 수정씨와 친구들도 계산사로 보이지 않으려고 노력한다. 회사와 관련된 얘기가 나오면 목소리를 낮추고 주변을 신경 쓴다.

하지만 외계인의 등장 후론 ㅁ과 ㄹ의 화제도 외계인이다. 수정씨는 관심이 없지만 둘의 얘기를 가만히 듣는다. 너무 모르면 은근히 무시당하기도 하고, 그들의 수다가 생각지 못한 즐거움을 줄 때도 있기 때문이다.

 

“걔네들이 변태처럼 내내 쳐다본다는 거잖아. 몰카 아니라서 잡을 수도 없고.”

“나노봇 수술한 사람 몸에 로봇을 넣어놓고 촬영한단 말이 있더라.”

“그건 아닐 거 같대. 미국 그…. 나사? 뭐 그런 데서 조사했는데 그 로봇은 그런 기능이 없대. 오히려 폰이나 카메라, 인공지능 스피커처럼 우리 옆에 있는 데 인터넷 연결된 거! 그런 걸 해킹했을 거란 얘기가 있어. 근데 걔들 기술이 너무 좋아서 우리는 아무리 찾아도 모르는 거지.”

“어머, 무섭다. 집에 있을 땐 그런 거 전부 꺼놔야 하나?”

“하하하! 우리 사는 거 봐서 뭐하겠어? 진짜 영양가 하나도 없는데.”

“혹시 사람인 척하고 숨어서 보고 있는 거 아닐까? 사람이랑 비슷하게 생겼다고 했잖아.”

 

갑자기 끼어든 수정씨의 의견에 ㅁ과 ㄹ이 순간 생각에 빠진다. 과연…, 그럴까?

 

“대박! 사무실 ㅊ씨가 딱이네.”

“왜?”

사무실 얘기라 그런지 ㅁ이 목소리를 낮춘다.

 

“ㄹ을 빤히 쳐다보잖아. 자기 그 눈빛 못 봤어? 나 진짜 경찰에 신고할 뻔했어! 크크크”

“뭐야. 그런 거 아니야. 그냥…….”

“그냥 뭐? 뭐 있구나!! 얘기 좀 해봐.”

 

ㄹ이 부끄러운 듯 얼굴을 붉힌다. 수정씨는 지금 이 상황이 얼른 이해되지 않는다. TV에서 본 옛날 로맨스 드라마의 남자 주인공이 외계인이었던 게 생각나서 농담했을 뿐이다. 그런데 갑자기 ㄹ이 자신과 ㅊ이 요즘 메시지를 주고받으며 조만간 밥을 같이 먹기로 했다고 고백한 것이다. 그 말을 들은 ㅁ은 신이 나서 이러다 결혼까지 가는 거 아니냐고 난리다. 자기 몰래 언제 이런 일이 벌어지고 있었지? ㅁ은 혼자 알고 있었고 ㄹ은 눈치챘으면서 왜 이제 말하는 걸까? 수정씨는 가벼운 배신감을 느낀다. ㅁ과 ㄹ 둘 다 친하다고 생각했는데…….

 

커피숍을 나오며 ㅁ과 ㄹ이 같이 저녁을 먹자고 했지만, 수정씨는 집안일 핑계를 대고 헤어진다. 내내 외계인 수다에다 전혀 모르던 ㄹ과 ㅊ씨 얘기를 들으니 어째 마음이 불편했다.

수정씨는 버스를 타고 대형마트로 간다. 버스 안에서 지금쯤 ㅁ과 ㄹ은 저녁을 먹으며 자기 대해 얘기하고 있을지 모른다고 생각한다. “수정씨는 다 괜찮은데 살짝 느려.”라고 말하면 “그래, 좀 답답하지.”라며 맞장구를 치고 있을 거다. 어릴 적부터 종종 겪던 일이다.

마트에 도착했다. 그늘졌던 수정씨의 마음은 밝고 화사한 매장과 여유로워 보이는 쇼핑객들 덕에 다시 환해졌고, 어느새 가벼운 행복감까지 일었다. 여기선 누구도 수정씨가 둔하고 가난한 계산사라는 걸 모른다. 오히려 반짝거리는 수많은 물건에 둘러싸여 어떤 것이든 선택할 수 있는 고객이 됐다고 생각하니 자신의 처지나 상황은 사소하게 여겨졌다. 지갑에 얼마가 있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수정씨가 고른 물건에 대해 이러쿵저러쿵할 사람은 없을 테니 말이다.

 

장을 보고 나온 수정씨가 좀 걷기로 한다. 대형할인점 옆으로 잘 정비된 하천이 있어서 산책하기에 안성맞춤이다.

해가 질 무렵이라 사람이 그리 많지 않다. 수정씨는 천천히 걸으며 누군가를 집으로 초대하는 것에 관해 생각한다. 원래는 다음 주쯤 ㅁ과 ㄹ을 초대할까 했지만 별로 내키지 않는다. 다른 사람 없을까? 원룸에 같이 있으면 즐겁고 가슴이 뛸 수 있는…. 가슴이 뛴다고 생각하자 정말로 심장이 콩닥콩닥- 한다. 왜 이러지? 어제도 그랬다. 자기 전에 본 옛날 드라마 속 남자 주인공. 그가 여주인공에게 자신이 외계인이라고 고백하는 장면에서 지금처럼 가슴이 두근거렸다.

“엄마야!!” 깜짝 놀란 수정씨가 소리를 지른다. 드라마 장면을 떠올리며 걷다가 발에 뭔가가 닿았다. 보니까 풀밭에서 산책로로 삐져나온 사람의 다리다. 조심스럽게 다리 주인공을 살핀다. 어떤 남자가 길게 자란 풀숲에 엎어져 있다. 겁이 났지만 다친 사람일지도 몰라서 다가가 흔들어본다. 남자는 ‘으으음~’소리를 내며 몸을 돌린다. 남자의 얼굴을 본 수정씨가 흠칫한다. 찡그린 표정이지만 뽀얀 얼굴이 연예인처럼 잘 생겼다. 그러고 보니 입고 있는 코트며 바지가 세련되고 키도 큰 것 같다.

 

“저기, 여기서 주무시면 위험해요.”

 

남자가 힘겹게 눈을 뜨며 “무슨 일인데요?” 묻는다.

수정씨가 우물쭈물한다. 대답할 말도 모르겠지만 그보다 남자의 눈에 자기가 어떻게 보일까 하는 생각이 퍼뜩 들어서 바람에 날린 머리칼을 정돈한다.

“제가 몸이 좀 안 좋아서 그런데……. 도와주시면 안 돼요?” 남자가 손을 내민다. 누가 채가기라도 할 것 처럼 수정씨가 급하게 그의 손을 붙잡아 일으켜 세운다. 수정씨가 부축해서 둘은 찻길로 올라간다. 집이 어디냐고 묻지만, 남자의 눈은 거의 감겨있고 발만 겨우 움직인다. 택시를 잡은 수정씨가 남자를 밀어 넣고 자기도 올라탄다.

 

그렇게 해서 토요일 밤, 모르는 남자가 수정씨의 침대를 차지하게 된다. 수정씨는 감히 그의 코트를 벗기지 못한다. 그래서 남자는 천변에 쓰러져있던 차림 그대로 얌전하게 잠들어있다. 여기저기 잡초가 붙어있는 것만 빼면 매우 근사하다.

만일을 위해 사진을 찍을까 하다 남자가 알면 싫어할 것 같아 그만둔다. 그래서 수정씨는 그가 깨어나길 기다리며 주변을 서성거린다. 어쩔 수 없다. 손바닥만 한 원룸이고 딱히 갈 데도 없는데 남자가 유일한 침대를 차지하고 있으니까.

 

하얀 발목 양말은 신은 남자의 발은 수정씨의 뭉툭하고 작은 발과 달리 길쭉하고 큼직하다. 저 정도가 280이구나, 라고 생각한다. 아까 남자의 구두를 봤었다. 검색해보니 백화점에서 판매하는 꽤 비싼 제품이다. 많은 생각이 스쳐 간다. 지금이라도 경찰에 신고해 데려가라고 할까? 저 옷들은 부모님이 사줬을까? 왜 산책로에 기절해있었지? 술 냄새는 안 나던데…. 마약이라도 한 걸까? 몇 살이지? 대학생인가? 계산사는 아닌 것 같은데….

겪어본 적 없는 이 상황 때문에 도저히 잠들 수 없을 것 같았다. 하지만 수정씨는 싱크대에 기대 까무룩 잠이 들었다. 얼마나 지났을까? 바로 옆에서 느껴지는 인기척에 눈을 떠보니 바로 옆에 서 있는 남자의 다리가 보였다. 뭐 하는 거지? 맛있는 냄새가 나는데…. 라면을 끓이던 남자가 수정씨와 눈이 마주치자 아주 작은, 그러나 분명한 미소를 지으며 말한다.

“라면 먹을래요?”

 

새벽 3시, 수정씨는 남자와 라면을 먹는다. 남자 때문에 저녁을 놓쳐서 몹시 허기졌다. 남자도 마찬가지였는지 라면을 열심히 먹고 있다. 수증기 너머 보이는 남자는 지나치게 현실적이다. 남자가 라면을 덜다 튄 국물이 수정씨의 그릇에 떨어진다. 남자와의 거리가 얼마나 가까운지 깨닫자 온몸의 근육들이 미세하게 긴장한다.

“무슨 일 하세요?”

“계산사...!” 수정씨가 자기 대답에 놀라 손으로 입을 가린다. 하지만 말은 이미 튀어나왔고 면발은 끊어지지 않았다. 후루룩- 입에 걸린 라면 가락을 빨아들여보지만 후회는 사라지지 않는다. 이 멍청한 것!

“그렇구나. 계산사가 어디서 온 말인지 알아요?”

“.... 공순이…. 그거랑 같은 거 아니에요?”

“옛날 소설 중에 ‘세계의 끝과 하드보일드 원더랜드’라고 있어요. 거기 주인공이 계산사인데 거기서 따 온 말로 알고 있어요.”

“소설에서는 좋은 직업이에요?”

“좋은 건 모르겠고 전문직이에요. 암호 관련된 일이고, 주인공이 양쪽 주머니 동전 개수를 동시에 세거든요. 그 책 볼 때 신기해서 따라 해 봤는데, 안되더라고요.”

 

말을 마친 남자가 수정씨를 보며 빙긋 웃는다. 대화 마무리의 의례적인 미소지만 그것은 수정씨 마음에 마지막 빗장까지 풀어버린다. 그렇게 일요일 정오까지, 피곤에 못 이겨 낮잠에 빠질 때까지 두 사람은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추락하는 눈꺼풀만 아니면 계속, 해가 질 때까지 수다를 떨었을 것이다.

남자는 이것저것 아는 것이 많았다. 외계인 사태를 보는 각국의 입장부터 파스타의 종류와 조리법, 코오롱과 퍼퓸이 뭐가 다른지 알려주었다. 하지만 그는 잘난 체하지 않았고, 자기가 모호하다고 생각하는 건 같이 검색해보자고 했다. 그렇게 남자와 머리를 맞대고(그의 체취와 체온이 느껴졌다!) 스마트폰 화면을 보는 동안 수정씨는 가슴이 너무 뛰어서 그 소리가 들릴까 걱정이 될 지경이었다.

 

일요일 정오 “조금만 잘게요. 너무 피곤해서…. 얘기하는 건 정말 좋아요!”라며 침대에 올라간 수정씨는 이 모든 게 꿈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여태껏 살면서 이런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행복은 늘 손안의 모래 같았다.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가거나 바람에 날아가거나.

눈을 떴을 때 남자는 없었다. 정말 꿈이었나? 어떤 감정을 느껴야 할지 몰라 당황스러울 무렵, 딩동- 하고 초인종이 울린다. 남자다. 근처 슈퍼마켓에 가서 장을 봤다고 한다. 냉장고를 보니 레토르트뿐이라 사 왔다며, 혹시나 불편하게 한 거라면 미안하다고 한다. 수정씨는 괜찮다고 한다. 그러자 남자는 방안을 가득 채울 만큼 환한 미소를 짓더니 팔을 걷어붙이고 음식을 만들기 시작한다. 닭볶음탕을 만들 건데, 몇 번 안 해봐서 서툴 수 있으니 이해해달라고 한다. 수정씨는 애원하듯 공손히 말하는 그의 말투가 너무나 사랑스럽다, 고 생각한다. 남자는 닭을 찬물에 담그며 수정씨에게 조심스럽게 말한다.

“괜찮으면, 조금 더 신세 져도 될까요? 집에 들어가기가 좀 그래서요. 갈 데도 없고…. 불편하시면,”

“괜찮아요.” 수정씨가 대답한다. 생각보다 단호한 자신의 말투에 놀랐지만, 진심이니까 상관없다. 수정씨는 남자가 마음에 든다. 그와 더 이야기를 나누고 싶고, 조금 더 알고 싶다. 그러기 위해서는 시간이 필요하다. 할 수만 있다면 출근도 미룰 만큼.

월요일에는 제시간에 일어나 출근 준비를 한다. 달라진 게 있다면 아침으로 늘 먹던 달짝지근한 믹스커피 대신 대신 남자가 전날 사 온 베이글에 크림치즈를 발라 오렌지 주스와 먹었다는 정도다. 남자는 당연하다는 듯 수정씨를 배웅한다.

“계산 잘하고 오세요.”

말투와 표정에 비꼼이나 놀림은 없다. 그의 표정은 진심인 것 같다. 수정씨는 고개를 끄덕이며 집을 나선다.

지하철에 올라서야 아주 천천히, 자신에게 벌어진 이 일이 얼마나 놀랍고 황당하며 아름다운지 깨닫는다. 좋은 꿈에서 깨지 않고 그대로 일하러 가는 것 같다. 상상해본 적도 없는, 마치 하늘에 고래가 떠다니는 광경을 보고 있는 기분이다.

 

평소처럼 ㅁ, ㄹ과 구내식당 점심을 먹는데, ㅁ가 수정씨를 보며 말한다.

“나, 수정씨 땜에 주말 내내 엄청 신경 써서 너무 피곤해!”

“왜? ㅁ씨 무슨 일 있었어?”

“자기가 그랬잖아, 외계인이 사람인 척 보고 있다고. TV에 나온 전문가가 그럴 가능성도 있댔어. 그래서 일요일 날 홍대에 나갔는데 누가 보나 싶어서, 그거 신경 쓴다고 진 다 뺐잖아. 옷 사러 간 건데 제대로 보지도 못하고…. ㄹ씨는 ㅊ씨랑 카톡한다고 건성으로 봐주고.”

ㅁ의 말에 ㄹ이 급히 말을 덧붙인다. “아! 토요일에 자기가 먼저 갔잖아. 피곤한 거 같아서 일요일에 보잔 말을 못 했어. 미안.” ㄹ의 말투에 진심으로 미안함이 묻어있다. “괜찮아. 그럴 수도 있지.” 수정씨는 진짜로 괜찮아서 그렇다고 말한다. 어차피 가자고 했어도 나가지 못했을 거다. 남자와 같이 있었으니까. 문득 궁금했다.

“혹시 모르는 남자를 집에 데려온 적 있어?”

수정씨의 물음에 ㄹ과 ㅁ이 멈칫한다. 다른 사람이면 몰라도 수정씨가 할 만한 질문이 아니라서다.

“.... 자기, 남자 생겼어!?” 눈치 빠른 ㅁ이 묻는다. 당황한 수정씨가 얼버무린다.

“아니야. 그런 건 아니고……. 집에 남자랑 있으면 다른 사람은 뭘 하나 궁금해서.”

“친척이나 게이야?”

“둘 다 아닌 것 같은데…. 아니, 둘 다 아닌 남자랑 말이야.”

ㄹ이 능글맞은 표정으로 말한다. “섹스할 거 아니면 왜 모르는 남자랑 집에 같이 있어?”

이제는 ㅁ까지 초롱초롱한 눈으로 수정씨를 보고 있다. 답을 기다리는 거다. 참지 못한 ㄹ이 다시 묻는다. “그 남자 못생겼어?” 수정씨가 강하게 고개를 저으며 말한다. “잘 생겼어!”

ㄹ과 ㅁ은 놀란 듯 서로를 보더니 다시 수정씨에게 집중한다. 새벽 호숫가의 안개처럼 그들의 눈에 음흉함이 어리기 시작한다. 그 시선이 수정씨를 웅크리게 만든다. 놀림거리가 될 지도 모른다는 본능적인 두려움이다. 학교도 아닌 공장에서까지 이런 꼴을 당하고 싶지 않다.

“앞뒤 얘기가 더 있을 거 아냐?”

“괜찮아. 아무한테도 말 안 할게.”

끈덕진 추궁이 이어지지만 수정씨는 입을 꾹 다문다. 탐스럽다고 파란 감을 따면 결국엔 버려야 하는 것처럼, 지금 얘기하면 수정씨가 느끼는 행복감은 다 부질없는 것이 될 것이다. 아니, 사람들이 놀려대고 건드리기 좋은 표식이 될 지 모른다.

 

ㅁ과 ㄹ을 피해 혼자 퇴근하던 수정씨는 어차피 그녀들의 질문에 대답할 게 거의 없다는 걸 깨닫는다. 남자는 수정씨의 직업 말곤 개인적인 질문을 하지 않았고, 수정씨도 그랬다. 어딘가…. 그가 불편해하는 기색이 느껴져서 그랬다. 그런 얘기 없이도 너무나 즐거웠고, 어쩌면 그런 얘기를 하지 않아서 즐거웠던 건지도 모른다.

 

“고마워요. 이것저것 묻지 않아 줘서.”

저녁을 먹는데 마치 수정씨의 마음을 읽은 것처럼 남자가 말한다. 수정씨는 남자가 자주 그러는 것처럼 미소를 지어 보인다.

“골치 아픈 일들이 있어서 조금 거리를 두고 싶어요. 가족, 학교, 친구들이랑….” 남자가 말한다. 수정씨는 겪어본 적 없는 일이지만(그것들은 언제나 골칫거리였다! 거리를 둬본 적이 없었을 뿐)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이사 오기 전까지 수정씨도 항상 현실에서 도망치고 싶었다.

“내 이름은 이루리에요. 나이는 스물넷. 수정씨 맞죠? 택배박스에서 봤어요.”

“나랑 동갑이네요. 이루리…. 이름이 특이해요.”

“할머니가 좋아하는 만화 주인공 이름에서 따왔대요.”

루리가 수정씨를 보고 웃는다. 이름만큼 예쁜 미소다. 어째서 저 남자의 것들은 모두 다 신선하고 아름다울까? 수정씨는 자신의 것에 대해서 그렇게 느껴본 적이 없다. 머리카락도 피부도 손가락도 발가락도 가슴도 엉덩이도 남에게 내놓기엔 아쉽고 부족해 보인다. 문득 자신이 초라하게 느껴진다. 지금 남자가 입고 있는 티셔츠는 수정씨가 입었을 땐 후줄근했는데, 그가 입고 있으니 귀엽고 사랑스러웠다.

‘루리 이펙트….’ 속으로 떠올린다. 그는 자신에게 속한 모든 것을 매력 있게 만든다. 저 남자가 목 늘어난 티셔츠와 낡은 츄리닝을 개성 있고 신선한 것으로 만든다면…. 어쩌면 나도 그렇게 만들어 줄 수 있지 않을까? 그래, TV에서 봤던 것 같다. 외모 차이가 많이 나는 커플을 볼 때 사람들은 못생긴 쪽이 외모 이외의 다른 매력-돈이나 경제력 같은-이 있다고 믿었다. 그래서 혼자 있는 못생긴 사람보다 훨씬 높게 평가했다. 하지만 어떻게 루리와 함께 있지? 점심때 ㄹ이 했던 말이 떠오른다.

‘섹스할 거 아니면 왜 모르는 남자랑 집에 같이 있어?’

갑자기 수정씨의 머릿속이 혼란해지고 심장이 급하게 요동친다. 하지만 이런 생각이나 두근거림을 절대로 들켜선 안 된다. 수정씨도 욕망이란 것이 얼마나 부질없는지, 상대를 얼마나 불쾌하게 만들 수 있는지 잘 안다. 학창시절, 골목길의 그 남자들……. 흉측한 성기를 꺼내놓고 자랑스러워하던 그들이 자신을 얼마나 불쾌하게 만들었는지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다.

 

저녁을 먹고 루리의 제안으로 산책을 한다. 그와 거리를 두고 걷고 싶지만, 자꾸 말을 걸며 끌어당기는 바람에 나란히 서게 된다. 수정씨는 속으로 루리 이펙트가 발휘되길 빈다. 내가 그와 어울리는 사람으로 보이기를... 그렇지 않다면 외모 말고 다른 매력이 있다고 믿기를….

초라함과 만족스러움이 동시에 느껴지는 묘한 산책이다. 이런 산책에 익숙해지는 데 얼마나 걸릴까? 원룸으로 이사하고 한 달 내내 낯설면서 행복했던 기억이 떠오른다. 그리고 지금까지도 마음 밑바닥에 은은하게 깔린 만족감이 있다. 루리와 함께라면 족히 일 년은 달뜬 채로 행복했다가 그 후로도 아주 오랫동안 부드러운 충족감을 느낄 수 있지 않을까? 라고 생각해 본다. 그 감각을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발가락 끝에 힘이 들어가는 짜릿한 기쁨을 느낀다.

 

“도넛 먹고 싶은데. 수정씨도 먹을래요?” 루리가 슈가 파우더처럼 달콤한 미소를 지으며 말한다. 수정씨는 도넛가게 바로 옆에 있는 편의점을 발견한다.

“루리씨가 내 거까지 골라주세요. 하나면 돼요. 전 편의점에서 음료수 살게요.”

“음료수 천천히 고르세요. 도넛 고르는 데 오래 걸려요.”

 

수정씨가 커피 두 개를 들고 위생용품판매대 앞에서 멈춘다. 생리대, 콘돔 따위와 함께 가임진단기가 있다. 포장에 ‘98%의 정확성! 어플로 확인하세요.’라고 큼지막하게 인쇄되어 있다. 자석에 이끌린 것처럼 그것을 집어 든다. 전용판독기는 3초, 스마트폰 어플은 1분이면 배란여부를 확인할 수 있다. 시간은 충분하다. 루리는 도넛을 고르는 데 오래 걸린다고 했다. 편의점 안에는 수정씨와 계산대의 극지인점원 뿐이라 눈치 볼 사람도 없다.

수정씨는 가임진단기와 콘돔을 같이 집었다가 콘돔만 제자리에 둔다. 둘을 동시에 사는 건 겨울 코트와 비키니 수영복을 같이 사는 것과 마찬가지란 생각이 들어서다. 논리적인지 아닌지는 따질 겨를이 없다. 지금 중요한 건 수정씨 자신이 원하는 게 무언지 알아내는 거다. 여태껏 살아오면서 이렇게 간절한 느낌은 처음이다. 조금만 더 노력하면 진정으로 갖고 싶은 것이 무엇인지 알게 될 것만 같다. 이것은 원룸의 힘이다, 라고 생각한다. 원룸이 없었다면 루리도 없었을 것이고 그랬다면 루리와 함께 하고 싶은 마음도 들지 않았을 것이다.

수정씨가 가임 테스트 시트를 입에 물었다가 뺀 후 침에 젖은 부분을 스마트폰 카메라에 비춘다. 앱이 찰칵- 사진을 찍더니 분석을 시작한다. 문득 출산하면 소비장려금에 양육비 명목으로 50%가 가산된 금액이, 그것도 모자 양쪽에, 남편이 있으면 남편 몫까지 증액되어 교부된다는 사실이 떠오른다. 회사 사람 중 한 명이 아이를 낳은 달 소비장려금이 엄청나서 비싼 정장을 샀다고 자랑했었다. 마음이 초조해진다. 도넛을 다 고른 루리가 편의점에 들어와 이 꼴을 보면 뭐라고 할까? 하지만 어쩔 수 없다. 시트지의 결과에 따라 원하는 게 달라질까? 수정씨는 잘 모르겠다고 생각한다. 딩동-하며 어플리케이션이 결과를 보여준다. ‘가임확률 80%입니다.’란 메시지와 임신을 원할 경우, 원하지 않을 경우의 주의사항을 동시에 보여준다.

 

수정씨와 루리는 집에 들어와 도넛과 커피를 나눠 먹었다. 시계가 11시를 가리키고 있다. 루리가 이제 자야 하지 않냐고 묻는다. 수정씨는 고개를 젓는다. “괜찮아요.” 루리는 잠시 생각하다 사용하는 동영상 스트리밍서비스를 묻는다. 수정씨는 옛날 영화와 드라마 위주의 저렴한 서비스(수정씨가 외계인이 나오는 옛날 로맨스드라마를 보던 바로 그 서비스다.) 계정이 있다고 대답한다. 루리가 그걸로 같이 옛날 영화를 보자고 제안한다. 수정씨가 TV를 켜고 스트리밍 앱을 실행한다.

 

“넷플릭스 보고 갈래? 라는 말 알아요?”

“... 넷플릭스요?”

“옛날에 있던 동영상 서비스에요. 우리 엄마가 어렸을 때는 전 세계 사람들이 다 넷플릭스를 봤는데, 그 당시엔 넷플릭스 보고 가라는 말이 좀 다른 의미로 쓰였어요.”

“아, 그거 나도 봤어요! 옛날 캐나다 시트콤에 나와요. 섹스하자는 뜻…. 맞죠?”

“맞아요.”

“아는 게 참 많네요. 부러워요.”

“이번엔 수정씨도 알았잖아요.”

“아뇨, 난 모르는 게 너무 많아요. 루리씨가 알려줘요.”

“뭘 모르는데요?”

“..... 나한테 키스하고 싶어요?”

 

잠시 정적이 흐른다. TV에서 <스플라이스 (Splice)>라는 옛날 영화가 스트리밍되고 있다. 수정씨가 아무렇게나 눌러서 선택된 것이다. 루리가 묻는다. “키스해도 되요?” 수정씨는 생각한다. 자신이 원하는 게 무엇인지, 알고 싶은 것이 무엇인지를.

 

“나는... 난 수정씨 곁에 계속 있지 못해요. 그래도 괜찮아요?”

“난 평생 혼자였어요. 앞으로도 그럴 거라고 쭉 생각해 왔어요. 그런데 갑자기 루리씨가 나타나서 너무 행복해요. 난 잘 알아요. 내 미래가 지금 같을 수 없다는 거. 그치만 단 한 순간의 행복만 있어도 버틸 수 있어요. 반지하에 혼자 살 때도 초등학교 때 엄마아빠랑 식당에서 갈비 먹던 걸 떠올리면서 견뎠어요. 그 고기냄새, 나를 보는 엄마아빠의 표정... 그런 것들이 나를 버티게 해줬어요. 그런데 루리씨는.... 여태까지 내가 본 가장 잘생기고 재밌는 사람이에요. 날 무시하지 않고, 처음부터 지금까지 계속 즐겁게 해줘요. 나한테 이렇게 잘해주는데, 이런 순간들을 기억할 건데 내가 왜 미래를 두려워하겠어요? 당신이 사라져도 추억은 멀쩡해요. 나한테 있는 거니까. 내 거니까.”

 

수정씨는 자신이 무슨 말을 하는지 잘 모르겠다. 살면시 이렇게 자기 얘기를 많이 해본 게 처음인 것 같다. 뜨거운 것이 가슴에서 올라와 목구멍까지 차오른 것같다. 심장이 두근거리는 것과는 다른 종류의 흥분감이다. 수정씨를 보는 루리역시 그런 느낌을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것으로 보인다. 그가 수정씨의 눈을 보며 말한다.

 

“우리 추억을 만들어요. 당신의 추억을. 당신만의 아름다운 추억을.”

 

루리가 다가와 수정씨에게 입 맞춘다. 그의 뜨거운 입술이 느껴진다. 수정씨가 그를 껴안는다. 그 후로 벌어진 모든 일들은 운명이 예정해 두었던 것처럼 필연적이면서 극적이다. 두 남녀의 몸이 뜨겁게 밀착되었고,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서로를 흥분시키려고 애썼다. 그의 손길을 느끼며 그의 몸을 만지고, 그의 혀를 느끼고 그의 허리를 끌어안는다. 두 사람의 다리는 구분할 수 없게 얽히고 자연스럽게 하나가 된다. 루리의 것이 수정의 것이 되고, 그 반대가 되기도 한다. 서로에게 깊숙히 연결되면서 절정으로 달려간다. 그렇게 밤이 지나간다. 그들은 뜨겁게 사랑을 나눈다.

 

햇살이 쏟아지는 다음 날 아침, 수정씨가 먼저 눈을 뜬다. 옆에는 벌거벗은 루리가 잠들어 있다. 시계를 보니 아직 여유가 있다. 그대로 누워서 루리의 얼굴을 가만히 살펴본다. 그는 무척 어려서 십대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에게는 어떤 문제가 있는 걸까? 그 문제가 당분간 이 동거를 지속할 만큼 깊은 거라면 좋을텐데.... 루리가 눈을 뜬다. 수정씨를 발견한 그가 가볍게 미소짓는다. 그의 미소는 수정씨의 가슴을 저릿저릿하게 한다. 햇빛에 녹아서 사라질 간밤의 얕은 눈처럼.

 

“오늘 떠나야 해요.”

“..... 퇴근할 때까지 기다려줄래요?”

“미안해요.”

 

출근 버스 안에서 수정씨는 자기가 울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흐느낌도 없이 눈물만 주룩주룩 흘리고 있다. 이렇게 우는 건 처음이다. 슬프지만 예감한 것이라 이런 걸까?

공장 사무실에 들어가기 전에 편의점에 들려 임신테스트기를 산다. ㅁ과 ㄹ이 알면 호들갑을 떨테니 가방에 넣어서 조용히 집에 가져가서 사용할 생각이다. 괜찮을 것 같다. 루리 이펙트가 발동되어 그를 닮은 아이를 낳아 기른다면 행복할 것이다. 사랑하고 사랑받는 사람이 될상상을 하니 풍선처럼 마음이 부푼다.

 

루리는 아침에 얘기했던 대로 떠나고 없다. 방을 깨끗하게 청소해 놓았고 빌려입었던 수정씨 옷들을 세탁해 침대 위에 반듯하게 개켜놓았다. 어딘가에 그의 체취가 남아있다면 좋을텐데... 라고 수정씨는 생각한다. 사진을 찍어두지 않은 게 후회스럽다. 그와의 추억을 증빙할 것들이 거의 없다. 아무도 믿지 않겠지. 이 얘기를 하면 ㅁ과 ㄹ은 반신반의할 것이다.

다음 날 아침, 수정씨는 임신테스트기를 보는 자신의 얼굴에 환한 미소가 피어오름을 느낀다. 이렇게 자연스러운 기쁨이 샘솟을 거라곤 상상 못 했다. 수정씨는 임신했다. 이제 이 아이와 평생에 걸쳐 결코 잊지 못할 아름다운 추억을 만들 것이다. 미래에 대한 기대로 가슴이 벅차오른다.

 

수정씨의 배가 불러오자 사무실 사람들이 와서 축하해주었다. 특히 ㅁ과 ㄹ은 자기 일처럼 기뻐하며 온갖 잡다한 것들을 알아보고 챙겨주었다. 수정씨는 그들의 호의에 진심으로 고마워하며 차근차근 출산을 준비하고 있다. 지금 계획은 출산예정일 한 달 전부터 휴직해서 적어도 1년 정도는 육아에 전념할 생각이다.

ㄹ과 ㅊ씨가 수정씨와 ㅁ에게 근사한 저녁을 사겠다며 강남의 레스토랑으로 초대했다. 두 사람이 백일 된 기념으로 수정씨와 ㅁ과 함께 작은 파티를 하기로 한 것이다. 그들을 축하하기 위해 수정씨는 꽃을 사고 ㅁ은 선물을 준비하기로 한다. 수정씨는 지하철역 근처 꽃집에서 꽃다발을 사서 지하철 플랫폼으로 내려간다. ㅁ은 먼저 출발해 약속장소 근처의 백화점에서 선물을 고르고 있다. 그래서 수정씨 혼자 지하철을 탄다.

살짝 부른 배를 알아본 사람이 양보해준 덕에 수정씨가 자리에 앉는다. 퇴근 시간이라 열차 안에는 사람들이 많다. 그때 대각선 건너편에 앉은 사람의 신발이 눈에 띈다. 낯이 익다. 가슴이 두근거린다. 검색해서 확인했던…. 백화점 브랜드의 280짜리 그 신발이다. 엄마의 두근거림을 감지한 아이가 수정씨의 배를 발로 통통 찬다. 수정씨는 아주 잠깐 고민한다. 하지만 결론은 분명하다. 추억은 나의 것. 온전히 수정씨의 것이다. 일부러 아는 척할 필요는 없다. 은연중에 그럴 것을 서로 약속하지 않았던가?

하지만 그의 안부가 궁금하다. 수정씨가 그를 보기 위해 애쓴다. 그러나 역에 정차할 때마다 많은 사람이 들어와서 수정씨의 시야를 가린다. 자리에서 일어나 그의 앞으로 가볼까 하는 생각을 진지하게 하는데 사람들 사이로 틈이 생긴다. 신발 주인의 얼굴을 간신히 확인할 수 있을 정도의 작은 틈이다. 그 틈으로 보이는 것은 잘생긴 남자의 얼굴이다. 분명 루리다. 그런데 동시에 그것은 루리가 아니다. 수정씨는 목덜미가 서늘해짐을 느낀다. 어째서 그는 그가 아닌 걸까? 똑같은 얼굴인데 왜 다른 사람이지? 혹시 내가 착각하고 있나? 여러 생각이 수정씨의 머릿속을 어지럽히던 그 순간 틈 너머의 남자와 시선이 마주친다. 루리의 얼굴을 한 남자는 수정씨를 무심히 보다 고개를 돌린다. 절대로 아는 사람을 본 표정이 아니다. 만약 아는데 모르는 척 한 거라면 그는 훌륭한 배우일 것이다. 어쩜 그럴지도 모르겠다. 그가 무슨 일을 하는지, 어떤 공부를 하는지 알려준 적이 없으니까…….

수정씨는 금세 마음을 추스른다. 마음에 드는 게 없던 그녀가 가진 자질 중에 그나마 괜찮은 걸 꼽아본다면 그것은 둔감함이다. 안 좋은 일들, 불편한 것들을 모르고 지나치거나 빨리 잊어버리는 자신의 그런 면이 그나마 다행이라고 여겼다. 지금 중요한 것은 배 속에서 자라고 있는 아이다. 수정씨에게 그 이상 소중한 것은 없다. 아이를 위해서라면 루리와 똑같은 얼굴의 남자는 얼마든지 잊을 수 있다. 아니, 설령 루리가 맞다 해도 잊을 수 있다. 온 세상이 외계인에 미쳐서 날뛰고 있는 상황에서도 지루한 덧셈뻴셈을 담담히 해내는 계산사 수정씨가 이런 일 정도로 흔들릴 리 없다.

아이는 운이 좋다. 미래에 찾아 올지도 모를 고통스러운 시련도 극복할 수 있을 것이다. 사랑받은 아이는 자기가 받은 사랑만큼의 시련을 견녀낼 수 있기 때문이다.

 

 

- 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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